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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발전[편집]

醫學-發展

14세기경에 일어난 자유정신 운동, 이른바 르네상스는 근대의학의 근원이기도 했다. 중세의 10세기 이상에 걸친 암흑시대에 절대 권력을 자랑하고 있던 스콜라철학은 교회 세력과 아울러 모든 새로운 움직임을 억압하고, 새싹을 짓눌러 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르네상스와 함께 자유롭고 청신한 기풍이 학문계에 불기 시작하여, 권위에 구속되지 않는 새로운 연구가 이루어지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새로운 움직임은 자연과학의 급속한 발전을 촉진하여 근대 의학의 탄생에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나, 그 가장 기초적인 생각은 사물을 본원으로 거슬러올라가서 구명하는 데에 있었다. 이것은 고대에서도 어느 정도 실제로 행해졌던 바이었으나, 이것이 어느 사이에 잊혀지고, 중세에 횡행했던 스콜라 철학에 뒤흔들려 권위에 압복(壓伏)되어 버렸다.

본래 사람의 질병 치료를 궁극의 목적으로 하는 의학의 연구는 우선 경험적인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되고 있으나, 그것이 이윽고 신비적인 것이 되고, 나아가서는 어느 틈에 종교와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된다. 병고(病苦)로부터 벗어나려고 기도를 드리고 주문을 외며, 희생을 제공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의 병도 자연계에서의 현상의 하나로서 연구의 대상으로 채택한 그리스의 자연철학자 가운데 기원전 5세기에 나온 히포크라테스(Hippokrates)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사람들은 임상 관찰을 중히 여기는 독자적 의학론을 세우고 종교와 결합한 것처럼 보였던 의학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다.

그 뒤에도 일단 의학은 의학자의 수중으로 들어가, 그 연구가 계속되었으나, 2세기 후반 로마의 갈레노스(Galenos, 갈렌이라고도 한다)는 의학에 관한 연구를 정력적으로 행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드디어 의학의 일대 권위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중세로 들어오자, 이치도 모른 채 무비판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신봉되어, 권위를 중시하는 당시의 기풍과 어울러 10여세기의 장기간에 걸쳐 갈레노스의 이름은 의학계에 군림했다.

14세기에 들어와서 문예부흥의 기운이 일어나자, 이윽고 그것이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의학계에 전해졌으나 그것이 뚜렷한 형태로 나타난 것은 1543년에 발행된 베살리우스(Vesalius)의 해부서 『파브리카(Fabrica)』이다. 베살리우스는 수많은 인체해부(人體解剖)를 한 결과에 입각해서 이 책을 저작하고, 감연히 갈레노스가 범하고 있는 오류를 지적하였으며, 일일이 그에 반론을 가했다. 이 일은 오늘날 생각하면 그다지 중요한 일처럼 생각되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인체 해부의 실시와 자연 과학의 흥륭은 이윽고 의학의 연구에 실험이라는 방법을 실시하게 하고, 여기에 이른바 근대 생리학·근대 병리학이 탄생하고, 그 영향을 임상의학 방면에도 차차 영향을 미쳐 갔던 것이다. 특히 물리학·화학이 급속히 발전한 17세기에는 의학에도 그 영향이 현저하게 나타나서, 물리(物理)의학파와 화학(化學)의학파의 양파가 의학계에서 대립했다. 하나는 물리학적으로 의학적 현상을 설명하고 다루는 데 대하여, 다른 하나는 화학적으로 이에 대처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18세기에 들어와서도 아직 남아 있었으나, 자연과학이 완전히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는 이 시기에서는 양파의 대립은 오히려 볼 수 없었으며 도리어 이들 양자가 서로 협력하며 의학 발전에 기여한 감이 있다.

물론 일시적이긴 해도 의학의 다른 분야의 동향에 자극을 받아, 의학의 안에서도 자연철학적 사고가 18세기 말에 행해졌으나 그것은 얼마 가지 않아서 대체로 가라앉았다. 다만 메스메리즘(mesmerism, 動物磁氣說)·호메오파시(homoeopathy, 類以療法)라 불리고 있는 것 등은 이 때의 소산이었다.

19세기를 맞이하여 의학은 생물학·유전학·세포학과 같은 인접 과학의 확립에 의하여 자연과학으로서의 지위를 더욱더 공고히 했다. 특히 세균학의 발흥은 이 시기의 의학의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서, 그것에 의해 의학의 새로운 분야가 개척되고, 질병의 진료를 보다 더 상세하게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다시 질병의 예방을 확실하게 행할 수 있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자연과학 연구의 정밀화에 따라 의학의 연구도 한층 더 정확(精確)하고 미세하여져서, 의학의 각 분야에 걸쳐서 계속 정밀과학적 연구방법이 채택되었다. 이러한 동향은 해를 거듭할수록 강해지고 그 연구는 더욱 분석적이 되고 세분화하는 경향이 짙어진 것이 현재의 의학의 대관(大觀)이다.

18세기의 의학[편집]

十八世紀-醫學

18세기의 의학은 한마디로 체계화 시대라고 불린다. 린네(Linn

)가 그리스 이래의 전통을 깨뜨리고 생식법에 입각한 식물의 분류법을 제시한 것도 이 시대이지만, 질병이나 인체의 기구를 체계화하는 시도가 즐겨 행해졌다. 중요한 일은 이와 같은 노작(勞作)이 단순한 책상 위에서의 사색에 의해서뿐 아니라, 임상 경험이나 병리 해부학의 지험(知驗)에 의하여 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해부학의 발달에 뒤져 있던 생리학도 이 시대에 겨우 학문으로서의 방법론을 확립하고, 할러(Haller)의 이른바 '동적 해부 학'으로서 독자적 걸음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할러나 스팔란차니(Spallanzani)의 뛰어난 업적 외에 헤일스(Hales, 1677-1761)는 인공호흡법의 창시자로서 알려졌으며, 또한 혈액순환의 생리를 연구했다.

볼프(Wolf, 1733-1794)는 생물체의 후성설(後成說:생물체의 발생은 무구조(無構造)의 상태에서 차차 구조가 생성되어 간다는 설)을 제창하고 달걀 배자(胚子)의 발생을 상세히 기재하였으며, 또한 장기(臟器)가 엽상(葉狀)의 태층(胎層)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말한 점에서, 근대 발생학의 아버지인 베일(1792-1876)에게 그야말로 선행(先行)하는 것이다. 병리학에서는 모르가니(G. Morgagni)가 그 방대한 병리 해부의 성적을 내과(內科)진단학과 결합시킴으로써 근대 병리학으로서의 제일보를 내디뎠다.

그의 주장인 장기(臟器)의 병변(病變)을 중시하는 질병 국재이론(局在理論)은 피넬(Pinel, 1745-1826)을 거쳐 비샤(Bichat)에 이르러서 장기의 구성 요소로서의 조직의 개념으로 발전하고, 뒤에 세포병리설을 제창한 피르호(R.Virchow)에 연결된다. 윌리엄 헌터(W. Hunter, 1718-1783)는 정교한 임신 자궁의 도보(圖譜)를 작성했다.

그의 아우인 존 헌터(John Hunter, 1728-1793)는 외과(外科)학자였으나, 넓은 학문적 시야에서 생리학·병리학의 기반 위에 서서 외과학(外科學)을 연구함으로써 이제까지 단순한 치료 기술이라고 보아오던 외과학을 처음으로 의학의 한분야로서의 지위에까지 올려놓았다. 그의 염증(炎症)에 관한 연구는 특히 높이 평가되었다.

18세기 초의 유럽에서는 알비누스(B.Albinus, 1697-1770)나 뵈르하페(H. Boerheave, 1668-1738)와 같은 저명한 교수를 모시는 라이덴(Leiden)대학이 두드러져 있었다. 라이덴에서 수학한 할레는 훗날 라이덴대학을 본따서 초창기의 괴팅겐(G

ttingen)대학의 기초를 확립했으나, 당시의 문화의 일대 중심지였던 빈(Wien)에서도 여왕 마리아 테레사의 영단에 의하여 대학의 혁신이 이루어졌다.

혁신의 원동력이 된 것은, 여왕의 신임이 두터웠던 판스위텐(1700-1772)이었다. 그는 라이덴에서 뵈르하베 밑에서 배웠으나, 후에 빈에서의 의사(醫事)제도의 쇄신에 힘쓰고 라이덴대학을 본떠서 빈대학의 근대화를 도모했다. 외과학과 해부학을 분리하고, 또 라이덴으로부터 하엔을 초빙하여 내과학 교수로 임명했다.

