게오르크 칸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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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칸토어의 일대기 번역문
[편집] 한국어 번역문
그의 아버지(Georg Waldemar Cantor)는 상테르부르크에서 도매상을 하던 아주 성공적인 상인이었으며, 나중에는 주식거래장의 브로커로 지냈습니다. 그는 덴마크 출신이며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칸토르의 어머니(Maria Anna Böhm)는 러시아인이었으며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칸토르는 이런 부모의 영향을 받아 상당한 수준의 음악적 미술적 재능이 있었으며,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개신교인이었으며, 어머니는 카톨릭 신자였습니다.
칸토르는 어릴 적에는 가정교사를 통해 공부했고, 상테르부르크의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11세(1856년)가 되던해, 가족과 함께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독일로 이주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안 좋은 건강 때문에 러시아의 매우 추운 겨울보다 좀 더 따뜻한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렇게 잘 적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칸토르의 전기 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비록 그는 그 이후의 일생을 전부 독일에서 보냈고, 분명히 러시아어를 알고 있으면서도, 러시아어는 전혀 쓰지 않았고 생활했지만, 러시아에서의 어린시절에 대한 향수로 인해 독일에서의 생활에 익숙해 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처음엔 Wiesbaden에서 살았고, 칸토르는 Gymnasium 을 거기서 다녔습니다. 그 후 그들은 프랑크푸르트로 이사갔으며, 칸토르는 Realschule in Darmstadt에서 공부하였지만 그리 잘 적응하지는 못했습니다. 칸토르는 거기서 삼각함수에 대한 걸출한 졸업원고를 제출하며 1960년에 졸업하였으며 Höhere Gewerbeschule in Darmstadt를 거쳐 1862년에 Polytechnic of Zurich 에 입학하였습니다. 칸토르의 아버지가 아들이 Höhere Gewerbeschule in Darmstadt에 가도록 한 이유는 그가 뛰어난 엔지니어가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862년 칸토르는 아버지에게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게 되며 결국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듬해 아버지가 죽게 되자, 취리히에서의 학업은 중단되고, 베를린대학으로 새로운 학업을 시작하게 되며 거기서 Hermann Schwarz 를 친구로 만나게 됩니다. 칸토르는 거기서 바이어슈트라스, 쿠머, 크로네커의 강의를 접하게 되었고, 1866년에 괴팅겐대학에서 여름학기를 마치고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1867년에 정수론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 “De aequationibus secundi gradus indeterminatis" 를 완성합니다.
베를린에서 있던 1864-5년에 칸토르는 수학학회의 회장으로 있었으며, 와인하우스에서 매주 만나는 젊은 수학자들의 일원으로 지내기도 했습니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는 베를린의 한 여학교에서 잠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이듬해 수학교사를 위한 Schellbach Seminar 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 기간동안 그는 교수직도 알아보았는데, 할레에서 같은 논문으로 교수직을 취득하게되었습니다.
Halle에서 칸토르는 자신의 연구 방향을 정수론에서 해석학쪽으로 바꾸었습니다. 이건 그의 선배 교수였던 Heine 때문이었는데, 그는 칸토르에게 the uniqueness of representation of a function as a trigonometric series에 관한 문제에 도전해 보도록 동기를 주었습니다. 이것은 Heine , 디리클레, 립쉬츠, 리만 등이 도전해서 풀지 못한 어려운 문제였는데, 칸토르는 이 문제를 1870년 4월에 해결하게 됩니다. 또한 바이어슈트라스의 영향을 받은 삼각급수에 관한 여러 논문들을 1872년까지 출간합니다.
칸토르는 1872년에 이 대학의 외래교수로 초빙받게 되고, 스위스에서의 휴가기간에 만난 데데킨트와의 교류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 시기 즈음 무리수를 유리수열의 수렴으로 정의한 논문을 발표하고, 이 논문은 데데킨트가 같은 해 발표한 실수의 정의에 관한 논문에서 "데데킨트 절단" 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1873년엔 칸토르는 유리수가 자연수와 일대일 대응임을 증명하였습니다. 동시에, 대수적 수(정수 계수 방정식의 근이 될 수 있는 수)도 그렇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수도 그런지에 대해서는 당장은 증명하지 못했고 그 해 겨울에 가서야 그것에 대하여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결과는 이듬해 출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논문에서 최초로 일대일 대응이라는 개념이 묵시적이지만 소개되었습니다.
