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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그리스도교의 박해와 수난〔개설〕[편집]

韓國 Christ 敎 迫害-受難〔槪說〕

조선 인조(仁祖)

때에 한국에 들어온 가톨릭은 최초의 유학자(儒學者)들 사이에서 하나의 서양 학문으로 연구되어 오다가 교세가 커지기 시작하여 정조(正祖) 때에는 경기·황해·강원 일대에 교세가 만연하게 되었다. 가톨릭은 종래의 유교사상이나 습속과는 배치되었으므로 조가(朝家)에서는 이를 사학(邪學)이라 하여 금압해 오다가 정조 때부터 순조·현종을 거쳐 대원군이 하야하기까지 수차에 걸친 교화(敎禍)로 교도가 피해를 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와 큰 희생하에서도 교세는 여전히 성장하여 철종 때에는 약 16만을 헤아리는 신도가 있었으며, 순교자들이 흘린 피 위에 한국 가톨릭교는 오히려 교회의 굳건한 터전을 갖추게 되었다.

가톨릭교는 우상에 대한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였고, 특히 유교 의식의 하나인 제사에 대하여는 완전히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으므로 유교로 훈련된 당시의 사회에서는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약용(丁若鏞)·이승훈(李承薰)·권일신(權日身) 등 양반석학들이 가톨릭교를 신봉하게 되어 사상계의 혁신을 기도했으나 비타협적 유학자들의 저항에 부닥쳤다. 특히 정조 9년(1785)에 예조판서 김화진은 유력한 신도인 김범우(金範禹)를 잡아다가 고문을 가하여 배교(背敎)를 강요하였는데, 김범우는 악형을 받으면서도 배교를 거부하다가 충청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형독으로 죽었다. 이리하여 그는 한국 가톨릭교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김범우에게서 전도를 받고 정약전에게 세례를 받았던 진산(珍山)의 윤지충(尹持忠)은 모친 권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신주를 모시거나 제상을 차리지를 않고, 또 문상왔던 외종형

권상연(權尙然)도 가톨릭 선자였기 때문에 이모의 영전에 절하지 않은 것이 화근(禍根)이 되어 체포되었다.

두 사람은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배교를 거부하다가 서인(西人)들이 위협적 처형방법을 요구하였으므로 국왕이 윤허를 내려 정조 15년(1791)에 작두로 처형되었다. 이를 신해사옥(辛亥邪獄)이라고 칭한다.

그후 신도 원시장은 관헌의 박해하에서도 전교에 힘쓰다가 정조 17년에 체포되어 등뼈가 부러지는 정도의 심한 고문을 받다가 동사형(凍死刑)을 당해 순교하였다.

당시 가톨릭 신자들 중에는 남인(南人)이 많았기 때문에 서인들은 남인 탄압을 위하여 가톨릭의 박해(迫害)를 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조때에는 별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순조가 즉위하자 남인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였는데, 남인에 대한 박해는 가톨릭 박해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특히 순조 즉위 후 대왕대비 김씨가 후견하게 되었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불행에 동정하는 시파(時派)에 가톨릭 교도가 많았으므로 이를 억압하기 위하여 대비의 세력을 배경으로 한 벽파(僻派)들이 가톨릭 탄압을 강화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승훈·권철신(權哲身)·이가환(李家煥)·정약종(丁若鍾)을 비롯하여 홍낙민(洪樂敏)·최필공(崔必恭)·최창현(崔昌顯)·이단원·강완숙 등은 옥사 내지 참수형을 당했으며, 일대의 석학 정약용(丁若鏞)·이지훈·정약전(丁若銓) 등을 유배형을 당함으로써 남인의 중진들은 모두 거세되었다. 이를 신유교난(辛酉敎難)이라 하는데, 남인 신도 황사영(黃嗣永)은 이 사건의 경과를 베이징(北京)에 있는 서양인 주교(主敎)에게 보고하는 백서(帛書)를 보내다가 발각되어 처단되고 말았다.

정조 17년(1793) 관헌의 눈을 피하여 한복을 입고 입국한 청(淸)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는 7년간 비밀리에 전도 활동을 펴서 많은 신자를 얻게 되었는데, 한영익(韓永益)이라는 신자가 배신하여 관헌에 밀고하자 체포령이 내려 피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자기가 주문모라고 위증하면서 수사를 방해하던 최인길(崔仁吉)과 윤유일은 붙잡혀 사형을 당했다. 그후 주문모는 1801년 3월 27일 자수하였고 노량진 연무장에서 죽음을 당했다. 그를 참수한 뒤 목을 5일간이나 거리에 매달았다가 시체와 더불어 암장했으므로 유물이라고는 없었다. 한편 그의 형살(刑殺)과 함께 측근으로 있던 신도들도 죽임을 당하였는데, 그 중에는 왕가의 부녀자도 있어 그들은 주문모와 도색(挑色) 회합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다.