그 후 18세기 말까지 빈의 의학은 공전의 융성을 보았다. 그 학파를 구(舊) 빈학파라고 부르고 있다. 대학에는 소속하지 않았으나, 빈의 아우엔브루거(Auenbrugger, 1722-1809)는 호흡기 질환의 진단에 타진법을 발명했다.

프랑스에는 훌륭한 외과의사 데소(P. Desault, 1744-1795)가 있어서 혁명 이후의 의학의 재건에 진력했다. 데소의 문하에는 비샤나 콜비사르(1775-1821)가 있었다. 콜비사르는 빈 학파와 접촉하여 타진법을 깊이 연구하고 병리 해부를 적극적으로 행하여 내과 진단학의 발전에 공헌했다. 그와 같은 시대 사람인 피넬은 『철학적 병리학』을 저술하여, 질병의 분류에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산과학(産科學)의 영역에서는 파르핀(1650-1730)에 의하여 분만(分娩) 겸자(鉗子)의 발명이 이루어졌다. 이 세기의 후반에는 민간의 경험을 의학에 도입함으로써 두 가지의 획기적인 업적이 영국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위더링(Withering, 1741-1799)에 의한 디기탈리스(digitalis)의 개발이며, 다른 하나는 아마도 18세기 최대의 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은 제너에 의한 우두법의 발견이다.

모르가니[편집]

Giovanni Battista Morgagni(1682-1771)

이탈리아의 병리학자.

포를리에서 출생하여 볼로냐에서 바르사르바 등에게서 의학을 배우고, 1701년에 학위를 얻었다. 1707년까지 볼로냐의 병원에서 해부학과 내과학(內科學)을 연구했다. 1707년 고향으로 돌아와 의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1711년에 파도바대학 교수로 천거되었다. 이 후 89세로 그 곳에서 병사할 때까지 연구 생활에 전념했다.

병리 해부로 얻어진 소견을 생전에 관찰한 임상상(臨床像)과의 관련하에 고찰하여, 병리 해부학을 임상 의학, 특히 내과 진단학과 직결시킨 점에 그의 최대의 공적이 있다. 그의 최대의 저작인 『질병의 자리와 원인』은 1761년에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그에 의해서 기재된 질환은 매우 많으며, 그 대부분이 처음으로 기재된 것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매독성 대동맥류(瘤)·급성 황색 간위축증·중이염에 속발한 뇌막염 등이 있다. 그가 주창한 질병의 원인으로서 개개의 장기의 병변(病變)을 중시하는, 이른바 질병 국재이론(局在理論)은 피넬, 비샤를 거쳐 피르호의 세포 병리설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할러[편집]

Albrecht von Haller(1708-1777)

스위스의 생리학자.베른에서 출생. 15세로 튀빙겐(Tubingen)대학에 입학했으나, 1년반 만에 떠나 라이덴대학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알비누스와 뵈르하페 밑에서 의학을 배웠다. 후에 다시 런던, 파리 등지에서 공부하고, 바젤에서는 베르누이(J. Bernoulli, 1667-1748)에게서 고등수학을 배웠다.

1729년에는 고향인 베른으로 돌아와, 여기서 5년여를 지냈다. 1732년에 『스위스의 시의 시도』라는 시집(詩集)을 내어 전 유럽의 이목을 모았다. 1736년에 신설된 괴팅겐대학의 해부학·외과학·식물학의 교수로 추천되어, 여기서 그의 학구 생활이 시작되었다. 라이덴의 본을 따서 참신한 기풍 아래 설립된 대학의 연구실에서 그는 정력적인 연구를 했다.

그의 업적 가운데서 특히 유명한 것은 자극 감응성설(感應性說)이다. 그는 동물체의 근본 현상으로서 자극성과 감응성을 상정(想定)했다. 자극성은 근육의 특성이며, 근육은 기계적·전기적 등의 자극에 의해서 수축한다. 또 자극을 전달하는 성질, 즉 감응성은 신경의 특성이다. 그리고 이들은 근육 및 신경에 내포된 특성이며, 물리학·화학에 의해서 해명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이와 같은 할러의 설은 생물에 자연과학의 힘을 초월한 어떤 것을 상정하는 생기론(生氣論)의 입장이며, 후대의 학계에 미치는 영향은 지극히 컸다. 할러는 망향(望鄕)의 심정이 강하여, 1753년 스스로 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777년 고향에서 병사했다.

스팔란차니[편집]

Lazzaro Spallanzani(1729-1799)

이탈리아의 생리학자·자연 과학자.

레지오의 스칸지아노에서 출생. 볼로냐에서 법률을 공부, 후에 자연과학으로 전향했다. 1754년 이래 유럽 각지를 전전하면서 연구생활을 계속하다가 파비아에서 죽었다. 유기체의 자연발생설을 부정하고, 모든 생물은 포아(胞芽)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하여 뷔퐁(Buffon, 1707-1788) 등과 같은 사람들의 구설(舊說)을 부정했다. 또 하등동물의 신체의 일부가 재생하는 것에 관한 연구와 온혈·냉혈동물의 호흡에 의한 가스 교환에 관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양서류(兩棲類)의 인공수정에 성공하여 수정(受精)에서의 정액(精液)의 역할을 연구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동물에 대하여 재생(再生) 실험을 행하고, 혈액순환을 연구하며, 소화문제(消化問題)에도 손을 대었고, 또 호흡에 관해서도 귀중한 관찰과 실험을 남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의 생물학 연구에 논리적·계통적 방법을 적용한 그의 공적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

제너[편집]

Edward Jenner(1749-1823)

영국의 의사. 우두법의 발견자.

글루세스터셔에서 출생. 1770년부터 2년간, 유명한 외과의사인 존 헌터 밑에서 의학을 배우고, 그들의 우정은 헌터가 1793년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1773년에 고향 마을에서 개업의가 되었으나, 이 지방에서는 우유 짜는 부인이 소의 두창(痘瘡)을 경험한 뒤에는 사람이 앓는 두창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제너는 이러한 사실을 의학에 응용하여 1778년에 그의 관찰을 모았으며, 1796년 5월 14일에 제1회의 종두(種痘)를 그 지방 소년에게 행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798년까지에 23번의 실험을 실시하여 그 결과를 보고했다.

우두법은 유럽 각지, 그리고 이어서 미국 등지에서 인정되어, 1800년까지에 6000명 가량의 사람이 접종했다. 정부는 제너의 연구를 원조하기 위하여 1802년과 1807년의 2회에 걸쳐서 도합 3만 파운드의 조성금을 내놓았다. 런던 명예시민으로 추대된 그는 1814년에 생애 최후의 런던 방문을 하였으며, 1823년 고향 마을에서 사망했다.

비샤[편집]

Maria Francois Xavier Bichat(1771-1802)

프랑스의 해부학자.

쥐라 지방의 트와레트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몽펠리에와 리옹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1793년에 파리로 갔다.

여기서 외과학(外科學)의 대가이며 국부 해부학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데소(Pierre, J. Desault)의 신임을 얻어 연구생활로 들어갔다.

바랐던 교직을 얻지 못한 비샤는 사립 연구소를 설립하여 해부학·생리학의 강의를 하고, 많은 청강자를 끌어들였다. 그는 침식을 잊고 연구에 몰두하여 다수의 병리 해부를 했다.

모르가니에 의해서 제창된 '장기(臟器)는 질병의 자리'라고 하는 설에는, 왜 서로 다른 장기가 병에 걸렸을 때에 같은 증상이 나타나느냐는 문제가 있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비샤는 장기의 구성 요소로서의 조직을 상정하고, 서로 다른 장기 속에동일한 조직이 존재하며, 이것이 같은 형태로 이환(罹患)되면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이 조직의 실체를 구명하기 위하여 그는 많은 실험을 했다. 그의 업적은 18세기 의학을 대표하는 할러의 자극 감응설과 모르가니의 장기병리설의 결합의 소산이며, 훗날 비르효브의 세포병리설에의 선구를 이루었다.

