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조선후기의 사상/조선후기의 종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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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종교사상〔槪說〕[편집]

18세기로부터 19세기에 걸친 약 200년 동안에 우리나라 종교계의 움직임도 다른 문화계의 움직임과 아울러 크게 변하고 있었다. 영조(英祖, 재위 1724∼1776)는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을 철저히 실천하였으므로 그 신도들은 더욱 천대를 받게 되었다. 이제 여자신도까지도 서울 성안으로 들어올 수 없게 되었으며, 위로는 유교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고 밑으로는 사회 혼란을 타 고개를 드는 민간신앙(民間信仰)과 새로 들어온 그리스도교(西學)와 힘겨운 경쟁을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불교는 사회의 실정에 적응하기 위해 혹은 유교의 요소를 혹은 민간신앙의 요소를 끌어들이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시대가 흐를수록 현실적인 힘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 밑에서도 지식과 덕행이 높은 훌륭한 스님도 있기는 하였으나 대체로 역시 신도들의 질이 낮아져 스스로 다시 일어날 힘도 약했다. 유교는 지배층에 의해 계속 장려되었으나 지배층의 분열과 부패로 말미암아 점점 민중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지배층도 성리학설(性理學說)이나 예론(禮論)에 지나치게 휘말려 유교의 종교적인 측면을 거의 잊고 오로지 이론을 위한 이론을 일삼게 되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살기 어려워 허덕이고 사회제도는 뿌리로부터 흔들리고 있던 사회 실정은 유교에 대하여 새로운 반성을 촉구하였다. 이리하여 새로 나타난 학풍이 곧 실학(實學)이다. 이 실학은 크게 변하고 있는 사회현실을 직시하면서 민생을 위한 사회개혁에 관한 구체적인 현실문제를 조사 연구하였다. 드디어 실학은 종교문제에 있어서도 새로운 입장을 보이게 되었다. 즉 '천(天)은 곧 이(理)다'라는 주자의 성리학(性理學)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천은 곧 신(神)이다'라고 내세우게 되었다.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성리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옛날에 사람들은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천(天)을 섬기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신(神)을 섬겼다. 지금은 사람들이 천을 이(理)라 하고 신을 공용(功用)이라 하고 혹은 조화(造化)의 자취라고도 하고 2기(二氣)의 양능(良能)이라고도 한다. 그 마음이 어둡고 그 앎이 흐려 마치 지각이 없는 사람들 같다"(<中庸講義>)고 하여 천을 이라고 풀이하고, 귀신을 음양(陰陽)이라는 2기의 운동이라고 설명하는 성리학을 '지각이 없는 사람'의 흐리멍텅한 생각이라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그는 천을 정성스럽게 섬겨야 하는 그 무엇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정약용이 인격적이고 유일한 하느님(天)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정약용은 이러한 종교적 입장을 밝히고 원시유교(原始儒敎)부터 증거를 끌어다가 애써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점에서는 그가 그리스도교(西學)로부터 다소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영향 이상으로 우리 민중의 종교적 심정을 반영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원래 실학은 유교 안에서 일어난 새로운 학풍인데 특히 민중의 실정을 잘 살피고 민족적인 자각을 노리는데 그 특색이 있다. 