신유사옥 이래 한동안 가톨릭의 박해가 늦추어지자 경상도·강원도 일대에서 교세가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순조 15년(1815)에 전지수라는 배교자의 밀고로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있던 현장에서 교도 전원이 체포되었는데, 이 사건은 충청도와 강원도까지 파급되어 이때에 투옥된 신도 총수가 3백 명에 달하였고, 이들은 고문으로 옥사 또는 형살되었다. 이를 을해교화(乙亥敎禍)라 칭한다. 순조 27년에는 전라도 곡성의 한 옹기공장에서 가톨릭 신도인 옹기공들의 사소한 다툼으로 인하여 관헌에 고발당한 신도들이 있었다. 이들은 전라도 관찰사에 의하여 감옥에 갇혀 배교를 권유받았으나 거부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극형은 받지 않았으며 순교자는 십수명에 불과했다. 이것이 정해교화(丁亥敎禍)이다.

1831년에 정하상(丁夏祥) 등의 요청으로 조선교구(敎區)가 독립하고 외국인 신부도 몰래 입국하게 되었다. 이들 중에는 앙베르(Imbert) 주교와 샤스탕(Chastan)·모방(Maubant) 등 프랑스 신부가 들어왔는데, 1839년에 사학(邪學) 퇴치령이 내려 심한 고문을 받은 후 참수되었다.

이 금교령으로 이광연·홍영주·조신철·김제준·최영환·정하상·최한지·유진길(劉進吉) 등 130여 명이 순교하였다. 이를 기해교난(己亥敎難)이라 한다. 이는 가톨릭의 교세가 집권층인 보수진영에 대립되어 진보적 대중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있는 데 대한 탄압이었다.

한편 청나라 광둥(廣東)에 건너가 신학을 공부한 김대건(金大建)은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신부가 되어 입국하여 전도하던 중 1846년에 잡혀 순교하였다.

철종 때에는 가톨릭 신자가 급증하였다. 이것은 서양 세력의 확대와 청조의 약화를 틈타 화를 면하고자 신도가 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대원군은 정치적 타산에서 천주교의 포교를 공인할 방침이었다가 상황이 뒤바뀌자 청의 분노를 살 것이 두려워 천주교도 대학살로 방향을 바꾸었다. 고종 3년(1866) 금고령을 내려 외국 선교사와 남종삼 등을 체포하고 서울에서 1,000명, 전국적으로는 8,000명에 달하는 신도를 학살했다.

<金 寬 植>

프로테스탄트[편집]

Protestant

프로테스탄트가 한국에 전파되기도 전에 최초로 순교한 신교(新敎) 순교자는 토머스(Robert J.Thomas) 목사였다. '병인양요(丙寅洋擾)'라는 난리를 겪던 1866년에 토머스 목사는 이 땅을 찾아왔다. 그는 1840년 9월 7일 웨일스에서 태어나 에든버러에 있는 뉴칼리지에서 공부하였다. 그리고, 1863년 6월 4일 스코틀랜드의 애버가베니에 있는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런던 선교회 소속으로 중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해 7월에 부인과 함께 스코틀랜드를 떠나 임지인 상하이(上海)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갑자기 부인을 잃고 일자리를 베이징(北京)으로 옮기게 되었다. 1865년 가을 그는 체푸에서 기이한 인연으로 한국을 방문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대원군의 그리스도교 박해를 피하여 리델(F.C.Ridel) 신부와 함께 피난온 두 명의 한국인 가톨릭 신자를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체푸 주재원이었던 윌리엄슨 집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토머스 목사는 이 피난민들에게 자기를 한국으로 인도해 달라고 청하였고 그들은 응낙하였다. 1865년 9월 4일에 그들은 체푸를 떠나 황해도 소래(松川) 맞은편에 있는 백령도에 기항했다. 거기서 두 달을 지나는 동안에 토머스 목사는 한국말을 배우고 주민들과 서로 사귀며 또 싣고 온 한문 성경과 종교서적을 나누어 주어 읽게 했다. 그해 12월에 그곳을 떠나 만주 해안에 상륙하여 뉴좡·산해관(山海關)을 지나서 1866년 정월 베이징에 도착했다.

처음 전도여행에 성공한 토머스 목사는 두 번째 한국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마침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장사차 한국에 오게 되었으므로 그 배를 타고 다시 왔다.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서 평양 가까이 오게 된 것은 1866년 8월 초순경이었다. 평양으로 오는 도중 토머스 목사는 강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누어 주었다.