의사제도의 개혁[편집]

醫事制度-改革

16세기에 일어난 르네상스(文藝復興)의 물결은 18세기에 들어와서 사회·경제 면에서는 대자본주의 형태가 출현하고 자연과학 면에서는 과학 만능이 되었으며, 의학 분야에서는 이 시대처럼 많은 의학자가 여러 가지 학설을 발표한 시대는 없었다고 할 만큼 의학이 융성했으나, 의료 면에서는 그다지 크게 진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사의 지위는 많이 향상됐다. 사회적 지위에서나 물질적 수입 면에서나 글자 그대로 의사의 황금시대였다. 이것은 일반 교양이 풍부하고 전문적 기술이 뛰어난 의사가 많아졌다는 것과 또 사회의 인식도 변화했다는 것이 커다란 요인이었다. 더욱이 개업의가 가정의(家庭醫)로서 진료에 종사하게 되었다는 것도, 의사의 사회적 지위의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의료 내용에서는, 지금까지 이발사의 겸업이었던 외과(外科)가 독립하여, 겨우 내과와 동등한 지위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개선된 이유로는, 첫째로 군사상의 필요에 의한 외과 학교의 설립과, 둘째로는 외과 교육의 개혁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하여 1731년, 프랑스에 외과학교가, 1750년에는 외과 실습학교가 각각 설립되었다. 이어 영국에서 1800년에 왕립 외과학교가 창립되었다. 산과(産科)는 분만 겸자(鉗子)의 발명이 동기가 되어, 외과에서 독립하여 산과원(産科院)의 건설을 보게 되었다. 소아과는 내과에서 독립하고, 암스트롱이 1769년 런던에 소아과 병원을 창립했다. 또 18세기 말에 프랑스의 피넬이 정신병 환자 요양소의 개혁을 제창하기 시작한 후로 전국에 전문 병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간호에서는 종래의 종교적 간호로부터 탈피하여 휴머니즘에 입각한 근대 간호학의 확립에 커다란 영향을 던진 사람으로서 독일의 프리드너(1800-1869) 부부에 의한 간호학교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근대 간호의 확립자인 나이팅게일은 간호학을 배우기 위하여 두 번이나 프리드너의 교육을 받았다.

나이팅게일[편집]

Florce Nightingale(1820-1910)

영국의 간호사·병원 개혁자·군대 간호 사업의 선구자. 영국의 자선가의 딸로 부모의 이탈리아 여행중 피렌체에서 출생하였으며, 교육은 영국에서 받았다. 1849년 이집트 여행 도중에 알렉산드리아 병원을 참관하고, 정규 간호 교육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 해에, 독일의 카이저벨트의 프로테스탄트 학교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런던 숙녀병원의 간호부장이 되었다(1853). 이듬해 크림 전쟁이 일어나자, 38명의 간호사와 함께 전선으로 가서 스쿠타리의 야전 병원에서 초인간적인 활약을 보였다. 이 밖에도 많은 병원 및 간호 시설의 창립, 개선에 힘쓰고 남북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는 외국 정부의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영국 왕 에드워드 7세로부터 여성 최초의 공로 훈장을 받았으며, 만국 적십자사에서는 '나이팅게일상'을 설정하여 매년 세계 각국의 우수한 간호사를 표창하고 있다. 저서 『간호를 위하여』는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간호법과 간호사 양성의 기초 자료가 되고 있다. 나이팅게일 선서는 세계 모든 간호사에 의하여 행하여지고 있다.

공중위생학의 발달[편집]

公衆衛生學-發達

전염병의 만연은 18세기에서도 심해서 페스트·발진티퓨스·장티푸스·말라리아·디프테리아·유행성 감기·백일해·두창 등이 각지에, 또는 전유럽에 유행했다. 종래 미국에 국한되었던 황열병(黃熱病)도 1723년에 이르러 에스파냐 등지에 출현하게 되었다.

한편, 도시위생 상태는 18세기 말이 되어서도 아직 불충분하여, 하수도는 암거(暗渠)로 되어 있지 않고, 파리에서도 수세식 변소의 보급률은 좋지 못했다. 이 시대에 공중 위생학상 명기돼야 할 것은 피터 프랑크(Johann Peter Frank, 1745-1821)의 대저(大著)인 『의학적 경찰』(8권)이다. 이 책은 사회위생학적인 문제를 학문적으로 다룬 것으로서는 처음 것이다. 이어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영국의 존 하워드(J. Howard, 1726-1790)와 에드워드 제너이다. 하워드는 감옥이나 병원의 위생설비 개선에 노력하고, 『영국 및 웨일스의 감옥 상황과 어느 외국 감옥에 관한 얘기』라는 책을 내놓았다.

1830년부터 36년에 이르기까지 유럽을 석권한 콜레라의 유행은 환경 위생상의 설비 촉진의 동기가 되었고, 솔선하여 그 시범을 한 것이 영국이었다. 즉 급수·배수의 설계, 주택 위생, 그 밖의 보건 시설의 개선이 촉진되고, 1848년에는 공중위생법이 제정되었다. 독일에서는 막스 페텐코페르(Max von Pettenkofer, 1818-1901)가 뮌헨대학에 위생학 교실을 창설했다.

생기론과 그 비판[편집]

生氣論-批判

할러의 계통적·실험적 연구로 제시된 두 개의 중요한 생명현상(감각성과 운동성)을 한층 더 고도한 어떤 하나의 원동력에 의하여 지배되고 유지된다고 하는 이념하에 성립시킨 학설이 생기론(生氣論)으로서, 그 창시자는 프랑스 몽펠리에의 보르두(1722-1776)이다. 그의 학설은 생명력과 생기(生氣)인, 그가 이름을 붙인 '자연력'의 본체에 대하여 추상적 허구를 자의로 하지 않고, 해부학적·생리학적 실험에 의한 분석적 수법을 채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체계학파의 시탈의 정신론(精神論)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그러므로 프랑스의 생기론은 해부학 총론의 신흥(新興)을 촉진시켰다는 점에 의의가 있으며, 바르티에(1734-1806)는 정신과는 다른 '생명력'을 제시하고, 피넬은 생기론과 분석 종합법과의 결합을 한층 긴밀하게 하여, 해부학적 근거에서 질병한국(疾病限局)의 원리에 도달하고 있다.

하지만 그 해부학적 연구는 아직 불완전한 것으로서, 증후분석(症候分析)의 목적에 충분히 부응하지는 못했으나 그것은 후에 비샤의 출현으로 달성되었다.

프랑스의 생기론과 평행하여 할러설을 근거로 하는 제2의 견해는, 영국 에든버러 학파의 컬렌(W. Cullen, 1710-1790)이 제창한 신경병리설(神經病理說)이다. 이것은 영국에 특히 성행하고 있던 신경과 그 질환에 대한 연구에 뒷받침되어, 생명력에 대신하되 협의의 신경력으로서, 모든 생명현상을 신경 계통에 귀착시킨 것이다. 그 문하에서 나온 브라운(J. Brown, 1735-1788)은 자극에 대한 흥분성 발동을 생명 현상이라고 하는 흥분학설을 제창했으나, 그것에 의한 요법(療法)은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었다.

한편 독일의 생기론은 형이상학적 생명력의 사변(思辨)으로 타락하여, 자연 철학적 방향으로 편향되었다. 독일의 대표적 생리론자로서는 블루멘바하(J. Blumenbach, 1752-1840)와 라일(J. Reil, 1759-1813)이 있으며, 전자는 영양·신진대사·생장 등의 제현상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켰으나, 후자는 만년 칸트 철학을 떠나 셸링(F. Schelling, 1775-1854)의 자연철학으로 전향하여 추상론화해서 구체적 기초를 결여하게 되었다.

의학과 낭만주의의 영향[편집]

醫學-浪漫主義-影響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서 독일에서 일어난 낭만주의 사상은, 유물론적·기계론적 자연관으로서의 편향(偏向)에 대한 반동이었다. 의학에서 그것을 조장시킨 것은 낭만주의의 소산인 셸링의 자연철학으로서, 실험적·실증적 연구의 후퇴와 공상적·사변적 고찰이 대두되고, 낭만주의 의학을 출현시켰다. 이와 같은 경향은 독일 생기론에서 볼 수 있는 신비적인 생명력의 창도로부터 파생한 메스메르(F. Mesmer, 1734-1815)의 동물자기설(磁氣說)과 하네만(S. Hahneman, 1755-1843)의 유사요법(類似療法)을 받아들여 유행시키는 소지를 만들어 주는 것이 되었다. 메스메르 동물자기설(mesmerism)은 자석이 지니는 인력에 비유할 생체에 내존하는 신비한 초감각적인 힘을 상정하여 동물자기라 일컫고, 그것을 이용함으로써 신경 질환이나 그 밖의 질환을 치료하려는 것이다.