이러한 실학이 종교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 민중의 종교적 심정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풀이할 수 있다면 정약용은 그 당시의 우리 민중의 종교적 심정을 반영하여 어떤 인격적인 하느님을 내세웠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곧 우리나라 유교 안에서 어떤 인격적인 신을 찾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실학은 곧 우리나라의 새로운 유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유교뿐이랴. 이 무렵의 우리 나라 불교에 있어서도 사정은 비슷하였다. 조선의 지배층인 임금과 선비들이 불교를 철저히 배척하였지만 특히 궁중과 사대부(士大夫)의 부녀자들에게 의해 불교는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것은 불교가 주로 신분이 높은 집안의 부녀자와 민중속에 뿌리를 박았다는 것을 뜻한다. 과연 이러한 사람들이 불교를 어떻게 믿었을까? 이들은 거의 왕조나 집안 혹은 개인의 복을 부처님에게 빌고 있었다. 심지어 아들을 낳게 하여 달라고 비는 따위의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부처님이 화와 복을 가려 내려줄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믿는 것은 소박한 신도들뿐이 아니었다. 정조대의 유명한 스님 의소(義沼)는 천당과 지옥이 현실적으로 있다고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천당은 수미산 위에 있고 철위산(鐵圍山) 사이에 있다. 내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이것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仁嶽集>卷三). 그는 또 부처님이 위대하심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 백 억의 화신(化身)이 흩어져 있어 쳐다보면 앞에 있다가 어느듯 뒤에 있게 되어 헤아릴 수가 없다. 그 본체로 말하면 오직 하나의 참된 존재일 뿐이지만 그 활동하는 쪽으로 본다면 천 백 억에 그치지 않는다"(同上) 이것은 부처님을 전지(全知) 전능(全能)한 인격적 신이라고 보았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것을 불교가 우리 민중의 종교적 심정을 반영한 하나의 실례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우리 민중의 종교적 심정은 전형적으로 인격적인 신을 믿는 천주교(天主敎)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본래 서양문화의 전통 속에서 자라난 이 천주교는 우리의 문화전통과는 매우 다른 이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유교를 신봉하는 지배층의 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민족적인 종교심정을 반영한 동학(東學)이 나타나 이에 맞서게 되었다. 이러한 천주교의 전래와 동학의 출현으로 우리나라 종교계는 매우 복잡한 현상을 드러냈다. 이 이외에도 조선 말기의 종교계에서 주목되는 몇 가지 현상을 들 수 있다. 대체로 조선 중기 이후로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불교계는 선종(禪宗)을 그 주류로 삼고 있었다. 선종은 원래 이론보다 좌선(坐禪)에 힘쓴다. 그런데 긍선(亘璇, 1767∼1852)이 <선문수경(禪文手鏡)>을 지어 색다른 선의 이론을 편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뒤 한동안 선에 관한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는 염불(念佛)을 주로 하는 미타신앙(彌陀信仰)이 눈에 띄게 성하였다. 조선이 말기로 접어들자 조선사회는 점점 방향감각을 잃게 되어 삶에 허덕이는 민중은 <정감록(鄭鑑錄)> 같은 알쏭달쏭한 예언서(豫言書)에 귀를 기울이면서 앞으로 올 새 사회에 한가닥 희망을 걸기도 하였다.