배가 평양 근처 쑥섬 앞에 닻을 내리고 있는 동안 토머스 목사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차이를 설명하였으나, 평양의 관리들은 종교의 전파나 통상의 개방이 금지되고 있다면서 곧 물러가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셔먼호의 선장은 이를 거절하고 소청선을 풀어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수심을 측량하면서 한사정(閑似亭) 부근에 정박하고 이를 말리던 중군(中軍) 이현익(李玄益)을 오히려 감금하였다. 이를 목격한 군중들이 격분하여 강변에 몰려오자 총을 마구 난사하여 20여 명의 생명을 앗았다. 그러던 중 대동강의 수위가 갑자기 줄어들어 셔먼호는 양각도(羊角島) 서쪽에 좌초되었다. 극도로 격분한 군중들은 소나무를 잔뜩 실은 목선에 불을 질러 내려보내기 시작하였다. 곤경에 빠진 것을 알게 된 선원들은 화해를 제안했으나 이미 너무 늦었다. 겹겹이 불길에 싸인 배는 타버리고 선원들은 물 속에 뛰어들었으나 익사하고

말았다. 강변에 기어오른 토머스 목사는 형을 당할 때까지 군인에게 성경을 주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그가 순교한 날은 1866년 9월 3일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한국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한편 1888년 4월 28일 조정의 독판(督辦) 교섭 통상사무 조병식으로부터 미국·러시아·이탈리아 3국 공사에게 그리스도교 선교를 금지하라는 조회문이 전달되었다.

미국 공사는 평양에 여행중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긴급 소환하였고, 의사 알렌이 표면에 나서서 한불(韓佛) 수호 통상조약에 있는 교회(敎會)라는 말이 바로 포교를 의미하는 것이라 주장하여 마침내 정부는 그리스도교의 포교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1892년 한국 최초의 전도사 백홍준은 기독교가 국금(國禁)이었을 때에 비밀히 외국에 가서 성서를 번역하여 가지고 돌아와 정부의 눈을 속이고 전도했다는 죄목으로 평양 감독에 검속되어 취조를 받다가, 만주에서 성서를 번역하였다는 이유로 봉천으로 압송되어 2년간의 옥고를 겪은 뒤, 1894년 겨울에 옥중에서 순교하여 최초의 한국인 프로테스탄트 순교자가 되었다.

1907년 독로회(獨老會)가 설립되어 한국 교회의 독자적인 발전이 기약되는, 한국 그리스도교 사상 가장 희망적인 해인 동시에 통감정치가 시작되어 일본침략의 마수가 최종 단계에 이른 한국 역사의 가장 비극적인 해이기도 하였다.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옆에 반드시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통한 구국운동을 크게 일으켰다. 교회의 교육운동에 다른 뜻이 있음을 알아차린 일본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회 지도자들을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해서 교육총회 사건'과 '105인 사건'을 일으켰다. 이 두 사건에 관련되어 검속·투옥된 인사는 무려 700여 명이었는데 한국 그리스도교계의 중요 인물을 총망라하였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일본인들에게 당한 최초의 박해였다. 1908년 황해도에 김구·최광옥·도인권 등 한국 그리스도계의 쟁쟁한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해서 교육총회'가 조직되었다. 이 회는 한편으로는 학교의 교육시설을 확충하며, 한편으로는 강습소를 열어 계몽운동에 힘썼다. 1910년 12월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종제 안명근(安明根)의 독립운동자금모금사건이 탄로나자 경무총감부는 동회(同會)를 고의로 안명근 사건에 결부시켜 김구를 위시하여 회원 전원을 검거·투옥시켰다. 이것이 '해서 교육총회 사건'이다.

한편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에 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승훈(李承薰)·양전백 등 교회 지도자들은 전국 기독교 지식층을 총망라하여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1910년 12월 27일 신민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 지도자들이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북행하는 데라우치(寺內) 총독을 선천(宣川)역에서 맥쿤(G. McCune) 선교사가 제공한 권총으로 저격 살해할 음모를 꾸민 것이 사전에 발각되었다는 조작된 허위 사건을 꾸며 1911년 10월에 관서지방 교회 지도자 약 500명을 검거·투옥하였다. 이것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이라고도 하며, 기소된 사람이 105인이었기 때문에 '105인 사건'이라고도 한다.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삼일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의 종교적 분포를 보면 그리스도교인 16인, 천도교인 15인, 불교인 2인으로 되어 있다.