하네만의 유사요법(homoeopathy)은 영적(靈的) 생명력의 변조가 질병을 일으키므로 그 치료에는 그와 유사한 증후를 건강인이 야기시키는 약물을 극도로 묽게 하여 영화(靈化)해서 줌으로써 목적을 달성시키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요법들은 전기(前記)한 풍조하에서 왜곡되어 아류(亞流)를 낳게 했으나, 전자는 정신요법과 심신 의학적 의의에 있어서 진실성을 포함하는 임상적 사실의 집적을 준비했으며, 후자는 동양 의학사상과도 공통되는 전체론적 의학사상의 입각점(立脚点)이 인정되어, 근대 의학의 맹점을 찌르는 것이 있다.

독일 의학의 융성[편집]

獨逸醫學-隆盛

독일의 철학 혁명이 영국의 산업 혁명의 성과의 물결을 자유무역에 의하여 정면으로 받아 일으킨 프랑스 정치혁명의 파급이듯이, 독일 의학이 19세기 중엽에 낭만주의 의학에서 탈피하여 근대화로 향함에 있어서 취한 건설의 기초와 계획의 본은 프랑스에서 딴 점이 많다.

근대 의학사상이 중세적·일원적 병고관(病苦觀) 부정의 실증적 연구과정에서 일어난 이상, 임상 관찰과 병리소견을 관계짓는 병리 해부 연구의 체계화는 중요하다. 그 연구를 지탱하는 외적(外的) 조건은 풍부한 병시체(病屍體)를 얻는 일에 있다. 여기에는 산업혁명에 의한 도시인구의 집중화에 따르는 질병의 증대와 병원 시설의 확장, 나아가서 병원 성격의 의학 연구센터화(化)를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배경하에서 프랑스의 비샤에 의한 육안적(肉眼的)·거시적 관찰에서 태어난 조직 병리학은 독일의 뮐러(J.M

ller)의 손에 의하여 현미경적인 미시적 연구가 되고 그 문하에서 피르호가 나와서 세포병리학(病理學)을 창시하게 되었다. 그것은 뮐러의 문하(門下) 슐라이덴(M.Schleiden) 등이 생물학의 중심으로 만든 세포를 의학의 중심적인 지위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같은 뮐러 문하인 헨레(Friedrich Henle, 1809-1885)는 병리학과 병원(病院) 미생물학의 결합장이 되는 '헨레의 가설(假說)'을 제시하고, 그에 뒤따른 병원 미생물학이라는 의학의 변혁을 준비했으며, 역시 같은 문하인 헬름홀츠(H. Helmholz), 브뤼케(E. Br

cke, 1819-1892) 같은 이들은 각각 생리학 분야에서 활약하며, 대학의 연구실을 중심으로 독일 의학은 서서히 융성해 갔다.

근대 생리학의 확립[편집]

近代生理學-確立

할러에 의해서 길이 열린 근대 생리학은 18세기를 통하여 착실하게 진보를 계속해 왔으나, 생체의 기능이 자연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힘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다는 생각(生氣論)의 영향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18세기 말의 비샤의 생기론에 바탕을 둔 생리학적인 생각은 널리 19세기 초두의 유럽의 생리학계를 뒤덮고 있었다.

비샤의 생기론에 우선 반대의 입장을 취한 것은 프랑스의 마장디(F. Magendie, 1782-1855)였다. 마장디는 의학상의 모든 문제를 물리학과 화학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그는 뒤에 말하듯이 '벨의 법칙'을 실험적으로 입증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개개의 사실을 관련짓는 일은 하지 않았다. 관련짓는 과정에는 가설의 개입이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의 학문적 한계가 있었다. 그에게서 배운 클로드 베르나르(Claude Bernard)는 스승인 마장디와 마찬가지로 억측을 배척하고 실험 사실을 가장 존중했으나, 귀납법을 생물학 연구의 근본 방침으로 삼음으로써 근대 생리학을 확립시켰다.

같은 무렵, 독일에는 요하네스 뮐러(Johannes M

ller)와 루트비히(C. Ludwig)가 있어서 각각 생기론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요하네스 뮐러의 제자인 헬름홀츠는 1847년에 '에너지 보존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생리학상의 제현상을 물리학·화학의 방법에 의해서 해명한다는 입장을 옹호했다. 의학 분야에서 가장 뒤져 있던 신경계에 대한 해명에도 과학자들의 노력이 개시되었다.

벨(Charles Bell, 1774-1842)은 1811년에 '새로운 뇌(腦)해부에 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써서, 척수(脊髓)의 전근(前根)은 운동을, 후근(後根)은 지각을 전한다는 '벨의 법칙'을 발표했다.

신경생리학 역사상 획기적인 업적은, 마장디에 의해서는 개(犬)로, 요하네스 뮐러에 의해서는 개구리로 실험적으로 증명 확인되었다. 또 벨은 삼차(三叉)신경이 지각신경(知覺神經)이라는 것과 안면(顔面) 신경의 손상에 의하여 안면 마비가 일어난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 밖에 1885년에 골지(Camillo Golgi, 1844-1926)는 신경교(神經膠) 세포를 발견했다.

마장디[편집]

Francois Magendie(1783-1855)

프랑스의 생리학자. 동물실험을 통해 생리 현상이나 약물을 발견하여 생리학과 의학에 이바지했다. 임상 문제와 기초 의학(특히 생리학과 약리학)의 문제를 밝혔다. 특히 척수신경 중 척수전근은 운동에 관여하고 척수후근은 감각에 관여한다는 벨-마장디의 법칙과 장의 음식물 흡수 경로에 대한 연구로 유명하다. 근대적인 실험생리학과 실험의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

뮐러[편집]

Johannes M

ller(1801-1858)

독일의 생리학자. 현대 독일 의학의 아버지.

코블렌츠에서 출생. 어릴 때 괴테(J. G

ethe, 1749-1832)의 저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자연 연구에 대한 열정으로 의사의 길을 선택했다. 1819년 본(Bonn)대학에서 수학하고, 1823년에는 태아의 호흡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학위를 얻은 뒤, 베를린으로 가서 생리학자인 루돌피(1771-1832)의 영향을 받았다. 그 후 다시 본으로 돌아와서 1824년에 강사가 되고, 1830년에는 교수가 되었다. 1833년에 루돌피의 뒤를 이어 베를린대학 교수가 되어, 해부학·생물학·병리학을 교수했다.

본 시대부터 신경계·감각기의 생리에 특별한 흥미를 가지고 시각(視覺)의 비교생리학적 연구를 하여, 환시(幻視)에 관한 논문을 써 지각과 정신작용의 관련을 논했다. 또 신경계통에서의 '벨의 법칙'을 확인, 반사 작용·샘(腺)의 미세(微細)구조에 관한 연구와 발생학에 관한 업적 등 그의 연구 범위는 지극히 다양했다. 그는 만년에 심한 우울상태에 빠져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쇠약하여 1858년에 급서했다.

베르나르[편집]

Claude Bernard(1813-1878)

프랑스의 생리학자.상줄리앙에서 출생. 리옹에서 약제사의 도제(徒弟)가 되기도 하고, 극작가가 되려고도 하던 소년기를 거쳐 어떤 사람의 충고에 따라 의학의 길을 택했다. 처음 오테르 디우에서, 이어서 콜레즈 드 프랑스에서 마장디의 조수를 지냈다. 비샤의 생기론에 지배되고 있던 프랑스의 생리학계에 실증주의적인 생각을 도입한 것은 마장디였다. 그 밑에서 공부한 베르나르가 실험 사실과 억설를 엄밀히 구분하여 귀납법을 생물학 연구의 근본원칙으로 삼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1843년에 위액과 그 소화기능에서의 역할에 관한 연구로 학위를 받고, 이어 소화기능에서의 췌액(膵液)의 기능, 연수(延髓)의 천자(穿刺)에 의한 인공적 당뇨의 발현(發現), 간장의 당원(糖原)생성 등 많은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베르나르가 1865년에 저술한 『실험의학 서설』은 그의 실험의학(實驗醫學)에 대한 태도를 명확히 제시한 것으로서 불후의 고전(古典)이 되어 있다.

루트비히[편집]

Carl Friedrich Wilhelm Ludwig(1816-1895)

독일의 생리학자.

헤센의 비첸하우젠에서 출생. 1840년 마르부르크 대학을 졸업. 1846-1849년간 동 대학의 해부학 교수를 지내다가 이어 취리히, 빈의 교수직을 거쳐 1865년에 라이프치히대학의 생리학 교수가 되어, 병사할 때까지의 30년간을 생리학 연구에 바쳤다. 생기론을 부정한 점은 요하네스 뮐러나 베르나르와 마찬가지이며, 모든 것을 물질적 현상으로서 관찰했다. 뇨분비(尿分泌)와 혈압의 기전(機轉)에 관한 연구, 타액(唾液) 분비에서의 신경 관여에 대한 연구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슈미테베르크와 브루턴경(卿)과 함께 약품이 심장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고, 또한 척수에서의 혈관운동 신경의 중심을 확정지었으며, 모세혈관의 압력도 연구했다.