천주교의 전래[편집]

天主敎-傳來

17세기로 접어들자 중국을 통해 천주교의 책들이 들어와 우리 나라 지식층의 호기심을 자아내게 되었다. 그 뒤 정조(正祖) 때부터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천주교의 신앙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서양 신부(神父)로부터 세례(洗禮)를 받고 돌아온 뒤부터 활기를 띠게 되었다. 양반 중에서는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남인, 계급적으로는 억압받는 중인(中人)이나 상민(常民) 그리고 사회적으로 차별대우를 받는 부녀자들이 천주교를 많이 믿었다. 천주교가 이렇게 퍼지자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우리 사회는, 특히 지배계층은 커다란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더욱이 천주교의 신도들이 유교적인 예식을 거부하게 되자 지배층의 피해의식은 이제 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나라에서는 천주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것을 탄압하였다. 1786년(正祖 10年)부터 북경에서 책들을 수입하는 것을 금하였고, 1791년에는 어머니 상례(喪禮)에 신주(神主)를 없앤 윤지충(尹持忠)을 사형에 처했다. 이렇게 탄압하였지만 그 신도는 늘어만 갔다. 1795년에는 처음으로 정식 성직자(聖職者)를 맞이하게 되었다. 곧 이 해에 중국인 신부(周文謨)가 처음으로 서울에 들어와 참된 교회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 때에 전국의 신도는 4,000명을 넘었다. 신부를 맞이한 천주교회는 그 눈부신 활동으로 1800년까지는 10,000명의 신도를 거느리게 되었다. 이렇게 천주교회가 큰 발전을 보게 된 것은 한편으로는 정조(正祖)가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썼기 때문이었다. 정조가 돌아가자 사정이 갑자기 바뀌어 1801년(辛酉)에는 천주교에 대해 무서운 박해가 내려졌다. 많은 신도들이 혹은 사형을 당하고 혹은 옥사(獄死)하고 혹은 유형(流刑)을 받았다. 이 때에 황사영(黃嗣永)이 몰래 백서(帛書)를 북경의 서양인 주교(主敎)에게 보내려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당한 사건도 있었다. 이 백서에는 무력으로 정부를 위협해서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이 적혀 있어서 정부를 더욱 자극하였다. 이 박해로 300여명의 천주교 신도가 피를 흘리게 되었다. 이 사건을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당파싸움이 얽혀 있었다. 곧 정권이 바뀌어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가 시작됨에 따라서 천주교에 대한 심한 탄압은 없었다. 그 동안에 우리나라에는 독립된 교구(敎區)가 세워졌고(1831) 처음으로 서양사람의 신부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교구가 세워진 뒤에도 처음의 주교는 입국을 못한 채 돌아가고 2대의 주교가 비로소 1838년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 교구가 처음으로 그 조직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에 교회가 창설된지 54년, 교구가 설정된지 7년만의 일이다. 이리하여 1839년 초에는 전국에 9,000여명의 신도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해(己亥)에 또다시 이 무렵에 정권을 잡고 있던 풍양 조씨(豊壤趙氏)에 의하여 큰 박해를 받았다. 그 결과 3인의 서양인(프랑스인) 신부를 비롯하여 200여명의 신도가 순교의 피를 흘렸다. 이것이 곧 '기해사옥(己亥邪獄)'이다. 그 뒤에는 마카오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여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신부가 된 김대건(金大建)이 귀국하여(1845) 큰 활약을 하였다. 말과 정이 통하는 그의 가르침으로 신도가 더욱 많이 늘게 되었다. 이렇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교구에서는 청나라에서 때를 기다리는 두 신부를 맞아들일 계획을 세웠다. 1846년(丙午)에 바닷길로 두 신부를 맞아들일 길을 찾고 있던 김대건 신부는 우연히 관헌에 잡히고 그 계획이 발각되었다. 이와 관련되어 20여명의 신도들도 잡혀 결국 김신부 및 남녀신도 8명이 순교하였다.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다시 안동 김씨가 집권하여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거의 없었다. 이리하여 많은 신부들이 뒤를 이어 입국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서 신도도 많이 늘어 1850년에는 11,000여명의 신도를 거느리게 되었다. 1856년에는 충청도 제천(提川)에 신학교가 세워졌다. 1863년에는 20,000을 헤아리는 신도를 갖게 되고 프랑스로부터 많은 자금을 얻어다가 각종의 사업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대원군(大院君)이 정권을 잡자 천주교에 대한 가장 심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곧 1866년(丙寅)으로 접어들자 9명의 신부를 비롯하여 많은 신도들을 잡아들였다. 이렇게 시작된 박해는 1871년에 이르기까지 외국함선이 내침할 때마다 거듭되어 순교한 신도는 10,000명에 가까웠다. 이것을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 한다. 이렇게 천주교를 가장 극심하게 박해하던 대원군도 1873년 11월에 세도를 잃고 물러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조선의 대외정책도 달라졌다. 그러나 1876년(丙子)에 일본과 수호조약(修好條約)을 맺을 때에도 천주교를 들여오지 못한다는 금지조항을 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선말의 선론[편집]

