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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현대미술 분류에는 다음과 같은 세부 문서가 존재한다. 현대미술,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20세기 미술의 역사와 그 변천된 과정을 한눈으로 훑어볼 때, 우선 우리를 놀라게 하고 당혹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다양한 미술운동의 연이은 교체이다. 그 중에서도 일련의 국부적인 움직임을 제외하고 적어도 현대미술 전개에 획기적인 역할을 도맡았다고 간주되는 유파 또는 '이슴'만을 들어도 가히 열 손가락을 넘는다. 20세기에 들어서자 그야말로 불길처럼 폭발한 포비슴(야수파)을 필두로 독일의 표현주의, 프랑스의 퀴비슴(입체파), 이탈리아의 미래주의, 소련의 쉬퓌레마티슴과 구성주의(構成主義), 그리고 네덜란드의 네오 플라스티시슴(신조형주의), 다시 프랑스에서의 퓌리슴(순수주의)과 오르피슴(절대주의)…. 그리고 여기에 다시 다다이슴과 쉬르레알리슴(초현실주의)이 곁들여 20세기 미술은 가히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양상을 띠고 있다. 비단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을 고비로 전후 미술은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더한층 과격한 미학적인 모험과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그 가열된 소용돌이는 우선은 앵포르멜 미술과 액션 페인팅의 등장으로 전전(戰前)의 고전적 추상미학에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비롯되어, 연이어 상극(相克)과 초극(超克)의 눈부신 변천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 전후의 동향은 전전의 '이슴' 중심의 미술 운동과 달리 '아트(art)'의 명칭을 앞세우고 있는 것이 또한 눈에 띈다. 이를테면 팝 아트, 옵 아트를 필두로 하여 키네틱 아트와 라이트 아트, 또는 정크 아트(廢物藝術), 그리고 오늘날의 컨셉튜얼 아트(槪念藝術)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약 70년이라는 짧은 사이에 이처럼 다양하고 급격한 변천이 이루어지기는 일찍이 미술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예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은 비단 미술분야에만 국한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기실 금세기에 있어서의 그와 같은 가속화(加速化)된 변천의 양상은 모든 정신 및 과학 분야에서도 다같이 드러나고 있으며, 특히 전후에 있어서의 테크놀러지의 비상한 발전은 우리의 생활환경과 그 방식을 급격하게 변모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는 특히 전후 미술의 동태를 이해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전전(戰前)과 전후(1945년 이후) 미술에 대해 각기 그것이 '이슴'과 '아트'로 묶여진다고 비친 바 있으나 실은 이 양자간의 예술 사이에는 보다 근본적인 미학적 이념의 차이가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차이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전전의 미술, 말을 바꾸어 20세기 전반기의 미술은 어디까지나 조형(造形)의 문제를 주축으로 한 새로운 추구로 일관되고 있는 반면, 전후의 미술은 이 조형이라는 우상(偶像)마저를 거부하고 창조 또는 그 행위 자체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보다 절박한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조형의 문제를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 집약한 것이 바로 추상미술이라고 하는 국제적인 표현 형태요, 또 한편으로는 창조행위의 의미와 맞붙은 궁극적인 미술 형태로서 이른바 '오브제 미술'을 거쳐 오늘의 컨셉튜얼 아트가 등장한 것으로 일단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20세기 전반기의 미술을 두고 볼 때, 이 시기에 대두된 갖가지 미술운동은 한가지의 기본적인 과제를 앞세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우리는 '순수에의 의지(意志)' 또는 '순수에의 노력'이라는 말로 집약시킬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그 무엇이 순수인가. 그것은 바로 조형요소들, 즉 색채와 형태의 순수성을 말한다. 유럽에 있어서의 19세기까지의 미술전통은 한마디로 사실주의 미학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사실주의란 다름 아닌, 현실 내지는 자연의 충실한 재현(再現)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조형 수단은 오로지 이 지상 명령에 봉사하는 예속적인 구실밖에는 못해 왔으며, 따라서 독자적인 조형언어로서의 미술의 자율성과 순수성은 그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그동안 거의 말살되어 온 터였다. 그러나 20세기 미술은 바로 미술의 자율성과 순수성에 대한 각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르네상스 이래 미술의 유일한 규범으로 간주되어 오던 이 사실주의 전통에 대한 반기를 들고 20세기 미술은 새로운 조형적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 조급한 모색을 거듭하였거니와 한편에서는 순수한 형태의 조형성을, 또 한편에서는 색채의 독자적인 표현력을 제각기 추구하면서 끝내 반(反)사실주의의 절정인 추상미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에서는 사실주의 전통과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유럽정신의 기틀, 즉 합리주의 정신에 대한 반항도 또한 20세기를 특징짓는 요인의 하나로서 나타나며, 그러한 움직임의 가장 획기적인 표명으로서 우리는 다다이슴과 쉬르레알리슴을 들 수 있다. 특히 과격한 반예술(反藝術)의 움직임인 다다 운동은 전후 미술에서 다시 그 정신적인 계승을 보게 되거니와 이에 대해서는 '1945년 이후의 미술'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고찰될 것이다. <李 逸>

목차

[편집] 주관의 표출

[편집] 포비슴

Fauvisme (야수파) 20세기 미술은 반자연주의를 기조로 하는 혁신적 유파(流派)와 사조가 어지럽게 뒤바뀌게 되지만 그 발단이 되는 것은 포비슴의 운동이다. 이 명칭은 1905년의 가을 파리에 있는 살롱 도톤에 출품한 일군의 청년화가들이 극채색(極彩色)으로 그린 작품에 대해 당시의 비평가 루이 보크셰르가 '포브(Fauves)'라 부른 것이 그 유래라 한다. 주요한 화가로서 파리 미술학교의 귀스타브 모로 문하생인 마티스, 마르케, 카므왕, 망갱을 중심으로 하여 여기에 레옹 봉나의 아틀리에에서의 뒤피, 프리에스, 브라크 등이, 또 개인적인 교우를 통하여 블라맹크, 드랭, 반 동겐이 참가하고 있었다. 마티스를 리더로 한 이들 화가는 거의 1870년대 태생이라는 같은 세대의 연대감에 서서 이론적인 기반에서보다 기성 회화에 대하여 어떻게 하든 일격을 가하려고 하는 젊은 패기와 야심에서 공통되고 있었다. 그들이 당면한 적으로 삼은 것은 시각의 진실을 추구한 나머지 창조의 주체성과 내면적인 감동을 잃어버린 인상주의(印象主義)였으며, 따라서 이 인상주의에 중요한 수정을 시도한 선배 고흐의 격정과 고갱의 원시적 생명력의 표현은 그들을 한결같이 분발하게 하는 모범이 되었다. 파괴와 혁신에 불타는 포브들의 유일한 무기는 색채이었다. 그것도 빛깔의 인상을 조금씩 칠해 가는 타율적인 색채가 아니고, 단숨으로 캔버스에 범람시킨 강렬한 원색, 이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다이너마이트의 뇌관(雷管)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강렬한 원색이 작렬(炸裂)하는 가운데 감성의 해방과 자아의 고양(高揚)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고 창조적인 에너지의 대담한 연소를 다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젊은 생명력의 연소와 그것이 기성 회화에 끼친 적잖은 충격에 그들의 야수 중에도 야수다운 영역이 있으며, 거기에 포비슴이 수행한 역사적인 역할의 거의 전부가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에 가서 그러한 패기에 앞서서 확고한 이론을 갖지 못하고 다만 같은 세대라고 하는 친밀감을 바탕으로 나오게 된 포비슴의 운동은 흩어지는 것도 또한 빨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1908년에는 이미 클럽으로서의 결속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마티스는 독특한 장식체계의 확립으로, 마르케는 중후한 풍경화로, 드랭은 고전으로, 그리고 브라크는 세잔에게서 본을 딴 엄밀한 화면 구성으로, 각자가 자기 본래의 자질을 지향하여 떨어져 나갔다. 관점을 바꾸어 말한다면 밖으로 향하였던 혁신의 기개에 불탄 젊은이들이 안에서 각자의 개성의 차이를 발견해 내는 기회와 장소로 삼은 것이 클럽으로서의 포비슴의 의미였다고도 할 수 있다. 포비슴은 에콜(流派)이 아니라고 하는 의견도 이 때문에 나오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고하는 화려한 '색의 계절풍(季節風)'이었다.

[편집] 초기의 피카소

Pablo Picasso 이 세기 최대의 거장(巨匠)으로서 스스로 20세기 미술의 전개를 구현하고 있는 피카소는 1881년 10월 25일 에스파냐의 항구 도시인 말라가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는 화가로 관립 미술학교 교사였고 피카소는 모친 마리아의 성(姓)을 계승하였다. 14세에 집안은 바르셀로나로 옮겨 갔으며, 피카소는 부친이 교편을 잡고 있던 그 곳 미술학교에서 배웠다. 이 무렵에 이미 그는 수르바란과 벨라스케스의 사실(寫實)에 눈을 떴고 미술전에서 상을 받을 만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듬해인 15세 때 그는 마드리드에 나와서 산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학교에서의 수업에도 만족하지 못하여 프라도 미술관을 매일 다니다시피 명화를 감상하였는데 특히 그레코에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점차로 부친과 관학파(官學派)의 영향을 벗어난 그는 1901년에 당시 파리 몽마르트르의 술집을 근거로 하여 기지와 풍자를 무기로 삼고 세기말의 풍속을 그리고 있던 화가 로트렉과 스텐렌의 작품에 이끌리어 파리의 땅을 밟게 되었다. 1901년부터 4년 동안 피카소는 파리와 양친이 있는 바르셀로나를 왕래하면서 사회의 패잔자(敗殘者), 뒷거리의 영락한 사람들, 노인, 고독자 등의 인간상을 화면에 포착하였다. 그러나 결코 기지와 풍자를 쓰지 않고 대상에 충분한 공감을 가지고 그렸던 것이다. 대상은 짙은 블루의 거의 한 가지 색 속에 표현되고 있었다. 화면의 형체는 야위었고 선은 병적일 만큼 섬세하며, 색채는 어둡고 안타깝고 또한 아름답다. '눈물에 흥건히 젖은 예술, 촉촉한 계곡의 푸르름'(시인 아폴리네르의 평), 이것이 이른바 '청색의 시대'이다. 이 시대의 작품에는 <애정>, <늙은 유대인>, <다림질하는 여인> 등이 유명하다. 이 시대를 이어 짧은 기간인 '분홍색의 시대'(1904∼1906)가 계속된다. 화면은 밝은 연분홍색으로 채색되고 간소한 형체 파악으로, 대상은 겨우 물 속에서 이제 막 떠올라와서 화면에 붙여진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당시에 피카소는 몽마르트르의 아파트 '바토 라보아르(洗濯船)' (시인 막스 자콥의 명명)에 거처를 정하고 친구와 연인도 사귀게 되어 시야를 내면에서 외면으로 넓혀 갔다. 그는 서커스에도 흥미가 있어 <공을 타는 소녀> <아를퀴앵의 가족> 등 유랑하는 연예인을 많이 대상으로 하였다. 유명한 동판화 <살탐방크>(16점, 1913년 출판)의 제작도 거의 이 무렵이었다. 이 동판화는 유채(油彩)와 같이 방금이라도 형체를 잃을 것만 같은 섬세한 선으로 그려져 있다. 총괄하여 초기 피카소에게서 감성의 과잉과 문학적 취미를 찾을 수 있으나 그것이 단순한 감상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조형(造形)에 뛰어난 천분 탓이다. 그의 젊고 고독한 영혼과 대상과의 교류는 화면에서 대상의 음성이 울부짖게 하고 있는 점에 주목을 받고 있다. 이윽고 피카소는 흑인조각에 열중하게 되어 초기의 섬세함을 스스로 파괴하여 1907년에 중요한 변모를 수행하는 것이다.

[편집] 마티스

Henri Matisse (1869∼1954) 마티스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가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게 된 동기는 전혀 우연한 계기라 하였다. 1869년 북프랑스의 르 카토에서 출생한 마티스는 유복한 곡물상인 부친을 따라 처음에는 법률을 배우려고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병으로 입원했던 병실에는 바로 옆의 병상에 가끔 그림을 그리는 남자가 있었다. 이것을 보고 배운 그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이윽고 병상에 미술교본을 가지고 오게 하여 그림그리기에 열중하였다. 이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한 계기이며 1890년 그의 나이 21세 때의 일이었다. 1892년에 양친을 설득하여 재차 파리에 나온 마티스는 처음에는 아카데미 줄리앙의 부그로의 문하생이 되었다가 이어서 미술학교의 모로에게 사사(師事)하였다. 동문인 마르케와 루오와의 교우는 이 때에 시작하였다. 그는 루브르에서 고인(古人)을 배웠고 인상파·신인상파를 한 발짝씩 연구해 갔다. 화상(畵商) 볼라르의 점포에서 세잔, 고흐, 고갱의 데생을 구입하였고, 런던으로 여행, 터너를 보았으며, 더욱이 인상파의 유산을 계승하여 우키요에에 열중한 것도 초기 마티스에 있어서는 필요한 영양이 되었던 것이다. 1896∼97년경부터 그는 원색의 대비(對比)에 의하여 선명한 표현을 시도해 보지만 이윽고 앙데팡당 미술전의 출품을 통하여 젊은 드랭과 블라맹크와 깊이 사귀게 되어 색채는 더욱 선명해진다. 이리하여 그는 젊은 화가들의 선두에 서서 포비슴의 기치를 올리게 되었다. 마티스에 의하면 포비슴의 운동은 무엇보다 먼저 표현수단의 순수함을 재발견하는 용기를 고취하고 추진하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용기와 더불어 그가 회화에서 구한 또 하나는 '표현'이다. 그가 말하는 표현이란 얼굴을 찡그린다든지 강렬한 동작을 과시한다든지 하는 격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화가가 주체적으로 화면에 만들어 내는 색과 모양의 배합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긴밀한 질서를 가리키는 것이다. 1908년 이후 그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질서 있는 조형(造形) 탐구의 발걸음을 재촉하였는데, 가령 그가 자신하던 장르인 임의의 실내화(室內畵)와 정물화에 주목하여 보기로 하자. 거기에는 인물이 그려져 있으며 의장이, 장신구가, 가구와 꽃, 꽃병, 융단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들 여러 요소 가운데 마티스는 과연 어느 부분에 역점을 두고 그렸을 것인지, 가끔 눈도 코도 없이 다만 달걀모양으로 그려진 사람의 얼굴인가, 아니면 색채의 아라베스크를 화면에 차지하고 있을 뿐인 비실용적인 가구나 융단인가, 물론 그 어느 것도 아니란 것은 명백한 일이다. 그의 그림에 있어서는 인물이 의장보다 중요하다든가 융단의 색채가 다른 형태보다 뛰어난다든가 하는 관점은 성립되지 않는다. 화면은 모든 구성 요소의 균등한 비중에서 또 그 비중의 하모니에서 성립되고 있다. 다양하면서도 단일한 것, 질서·조화의 창조야말로 그의 과제이다. 그는 '동비중(同比重)·순일(純一)·절도(節度)'를 자기 스스로 표현의 3원칙이라 말한다. 마티스의 이러한 질서에 대한 감각은 자연법칙을 지상(至上)으로 하는 리얼리즘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도(邪道)임에는 틀림없지만 본질적으로는 명석한 형식감정을 존중하는 라틴적인 조형정신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균형이 잡힌 무구(無垢)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지쳐버린 사람에게 조용한 휴식처를 제공하는 것과 같은 그림을"이라 하였다. 포브 시대의 마티스 그림에 <호사(豪奢)·정밀(靜謐)·쾌락을 위한 에튀드>라고 하는 작품이 있다. 보들레르의 시에서 얻은 이 세 낱말처럼 마티스의 예술적 생애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은 없다. 그는 항상 색채를 호사하게 탕진하는 일에 대하여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고, 동시에 조용하게 다양한 통일을 반드시 추구하였던 것이다. 쾌락이란 그에 있어서 방종을 규제하는 질서 속에서 절도 있는 사치에 속한 것이었다. 만년에 80세의 고령인 마티스가 5년의 세월에 걸쳐 완성한 반의 <마티스 예배당>은 그 예술의 집약이며 명쾌함과 단순함에 넘치는 조형이었다.

[편집] 블라맹크

Maurice de Vlaminck (1876∼1958) 프랑스의 화가. 예술에 있어서 이론이란 의사의 처방과 같은 정도로 필요하다고 믿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병자임에 틀림없다. 지식은 본능을 말살해 버린다. 그림의 창작은 유통(流通)이 자재(自在)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렇게 단언하는 모리스 드 블라맹크는 가장 포브적인 화가였으며 포비슴 속에 산 화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1876년 파리에서 출생하였으나 그 집안은 플랑드르 출신이라 한다. 양친은 음악가로 자제의 교육에는 무관심한 보헤미안 기질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하였고, 바이올린을 켠다든지 자전거경주의 선수를 해 가면서 자수성가(自手成家)의 인생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그는 본능에 의하여 화가가 되려고 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화가란 무정부주의자와 같아 직업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나는 어린이의 눈으로 사물을 본다"라고도 하였다. 그는 드랭과의 교우로 마티스와 사귀어 포비슴 운동에 가담하였다. 블라맹크는 무엇보다도 생명력의 표현을 화면에서 추구해 보려던 화가이다. "나는 미풍양속에 혁신을 불러일으키고 싶다. 진부한 이론과 의고전주의(擬古典主義)에서 해방된 자연의 활달함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하던 그의 패기는 색채의 과잉과 범람으로 화면에 마구 넘쳐 흘러 포브 중에서도 더한층 높은 음색의 절규가 되었다.

[편집] 뒤피

Rauol Dufy (1877∼1953) 프랑스의 화가. 라울 뒤피가 자기의 묘화 과제에 대하여 스스로 계발(啓發)된 계기는 마티스의 작품 '호사·정밀·쾌락'을 접한 때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그림을 보고 나는 그린다고 하는 참다운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정말 놀라운 발명이라 할 이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상주의적인 리얼리즘의 매력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다." 이 말에도 있듯이 1877년 르 아브르에서 태어난 뒤피는 23세에 파리로 나와 오로지 인상파의 드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림을 약간 어두운 색조로 그렸던 것이다. 그러나 포비슴의 운동에 참가한 후부터 그는 자랑으로 여긴 속필(速筆)을 유감없이 구사하여 삶의 기쁨을 다채롭게 표현하는 화가가 되었다. 보트 경주, 수욕장 풍경, 길거리 축제 등 환희의 소리가 울리는 장소와 장면은 그가 애호하는 모티프가 되었다. 그 후에 그는 퀴비슴으로 접근했으며, 한때는 화상(畵商)도 위험시하는 실험가인 척도 하였지만 그 금욕적인 분석과 구성의 수법은 결국 그의 기질과 맞지 않아 그는 또다시 자칭 '바캉스의 화가'로 돌아와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현세는 괴로운 세계로 보기에는 너무 아름답고 기쁨에 충만한 빛깔과 빛에 넘쳐 있었다. 특히 그는 생활을 위하여 디자인을 하는 일에도 손을 대어 장식 미술가로서도 높이 평가를 받아 그 힌트에 의하여 회화도 충실하였다.

[편집] 마르케

Albert Marquet (1875∼1947) 프랑스의 화가. 알베르 마르케는 1875년 보르도에서 출생하였다. 처음 장식화가를 지망하였으나 22세 때 마티스와 더불어 모로 문하생이 되었다. 마티스와는 절친하였고 같은 아틀리에에서 1900년의 만국박람회의 장식화를 공동 제작한다든지 또는 같은 전람회에 각자의 작품을 출품하면서 그림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성격적으로 볼 때 마티스를 양(陽)이라고 한다면 마르케는 음(陰)이라 할 만큼 달랐다고 한다. 마르케는 일찍부터 바다와 항구와 해변의 풍경화를 그렸고, 이러한 기호는 늙어갈수록 화면에 인적이 없는 고요한 취향을 가미하여 그 제작을 일관하였다. 같은 모티프의 풍경화에도 뒤피의 경우에는 축제의 광경, 그 생생한 환희의 표현에 특색이 있으나 마르케가 노리는 것은 대범한 색면 구성 즉 넓고 넓은 하늘의, 언덕의, 모래 형태의 이조(移調)에 중점을 두고 있다. 마르케는 격렬한 색채에 의한 포브의 화가가 아니고, 그 색조의 대담함에 의해 포비스트라 말하는 견해도 있다. 확실히 단조로운 색채로 덮여진 그의 화면은 때때로 중후한 이면의 뉘앙스가 노출되어 몽롱한 애수마저 풍기고 있다. 포비슴 운동 이후의 그는 구성을 더욱 순화하여 견고하고 평형감이 넘치는 작품을 만들었다. 마르케는 현대 회화에 유니크한 지위를 차지하는 풍경화가로 기억되는 화가일 것이다.

[편집] 루오

Georges-Henri Rouault (1871∼1958) 프랑스의 화가, 판화가. 파리의 노동자 동네인 베르빌의 초라한 방에서 정부군의 포격에 벌벌 떠는 모태로부터 탄생하였고 부친은 빈곤한 목수였다. 루오는 14세 때에 글라스 그림을 그리는 공방(工房)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중세 스테인드글라스의 복원 수법을 배웠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4년 후에 미술학교에 입학, 포브의 스승인 모로의 지우를 얻는 바가 되었다. 그래서 모로는 예술의 스승 이상으로 정신적인 선배이며 때로는 동지나 친구로서 마음의 지주가 되었다. 이것은 모로의 사후(死後)(1898)에 많은 제자 가운데서 뽑혀 루오가 '모로 미술관'의 관장이 되어 스승의 유작을 관리하는 지위에 오랜 기간 머물렀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모로는 루오가 성장한 베르빌의 주민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어둡고 과묵한 종교예술의 애호자이다.' 이러한 지적은 루오의 장래를 멀리 예견하고 있었다. 모로의 사후 루오의 시야에는 포랭과 로트렉 및 도미에가 뚜렷하게 부각되었고, 모두가 사회 비판의 경향이 농후한 화가들이었다. 또한 카톨릭의 문필가 위스망스와 레온 블르와와의 교우는 루오의 종교적인 인생관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가난하고 학대받는 자들에 대한 공감, 부자나 권력자를 향한 분노는 루오에 있어서의 깊은 종교적인 감정에서 유래한다. "가령 창부를 그리는 경우 루오는 이 죄많은 여인이 풍기는 전율할 향기에 취하는 것이 아니고 그녀의 죄에 울고 그녀와 더불어 괴로와하는 것이다(美術史家 드리발)." 세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루오는 포비슴의 와중에 있지만 밝게 삶을 구가하는 그들과는 대극(對極)의 위치에 있었다. 루오의 신앙과 그에 입각한 예술관은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이다. 그는 "나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느낄 수 있는 것뿐이다." 그는 이처럼 비합리적 세계에서의 계시(啓示)를 어둔 밤 속에서는 빛나는 별을 인정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예술적 탐구는 완성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완성해 낼 수 없는 것의 극(極)을 다하기 위하여 행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참다운 예술은 열렬한 고백을 토로할 수 있는 까닭에 가치를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암야(暗夜)의 절규이며 자기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울음소리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영혼의 극점에 서서 루오는 단언하기를 '구세주로서 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는다'라고 했다. 이 동안의 소식을 여실히 말해 주는 것으로 판화집 <미세레레>(1948년 발표)가 있다. 1913년 루오는 화상(畵商) 볼라르에게 인정을 받아 아틀리에를 제공받음과 동시에 일정한 금액으로 전작품을 인수받게 되었다. 1917년에는 역시 볼라르와의 계약으로 한때 유채화를 중지하고 판화에만 전념하였으나, 이것이 일반 사람에게 공개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었다. 이런 것에서도 그가 시류(時流)에서 멀어져 가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더욱이 그는 용이하게 완성을 인정하지 않는 화가이어서, 독특한 에나멜을 칠한 것과 같은 중후한 마티에르와 농밀(濃密)한 색채로 덮인 작품으로 완성이 될 때까지는 상당히 긴 세월이 소요되었다. 1948년 볼라르의 유산 속에 들어가 있던 약 3백점 이상의 작품을 재판에 의하여 되돌려받았을 때에도, 벌써 이것들을 마음대로 가필 수정할 여력이 없다고 하여 아낌없이 태워버렸던 것이다. 판화 때문에 중단된 유채화의 제작을 다시 시작한 때는 1929년이며, 이 때부터 그의 명성은 높아졌으나 이후 87세의 생애를 마칠 때까지 루오는 현대 화단에 초연한 성화상(聖畵像)의 화가이기도 하였다.

[편집] 표현주의

表現主義 Expressionismus 표현주의란 일반적으로 자연묘사에 대립하여 감정표현을 주안으로 하는 예술상의 이념을 말하며, 직접적으로는 20세기 전반 독일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던 주관 표출을 목표로 한 전위(前衛)예술운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술분야에는 고흐와 고갱의 흐름을 따른 반(反)인상주의·반자연주의 입장에 서게 되는데, 이러한 입장은 항상 현상보다는 그 배후에 있는 것을 탐구하려고 하는 게르만 기질에 있어서는 생득적(生得的)인 것이라 하겠다. 독일 표현주의 운동은 나비파(派)와 접촉이 있던 노르웨이 화가인 뭉크처럼 뛰어난 선구자 이외에도 독일 향토예술과 정감적인 자연파(自然派)와 세기말의 미술 가운데에 선구자를 가졌으며, 또한 16세기로 소급하는 독일미술의 전통 중에서도 풍부한 영양을 섭취한 것이었다. 독일 표현주의의 최초의 그룹은 1905년 드레스덴 고등공업학교 건축과 학생들로 결성된 '브뤼케(橋)'였다. 키르히너, 헤켈, 시미트로틀루프를 창립멤버로 하는 이 그룹은 후에 활약 무대로서 베를린으로 옮겨가서 페히시타인, 뮐러가 첨가되었다. 그룹의 명칭은 독일 각지에 있는 젊은 세대가 널리 결집하기 위하여 다리를 건넌다는 뜻으로 그러한 이름을 붙였다. 1909년 뮌헨에서 '신예술가동맹(新藝術家同盟)'이 탄생하여 인상주의를 신봉하는 분리파인 구세대에 대항할 새로운 세력을 결집하였다. 1910년에는 베를린에서 평론가인 헤르바르트 발덴이 화랑 '시투름(暴風)'을 개설하였고 같은 이름의 미술잡지를 발행하여 화가·시인·문학가들을 모아 신사조를 고취하고 있었다. 당시 무명이었던 샤갈이 첫 개인전을 시도한 곳도 이 화랑이었다. 시투름의 서클에서는 코코슈카가 독특한 심리적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더욱 1911년 신예술가동맹에서 새로이 '블라우에 라이터(靑騎士)' 그룹이 파생하여 칸딘스키, 마르크, 마케, 쿠빈, 클레 그리고 여류 뮌터 등이 여기에 속하였다. 이 그룹은 다분히 낭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제예술(諸藝術)의 통합'을 이념으로 내건 모임이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뒤의 '바우하우스' 운동을 선취하는 것이다. 1912년 제2회전에는 피카소, 브라크, 블라맹크, 라리오노프, 말레비치 등이 출품자로서 참가하였다. 이리하여 독일 각지에 고양된 표현주의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전야의 위기적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여 인간 존재의 심각한 문제를 강렬한 색채와 형태로 호소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그룹은 흩어지고 이후는 1인1파적인 추구로 파고들면서 나치스의 탄압을 받을 때까지 독일 현대미술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더욱 표현주의의 고독한 탐구자로서 월프스 베테의 자연파에서 나온 여류화가 모데르존베카와 닷하우의 자연파에서 나온 놀데가 있으며, 또 조각가로서 바를라흐 및 여류인 코르비츠가 유명하다.