라에네크[편집]

Rene Theophile Hyacinthe Laennec(1781-1826)프랑스의 의학자. 청진법의 창시자. 브르타뉴의 캥페르 출생. 14세 때 낭트에서 개업하고 있던 숙부의 집에서 지내며 의학의 기초를 배웠다. 1801년 파리에 나와 샤리테 병원학교에 들어가서 나폴레옹의 주치의였던 코르비자르에게 사사하여 정식으로 의학을 수학하였다. 1806년 보종병원의 의사가 되어 병리해부학에 관심을 가지고 그 분야의 문제에 관한 몇 가지 논문을 발표하였다. 1816년 어린이의 놀이에서 힌트를 얻어 비대한 여성을 진찰할 때 종이를 말아서 관 모양으로 하여 가슴에 대고 청음하였다가 청진기를 발명하였다. 그 후 3년 동안 환자를 청진하여 여러 가지 음(音)을 기록하고 죽은 후의 병형(病型)과 대조하여 이러한 음이 어떠한 병에서 나오는가를 알아냈다.

병리학·약리학의 발전[편집]

病理學-藥理學-發展

아우엔브루거(L.Auenbrugger)의 타진법(打診法)을 프랑스로 도입한 콜비사르나, 청진법(聽診法)을 발명한 라에네크 같은 사람에 의하여 임상의학은 융성하게 되었으나, 과거의 구(舊) 빈학파(Wien 學派)는 19세기 초에 소멸하고, 빈 의학은 한때 저조해졌다. 그러나 1840년경부터 빈 의학의 제2의 황금시대가 시작되었다. 신(新) 빈학파라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1844년에 빈대학의 병리 해부학 교수가 된 로키탄스키(K. Rokitansky, 1804-1878)는 정력적으로 병리해부를 연구하고 종래의 증후에 의한 질병의 분류에 대신하여 병리 해부의 소견에 입각한 질병의 분류를 제창했다.

또 그는 전신적 질환의 원인은 혈액이라고 하고, 여기에 전부터 전해 오던 체액(體液) 병리학설과의 접촉을 구하여 '체액 부조화설(體液不調和說)'을 제창했다. 그의 동료인 스코다(J. Skoda, 1805-1881)는 타진법과 청진법에 의한 임상소견을 병리해부의 소견과 직결시키려 했다. 1846년에 빈대학의 교수가 되고 로키탄스키와 아울러 신(新) 빈학파의 쌍벽을 이루었고, 이 두 사람에 이은 신(新) 빈학파의 중진은 헤브라(F. Hebra, 1816-1880)이다.

그는 피부학(皮膚學)에 병리학적 방법을 도입하여 병리학에 입각한 피부 질환의 분류를 하였다.

근대 약리학 이전에는 본초학(本草學)의 긴 역사가 있었다. 19세기가 되어서 물리학·화학 방법을 이용하여 동물실험에 의한 약효의 관찰이 성행되고, 독일의 부프하임(1820-1879)은 칼륨염(鹽)·하제(下劑)·맥각(麥角) 등을 연구하여 근대 약리학에 앞장섰다. 부프하임 밑에서 공부한 시미데베르크(1838-1921)는 스트라스부르대학의 교수로서 다채로운 연구를 하였는데, 개구리의 심장을 사용해서 독물(毒物)의 효과를 살펴본 것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또 독버섯의 유독 성분인 무스카린이나 디기탈리스(digitalis)의 연구에 대해서도 업적을 남겼으며 근대 약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그 밖에 빈츠(K. Binz, 1832-1912)는 본대학의 교수가 되어, 키니네·알코올·비소·진통제 등에 대한 연구를 했다.

피르호[편집]

Rudolf Virchow(1821-1902)

독일의 병리학자. 세포 병리학의 제창자.

폼메르의 시페르바인에서 출생했다. 1839년 베를린에 나와서 의학을 공부했고, 특히 요하네스 뮐러와 세라인(1793-1864)의 영향을 받았다. 1843년에 학위를 얻고 프로리프의 조수가 되었으며, 3년 후에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1848년 실레지엔 지방에서 발생한 전염병의 조사를 단서로 하여 피르호는 의사(醫事)제도의 쇄신을 정부에 제언하고 『의학의 혁신』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여 정부의 정책과 대립하다가 샤리테 병원의 직을 쫓겨났다. 그러나 때마침 뷔르츠부르크대학의 교수로 추천되어 여기서 병리학 연구에 전념하고 많은 업적을 올렸다. 1856년에는 베를린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1858년에는 '세포병리학설'을 발표하였다.

인체는 세포로 구성되고, 또 모든 세포는 세포에서 생겨난다는 것이 그 골자인데 모르가니의 장기(臟器)에서 출발하여 비세의 조직을 거쳐, 세포병리학설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피르호는 또한 종양학(腫瘍學)에 관해서도 커다란 업적을 남겼으며, 인류학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리스터[편집]

Joseph Lord Lister(1827-1912)

영국의 외과의사. 무균수술법을 확립했다. 또 혈액·염증 등의 응고에 관한 중요한 관찰로 현대 외과 수술에 혁명을 가져다 주었다. 무균수술법이 나오기 전에는 아주 간단한 수술도 감염증을 일으켰고, 수술 환자의 50% 정도가 사망했다. 1867년에 펴낸 그의 저서는 방부의 체계에 대한 소개이다.

세균학과 예방의학의 발달[편집]

細菌學-豫防醫學-發達미소한 생물이 병의 원인을 이룬다는 생각은 옛날부터 있었다. 또 현미경 학자인 레벤후크가 1674년과 76년의 편지에서 미생물을 보았다는 것을 밝히고 있으나, 이것을 병과 결부시켜 생각하지는 않았다.

19세기가 되어 이탈리아의 바시(A.Bassi, 1773-1856)가 누에의 전염병에 관하여 중요한 실험을 하여 미생물에 의해서 그 병이 전염된다는 것을 증명하고, 아마도 인간의 여러 가지 병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논했다. 그러나 그 주장은 의학자에게는 그다지 주의를 끌지 못하였다.

프랑스의 파스퇴르, 독일의 코흐가 나올 무렵 세균학이 급속히 발흥(勃興)했다. 코흐는 자기가 창설한 연구법에 의하여, 1882년 결핵균을, 이듬해인 1883년에 콜레라균을 발견했다. 노르웨이의 한센(A.Hansen, 1841-1912)이 나균(leprae)을 발견한 것은 코흐에 의한 세균학의 발생보다 조금 전의 일인데 그것이 나병(leprosy)의 병원체라는 것이 결정된 것은 1880년이다.

나이세르(A. Neisser, 1855-1916)의

임질균(淋疾菌) 발견은1879년이고, 클레프스(E. Klebs, 1834-1913)와 뢰플러(F. Loffler)의 나균발견은 1883년, 그리고 에베르트(K. Eberth, 1835-1926)와 가프키(G. Gaffky, 1850-1913)가 티푸스균을 발견한 것은 1880년이다. 프렌켈(Fraenkel, 1848- ? )은 1884년에 폐렴쌍구균을 발견하고, 프랑스의 라브랑(A. Laveran, 1845-1922)은 1880년에 말라리아의 병원체를 발견했다.

단, 말라리아의 병원체는 세균이 아닌 단세포의 원충이었다. 바이크셀바움(1845-1920)은 1887년에 수막염균(髓膜炎菌)을, 기타사토 시바사부로(北里柴三郎)와 에르잔(1863-1943)은 각각 독립적으로 1894년에 페스트균을 발견했다. 시가 기요시(志賀潔)는 1897년에 이질균의 일종인 시가균을 발견했다.

이상과 같이 세균학의 발달에 의하여 예방의학·면역학은 필연적으로 장족의 진보를 하였다.