朝鮮末-禪論

19세기 전반에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가장 이름이 높았던 중(僧) 긍선(亘璇)은 <선문수경(禪文手鏡)>이라는 책을 지어 선에 관한 좀 색다른 이론을 내세웠다. 종래에 중국에서는 선을 조사선(祖師禪)과 여래선(如來禪)으로 나누어 보는 사상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이러한 사상이 소개되어 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조사선이란 석가모니가 샛별을 보고 깨달았으나 미흡함을 알고 다시 진귀조사(眞歸祖師)를 찾아 그로부터 전하여 얻은 선이라고 풀이되었다. 이에 대하여 여래선은 석가모니가 깨닫기는 하였으나 아직 미흡한 경지에 있을 때 가르친 선이라고 풀이되었다. "이를테면 여래(석가모니)가 깨달은 것을 여래선이라 하고 조사(眞歸祖師)가 전한 것을 조사선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여래선은 조사선보다 못하다" <禪源遡流>. 이 밖에도 우리나라에서는 격외선(格外禪)이니 의리선(義理禪)이니 하는 따위의 이름도 떠돌았다. 이러한 사정 밑에서 긍선은 선을 조사선·여래선·의리선으로 나누었고 이것은 배우는 사람이 타고 난 능력의 정도, 곧 상근(上根)·중근·하근에 따르는 등급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른바 '임제의 삼구(臨濟三句)'를 여기에 배당하였다. 그에 의하면 임제의 제1구는 상근(上根)의 선비가 조사선을 터득한다는 것이고 제2구는 중근의 선비가 여래선을 터득한다는 것이고 제3구는 하근의 선비가 다만 의리선을 이해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선은 모두 삼구 속에 있다" <禪文手鏡>. 조사선·여래선·의리선의 세 가지 선이 모든 임제의 삼구 속에 있다는 것이다. 긍선은 조사선과 여래선을 묶어 격외선(格外禪)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의리선이 가장 낮은 단계의 선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주장하는 긍선의 의도는 교종(敎宗)보다 선종(禪宗)이 훌륭하다는 것을 강조하자는데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의리선을 물리치고 여래선을 넘어섬으로써 글자와 언어를 초월한 참된 선이 곧 조사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래선 이외에 따라 의리선이 있고 이것이 여래선보다 낮은 단계의 선이라는 주장은 매우 독특한 것이었고 더욱이 세 가지 선에 임제의 삼구를 배당하는 것도 매우 신기한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하여 반대이론을 펴는 중이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의순(意恂 1786∼1866)과 홍기(洪基 1822∼1881)가 유명하다. 대체로 그 반대의 요지는 여래선 이외에 따로 의리선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 가지 선이 아니라 두 가지 선을 주장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대하여 긍선의 제자이며 4세 법손(法孫) 유형(有炯 1824∼1889)은 <선원소류(禪源遡流)>라는 저서를 통해 의순과 홍기의 주장을 반박하고 긍선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그 뒤 축원(竺源)(1861∼1926)은 <선문재정록(禪文再正錄)>이라는 책을 지어 다시 긍선과 유형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그도 세 가지 선이 아니라 두 가지 선을 주장하는 입장이 옳다고 단정하였다. 그는 동시에 이러한 논쟁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경계하였다.

동학의 출현[편집]

東學-出現

동학은 1860년(庚申)에 교조 최제우(崔濟愚)(1824∼1864)에 의해 세워진 새로운 종교다. 최제우(호는 水雲)는 안으로는 백성들이 가난과 불안 속에서 허덕이는 것을 보고, 밖으로는 서양의 놀라운 무력이 밀어닥치는 것을 보면서 큰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러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힘을 갈망하고 찾아 헤매던 끝에 드디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새로운 종교를 내세우게 되었다. 그는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 퍼져 가는 그리스도교 곧 서학(西學)에 대항한다는 뜻에서 그의 종교를 동학이라고 불렀다. 동학은 주로 가난과 불안 속에서 허덕이고 있던 민중 속으로 퍼져 갔다. 하느님만 모시면 조화도 부릴 수 있고 만사를 다 알 수도 있다고 하는 동학이 민중에게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동학의 종교사상은 최제우가 지은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에 나타나 있는데 그 당시의 민간신앙(民間信仰)이 반영되어 민중에게 친근함을 느끼게 했다. 동학은 불교(佛敎)도 유교(儒敎)도 이미 운이 다하였다고 대담하게 외쳤으므로 기성종교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특히 유교를 신봉하는 지배층의 지목(指目)을 받았다. 드디어 정부는 동학을 엄금하는 방침을 세우고 교조를 비롯한 주동자들을 체포하였다. 이리하여 교조(敎祖) 최제우(崔濟愚)는 1864년에 처형되어 순교(殉敎)의 피를 흘렸다. 그 뒤에는 최시형(崔時亨)이 살아 남아 지하에서 포교활동을 펴게 되었다. 그는 드디어 제2대 교주로서 포교와 교회조직에 힘썼다.