[편집] 키르히너

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 독일의 화가, 판화가로 아샤펜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1901년 드레스덴 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 재학 중에 뮌헨의 공예가 헤르만 오프리스트의 감화를 받았다. 1905년 학우인 헤켈, 시미트(로틀루프)와 더불어 그룹 '브뤼케'를 조직하여 미술 혁신의 기치를 올렸다. 의도한 바는 강렬한 색채와 분방한 묘선(描線)으로 주관적 진실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1911년 그룹과 함께 베를린으로 옮겨 뭉크와 고갱의 영향을 받아 독일 표현주의 운동의 유력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 시기에 있어서 키르히너의 제작에는 대도회의 단면을 모티프로 한 것이 많고 흑(黑)을 기조로 하는 액센트가 강한 색채와, 경질(硬質)이며 가슬가슬한 형태에 의하여 문명의 모순과 인간의 비참함을 가차없이 폭로하는 것을 그 취지로 삼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결핵에 걸린 이후는 오로지 이주한 스위스의 다보스에서 인간의 채취가 강렬한 풍경화를 제작하였다. 키르히너는 조국 독일과 독일의 예술을 깊이 사랑하였고 또 극단적으로 자아의식이 강한 성격이었으나 나치스에게 경원당한 화가로 퇴폐예술가라는 낙인이 찍히기에 이르러 1938년 조국예술의 전도를 절망하여 스스로 죽음을 택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판화도 많으며 이 분야에서도 독일미술의 전통을 계승함과 동시에 표현주의 회화에 광채를 부여하였다.

[편집] 놀데

Emil Nolde (1867∼1956) 본래의 성(姓)은 한젠으로 에밀 한젠이 본명이었다. 1867년 북독일의 노르트시레스비히의 농가에서 태어났고, 그가 성을 바꾸게 된 것은 이 북방의 고향에 연유되며, 1901년인 34세에야 미술에 전념하려는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본래 그는 공예를 배워 1892년 스위스의 산크트 가렌 공업학교의 교직에 있었다. 그 곳에서 그린 알프스산의 의인화(擬人畵)가 호평을 받아 화가수업의 자금을 얻을 수가 있었다. 1898년 교직을 사임하고 뮌헨·파리·코펜하겐 등지로 유학하면서 인상파풍(印象派風)의 스타일을 익혔다. 닷하우의 자연파에 접근한 것도 이 시기이다. 성을 바꾼 경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놀데는 북방의 풍토를 사랑하여 스스로 향토화가라 자칭했고, 북변(北邊)의 황량한 풍토화와 범신론적인 종교화에 대한 애호(愛好)는 점차 그를 인상파와는 정반대의 길로 이끌어 갔다. 1909년 그의 종교화 <성령강림제(降臨祭)>가 인상파적인 베를린 분리파(分離派) 미술전에서 거부당하자, 그는 공개적인 질문장을 제출하여 이에 반론을 펴고 분리파와 인연을 끊었다. 이보다 먼저 드레스덴에서 개최한 그의 개인전에 찬사를 보낸 브뤼케파(派)의 화가나, 분리파 가운데서도 혁신적인 신세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놀데를 표현주의의 맹장(猛將)으로 추앙하였다. 그러나 놀데는 자수성가한 예술가이며 평생 파벌을 형성하는 일은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놀데는 시베리아를 거쳐 동양을 여행하고, 더 나아가 동남아시아에 와서 원시예술을 접하였다. 그는 원시예술의 단순 소박한 형식 가운데에 화려하고 기괴한 생명력의 표현을 흡수하여, 그것을 그의 주요한 모티프인 가면과 인형에 관한 제작의 영양분으로 삼았다. 영원히 회귀(回歸)하는 근원적인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엿보는 것 같은 중후하게 채색한 풍경화, 항상 핏자국의 적색이 부착하여 있는 이단적인 종교화, 본능과 정열을 싫증날 정도로 강렬하게 상징한 가면과 인형의 화면, 그리고 개화 그 자체를 선명한 색채로 포착한 꽃의 그림, 또한 흑백 2색의 소박한 판화, 이들 놀데의 주요한 제작은 그가 순수하게 게르만적인 정신의 조형자임을 보여준다. 1937년 놀데의 작품은 나치스에 의하여 퇴폐예술이란 낙인이 찍힌다. 그는 북독일의 제뷔르에 은신하여 1956년 그 곳에서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자기 작품을 공개하려 하지 않았다.

[편집]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1886∼1980) 오스트리아의 화가. 도나우의 푀히라룬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빈 공예학교의 급비생으로 수학하는 한편, 구스타프 클림트가 지도하는 '빈 아틀리에'에 들어가서 환상적인 작풍(作風)의 판화·그림책·플래카드 등을 제작하였다. 1910년 화랑 및 미술잡지 <시투름>의 창립자인 발덴의 초청으로 베를린에 이주하여 그 곳에서 표현주의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 시기에는 초상화의 제작이 많았고, 그 심리묘사에까지 육박하는 작풍은 대상으로 하는 인물의 운명을 예언한다는 평을 받아 '화필의 점술사'라 불리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여 부상을 입었고, 전후에는 1918년∼1924년까지 드레스덴 아카데미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이윽고 유럽·아프리카·중근동 각지를 편력하여 광대한 시야에 입각한 바로크적인 풍경화를 그렸다. 나치스의 대두로 정치적인 압박을 받아 1938년 런던으로 망명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그 곳에서 침략주의에 대항하여 전란의 유럽을 비판하는 경세적(警世的) 작품을 발표했다. 이런 종류의 제작에는 '예술은 언어와 같아서 자아로부터 타아(他我)에의 사자(使者)이다'라는 그의 신념이 구체화되었다. 초기의 환상화로는 <바람의 신부>, 초상화는 <포렐 박사상(博士像)>이 있고, 편력시대의 풍경화에 <몬타나>가 있으며 풍자적 작품인 <테레모피레>는 유명하다. 그는 또한 표현주의의 시인, 희곡작가로서도 주목할 작품을 발표하였다.

[편집] 마르크

Franz Marc (1880∼1916) 독일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는 1880년 뮌헨에서 출생하였다. 그 곳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웠고, 1903년 및 1907년에는 파리로 가서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특히 고흐)를 연구하였다. 1910년 칸딘스키와 사귀어 이듬해 그와 함께 그룹 '블라우에 라이터'를 창립하였다. 마르크의 주제는 동물이며 즐겨 쓰는 색채는 청색이며 또 화면은 구상(具象)의 묘사를 지양한 형태의 구성으로 처리되고, 더욱이 로맨틱한 색채로써 깊은 내면성을 표현하고 있다. 1912년 들로네와의 교우로 퀴비슴을 흡수하고 또 친구 칸딘스키의 영향도 받아서 순수한 색채 형태의 탐구를 시작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종군, 1916년 베르됭 공방전에서 전사하였다. 그는 표현주의에서 추상으로 향하는 길을 모색한 선각자적인 화가이며, 1920년대의 바우하우스 운동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한 이론가이기도 하였다.

[편집] 초기의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1866∼1944) 바실리 칸딘스키는 1866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법률과 경제학을 전공하였으나 30세가 될 무렵부터 화가를 지망하여 뮌헨으로 나와 프란츠 시투크의 문하생이 되었다. 회화로 전환한 동기는 고향에서 개최된 인상파 전시회에서 모네의 작품 <노적가리>를 보게 되어, 빛깔 즉 색채의 해조(諧調) 안에서 거의 형태를 잃어 가고 있는 그 화면에서, 대상을 떠나서도 성립되지 않을까 하는 새로운 회화에의 시사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그는 러시아 민속예술이나 세기말의 양식(아르누보), 그리고 인상주의 영향을 서서히 벗어나 1902년에는 스스로 회화학교를 개설하였고, 이듬해부터 1907년에 걸쳐 튀니스·이탈리아·프랑스 및 네덜란드 각지를 여행하여 견문을 넓혔다. 그 동안 포비슴의 영향으로 밝은 색채와 넓은 색면에 의한 화면의 구성을 배웠다. 1910년, 수채(水彩)로써 최초의 비구상화(非具象畵)를 그렸고 동시에 논문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을 발표하여 시각적인 대상에 종속하지 않는 새로운 회화를 지향한 제일보를 디뎠다. 그런데 당시 그 자신이 조정 역할의 지위에 있던 뮌헨의 젊은 그룹 '신예술가동맹(新藝術家同盟)'의 내부에서조차 이러한 새로운 시도를 의구하는 소리가 높아, 그 때문에 그는 마르크, 마케, 쿠빈과 더불어 동맹을 탈퇴하여 1912년에 새로이 '블라우에 라이터' 그룹을 조직했던 것이다. 그의 초기 비구상화는 오직 색채가 갖는 정신적인 환기력의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이 점으로 보면 순수한 음성으로써 이미지를 형성하는 음악의 영역에 가깝다. <콤퍼지션>이라든가 <즉흥곡>이라는 작품이 있는 것은 그러한 까닭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한때 러시아로 돌아가 혁명 후는 계몽적인 문화인으로 요직에 취임하였지만 그간 구성주의에 접하여 형식 문제에 관해 깨달은 바가 있었고, 그 성과를 가지고 1920년대의 독일 미술계에 복귀하게 된다.

[편집] 대상의 해체

[편집] 아비뇽의 아가씨들

피카소 작. 1907년, 유채화. 뉴욕 근대 미술관 소장. 1906년부터 1년간에 걸쳐 제작된 미완성의 대작인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작가 피카소의 화력(畵歷)에 중요한 전기(轉機)를 보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고 20세기 회화로서도 기념비적 가치의 전환을 의미하는 의의 깊은 작품이다. 아비뇽이란 바르셀로나의 서민가에 있는 마도로스 상대의 창녀가 출몰하는 뒷거리의 명칭이며 화면에 그린 것은 이 뒷거리에 있는 창부들이다. 초기의 피카소가 즐겨 그린 인생적인 주제가 답습되어 있는 셈인데 이 작품에는 벌써 청색 시대의 정감적(情感的)인 침울함이 없고, 대상은 주제를 전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비정(非情) 형태의 구성으로 포착하였다 이것은 피카소가 스스로 제작에 가한 제1의 파괴인 것이다. 이 파괴의 힌트는 피카소가 고대 이베리아 조각과 아프리카의 흑인조각에서 배웠다. 이들 원시미술이 가진 분방(奔放)한 데포르메와 충실된 양감은 무엇보다도 형(形)을 만드는 것, 즉 조형의 문제로서 정감적인 피카소를 경탄하게 하였고 매혹시켰다. 자연과 예술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감지하였다. 또 하나의 힌트는 세잔에게서 받았다. 세잔도 역시 현상과는 별개의 실재(實在)를 화가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색면(色面)으로써 견고하게 구축할 것을 염원하였던 조형가였다.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최초에 이 세잔의 수욕(水浴)의 구도를 모방하여 나부(裸婦)의 군상을 그리려던 목적이라 말하지만, 세잔의 주체적인 색면 배합을 진일보하여 피카소는 형태의 분해와 화가의 내적인 질서에 따르는 그 재배분(再配分)을 노렸던 것이다. 가령 정면으로 향한 얼굴일지라도 코는 높이를 가지고 있으며 뒤돌아서 있는 사람이라 하여 얼굴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일부러 그린다는 것은 단일한 시점에서 보는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손상시킨다는 사실은 틀림없지만, 인물의 표정과 감정은 더욱 생생하게 전하게 된다고 피카소는 확신하였던 것이다. 흑인조각의 영향을 여실히 말하여 주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의 화면에서 오른편에서 둘째번의 왜곡된 얼굴은 그의 생각을 대담하게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피카소의 조형에 대한 사고는 그 그림을 그린 당시에 있어서 친한 친구에게조차 잘 이해되지 않았다. 피카소는 머리가 돌아서 그 그림 뒤에서 목을 매달 것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다만 브라크만이 알지 못하면서도 그 그림을 이해하려고 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당시 브라크도 역시 세잔의 본을 따라 풍경화 가운데에 있는 색면에 의한 양(量)의 파악과 대상의 재구성에 손을 뻗치고 있었다. 이윽고 피카소와 브라크의 공동연구에서 퀴비슴의 사조(思潮)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연의 모방을 근저로부터 뒤집어 엎는 이지(理知)의 조형이며 20세기의 회화가 달성한 주목할 만한 혁신이다.

[편집] 퀴비슴

立象派 Cubisme 퀴비슴은 포비슴에 이어서 일어난 20세기 미술의 제2의 혁신운동이고 그 이념은 포비슴보다 훨씬 이지적(理知的)인 기반 위에 있으며, 기성의 것에 반역한다고 하기보다는 리얼리즘을 골격으로 하는 르네상스 이래의 미술의 전통 그 자체에 도전하는 혁명적인 성격을 지닌 운동이다. 그것은 세잔을 모범으로 하는 두 화가, 즉 피카소와 브라크가 다같이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추진하여 그동안 분석적 퀴비슴, 총합적 퀴비슴, 다이내믹 퀴비슴 등의 변용(變容)을 보이면서 많은 미술가들을 가담시켜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퀴비슴은 종래의 회화의 기법에 따르지 않고 입체적인 대상을 평면의 캔버스에 옮기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또 대상의 다각적인 관찰을 이동하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란 문제와 대결하고 있다. 종전에는 이것을 오로지 빛으로 해결하여 왔다. 가까운 물체는 밝고 크며 먼 곳 물체는 어둡고 작으며 또한 보이지 않는 부분은 그리지 않았다. 결국 화가는 빛의 속임수를 그리고 현상을 모사(模寫)하는 데 불과하였다. 이것을 불만으로 여겨 더욱 항구적인 자연을 그리려고 부심한 사람이 세잔이다. 퀴비슴은 이 세잔의 추구에서 큰 암시와 격려를 받고 있다. 피카소가 세잔을 본따서 흑인조각에서 자극을 받아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그린 것은 1907년의 일이다. 같은 무렵에 포비슴의 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브라크는 세잔의 '모든 자연은 원추(圓錐)와 원통(圓筒)과 구체로 환원된다'라고 말한 내용의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1907년에 공표되었다)의 그 구절에 따라 <에스타크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1908년 이 풍경화 6점은 살롱 도톤에 출품하여 결국 낙선이 되었으나 그 때의 심사위원인 마티스가 '이 그림은 작은 퀴브(입방체)로써 그려졌다'라 평한 말이 퀴비슴의 명칭을 만든 실마리가 되었다. 브라크의 낙선작품은 화상(畵商)인 칸와이러의 화랑에서 개인전으로 발표되었는데 그 화상이 피카소와 브라크가 추구하는 공통점을 인정하여 1907년 가을에 두 사람을 만나게 하였다. 그 후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협력관계가 맺어져 1910년까지 퀴비슴은 전적으로 이 두 사람이 추진한 바가 되었다. 이 시기를 '초기 퀴비슴' 또는 '세잔풍(風) 퀴비슴'이라 한다. 1910년부터 1912년에 걸쳐 퀴비슴은 새로운 발전의 단계를 맞이한다. '분석적 퀴비슴'이라 불리는 시기로 대상의 분해가 철저하게 행하여졌다. 대상은 여러 각도에서 고쳐 보게 되며 갖가지의 모습이 동일 화면으로 재구성되어 가는 것이다. 이 시기의 피카소는 거의 색채를 쓰지 않고 '외과의사가 시체를 해부하는 것처럼'(시인 아폴리네르의 논평) 형태의 분석과 그 질서 있는 배합을 추구하였다. 다음 1913∼1914년에 이르면 '종합적 퀴비슴'의 시기에 들어간다. 이것은 주로 피카소와 환 그리스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는데 분석적 퀴비슴이 해체와 재구성의 사이에서 잃어버린 리얼리티를 되찾으려는 동향이었다. 분석적 퀴비슴은 병(甁)이란 대상에서 원통형을 추출(抽出)하지만, '나는 원통형에서 병을 만든다'라 말하는 것이 그리스의 입장이었다. 촌단(寸斷)된 색면의 통합과 기하학적 질서에 의한 장식효과의 증대를 가져 왔으며, 또한 리얼리티 회복이란 요구에 응하여 콜라주와 파피에 콜레의 수법이 개척된 것을 특기할 수 있다. 이상이 정통적 전개인데 이와 별도로 거의 1910년경부터 레제를 중심으로 개척된 방향으로 다이내믹 퀴비슴이 있다. 이것은 대상을 분해하여 재구성할 때에 화면에 역동감(力動感)을 도입하려는 것이며, 주로 정물의 분야에서 성과를 올린 정통파 퀴비슴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려고 시도하였다. 레제는 기계문명에 대한 관심을 뒤샹, 법으로 구체화하고 있다.

[편집] 섹션 도르파

Section d'or 섹션 도르란 본래 황금비율(黃金比率)에 대한 것인데 B:A=A+B의 관계에 있는 비례를 말한다. 이 비례관계는 시각적으로 가장 조화가 잘 취해진 것이라 하여 고대 그리스로부터 미적 프로포션의 전형이라 생각해 왔다. 이 황금분할을 위시한 기하학적 원리에 입각하여 퀴비슴을 추진한 그룹을 섹션 도르파(派)라 부른다. 이것은 쟈크 비용의 아틀리에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멤버는 마르셀 뒤샹, 피카비아, 메찬제, 마르샹, 들로네, 로트, 뒤샹 비용, 엘방 등이었다. 이 파는 1912년에는 피카소와 브라크를 제외한 거의 모든 퀴비스트를 규합하여 제1회 전시회를 가졌고 기관지(機關誌)를 발행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고 전후에는 1921년에 제2회전(展), 1922년에 제3회 전시회까지 그룹활동을 하였으며, 이 파가 퀴비슴에 끼친 계몽적 역할은 크다.

[편집] 오르피슴

Orphisme 오르피슴은 1912년 로베르 들로네를 주창자로 하여 발족한 퀴비슴의 한 분파이다. 이 명칭은 그리스의 악신(樂神) 오르페우스에서 연유한 것인데, 시인 아폴리네르가 명명(命名)하였다. 전통파 퀴비슴이 엄격한 기하학적 구성에 따라 색채를 망각하고 색채를 선의 종속적인 요소로 떨어뜨리는 데에 반대하여 색채야말로 회화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이며 그 다이내믹한 힘을 화면구성의 기본으로 하려는 것이 이 파의 주장이다. 이로써 공간적 요소(형태)와 시간적 요소(리듬)의 동시성(同時性)을 가져 오게 하여 화면에 음악적인 해조(諧調)가 생기도록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점차로 구상적(具象的) 형태를 떠나 순수한 색채 형태만으로 콤퍼지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 추상회화의 한 분야를 개척하였다. 이 파의 멤버로서 후에 들로네 부인이 된 소니아 테르크와 체코 사람인 프란시스크프카 및 미국인 모간 러셀 등이 있다.

[편집] 퓌리슴

純粹主義 Purisme 퓌리슴이란 일반적으로 예술작품의 미적·양식적 순화(純化)로의 노력을 가리키고 있으며, 현대미술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의 오장팡과 잔레(르 코르뷔지에)가 주장한 조형언어(造形言語)의 순화(純化)를 의도하는 사조(思潮)를 말한다. 1918년에 그 두 사람의 공저로 발간된 <퀴비슴 이후>가 그 마니페스트라 하겠으며, 퀴비슴이 해체한 대상의 조형적 요소를 엄밀한 과학적 질서와 규범에 따라 재조직하여 회화에 더욱 건축적인 구성미를 부여하려는 것이었다. 1920년부터 1925년에 걸쳐 잡지 <에스프리 누보>를 발행하여 퓌리슴의 보급을 꾀했으나, 회화 그 자체에 대해서는 본질적인 영향이 적었고 오히려 건축의 분야에서 르 코르뷔지에의 활약으로 후계자에게 다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퓌리슴이 네덜란드의 신조형주의(新造形主義)와 러시아의 구성주의(構成主義) 발전을 위하여 퀴비슴의 이념을 매개한 역할은 묵과할 수 없다.

[편집] 피카소

Pablo Ruiz Picasso (1881∼1973) 피카소의 친구인 브라크는 퀴비슴에 의하여 자기의 양식을 확립하여 그후 이 양식의 심화(深化)에 생애를 바친 화가이나 피카소는 그렇지 않다. 그는 퀴비슴을 추진하고 있던 시기에도 때로는 리얼한 수법으로 돌아왔으며, 이 경향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퀴비슴에 사실상의 종지부가 찍혀진 무렵부터 더욱 그러하였다. 특히 1917년 피카소에게 한 전기가 닥쳐온다. 이 해에 장 콕토로부터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을 위한 무대장식의 공동작업을 권유받은 피카소는 콕토와 더불어 로마에 갔다. 그리하여 같은 그 해에 일단 파리로 돌아온 피카소는 다시금 나폴리·폼페이·피렌체 등지로 고대 및 르네상스의 미술행각을 한 후, 1920년 드디어 신고전파의 앵글을 생각하게 하는 화풍(畵風)을 택했던 것이다. 이 이후의 3년간을 피카소의 '신고전파 시대'라 한다. 아내인 오르가와 장남 폴을 모델로 한 '모자(母子)' 시리즈는 이 시기의 작품으로서 유명하다. 결국 피카소는 변모하고 예술의 길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세 사람의 음악가(音樂家)>와 같은 모순된 수법의 대작도 나왔으나, 1924년에는 다시 화면구성을 주로 하는 대정물(大靜物) 시리즈에 착수하였는가 하면 다음 1925년에는 환상·기괴의 표현으로 등장한 쉬르레알리슴 운동에 관여했다. 그런가 하면 1930년에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보(變身譜)>와 발자크의 <알려지지 않는 걸작>에 고전주의적 수법인 동판화(銅版畵)에 의한 삽화를 그리는 등 그의 변신은 너무나 다양하여 어지러울 정도이다. 피카소는 '한장의 그림은 파괴의 총계(總計)이다'라 말하지만 그의 예술적 생애도 또한 철저한 자기 부정과 꾸미지 않고 구애받지 않는 활달에 의해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파괴와 변모야말로 그의 예술의 영양제였다. 1934년 피카소는 장기간 모국에 머물렀다. 이 체재의 선물로서 그는 그 해에 많은 투우도(鬪牛圖)를 그렸다. 이 묘화(描畵)는 언제부터인지 그리스 신화의 미노타우로스 전설의 환상이 되어 이듬해에 아름다운 동판화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1937년 독일 공군이 바스크 지방의 무방비한 소도시인 게르니카를 폭격하자 그는 즉시 붓을 들어 이에 항의하는 대작을 그렸다. 이것이 그해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의 에스파냐관(館)을 장식한 유명한 <게르니카>이다. 퀴비슴 이래에 오로지 예술의 범위 내에서만 행하여진 듯이 보인 규문(糾問)의 자세를 피카소는 <게르니카>로써 평화와 자유를 위협하는 침략자를 향하여 규탄(糾彈)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피카소는 남프랑스에 있으면서 주로 석판화(石版畵)와 도기(陶器)의 제작에 열중하였다. 어느 것이나 당시 새로이 손을 댄 분야였으나 이 분야에서도 그는 현대미술의 마르지 않는 샘이라 평가받은 그대로 발견하고 학습을 연구하고, 개척하고, 창조하는 왕성한 의욕을 불태워 커다란 성과를 올렸다. 또 1950년대부터 최근에 걸쳐서는 벨라스케스, 들라크루아, 크라나하, 마네, 다비드 등의 명작과 대결하여 이것을 자기의 양식화(樣式化)한 독특한 모작(模作)에서 새로운 진로를 추구하고 있다. 그에게서 이어받은 현대미술의 부(富)는 그에 의해서 크게 증가하여 갔다.

[편집] 브라크

Georges Braque (1882∼1963) 조르즈 브라크는 1882년 파리 근교의 아르장튀유에서 태어났고, 8세에 집안이 르 아브르로 이사, 브라크도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부친은 도장업(塗裝業)을 하였는데 그도 소년시절부터 그 직업을 견습하면서 1897년 르 아브르의 미술학교 야간부에서 그림을 공부하였다. 이윽고 장식화가를 지망하여 그 수업을 위해서 1900년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는 아카데미 운베르에 다녔는데 여기에서 로랑생과 피카비아와 사귀었다. 그러나 그는 노르망디 출신인 프리에스와 가장 절친하여 이 두 사람은 1906년에 네덜란드로, 1907년에는 남프랑스의 라 시오타로 여행을 하였다. 그동안 브라크는 포비슴에 가담하여 색채가 선명한 작품을 그렸으며, 당시의 그는 프리에스와 나란히 마티스나 드랭의 영향이 농후하였다. 시오타에서 돌아온 뒤에 브라크는 전기(轉機)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포비슴의 그룹을 떠나 에스타크에서 지내면서 고독한 가운데에 세잔이 시사한 자연의 양식화(樣式化) 방향을 추구했다. 그 해에 처음 알게 된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그의 마음에 던진 감동의 파문도 그 곳에서 조용히 반추하고 있었을 것이다. 1908년 퀴비슴 명칭의 유래가 된 <에스타크 풍경>이 살롱 도톤에서 거부당하여 칸와이러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것으로 피카소와의 친교가 깊어지고 세잔풍(風) 퀴비슴에서 점차로 풍경을 제거한 분석적 퀴비슴으로 나갔다. 이 시기에 브라크와 피카소는 서로를 가려 볼 수 없을 만큼 그림이 비슷하였다. 1911년경부터 두 사람의 화면에는 현실 회복의 징조가 나타나 숫자와 알파벳이 구성 요소로 취급되고, 이듬해에는 이것이 파피에 콜레로 발전하여 총합적 퀴비슴에 옮겨 갔다. 화사한 피카소와 대조적인 성격의 탓도 있지만 브라크는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마담 피카소란 별명으로 불려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나 머리에 부상을 입어 1917년에 제대한 후 회화의 길에 복귀하여 예의 총합적 퀴비슴을 완성하였다. 화면에 색채와 대상성을 회복하고 나체와 풍경의모티프도 받아들여서 피카소와 별도의 길을 걷는 독자적 양식에 도달하였다. 1920년 피카소가 고전주의로 전환하였을 때에 브라크는 최초로 조각에 손을 대어 형태애 관한 사고를 더욱 연마해 나갔다. 1930년대 재차 피카소와 가까워졌으나 브라크의 모뉴멘털한 장식성(裝飾性)의 추구는 벌써 피카소와 질적으로 다른 침정(沈靜)과 세련을 구하는 것이었다. 1939년에 시작한 <아틀리에>의 연작(連作)과 1944년에 시작한 <당구대(臺)>의 연작 및 1952년 루브르 미술관의 새를 모티프로 한 대천장화(大天障畵) 등은 브라크가 도달한 지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걸작이다. 브라크는 퀴비슴의 원칙을 생애를 걸고 이지와 질서를 존중하는 프랑스 회화의 전통에 결부시키려던 화가였다.