서울을 비롯하여 각 지방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난 곳이 모두 교회가 왕성한 곳이었고 대부분 교회가 중심이 되어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이것은 그리스도교회가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일제(日帝)는 한국 교회를 법적으로 탄압하기 위하여 1920년 4월 7일 조선총독부령 제59호로 제정, 포교규칙을 발령·실시하였는데, 제2조에는 \"포교자는 자격을 증명한 문서 및 이력서를 첨부하여 조선총독에게 제출할 것\"과 동 9조에 \"교회당 및 설교 강의소를 설립코자 할 때에는 규정된 서류를 갖추어 조선 총독에게 제출할 것\", 동 12조에는 \"조선 총독은 교회당에서 안녕질서를 문란시킬 우려가 있는 일이 있다고 인정될 때에는 그 사용의 정지 또는 금지를 명할 수 있다\"라고 하여 한국 교회의 사업과 활동을 그들의 마음대로 규제할 수 있게 만들고 노골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1938년 2월까지에 북장로선교회 경영의 8개 중등학교 및 남장로선교회 소속 10개 학교를 신사(神社) 불참배의 이유로 폐교시킨 총독부는, 여세를 몰아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할 계획을 세우고, 회유와 강압의 악랄한 수단을 써서 1938년 9월의 장로회 총회를 최후로 전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써 한국 교회로 하여금 다시 어려운 수난의 길을 걷게 하였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전국적으로 검거·투옥되었고, 선교사들은 국외로 추방되었으며, 교회의 종(鍾)은 강제 공출되어 군기(軍器) 제조에 사용되었다. 1942년 3월에는 강제로 일본 기독교 조선 혁신교단을 조직케 하고, 민족사상과 내세사상이 강하게 표현된 <모세5경>과 <요한계시록>은 성서에서 삭제시켰으며, 찬송가 중에서도 그러한 이유로 여러 장을 삭제 또는 개편시켰다. 주일학교는 일요 수련회로, 수양회와 부흥회는 연성회로 개칭시켜 교회 집회를 전시체제화(戰時體制化)하였고, 1943년 9월부터는 주일 오후 및 야간집회와 수요일 밤 기도회 등을 일체 금지했다. 예배당 안에서는 일본어 강습·근로작업 등을 강행시켰다. 그리고 도시의 교회들은 무조건 폐합시켜 단일교회로 만들고 남은 예배당은 군용공장으로 징발·사용하였다. 이러한 당국의 강제명령을 내려 실제 활동을 억제하였다.

1942년 미나미(南次郞) 총독은 한국 기독교 여러 교파의 합동을 적극 추진하여 우선 각 교파가 모두 고유의 명칭을 버리고 일본 기독교단을 모방하여 '교단'이라는 명칭을 붙이게 하였다. 1943년에 각 교파별로 선임된 합동 준비위원들로 조직된 교파합동위원회가 일본 기독교단의 규칙을 모방한 교회 규칙을 만들어 1945년 8월 1일에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모든 교파를 합동하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을 창설하여 한국 교회를 완전히 일본 기독교단에 예속시키는 비극을 만들어 놓았다.

<尹 炳 相>

가톨릭[편집]

신해교난[편집]

辛亥敎難(1791)

새로 들어온 가톨릭 사상이 여태까지 조선을 지배해 오던 유교도덕(儒敎道德)과 서로 맞서서 싸움을 일으키게 되었으니 그것이 이른바 조상제사 문제였다. 1791년(正祖 15년)에 전라도 진안군에 살던 윤지충(尹持忠:바오로)이 어머니 장사때에 위패(位牌)도 만들지 않고 제사도 드리지 않았으며, 그의 외종형(外從兄) 되는 권상연(權尙然:야고보)도 같은 태도를 취하자, 이에 오래전부터 반감을 품었던 홍낙안(洪樂安)은 긴 고발문을 대신 채제공(蔡濟恭)에게 올려 1791년 11월 13일 오후 3시 우리나라 교회사상 최초의 순교자를 내었다. 이때 윤 바오로의 나이는 33세요, 권 야고보의 나이는 41세였다. 반대파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왕을 움직여 철저히 가톨릭 탄압을 시작하였으니, 권일신(權日身)·이단원·원시장(元始長) 등이 순교당했고 중인계급들도 모두 잡혀 고문을 받았던 것이다.

벽파 홍낙안 일파는 왕의 신임을 받고 있던 시파 채제공을 시기하던 차제인데 돈독한 가톨릭교인들은 모두 채제공 일파였다. 따라서 정조 15년에 일어난 이 신해교난은 겉으로는 서학(西學)배척운동에서 일어난 것 같으나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원인을 살펴보면, 역시 조선 500년 중에서 300년간의 역사를 피로 물들게 하던 당파싸움의 연장이었다.

신유교난[편집]

辛酉敎難(1801)

1799년 교회를 동정하던 시파(時派) 채제공과,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가 11세로 왕위에 오르자, 조모 김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정사를 간섭케 되었다. 김대왕대비는 친정 오라버니인 벽파의 우두머리 김구주(金龜柱)의 원수에 대한 앙갚음으로 시파와 관계가 많은 교회에 박해의 손길을 내밀게 되었다. 대박해는 개시되어 1801년 (순조 1년, 신유년) 정월 9일 총회장 최창현(崔昌賢:요안)을 잡아 가두고 사학(邪學:가톨릭) 금지령을 내렸으며, 2월 26일에 이르러 이가환(李家煥)과 권철신(權哲身:암브로시오)은 고문에 못이겨 옥사하고, 같은 날 이승훈(베드로)·정약종(아오스딩) 등 중요 인물들이 서울 서소문(西小門) 밖 네거리에서 참수(斬首)를 당하였으며, 정약전·정약용은 각각 귀양을 가게 되었으니, 조선 교회를 지도할 만한 인물을 모조리 처형함으로써 대왕대비의 박해는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이 박해에 정식사형(正式死刑), 또는 옥중고문(獄中拷問)으로 순교의 피를 흘린 교인수만도 자그만치 300명 이상에 달하였던 것이다. 이때 한국 최초의 외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도 순교당했으니 1801년 4월 20일(19일?) 오후 4시였으며, 그의 나이는 45(46?)세였다.