초월수라는 것은 정수계수방정식의 근이 될 수 없는 무리수입니다. 리우빌은 1851년에 그런 수의 존재에 대해 증명하였습니다. 20년이 지난 1874년에야 칸토르가 실수의 개수가 비가산이고, 대수적 수가 가산임을 통해, 사실상 거의 모든수가 초월수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앞서서 칸토르는 그가 데데킨트와 주고 받았던 편지들도 출간하였는데, 거기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의문이 제시되어있습니다.
정사각형위의 모든 점은 선분 위의 모든 점과 일대일 대응될 수 있을까? 증명하기도 어려울 것 같고, 결론적으로 이 생각이 틀린 것 같기도 하지만, 내 생각엔 이 문제에 대한 답이 쉽지 않을 것같다.
1874년은 칸토르 개인의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는 그의 여동생의 친구인 Vally Guttmann 과 그해 봄에 약혼하였고, 8월 9일에 결혼하였으며, 데데킨트와 많은 수학적인 의견을 교환한 스위스의 인터랑켄으로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칸토르는 데데킨트와 계속 서신을 교환했으며, 그의 아이디어를 나누고, 그의 의견을 구하였습니다. 1877년에는 [0,1]위의 점과 p차원공간위의 점들이 1-1 대응을 이룸을 결국 증명하였습니다. 칸토르는 자신의 연구 결과에 놀라며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I see it, but I don't believe it!
물론 이 발견은 공간의 차원에 대한 생각과 기하학적인 측면과의 관련성이 깊었습니다. 1877년 Crelle's Journal 에 칸토르가 제출한 차원에 관한 이 논문은 Kronecker에 의해 의심스럽다는 평을 얻었고, 데데킨트에 의해 보정된 후에 출판되었습니다. 칸토르는 크로네커의 반대에 크게 상심하였고, 그 후로 다시는 이 저널에 투고하지 않았습니다.
1878년에 Crelle's Journal 에 실린 차원에 관한 논문은 1-1 대응의 개념을 좀더 정확하게 다듬어 소개하였습니다. 이 논문은 자연수와 1-1대응이 성립하는 집합(가부번집합)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1-1 대응이 성립하는 집합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칸토르는 또한 차원의 개념에 대해 논하고 있으며, [0,1]구간과 단위정사각형사이의 대응은 연속함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879년과 1884년 사이엔 칸토르는 Mathematische Annalen 에 6편의 논문을 시리즈로 투고하였는데, 이것은 집합론에 대한 기초적인 소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쿨라인이 편집위원으로서 이 내용들이 실리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동안 칸토르는 몇 가지 어려운 문제들로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Heine의 추천을 받아 1879년에 정교수직을 제의 받았지만, 그는 좀 더 유명한 대학의 자리를 원하고 있었고, 1880년 경에는 칸토르의 연구방향에 더 이상 동의 할 수 없었던 슈바르츠와의 관계가 정리되었습니다. 이듬해 10월엔 할레대학의 교수인 Heine가 죽고, 그 빈자리를 채울 교수가 필요하게 되었다.
칸토르는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세명의 명단을 뽑아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으며 데데킨트가 맨 위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하인리히 베버와 메르텐이 뒤를 이었습니다. 그러나 1882년초에 데데킨트가 이 제의를 거절하였고, 칸토르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명도 이를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새로운 명단을 제출하여 Wangerin이 승인을 받았으나 그는 칸토르와 친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칸토르와 데데킨트의 친밀함도 그 날로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 무렵 칸토르는 미타그-레플러와 새로운 관계를 발전시키고 있었는데, 얼마지나지 않아 칸토르는 그의 저널인 Acta Mathematica 에 자신의 논문을 발표하지만, Mathematische Annalen에도 그의 시리즈를 계속 투고 하였습니다. 이 시리즈의 5번째인 Grundlagen einer allgemeinen Mannigfaltigkeitslehre 는 아예 분리된 논문으로 출간되었는데, 이 논문은 몇 가지 이유로 인해 특별히 중요한 논문입니다. 우선 칸토르는 이 때쯤 자신의 집합론이 그가 원했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Grundlagen은 그러한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Grundlagen의 가장 중요한 성취는 초월수를 자연수의 확장을 이용해 체계적이고 자동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는 것이다.