[편집] 그리스

Juan Gris (1887∼1927) 본명은 호세 빅토리아노 곤살레스이며 1887년 마드리드에서 출생했다. 그곳 미술공예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중도에서 학업을 버리고 동향(同鄕)의 선배인 피카소를 따라 1906년 파리에 나왔다. 처음에는 캐리커처를 그렸으나 1911년에 회화로 전환하여 퀴비슴 운동에 참가하였다. 1912년 앙데팡당에 첫 출품, 이후부터 퀴비슴의 궤도를 달리는 역작을 계속 발표하여 퀴비슴의 기수(旗手)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의 색채는 그 이름(그리스=灰色)이 표시하는 바와 같이 결코 다채롭지 않았으나 형태를 대범하게 파악하는 기하학적 평면을 향하는 전개에는 비범한 재능을 보여주었고, 총합적 퀴비슴의 양식을 확립하기 위하여 다대한 공헌을 하였다. 퀴비슴이 2차원의 회화로서 장식성에 자각한 것은 그리스의 시사가 크다. 그는 섹션 도르의 그룹과도 교류하였는데 1927년 요독증(尿毒症)으로 요절하였다.

[편집] 레제

Jules Fernand Leger (1881∼1955) 프랑스 화가. 페르낭 레제는 1881년 아르장탕에서 출생하였다. 16세부터 4년간을 어느 건축사무소에서 데생을 수업하였고 1900년에 파리로 나왔다. 1902년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고전파의 화가이며 조각가인 장 레옹 제롬의 가르침을 받았다. 1909년까지 초기의 제작은 주로 후기 인상파 및 포비슴의 영향을 볼 수 있지만 이 해에 브라크 및 퀴비슴과 접촉하게 되자 초기의 제작방법을 버리고 퀴비슴의 기하학적 체계에 적응하면서, 이에 역동감을 부여하는 다이내믹 퀴비슴의 방향을 개척해 나갔다. 이 추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군으로 중단되었으나 전후 1925년까지의 사이에 레제의 양식으로 확립되었다. 크고 작은 톱니바퀴와 각종의 연동(連動) 장치가 동적으로 단속(斷續)하는 화면 공간에 메커니컬한 인간상이 배합되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 때에 그의 밝고 선명한 채색은 이 기계와 인간과의 공존(共存)을 대범하게 긍정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것은 기계문명에 대한 그의 적극적인 관심을 뒷받침하는 것이라 하겠다. 1925년 이후 그의 화면에는 추상적인 구성을 목표로 하는 형태가 점점 강화되어 간다. 르 코르뷔지에, 몬드리안과의 교우에서의 시사도 있어서 그의 건축·디자인·인쇄 등 현대문명이 제공하는 것과 회화와의 결합에 지대한 흥미를 가지고 이것을 추진하였다.

[편집] 들로네

Robert Delauney (1885∼1941) 프랑스 화가. 로베르 들로네는 1885년 파리 태생이며 그림은 독학으로 최초 쇠라 및 포비슴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신인상파의 색채 분할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를 연구하였다고 한다. 1909년 피카소와 브라크의 퀴비슴에 기울어졌으나 그들이 추구하는 것에 동화(同化)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것은 퀴비슴의 구성에 포비슴의 강렬한 색채를 도입하려는 시도이며 색채를 잃어버린 분석적 퀴비슴에 대한 하나의 반증(反證)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1912년경 그의 양식으로서 어떤 총합에 도달한 것이며, 아폴리네르가 명명(命名)한 오르피슴이 그것이다. 들로네는 한편 독일적인 사고에 관심이 깊어 예술과 과학의 결합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것이 다른 제예술(諸藝術)과 폭넓은 통합을 의도하는 '블라우에 라이터' 그룹과 교류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1912년 '블라우에 라이터' 전에는 출품자로 참가하였고 이 파의 마케, 마르크 및 클레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점을 볼 수 있다. 또 칸딘스키와의 접촉이 점차로 시각적 대상에서 멀어져서 리드미컬한 색채 구성으로 향하여 가려던 들로네에게 1912년 처음으로 비구상(非具象)의 작품을 그리도록 하였던 것이다. 1914년부터 1920년까지 그는 대부분의 기간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서 보냈으며 그 동안에 한때 다다이슴과 교섭도 있었다. 파리에 돌아온 후 나이가 더할수록 그의 작품은 더욱더 추상으로 기울어졌다. 퀴비슴에 색채를 도입한 점 및 색채의 리듬에 입각하여 퀴비슴에서 추상으로 향한 길을 열었다고 하는 점으로 그가 추상화에 끼친 선구적인 공적은 칸딘스키와 더불어 실로 크다 하겠다. 작품 <에펠탑>(1911)은 초기에 있어서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졌고 그의 아내 소니아도 오르피스트로 활약한 화가이다.

[편집] 아폴리네르

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 프랑스 시인, 평론가. 본명은 윌헬름 아폴리나리스 코스트로위츠키라 하여 1880년 폴란드인을 양친으로 로마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파리에 나와서 막스 자콥 등과 더불어 전위시인(前衛詩人)으로 활약하는 한편, 앙리 루소와 포비슴 회화를 통하여 미술에 접근하여 전위미술운동을 문필로써 추진하여 큰 공헌을 하였다. 특히 퀴비슴의 발전은 그의 주장과 평가의 도움이 컸고 피카소와 브라크도 그의 열성적인 격려와 지지를 받고 있다. '퀴비슴을 종래의 그림과 엄격하게 구별하는 것은 그것이 모방의 예술이 아니고 창조에까지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이다'라고 재빨리 예견한 사람도 그였다. 또 들로네가 추구하는 퀴비슴의 한 분파를 시인하여 이것에 오르피슴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1912년 이후 그는 미래파(未來派)의 추구에 공감하여 여기에 접근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이 그룹과 갈라지고 키리코의 환상적인 형이상회화(形而上繪畵)에로 관심을 바꾸었고 이는 뒤의 쉬르레알리슴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1951년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파리의 상 제르맹 데프레 사원(寺院) 근처에 그의 필명을 딴 '아폴리네르 거리'가 생겼다. 시집에 <알코올>(1913), <칼리그람>(1918)이 있고 평론집에 <퀴비슴의 화가들>(1913) 등이 있다.

[편집] 미래파

未來派 futurism 미래파란 1909년 시인 마리네티가 잡지 <르 피가로>에 발표한 '미래파 선언'을 실마리로 전개된 이탈리아의 전위운동 및 그 그룹을 말한다. 원래 이 운동은 미술이라는 한 장르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고 문학·음악·건축·연극·영화 등 다방면에 걸친 예술혁신운동이었고 르네상스 이래 이 나라에 삽체(澁滯)하고 있던 무거운 전통의 멍에를 한꺼번에 타파하려는 운동이었다. 더욱 이러한 운동에 독일 및 오스트리아에 추종하는 당시의 미온적인 정치와 사회 상황을 개혁하려던 젊은 세대의 의욕이 합쳐져 상당히 과격한 성격을 지녔다. 계속해서 선언이 발표되어 실작(實作)보다도 논의가 선행되는 감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통속적으로 '태워 버리는 선언'이라 일컫는 마리네티의 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들의 혐오와 모멸을 가지고 세상의 속물 근성에 현학적이고 아카데믹한 것이 아닌 주의에 일격을 가하자. ……권하건대 모든 미술관을 태워 버리자." 이 마리네티의 선언에 대하여 미술의 분야에서 호응한 화가는 밀라노에 있던 움베르토 보초니, 루이지 루솔로, 카를로 카라 들과 로마에 있던 자코모 발라 및 파리의 지노 세베리니 들이었다. 그리하여 1910년에는 '미래파 회화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분야에서는 보초니가 중심이 되어 활약하였는데 그는 미래파 회화의 당면한 과제를 '우리들은 색채분석(色彩分析:쇠라, 시냐크의 분할주의)과 형태분석(形態分析:피카소나 브라크의 분할주의)을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였다. 즉 미래파는 새로운 회화의 입장으로 분석적 퀴비슴의 흐름을 따른 것이지만 그 정적인 화면 공간에 만족하지 않고 여기에 속력·동감·소란 등 현대문명이 노출해 내는 다이너미즘을 첨가하여 '관객을 사로잡고 흡수하여 보는 자를 화면의 중심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보초니)고 하였다. 퀴비슴이 행한 실재의 해부도(解剖圖)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운동의 전개도를 그리려는 데에 착안점의 현저한 차이를 볼 수 있다. 화면은 심한 진폭을 나타내어 움직이는 공간을 현출(現出)시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질주하는 말에 스무 개의 다리가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이리하여 '어떤 스포츠카도 사모트라케의 니케 이상으로 장려하다. 오늘날에 있어서 요구되는 것은 최고의 스피드에 지나지 않는다.'(마리네트) 라는 현대문명의 소산에 대한 긍정과 그 소산을 조형요소로서 만들려는 새로운 태도를 표명하고 있다. 조각의 분야에서도 미래파는 종래의 돌(石)이나 브론즈 등 단일한 소재로 표현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하고 시멘트·유리·철사 및 전광(電光)에 의한 복합적인 조형의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소음을 음악에 받아들여 오늘날의 뮤직 콘크리트의 선구가 된 루솔로의 '음향예술의 선언'(1913)도 같은 관점에 서 있다고 하겠다. 미래파는 전통과 기술에 대한 혁명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제정(帝政) 말기 러시아의 전위미술(前衛美術)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또 기계와 스피드에 대한 현대인의 감수성을 계발하는 데 전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대에 대한 낙천적 인식으로 그 예술이념은 오래도록 명맥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현대문명이 최초의 모순과 참화(慘畵)에 직면하였을 때에 이 운동은 소멸하였다.

[편집] 보초니

Umberto 1882∼1916) 이탈리아의 화가, 조각가. 그는 1882년 이탈리아 칼라브리아의 레지오에서 출생하였고, 1900년경에 로마로 나와 발라에게 사사(師事), 이어서 밀라노에 가서 브레라 미술학교에서 공부했다. 그가 로마에서 사사하였던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는 1871년 출생으로 젊었을 때부터 아카데믹한 화풍(畵風)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발라는 후에 프랑스로 가서 신인상파를 연구하고 색과 빛을 저 스스로가 추구하는 과제로 삼게 되면서 아카데믹한 명성을 돌보지 않고 미래파의 운동에 참가한 화가이다. 1909년 보초니는 미래파 운동의 주창자인 시인 마리네티와 사귀어 그 선언의 서명자의 한 사람이 되었고 그 후에 그의 활동은 회화·조각 및 이론의 각 분야에 눈부셔 미래파 운동을 추진하는 큰 힘이 되었다. 1910년의 '미래파 회화 선언', 1912년의 '미래파 조각 선언'은 그가 기초하였던 것이다. 원래 보초니는 화가로서보다 조각가로서의 자질이 많아서 운동의 형태를 공간적으로 어떻게 조형하여가는가에 대하여 하나의 새로운 기축(機軸)을 열었다. 소재에 대해서도 기성의 개념을 타파하는 자유롭고 현대적인 사고를 품어 행여나 회화와 조각의 장르를 구별하는 것을 철폐할는지 모를 새로운 조형이 그에게 기대되었으나 1916년 뜻밖의 낙마(落馬) 사고로 요절하여, 움직이는 대상을 즐겼던 그에게는 퍽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편집] 형이상화파

形而上畵派 Pittura Metafisica 이탈리아의 키리코가 주창하여 칼라, 모란디 들이 추진한 유파(流派)를 일컫는다. 주창자 조르조 드 키리코(Giorgio de Chirico)는 1888년에 그리스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사람인데 최초에는 기술자가 되기 위한 길을 걷다가 회화로 전향, 1906년부터 1909년까지 뮌헨에 머물면서 뵈클린과 클링거의 화풍(畵風)을 배웠다. 그후 이탈리아 각지로 여행하여 르네상스 미술을 연구하고 더욱 1911년에서 1915년까지는 파리에서 퀴비슴에 접(接)하였다. 형이상화파의 제창은 파리체재 이후의 일이다. 키리코의 사상적 근저에는 독일 낭만파와 니체, 쇼펜하우어 등 독일 철학에 깊이 기울어 있고, 이것이 그를 독특한 환상과신비에 넘친 화풍으로 유도해 갔다. 그는 미래파가 가진 다이너미즘을 부정하여 진공(眞空)을 생각나게 하는 정적한 화면 공간을 그리고, 더욱 퀴비슴이 버린 원근법(遠近法)을 이용하여 흉상(胸像)과 인체 모형과 기하학적 물체의 단편 등을 거기에 배치하였다. 그 화면은 키리코가 말하듯이 '사물의 형이상학적인 심리'를 묘출(描出)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정감의 영역을 뚫어버린 환상은 가끔 쉬르레알리슴의 선구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1924년 쉬르레알리슴의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키리코는 아카데믹한 작품으로 바꾸어 전위적인 활약 무대에서 물러나와 있었다.

[편집] 아모리 쇼

Armory Show 병기고(兵器庫) 전람회를 말한다. 1913년 2월 뉴욕의 제69연대의 병기고에서 유럽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큰 규모의 전람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전람회를 개최장소로 한 연유로 아모리 쇼라고 부른다. 세잔·고흐에서 포비슴·표현주의·퀴비슴에 이르는 현대미술이 처음으로 미국에서 공개된 획기적인 전람회였다. 회장은 분노와 조소로 싸였다고 하는데 당시 유럽에 이식(利植)된 구미술(舊美術)에 안일하게 젖어 있던 미국 미술계에 준 충격은 대단히 컸다. 특히 퀴비슴이 전시된 화실은 '공포의 방'이라 불리어 마르셀 뒤샹의 작품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등은 이것을 이해하려는 사람도 없어 스캔들의 일종이 되었다. 그러나 뉴욕에서 8만명, 시카고 및 보스턴의 순회 전람회에서 18만명의 관중이 모인 이 전람회의 성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국의 젊은 세대는 싸우는 무기를 여기에서 얻었던 것이다.

[편집] 추상의 여러 유파

[편집] 레이오니슴

Rayonisme 光線主義 레이오니슴은 유럽전위 미술사조의 영향을 받아 20세기의 러시아에서 가장 일찍 싹튼 전위운동이다. 미하일 라리오노프와 그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에 의해 주창되고 또 추진되었다. 퀴비슴(특히 오르피슴)과 미래파와의 총합을 지향하여, 색채를 독자적인 법칙성과 운동성에 의해서 질서를 갖도록 화면에 예각적(銳角的)인 색채 형태를 다차원적으로 배합해 가는 추상화다. 1913년에 발표된 마니페스트는 다음의 구절로 시작한다. "현대의 수호신-그것은 바지이며, 야크이며, 버스이며, 비행기며, 철도며, 호화선이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불가사의! 비교도 할 수 없는 세계사의 이 커다란 에폭! 이러한 시대에 개성이 다 무어냐, 우리들은 예술작품에 있어서 개성의 가치를 부정한다." 즉 기계시대의 현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인식에 입각하여 개성적이고 정감적인 과거의 묘사적 회화를 부정하여 순수한 색과 형식의 콤퍼지션을 행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혁명 전야의 러시아에는 이러한 미의식(美意識)의 변혁이 그대로 정치적인 자유에의 희구와 권위에 대한 반항으로 통하였던 것이다. 이 점은 미술의 테두리 안의 개혁과는 다른 격렬함을 지니고 있었다. 마니페스트의 끝 구절에는 '그리하여 예술의 참다운 자유가 시작되어 삶은 예술의 법칙으로 형성된다'라는 말로 맺어져 있다. 1914년 라리오 노프 부처는 레이오니슴의 전람회를 파리에서 개최하였는데 거기엔 아폴리네르가 카탈로그의 서문을 써서 소개를 하였다. 그러나 레이오니슴의 주장은 국제적인 무대에서 널리 공감을 불러일으킬 운동이 되지는 못하였다. 라리오노프느 후에 파리로 이주하여 오로지 무대미술의 분야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갔으며, 여기에는 러시아의 민족적 장식미술에서 출발한 아내 나탈리아의 협력이 큰 추진력이 되었다.

[편집] 쉬프레마티슴

Suprematisme 絶對主義 쉬프레마티슴은 1915년 말레비치가 주창하여 러시아 혁명 전후의 미술계를 구성주의와 함께 2분하여 전개된 전위 미술 사조 및 그 운동을 말한다. 구성주의가 물질적 소재의 개발에 의해 외적인 현실로 향한 비회화적인 사조인 데 반하여 쉬프레마티슴은 2차원의 세계에서 인간의 내적인 현실에 대결한 사조라고 말할 수 있다. 퀴비슴의 영향을 받은 말레비치는 순수한 형태에 의한 화면 구성을 목적하였고, 그러기 위하여 모든 시각적인 대상을 버리고 이것을 조금도 상기시키지 않는 추상적 도형을 가장 간결하게 응축(凝縮)시킨 형태로써 화면에다 배치하였다. 이것은 검은 정방형을 기조(基調)로 하여 여기에 원·삼각형·십자형 등을 조합한 단순한 화면인데, 말레비치에 의하면 이 화면은 무슨 상징도 기하학도 도안도 아니며, 내면의 질서에 따라서 스스로 형성되고 구성된, '자연을 훨씬 초월한 순수한 감각'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감각 바로 그것의 표현을 그는 '절대'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 쉬프레마티슴 선언에는 시인인 마야코프스키의 지지와 협력이 있었다고 하며, 화면에 보이는 것에는 어떠한 비유와 설화(說話)도 시사하는 일 없이 이른바 미지의 공간 체험의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말레비치의 작품에는 포에지 바로 그것의 시각화가 겨냥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단순한 도형은 현상에서 추출된 상형문자가 아니고 감각의 순화에서 생겨나온 구체적인 조형언어이다. 그가 '절대주의란 비구상적 제작에 의한 새로운 리얼리즘이다'라고 하는 그 진의도 이 점에 있다. 추상미술이 현상의 추출 작업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쉬프레마티슴의 사상은 대단히 중요한 미술의 가치 전환을 시사하는 것이며 그 영향력은 크다. 러시아 본국에서는 소비에트의 정책 변경과 함께 소멸한 운동이지만 그 이념은 널리 유럽에 있어서의 추상미술의 저류가 되었다. 특히 신조형주의(新造形主義)와 바우하우스에 끼친 영향은 무시할 수가 없다. 더욱 말레비치의 감화를 직접 받은 엘 리시키는 혁명 후에 쉬프레마티슴의 원칙에 입각하여 그래픽 디자인의 분야에 새로운 면을 개척하여 큰 공헌을 남기고 있다.

[편집] 말레비치

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1878∼1935)러시아 화가. 키예프에서 출생하였고, 초기의 수업은 인상파 및 포비슴에서 출발하였으나 1912년 파리로 나와 퀴비슴을 접하여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1913년 백지(白紙)에 검은 정방형만 그린 작품을 발표하여 화제를 일으켰고, 이 작품을 계기로 하여 감각의 궁극을 탐구하는 쉬프레마티슴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1915년 시인 마야코프스키의 협력으로 '쉬프레마티슴 선언'을 발표하여, 러시아 전위미술의 기수로서 활약하였다. 1919년에는 모스크바 미술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1921년에는 레닌그라드 미술학교의 초청을 받았다. 1926년 그는 단기간 독일에 머물렀는데 귀국 후에 문화정책을 변경한 당국에 의하여 공직서 추방당하였고, 그 이후는 오직 실용미술(제도·직물·벽지)의 분야에만 종사하다가 1935년 레닌그라드에서 사망하였다.

[편집] 리시츠키

El Lissitzky (1890∼1941) 리시키는 스몰렌스크에서 출생하였다. 1909년부터 1912년까지 그는 다름시타트의 고등기술학교에서 건축을 배웠으며, 귀국하여 말레비치와 사귀어 쉬프레마티슴의 유력한 작가로 활약하다가 1921년 모스크바 예술 아카데미의 교수에 취임하였다. 그 해에 재차 독일에 가서 모홀리 나기와 친교를 맺었다.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주로 스위스에서, 1925년에서 1928년까지는 주로 하노버에 머물렀고 그 동안 장 아르프, 반 도스부르크, 반 데르 로에 등과 협력해 많은 인쇄 디자인과 디스플레이·포스터의 제작을 통하여 유럽의 추상미술운동 및 현대 디자인운동에 큰 공적을 남겼다. 마야코프스키의 시집 <낭송을 위하여>의 삽화와 장정(裝幀)은 그의 대표작의 하나이다. 만년에는 나치스에게 추방당하여 모국으로 돌아가서 1941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였다.

[편집] 구성주의

構成主義 construtivism 구성주의는 혁명 전후 러시아에서 전개된 전위운동인데 타틀린, 로드첸코, 가보, 페브스너 등이 주창하고 추진하였다. 퀴비슴이 시사한 추상적 조형과 미래파가 촉발한 기계주의적인 이념의 영향을 받아 이것을 독자적인 방향으로 발전시켰고, 더욱 혁명 전후 민중의 입장도 반영하여 미술뿐만 아니고 건축·공예·무대·디자인 등 광범위에 걸친 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미술의 분야에서 구성주의는 오직 물질의 세계와 대결하여, 이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을 대폭적으로 미술에 도입함으로써 미술과 물질계에 가로놓여진 장벽을 한꺼번에 제거하려고 하였다. 즉 종래에 오로지 개인적 정감의 표현에 사용된 그림물감을 폐지하고 나무·쇠·금속·돌·글라스 등 시대의 요구와 민중의 생활에 밀착된 물질적 소재의 개발과 이들 새로운 소재를 가지고 공간 구성을 표현하려는 데에 그 특색이 있다. 이것은 퀴비슴에 있어서도 파피에 콜레와 콜라주의 기법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 시도되었던 것인데, 구성주의는 이러한 착안을 더욱 철저화한 것이다. '현실의 사물을 현실의 공간에' 이것이 구성주의자의 모토이며 그 근저에는 단지 기법상의 모험에 그치지 않고 미술을 질적으로 전환시키려고 하는 의욕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이 주목된다. 1913년경부터 혁명 직전까지의 구성주의에 의한 부조 작품은 사물이 갖는 중후한 실재감을 대담한 구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새로운 공간의 탐구는 평면적 구성에서 필연적으로 입체적 구성으로 나아가서, 혁명 후의 유물적(唯物的)인 사상에 의하여 더욱더 새로운 환경의 구축에로 의욕을 가지게 하였다. 타틀린이 설계한 <제3 인터내셔널의 기념탑>(模型)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시세(時勢)의 작용도 있어 혁명 후의 구성주의는 예술을 한갓 기술로 대체하여 예술이 무(無)로 돌아가는 것도 불사한다고 하는 과격한 풍조가 생겨났다. 모스크바에서 구성주의의 대총합 전시회가 열렸던 1920년을 최종의 피크로, 그 해에 페브스너와 가보의 형제가 이 그룹을 이탈하고, 이윽고 소비에트 문화 지도이념의 전환으로 인하여 이 운동은 형식주의라 비판을 받아 러시아에서의 활동은 끝났다. 그러나 그 이념은 유럽에 전파되어 특히 독일의 바우하우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또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귀국한 칸딘스키도 1921년까지 이 운동에 참가하였다.

[편집] 타틀린

Vladimir Evgrafovich Tatlin (1885∼1953) 구성주의의 기수였던 블라디미르 타틀린에 관해서는 그의 활약이 혁명 전후의 러시아 본국에 한정되어 있어서인지 그의 전기적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예술은 1914년 마테리알, 매스 및 콘스트럭션을 그 원칙으로 인정하였을 때에 이미 1917년의 사회혁명을 선취하고 있었다"고 말한 그는 목재와 금속 등 본래의 물질로 부조의 제작뿐만 아니고 혁명 후에는 노동복과 난로, 기념비나 글라이더의 설계까지 구성주의의 원칙에 따라 다방면으로 제작의 장르를 펼치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무릇 사물에 형태를 부여하는 행위는 모두가 예술인데, 이러한 주목되는 예술개념의 확대도 혁명 후 유물사상에 젖은 젊은 세대 및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전환한 미술정책이 용인하는 바가 되지 못하였다. 타틀린은 페트로그라드·키예프·모스크바 등지에서 일시적인 교육활동을 하였으나 고독하게 은퇴해 버렸다.