오가작통법[편집]

五家作統法

가톨릭교도를 뿌리째 없애고자 전국 관헌에게 엄한 명령을 내려 5호(戶)로써 1통(統)을 만들고, 그 통내에 가톨릭이 퍼짐을 막고자 하였던 법이 곧 오가작통법이다. 이 법은 조선 7대왕 세조(世祖) 3년 5월에 저수관개(貯水灌漑)와 이(利)를 감독키 위해 팔도(八道) 각 마을에 통주(統主)를 둔 데서 비롯한 것으로 10대 연산군 9년 6월에는 지방에서 다섯 집마다 오장(五長)을, 다섯 오(伍)마다 통장(統長)을 두어 관내(管內)를 살핌으로써 백성의 도망을 막게 하였다. 이것이 발전되어 5호 또는 10호로써 1통을 삼아 이웃사람들끼리 서로 감시케 함으로써 사고 유발을 미리 예방하고자 하는 매우 놀라운 사찰제도(査察制度)가 된 것이나, 종전까지는 국경지방에 강제 이사시켜 온 마을에만 실시하던 것을 순조 때에 이르러 전국에 실시케 하였으니 얼마나 철저하게 가톨릭을 탄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황사영백서 사건[편집]

黃嗣永帛書事件

1801년에 일어난 신유교난의 귀중한 근본 사료(史料)로 당시의 유명한 남인학자이며 교도인 황사영(黃嗣永)이 지은 <백서(帛書)>라는 것이 있다. 황사영은 경상도 창원 황씨로서 정약전의 형인 약현(若鉉)의 사위이며 어릴 때부터 신동(神童)으로 알려졌다.

17세에 진사고시에 합격하였고, 주문모 신부로부터 알렉산델이란 세례명으로 세례받은 후 그를 열심히 돕던 중, 1801년 신유교난이 일어나자 충청도 제천군 배론(舟論)이라는 마을 토굴 속에 몸을 감추었다. 주신부가 박해를 당하고, 위기에 처한 조선교회의 상황을 본 황사영은 제천의 토굴 속에서 그를 찾아온 황심(黃沁:도마)과 상의하여 조선교회를 건져낼 계책을 세웠으니 이것이 곧 황사영의 백서이다. 백서는 길이 62cm, 폭 38cm의 흰 명주 비단에, 한 줄에 110자씩 121행(行), 도합 1만 3,000여 자를 검은 먹으로 깨알같이 쓴 긴 편지이다. 1만 3,000여 자의 황사영백서 원문의 내용은 대략 셋으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당시의 교세 및 신유교난과 순교자의 전기요, 둘째는 주신부의 순교에 관해서,

셋째는 정계의 실정과 포교에 필요한 근본 건의책을 들고 있다. 네 가지 근본 건의책은 ① 조선은 경제력이 약하니 포교와 백성구제에 필요한 자본(資本)의 요청, ② 청은 조선의 종주국이므로 청황제의 명령에 복종할 것이니 청황제의 명의로 양신부를 보낼 것, ③ 이 조선땅을 청에 부속시키고 안무사(按無使)를 안주(安州)와 평양 사이에 두어 이 나라를 감독 보호하게 할 것, ④ 선박 수백 척과 강한 병사 5, 6만으로 서양 전교대대(傳敎大隊)를 조직하여 선교의 승인을 강경히 요구할 것 등이었다. 그리고 나라가 망하여 없어져도 성교(聖敎)의 표는 남아 있어야 할 것이라 하였다. 결국 밀송되기 전에 발각되어 황사영은 1801년 11월, 27세의 나이로 대역모반죄로 몰려 참수형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 한국은 서학의 창궐(猖獗)을 염려하고 세계 각국과 상관하기를 금기해, 마침내 엄격한 쇄국정책을 쓰게 되었으며, 북경 왕래를 제외한 모든 외교관계는 삼엄한 통제 아래 단절되었다.

기해교난[편집]

己亥敎難(1839)

앙베르(Imbert) 주교를 비롯한 세 명의 서구 선교사의 활약에 의해서 교세를 만회하고 천주신앙의 기틀을 잡아가는 형세를 못마땅히 여긴 조정은 다시 한번 가톨릭 박해를 일으켰으니 1839년 기해년(己亥年) 헌종 5년의 일이었다. 이 교난도 한국의 정치 풍토에서 세도간의 알력이 원인이 되어 희생된 교회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준다. 순조 비(順祖妃)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로서, 헌종이 어린 나이로 등극하자 섭정을 맡아 보았는데,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를 정약용이 의술로 치료해 주었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온건정책을 썼다. 효명세자의 부인인 풍양 조씨(趙氏) 일파는, 그들이 온건하게 대했던 가톨릭교를 박해함으로써 김대왕대비를 비롯한 김씨 주변의 기성세력 타도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교난은 1839년 3월부터 막이 열리어 79세의 노파(鄭아가타)에서 14세의 소년(劉베드로)에 이르기까지, 형죄의 고문에 굴하지 않고 무서운 형벌을 참고 견디어 마침내 순교자 대열에 참여했던 것이다. 1840년 12월 이 교난의 막은 내렸지만 순교자의 수가 113명에 이르고 있었다.