조선말의 미타신앙[편집]

朝鮮末-彌陀信仰

불교가 이 땅에 들어 온 뒤에 염불(念佛)을 신앙의 일과로 삼는 미타신앙(彌陀信仰)도 함께 이 땅에 들어왔다. 그러나 조선말에 이 신앙이 특히 성하였다. 많은 절에는 염불당(念佛堂)이 있어서 만일회(萬日會)를 열고 염불을 집중적으로 하였다. 만일회란 뜻을 같이 하는 신도들이 10,000일을 정하여 놓고 염불을 하는 모임을 말한다. 이러한 만일회가 조선말에 와서 부쩍 늘었다는 것이 주목된다. 그 중에서도 건봉사(乾鳳寺)와 망월사(望月寺)의 만일회가 유명하다. 특히 건봉사에서는 전후 세 번에 걸쳐 대대적인 만일회를 열었다. 처음은 1801년에 시작하여 1834년에 마쳤고 다음은 1850년에 시작하여 1863년에 마쳤다. 세 번째는 1881년에 시작하였다.

의소[편집]

義沼 (1746∼1796)

조선후기의 중 일명 의첨(義沾), 호는 인악(仁岳), 자는 자의(子宜). 18세에 중이 되어 벽봉(碧峰)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서악(西岳) 등에게서 배웠다. 영조 44년 벽봉에게 돌아와 법을 이어받고, 설법, 상언(尙彦)에게 가서 <화엄경(華嚴經)> <선문염송(禪門拈頌)>을 배운 다음, 비슬산(琵瑟山) 등을 유력하면서 불경을 강의하였다. 정조 14년 수원 용주사(龍珠寺) 창건시 증사(證師)로서 <불복장원문경찬조(佛腹藏願文慶讚疏)> 등을 지었다. 저서로 <인악집(仁岳集)>과 수편의 경론(經論) 사기(私記)가 있다.

긍선[편집]

亘璇 (1767∼1852)

조선후기의 중. 호는 백파(白坡), 성은 이(李). 12세에 고창 선운사(禪雲寺)의 시헌장로(詩憲長老)에게서 중이 되고, 용문암(龍門庵)을 거쳐 영원암(靈源庵)에 이르러 상언(尙彦)에게 서래(西來)의 종지를 배우고, 귀암사(龜岩寺)에서 회정(懷情)의 법통을 이어 받아, 백양산 운문암(雲門庵)에서 개당(開堂)하였다. 순조 30년 귀암사로 옮겨 절을 중건, 선강법회(禪講法會)를 열고 선문(禪門) 중흥의 종주로 추앙받았다. 저서로 <선문수경(禪文手鏡)> <5종강요기(五宗綱要記)> 등 수편이 전한다. 선운사에 김정희(金正喜) 찬의 비(妃)가 있다.

선문수경[편집]

禪文手鏡

조선후기의 고승 긍선(亘璇)의 저서. 5종(宗)의 강요와 어구를 임제(臨濟)의 3구에 배대하여 설명하고 도표로 만든 것. 긍선은 일대의 선교(禪敎)를 임제의 3구로서 3분하여, 제1구를 얻으면 불조(佛祖)를 스승으로 삼을 수 있고, 제2구를 얻으면 인천(人天)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겠으나, 제3구는 자기 한 사람도 구제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6조(祖)대사 이후의 5가(家) 종풍을 규정하여 임제종을 제1의 조사선(祖師禪), 위앙( 仰)·법안(法眼)·조동(曹洞) 3종은 제2구인 여래선(如來禪)이라고 하고, 제3구의 의리선(義理禪)은 변계망정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다. 이것은 일대 논쟁을 낳게 되어 그의 주장을 전면으로 반박한 것이 초의(草衣) 의순(意恂)의 <사변만어(四辨漫語)>이다.