[편집] 로드첸코

Alexandre Mikhailovich Rodchenko (1891∼1956)로드첸코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생했고 카잔의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로 나와 말레비치와 사귀어 한때 쉬프레마티슴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후 타틀린과 더불어 구성주의의 대표적인 작가로 활약하였으며, 그 자신도 비구상(非具象)의 조형에 대하여 별도로 독자적인 주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제작분야는 앞의 타틀린과 같이 다방면에 걸쳐 있지만 특히 실용적인 분야의 공헌은 컸다. 예를 들면 포토 몽타주의 수법도 그가 개척한 것이다.소비에트의 문화정책 전환 후는 오직 선전미술 및 각종의 디자인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 장식 공예전(工藝展)에 출품한 <노동자 그룹의 모형(模型)>은 건축과 실내장식의 분야에 있어서 그의 활약을 보여 주었던 것이며, 당시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편집] 데 스틸

De Stijl 양식(樣式)이란 뜻이다. 데 스틸은 1917년에 테오 반 도스부르크가 라이덴에서 결집한 그룹의 명칭인데, 1931년까지 같은 이름의 기관지를 발행하여 추상미술의 한 유파(流派)를 이루었다. 멤버로는 몬드리안, 반통겔루, 아우드, 리트벨트 등이 있으며 미래파의 세베리니, 쉬프레마티슴의 리시츠키, 조각가인 브랑쿠시도 한때 이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 운동은 주로 몬드리안과 도스부르크의 <데 스틸> 지(誌)에 발표한 논문과, 바우하우스에서 발행된 저서 및 유럽 각지에서 행한 강연 등으로 널리 보급되어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목적하는 바는 단순한 미술 창작의 분야만이 아니고 생활양식의 전반에 걸치는 예술의 총합적 혁신에 있었다. 기하학적인 선과 순수한 색채와의 몰개성적(沒個性的)인 관계에 기초를 둔 이 운동의 미학은 회화에 몬드리안과 도스부르크, 조각에는 반톤게를로, 건축에는 아우드, 실내장식과 가구에 리트펠드 등 이들이 각기의 분야에서 구체화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이 지향하는 총합(總合)은 너무나 유토피아적 성격인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실현되지 못하고, 그 이념은 오히려 독일의 바우하우스에게 계승되었다. 몬드리안은 1920년에 저서 <신조형주의(Neo Plasticism)>를 발표하여 데 스틸의 주장을 이론적으로 추진시키는 한편, 시각을 속이지 않는 수평·수직의 선분에 의하여 회화형식의 순화를 달성하여,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시조(始祖)로서의 길을 개척하였다. 도스부르크는 추상이야말로 가장 구체적인 현실을 표현하는 것이라 하여 기관지(機關誌)에서 '요소주의(要素主義)'의 선언을 하였으나, 그의 평면 분할의 수법은 몬드리안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리고 데 스틸의 네덜란드어(語)의 발음은 데 스타일이다. 또한 이상의 운동을 신조형주의란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편집] 몬드리안

Piet Mondrian (1872∼1944) 피에트 몬드리안은 네덜란드의 아머스포르트에서 출생했다. 초기의 그림은 인상파 및 아르누보의 영향하에 있었으며, 이 시기의 그는 암스테르담의 아카데미 야간에 다니고 있었다. 1907년 포비슴과 접하고, 이어 1912년부터 1914년까지 파리에 체재하면서 신인상파와 분석적 퀴비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퀴비슴의 영향은 결정적이며, 이 시기에 그려진 정물화의 시리즈에서는 대상을 그 기본형태에까지 환원하려는 의욕이 현저하다. 귀국 후에 그는 반 도스부르크와 더불어 라이덴에서 데 스틸의 그룹 및 같은 이름의 잡지로 퀴비슴 영향하에 발견하였던 기하학적인 순수 추상의 길을 제작에서나 이념에서나 심화하여 갔다. 플러스, 마이너스의 짧은 선의 집적(集積)이 타원형을 구성하여 가는 '콤퍼지션'을 시도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1919년 그는 재차 파리에 가서 1920년에 저서 <신조형주의(Neo Plasticism)>를 발표하여 스스로 자기의 이론적 입장을 명백하게 하였다. 이 무렵부터 제작도 한층 더 명확화하게 되고 순색의 사용과 수평·수직의 두 직선으로 단순하고 질서 있는 화면 구성을 하여 그의 독자적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그가 목표한 바는 자연에 길항하는 그리고 항시 불변한 리얼리티를 생산하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그는 센 강(江)이 바라다보이는 조망이 좋은 아틀리에에 있으면서도 종일 창문을 닫고 제작하였다고 하는 에피소드는 그러한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후 그는 독일과 영국으로 여행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에 이주하여 1944년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거기에서 제작한 <브로드웨이 부기우기>(1942∼1943)는 그 만년의 수작으로 유명하다. 그는 기하학적 추상의 시조이며 그 영향은 매우 크다.

[편집] 도스부르크

Theo van Doesburg (1883∼1931) 테오 반 도스부르크는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부터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고, 화가와 조각가로 제작을 하면서 이론가로서도 적극적으로 활약하였다. 초기에는 도미에에 쏠린 적도 있었으나 1917년 라이덴에서 데 스틸의 그룹을 만들고 동명의 기관지를 발행하였으며, 그는 실제 제작과 더불어 이론적 활동에도 종사하여 여러 곳에서 강연을 하면서 데 스틸 운동의 보급에 힘썼다. 저명한 논문으로는 '요소주의(엘리멘터리즘)'라고 제목을 붙인 선언으로, 자연의 구상성을 일체 배제한 기본적인 형태와 순색의 배합에 의해서 참다운 리얼리티를 창조하는 길을 설파하였다. 그의 작품은 몬드리안과 매우 비슷하고 분석적 퀴비슴을 궁극적으로 추진한 기하학적 추상으로서 평면의 분할에 그 특색을 볼 수 있다. 1931년 다보스에서 사망하였다.

[편집] 바우하우스

Das Bauhaus 건축의 집이란 뜻이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바이마르에서 공립 미술학교와 공립 공업학교를 합병하고, 새로이 건축의 분야를 첨가하여 창립된 국립 종합 조형학교이며,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가 입안자이며 지도자가 되었다. 그 요람의 목적의 항(項)에는 '바우하우스는 모든 예술 창조를 하나로 결집하고, 모든 예술 부문-조각·회화·공예·수공을 새로운 건축의 긴밀한 구성 요소로서 재통일하는 데에 힘쓴다'라 하였다. 중세의 바우피테(교회 등 대건설의 현장에 만들어지는 각종 직인의 조합조직)에서 따 왔다고 하는 바우하우스에는 위의 건축을 바탕으로 총합적인 이념에 입각하여, 공방(工房)을 기본으로 독특한 연구 교육의 조직을 갖추어, 한 공방에서 형태와 실기의 연구지도가 일시에 진행되었다. 공방에는 벽화, 글라스화·판화·제도(製陶)·금속·직물 등이 있었고, 각 분야에는 칸딘스키, 클레, 파이닝거, 마르크스, 모홀리 나기, 무헤 등 전위 미술가가 형태의 연구지도를 담당하였다. 이들 지도자를 프로페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포름 마이스터(마이스터는 공방 스승이란 뜻)라 칭한 것도 미술과 손으로 하는 수공 사이에 본질적인 차별을 두지 않는 바우하우스의 새로운 교육 이념에 의한 것이다. 이리하여 바우하우스에서는 자칫하면 미술가의 자의(恣意)에 빠지기 쉬운 미술이 건축이라고 하는 실제적인 목적을 가짐으로써 합목적적으로 되살아날 수가 있고, 그 미적인 성과가 건축·공예·디자인 등으로 환원되어서 이들 분야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926년 바우하우스는 데사우로 이전하여 그 때까지의 표현주의적 이론에 새로이 합리적 기능적인 구성 이론을 첨가하고, 가구집기로부터 인쇄업무까지 취급하는 '바우하우스 유한회사'를 병설하여 국제양식센터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이 시기가 되면 바우하우스에서 배운 요제프 앨버스, 헤르베르트 바이어 등 젊은 세대가 교수진에 들어가게 된다. 바이어가 고안·디자인한 스틸 파이프제(製)의 의자는 바우하우스에서 수준의 척도를 표시해 주는 것으로 국제적인 평판을 받았다. 1928년 그로피우스가 지도적 지위를 사임하고 후계자로서 한네스 마이어가, 또한 1933년에는 미스 반 데르 로에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예술의 자유에 대한 나치스의 정치적 압력이 강화하게 되어, 바우하우스도 사학교(私學校)로 격하되고 베를린으로 옮겨졌으나 이윽고 폐쇄당해 버렸다. 그러나 그 이념은 현대미술의 여러 분야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1937년, 모홀리 나기는 그로피우스를 고문으로 추대하여 시카고에서 뉴 바우하우스를 설립, 그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미국에 전하였으며 이것이 훗날의 시카고 디자인 연구소이다.

[편집] 파이닝거

Lyonel Feininger (1871∼1956) 그는 독일계(系) 이민의 가문으로 뉴욕에서 출생하였다. 1887년 독일로 유학, 함부르크 공예학교와 베를린 미술학교에서 배웠고, 처음에 그로테스크한 삽화를 그리는 소묘가(素描家)로 출발하였다. 그후 수차에 걸친 파리 체재 후 1906년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하여 파리의 전위(前衛) 회화와 접촉하면서 자기 자신의 양식을 모색해 갔다. 1911년 뮌헨의 '블라우에 라이터'파(派)에 가입하였으며, 이 시기에 퀴비슴과 오르피슴의 영향을 받아 그의 독특한 양식이 확립되었다. 그것은 프리즘의 분광(分光)이 결정(結晶)한 것과 같이 보이는 시가지·탑·다리·선박 등의 구축물의 표현인데, 교착하는 직선과 색면의 리드미컬한 구성은 추상과 구상의 개념적 구별을 지양하는 자율적인 화면을 만들어 냈다. 1919년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 초청을 받아 판화의 공방(工房)을 담당하는 포름 마이스터로서 연구교육의 활동을 하였다. 또한 칸딘스키, 클레, 야우렌스키와 '청색의 네 사람'의 그룹을 만들어 상호간에 연구와 수련을 쌓았다. 1936년 나치스에게 추방당하여 미국으로 돌아왔으며, 만년의 작품은 특히 구성이 엄격한 것이 특색이다. 1956년 뉴욕에서 사망하였고, 그에게 붙여진 '독일 표현파의 거장(巨匠)'이란 찬사는 그의 작품과 더불어 미국의 젊은 화가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편집]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1866∼1944) 러시아 출신의 화가. 추상화의 창시자. 모스크바 출생. 1921년 모스크바 미술아카데미의 교수직을 버리고 조국을 이탈한 칸딘스키는 1922년 바우하우스의 포름 마이스터가 되었다. 그가 담당한 것은 벽화 공방이었는데, 이후 1911년 바우하우스가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나아가서 사학으로 격하되어 베를린으로 이전하고 1933년 정치적 압력으로 폐쇄당하는 날까지 계속 그 자리에 있었으며, 바우하우스의 말기에는 부교장의 자격으로서 널리 신망을 모았다고 전해진다. 바우하우스에서 강의록을 기초로 하여 1926년에 그의 제2 이론적 저작인 <점·선·면>이 출판되었다. 회화의 기초적인 평면에 대한 기본적인 조형요소의 관계에 대하여 기술한 것인데, 제1의 저작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칫 잘못하면 무미건조하게 되기 쉬운 조형의 기본적인 사고에 직관과 상상의 비합리적인 내용을 기술한 유니크한 저작이다. 당시 합리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가려던 바우하우스에 있어서 그와 같은 존재는 매우 귀중하였던 것이다. 바우하우스에서 배운 조각가 막스 빌은 '칸딘스키는 청년들의 의혹을 제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확실한 판단력을 길러 주어, 끊임없는 비판과 자기 비판을 환기시킨 인물이었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그의 제작에 있어서 1910년부터 1920년에 걸치는 기간에는 색채와 형태의 격렬한 다이너미즘이 1920년에서 1924년에 이르는 시기에는 자취가 없어지고, 대신 명확한 형식에 의한 구축적인 콤퍼지션이 현저해진다. 이것은 모국에서 구성주의와 쉬프레마티슴을 체험한 성과이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는 이 경향이 더욱 순화되어 이른바 원(圓)의 시대에 들어간다. 1931년 그는 이집트·그리스·터키로 여행하여 동양의 풍물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으며, 이 여행에서 얻은 인상이 익어서 다채로운 형태 가운데에 동양의 여정(旅情)과 향수를 표현한 것은 1933년 파리에 이주한 뒤의 일이었다. 이 만년의 제작으로 그는 원의 시대의 기하학적인 추상을 탈피하고 형식과 색채에 의한 서정적 내지는 환상이 넘치는 음악적 해조(諧調)를 만드는 데에 성공하였다. 내면의 표출을 주안점으로 하는 추상의 이념은 이론적으로도, 실제적인 제작에서도 그에 의하여 기초가 닦여진 것이다. 1944년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편집] 클레

Paul Klee (1879∼1940) 그는 스위스 베른 근처인 뮌헨부후제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독일에서 이주한 주립 사범학교의 음악교사였고 모친은 젊었을 때에 가수를 지낸 적이 있었던 스위스 부인이었다. 클레는 그림보다 오히려 음악적인 환경에서 성장하여 7세 때부터 바이올린 교습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음악에 대한 애호는 평생 변하지 않아, 1906년에 결혼한 처 릴리이도 피아니스트였으며, 이들 부부는 곧잘 바흐나 모차르트, 베토벤의 만년 작품인 소나타 등을 듣고 또 연주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으며, 음악이 클레의 그림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라고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1899년 김나지움을 졸업한 클레는 화가수업을 위하여 뮌헨으로 가서 처음으로 크닐의 사숙(私塾)을 찾았고, 후에는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유겐트 시틸의 화가인 프란츠 시투크의 가르침을 받았다. 3년 후 그는 이탈리아로 연구 여행을 떠나서 제노바·나폴리·피렌체·로마 등지에 체재하였다. 그러나 이 여행의 수확은 고대 로마나 르네상스의 미술보다도 해항도시(海港都市)의 풍경과 나폴리 수족관의 풍물이었다. 내륙지방에서 자라온 그의 회화의 모티브로 배나 고기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그 여행의 체험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1903년부터 동 6년까지 베른으로 돌아와 오로지 세기말적인 환상과 풍자에 입각한 에칭을 제작하였다. 1906년 재차 뮌헨으로 돌아간 클레는 당시 바야흐로 발흥의 기운이 움튼 표현주의의 분위기 속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는 마르크, 마케 쿠빈, 칸딘스키 등과 사귀어 이윽고 블라우에 라이터의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의 제작은 흑백의 판화나 또는 단채(單彩)의 파스텔·수채·구아슈·템페라 등으로 한정되어 그 표현은 기괴하고 환상적인 소묘가(素描家) 알프레트 쿠빈(1877∼1959)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 흑백 또는 단채에 의한 대상의 도식화를 통하여 그는 '예술이란 눈에 보이는 것의 재현은 아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라는 신념을 굳혀 갔다. 1914년 그는 북아프리카의 튀니스와 카이루안으로 여행을 하여 그 아열대의 풍토에서 색채에 눈뜬다. '빛깔이 나를 갖는다. 나와 색은 일체이다. 나는 화가이다'라고 자각한 바를 일기에 적은 것도 그 때의 일이며, 1919년 이후 이러한 자각은 유니크하게 실현되어 간다. 1920년 비평가 레오폴트 츠안 및 빌헬름 하우젠시타인 등이 맨 처음으로 비평을 발표하였다. 일찍이 아동화의 모방이라 냉소를 받은 클레의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몰락의 위기에 허덕이던 유럽문화의 전통에 색다르게 청신한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것으로 기대되었던 것이다. '화가가 일찍이 현상계에서 정신계로 가지고 가버린 것을 반대로 정신계에서 현상계로 돌이키려고 한다'라는 클레의 독특한 추상에 대한 사고가 시대의 지지를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1921년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 초대를 받은 클레는 글라스화(畵)의 공방을 담당하여 후진을 지도하는 한편, 파이닝거와 칸딘스키를 이 곳에서 재회하여 활발한 제작 활동을 하였다. <자연연구의 길>과 <교육적 스케치북> 등 이론적인 저술도 바우하우스에서의 활동을 통하여 정리되었다. 1930년 뒤셀도르프 미술학교로 자리를 옮긴 클레는 이윽고 나치스에 의하여 자유가 박탈되어 가던 독일에서 추방되어 1933년 베른으로 돌아온다. 클레의 평생을 통한 작품은 9천 점이란 다수에 이른다. 베른에 돌아온 후에도 제작욕은 왕성하였고 만년에는 독특한 천사의 상이 눈에 많이 띈다. 그의 단순한 표현은 형태 그것보다도 형태를 만드는 일을 주안점으로 한 것이며, 보는 자로 하여금 그 형성의 과정을 좇아 체험하여 가는 것을 그는 바랐던 것이다. 1940년 무랄토 로카르노에서 사망.

[편집] 모홀리 나기

Ladislaus Moholy­Nagy (1895∼1946) 헝가리 출생. 처음에는 법률가가 되려고 하였으나 1915년 미술로 전환하여 1917년 러시아의 구성주의 및 말레비치의 영향을 받았다. 1920년에 베를린으로 이주하였고 이 시기의 그의 작품에는 몬드리안의 영향을 볼 수 있다. 1923년 바우하우스에 초대되어 1928년까지 이 곳에서 연구와 교육에 종사하였다. 구성주의에서 신조형주의의 흐름에 따른 그의 합리적인 이론과 제작은 표현주의를 기조로 하여 출발한 바우하우스의 체질을 개조하는 데 강력한 힘이었다. 원래 그는 새로운 소재에 대하여 끝없는 욕망을 일으켜, 타블로 회화에 만족하지 않고 금속을 사용한 조형적인 실험을 시도하는가 하면, 그 성과를 새로운 사진의 수법과 결합하여 선전미술과 인쇄에 응용하는 등, 장르를 초월하여 새로운 표현 영역을 확대하였다. 평면 및 입체의 기하학·역학·광학 등 그의 탐구는 4차원의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는 화가라든가 조각가라는 종래의 개념으로 분류될 수 있는 예술가가 아니라, 미술의 모든 장르에 창조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조형가였다. 예를 들면 바우하우스의 그래픽 공방에서 참신하며 구성적인 레이아웃이나 디스플레이를 초래한 최초의 공적자는 그였다. 그는 또 그로피우스를 도와 바우하우스 총서의 출판 사업에도 공헌하였다. 바우하우스를 떠나 1933년까지 그는 주로 베를린에 정주하였으나 독일의 국내 정세가 긴박하게 되자 런던으로 이주하고, 1937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시민권을 획득했다. 그 해에 그는 그로피우스를 고문으로 추대하여 시카고에서 뉴 바우하우스를 설립,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미국에 전하였으며, 1946년 시카고에서 사망하였다.

[편집] 압스트락숑 크레아숑

Abstraction­Creation 抽象創造派압스트락숑 크레아숑은 1932년에 파리에서 결성된 추상미술가의 그룹을 말한다. 그 멤버는 칸딘스키, 몬드리안, 들로네, 글레즈, 반톤게를로, 곤잘레스, 브랑쿠시, 모홀리 나기, 카르더, 벤 니콜슨, 가보, 페브스너 등이며, 이것은 당시 융성하고 있던 쉬르레알리슴에 대항하여 추상미술가의 대동 단결을 절규한 것인데 한때는 400명의 미술가를 집결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기관지인 <추상·창조·비구상 예술>을 발행하여 활발하게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연적으로 해소되어 버렸다. 위기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단기간의 운동이기도 하였으나 추상미술가를 국제적인 규모인 일파로 집결한 이 그룹의 의의는 크다고 하겠다.

[편집] 현실 회귀

[편집] 사회주의 리얼리즘

社會主義- socialist realism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1922년 소비에트에서 혁명러시아 미술협회(革命-美術協會)가 결성됨에 즈음하여 그 기본적인 제작 원리로 채택된 이념이다. 1932년에는 스탈린에 의하여 이 이념은 더욱 명확해져 예술 전반의 원칙으로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즉 그 내용은 현실을 혁명적 전개에 즉응하여 역사적·구체적으로 표현할 것, 또한 예술 제작을 사회주의의 정신에 입각한 이데올로기의 혁신과 노동자의 교화(敎化)라고 하는 목적에 합치시키는 것이다. 이 원칙을 채용함으로써 혁명 전후에는 상당한 약진을 보여 준 전위적인 경향(구성주의 및 쉬프레마티슴)은 형식주의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동시에 널리 유럽의 현대미술도 소위 부르주아적인 퇴폐 미술이라 하여 배척하는 독선을 낳게 하였다. 소비에트의 새로운 체제가 서구(西歐)와의 대결에서 생긴 이념으로서 각국의 프롤레타리아 미술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나 실제의 작품은 정치가와 군인의 초상화, 노동이나 전투 따위의 장면을 그린 의고전적(擬古典的)인 작품이 거의 전부이며 새로운 입장에서의 실재감(實在感)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였다. 정책으로서의 경사(傾斜)가 때때로 예술적인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경향도 있다. 대표적인 미술가로서는 회화에서 게라시모프와 그레코프가 있고 조각에는 무하나, 톰스키를 들 수 있고 만화의 공동제작 그룹에는 쿠크루이니크시가 있다.

[편집] 쿠크루이니크시

Kykyruiniksui 1924년 쿠프리아노프와 크루이로프 및 소코로프의 세 사람이 만화를 공동으로 제작하기 위하여 만든 그룹으로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념에 입각하여 풍자화와 삽화 등을 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처녀작 <젊은 시인과 작가의 우정적 만화> 이래 몇 번의 스탈린 상을 받았고 대표작으로는 <독일군 노브고로드 패주(敗走)>와 <종말> 등의 유채화가 유명하다.

[편집] 노이에 자하리히가이트

Neue Sachlichkeit 신즉물주의(新卽物主義)란 뜻으로 독일에 있어서 반표현주의적인 미술운동인데, 1925년 만하임 미술관에서 개최된, 할트라우프 박사가 기획한 전람회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표현주의가 주관의 표출(表出)에 전념한 나머지 대상의 실재 파악을 벗어나 비합리주의적 경향으로 향하여 가는 데에 반대하여 즉물적인 대상 파악에 의하여 실재감의 회복을 꾀하였다. 유력한 화가로서는 게오르게 그로스와 오토 딕스의 이름을 들 수 있으며, 베를린의 다다이슴 운동을 거쳐온 이 두 사람은 사회풍자의 경향이 짙고 제1차 세계대전 후 혼란한 세상을 좌익적인 입장에 서서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그 밖에 주목되는 화가에는 정물 및 실내를 소박한 기법으로 그린 게오르그 시린프와 기계를 모티프로 한 게오르그 숄츠, 가하학적 형태를 골격으로 하여 식물을 그린 알렉산더 카놀트가 있다. 노이에 자하리히가이트의 화가들은 대상 묘사만은 리얼하지만 그 배합과 구성에 있어서는 이질적인 관련성을 구하여 재배합·재구성해 가는 경향이 짙어 그 때문에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별명으로도 불린다. 이러한 점에서는 형이상화파(形而上畵派)나 쉬르레알리슴의 의도하는 바와 가깝다. 나치스의 대두와 함께 박해를 받아 소멸되었다.

[편집] 그로스

George Grosz (1893∼1959) 독일 출신의 미국화가.그는 베를린에서 출생하였고 어릴 적에 부친을 여의어 빈곤 속에서 성장하였으나 장학금을 받아 드레스덴 및 베를린 미술학교에서 배웠다. 재학중에서부터 책의 장정(裝幀)과 의장(意匠) 디자인의 일을 시작하여 졸업한 뒤에는 오직 풍자적인 신문과 잡지에 캐리커처를 그렸다. 그 때에 그는 항상 현실의 사회문제에 착안하여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쟁의 비참과 궁핍을, 전후에는 사회의 혼란과 부패를 뛰어난 묘사력으로 예리하게 그렸다. 1917년 베를린의 다다이슴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그 후에 사상적으로 점차 좌경하여 독일 부르주아지와 군주주의의 통렬한 규탄자가 되었다. 1925년 만하임 미술관에서 개최한 노이에 자할리히카이트 전시회에 참가하였고 독특한 리얼 기법(技法)과 정치적 이념으로 그후 이 운동에 새로운 국면을 개척하였다. 1932년 나치스의 대두로 여지없이 국외로 추방당하게 되자 아트 스튜던츠 리그의 초청으로 미국에 갔다. 1937년 시민권을 획득하여 뉴욕에서 교직에 종사하면서 그의 작풍은 오히려 그 예리함이 없어졌으나 데생의 분야에서는 종래의 미적인 기성 개념을 타파하여 자유로운 기법을 도입하고 이것을 실재 파악의 새로운 무기로 활용하는 길을 개척한 공적은 크다. 그는 베를린에서 사망하였다.

[편집] 딕스

Otto Dix (1891∼1969) 독일 화가. 오토 딕스는 라이프치히 교외의 게라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장식화가로서의 교육을 받아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였고, 1922년에서 1925년까지 뒤셀도르프 미술학교에서 수학했다. 그의 초기 회화는 후기 인상파의 흐름에 따라 그 테마는 전쟁 체험에 입각하였다. 1926년 드레스덴 미술학교에서 교직에 종사했으며 이 무렵 다다이슴을 거쳐 노이에 자하리히가이트의 진영으로 들어간 그의 그림에는 사회의 부정·퇴폐·악덕·암흑 속에서 꿈틀거리는 인간의 비참, 추악을 박진(迫眞)한 묘사력으로 추구하였다. 이들이 자칫 캐리커처까지 전화(轉化)해 버릴 것만 같은 리얼한 묘사는 같은 노이에 자하리히가이트의 진영에 있었던 게오르게 그로스의 기법과 쌍벽을 이루는 것이었다. 딕스는 이 착안점과 기법을 발전시켜 마치 종교개혁의 한 가운데서 활약한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巨匠)들과 같이 윤리적 발언을 배경으로 하는 독특한 화풍(畵風)을 세워 나갔고, 그가 '프롤레타리아의 크타라나하'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나치스 시대가 되어 드레스덴 미술학교의 교직에서 추방당하여 박해와 궁핍을 견디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였지만 전후에는 표현주의에 접근한 종교화와 풍경화의 건전한 작품을 제작하다가, 1969년 보덴 호반의 콘스탄츠에서 사망하였다.

[편집] 멕시코의 현대미술

-現代美術 멕시코에서 현대미술은 1912년의 혁명과 그후 10년에 걸친 내란의 시기를 거쳐 금세기에 이채를 띠어 극히 주목할 만한 발전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민족주의와 리얼리즘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이 원리는 타율적으로 부여된 것이 아니고 미술가의 자각에 입각한 자율적인 활동으로 추구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이 나라 젊은 미술가들이 에스파냐의 통치에 반항하여 일어선 민중의 지지자이며 개중에는 직접 혁명군에 가담하여 싸운 자(시케이로스, 프란시스코 고이티아 등)도 있다고 하는 사실이 뒷받침하고 있다. 원래 멕시코에는 독자적인 고대 문화와 민중 예술의 전통이 있었으며 리베라, 시케이로스 오로스코 등의 화가는 1920년대에 미술가 조합을 결성하여 멕시코 문화의 순수성에 입각한 새로운 미술을 민중에게 접근하도록 목표를 세워 그를 향하여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이 먼저 착수한 것은 공공(公共)의 건조물에 벽화를 그리는 일이었다. 그 테마도 멕시코의 신화와 전설, 역사적인 사건과 민중의 생활 등에서 취재하여 모뉴멘털한 화면으로 모든 계층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것을 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민중 예술의 탄생은 1930년대의 미국에 강렬한 영향력을 가짐과 동시에 유럽의 현대미학에 대치(對峙)하는 참신한 에너지를 공급하였다. 더욱 멕시코 인디언의 유산을 따른 서정적인 화풍으로 성공한 이 나라의 화가에는 파리에 있는 루피노 타마요(1899∼1991)가 있다.