척사윤음[편집]

斥邪綸音

1839년 10월 18일 유혈의 와중에 국왕 헌종은 척사윤음이라는 교서를 발표하고, 가톨릭교가 망국의 사교임을 설파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왕의 이름으로써 서교가 국금(國禁)의 교임을 명시했다. 이것은 검교제학(檢校提學) 조인영(趙寅永)이 지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정학(正學)의 연원(淵源)을 밝히고, 천주학의 죄목을 열거하며, 가톨릭은 하류층의 어리석은 자들 중에서 더욱 흥성한 것을 지적하면서 '예수라고 하는 자'는 사람인지 도깨비인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다는 것과 결혼에 관해서도 비방하면서 종족적 계승의 종식을 예언하고 있다. 결론에 가서 바른길은 인위적 노력 없이도 땅에 충만하고 이단(異端)은 반드시 공들여 배척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끝을 맺고 있다.

정하상의 상재상서[편집]

丁夏祥-上梓上書

기해교난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우리나라 최초의 호교론(護敎論)이라 볼 수 있는 <상재상서>가 저작되었다. 이것은 정하상이 가톨릭의 교리가 참되고 공명정대하다는 것을 우의정이던 이지연에게 알리고자 해서 지었던 것으로,

가톨릭의 교리를 풀어 밝히는 부분과 호교변증하는 부분, 그리고 국왕에 대한 호소 등 세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첫째 그는 가톨릭이 현실적이면서도 '이국지원(理國之源)'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윤리적 차원이 높음을 강조했으며, 그 근거로서는 십계명을 들었다. 그 다음 교회사를 폭넓게 제시하면서, 동시에 중국에서 왕의 보호 아래 있었다고 강조함으로써 중국 밖에서 왔기 때문에 오랑캐의 종교라고 함은 부당하다는 것을 밝히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가톨릭이 지극히 거룩하고 참됨을 변증하면서, 공맹정주(孔孟程朱)의 정학(正學)에 어긋나지 않으며 성경은 시서예악(詩書禮樂)의 전통 고전과 다름없이 하늘을 섬기라했다고 논증하고, 마지막으로 가톨릭교인은 뜻 잃고 나라를 원망(失志怨國)한 일이 전혀 없음을 주장했다.

김대건의 순교[편집]

金大建-殉敎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충남의 내포에서 태어나 모방(P.Maubant) 신부에게 발탁되어 16세에 유방제(劉方濟:빠치피코) 신부의 귀청편에 마카오에 유학하게 되었던 사람이다. 그가 한국인 최초로 신부의 서품을 받은 것은 귀국 1개월 전인 1845년 8월 17일이었다. 그는 앙베르 주교의 대를 이을 제3대 주교 페레올(Jean Joseph Ferreol-高)과 함께 강경을 거쳐 서울에 잠입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프랑스의 함정 세 척이 충청도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기해교난 때에 참형된 세 프랑스 신부의 순교 사실을 힐문, 위협하고 물러갔던 것이다. 그것이 결국 교회에 큰 손해를 미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마침내 헌종이 1846년 9월 15일 김신부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다음날 그는 새남터에서 칼을 여덟 번 받고 목이 떨어져 순교했으니 그의 나이 25세 되던 해이다. 그런데

김대건 신부의 순교가 실질적으로는 근대 한국과 서양제국과의 접촉을 표면화하고 그 결과에 따라서 결국 쇄국배외(鎖國排外)하게 된 사건이 되었다.

병인교난[편집]

丙寅敎難(1866)