칸토르 자신은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한 반대가 매우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나는 이런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요즘들어 널리 제기되고 있는 무한에 대한 개념과 수의 성질에 자주 의존하고 있는 의견에 대해 반대의 입장에 선다....
1884년 5월말 경. 칸토르는 기록상으론 최초인 우울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몇 주 후에 좋아지긴 했지만, 자신감이 많이 사라졌으며, 6월 말 경에는 미타그-레플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난 정말 원래 하던 연구를 다시 시작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못하겠고, 정말 해야만 하는 것(대학강의)만 하고 지내고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회복되어 연구를 액티브하게 다시 시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때는 그의 우울증은 수학적인 고민이나 인간관계의 어려움(특히 크로네커와)들과 관계 있다고 여겨졌으나, 정신의학이 더욱 발달된 최근엔 오히려 그 반대로 우울증이 그런 것들을 유발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884년의 이러한 아픔이후엔
...Harz mountains 에서의 휴가를 보낸 후에 칸토르는 크로네커의 관계 회복을 시도한다. 크로네커는 그 시도를 받아들였지만, 둘 사이의 앙금이나 수학적인 견해의 차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수학적인 고민들은 이때쯤부터 칸토르를 괴롭혔습니다. 특히 그는 실수의 개수는 자연수 전체의 개수 바로 다음의 수라는 연속체가설(continuum hypothesis)의 증명이 잘 되지 않아 많이 힘들어 했습니다. 어떤 날은 그것이 틀리다고 증명했으나 곧 실수를 발견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그것이 참이라고 증명을 했으나, 즉각 오류를 발견하기도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 가설에 대한 증명을 Mittag-Leffler의 저널인 Acta Mathematica 실어야 할 시점에서 미타그-레플러는 그 증명은 100년 후에나 가능할 것이라 이야기 하며 그의 논문을 반려했습니다. 칸토르는 다음과 같이 조크로 답하기는 했지만, 분명 그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미타그-레플러의 말대로 라면 나는 1984년 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건 나에게 매우 힘든일인것 같다. ... 그러나 나는 다시는 Acta Mathematica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
미타그-레플러는 물론 칸토르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으나, 반면 이 사실은 칸토르의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둘 사이의 관계는 이 일로 인해서 잠깐 끊어졌고, 12년 동안 칸토르가 줄기차게 발전시켜온 집합론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886년엔 칸토르는 헨델의 이름을 거리에 붙인 Händelstrasse에 근사한 집을 마련하였습니다. 이 해가 가기전에 그의 마지막 아들이 태어났으며, 그의 가족은 6명의 자녀를 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수학에서 잠시 손을 떼고, 자신의 수학적인 결과물의 철학적인 측면을 두고 철학자들과 주로 논쟁하는 일이나, Clebsch's death 이후에 Deutsche Mathematiker-Vereinigung 를 설립하는 일에 매진하였습니다. 1891년 9월 그는 the Association in Halle 의 의장이 되었고, 여전히 반목관계에 있었던 크로네커에게 그 모임의 첫 연설을 맡깁니다.
크로네커는 결국 그 곳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건 그의 아내가 산을 오르던중 떨어져 크게 다치고,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칸토르는 the Deutsche Mathematiker-Vereinigung 의 첫모임에서 의장으로 선출되고, 1893년까지 이 자리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는 1893년의 모임을 준비하였으나, 병으로 그 모임에 참석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칸토르는 1894년 다소 이상한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그건은 1000까지의 모든 짝수는 두 개의 소수의 합으로 구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골드바흐의 추측의 예들로서, 이미 40년 전에 10000 까지 구하는 방법이 알려져 있던 터라 이 논문은 골드바흐의 추측보다는 칸토르의 정신상태에 대해 더 잘 알려주는 논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쓴 집합론에 관한 논문중 중요한 것으로서 마지막에 나타난 것은 1895년과 1897년 에 각각 발표된 것으로서 클라인이 편집장으로 기획한 Mathematische Annalen에 저술된 것들이었습니다. 이 논문들은 무한의 연산에 관한 좋은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두 논문 사이에 다소 긴 갭은 연속체 가설의 증명때문 이었는데, 사실 첫 번째 논문 후 6개월만에 두 번째 논문을 완성하였으나, 칸토르가 연속체 가설의 증명을 두 번째 논문에 담기 원했던 까닭에 기간이 많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 대신 well-ordered sets and ordinal numbers 에 대한 내용을 담는데 칸토르는 만족해야 했습니다.