[편집] 리베라

Diego Rivera (1886∼1957) 멕시코의 화가. 과나파트 주(州)에서 출생하여 멕시코시에 있는 국립 미술학교에서 배운 후에 에스파냐·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영국·포르투갈로 연구 여행을 하고 1910년 파리에 정주하였다. 그는 모딜리아니와 친교를 맺고 또 바토 라보알(洗濯船)의 전위 화가인 피카소, 브라크, 그리스 등과 사귀어 1910년대의 퀴비슴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당시 시인 아폴리네르는 그의 열렬한 지지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파리의 화단에 몸을 담지 못하고 1921년 멕시코로 되돌아왔다. 그리하여 마야·아티카의 고대 문화를 탐구하였고 또 당시 멕시코에 대두한 혁명적인 정신에 공명(共鳴)하여 참다운 민중화가로서 모든 계층이 이해하는 그림을 그리려고 결심하였다. 그러기 위하여 그는 한때 타블로를 그만두고 민중이 모이는 장소에 거대한 벽화를 그리는 일에 열중하였다. 문부성(文部省)·보건성·차핑고 농업학교(農業學校)·호텔·레폴마 등의 벽화는 1920년 대의 제작이다. 그후 미국의 초청을 받아 샌프란시스코의 증권거래소와 디트로이트 미술학교에도 벽화를 그렸다. 그의 형태와 색채는 모국의 전통과 국민성에 뿌리를 박은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멕시코 현대회화의 아버지라 할 수 있겠다.

[편집] 시케이로스

David Alfaro Siqueiros (1896∼1974) 멕시코 화가. 그는 치와와시(市)에서 출생하였다. 처음 멕시코시의 국립 미술학교에서 배웠는데 일찍부터 급진적인 사상이 영향을 받아 재학중부터 교내에서 아카데믹한 교육에 대한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멕시코 혁명 때에는 혁명당의 디에게스 장군 휘하에 있었다. 1919년에 유럽으로 가서 1921년에 귀국, 대학 예비교의 벽화를 그리려고 시도하였으나 미완성으로 그쳤다. 그 후는 리베라, 오로스코 등과 함께 벽화의 제작에 종사하였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과격한 정치운동으로 종종 투옥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미국에서 공공건물에 정치사상을 표현한 이유로 국외 추방의 처분을 받았다. 1932년에는 몬테비데오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934년에는 브라질에서 제작을 하였다. 시케이로스의 화풍(畵風)은 강렬한 박력을 가진 다이내믹한 리얼리즘에 특색이 있다. 그는 리베라와 마찬가지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려고 하였으며, 특히 회화에 대담한 혁명정신을 담고 있는 점에 주목을 받고 있다. 벽화를 민중에게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삼은 것도 그의 과격한 사상에서 연유한다. 그는 또한 새로운 공업제품인 피록실과 실리콘 등을 매개로 하는 회화의 재료를 창안하였다. 이들 새로운 화재(畵材)는 그가 주창한 리얼리즘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다 더 어필하게 하고 있다.

[편집] 오로스코

Jose Clemente Orozco (1883∼1949) 오로스코는 멕시코의 하리스코주(州) 사보트란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멕시코시의 농업학교(農業學校)에 입학, 졸업 후 국립대학에서 건축을 배웠으며 건축사무소에 근무하면서 회화를 공부했다. 그가 화가로서 인정받은 것은 1913년 역사화(歷史畵)의 대작에 발표한 이래의 일이다. 그후 미국에 거주하며 멕시코 내란의 시대를 보냈으며, 1922년에 귀국하여서부터는 여러 곳에서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프레스코의 대작에 손을 대었다. 그는 멕시코의 현대 미술가 가운데에서 유럽 회화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았고, 그리하여 멕시코의 토속적인 색채와 형태의 감각을 가장 잘 지니고 있었다. 전란의 비극적인 정경(情景)을 테마로 한 그림이 많았으며 가끔 '현대의 고야'라는 말을 듣는다. 그는 1949년 멕시코시에서 사망하였다.

[편집]

Ben Shahn (1898∼1969) 러시아 출신의 미국 화가로 리투아니아의 벽촌인 코보노 출신이고 양친은 가난한 유대인의 혈통이다. 그가 8세 때 일가(一家)가 미국으로 이주하여 그는 브루클린의 슬럼가(街)에서 성장하였다. 1913년부터 1918년까지 그는 어떤 석판화가의 아틀리에에서 일하면서 내셔널 아카데미 오브 디자인에 야학을 다녔다. 그후 뉴욕대학에서 생물학의 강좌를 수강한 적도 있었다. 1925년에서 1929년까지 그는 유럽 및 북아메리카 방면으로 여행하였고, 이 여행을 통하여 그는 현대미술의 여러 가지 동향에 대한 이해를 깊이 심화시켰다. 가령 파리에서 그는 뒤피와 루오에 깊은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그러나 1929년의 대공황에 그는 사회적 사건에 눈을 돌려 '드레퓌스 사건'과 '사코와 반제티 사건' 등을 테마로 극명(克明)한 사실적(寫實的) 회화를 발표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1930년대가 되어 미국에서는 그랜트 우드(1892∼1942)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사회정경파(社會情景派)가 리얼한 현실 파악으로써 활약하는데 샨도 사진작가인 워커 에반스와 협력하여 다큐멘터리 사진을 제작하였고, 또 이 사진을 기법으로 도입하여 타블로와 벽화의 제작을 해 나갔다. 그러나 그의 특징은 외적인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점에 그치지 않고 리얼한 대상 파악을 통하여 고독하고 비애에 넘친 인간상의 내면을 상징화하여 가는 점에 있다. 그것은 때에 따라서 환각과 잠재의식까지도 암시하는 것과 같은 특이한 표현을 낳고 있다. 더욱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그는 산업자본가회의(産業資本家會議)의 디자이너가 되어 전후 그래픽 디자인 분야의 제작에도 공적을 올렸으며 뉴욕에서 사망했다.

[편집] 베크만

Max Beckmann (1884∼1950) 독일의 화가. 그는 라이프치히에서 출생하여 바이마르·파리·피렌체 및 베를린에서 수업하고 1905년 베를린 분리파(分離派)에 가맹하였다. 당시 베를린 분리파의 주류는 인상주의인데 베크만도 독일 인상파의 화가 막스 리베르만과 로비스 코린트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뒤에 인상파의 외적 리얼리티의 추구에 만족하지 않은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의 무렵부터 판화를 가지고 양식 전환의 모색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사실(寫實)에서 상징으로, 현실에서 그 배후에 숨은 이념의 표현으로 향하는 모색이었으며, 이것이 달성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 위생병으로 종군했을 때의 전쟁체험이었다. 그는 인상주의를 버리고 표현주의적인 요소를 받아들였지만 그의 화풍(畵風)은 억센 선에 의한 대상 파악과 단순한 화면 구성을 특색으로 하는 그의 독자적인 것이다. 테마는 대도회(大道會)의 인간을 위협하는 고독과 파국(破局)의 불안을 다룬 것이 많고 창부(娼婦)와 서커스의 무희 등이 빈번하게 캔버스에 올려져 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그는 발자크의 <인간 희극>과 같이 세기의 전형적인 인간상의 시리즈를 그리기를 염원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그러한 연유로 상징적 리얼리즘이란 말로 개념지어지는 그의 화풍은 표현주의와 노이에 자하리히가이트와도 하나의 선을 구획하는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1932년 그는 나치스의 압력으로 1915년부터 근무한 직장이었던 프랑크푸르트 미술학교의 교수 직위에서 쫓겨났다. 그는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1937년 암스테르담으로 탈출,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기다려 1948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전쟁 중에 구상하였으며 그의 걸작이 된 삼폭대(三幅對)의 대작 <아르고호(號) 원정대원>은 그리스 신화에서 취재한 작품이며, 시대를 초월하여 공동체의 이념과 인간의 연대(連帶)에 대하여 시사한 그의 예술의 절정이었다. 그는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편집] 서덜랜드

Sutherland Graham (1903∼1980) 영국의 화가, 판화가. 런던 출신이며 그는 처음 에칭으로 명성을 얻어 주로 풍경과 여러 삽화를 환상적인 표현으로 그렸다. 그의 화풍은 윌리엄 블레이크 일파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이어서 그는 쉬르레알리슴의 영향을 받아 1930년대부터 전쟁 중에 걸쳐 구아슈 및 수채로써 대단히 특이한 풍경화의 연작(連作)을 만들었다. 그것을 구태여 예증(例證)한다면 칸딘스키의 1910년대의 콤퍼지션에 유사한 것인데, 서덜랜드 자신은 그것을 '패러프레이즈의 수법'이라 불렀다. 당시 그는 '나는 마음에서 느끼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으로 패러프레이즈하여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그는 더욱더 새로운 수법을 개척하였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찌르는 강렬한 색채와 예각적(銳角的)인 포름에 의한 표현이며, 1945년 그는 이 새로운 수법을 구사하여 노잔프톤의 성(聖) 마다이 교회의 <그리스도 책형도>를 그렸다. 이것이 때때로 독일 16세기 화가인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祭壇畵)>에 비견할 만하다는 평을 받는 그의 대표작이다. 전후에 그는 정기적으로 지중해에 여행하였고 그 곳에서 그는 환상의 원천이 되는 갖가지 대상을 발견하였다. 이국적인 식민지와 토속(土俗), 이들의 대상을 그는 독특하게 패러프레이즈하여 기호화(記號化)해 버린다. 그는 영국의 대표적인 시인 워즈워스와 홉킨스, 그리고 하디와 같은 내면의 눈을 가진 예술가인 동시에 1930년대에 환상적인 풍경화와 전쟁화를 그린 그 나라의 화가 폴 내시(1889∼1946)와 더불어 새로운 실재 파악의 길을 개척한 화가로서 그들의 영향은 크다. 또한 서덜랜드에게는 초상화의 작품도 많아서 <서머싯 몸상(像)>과 <윈스턴 처칠상>도 유명하다.

[편집] 꿈과 향수

[편집] 에콜 드 파리

Ecole de Paris 파리파(派)라고나 할까. 보통 제1차 세계대전 후에 파리에서 활약한 외국작가를 총칭하여 부른다. 물론 베르나르 도리발과 같이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재차 파리를 중심으로 모인 예술가를 포함하여 부르는 경우도 있다. 도리발에 의하면 파리가 이른바 예술의 핵심이 된 적은 전후 3회인데 그 첫째는 12세기부터 13세기에 걸친 고딕시대이고, 둘째는 말할 나위도 없이 19세기 프랑스의 황금시대이며, 마지막으로 에콜 드 파리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에콜 드 파리의 중요한 예술가는 거의 전부가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예를 들면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 출생이고 수틴은 리투아니아, 샤갈은 러시아, 키슬링은 폴란드, 반 동겐은 네덜란드, 파스킨은 불가리아, 후지타는 일본 출신이며, 이들에게 가령 피카소와 미로를 더하여 보면 이들은 에스파냐 출신이어서, 순수한 프랑스인은 겨우 마르케, 스곤작, 로랑생, 바라동, 위트릴로 등에 불과하다. 이 사실은 아마도 에콜 드 파리시대가 전기한 두 시대와 달라서 완전히 시민문화의 미술이며, 그리고 그 중추는 어디까지나 예술가의 개성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동시에 파리가 옛날의 오토노미를 잃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예술가의 개성을 자극하는 유니크한 도회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거기에는 루브르 미술관을 위시하여 헤아릴 수 없는 예술의 전통이 있으며, 좋은 의미로 철저하게 엄격한 개인의 의식, 즉 생을 솔직하게 향수(享受)하는 봉 상스(제2차 세계대전 후의 주요한 에콜 드 파리의 예술가를 들면 다음과 같다. 다 실바, 한스 아르퉁, 장 아트란, 니콜라 드 스테르, 피에르 스라쥐, 알프레드 마네시에, 앙드레 마르샹 등이다.

[편집] 위트릴로

Maurice Utrillo (1883∼1955) 프랑스의 화가이다. 모친은 이전에 르누아르나 드가의 모델이었다가 프랑스 표현주의의 여류 화가가 된 바라동이며 부친은 분명치 않다. 청년 시절의 위트릴로는 알코올중독에 걸려 자주 병원 신세를 졌다. 퇴원 후 기분 전환으로 화필을 잡은 것이 화가로서의 출발이며, 물론 이것을 권유한 사람은 모친이고 이는 1902년의 일이었다. 위트릴로는 처음 인상파풍(印象派風)의 풍경을 그리다가 얼마 뒤 '백(白)의 시대'에서 일가(一家)를 이루고 이어서 제3기인 '다색(多色)의 시대'를 맞는다. 주제는 모두 풍경인데 초기의 <몽마르트르 풍경>에서부터 파리의 길거리로 시점(視點)이 옮겨지고 그 중에도 몽마르트르는 그가 애호하던 장소로서 언제부턴지 유모러스한 점경(點景) 인물은 거의가 뒷모습인데 어딘가 야릇함과 슬픔을, 즉 인생을 짊어지고 있다.

[편집] 백의 시대

白-時代 위트릴로가 독창적인 스타일을 확립한 시기를 가리키며 1908년에서 1914년까지의 기간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에는 <베를리오즈의 집>, <마을의 교회> 등이 있으며 이 화면에서 복잡한 뉘앙스를 가진 백(白)이 기조색(基調色)이고, 모친 바라동을 계승한 표현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스며 나오고 있다. 그것은 조금 남루한 집들의 벽이나 낡은 성당의 그늘에서 발견된 아름다움이며, 내적으로는 쉽사리 음주벽(飮酒癖)이 낫지 않아 몇 번인지 모를 만큼 위트릴로가 더듬었던 을씨년스럽고 병적이며 고독한 길을 상기하게 한다. 왜냐하면 순결은 또한 가장 다치기 쉬운 빛깔이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도리발은 이러한 위트릴로의 시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나오는 인물의 그것을 엿보게 한다고 말하였는데, 확실히 그의 백색은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위트릴로는 백의 망집(妄執)에서 빠져 나오기가 매우 어려웠다. 여기에는 점경 인물도 거의 볼 수 없고 엄격한 구성과 백의 변화만 이 시정(詩情)을 북돋우고 있었다.

[편집]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1920) 이탈리아의 리보르노 출신이며 베네치아와 피렌체에서 배운 뒤에 1906년 파리로 갔다. 초기에는 세잔의 영향을 받아 <거지>, <첼로 연주>를 그렸으며, 1913년 몽파르나스에 거처를 정하여 키슬링, 수틴과 사귈 무렵부터 독자적인 스타일을 만들어 내어 특히 인물·초상·나체 여성에서 신기축(新機軸)을 이룩했다. 타원형의 형태가 빚어내는 양감이 특색으로서 엷게 칠했고 눈에는 가끔 투명한 블루가 채색돼 있다. 모딜리아니가 '프랑스인의 눈동자에 이탈리아 하늘의 푸르름을 넣었다'고 말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나부도 미묘한 곡선의 구도인데 조각가를 지망했으니만큼 대담한 파악이며, 풍경은 겨우 2∼3점에 불과하여 작품은 모두가 신변의 신중한 인간표현에 의지한 감이 있다. 1916년에서 1918년의 3년간에 가장 수작이 많다. 이러한 집중적인 제작을 위하여 알콜과 아편에서 자극을 구하게 되었고 빈곤 가운데서 가슴을 앓아 요절하였다.

[편집] 여인의 두부(頭部)

모딜리아니의 조각이며 1913년경의 작품이라 생각된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에서 <아르카이크 스마일의 여인>이라는 호칭이 붙어 있다. 1909년 모딜리아니는 조각가인 브랑쿠시를 만나 그의 격려로 조각을 시도하게 되었다. 브랑쿠시나 흑인 조각의 영향을 느끼게 하는 이 작품은 불가사의와 동양적인 명상의 모습을 방불케 한다. 그렇게 말한다면 1901년 아직도 젊은 모딜리아니가 로마나 피렌체에 머물러 있었을 때에 그를 가장 매혹시킨 것은 티이노 디 카마이노의 조각이 아니었을까. 카마이노의 원통형 목 위에 놓인 비스듬한 얼굴, 또는 수직의 콧마루와 길게 째진 눈, 그리고 표정 전체에 넘치는 신비적인 슬픔에 모딜리아니는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902년경에 그는 차라리 조각으로 나갈까 하고 생각하였을 정도였고, 여기에 브랑쿠시의 결정적인 조언이 있었다고 보겠다.

[편집] 파스킨

Jules Pascin (1885∼1930) 본명은 율리우스 핑카스이고 불가리아의 도나우 하반(河畔)의 소음인 비진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곡물상인이고 원래는 세파르딤(에스파냐 유대인)이다. 빈과 뮌헨에서 배운 후 한때 잡지 <진프리치스므스>에 신랄한 풍자화를 그려 명성을 얻고 1905년 파리로 나왔다. 당시 그는 부셰, 프라고나르, 드가, 로트렉, 그로스, 뒤피 등의 영향이 현저하였으나 섬세한 필력에 넘치는 일급의 데생가(家)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얼마 뒤에 파리에 거처를 정하여 삽화의 일에 몰두하였으나 1914년부터 1921년까지는 미국에서 보내다가 또다시 파리에서 정주하였다. 파스킨은 무엇이든지 재빨리 데생을 하였다고 전한다. 메뉴에도 담뱃갑에나 종이, 냅킨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특질은 '부서진 인형'이라 부르는 퇴폐적이고 향기높은 나체 여상에 있었으며 저주받은 화가에게 어울리게 자살로 생을 마쳤다.

[편집] 소박파

素朴派 일반적으로 프리미티브(소박) 예술이라 말할 경우에는 원시·미개민족의 예술을 가리키는 것이나, 여기서는 앙리 루소를 위시한 이른바 소박화가를 의미하고 있다. 이 화가들은 19세기 말부터 금세기에 걸친 갖가지 유파(流派)의 교체를 외면하고 홀로 자기의 세계에 침잠(沈潛)하였던 화가들이다. 물론 그 가운데는 루소와 같이 한때 퀴비슴과의 관련 운운한 화가가 없는 것도 아니나 대체로 고독한 길로 나아가 때로는 일요화가(日曜畵家)라, 또는 서투른 화가라는 경멸을 받기도 하였다. 주요한 화가를 들면 프랑스의 앙드레 보샹, 루이 비뱅, 카미유 봉브와, 루이 세라핀, 아로이즈 소테 들이고 미국의 여류화가인 그랜도마 모제 정도일까. 원래 소박파란 명칭은 편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공통적인 주의 주장이 있을 턱이 없다. 공통된 점이 있다면 그들이 정규의 미술교육을 받지 못하였다는 점이고, 따라서 미술양식이나 그 운동에도 무관심하여 자연과 현실에 대하여 경건하리만큼 나이브한 태도를 가지고 독특한 리얼리즘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현대미술의 문외한(門外漢)이며 아웃사이더라고 보겠다. 그러나 1900년대 퀴비슴의 발상(發祥)에 흑인 조각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처럼, 또한 1910년대의 표현파 운동에 남방 원시미술의 거친 생명감이 크게 공헌한 것처럼 소박파는 현대미술의 저류에서 새로운 환상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다. 그것은 소박파에서 세라피스나 소테 등은 '무의식의 쉬르레알리슴'이기도 하고 그들의 제작은 이따금 광기(狂氣)에 빠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특색은 얄궂은 장식의 과다(過多), 격렬한 표현력에 있으나 만약 그들을 소박파라 한다면 영국의 루이스 웨인과 독일의 페타 모그, 요제프 제르 들도 여기에 첨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편집] 루소

Henri Rousseau (1844∼1910) 프랑스의 화가. 서프랑스의 라바르에서 출생하여 변호사 사무소의 서기로 근무하다가 파리의 입시세관(入市稅關)의 관리가 되었다. 여가를 틈타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세리 루소'라는 이름이 있다. 1880년경부터 그림을 그렸다고 추정을 하고 있는데, 1884년에는 루브르 미술관에 다니면서 옛 대가의 작품을 모사하였고 당시의 관학파(官學派)인 부그로, 제롬, 클레망 등을 존경하였다고 한다. 그의 작품 <행복한 콰르테트>(1902)는 제롬의 <순결>에서, 그리고 <잠자는 집시의 여인>(1897)도 제롬의 <두 사람의 왕>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1886년 앙데팡당 미술전에 첫 출품을 하여 고갱, 르동, 쇠라 등과 사귀게 되었지만, 특히 그의 존재를 인정받은 것은 1906년 피카소와 들로네 그리고 시인 아폴리네르와 비평가인 우데를 통해서였다. 이듬해에 빌헬름 우데가 최초로 그의 에세이에서 그를 호평하게 되었다. 루소의 주제는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⑴ 자화상을 포함한 초상화 ⑵ 파리 및 파리 근교의 풍경 ⑶ 브르타뉴와 엑조틱한 풍경 ⑷ 정물 등. 이들 가운데에서는 무엇보다도 ⑶의 이국 풍경이 유명하지만 루소는 어떤 경우에나 면밀 세심한 묘사와 사람의 의표를 찌르는 콤퍼지션으로써 항상 나이브한 정감을 잊지 않았다. <일몰(日沒)의 처녀림(處女林)>(1907)과 <제니에 영감의 마차>(1908) 등에서는 사진조차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주목할 것은 화면에서의 과거와 현재의 교차이며, 이것은 그의 숲과 나무의 콘트라스트에서도 엿볼 수 있다. 범인(凡人)이라면 나뭇잎 백장을 그린다 해도 그것은 백의 나뭇잎에 불과하다. 그러나 루소가 이것을 그리면 백장의 나뭇잎 플러스 알파(+α)가 된다고 하는 말은 루소를 평하는 적절한 말이며, 이 알파야말로 그의 시정(詩情)이어서 그는 소박파 중에서도 발군한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편집] 뱀 마술사

루소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1907년에 제작하였으며 이국 풍경을 취급한 작품이다. 1904년부터 몰년(沒年)까지 루소는 이들 일련의 엑조티즘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그는 이러한 착상을 <마가장 피토레스크> 등의 잡지에서 얻었고 열대 동식물에 관한 진기한 기사는 그의 흥미를 강렬하게 끌었던 것 같다. 루소가 젊었을 적에 멕시코로 갔다고 하는 설은 오늘날에 와서는 부정되고 있으므로 <뱀 마술사>도 그의 팬터지가 만들어 낸 동화이다. 화면에서 식물의 잎사귀는 한장 한장씩 극명하게 그려졌고 배경인 섬의 묘사는 흡사 에른스트의 그림 표면처럼 섬세하다. 중천에 걸린 달, 이 달빛에 이끌려 퉁소를 부는 사람, 이 음색에 매혹되어 춤을 추는 뱀, 화면에는 푸른 하늘과 녹색의 수풀에 싸여 퍽이나 몽상적이다. 어느 식물학자는 루소의 작품에 용혈수(龍血樹)나 사란이 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여기에서도 갖가지 식물의 종류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편집] 비뱅

Louis Vivin (1861∼1936) 프랑스의 화가이다. 보쥐 지방의 롤에서 출생한 그는 어릴 적에 이미 집안의 문이란 문은 그림으로 메웠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부친이 그의 화가 지망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61세로 퇴직할 때까지 우체국에 근무하였다. 1889년 우체국 직원 작품 전시회에 처녀 출품한 이후 파리의 몽마르트르로 이사하여 유명한 사클레 크르를 중심으로 하는 몽마르트르의 풍경이 알맞는 화재(畵材)가 되었다. 그는 <교회의 내부>를 그리고 <폐병원(廢病院)>을 섬세한 종횡의 선으로 정성들여 그리고 있다. 이렇게 제작한 작품은 그물 눈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이것은 그가 늑대가 있는 숲속 나무를 그릴 때에도 마찬가지이며 장식미도 넘친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베르나르 뷔페가 그린 파리 풍경이 침침하며 실존주의적인 도회 풍경이라 한다면 비뱅의 풍경은 밝고 발랄한 도회의 풍경이라 하겠다. 그도 또한 우데에게 발탁된 화가였다.

[편집] 세라핀

Louis Seraphine (1896∼1942) 프랑스의 화가. 오아즈의 닷시에서 출생하였고 소녀시절을 양몰이로 보냈다고 한다. 얼마 뒤 상리스에서 중류 가정의 가정부가 되고 클레몽에서 사망했다. 그녀가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녀를 발견해 낸 사람도 비평가 우데이다. 우데가 기술한 바에 의하면 1912년경 파리 부근의 상리스에서 살고 있었을 때에 이상한 정물화를 보고 이것에 이끌려 조사하여 본 결과 자기 집에 매일 오는 청소부였다고 한다. 세라핀은 봉브와와 루소와는 달리 정물(靜物)과 꽃만을 그렸다. 그러나 그녀의 그러한 꽃그림에는 '중세기풍(中世紀風)의 퍼내틱한 격정(激情)'이 있고 무기미한 빛을 던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녀의 불타는 듯한 색채의 화염은 상리스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받은 영감이다'고 말하는데, 확실히 거기에는 스테인드글라스 특유한 신비로운 색조(色調)나 태피스트리에서 보이는 패턴의 반복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식 과잉을 넘어 더욱 강하게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그녀의 굳은 집념이며 분열병 환자에게 있기 쉬운 폭발적인 어두운 분위기이다. 세라핀이 초라한 방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촛불을 밝히면서 제작하였다든지, 제작하는 모습을 보이기를 극도로 싫어했다든지 후에 화필을 집어 던지고 '세계는 멸망해 간다'고 중얼거리면서 상리스의 거리를 방황하였다고 하는 기록은 상기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것에 틀림없다. 따라서 세라핀의 꽃은 루소의 그것처럼 이국취미도 아니며 보샹과 같이 따스한 것도 아니라 예사로운 <포도의 방>이고 단순한 <과실의 꽃>이며 그것들이 기묘하게 집중과 확산의 조형을 보여주고 있다. 조화는 여기에서는 균일화(均一化)되었고 말셀 브리온이 말하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말이 꼭 들어맞을 만큼 정밀하고 또한 환상적이다.

[편집] 낙원의 수목

세라핀의 작. 그녀의 작품은 거의 전부 제작 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화면은 무수한 잎사귀의 난무이며, 나무 줄기마저 잎사귀의 집적으로 잘못 보인다. 물론 이러한 작품은 시간을 오래 잡아 천천히 그렸다기보다 분열증 환자의 억압 상태에서 단숨에 그려진 듯한 어떤 종류의 속도감을 느낄 수 있다. 자기 중심적이며 편집적이어서 결코 남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 이른바 폐쇄적인 완고함이 있다. 그러하지만 만약 생명이 운동이며 작품은 그 표현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면 이처럼 찰나적이고 현기증 나는 바이탈리즘이 있을까. 잘 살펴보면 화면의 중앙쯤에 하나의 열려진 눈이 있다. 이러한 눈은 옛날에 '신(神)의 눈'이라 하여 르네상스 예술에도 가끔 나타나는 것인데 민중예술에서는 소박함과 직절(直截)함이 존중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동(動) 가운데 정(靜)이라는 느낌이며, 이 눈만이 움직이지 않는다.