병인교난의 원인은 2가지로 살펴볼 수 있는데 하나는 가톨릭의 수적 부흥이다. 1865년 고종 2년에 2만 3,000명의 신도를 포섭할 수 있었고, 국내에 잠입한 외국 선교사만도 12명을 헤아리게 되었던 것이다. 또다른 원인은 좀더 직접적인 것이다. 안으로 동학란의 시련을 겪고 있을 때 제정 러시아가 함경도에 여러 번 침공하여 통상을 요구하며 변경을 소란케 하였는데 이럴 즈음에 남종삼(南鍾三)을 비롯한 가톨릭교인들이 남하정책을 봉쇄하는 방도로 많은 신부의 희생을 낸 프랑스와 대영국의 협조를 얻어 한영불(韓英佛)의 3각동맹을 결성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하고, 그 대신 그 공로로 신교(信敎)의 자유를 획득할 길이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대원군 자신도 이 일에 대해서 비상한 관심을 보였고, 선교사의 힘으로 러시아 방어가 가능한지를 다짐하고 교회의 중심 인물 남종삼을 접견하여 의논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원군의 초조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베르누(S.F.Berneux) 주교는 정치문제에의 개입을 꺼려 만족할 만한 회답을 주지 못하였고, 조야(朝野)의 대부분이 치열한 배외(排外)사상과 사교금압 열의에 젖어 있었던 때며, 변방을 넘나들던 러시아의 발길도 어느덧 멈칫하자 대원군은 지난 날 프랑스 신부들에게 걸었던 기대를 포기하고, 거기에 스스로 반발하면서 목전의 여론에 호응, 질풍과 같은 탄압에 나섰다. 1866년 이른 봄의 일이다. 대원군 집정하의 가톨릭교도 대학살은 이날부터 처절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 교난에 피흘린 가톨릭교도의 희생자수는 막대하였으니 3년간의 순교자 수가 8,000여 명에 이르고 있다. 베르누 주교, 브르티니에르(Breteniers)·포르티에(Pourthie) 등 6명의 선교사가 순교당하였으며, 이 박해는 결국 병인양요(丙寅洋擾), 곧 프랑스 함대의 격침사건을 빚게 한 원인이 되었다.

프로테스탄트[편집]

105인 사건[편집]

百五人事件

이 사건은 개신교 최초의 박해사건으로서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들을 투옥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해서 한국 통치의 장애물을 제거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일본의 표독한 날조로서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가 1910년 11월 5일 압록강 철교의 낙성식에 참석하고자 선천(宣川) 역에서 잠시 하차했을 때 선교사 맥쿤(G.S.McCune)이 데라우치와 악수하는 것을 암호로 암살하려 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씌워, 그 구실로 해서(海西)지방의 유명한 교회 관계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1911년 가을까지 체포된 자는 157명이었으나 몇몇은 고문 끝에 죽고 23명은 석방되었으며, 나머지 123명은 1912년 6월 28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 중에서 그리스도교인의 수는 105명이었다. 재판 진행중 소위 증거물로 제출된 유일한 근거인 공술서(供述書)는 견딜 수 없는 고문 때문에 쓰여졌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사건 자체가 완전히 날조라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재판장은 이런 핑계 저런 구실로 남감리교인 윤치호(尹致昊)를 비롯한 105인에게 10년 내지 5년의 선고를 내렸다. 그들은 여러 차례 감형되어 오다가 1915년 2월까지는 다 풀려 나왔으나, 이 사건은 일본과 한국이 최초로 정신적인 면에서 대결했던 명예로운 싸움이었다.

3·1운동과 그리스도교[편집]

三一運動-Christ敎

이 운동은 물론 한국인 전체의 운동이었고 또 천도교나 불교와 같은 여러 종교 단체가 선도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핵심과 기동력은 그리스도교를 경로(經路)로 했던 것이다. 교회가 이같은 독립운동에 앞장서 가는 데 있어서는 막대한 원동력이 깔려 있었던 것이니 우선 교회는 본래 역사상으로 전제정치에 대한 정신적 항거로 자처해 왔으며 또한 교회는 본래 체질적으로 타고난 결속력(結束力)과 통일력(統一力)이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강한 자치 정신과 연대감, 그리고 한국교회는 참혹한 식민정책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부활의 신앙에 튼튼히 서서 절망을 몰랐던 것이다. 마침내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에 교회인사 16명이 서명 날인함으로써 독립만세 운동의 대열은 감동과 열의로 그 대오가 짜여졌다.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29명이 참석하여 선언서를 발표했으며, 같은 시간에 파고다 공원에서는 태극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독립선언서가 당당히 낭독되었으며, 만세시위 유발은 당장 지방에 파급되었다. 총독부는 그리스도교를 이 운동의 핵심으로 간주하여 교회를 때려부수고 종탑과 성서를 산산조각냈으며, 검거 대상 역시 그리스도인들을 특별히 목표로 하고 있었다. 가장 비인도적인 참화는 수원 부근의 제암리 교회당 소실사건이다. 그해 4월 15일 낮 2시경 아리다(有田俊夫)라는 일본군 중위가 나타나 교인들을 그곳 감리교회당에 모이게 한 뒤 군인들이 무자비하게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면서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안에 있던 30명 교인들은 다 타서 죽었고, 교회당은 잿더미로 화하였다. 총독부가 1919년 5월에 발표한 통계에 보면 전부 파괴된 교회당의 수가 17동(棟), 일부 파괴된 것이 24동, 기타 교회당의 손해가 41동, 교회재산의 손해액이 대략 3만 달러, 그리고 1919년 6월 3일 현재로 투옥된 사람의 수는 그리스도교인이 2,190명으로 유교나 불교 및 천도교인을 합한 1,556명보다 훨씬 많았으며 교역자도 151명으로 천도교 직원 72명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이 통계는 확실치 않으며 사실은 이보다 훨씬 많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해에 한국은 그 순교역사(殉敎歷史)의 페이지에 또 하나의 영광스러운 장(章)을 덧붙였던 것이다.