이승훈[편집]

李承薰(1756∼1801)

조선 정조 때의 천주교인. 교명은 베드로, 참판 동욱(東郁)의 아들, 이가환(李家煥)의 생질, 정약용의 매부. 정조 4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 학문에 전심타가 천주교인 이벽(李蘗)을 만나 입교를 결심하였다. 정조 7년 서장관인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가서 북경 남천주당(南天主堂)에서 교리를 익히고, 이듬해 북천주당에서 예수회의 그라몽(Grammont, Louis de)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신자가 되었다. 이해 교리서적·십자고상(十字苦像)을 갖고 귀국, 정조 9년 명례동(明禮洞)의 김범우(金範禹) 집에 조선교회를 건립, 전도하다가 이듬해 발각되어 배교(背敎)하고 척사문(斥邪文)을 공표했다. 그러나 정조 11년 복교(復校)하여 자신이 주교(主敎)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 정조 13년 평택현감으로 선정을 베풀기도 하였다. 이듬해 조상제사도 철폐하라는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밀령을 받고 두 번째 배교, 그후 다시 복교하였으나 정조 15년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천주교 서적을 발간했다는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면서 투옥, 옥중에서 제3의 배교를 하여 석방되었다. 정조 18년 주문모(周文謨)신부 밀입국 사건에 관련, 예산에 유배되었다가 1801년 '신유교난'시에 취조받고 처형당했다. 철종 7년(1856) 아들의 탄원 때문에 신원되었으나, 이어서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내었다.

윤지충[편집]

尹持忠 (1759∼1791)

조선 정조 때의 천주교인. 교명은 바오로, 정약용의 외사촌, 진산(珍山) 출신. 정조 7년 진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정약용의 가르침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 정조 13년 북경으로 가서 견진성사(堅振聖事)를 받고 귀국, 박해가 심하여 진산 시골집에서 신주(神主)를 태우고 신앙을 지켰다. 정조 15년 모친상에 혼백 및 위패를 폐하고 천주교의식으로 지낸 것이 고발당해 일시 피신하였다가 자수, 전주(全州)에서 불효·불충·악덕의 죄로 사형되었다. 이것을 진산사건이라고 하는 바, 이것을 계기로 천주교도의 대박해가 시작되었다.

김대건[편집]

金大建 (1822∼1846)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교명은 앙드레, 아명은 재복(再福), 제준(濟俊, 익나티우스)의 아들. 충남 내포(內浦) 출신. 헌종 2년 프랑스 신부 모방(Maubant)에게 영세를 받고 상경, 중국어를 배운 뒤에 예비신학생으로 모방 신부의 소개장을 갖고 중국에 갔다.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칼레리 신부로부터 신학·프랑스어·중국어·라틴어를 수학, 마카오의 민란을 만나 두 번이나 마닐라에 피난한 후, 매스트로 신부 문하에서 신학·신철학(新哲學)을 연구하였다. 1842년 수업을 끝내고 프랑스의 동양함대 제독이던 세실의 통역관으로 6개월간 종사한 후 기해박해 이래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계속되고 있는 고국에 밀입국을 기도, 의주(義州)를 거쳐 입국하다 실패, 몽고의 바자즈(八家子)에 기착, 매스트르 신부 문하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845년 단신 밀입국에 성공, 지하포교를 하다가 상해로 가, 금가항(今家港) 신학교에서 탁덕(鐸德)으로 승품(陞品), 신부에 임명되어 만당성당(萬堂聖堂)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집례하였다. 이해 8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주교와 함께 충남의 강경(江景)에 잠입, 서울로 향하여 각지를 순방, 전도하였다. 1846년 선교사 입국과 선교부 연락을 위한 비밀항로를 찾으려다 피체, 서울로 압송된 후, 6회의 혹독한 문초를 받고, 선교부와 신부들에게 보내는 편지, 교우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쓴 후, 25세로 순교하였다. 1857년(철종 8) 교황청에서 가경자(可敬者)로 선포, 1925년 교황청에서의 시복식(諡福式)에 이어 한국 전 성직단 대주보(大主保)로 정해졌으며, 교황 비오Ⅱ세에 의해 복자위(福者位)에 올랐다.