[편집] 보샹

Andre Bauchant (1873∼1958) 프랑스 화가이며 샤토르노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원예사이었으며 보샹도 17세로 부친의 직업을 계승하였으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출정했다. 1921년에 살롱 도톤에 출품한 <마르스의 전투>를 보면 그는 군대에서 비로소 자기의 그림 재주를 의식한 듯하다. 본격적으로 화필을 잡은 것은 46세부터인데 이것은 정신병 환자인 아내를 간호하기 위하여 전원생활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는 압도적으로 꽃이 많다. 그는 데생을 하지 않고 흰 캔버스 위에다 직접 꽃들을 그렸다. 꽃은 때로 이상하게 커서 주위와 언밸런스를 이루나 색채는 투명, 아름다우며 신화나 성서(聖書)에서 취재한 경우도 많다. 1921년 르 코르뷔지에와 디아길레프에게 인정을 받아 무대장치를 담당한 적도 있고 루소 이후 가장 중요한 소박화가로서 1949년에는 대회고(大回顧) 전시회가 열렸다.

[편집] 봉브와

Camille Bombois (1883-1970) 프랑스의 화가로 부르고뉴의 브나레 롬에서 출생하였다. 16세경부터 농가에서 일을 하는 틈을 타 전원풍경과 시골의 풍속을 그렸다. 후에 파리로 나와 공사판에 막벌이와 인쇄공 등 갖가지 직업으로 전전하였으나 한시도 화필을 버린 적은 없었다. 1924년부터 화업(畵業)에 전렴하였고 1922년에는 가두전시회를 연 적이 있고 그 때에 비평가인 빌헬름 우데의 눈에 띄게 되었다고 한다. 풍경·정물·나부(裸婦)·서커스·떠돌이 광대 등 모티프도 다채로우나 특히 보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한없이 청결한 화면 구성이며, 이것을 갖춘 작품으로 <아르비의 카테드랄> 등은 그 전형이라 하겠다. 사진적(寫眞的)인 정확함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거기에 감도는 분위기는 차갑지 않다. 우데는 그 특질을 '그는 화면의 원근을 부정하고 사물을 엑스터시로까지 승화시킨 독자적인 생명감으로 감싼다'고 말하고 있다.

[편집] 마르케

Albert Marquet (1875∼1947) 프랑스의 화가. 보르도에서 태어났다. 1890년 파리로 나와 장식미술학교(裝飾美術學校)에 다녔고 1897년 귀스타브 모로의 문하생이 되어 마티스와 루소를 사귀었다. 따라서 1905년의 포브 운동에 그도 가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야수파의 격렬한 색채 구가의 시대가 지나자 마르케는 하반(河畔)의 풍경을 온화한 색조로 그리게 되었고, 가령 <퐁 느프의 풍경> 등은 아침나절부터 밤까지 끊임없는 색채의 다양성으로 표현하면서 캔버스에 정착되어 있는 것은 울적하고 고독한 파리의 풍경이다. 1912년에는 나폴리·함부르크·로테르담 등 항구를 그렸고, 1915년에는 마르세유에서 지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알제리에서도 살았다. 그의 색채는 한층 더 순도(純度)를 더해가면서 비평가나 화상(畵商)들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제작에만 몰두하였다. 이 이외에도 간결한 묘선으로 포착한 파리의 인물 스케치는 일품이다.

[편집] 동겐

Kees van Dongen (1877∼1968)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의 장식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파리로 나왔다(1897). 초기에는 인상파풍(風)의 그림을 익히고 있었으나, 1906년 포브 운동에 참가하여 생생한 원색을 사용하여 인물과 풍경을 그렸는데 당시는 마티스의 영향이 현저했다. 후에는 드레스덴의 '브뤼케'파(派)에도 가입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표현파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1905∼1913)의 제작을 동겐에게 있어서 절정이라고 보는 비평가가 많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초상화가로서의 재능도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그는 여기에 일찍이 공감해 마지않던 수틴의 작풍을 받아들여서 사교계의 히로인과 은행가 그리고 무희 등을 신랄하게 그려 내어 그의 붓은 그들에게 아첨할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반 동겐이라고 하면 경묘한 필치로 표현한, 세련된 부인들과 그녀들의 멋장이 유행 감각에만 맴돌았다고 평한다.

[편집] 샤갈

Marc Chagall (1887∼1985) 러시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 시아의 비데브스크에서 출신. 유태인의 혈통이라 한다. 1907년부터 3년간 레닌그라드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910년에서 동 14년까지 파리에 체재하면서 비평가 H. 바르덴에게 인정을 받아 베를린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다. 포브와 퀴비슴의 경향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특질은 그 일체(一切)를 가난하였던 고향의 회상에 의탁하여 비현실적인 신화 세계와 동화세계로 바꾸어 버렸다는 데에 있다. <아폴리네르에게 바친다>와 <나와 마을> 등이 전기한 대표작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러시아에 있었으나 1922년 재차 파리로 왔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으로 망명, 1947년에 또다시 프랑스로 건너가서 남프랑스에서 유유자적(悠悠自的)한 생활을 보냈다. 물론 그의 작품에선 점차적으로 현란한 빛을 더해가고 있었다고는 하나 <천사의 실추(失墜)>와 같이 어두운 예감을 간직한 것도 있고 <시간은 가없는 흐름>과 같이 초현실적인 작품도 있으며 <죽은 영혼>과 <라 퐁텐의 우화>의 판화는 걸작으로 꼽힌다.

[편집] 나와 마을

샤갈이 1911년에 제작한 작품. "나는 묘화(描畵)의 대상을 러시아에서 가지고 왔다. 그리고 파리는 그 위에 빛깔을 주었던 것이다"라고 샤갈은 말하였는데 사실에 있어서 파리에서 제작된 이 그림에도 갖가지 고향의 추억이 뒤범벅이 되어 있다. 소·바이올린·잉어·닭·꽃다발 등 모두 샤갈이 자랑으로 여기는 조형 언어이며, 그의 소는 이집트의 Himmelkuh(천국의 소)와 같이 행복한 상징이라고도 말한다. 여기에는 입체파에 대한 관심도 엿보이며 원형, 삼각형이 교차하는 형식이 두드러진다. 집과 농부가 거꾸로 서 있는 것도 과연 그다운 착상이며 이것은 하늘로 나는 인간이나 떨어진 목 등과 같아서 비합리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해 보인다. 그러나 에콜 드 파리의 많은 고향 상실자에게는 이러한 비합리적인 꿈만이 생활의 지주이며 신화였을 것이다.

[편집] 키슬링

Mo se Kisling (1891∼1953) 폴란드 출신의 에콜 드 파리의 화가. 크라크프에서 출생한 유대계(系) 사람이다. 크라크프 미술학교에서 배운 뒤에 1910년 파리로 이주하여 몽마르트르르에서 살았다. 키슬링은 벌써 크라크프 시대에도 당시 폴란드에서 절찬되었던 독일 예술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고 인상파에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곧 드랭에게 공명하게 되었으며 특히 모딜리아니로부터는 큰 감화를 받았다. 이 점에 있어서는 수틴과 차이가 있으며 생래적으로 프랑스적인 세련성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고 보겠다. 1915년 의용병으로 출정, 중상을 입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나 전후에 재차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제재는 인물·꽃·풍경이었고 더욱이 소년·소녀상에 우수하여 마치 도기(陶器)의 표면처럼 투명한 색감과 유연한 그림자와 같은 묘선(描線)이 가장 뛰어났다. 그것은 슬라브인 특유의 밝은 생의 긍정 속에 일말의 애수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편집] 수틴

Cha m Soutine (1894∼1943) 리투아니아의 민스크에 가까운 스미로비치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가난한 재봉사였다. 수틴은 어릴적부터 그림을 좋아했다. 비르나의 미술학교를 거쳐 파리로 나와(1913) 코르몽에게 배웠다. 여기에서 샤갈, 리프시츠, 모딜리아니와 사귀게 된다. 루브르 미술관에서 그레코, 렘브란트, 고야, 쿠르베를 연구하여 한때 이 대가들의 영향을 농후하게 보여 주었으나 점차로 격렬한 생명감을 묘사하기 시작하여 발광하는 듯한 터치를 특징으로 하였다. 자기의 감정표현을 위하여 '아름다운 형태'라는 이념을 타파했기 때문에 표현파의 경향에 속하지만 유년시절의 괴로웠던 인생 체험에서 죽음이 곧 붕괴임을 직감하였던 그는 토끼나 오리에서도, <성가대의 소년>과 <카뉘 풍경>에서도 모두 찢어질 듯한 형태와 짙은 색채의 콘트라스트로 표현하지 않고서는 못견뎠던 것이다. 제작이란 그에게 있어서는 어떤 종류의 자학적인 속죄(贖罪) 행위이기도 하였다.

[편집] 환상의 미술

[편집] 다다이슴

dadaisme 제1차 세계대전 중 전후에 걸쳐 일어난 반예술운동(反藝術運動)으로 조형 예술뿐만 아니라 문학도 포함하고 있다. '다다'란 아이들의 목마를 가리키는 말이고 이 운동의 본질에 뿌리박은 '무의미함의 의미'를 암시한다. 1916년 2월 먼저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인 트리스탄 차라와 리히알트 휠젠베크는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의 부정을 표방하고 비합리성·반도덕·비심미적인 것을 찬미하였다. 콜라주나 자유롭고 제멋대로인 오브제가 만들어졌고, 그것은 풍자적이고 메캐닉하며 상징적으로 추상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윽고 다다는 취리히에 한정되지 않고 뉴욕·베를린·하노바·게른·파리로 파급 또는 동시기에 발생한 쉬르레알리슴의 전주곡이 되었던 것이다. 주요 화가로서 한스 아르프, 에른스트, 슈비터스, 뒤샹 등이 있었으며, 역사는 되풀이되어서인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네오 다다'가 풍미하였다.

[편집] 뒤샹

Marcel Duchamp (1887∼1968) 루앙 근처의 브란빌 출신인 프랑스 화가이며 조각가 레이몽 뒤샹 비용과 화가인 쟈크 비용의 아우이다. 처음에는 도서관의 사서(司書)가 되려고 하였으나 파리에 나와서 아카데미 쥐리앙을 다니는 가운데 화필을 잡게 되어 후기 인상파의 작풍에 접근해 갔다. 이윽고 분석적 퀴비슴에 관심을 쏟아 1912년에 유명한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를 제작해 세상에서 일컫는 동시주의(同時主義)의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서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어서 뒤샹은 1914년에 아홉개의 동편(銅片)을 두장의 글라스에 끼운 <아홉개의 수형(鑄型), 나쁜 남자들>을 발표하였고 1917년 뉴욕의 앙데 팡당 미술전에는 흰 변기(便器)를 보내어 확실히 반예술의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이것이 뒤샹의 레디 메이드인 것이다. 결국 그는 보편적으로 낯익은 기성품에 새로운 시점(視點)을 제공한 것이고, '나는 결코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전개적인 사상의 소유주인 뒤샹은 이후 완전히 제작을 단념하여 버렸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그는 피카비아나 만 레이와 더불어 추진한 반예술의 경향은 다다이슴의 선구로서 지금에 와서는 다다의 부활에 새로운 재평가를 받고 있다. 1941년에는 브루인과 뉴욕에서 쉬르레알리슴 미술전을 열었고 1947년에도 파리의 국제 쉬르레알리슴 전시회에도 참가하였으나 그는 1968년 뉴욕에서 사망하였다.

[편집]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階段-裸體 뒤샹이 1912년에 그린 작품인데 1913년 뉴욕의 '아머리 쇼'에 출품하여 스캔들을 일으켰다. 이 그림은 고속도 사진의 한 코마처럼 색채의 다이너미즘을 표현한 것이지만 그의 목표는 미래파의 작업과 거의 같다. 오토 쉬텔츠아의 <예술과 사진>에 의하면 미래파인 루이지 루소로의 작품인 <다이너미즘>은 모조리 그대로 탄도(彈道)의 고속도 사진과 중복되고 있으며 자코 모바르라의 <노끈에 매진 개>와 지노 세레비니의 <탬버린을 손에 든 무희>도 이러한 운동감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이미 사진 애호가인 드가가 <무희들>에서도 실험했던 시도였다. 그러나 뒤샹이 그 그림에 대하여 "누드의 환경이 갑자기 나에게 떠올랐을 때에 나는 이것이 자연주의의 노예적 쇠사슬을 영구히 단절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고 말한 경우 그는 순수한 메카니즘 이외의 의미 내용을 주었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는 단순히 나체의 하강만을 의미할 뿐이 아니고 나아가서는 심리적·성적 메타모르포제를 암시한다고 보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장의 그림이 만약 그 정도까지 내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또한 놀라울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뒤샹을 다다이슴뿐이거나 쉬르레알리슴의 원천으로 볼 때에는 당연히 이 작품을 들 수 있다.

[편집] 슈비터스

Kurt Schwitters (1887∼1948) 독일의 화가·판화가·조각가이다. 하노버에서 태어나 드레스덴의 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베를린의 '시투름(暴風)'의 그룹에 참가하면서 시와 조형에서 다각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1923년부터 1932년까지 다다이슴의 잡지 <메르츠> 지(誌)를 발간했다. <메르츠>에서 그는 과거의 모든 예술을 부정하고 명백하게 '반예술'을 선언했고 그가 만든 각종 콜라주와 같이 그의 집에는 유명한 <메르츠바우> ― 길거리에서 주워 모은 판자나 잡동사니로 세운 기둥이 있고, 이것은 조각에 있어서의 콜라주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보고 있다. <메르츠바우>는 10년 세월에 걸려 만들었다. 후에 나치스에게 추방당하여 노르웨이에 망명하였을 때에도 그는 제2의 <메르츠바우>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다음의 망명지였던 영국에서도 이것을 시도하였다. 그만큼 마치 어린 아이처럼 진지하게 소재와 놀아난 다다이스트도 없을 것이다.

[편집] 에른스트

Max Ernst (1891∼1976) 독일의 쾰른 근처인 브뤼르에서 출생하였다. 본 대학에서 철학을 배웠고 1910년경 표현파 화가 마르케와 사귀게 되면서부터 회화의 길에 들어섰다. 최초에는 미래파의 영향 아래 있었으나 입체파를 거쳐 1919년 한스 아르프와 함께 쾰른에서 다다의 운동을 일으켜 종전의 회화개념을 타파하여 이듬해 파리에서 콜라주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1922년부터 파리에서 살았고 1924년에는 쉬르레알리슴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동 25년에는 독자적인 기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프로타주를 고안하여 쉬르레알리슴에 신국면을 개척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꿈과 현실, 우연과 필연이 교차되어 있어서 새로운 환상을 얻은 셈이다. 1941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1946년에는 애리조나로 거처를 옮겨 또한 원시의 야성적인 세계를 탐구하였고 1949년에 프랑스로 돌아와 이듬해에는 대회고전(大回顧展)을 열었다. 대표작은 <커다란 숲> <비 뒤의 유럽>이 있고 연작인 <박물지(博物誌)>와 <백두녀(白頭女)>도 유명하다.

[편집] 쉬르레알리슴

超現實主義 surrealisme 프로이드 정신 분석학의 영향 아래 전개된 예술운동이며 조형예술과 문학을 포함한다. 일반적으로 20세기의 예술운동은 포브와 표현파에서 시작하여 퀴비슴을 경유하여 다다이슴과 쉬르레알리슴으로 발전하는데 다다이슴 이전에는 시와 조형을 포함한 예술운동은 표현파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결국 야수파나 입체파의 운동은 순전히 조형상의 문제에 한정되어 있어서 화면에서 비어져 나오는 미지수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표현파는 문학운동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포식 이상으로 인간의 감성과 내부세계의 격정을 존중하였기 때문이다. 원래 포브와 표현파의 차이는 형식을 중히 여기는 프랑스적 감성과 내용을 중시하는 독일적 정신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블라맹크, 드랭의 작품 이상으로 키르히너와 쉬미트 로틀루프의 화면쪽이 더욱 파국적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다이슴은 한층 더 파괴적이었으며 쉬르레알리슴은 프랑스적 감성 위에서 한번 더 내용을 전면으로 밀어 내는 조작(操作)은 아니었을까. 테크닉에서 본다면 쉬르레알리슴은 퀴브에서 다다로, 다다에서 초현실로 몇몇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쉬르레알리슴은 이념과 기술 양면에 걸친 20세기 최대의 예술운동이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쉬르레알리슴의 어원은 아폴리네르에 있으며, 주의로서 명확한 형태를 취한 것은 앙드레 브르통의 '쉬르레알리슴 제일선언'(1924)에서 비롯되었고 오토머티즘을 통하여 꿈의, 심층의, 불가시(不可視)한 세계가 백일하에 노출되었다. 프로타주나 데칼코마니는 그러한 표현에는 불가결의 수단이었다. 여기에서는 영국의 프란시스 베이컨과 독일의 파울 클레를 의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그들도 초현실의 일면을 갖추고 있다.

[편집] 키리코

Giorgio de Chirico (1888∼1978) 이탈리아의 화가이며 그리스의 볼로스에서 출생, 기술자가 되려고 공학을 수학하였으나 화가생활로 전환하였다. 아테네의 미술학교와 뮌헨의 미술학교를 거쳤고, 특히 독일의 화가 뵈클린과 클링거에게 접근, 결국 이탈리아에 정착하였다. 1910년 쉬르레알리슴을 예고하는 최초의 그림을, 1911년 파리에 체재하며 피카소와 아폴리네르들과 사귀어 퀴비슴에 관심을 가지면서 점차적으로 조상(彫像)이나 기하학적 도형을 배치한 움직임이 없는 양식을 확립하였고, 1917년에 친구인 카를로 카라와 '형이상회화(形而上繪畵)'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사물이 가진 형이상(形而上)의 심리학을 목표로 하고, 명상적이고 신비적이며 또한 추억적인 화면이다. 이러한 그의 정숙한 구도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의 영향이 없다고는 단언할 수 없지만 전기한 뵈클린과 클링거에로의 경도(傾倒)를 생각할 때에, 또한 키리코를 스승으로 받들었던 수많은 쉬르레알리스트의 존재를 생각할 때에 그에게서 헤겔과 니체를 원천으로 하는 독일적 사념을 연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24년 파리의 쉬르레알리슴 미술전에 참가하였고 발레나 오페라의 무대장치에도 몽환적인 구도를 전개하였으나, 1933년부터는 또다시 아카데믹한 작품으로 돌아와 이른바 전위운동에서 물러나와 버렸다. 대표작은 <시인의 불안>(1913), <봄의 트리오>(1914) 등이다.

[편집] 멜랑콜리와 가로의 비밀

-街路-秘密 키리코의 1914년 작품으로 대표작 중 하나로 이 길게 뻗친 회랑(回廊)이 있는 건물투시법은 될 수 있는 한 보는 사람의 시선을 깊숙하게 끌어들이고 그것과 교차하는 듯이 침침한 건물이 오른편에 배치되고 있다. 빛과 그림자, 연장과 정지, 앞과 뒤, 미래와 과거 등 대상은 저마다에 형이상의 의미를 가져서 심리의 주름살을 엿보게 한다. 굴렁쇠를 돌리고 있는 소녀, 그녀도 앞으로 달리고 있는 듯이 보여서 사실에 있어서 회상의 실을 끌어당기고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이후 이러한 관념의 대립이 초현실주의 최대의 내적인 수법이 된다.

[편집] 미로

Joan Miro (1893∼1983) 에스파냐의 화가. 바르셀로나 근처인 몬토로이크에서 출생하여 바르셀로나의 미술 학교를 마친 후 1919년 파리로 나와 피카소를 중심으로 한 퀴비슴 운동에 공명하였고 1925년 앙드레 브르통 등의 쉬르레알리슴 운동에 참가한 후에 쉬르레알리슴 미술전에 출품도 하였으며 파울 클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초기의 <농원>(1921)과 같은 사실적인 작풍으로부터 특징있는 조형언어의 세계로 옮아간 것도 이 시기인데 대상은 단순하게 추상화되었고, 히에로그리프에 흡사한 기호가 지배적이다. 1928년에는 네덜란드 여행, 그 해에 미국에서 개인전, 1937년에는 만국박람회 에스파냐관(館)에 벽화를 제작,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1948년 귀국한 후로는 파리와 바르셀로나에서 제작생활을 하였다. 미로의 작품에는 초현실주의 특유한 어두운 꺼림칙한 느낌이나 심리묘사는 적고 밝은 소박성이 특질이며 모두를 순수한 상징기호로 바꾸어 가는 매력이 있다.

[편집] 탈출의 사다리

미로가 1940년에 제작한 작품으로 원숙기의 것이라 한다. 미로의 전매특허라고도 할 기묘하게 희학질하는 생물, 불가사리·초승달, 별, 뱀 등이 기호가 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앙드레 브르통이 '이들의 형태야말로 공간에서 한기(寒氣)를 뺏는다'고 비판하였으니 만큼 화면은 과연 유머에 넘쳐 있고 이 때문에 색채도 겨우 청·흑·적의 배치로 총족하고 있다. 기호는 마치 음표와 같다. 그러기에 리드미컬하여 눈으로 보는 작품 이상으로 눈으로 듣는 작품이란 인상을 받는다. 미로 연구가 중에는 화면에 마구 뿌려진 별과 뱀, 달과 마물(魔物)에는 이 지상과 하늘의 끊임없는 싸움이 있다고 하지만 심각성은 없다. <탈출의 사다리>가 미로의 머릿속에서 구상된 것은 1936년경부터라고 하는데 그래서 전쟁에 대한 불안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것은 지나친 생각일 것이다. 다만 한편의 동화와 같이 즐거운 율동의 세계이다.

[편집] 델보

Paul Delvaux (1897∼1994) 안타이트 출신인 르네 마그리트와 더불어 벨기에의 쉬르레알리스트이다. 부친의 희망으로 건축을 배웠지만 수학이 떨어져서 화가로 전환하여 1920년에 4년간 브뤼셀의 미술학교에 다녔다. 델보 초기의 풍경화는 포브이며 인물은 대체로 벨기에의 표현파 안소르 페르메크의 영향을 받았으나 얼마 뒤에 키리코와 만나 쉬르레알리슴으로 기울어져서 거의 독자적인 힘으로 자기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1935년 후에는 직접으로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쉬르레알리슴 미술전에 출품하여 '몽유병적 나부가 거니는' 그의 이미지네이션은 최근에 와서 겨우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1969년 파리에서 회고전(回顧展)을 열었다. 앙드레 브르통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델보는 낡은 플랑드르 풍차가 청동(靑銅)의 빛 속에 진주의 쇠사슬을 만들고 있는 거대한 영혼의 영역과, 바로 이것을 통괄하는 단 한 사람의 여성에게 일체를 맡기고 있다.'

[편집] 메아리

델보가 1943년에 제작한 작품이다. 델보의 매력도 키리코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추억과 결부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막연하여 포착할 수 없는 순수한 이념이고 특정한 추억은 아니다. 단지 델보는 이것을 꿈의 반복에 유사한 되풀이의 수법으로 표현한다. 그리스풍(風)인 신전(神殿)의 열과 창백한 달빛을 받으면서 나체인 채로 걸어가는 여인들. 그녀들은 원근법의 초점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작아져 어즘푸레해져간다. 델보의 연구가들 중에는 그가 평생 나부(裸婦)를 계속 그렸다고 하는 이유로 단적으로 평하여 에로티시즘 화가라 말하기도 하지만 델보의 누드는 항상 정신의 등불이었으며 순결하고 갭직하였으며 밤 사람이어서 결코 옮기는 일이 없다. 아마도 델보의 그림 속에서 보이는 옷 입은 사람 편이 차리라 교활하고 물질적인 존재로서 죄지은 것같이 겁을 집어먹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 점에서 델보는 그리스 정신을 계승한 정당한 적자(嫡子)라 하겠다.

[편집] 마그리트

Rene Magritte (1898∼1967) 레시느 태생. 벨기에의 쉬르레알리스트이다. 브뤼셀의 미술학교를 졸업한 다음 파리에 체재(1920∼1926)하여 입체파와 미래파를 거쳐 쉬르레알리슴의 그룹과 사귀게 되면서 환상적인 작품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마그리트의 환상이란 이상한 것, 놀라운 것을 세련된 기법으로 일상생활 속으로 지양하여 유니크한 사물과 사물과의 관련을 구축하는 것일 뿐 결코 기괴취미도 아니고 도깨비 따위도 아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로 뒷받침할 수 있겠다. "인간이 어떠한 사물에서 보고 있는 사실은 또 다른 하나의 사물이다. 중요한 일은 어떤 물체를 통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는 일이 아니고 놀란 자기에게 놀라는 일이다"라 말하였다. 대표작으로 <빛의 왕국> <비레네의 성> <커다란 가족> <사람은 이렇게 산다> <규방(閨房) 철학> 등이 있다.

[편집] 빛의 왕국

마그리트의 대표적 작품이며 화면에는 소읍의 작고 평화스러운 한채의 집이 그려져 있다. 그저 그뿐이다. 그러나 보는 사람으로서는 문득 생각에 잠겨버린다. 문은 어둠에 싸였고 가로등이 켜졌으며 집도 마당도 그리고 나무도 밤의 정적 속에 잠겨 있는데 하늘만이 그렇게도 밝고 흰 구름마저 뚜렷이 떠 있는 것은 어쩐 일인지. 이것은 마그리트가 되풀이하는 수법이다. 즉 데페이즈망이다. 프랑스 말로 depaysement(사람을 다른 생활환경에 둔다)이란 말은 실은 프로이트가 '꿈'의 한 현상으로서 지적한 성질로 전위(轉位)라 표기하여도 무방하다. 꿈에는 카테고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꿈에서는 일체가 가능하며 A란 장소에서 어느 틈에 Z의 장소로 변하고 있다. 따라서 마그리트의 <빛의 왕국>은 밤인 동시에 한낮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을 일종의 트릭이라 말해 버리면 그만이기는 하겠지만 마그리트는 묘사력에 있어서 보통이 아닌 기량을 가졌기 때문에 밤과 낮은 종이 한장의 차이인 것이다.

[편집] 탕기

Yves Tanguy (1900∼1955) 프랑스 화가로서 파리 출신이나 미국에 귀화하여 코네티컷 주 우드벨리에서 사망했다. 부친은 해군장교였던 관계로 청년시대는 선원으로 아프리카·에스파냐·남미 등을 항해, 1922년 파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가끔 포르 기욤의 화랑에서 키리코의 작품에 매혹되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25년에는 쉬르레알리스트들과 사귀어 1927년 제1회 개인전을 열었다. 탕기는 최초부터 구상(具象)을 그리지 않았는데 항해 중의 추억에서였던지 마치 해저(海底)와 같은 백그라운드에 화석 혹은 생물 비슷한 오브제를 배열하여 비현실의 회화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1927년 이래에 그가 추구한 바는 일관하여 변하지 않았고 점토상(粘土狀)의 원형질을 대지(大地)로 하는 그의 우주발생의 풍경은 점점 확대되어 그의 꿈은 그 나름의 리얼리티를 유지해 나갔다. 대표작은 <때의 신기루>(1954)와 대작 <호(弧)의 증식>을 남겼다.