신사참배[편집]

神社參拜

우리 교회가 일본의 잔인한 박해를 받아온 역사는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서 그 절정에 올랐다. 본격적인 참배강요의 마수가 뻗친 것은 1935년 평양의 미션학교에 대해 정기적인 참배를 강요할 때부터였다. 교회의 의사표시는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반대 의견은 묵살과 검색(檢索)으로 탄압되고, 다만 친일적인 발언만이 교회의 양심을 대변하는 것처럼 되었다. 감리교의 대부분은 신사참배가 정치적인 국민행위로 끝난다는 일본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함으로써 교회의 수난은 가벼웠다. 장로교는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총회시에 홍택기 총회장이 신사참배가 그리스도교 신앙에 배치되지 않는다는

결의를 하고 말았다. 일본의 종교단체법이 1939년 1월 의회에서 통과, 1940년까지 300명의 목사와 신도들이 검속되었고, 이들은 교회의 교직에서 해직당하였다. 주기철(朱基徹) 목사는 네 번째로 구속되어 4년간 고문을 받아 오다가 1944년 4월 22일 영광된 순교를 하게 되었고 장로교의 최봉석(崔鳳奭), 감리교의 이영한(李榮漢), 침례교의 전치규, 성결교의 손감종, 안식교의 최태협 등 50여 명의 교역자들이 순교의 면류관을 썼으며, 천여 명의 신도가 투옥되었던 것이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미국과 영국에 대항함으로써 형언할 수 없는 박해의 단계에 이르렀다. 한국 내의 여러 교파들을 기구적으로 단일 교파로 합동해서 1945년 8월 1일, 종교단체법에 의해 세워진 일본 그리스도교단 산하의 조선교단으로 명칭을 바꾸게 된 것이다. 재림사상을 강조하던 침례교·성결교·안식교가 차례로 문닫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교회는 형극의 길을 스스로 견디어 나갈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이다.

신앙의 이질화[편집]

信仰-異質化

1938년 4월 25일에 서대문 경찰서에서 유형기·최석모·김응조 등 여러 교파 대표자들이 신사참배는 물론 총후보국(銃後報國) 강조주간 행사에 참가할 것과 '일본적 그리스도교에 입각하여' '황도정신을 발양'하겠노라는 결의를 거쳐 선언문을 택했을 때 교회신앙의 이질화가 시작되었다.

이질화의 진행은 전향(轉向)의 표현으로도 나타났다. 1937년 면려 청년회사건으로 검속되었던 목사 정영도(鄭永道)가 사상전환을 하고, 1938년 9월 27일에는 진주(晋州)의 4교파 27교회의 전향이 보도되었다. 또한 신사참배문제로 구속되었던 수원의 최계만(崔繼萬)·차일훈(車日勳)은 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그리스도교 황도선양연맹(皇道宣揚聯盟)을 결성했으며, 견딜 수 없는 체형을 겪고 사상 전향을 받고 나온 유형기 목사와 갈홍기(葛弘基)가 황도문화관이라는 어용단체에 들어 있었고, 정춘수·정인과 목사가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에, 소위 비밀결사 흥업구락부사건(興業俱樂部事件)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던 YMCA의 구자옥(具滋玉)은 '황도학회(皇道學會)'에, 정인과·채필근·정춘수·양주삼 제목사와 신흥우(申興雨) 등은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와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1941.8.20)에 동원되고 있었다. 이처럼 황량한 교회의 비극은, 세상에 알려져 있는 몇몇 그리스도교 인사들을 비굴과 잔인의 새끼줄로 묶어 등을 쳐 앞세워서, 국민의식 부식과 와해에 비인도적으로 이용한 데서 더욱 서글프게 나타났다.

6·25와 교회[편집]

六·二五-敎會

6·25의 전란을 겪으면서 받은 국민의 피해도 막심했으나 그리스도교회가 받은 비극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성인 손양원(孫良源) 목사와 저명한 부흥목사 김익두(金益斗)의 순교, 그리고 남궁혁·양주삼·송창근·박현명 제목사와 신학자들이 납치되어 행방이 묘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변을 통해 파괴·손실된 교회의 수는 장로교가 152교회, 감리교가 84교회, 성결교가 27교회, 그리고 구세군이 4교회, 기타 교파에서도 손해는 막심했다. 순교·납치당한 이는 장로교에 177명, 감리교에 44명, 성결교에 11명이었다.

이런 외적 피해보다 더 실질적인 피해는 내적 분열이었다. 한국 장로교회는 고려신학교파를 정죄함으로써 그들이 갈려져 나갔으며 그리스도교 장로회(朝鮮神學校系)와 예수교 장로회(長老會神學校系)의 분립도 이때였다. 경건과 신학보다는 교권, 즉 인사문제와 정치문제로 분열한 감리교회의 불상사도 이때 일어났다. 6·25는 이처럼 한국교회 분열기에 위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