레벤후크[편집]

Antonie van Leeuwenhoek(1632-1723)

네덜란드의 현미경학자·박물학자. 델프트 출생. 16세 때 학교를 중퇴하고 암스테르담의 포목점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21세 때 귀향하였다. 상업에 종사하면서 렌즈연마술·금속세공술 등을 익혀 확대율 40-270배의 현미경을 만들었다. 직접 제작한 현미경이 400개 이상이며, 현재 네덜란드의 레이덴박물관에 그 중 몇 개가 보존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현미경으로 원생동물·미생물 등을 관찰하였으며, 그 결과가 R. 그라프에 의해 영국 왕립협회에 소개됨으로써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생물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의 연구 결과가 최초로 발표된 것은 1673년이며, 1675년에는 적충류(滴蟲類)를 관찰하였고, 1680년에는 그의 업적이 인정되어 영국 왕립협회 회원으로 천거되었다. 이 밖에도 가로무늬근, 곤충의 복안(複眼), 동물의 정자 등을 관찰하였으며 생물의 발생에서는 정자를 중시하는 전성설(前成說)을 주장하였다.

파스퇴르[편집]

Louis Pasteur(1822-1895)

프랑스의 화학자.쥐라 출신. 무두질을 업으로 하는 퇴역 군인의 아들로 화학을 공부하여 교사가 되었다. 그가 교직에 있었던 릴 지방의 포도주 양조업자의 부탁으로 포도주의 발효와 부패의 연구에 손을 댄 것이 시초가 되어 세균학 연구에 몰두했다. 1857년 파리의 사범학교로 전근했는데, 여기서 미생물이 없으면 발효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즉, 유명한 '고니목 플라스크'의 실험을 하여 생물의 자연발생을 타파했다.

1864년에 쥐라의 포도주의 부패를 막는 연구를 하여, 기생한 미생물을 50℃-60℃의 열로 죽이는 저온멸균 방부법(防腐法), 이른바 파스퇴리제이션(Pasteurization)을 창시했다.

1877년에는 양의 비탈저(脾脫疽)를 연구하였으며, 3년 후에는 닭 콜레라에 대한 연구도 시작했다. 이 때 백신(vaccine)에 의한 면역에 성공하여 같은 원리를 양의 비탈저에 응용했다. 이것이 백신 예방접종법으로서, 만년(1885)에 완성시킨 광견병 예방 접종법과 함께 프랑스의 자랑할 만한 세균학상의 성과이다.

코흐[편집]

Robert Koch(1843-1910)

독일의 세균학자.하노버에서 출생. 1866년 괴팅겐 대학을 졸업했다. 그가 시골에서 개업하면서 여가에 조금씩 하고 있던 비탈저(脾脫疽)의 연구는 1876년에 당시 독일에서의 세균학의 권위였던 콘(F. Cohn, 1828-98)에 의하여 인정되어 일약 유명해졌다. 이 때 코흐의 설을 지지한 사람은 파스퇴르였다.

이리하여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신분이 된 그는 표본으로 만들기 위한 세균의 고정법·염색법을 고안 또는 개량하고, 고형배지(固形培地)·순수 배양법 등에 대해서도 많은 창의를 발휘하여 1881년 런던에서 개최된 국제 의학회에서 이것을 발표했다.

그가 창시한 세균학 연구법이 동기가 되어 많은 병원균이 발견되었다. 1882년에는 결핵균을, 그 다음해에는 이집트 및 인도로 출정하여 콜레라균을 발견했다. 1890년에 결핵 치료제 투베르쿨린을 창제하였으나 치료 효과는 없었다. 그러나 결핵의 진단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뒤에 밝혀졌다.

모턴[편집]

William Thomas Green Morton(1819-1868)

미국의 치과의사. 매사추세츠주 찰턴 출생. 하버드의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화학교수 잭슨의 권유에 따라 1846년 9월 통증없이 이를 뽑는 데 성공하였다. 그해 10월에는 수술에 에테르 마취제를 사용하여 성공하였다. 그러나 에테르 사용에 대한 독점권을 두고 에테르 사용 발견의 우선권을 주장한 잭슨 등 몇몇 사람과 소송쟁의를 하면서 일생을 마감하였다.

마취법·살균법의 발견[편집]

痲醉法·殺菌法-發見

파스퇴르에 의해서 명확해진 부패 이론이 의학에 도입되기 전에 이미 외과의(外科醫)는 마취약을 획득하여 근대 외과의 제1 난관인 무통화(無通化) 수술이 개시되고 있었다.

마취법[편집]

痲醉法

근대 마취약은 가스 화학의 발전에 힘입은 바 크다.

1840년대에는 소기(笑氣:亞酸化窒素)·에테르 같은 가스를 맡아서 무감각 상태에 빠진다는 이상한 현상이 전시적인 가치를 지녀, 순회 통속 강연이 유행했다. 이것이 힌트가 되어 미국의 롱(C. Long, 1815-1878)은 경부(頸部)의 낭(囊)적출 수술에 에테르마취(1842)를, 웰스(H. Wells, 1815-1848)는 발치(拔齒)에 소기(笑氣) 마치를, 다시 그의 동료 모튼(T. Morton, 1819-1868)은 에테르 마취를 발취와 좌측 두부 종양(腫瘍)적출 수술에 응용(1846)했다.

이 보고가 전세계에 발표되고, 유럽에서도 이를 시험하게 되어 외과 수술에 정착했다. 그리고 1847년, 영국의 심프슨(J. Y. Simpson, 1811-1870)은 에테르 대신에 클로로포름을 무통 분만에 응용, 클로로포름 마취에 앞장섰으나 무통분만을 둘러싸고 성경의 가르침과의 관련성으로 종교상의 논의를 야기시켰던 것도 마취법 초창기의 에피소드이다.

살균법[편집]

殺菌法

'병원부패(病院腐敗)'라는 말로 표현되는 수술 후의 화농과 사망, 그리고 출산 후의 산욕열(産褥熱)에 의한 높은 사망률은 19세기 중엽까지는 큰 공포의 대상이었다.

병원 미생물학이 일어나기 전 빈의 젬멜바이스(I. Semmel-weiss, 1818-1865)는 손가락의 소독이나 기계·붕대 재료의 소독에 의하여 산욕열의 사망률을 끌어내리는 데에 성공했다. 보스턴의 홈스(O. W. Holmes, 1809-1894)도 같은 지견(知見)을 얻고 있었으나 어느 것이나 일반화하지 않았으며, 이와는 따로 영국의 리스터(J. Lister, 1827-1912)는 파스퇴르의 부패이론을 채용하여 석탄산피복(石炭酸被覆) 붕대의 응용을 거듭하고 다시 수술실과 수술대를 석탄산 용액으로 분무하는 제도를 채용(1865), 공기 살균의 일반 개념을 도입했다.

이 방법은 영국 본국에서는 당초 비판적이었으나 독일에서 보불(普佛)전쟁 개선 부상자에게 시험하여 호성적으로 나타낸 후로 보급되었다.

무균법[편집]

無菌法

병원미생물학(病原微生物學)의 수립과 발전으로 창상(創傷)감염 병원균이 확인되고, 파스퇴르가 제창한 가열멸균(加熱滅菌)에 의한 이학적(理學的) 소독법의 채용을 더하여 외과(外科) 용구나 붕대 재료의 고온 멸균법이 제시되었다. 1883년 이래, 프랑스의 테리옹(1844-1895)은 끓이기·건열(乾熱)·화염 멸균(火焰滅菌), 독일의 노이벨(1850-1932)은 멸균·무균법의 개량, 심멜부시(1860-1895)는 증기 멸균법의 일반적 응용을 개척하는 등 살균 소독법과 함께 무균법이 일어나 외과 수술의 범위가 현저하게 확대되고 개복술(開腹術)·내장 수술 등도 차차 성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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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wford Williamson Long(1815-1878)

미국의 의사. 1842년 처음으로 외과 수술에 에테르를 마취제로 사용했다. 에테르가 마취를 일으키는 성질은 에테르를 소량 흡입했을 때 나타나는 '에테르 환각'으로 이미 알려져 있었다. 롱은 1842년 3월 30일 베너블에게 에테르를 흡입시킨 뒤 통증없이 목에서 종양을 제거했다. 하지만 에테르를 사용하면서도 외과 수술에서 마취법의 가치를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다가 1849년 마침내 에테르에 대한 실험을 발표했다.