[편집]

Wifredo Lam (1902∼1982) 쿠바의 사구아에서 출생하였다. 하바나·마드리드·파리에서 배웠고 1938년부터 파리에서 살았다. 그 해에 에른스트와 빅토르 브로넬을 사귀어 쉬르레알리슴 운동에 참가하여 1940년에는 앙드레 브르통의 책에 삽화를 그렸다. 동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재차 파리로 돌아왔으나 현재는 이탈리아에서 제작활동을 하고 있다. 램의 작품에는 원시림과 정글 그리고 서벤너의 망령이 서로 밀치고 있다고 평한다. 조포하고 난잡한 배색에서 유달리 빛나는 괴물이 떠올라 마치 그것들은 적도지대의 수목을 치장하는 의태(擬態) 곤충인 것만 같다. 말하자면 원시와 신화가 뒤섞여 흔들려 움직이는 세계이지만 아무튼 토착의 향기가 강하게 풍겨 쉬르레알리슴의 이색적인 화가라 말하겠다. 칠레 출신인 초현실의 화가 마타가 인공세계의 착란을 그린 데에 비하여 대단히 야성적이다.

[편집] 벨메르

Hans Bellmer (1902∼1975) 폴란드의 카드비체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사진작가로서 출발하였으나 [인형]이라고 제목을 붙인 일련의 기분나쁜 사진에서 명성을 얻고, 베를린을 떠나 파리로 나왔다. 쉬르레알리슴 잡지 {미노토르}에도 그 사진 한장을 게제하였는데 귀여운 소녀가 분해되고 해체된 그림에서 큰 충격을 일으켰다고 한다. 다만 마르셀 장의 말에 의하면 그 소녀의 얼굴은 사별한 벨메르의 부인을 꼭 닮았다고 한다. 소묘가로서도 탁월하였으며 유채화는 별로 많이 그리지 않았으나 데생과 판화에 새로운 해부학의 영역을 개척하였다. 막스 에른스트, 가스통 바쉬라르, 포르, 에뉘아르 등의 초상 외에 그 변형이 가능한 오브제 [인형]도 제작하여 진귀한 심리적·성적인 발상(發想)을 환기시킨다. 대표작에는 [밤에 피는 장미] [이미지의 해부학] [안구담(眼球譚)] 등이 있다.

[편집] 달리

Salvadore Dali (1904∼1989) 에스파냐의 화가이며 바르셀로나 근처의 피게라스에서 출생. 1921년 마드리드의 미술학교에서 배웠고, 1924년 형이상화(形而上畵=키리코, 카라)에 관심을 깊이 가지면서 동시에 프로이트의 심리분석에도 흥미를 갖게 되었다. 1928년 파리로 가서 피카소와 쉬르레알리스트와 교유하여 이듬해 파리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다. 달리는 매우 훌륭한 기법을 구사한 화가이어서 정확하기 이를 데 없는 세부묘사와 여기에 프로이트의 이론으로 단장하였다. 1931년부터 1934년에 걸쳐서 대표작 <기억의 고집> <황혼의 격세유전(隔世遺傳)>을 발표하는 한편 1930년에는 <눈에 보이는 여성>을 제작하여 편집광적(偏執狂的) 비판의 방법론을 명백히 하였다. 이른바 이중상(二重像)의 작품이 나온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1940년 미국에 건너가 캘리포니아에서 살았고, 1941년에는 뉴욕에서 대회고전(大回顧展)을 열었다. 그는 쉬르레알리슴의 전형적인 화가이다.

[편집] 내란의 예감

內亂-豫感 달리 작. 일명 <삶은 강낭콩이 있는 부드러운 구조>라고 하는 이 그림은 1936년 소위 에스파냐 내란이 일어나기 반년 전에 제작하였다. 지평선을 가능한 한 낮게 잡고 부드러운 물체를 심하게 잡아 늘인 이 수법은 달리 독자적인 왜곡(歪曲) 원근법의 일종인데 이 때문에 화면은 실로 다이내믹한 구성력을 갖추고 있으며 거기에 동족 상쟁의 내란의 비극을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계열에 속하는 것으로 <가을의 인육(人肉) 먹기>(1936∼1937)가 있는데 이것은 울적한 가을풍경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살을 뜯어 먹는 작품으로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권태감이 화면 전체에 덮여 있다. 이에 비하면 <내란의 예감>은 글자 그대로 격발(激發)의 찰나라고 하는 야릇한 긴박감이 특징일 것이다. 흰 구름이 떠 흐르는 하늘의 푸르름 또한 이러한 긴장의 효과를 높이고 있다. 예술은 예언이라 말하지만 바로 여기에 그 좋은 예가 있으며, 이후 현대예술은 미래로 향한 통찰력을 상실해 버렸다.

[편집] 피니

Leonor Fini (1918∼ )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출생하였으며 쉬르레알리슴의 가장 독창적인 여류화가로서 현재는 파리에서 살고 있다. 한스 리히터에 의하면 쉬르레알리슴풍(風)의 그림을 그리는 여류화가는 피니뿐만 아니고 레오노라 카린톤, 드로테아 타닝, 메레트 오펜하임 모두가 에른스트에서 큰 영향을 받았던 듯한데 확실히 피니가 잘 그리는 동굴이나 폐가·황야나 늪지대는 게르만적이었지 결코 라틴적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고 보니 그녀 선조에 독일사람의 피가 섞여 있었던 것이다. 피니가 그린 상징의 오브제는 달걀이고 해골이며, 어느 것이나 생성과 사멸에 직결되고 있다. 스핑크스는 아마 그 양쪽을 다 지배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대표작으로는 <세계의 끝> <지질학적인 기억>이 있으며 1955년 이후는 중국회화의 전통을 포용한 풍경이 뛰어났고 최근의 작품에는 색채가 한층 더 현란해 가고 있다.

[편집] 환상적 레알리슴

幻想的- fantastischer realism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빈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환상예술의 운동인데 시인이자 화가인 알베르트 파리스 폰 귀타스로가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빈은 나치스의 통치하에 있었고 전후의 빈은 4개국의 공동관리로 인하여 완전히 분단되어 이른바 예술의 공백상태가 생겼으나, 원래 그 곳에는 세기말부터 금세기에 걸쳐 구스타프 크림트와 에곤 실레 등 뛰어난 인물이 있었고 프로이트나 와이닌겔, 무질, 그리고 호프만스타르, 마라와 센베르크 등 모든 예술분야에 있어서 현저한 연쇄반응을 보여왔다. 1950년 쉬르레알리슴의 화가이자 이론가인 에드거 쥐네가 빈에 왔을 때 당시 20대의 젊은 화가들이 그의 주변에 모였는데 르돌프 하우스너, 월프간그 프티, 안톤 렘덴 등이고 그 후에 에른스트 프크스, 에리히 브라우어, 피터크리치 등이 첨가되었다. 그들은 쉬르레알리슴 운동에 있어서 그것을 반드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역할과 동시에 조형(造形)의 미를 경멸하는 관념의 유희인 네거티브한 면도 발견하게 되어 새로운 쉬르레알리슴 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먼저 전통으로 되돌아와서 뒤러, 레오나르도, 알트도르퍼, 브뤼겔, 알텐보르트 등으로부터 양분을 흡수하고 이어서 기술의 수련을 목적으로 하여 갖가지 mischtechnik(기술의 복합)를 구사하여 무엇보다도 아르티장임을 모토로 하였다. 그들 가운데서도 폭스, 브라우어, 렘덴이 뛰어났으며, 폭스의 다음과 같은 말은 어떤 의미에서 쉬르레알리슴의 수정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겠다. "그림을 완벽하게 마스터하는 일, 결국 회화의 기술이란 정밀 적절한 필기법-내용의 한 자 한 구절을 소홀히 하지 않는 기술법-즉, 무엇을 그리느냐에 달려 있다."

[편집] 오토마티슴

Automatisme 自動書記法 우연을 이용하고 동시에 만인에게 가능한 쉬르레알리슴의 방법으로 이성이나 의식에 지배되지 않고 무의식 가운데에 화필을 자유롭게 움직여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 방법은 쉬르레알리스트 가운데서 행하여졌던 우미한 사해(死骸)와도 어딘가가 닮아 있다. 후자는 한장의 종이를 순서대로 서로 돌려서 각자가 생각나는 그대로의 한 낱말과 한 줄의 선을 그려 최후에 얻어진 일련의 기괴한 문장이나 야릇한 데생을 보고 즐기는 방법이다. 물론 우미한 사해에 비교하면 오토마티슴이 원초적이며 문명의 냄새가 묻지 않은 무의식의 메시지라 하겠다. 우수한 화가이기도 하였던 빅토르 위고도 이 방법을 사용하였고, 시인 아르님도 이러한 마법의 구술(口述)을 썼다고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브르톤의 기본정신이기도 하다.

[편집] 에로티시즘

eroticism 쉬르레알리슴의 중요한 무기는 에로티시즘이다. 초현실주의가 프로이트의 심리분석을 정신적인 지주로 하고 있는 이상 이는 극히 당연한 판단일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쉬르레알리슴이 그들의 원천(源泉)으로서 찾았던 과거의 화가 가운데에 가령 보쉬, 피에로 데 코시모, 위스리, 고야, 귀스타브 모로, 뭉크 등 남녀의 성애를 저마다의 관점에서 묘사한 것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 후작의 갖가지 저작은 인간의 육(肉)과 영(靈)을 극도로 긴박하게 대립시키는 것이라 하여 애호되었기 때문에 결국은 피엘 드 만디아르그, 조르즈 바타이유, 장 쥐네, 앙드레 브르통과 같은 시인이 자라날 수가 있었다. 원래 '시란 하나의 감각에서 다른 감각으로, 사물에서 이미지로, 이미지에서 관념으로, 관념에서 명확한 실체로 향하는 몇 차례의 다리를 걸어 준다'(르네 크르베르)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새로운 이미지의 관념의 복권(復權)이었던 쉬르레알리슴이 문학과 시와 나란히 갔다는 것은 필연적 사실이어서 때로는 바타이유의 소설이 화가들의 데생력을 자극하였던 일도 있었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쉬르레알리슴이 시대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혼란한 시기에 나왔다고 본다면 에로티시즘이 죽음을 극복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이렇게 하여 <에로틱 드 쉬르레알리슴>이라는 서적이 간행될 만큼 쉬르레알리슴은 에로티시즘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사람들은 벨메르나 파울 븐더리히의 인체해부학에서도, 그리고 월터 스완벨크나 바르티스의 소녀들에서도 브로넬의 요정이나 만 레이의 사진에서도 오펜하임이나 피에르 모리니에의 오브제에서도 에로티시즘을 발견해 낼 수 있겠다. 본디부터 그들 가운데에는 섹스 이퀄 에로티시즘이라고 하는 직절적(直截的)인 도식도 있으며 앙드레 마송, 존엔시테른 등은 그 전형이라 간주된다.

[편집] 프로타주

frottage 본뜻은 마찰하다 또는 문지르다의 뜻인데 독일어는 Durchre, betechnik이다. 나무토막·돌·나뭇잎·베 등 요철(凹凸)이 있는 물질의 표면에 종이를 대고 이것을 위해서 연필이나 목탄으로 문질러 거기에 떠오른 우연의 효과를 노린 한 수법을 말한다. 1925년 여름에 에른스트는 브르타뉴의 포르닉에서 이 수법을 발견하였다. 무심히 바라다보던 호텔 방바닥의 요철에 흥미를 가졌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꺼질 듯이 어슴푸레하고 희미한 선의 궤적이었으며 혹은 무(無)에서 이룩된 형식이라고도 할까. 그러나 이 무한히 작은 형식은 인간의 무의식에 계류되는 제작충동을 자극하여 점차로 확대되고 분기(分岐)되어 간다. 마치 레오나르도의 그 벽의 얼룩과도 같다. 이리하여 에른스트는 프로타주로써 쉬르레알리슴의 한 특징 테크닉의 가능성을 암시하였다. 석쇠나 어탁도 프로타주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편집] 콜라주

collage 무엇을 바른다는 뜻인데 퀴비슴 시대에 피카소나 브라크가 시도한 파피에 콜레를 발전시킨 기법을 가리킨다. 다만 파피에 콜레는 화면에 우표나 티켓이나, 모조지·신문지 등을 발라 붙여서 조형적인 효과를 노린 데 대하여 다다이슴과 쉬르레알리슴의 콜라주는 깃털·철사·성냥개비, 따위 응용하는 소재의 종류도 넓어졌고 쇼킹한 효과를 구하는 경향도 강화되었다. 즉 파피에 콜레의 경우는 어느 정도 화면의 하모니에 따라서 무엇을 발라도 발랐던 것이어서 세련도가 높은 데 대하여 콜라주는 다른 소재와 맞부딪치게 되고 또한 생각지도 못한 언밸런스를 본질로 하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인상은 결코 최초의 충격을 뛰어 넘을 수가 없다. 여기에 양자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콜라주는 그림에서 태어나온 새로운 관계, 그리고 이성에 반대되는 특색과 우연한 트릭을 지향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성공한 예로서는 막스 에른스트의 <백두녀(白頭女)>와 <친절 주간>이 있다.

[편집] 데칼코마니

decalcomanic 이 말은 프랑스어 decalquer(복사하다. 전사하다)와 manie(편집)의 합성어인데 쉬르레알리슴 기법의 하나이다. 오스카 드민게스가 이 기법을 발명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글라스나 아트지와 같은 비흡수성인 소재에 그림물감을 칠하고 거기에 다른 종이를 댄 다음 위에서 눌렀다가 떼면 기괴한 형태의 무늬가 생겨나는 우연한 테크닉이다. 오스카 드민게스는 1906년에 카나리아 군도(群島)의 테네프리에서 출생하여 1928년 파리로 나와 쉬르레알리슴의 진영에 참가하였다. 정열적이었고 발명에 대한 재능이 우수하였던 그는 어느날 두 장의 고무 수채화를 문질러 맞췄다가 떼내어서 유니크한 풍경을 제작하였다. 막스 에른스트가 이것을 유채화에 응용한 일은 유명하였지만 보통 이러한 제작은 시머트리컬하게 되기 쉬워 드민게스는 그것을 피했다. 대표작에는 <미래의 기억>이 있다. 끝으로 드민게스는 1957년 섣달 그믐달에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부기해 둔다.

[편집] 1945년 이후의 미술

[편집] 살롱 드 메

Salon de Mai 살롱 드 메(5월의 전람회)는 1945년에 비평가인 가스통 디르의 주장에 따라 파리에서 창설된 초대제(招待制)의 전람회이며 매년 5월에 개최된 데서 이 명칭이 생겼다. 이것은 1941년 5월에 독일군 점령하에 있었던 파리에서 개최된 '프랑스 전통 청년화가 미술전'의 레지스탕스 정신의 오의(奧義)를 계승하였고 바젠, 에스테브, 마네시에, 상지에 등 비구상계(非具象系) 화가들이 중심이 되었지만 미노, 로르주 뷔페 등 옴 테모앙(시대의 증인)계 그룹의 구상화가까지도 거부하지는 않았다. 이 점에서 1946년에 설립된 레알리테 느베르(新現實展)는 아르퉁, 폴리아코프, 바자렐리 등을 포용하여 순수 추상으로 향한 것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그러나 1947년 이후는 레알리테느베르계(系)의 화가까지도 흡수하여 전후(戰後)에 먼저 일어난 추상과 구상의 대립을 초월해서 추상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편집] 바자렐리

Victor Vasarely (1908∼1997) 헝가리 출신. 그는 의사가 되기 위하여 부다페스트 대학 의학부의 입학 자격을 얻었으나 그것을 포기하고 디자인 학교에 진학하였다. 모홀리 나기의 작품에서 크게 감명을 받았고 말레비치, 몬드리안, 칸딘스키의 작업에서 영향을 받았다. 1930년 그는 파리로 이주하여 계속 파리파(派)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전쟁 중에는 주로 그래픽의 작업에 종사하였으나 종전 후에는 재차 회화에 열성을 쏟았고 동시에 태피스리의 의장(意匠) 디자인이나 석판화 분야에서도 폭넓은 활약을 하였다. 그의 작품은 구성주의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인데 기하학적인 색면구성에 의하여 순수한 객관을 화면에 나타내려고 의도하였다. 그는 정서적인 표현이나 주관의 표출을 극력 피하고 일반적으로 차가운 추상이라 일컬어지는 비개성적인 기하학적 형태의 배합으로써 순수한 것, 절대적인 것에 접근하려고 하였다.

[편집] 뷔페

Bernard Buffet (1928∼1985) 파리에서 출생하여 1944년 파리 미술학교에서 배웠다. 1947년 최초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는데 이 개인전은 전후의 불안을 단적으로 묘사한 사실적인 수법에 의하여 널리 공감을 얻었다. 이듬해인 1948년에는 20세라는 약관으로 크리틱상(賞)을 수상하여 일약 화단의 총아가 되었다. 그후 매해마다 테마를 정한 연작을 발표하였고, 1958년 샬판티에 화랑에서 개최한 대전람회가 성공을 거두어 그의 위치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 동안에 같은 크리틱상 수상자인 로르주 등과 함께 결성한 '시대의 증인' 그룹을 본거로 하여 추상회화와 대립했다. 뷔페의 특색은 예각적(銳角的)인 선묘(線描)와 흑·백·그레이를 기조로 한 간결한 배색에 의한 사실이며 이따금 그리는 야위어 빠진 얼굴이나 다리·풍경·새·광대 등은 전후의 폐허에 허덕이는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수법의 마네리화(化)는 이윽고 비참주의(悲慘主義)·과장벽이라는 비난까지도 받았다.


[편집] 코브라

Cobra 코브라는 코펜하겐·브뤼셀·암스테르담의 각 머릿글자를 맞춰서 만든 전위미술(前衛美術) 그룹의 명칭인데 1948년 덴마크·벨기에 및 네덜란드의 미술가들을 멤버로 해서 집결되었다. 북구의 표현주의와 쉬르레알리슴적인 환상을 혼합한 화풍(畵風)을 추진하면서 활약을 하였으나 1951년에 해산하였다. 요른, 아펠, 아레신스키를 중심으로 하였고, <코브라>라 는 동명의 기관지를 10호까지 발행하였다.

[편집] 추상표현주의

抽象表現主義 abstract expressionism 추상미술의 경향을 총칭하는 개념인데 1950년대 처음으로 일어난 유럽의 앵포르멜·타시슴과 미국의 액션 페인팅도 이 개념 속에 포괄할 수 있다. 기하학적인 도형을 중심으로 한 순수 추상의 차가움과 비교하여 일반적으로 뜨거운 추상이라고도 불린다. 1940년대 종말에 가서는 이 추상의 냉열논쟁(冷熱論爭)이 자주 일어났으나 이윽고 뜨거운 추상이 주류를 점유하게 되었다.

[편집] 앵포르멜

informel 비정형(非定形)이란 의미이다. 앵포르멜이란 1951년 프랑스의 비평가인 미셀 타피에가 조직한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운동이며 전후 회화의 이념을 명확하게 밝히려고 한 최초의 시도이었다. 회화에 있어서 모든 정형화(定形化)를 배제하고 정형화되지 않은 생명의 자취를 그리려는 행위 바로 그것, 혹은 마티에르의 집적(集積)과 공간의 긴장 속에서 직접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다. 1951년의 '격정의 대결' 전시회와, 1952년의 '앵포르멜이 의미하는 것' 전시회에 의하여 전후 회화의 하나의 중요한 도표가 되었다. 타피에가 이 운동을 벌일 힌트를 얻은 것은 1945년에 개최된 포트리에 전시회에서 나치스에게 학살당한 무명인의 얼굴을, 얼굴이라고도 할 수 없는 형태의 상실과 박력있고 중후한 마티에르로써 그린 작품 <인질(人質)>을 보고 난 다음의 감명 때문이라고 한다. 이 운동에 참가한 주요한 화가들은 마튀, 아르퉁, 쉬마하, 뒤뷔페, 타피에스 등이다.

[편집] 포트리에

Jaen Fautrier (1898∼1964) 그는 파리에서 출생하였으나 생후 얼마 뒤에 양친과 더불어 런던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부상을 입었으나 1920년부터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차려 회화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의 제작을 '새우갈색의 시대'라 하고 있다. 1927년 최초의 개인전을 열어 앙드레 말로의 지우(知友)를 얻어 단테의 지옥편에 삽화를 그리는 일을 주선해 받았다. 이 무렵을 흑의 시대라 한다. 이어서 그레이의 시대가 시작되어 그의 마티에르는 더욱더 강하게 됨과 아울러 비구상으로 향하는 의도가 현저하게 되었다. 스키 강사를 하면서 묘화(描畵:청의 시대)를 하고, 이 시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에 그는 앵포르멜풍(風) 양식을 거의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1940년 파리에서는 그의 집이 레지스탕스의 본거지가 되어 있었다고 전하며, 1942년에서 1944년까지 그 유명한 <인질>의 연작을 제작하였다.

[편집] 마튀

Georges Mathieu (1921∼ ) 마튀는 처음 법률·철학·영문학 등을 배우다가 1942년경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947년 파리에 정주하면서 본격적인 제작을 하였다. 1951년 미셀 타피에의 초대에 응하여 '격정의 대결' 미술전에 참가한 후에는 앵포르멜의 대표적인 화가로 활약하게 된다. 그가 이상한 복장을 하고 긴 화필을 가지고 또한 독특하고 정열적인 제스처를 섞어가면서 즐겨 공개하는 제작을 하였음은 유명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린다는 것은 화려한 축제라고 한다. 따라서 그는 모든 의도나 계획을 배제하여 그리는 데에 몰입한다. 그리는 행위 자체에서 삶의 확증을 구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의지는 예술의 죽음이다'라고 하여 일순간의 속필(速筆)을 중하게 여기고 있다. 속필에 전생명을 맡겨 버려야만이 회화의 정신은 소생할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믿을 수 있는 것은 행위뿐이라고 하는 그의 실천은 전후의 세대적인 특질을 지니고 있다.

[편집] 타시슴

Tachisme 타시슴은 1954년 비평가 샤를르 에스틴느가 주창한 이념인데 타시(얼룩:色斑)에 의한 오토매틱한 제작을 특징으로 한다. 그림물감의 비말(飛沫), 점적(點滴), 번짐 등 우연적인 효과에 의해 의식적인 묘화를 넘어서려고 하는 점, 즉 앵포르멜로 통하는 데가 있는데 원래 프로타주나 데칼코마니의 기법을 개척한 쉬르레알리슴에 의한 현대 회화로의 접근이라 생각할 수가 있다.

[편집] 액션 페인팅

Action Painting 액션 페인팅은 1952년 미국의 비평가 해럴드 로젠버그가 명명(命名)한 전후 미국의 대표적인 표현양식이다. 이미지의 정착보다는 그린다는 행위(액션) 그 자체에서 순수한 의미를 찾아내려는 경향이며, 잭슨 폴록, 윌렘 데 크닝, 프랑츠 크라인 등에 의하여 대표된다. 본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에 망명한 쉬르레알리스트의 영향하에서 쉬르레알리슴이 개척한 오토마티슴의 기법을 더욱 철저하게 한 수법(바닥에 펼친 캔버스 위에 유동적인 마티에르를 떨어뜨려 나가는 드리핑의 수법 등)도 볼 수 있지만 쉬르의 이미지 주의(主義)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유럽의 앵포르멜과 때를 같이 하여 1950년대의 미술에 뜨거운 추상의 선풍을 일으켰다.

[편집] 폴록

Jackson Pollock (1912∼1956) 폴록은 미국의 와이오밍주(州) 코디에서 출생하여 미국 서부의 애리조나와 북캘리포니아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후 로스앤젤레스의 미술고등학교에서 조각과 회화를 공부하였다. 1929년 뉴욕으로 나와 1931년까지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토머스 벤튼에게 사사하였다. 그가 작가활동을 시작한 것은 1935년 이후의 일인데 추상적인 작풍으로 전환한 것은 1940년부터이다. 1942년 그는 뉴욕의 맥밀란 화랑에서 열린 '미국·프랑스 청년화가 미술전'에 첫 출품을 하였다. 이듬해인 1943년에는 유명한 여성 컬렉터인 페기 구겐하임이 주최한 '금세기닝의 미술'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고 그녀가 주최한 개인전은 1950년 유럽에서도 개최하여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 그 해에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회에서는 고키와 데 쿠닝과 더불어 젊은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로서 각광을 받았다. 그 후에 그는 액션 페인팅의 대표적인 화가로서 미국과 유럽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1956년 뉴욕 교외인 사우잔프턴에서 자동차 사고로 급서(急逝)하였다. 그는 보통 화면을 수평으로 두고 상하 좌우의 구별 없이 어느 쪽에서도 그려 가지만, 만들고 있다는 의식을 배제한다는 그 화면에는 놀랄 만큼 밀도 있는 공간을 짜고 있다.

[편집] 데 쿠닝

Willem De Kooning (1904∼1997) 윌렘 데 쿠닝은 로테르담에서 출생, 네덜란드·벨기에에서 수학한 후 1926년 미국에 정주하여 그림을 그렸다. 그는 액션 페인팅의 선구자 아실 고키의 친구이나 고키가 섬세한 데에 비하여 그는 대담한 다이너미즘의 작풍이 특색이다. 폴록이 죽은 뒤 액션 페인팅의 대표적인 화가이기도 하다.

[편집] 네오 다다이슴

Neo­Dadaism 네오 다다이슴은 1960년 전후에 미국에서 일어난 한 경향인데, 그린다고 하는 행위를 지상(至上)으로 삼은 액션 페인팅에 대하여, 현실적인 기호나 오브제를 화면에 받아들인 데에 신선한 느낌이 있다. 이 비(非)에스테틱한 성격이 과거의 다다이슴 운동을 상기하게 한다는 데에서 이 명칭이 붙여졌다. 재스퍼 존스와 로버트 라우센버그 등이 그 대표적인 화가로 알려졌다.

[편집] 존스

Jasper Johns (1930∼) 재스퍼 존스는 미국의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52년 이후 뉴욕에 살았고, 1954년경 신문지로 만든 파피에 콜레에 납(蠟)그림물감을 사용하여 표적·숫자·알파벳·기(旗) 등의 미국적인 심벌을 그렸다. 거기에는 주관적인 마티에르를 신중히 배제하고 표현을 가능한 한 오브제에 접근시키려는 배려를 엿볼 수 있다. 1958년 뉴욕에서 제1회 개인전을 열어 네오 다다이슴의 선구적인 화가로서 주목을 모았다. 그는 이 때까지의 액션 페인팅의 열기 띤 표현에 차가운 문장(紋章)이나 기호나 표적 등을 대립시켰는데 이것은 물체 그 자체가 가진냉담한 실재성과 상징성에 의하여 감정이입을 주로 한 종래의 회화를 뿌리째 뒤집으려고 한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라 생각된다. 1959년 이후부터 그의 화면에는 완만한 색채가 더하여졌다.