1897년 칸토르는 처음으로 취리히에서 열린 세계 수학자 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f Mathematicians)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Hurwitz 는 칸토르에 대한 큰 존경을 표현했으며, 그를 함수론을 풍성하게 만든 업적을 지닌 이로 소개했습니다. Jacques Hadamard는 집합론은 잘 알려져있으며 없어서는 안될 수학적 도구라고 표현했습니다.
거기서 칸토르는 데데킨트를 만났고 둘의 우정은 새롭게 되었슴니다. 그러나 대회가 끝날 무렵 칸토르는 집합론의 첫 번째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1895년과 1897년에 발표한 논문을 조사하다가 그 패러독스를 발견하게 되었으며, 1896년에 힐베르트에게 그것에 대해 설명하게 됩니다. 부랄리-포르티가 그 패러독스를 독립적으로 발견하고 1897년에 그것을 발표하였습니다. 칸토르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 데데킨트와 논의하게 되었으나, 1899년에 다시 정신적인 발작이 일어나 논의를 중단하게 됩니다.
칸토르가 우울증 증세로 고생할 때면 언제든지, 그는 수학을 떠나 철학과 그의 가장 큰 문학적 관심사(프랜시스 베이컨이 셰익스피어다!)로 관심을 전환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1884년에는 수학강의대신 철학강의를 하게 해달라고 청원한 적이 있었으며, 베이컨이 셰익스피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엘리자베스 시대의 문학연구에 깊이 빠져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1896년과 1897년에는 문학적인 의문에 대한 팜플렛을 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칸토르에게 1896년 10월의 어머니의 죽음과 1899년 1월에 있었던 동생의 죽음은 큰 아픔을 더해 주었습니다.
1899년 10월, 칸토르는 1899-1900년의 겨울학기 강의를 잠시 중단하였습니다. 그리고 1899년 12월 16일 그의 막내 아들이 죽었습니다. 이때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그는 자신의 우울증과 싸웠습니다. 그는 계속 가르쳤지만, 1902-3, 1904-5, 1907-8 사이의 겨울학기에는 강의를 하지 못했습니다. 증세가 아주 심했던 1899년에는 요양원에서도 시간을 보냈으습니다. 그는 계속 베이컨-세익스피어 이론에 관해 공부하고 출판했지만, 수학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03년 9월의 Deutsche Mathematiker-Vereinigung 에서 집합론의 패러독스에 대해 강의 했으며 1904년 8월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세계 수학자대회에도 참석하였습니다.
1905년엔 칸토르는 퇴원후 종교적인 글을 썼습니다. 조르당과 계속하여 집합론의 역사와 그의 종교적인 소논문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였고, 1909년에는 상황이 많이 호전되어 1910,1911년에는 대학에서의 업무도 잘 수행하였습니다. 칸토르는 그 해에 성 앤드류 대학으로부터 그 대학 500주년을 기념해 뛰어난 외국인 석학을 모시는 자리에 초대되어 매우 기뻐하기도 했습니다. 1911년 9월 12-15일 사이에 모임이 열렸는데
그 기간동안 그는 베이컨-세익스피어 설에 대해 지나치게 길게 이야기 하는 등 누가봐도 명백히 문제가 있는 행동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 후 그는 런던으로 며칠간 내려갔습니다.
그는 방문기간 동안 Principia Mathematica을 출판한 러셀을 만나고 싶어했는데, 자신과 아들의 병으로 인해 아쉽게도 독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듬해 그 대학으로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으나, 가지 못했습니다.
칸토르는 1913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여생을 병으로 고생하며 적은 음식으로 연명했습니다. 이는 독일의 전쟁상황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전쟁 때문에 할레 대학의 칸토르 70세 생일 축하 이벤트도 무산되었습니다. 1917년 그는 마지막으로 요양소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죽는 날까지 아내에게 여기서 나갈수 있게 해달라고 편지를 보내곤 했습니다. 그는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힐베르트는 칸토르의 업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습니다.
수학적 지성의 최고봉이며, 인간 지성의 최고봉을 이뤘다.
참고: Cantor dust, 칸토어 집합(Cantor set)
[편집] 원문
- (영어) 칸토어 일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