의순[편집]

意恂(1786∼1866)

조선후기의 중, 호는 초의(草衣), 성은 장(張), 자는 중부(中孚). 15세에 남평(南平) 운흥사(雲興寺)에서 중이 되어 금담(金潭)에게서 선(禪)을 닦고, 윤우(倫佑)의 법을 이어 받았다. 범자(梵字) 및 신상(神像)에 능했고, 정약용에게서 유학과 시문(詩文)을 배웠다. 신위(申緯)·김정희(金正喜) 등과 사귀면서 해남의 두륜산(頭輪山)에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40년간 지관(止觀)을 닦았다. 서울 봉은사(奉恩寺)에서 <화엄경>을 새길 때 증사(證師)가 되었고, 달마산(達摩山) 무량회(無量會)가 창립되자 강석(講席)을 주재하였다. 그는 저서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를 통해 긍선(亘璇)의 <선문수경> 주장을 반박하여, 여래선 이외에 의리선이 따로 있을 수 없으니 두 가지 선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홍기[편집]

洪基(1822∼1881)

조선말의 중. 호는 우담(優曇), 초명은 우행(禹幸), 성은 권(權). 자신(自信)에게서 중이 되고, 한성(翰醒)에게서 배우고, 강파(江坡)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화엄·염송(拈頌)에 밝았으며, 특히 선(禪)에 통달 강석을 열어 후학을 가르쳤다. 만년에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을 지어 긍선(亘璇)의 <선문수경>을 논박, 불조전심(佛祖傳心)의 묘리를 밝혔다.

유형[편집]

有炯(1824∼1889)

조선말의 중. 호는 설두(雪竇), 성은 이(李), 초명은 봉기(奉琪), 유형은 자, 옥과현(玉果縣)출신. 19세에 백양산의 쾌일(快逸)에게서 중이 되어, 이듬해 조계사 한성(翰醒)에게 구족계를 받고 명산을 유력, 영귀산(靈龜山)에서 긍선(亘璇)의 강회(講會)에 참가, 학업을 마쳤다. 도원(道圓)의 뒤를 이어 강단에 올라 10여년 간 후학을 교도하며 선(禪)을 닦았으며, 고종 7년 무악산 불갑사(佛岬寺)를 증수, 1889년 봉인사(奉仁寺)에서 선문하였다. 그는 <선원소류(禪源遡流)>를 지어, 스승 긍선의 <선문수경>을 비판한 의순·홍기 등의 주장을 재반박하고, 긍선의 이론을 옹호하였다.

축원[편집]

竺源 (1861∼1926)

한말의 중. 호는 진하(震河), 성은 서(徐). 12세 때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의 상운(常雲)에 의해 출가하여 서호(西灝)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탄종(坦鐘)의 법을 이었다. 유형·해주(海珠)에게서 경전을 배워 대강사가 되었고, 만년에 중국에 건너가 저장성 천암율사(天庵律事)에게서 다시 구족계를 받았다. 1926년 제주도에 갔다가 아라교당에서 죽었다. 그는 <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을 지어. 긍선과 유형의 주장을 비판하고, <선문수경> 논쟁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하였다.

최제우[편집]

崔濟愚(1824∼1864)