핀라이[편집]

Carlos Juan Finlay(1833-1915)

쿠바의 의사. 황열이 이집트 모기에 의해 전염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증명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황열병위원회에서 1900년에 쿠바의 아바나를 방문했고, 자신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현대의학으로의 발전[편집]

現代醫學-發展

19세기 후반에 의학을 변혁한 것은 병원미생물학(病原微生物學)이다. 전염병의 실체를 병원 미생물로서 포착하는 병원론(病原論) 의학은 외래적·특이적·국소적 요인의 중시(重視)이며, 근대 외과학(外科學)의 방법론적 사고(切除의 論理)와 공통의 장(場)을 가진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전체론적 의학의 사고는 자취를 감추고, 질병을 독립된 실체로서 포착하려는 사고(思考)가 전면(前面)으로 나오게 되었다. 당시, 산업혁명에 의한 자본주의 사회의 눈부신 진전은 의학의 대상인 질병 구조를 격변시켰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열대·아열대권의 식민지 경영에 의하여 열대병이 유럽으로 침입해 들어옴으로 인한 질병환경의 열대적 직결이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병원론 의학이 기대되고, 특히 전제(專制) 통일국가 수립을 목표했던 독일에서는 의사(醫事)경찰을 표방하고 국가적 위생관리 제도를 발족시켜 위로부터의 방역대책에 이론적 근거를 주었으며, 또한 자본주의적 후진성 극복을 위하여 많지 않은 열대권 식민지 경영에 보다 유효한 수단으로서 중시되었다. 이와 같은 국가적 요청하에 독일의 병원미생물학은 정치적 경쟁국이었던 프랑스와의 경합에서 비약적 발전을 이룩하여, 독일 의학을 첨단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과거 1세기간의 급성 전염병 사망률의 격감이자 평균 수명의 연장은 근대 의학의 승리를 증명하는 자료로서 흔히 거론된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 직접적인 의학의 진보로 돌릴 만한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개인 생활의 향상·환경의 개선 등의 사회·경제적 요인의 반영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사실 병원론 의학이 낳은 유력한 무기(백신·항독소 혈청·화학요법제·항생 물질 등)가 전염병 극복에 유효하다는 것은 인정이 되어도, 그 유효성에는 이른바 '자연치유력(自然治癒力)'에 대한 기대, 협력이 걸려 있다. 확실히 급성병의 사망률은 줄었으나, 만성병으로의 이환율은 늘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 의학에서는 히포크라테스 의학 이래의 직관적·포괄적 개념 그대로 머물러 있던 자연치유력의 과학적 해명이 중요하게 된다. 그런 경우 자연치유력의 '자연'을 생체에 깃들이는 자연이라고 하는 한, 그 기구적 해명의 방향은 세포의 수준에서 분자 수준으로의 생화학적 접근이 되는데, 그것이 생체를 에워싼 자연까지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인간 생활의 터전·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문제로 삼아야만 비로소 질병의 극복과 건강의 적극적 증진이 가능하다는 논리가 나오게 된다. 따라서 현대 의학의 지향은 전체론적 의학 사고의 재인식이며, 그것은 사회적 견지를 포함하는 의학을 중시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적어도 피르호가 100년도 더 앞서서 '의학은 사회과학이다'라고 갈파했던 방향이었다.

혈액의 연구[편집]

血液-硏究

혈액의 성분과 응고와 같은 생리학적 연구는 수많은 연구자들에 의하여 점차 밝혀져 왔는데, 혈청이 의료상 주목되기 시작한 것은 베링(E. Behring)과 같은 사람들에 의한 항독소 혈청의 등장에 의한 것이었다.

혈청요법(血淸療法)은 병리학이 국소(細胞)에만 정착한 것을 다시 체액에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한 결과, 혈청 연구는 혈청 진단·혈청진(疹)·혈청병(血淸病)을 거쳐서 알레르기 개념의 도입에로 이르고, 면역학은 병원균에서 비약하여 새로운 전개가 시작되었다. 외과(外科) 기술의 진전은 잃어버린 혈액의 보급을 위하여 수혈법의 필요를 환기시킨다. 수혈법은 란트슈타이너의 동종(同種)혈액 응집반응 연구에 의한 혈액형의 발견이 기술적 공헌을 했다.

호르몬의 연구[편집]

-硏究

개개 장기의 생리학적 연구는 특정 질환과 특정 장기의 관계를 내분비 장해에 의한 탈락 중심으로 포착하고, 그 치료에 각각의 내분비샘 에키스의 유용성이 인정되어 왔으나, 20세기로 들어와서는 내분비샘 성분의 순수 분리와 합성이 활발해지고, 그것들은 호르몬(1905년 E. Starling이 명명)으로서 일괄적으로 정의(定義)되었다. 그 처음은 부신수질(副腎髓質)의 아드레날린(1901)이며, 이어서 갑상샘의 사이로키신(1915년, E. C. Kendall, 합성은 1927), 스테로이드 호르몬(성 호르몬·부신피질 호르몬)이 이에 계속된다. 그들 호르몬의 분리는 거꾸로 생리학의 인식을 넓히는 것으로도 된다. 부신피질 호르몬과 셀리에(H. Selye, 1907-1982)의 스트레스 학설의 관계 등은 특필할 만한 예라 하겠다.

대뇌생리학[편집]

大腦生理學

소화샘(腺) 생리의 연구에서 발전한 파블로프(I.Pavlov)의 조건반사의 발견은 그 후의 대뇌생리학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신경 생리의 전기(電氣)현상에 대한 연구는 뮐러의 문하인 뒤 보아 레몬(1818-1896)이 개척한 것인데, 1929년 베르거(1873-1941)에 의한 사람의 뇌(腦)의 동작(動作) 전류의 증명은 뇌파(腦波)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여, 뇌파 연구는 뇌 생리학·정신 신경병학에서 중요한 것이 되었다.

영양의 연구[편집]

營養-硏究

근대 영양학(營養學)은 군대·공장 노동자·수인(囚人)들에 대한 급식의 필요성이 그것을 촉진시킨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이전에는 목축에서의 가축의 사료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라부아지에(Ravoisier)에 의하여 증명된 에너지대사의 연구는, 19세기에 들어와서 비쇼프(T. Bischoff, 1807-1882)문하인 포이트(1831-1908)와 페텐코페르(M. Petten­kofer, 1818-1901) 같은 이들에 의하여 심화되어, 프라우트(1785-1850)의 3대 영양소(단백·지방·함수탄소)에 무기염류를 추가한 리비히의 '4대 영양소'의 대사에 대해서도 연구가 진전되고, 표준 식량은 '포이트의 식이비(食餌比)'로 제창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순수 사료에 의한 장기 동물 사육 실험은 포이트 이래의 기도(企圖)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그 이유의 해명은 개개의 영양소의 생리작용의 연구를 추진시켰지만 미해결인 채 남겨졌고, 여기에 비타민 발견의 온상이 마련되었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동남아 제국에서 많이 발생하는 각기(脚氣)의 연구가 도화선이 되어, 비타민B1(1910)을 선두로 하여 속속 비타민이 발견되고, 생화학은 비타민 결핍증과 식물(食物)에 관계하여 일어나는 질환과의 관계를 해명해 가고 있다. 바야흐로 문명국에 관한 한, 영양학으로서는 결핍 문제보다도 편중된 과잉 문제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될 상태로 돌입하고 있으나, 반면 기아(飢餓) 문제는 아직도 많은 지역에 남아 있다.

화학요법과 항생물질의 발견[편집]

化學療法-抗生物質-發見산업혁명의 부산물인 콜타르(coal tar)의 유기화학적 연구에서 태어난 합성염료는, 화학요법제 계보의 기점(起點)을 이루는 것으로서 의학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이다. 에를리히(P. Ehrlich)의 화학요법 연구의 실현은, 그것이 당시 신흥 독일의 합성 염료계가 흥륭기를 맞이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 그리고 당시의 모든 연구의 눈이 열대성 병원(病原) 탐구로 집중되고 있었다는 연구 재료 면에서의 2중의 행운에 힘입은 바 크다고 볼 수 있다. 에를리히의 연구 성과에 이어 도마크(G. Domagk, 1895-1964)에 의해 세균성 감염증에 대한 화학요법제의 발견(1932)이 이루어져, 1930년대는 설파제 시대로서 일기원(1紀元)을 이루었다. 뒤이은 1940년대는 항생물질의 시대로 보아도 좋다. 최초의 항생물질은 플레밍이 발견한 페니실린이지만, 항생 물질 요법의 예견은 왁스먼(1888-1973) 문하의 뒤보스(1901- ? )의 다위니즘적 발상에 의한 것이었으며, 왁스먼의 스트렙토마이신의 발견은 이 연구 발생의 성과로서 파악된다.