조선말 동학(東學)의 창시자. 호는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齊), 초명은 복술·제선(濟宣), 본관은 경주, 옥의 아들. 일찍부터 경사(經史)를 익혀 학문연구에 전심하다가 헌종 10년 전국 각지를 유람, 구도행각을 하고, 10년 후 고향에 돌아와 울산 유곡(裕谷)에 은거, 도를 닦던 중 1855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중에게서 얻은 <을묘천서(乙卯天書)>로 도를 깨닫고 이듬해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에 들어가 49일 간 기도한 후, 다시 1857년 천성산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 기도, 도술(道術)을 터득했다. 1859년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도, 이듬해 시천주(侍天主)사상을 핵심으로 한 새로운 종교 동학을 창시하고 천도(天道)라 하였다. 1862년 남원을 거쳐 보국사(輔國寺)에 들어가 <도수사(道修詞)>,<권학가(勸學歌)>를 짓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를 집필, 포교에 전심하였다.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각지에 접소(接所)를 설치, 접주(接主)를 두어 관내 교도를 관장시켰고, 1863년 7월 제자 최시형(崔時亨)에게 도통을 물려주고, 이듬해 용담정에서 피체,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대구 장대(將臺)에서 처형당하였다. 그후 교도들의 신원운동을 거쳐 1907년에야 신원되었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1) 천주교 유행에 자극받아 동양의 유·불·선 3교를 민족 고유신앙 위에 융합하여 서학(西學)에 대항하는 민족종교로서의 동학(東學)을 창시하였다. (2) 절대적인 유일신으로 한울님(天主)을 신앙하되 한울님과 세계, 한울님과 인간의 관계는 오히려 범신론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3) 유교중심의 동양적인 봉건체제, 양반사회, 낡은 윤리를 전면 부정하고, 인내천(人乃天)을 핵심으로 한 민권체제, 평등사회, 새 윤리를 주장하고 혁명적인 개혁론을 전개하였다. (4) 천(天)·인(人)을 대도의 근원으로, 성(誠)·경(敬)·신(信)을 도의 본체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수도의 요결로 삼았다. (5) 역사적으로 구체제의 시대를 선천(先天)이라 하여 그것은 종말이 가까웠다고 하고 앞으로 이룩될 신체제의 신대를 후천(後天)이라 하여, 전면적인 변혁 즉 '개벽'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다. (6) 정치적으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양척왜(斥洋斥倭)'를 표방하고, 동학에 의한 신체제 건설과 함께 전민족의 단결된 힘으로 외세(外勢)의 침략에 대항할 것을 명백히 하였다. (7) 민중 속의 포교를 위하여 도참, 비술(秘術) 등을 원용하고, 농민 대중의 불만을 대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동경대전[편집]

東經大全

동학교조 최제우가 지은 천도교의 경전. 저자가 사형될 때 불태워진 것을 후계자 최시형(崔時亨)이 암송한 부분을 1880년 비밀로 간행, 1883·1890년에 중간되었다. 내용은 본문과 별집으로 되어 있어, 본문에는 <포덕문(布德文)> <논학문(論學文)> <수덕문(修德文)> <불연기연문(不然其然文)>이 실려 있고, 별집에는 축문·입춘시·절구(絶句)·강시(降詩)·좌잠(座箴)·화결시(和訣詩) 등이 실려 있다.

용담유사[편집]

龍潭遺詞

동학교조 최제우가 서민·부녀자들의 교리 대중화를 위해 한글 가사체로 종교·철학·정치 사상을 읊은 책. 2세 교주 최시형이 1881년에 간하였다. 수록내용은 <용담가(龍潭歌)> <안심가(安心歌)> <교훈가(敎訓歌)> <도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 <몽중가(夢中歌)> <도덕가(道德歌)> <검결(劒訣)>등을 수록하였다. 최제우가 득도하기까지의 경과, 득도후의 심정, 교도들에 대한 훈계·호소 등이 가사체로 읊어져 있는 것이다.

만일회[편집]

萬日會

정토종(淨土宗)에서 하는 불교 행사의 하나, 극락세계 아미타불회(阿彌陀佛會)에 재생하기를 기원하고 천일(千日) 또는 만일간을 큰 소리로 '나무아미 타불'을 부르며 도를 닦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경덕왕 6년(747)에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에서 2백여 명이 모여 만일회를 열고, 혜공왕 11년(775)에 마쳤는데, 그중 31명의 중이 서방 극락세계를 향하고 앉아 열반에 들어갔다 한다. 조선후기에 다시 미타신앙이 성행하면서 만일회도 부흥되어 건봉사·망월사(望月寺) 등에서 세 번이나 열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