메디컬 일렉트로닉스로의 진전[편집]

medical electronics-進展물리학적 기술의 근대의학에 대한 공헌은 뢴트겐(R

ntgen)에 의한 X선 진단법의 도입(1895)과 치료가 최초의 획기적 진보라 할 수 있다. 진단기기(診斷器機)로서 광학계(光學系)의 응용인 검안경·식도경(食道鏡)·기관지경·위경(胃鏡)·방광경(膀胱鏡)과 같은 내시경(內視鏡)에서 위(胃)카메라와 같은 것이 개발되고, 미약한 전류 변화를 기록하는 심전도계(心電圖計)·파뇌계·근전도계(筋電圖計), 그리고 최근 비약적 발전을 보여주고 있는 각종 엘렉트로닉스는 의학 연구 분야에 그 위치를 착실하게 증대시키고 있다.

의학 각 분야의 분화와 발달[편집]

醫學-分野-分化-發達19세기는 현대 의학의 성격을 지닌 새로운 전문 분야의 질적인 발전 시대이며, 20세기는 전문분과의 양적(量的) 발전의 시대로 불린다. 내과·외과라고 하는 호칭까지도 세분화가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향이 올바른 의학의 발전에서 필연적인 요구인지 어떤지는 재검토를 요하는 문제이다. 이런 경우, 의과학(醫科學)연구에서의 전문화와 의료의 분야에서의 분과와는 구별되지 않으면 안된다. 의료 분과를 기술의 진보에 의한 분업으로 생각하는 데에는 이론(異論)이 있다. 의사와 여러 의료부문 직종과의 사이에 의료 분업(分業)은 있어도, 의사간(醫師間)의 기술 분업이라고 하기 위해서는 다른 형태로서의 재편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분업화 경향을 의학의 진보이기는커녕 역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설마저 나오고 있다.

의학·의료의 올바른 발전을 위하여 히포크라테스 이래의 의학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고, 앞으로의 진로를 터 나아가는 노력과 결의가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란트슈타이너[편집]

Karl Landsteiner(1868-1943)

오스트리아의 병리학자. 빈 출생. 빈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891년에 졸업하였다. 그 후 취리히·뷔르츠부르크·뮌헨 등의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여 빈대학의 조수가 되었다. 다시 병리생태학을 전공하여 1911년 병리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1922-1939년 미국 록펠러의학연구소의 병리학 교수를 지냈다. 1901년부터 사람의 혈액군(血液群)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여 ABO식(式) 혈액형을 발견, 수혈법을 확립하였다. 또 1940-1941년에는 A. 비너와 협동하여 Rh인자(因子)를 발견하였으며, 소아마비 초기에 유효한 혈청을 개발하고, 매독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1930년 혈액형에 관한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도마크[편집]

Gerhard Domagk(1895-1964)

독일의 의사. 최초의 술파제인 프론토실이라는 화학물질이 체내에서 인후염, 성홍열, 농가진과 같은 감염증을 일으키는 연쇄상구균을 없애는 데 효과가 있음을 밝혔다. 발견에 대한 공로로 193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베링[편집]

Emil von Behring(1845-1917)

독일의 세균학자. 한스도르프 출생. 동물에 디프테리아 독소를 주입한 후 생성된 항체를 이용하여 항독소 혈청을 개발했다. 발견은 많은 소아 질환의 치료에 획기적인 역할을 했다. 베링은 또한 파상풍의 항독소 혈청을 만들었으며, 소가 결핵에 걸리지 않도록 예방하는 백신도 개발했다. 디프테리아의 항독소 혈청을 개발한 공로로 1901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파블로프[편집]

Ivan Petrovich Pavlov(1848-1936)

러시아의 생리학자, 조건반사의 발견자. 리야잔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과대학에서 공부한 후, 외과의학교(外科醫學校, 후일의 陸軍醫學校)에서 보트킨의 내과학 조수를 지내면서 학교를 졸업했다. 이어서 독일에 유학하여, 브로츨라프의 하이덴하인(1864-1949)에게 내장 생리학을, 라이프치히의 루트비히에게서 순환계 생리학을 배우고, 귀국 당초에는 순환계를 지배하는 신경 생리 연구에 종사했다. 이윽고 소화샘(腺)의 실험을 함으로써 자율신경과의 관계를 밝혀냈다. 이 업적에 의하여 1904년 노벨생리학·의학상을 받았다. 그 후 타액샘(唾液腺) 분비를 기초로 하여 조건반사학을 발견, 대뇌에서의 주관적 정신작용의 과정을 순객관적·생리적으로 구명하는 데에 성공하고 조건반사학을 수립하여 일파(一派)를 이룩하였다.

1917년의 10월혁명의 내전 중에는 국외로 망명하지 않고 연구를 속행했던 일이 레닌에게 인정되어, 그 생활과 연구에 특별 조치가 강구되고, 만년을 조건반사학 완성에 바쳤다.

에를리히[편집]

Paul Ehrlich(1854-1915)

독일의 미생물학자·면역학자·화학요법의 창시자.

슐레지엔에서 출생. 브로츨라프, 스트라스부르, 프라이부르크, 라이프치히의 각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청년 시대부터 색소에 의한 조직 염색에 대한 연구를 추진하고, 가열 염색 결핵균 표본이 기연(機緣)이 되어서 코흐의 연구소에 초빙되어 면역학(免疫學) 연구에 종사했다. 뒤에 베링의 청에 응하여 항독소 혈청 제조 기술의 개량에 성공, 베를린 교외 스테그리츠 국립 혈청검정 겸 혈청연구소 소장이 되었으며, 이어서 이 연구소의 규모를 확대하여 이전(移轉)한 프랑크푸르트의 실험치료법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그 동안 혈청 검정법·면역 단위를 확립하여 오늘날 각국에서의 검정법의 규범을 만들었다. 또 면역 반응의 이론으로서 측쇄설(側鎖說)을 제창했다. 이와 같은 면역학에 대한 업적으로, 1908년 메치니코프(1845-1916)와 함께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1906년, 스파이엘 부인의 기증에 의하여 연구소를 설립하고, 여기서 색소요법으로부터 화학요법에로 연구를 추진하고, 1910년 606호(살바르산)을 창제하여 화학요법의 길을 개척했다.

메치니코프[편집]

Llya Llich Mechnikov(1845-1916)

러시아의 생물학자. 유대계 러시아인으로 하르코프 출생. 하르코프대학 졸업 후 원형질을 연구하기 위하여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 입학하였다. 1870년 오데사대학 교수를 거쳐, 1888년에는 파스퇴르연구소에 들어가 파스퇴르 밑에서 세균학과 면역학을 연구하다가 백혈구의 식균 작용과 면역과의 관계를 발견하였다. 또한 인간의 노화 현상을 연구하여 유산균을 먹으면 노화가 방지된다고 주장하였다. 1908년 에를리히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골지[편집]

Camillo Golgi(1844-1926)

이탈리아의 해부학자이자 병리학자. 1873년 현미경 연구를 위해 질산은을 이용해서 조직을 염색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는 골지체와 축색 돌기를 가진 척수 후근의 신경세포인 골지세포를 발견했으며, 힘줄과 근육에 있는 신경말단의 구조를 밝혔다. 또 1886년에는 말라리아원충의 생활사와 구조를 밝혔다. 신경계의 구조를 연구한 공로로 190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플레밍[편집]

Sir Alexander Fleming(1881-1955)

영국의 미생물학자·페니실린의 발견자.

스코틀랜드 남서부 아이어샤이어 농장주 아들로 출생. 런던의 성메리 병원 부속 의학교에서 공부하고 동 병원 세균부에서 라이트(A. Wright, 1861-1947)에 사사(師事), 그의 오프소닌(調理素)설에 입각하여 식균작용 연구에 종사하며 생체의 자연 치유력의 가치를 재인식, 리조팀의 항균작용을 발견(1922)했다. 이것을 발판으로 페니실린을 발견(1929)했으나 유능한 화학자의 협력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페니실린의 추출에 성공하지 못하고, 더구나 그 수년 후에 출현한 설파제(sulfa劑) 요법과 스승인 라이트의 면역요법(免疫療法) 고집 등의 악조건이 겹쳐 햇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10년 후에 플로리(1898-1968)와 체인(1906-1979)을 중심으로 하는 옥스퍼드대학 연구진에 의하여 동결건조법(凍結乾燥法)에 의한 제조 정제(精製)가 효력의 재인식을 가져와 제2차 대전하에서의 영국과 미국의 공동 연구체제에 의해서 실용화되어 질병 치료에 신기원을 획득하는 항생물질 요법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 업적에 의하여 1945년 플로리, 체인과 함께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 전해에는 영국 국왕에 의하여 나이트의 작위가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