[편집] 라우센버그

Robert Rauchenberg (1925∼ ) 라우센버그는 텍사스주(州)에서 출생하였다. 해군에서 복무를 마치고 파리의 아카데미 쥐리앙에서 회화를 배웠다. 1948년 그는 다시 노스캘로라이나의 조셉 앨버스가 경영하는 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그 앨버스가 주창한 백(白) 일색(一色)의 회화, 즉 화이트 페인팅은 그에게 다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이 화이트 페인팅에 금속·천·종이 또는 이미 만들어진 물질을 넣음으로써 실재의 세계를 보는 사람에게 강하고 선명하게 인상지으려고 하였다. 이것은 비(非)에스테틱한 성격에 있어서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서 전후에 걸쳐 일어난 다다이슴 운동을 상기케 한다. 그는 사물을 이미지에 종속시키지 않고 반대로 사물을 화면에 도입함으로써 이미지를 파괴하고 혼란시켜서 때로는 넌센스, 또는 역설적으로 현실인식의 다른 길을 내보여 주고 있다.

[편집] 팝 아트

Pop­Art 팝 아트란 1960년대 초엽에 뉴욕을 중심으로 출현한 미술의 한 경향이다. 그 명칭은 파퓰러 아트의 약칭인데 1950년대의 영국에서 선전미술의 명칭으로서 로렌스 아로웨이가 명명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팝 아트는 도시의 정보문화가 만드는 파퓰러한 이미지를 대폭적으로 받아들여 미술을 대중적인 영역으로서 독자적으로 확대해 가고 있다. 리히텐슈타인, 워홀, 올덴버그 등이 그 대표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다. 더욱이 1960년 프랑스의 비평가인 피에르 레스타니에 의하여 결집된 누보 레알리슴(신레알리슴)도 제2의 자연으로 화해 버린 도회적인 현실에 대응한 포퓰러 아트를 추진하고 있다. 아상블라쥐(모아 합치기)와 정크 아트(廢品藝術)는 네오 다다이슴을 더한 이세 유파(流派)에 공통되는 기법이다.

[편집] 폰타나

Lucio Fontana (1899∼1968) 루치오 폰타나는 아르헨티나의 산타 페에서 출생하였다. 7세 때에 집안이 이탈리아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자랐다. 그는 회화·조각·도예(陶藝) 등 다방면에 걸친 제작에 종사하였는데 이것이 그에게 새로운 소재에 대한 왕성한 관심을 환시시켰고 동시에 새로운 공간의 탐구로 유도하여 갔다. 1947년에 발표한 '공간주의(空間主義) 선언'에서는 과학이 제공하는 새로운 소재를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로부터 1951년의 '공간주의·기술선언'에 이르기까지 그는 네온관(管)을 사용하여 빛의 교차를 시험하는 등 여러 가지 공간적 실험을 하고 있었다. 색채·소리·운동·공간 등 모든 종류의 물질적인 요소를 사용하여 통일을 만들어 내는 것에 그의 목적이 있었고 종래 미술의 영역 개념을 넘은 조형의 이념을 세우려고 한 점이 그의 새로운 입장이었다. 회화에서는 1950년대 말에 캔버스를 예리하게 칼로 찢은 작품을 발표하여 화제가 되었다. 캔버스는 이미 그 위에 무엇이 생겨나는 뉘트럴한 공간이 아니고 현실의 공간과 호응하는 관념적이고 동시에 물질적인 공간으로서 의식되고 있다. 폰타나의 공간 탐구는 과거의 이탈리아 미래파의 오의(奧義)를 잇는 것인데, 그것이 추상적인 공간이 아닌 현실적인 고동(鼓動)하는 환경 형성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구적인 의의가 있다. 그는 추상미술의 한계점을 예견한 미술가라고 할 수 있겠다.

[편집] 키네틱 아트

Kinetic Art 움직이는 예술이라는 뜻이다. 움직이는 예술로서 과거에 콜더의 모빌이 고안되었으나 키네틱 아트에서는 관중이 작품에 참가하여 자유롭게 이것을 움직일 수 있는 것과(아감의 가변회화 등) 동력을 사용하여 작품 자체를 움직이는 것(팅겔리의 기계와 셰페르의 사이버네틱조각 등)의 두 종류로 대별된다. 1961년 암스테르담과 스톡홀름에서 키네틱 아트의 총합전시회가 개최되고부터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것이 의도한 바는 빛 혹은 움직임이라는 동태를 파악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하여 이따금 작품 그 자체보다도 이를 둘러싼 방 전체, 환경 전체를 개변하는 방향으로 진전한다. 거기에서는 빛·소리·움직임·색채 등을 종합적으로 취급하여 미술뿐만 아니고 예술의 영역 개념도 애매하게 되어버린다. 파리의 시각예술 탐구 그룹인 뒤셀도르프의 그룹 '제로'는 이러한 혼돈 가운데서 예술의 원점을 탐구하려는 동향이다.

[편집] 시각예술 탐구 그룹

視覺藝術探究-Groupe des Recherches d′Art Visuel 시각예술 탐구 그룹은 1960년 갈시아 로시, 쥐리오 르 팔크, 프랑시스코 소브리노 등 6명에 의해 파리에서 결성된 그룹인데 비닐·아크릴·플라스틱·알루미늄 등 소재를 사용하여 움직이는 오브제를 구성하고 여기에 빛을 비추어 시각적인 효과를 낳게 하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 이 그룹은 1961년의 파리 청년 비엔날레 전시회에서 <미로>라는 제목을 붙인 큼직한 작품을 집단적으로 제작가하여 주목을 끌었다. 빛과 움직임을 결합한 그들의 조형물은 관람자조차 그 내부로 끌어들이는 환경예술을 목표로 한 새로운 경향이라 하겠다. 또한 이와 같은 입장에 서는 그룹에는 독일에도 그룹 제로가 있으며 여기에는 오토 비네, 오토 하인츠 마르크, 귄터 유카의 세 사람이 멤버로서 기관지 <제로>를 발간하고 있다.

[편집] EAT

Experiments Art and Technology '예술과 테크놀러지의 실험'의 약자이다. EAT는 1966년 화가인 라우센버그와 벨 전화연구소(電話硏究所)의 기사인 빌리 크뤼버의 발안으로 결성된 그룹인데 뉴욕의 화가·무용가·음악가 등 예술가와 기술자를 폭넓게 결집하여 새로운 기술 협력을 얻은 여러 가지 예술상의 실험을 시도하였다. 예술과 과학기술의 단층을 메우려는 최신의 경향이라 하겠다.

[편집] 타마요

Rufino Tamayo (1899∼1991) 멕시코의 화가로 남부 와하카주(州)에서 출생하였다. 산 카를로스 미술 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한 후에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하였다. 그는 프랑스 에콜 드 파리의 화풍에 영향을 받았으며, 1923년 국립인류박물관의 민족국 국장이 되어 고대 멕시코의 전통예술에 심취하여 자기 나름의 독특한 양식을 수립하였다. 1933년 멕시코시(市)의 음악학교에 벽화를 그렸고 그 이외의 작품으로는 [자화상] [흰 나비]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멕시코의 민족적인 이야기를 화제(畵題)로 다루면서 이를 역학적인 추상 형식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색채는 강렬하고 인디오의 전통이 맥맥히 흐르고 있으며 누구보다도 가장 멕시코적인 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편집] 술라주

Pierre Soulages (1919∼ ) 프랑스의 화가. 로마네스코 조각·미술의 유품이 많이 남아 있는 중남부의 아벨이 로데스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혼자의 힘으로 그림을 배우다가 1939년 파리로 나와 활동을 하였으며, 중후한 풍경화 및 정물화에 능하였다. 초기에는 세잔·피카소의 영향을 받아 퀴비슴적인 경향을 띠었으나 1946년부터는 추상화로 옮겼다. 자유롭고도 표현의 풍부함을 꾀하였으며 외계에 대한 어떠한 대상도 배제하는 순수한 추상양식에다 조형 공간의 요소를 도입하였다. 그는 1948년과 그 이듬해에는 레알리테 누벨르전(展)에, 그 이후부터는 살롱 드 메에 출품하였다. 1952년의 베네치아, 1953년의 상파울루의 비엔날레전(展) 등에 출품하여 수상하였으며 그 밖에도 국제적인 상을 많이 수상하였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청색과 갈색 계통의 침착한 느낌을 주는 색조를 즐겨 사용하고, 그 이전의 강한 느낌을 주는 검은 형태를 밝은 색조와 결합시켜 간결하고도 힘찬 화면구성을 하고 있어 현대적인 약동감이 대담하고 자유롭게 나타나 있다. 주요 작품에는 <회화> 등이 있다.

[편집] 오키프

Georgia O'keeffe (1887∼1986) 미국의 화가로 위스콘신주(州)에서 출생하였다. 17세가 되던 해에 미술 연구소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버지니아 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광고미술, 교직에 종사하다가 1916년경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기존의 어떤 유파에도 소속되기를 거부하며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였으며 1920년이래 줄곧 뉴멕시코주(州)에서만 작품활동을 하였다. 그의 작품은 <검은 꽃과 푸른 참제비고깔>이 대표하는 연속의 꽃작품으로 유명하며, 뉴멕시코주州)의 황량한 사막과 협곡, 뉴욕의 수십층 되는 높은 건물, 텍사스, 조개껍질, 해골, 공동묘지의 십자가, 구름 등을 소재로 하여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 특히 특징적인 것은 소, 말, 사슴 등의 희게 노출된 두개골에 꽃을 배치하는 강렬한 형태를 구사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화풍은 매우 단순화되어 물상은 백·박청·도색·회갈색 등의 색조로 매우 섬세하다. 그는 뉴욕 현대미술관, 휘트니미술관, 시카고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미국 현대미술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1986년 3월 98세로 사망하였다.

[편집] 마네시에

Alfred Manessier (1911∼1993) 프랑스의 화가로 상투앙에서 출생하였다. 파리 미술학교와 아카데미 랑송에서 공부하였으며, 피카소·루오·세잔·렘브란트의 영향을 받았다. 초기에는 추상적인 종교화, 퀴비슴, 초현실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종군 생활과 전후(戰後)의 사상적 동요를 거쳐 열렬한 카톨릭 신자가 되어서 종교화에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살롱 드 메의 중심인물이 되어 활약하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비구상 형식에 의해 종교적인 테마를 표현하였고, 잘 조화된 선의 섬세한 구성과 광선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섬세한 색조에서 맑고 깨끗한 종교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1955년 카네기 상을 수상하였고, 1962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상을 수상하였으며 '추상회화에 의한 구도자'로 일컬어지고 있다.

[편집] 놀란드

Kenneth Noland (1924∼ ) 미국의 화가로 노스 캐롤라이나주(州)에서 출생하였다. 블랙마운틴 대학에서 공부한 후에 파리에 가서 파리 대학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새로운 추상을 개척하였고 1951년부터 1960년대까지 카톨릭 대학에서 교직하였다. 그의 작품은 추상표현주의로 출발하였으며, 입체주의 영향으로 명쾌하고 구획된 색면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또한 원이나 산 모양을 원색의 색대(色帶)를 병렬로 하여 평면성을 강조하는 색면회화를 이루고 있다.

[편집] 존스

Allen Johns (1937∼ ) 영국의 팝 아트화가로 사우샘프턴에서 출생하였다. 혼시 미술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964년부터 1년간 뉴욕에 체재하면서 대중잡지나 상품, 카탈로그의 도안을 발상원으로 하여 이용하였다. 특히 여성의 다리를 주제로 한 에로틱한 이미지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판화, 조각 작품도 시도하였고 1970년 '대 칼카타'의 무대장치, 의상 디자인에도 손을 댔다.

[편집] 아르퉁

Hans Hartung (1904∼1967) 현대 프랑스의 추상화가로 본래는 독일인이데 프랑스인으로 귀화하였다.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철학과 미술사를 배웠고, 드레스덴의 미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였다. 그후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1931년 드레스덴에서 첫 개인전을 연 그 이듬해부터 2년 동안 미노르카섬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파리로 되돌아와 제2차대전이 발생하여 프랑스군의 외인부대로 참전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프랑스인으로 귀화하여 파리에 정착하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추상적인 표현에 흥미를 느껴 표현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는 색채의 점이나 얼룩을 이용하여 그리는 타시슴 회화를 그려 그 방면에서 선구자로 평가받았다. 전후(戰後)에는 다이내믹한 선의 움직임과 리드미컬한 구성으로 추상화의 대표적인 화가로 크게 활약하였다.

[편집] 마더웰

Robert Motherwell (1915∼1991) 미국의 화가로 워싱턴주(州) 애버딘에서 출생하였다. 오티스 미술연구소, 캘리포니아 미술학교에서 미술을 배웠으며, 스탠포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였고 하버드 대학 대학원, 그르노블 대학, 컬럼비아 대학 대학원을 나왔다. 1941년 손에서 놓은 회화를 다시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쉬르레알리슴에 감화되어 오토마티슴의 실험을 꾀하였다. 그 후에는 일정하지 않은 추상형태를 뜯어 맞추어서 추상표현주의적인 작품을 전개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연작 <에스파냐 공화국에 대한 애가(哀歌)>가 있고 이론가로서도 활약하고 있다.

[편집] 현대조각

[편집] 화가 조각가

畵家 彫刻家 화가 조각가란 가령 피카소, 브라크, 마티스, 샤갈, 드랭, 미로, 모딜리아니 들과 같이 본디는 회화를 제1의적인 작업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때에 따라서 조각에도 손을 대어 기성의 개념에 구애되지 않는 조형작품을 만든 미술가들을 가리켜 말한다. 19세기 말의 로댕, 부르델, 마욜의 뒤를 계승한 금세기의 조각은 잡다한 미적 이념의 융체(隆替)와 보조를 맞추어 진전하여 온 과정에서, 종래의 개념에서 보는 조각이란 장르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를 지니게 되었지만, 전기한 미술가들도 여태까지의 조각이나 회화라는 기성의 테두리를 넘어서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넓은 시야와 자유로운 입장에서 조각에 접근하여 갔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시야의 넓이와 자유로운 입장과 그 위에 선 대담하고 솔직한 표현은 아카데믹한 조각가들조차도 감히 이르지 못한 곳이고 그들의 개척자적인 의의도 여기에 있다.

[편집] 바를라흐

Ernst Barlach (1870∼1938) 독일 표현주의 시대환경 가운데서 유니크한 제작을 진전시킨 조각가이자 판화가 및 시인이기도 한 에른스트 바를라흐는 홀시타인의 웨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888년부터 1891년까지 함브르크 공예학교에서 배운 뒤에 1898년 아르 누보에 따른 잡지 <위겐트>의 동인이 되는 한편 소묘(素描)와 도예(陶藝)를 시작하였다. 그의 제작에서 결정적인 체험이 된 것은 1906년의 러시아 여행인데 이 여행을 마치고서는 흙에서 사는 농민과 학대받는 영세민, 거지, 기도하는 사람과 인고자(忍苦者) 등을 주요한 테마로 다루었다. 소박한 목조(木彫)를 주로 한 이들 인간상은 이따금 긴 망토로 몸을 감싼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그 완만하나 힘있는 무브망을 가진 금욕적인 형태에서는 내부에 도사린 깊은 정신성을 암시하고 있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고, 전후에 많은 기념비를 만들었으나 1938년 나치스가 퇴폐예술가라는 오명을 붙여 그의 작품도 400점 남짓하게 파괴해 버렸다. 현존하는 조상 가운데 대표작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쾰른의 안토니타 교회에 있는 무명 전사묘의 기념비로 묘비 위에 매어달린 조상(彫像)은 그 형식도 매우 특이한 것이다. 그는 북구의 전통을 순수하게 계승하여 현대에 보기 드문 영혼의 조형자라 하겠으며 1938년 로쉬톡에서 사망하였다.

[편집] 렘브루크

Wilhelm Lembruck (1881∼1919) 바를라흐와 같이 독일 표현주의에 친근성을 가졌던 렘브루크는 마이데리히에서 출생했고 1901년부터 1907년까지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배웠으며 1910년에서 1914년까지 파리에 체재하면서 마욜, 로댕 및 브랑쿠시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고 또 아르키펜코와 친교를 맺어 그 우정은 평생 계속되었다. 렘브루크의 특색은 특히 마욜에 가까운 명석한 형태감을 고딕풍(風)의 수직의 질서에 따라 조형한 점이다. 독일의 젊은 세대나 친구인 아르키펜코도 그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가 실제적으로 제작 활동에 종사한 것은 1911년 이후 겨우 9년간에 불과하였는데 그는 많은 가능성을 남긴 채 1919년 베를린에서 가스 자살로 세상을 떴다. 그는 바를라흐와는 대조적으로 형태에 있어서 독일 조각을 근대의 레벨까지 끌어올린 공로자이기도 하다.

[편집] 뒤샹 비용

Raymond Duchamp Villon (1876∼1918) 입체파 조각의 선구자가 되는 뒤샹 비용은 단윌에서 출생하였다. 입체파 화가인 마르셀 뒤샹과 자크 비용과는 형제간이다. 레이몽은 처음 의학을 공부했으나 1900년경 조각가로 전환하여 1901년에 파리로 나와 최초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은 로댕의 강한 영향하에 있었지만 1910년경부터 형태의 대범한 처리를 특색으로 하는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1911년 이후 그는 퀴비슴 운동에 가담, 그 유력한 멤버로서 활약하면서 기계가 가진 구성미에 가까운 작품을 발표하여 조각의 양상을 시사하였다. 1914년의 작품 <말>(파리 근대미술관)은 그 제작의 정점을 이룬 작품으로 유명하며, 그는 1918년 칸느에서 사망하였으나 그의 작품은 자크 리프시츠, 앙리 로렌스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편집] 아르키펜코

Alexandre Archipenko (1887∼1964) 북구의 표현주의적 요소에 퀴비슴의 원칙을 가미하여 독특한 조형에 도달한 아르키펜코는 키예프 출신 조각가이다. 1902년부터 1906년에 걸쳐 그곳 미술학교에서 배웠고 1908년 파리로 이주하였다. 1910년 파리에서 사숙(私塾)을 개설하여 현대조각의 이념적인 탐구를 하는 동시에 퀴비슴의 원칙에 서서 제작을 하였다. 그것은 대상의 볼륨을 부정하여 그 양감을 자유롭게 선택한 네가와 포지의 형식으로 환원하여 재구성해 가는 작업인데, 예를 들면 인체 각 부분의 부푼 부분을 반대로 오목하게 표현하는 기법이다. 이것으로써 그는 유려(流麗)하고 신선한 하나의 양식에 도달하였다. 1923년 미국으로 이주, 1928년 시민권을 얻어 미국 각지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39년에는 또다시 뉴욕에서 사숙을 개설하여 후진의 지도를 담당하였으며 1964년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편집] 자킨

Ossip Zadkine (1890∼1967) 키예프 출신인 그는 퀴비슴의 이념에 입각하여 자기의 스타일을 완성한 조각가이다. 1906년 영국으로 가서 회화를 공부하고 1909년 파리로 나와 미술학교에 적을 두었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하였던 것은 피카소와 샤갈 및 리프시츠 등과의 교우였으며 특히 피카소를 통하여 퀴비슴을 알게 되었고, 회화에서 진전하고 있던 그 원칙을 조각에서 부연하였다. 1920년경부터 퀴비슴은 이미 원칙으로서가 아닌 새로운 가능성으로서 의식되기에 이르러 여기에 자킨 특유의 스타일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항상 인간상을 주제로 하지만 간결한 데포르메에 의해 야성미(野性味)·환상성을 혼합한 힘있는 표현력을 가진 작풍이다. 1954년 작인 <파괴된 도시를 위한 기념비>(로테르담)는 그의 대표작으로 유명하다.

[편집] 로랑스

Henri Laurens (1885∼1954) 아르키펜코, 자킨과 함께 입체파 조각을 추진한 앙리 로랑스는 파리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석공(石工)으로 일하면서 그림을 공부하였다. 1911년 브라크와 사귀어 퀴비슴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의 그는 분석적 퀴비슴과 보조를 맞추어 대상을 해체하고 기하학적인 원형태(原形態)를 추출하는 작풍을 보여 주고 있었으며 또한 콜라주의 기법에 의하여 채색한 조형까지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1927년경부터 그는 이러한 작풍을 고쳐 유기적인 형식으로써 서정적인 요소를 강조하게 되었다. 1919년의 작품 <클라리넷을 가진 사나이>는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퀴비슴의 조각가로서 자크 리프시츠(1891∼1973)를 빼놓을 수가 없다. 폴란드 출신 리프시츠는 퀴비슴의 원칙에 따라 인간적인 정감이 감도는 추상적 조형을 시도하였다.

[편집] 가보

Naum Gabo (1890∼1977) 러시아의 브리안스크에서 출생한 그는 구상주의에서 추상조각에의 길을 개척한 조각가이며 화가이자 조각가인 앙투안 페브스너의 동생이기도 하다. 처음 뮌헨에서 의학·수학·물리학 등을 수학하였으나 1914년 파리에 체재하면서 아르키펜코를 위시한 파리 전위미술가와 사귀게 되어 조각으로 전환하였고, 1915년에서 1917년에 걸친 스톡홀름 체재중에 퀴비슴의 원칙에 입각한 최초의 조각작품을 제작하였다. 러시아 혁명 이후 그의 모국에서 말레비치와 더불어 구성주의를 추진, 1920년 형과 함께 구성주의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리얼리스트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키네틱한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1922년 베를린에서 바우하우스에 협력하였고, 1932년 파리에서는 압스트락숑 크레아숑에 참가하였다. 이 시기의 작풍은 금속과 글라스 등을 사용한 공간 구성이 특색이며 1946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편집] 브랑쿠시

Constantin Brancusi (1876∼1957) 루마니아의 조각가. 추상조각의 유니크한 개척자인 그는 루마니아의 왈라키아 지방의 농촌 페스티사니 고뤼 출생이다. 오바에서 태어났다. 목수가 되기 위한 수업을 쌓았으나 1898년 부쿠레슈티의 미술학교에서 조각을 배우게 되었고 1902년에 파리 미술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는 최초에 로댕을 사숙하였지만 1906년 초 개인전을 가졌던 무렵부터 독자적인 길로 접어들어 1907년 국민미술협회의 살롱 전시회에 출품한 것이 계기가 되어 로댕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아틀리에를 제공하겠다는 호의를 거절한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1908년경부터 그는 형태의 단순화로 지향하여 존재의 핵심으로 접근해가는 과정에서 구상적인 요소를 신중하게 제거하여 갔다. '실재감은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핵심에 있다'는 신념에 따라 그는 가끔 원형(圓形)인 형태 속에서 사물의 원존재(原存在)를 발견하려고 애썼다. 1924년의 작품인 <세계의 시초>는 설명적인 요소를 일체 버린 단순한 달갈형일 따름이다. 더욱이 그의 작품은 기하학적인 구성을 의도한 것이 아니고 대리석·나무·브론즈 등의 소재를 정성어린 수공으로 깎고 다듬어 내는 작업에 의하여 소재의 표면은 비물질화되어 무명의 형태는 내부에 충실감을 품고 있다. 재질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그의 독무대 위에서 쇠퇴할 줄 모르는 그의 표현력의 기둥이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파리에 살면서 추상조각을 위하여 활발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편집] 아르프

Jean Arp (1887∼1966) 독일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약한 조각가, 화가, 시인. 독일과 스위스 및 프랑스에 있어서의 20세기의 주요한 전위운동에 업적을 남기고 있는 아르프는 스트라스브르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에 서정시집을 출판한 후에 1908년까지 바이마르와 파리에서 그림공부를 하였다. 1912년에 뮌헨에서 청기사(靑騎士) 운동에 가담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취리히에서 다다에 참가, 전후는 쾰른에 파급한 다다이슴 운동에 투신하였다. 조각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의 일인데 1924년에는 파리에서 재차 쉬르레알리슴 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그가 조각과 부조에서 세운 작풍은 곡선과 곡면에 의한 단순 명쾌한 추상 형태인데 그는 그 형태를 '과일이 스스로 성숙되는 것처럼 형을 만든다'라 말한다. 파리 유네스코 본부(本部)의 부조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의 형태는 기능적인 현대건축에도 매치하는 드문 유기성을 느끼게 한다. 1966년 바젤에서 타계하였다.

[편집] 콜더

Alexander Calder (1898∼1976) 모빌의 창시자로 알려진 콜더는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하였다. 처음 공학을 배웠으며 뉴욕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26년 런던을 거쳐 파리로 유학, 여기에서 처음으로 목조에 손을 댔으며 철사조각도 제작하였다. 이윽고 구성주의와 신조형주의(新造形主義)의 영향을 받아 추상조각으로 전환하였고, 또한 미로를 위시한 쉬르레알리슴의 회화에서 이미지를 계발하게 되었다. 갖가지 금속 소재를 사용하게 된 데에는 자코메티가 시사한 바를 따랐다는 말도 있다. 1932년에 그는 철사와 쇠조각을 사용, 입체를 구성하여 이것을 공중에 매달아 공기의 진동에 의하여 움직일 수 있는 조형물을 제작했다. 이것이 모빌이며 이 제작에 의하여 그는 조각은 부동한 것이라고 하는 종래의 사고방식을 한꺼번에 역전시켰다. 그는 또한 스태빌이라 부르는 움직이지 않는 금속판의 구성물을 만들었다.

[편집] 자코메티

Alberto Giacometti (1901∼1966) 쉬르레알리슴의 이념에서 많은 시사를 얻은 그는 스위스의 스탄파에서 출생했으며, 일찍이 조형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그는 1919년에서 1920년까지 제네바에서 그리고 1922년에서 1925년까지를 파리에서 수업하였고 파리에서는 부르델에게 배웠다. 처음에 그는 조각과 회화의 결합을 기도하여 다채로운 작품을 만들었으나 1925년경부터 입상(立像)으로 옮아갔고 1929년 쉬르레알리슴 운동에 관여한 후부터는 특히 무브망의 탐구에 관심을 쏟았다. 그가 결정적인 작풍을 확립한 것은 1945년 이후인데 그것은 인체의 매스를 극한에까지 없애고 이것을 공간적으로 처리하는 유닉한 방법이었다. 그가 만들어 낸 세장(細長)하고 홀쭉한 자태는 물질화될 수 없는 인간존재의 극화(極化)가 표현되어 있다. 회화와 데생 이외의 그의 초현실적인 시작(詩作)도 있다.

[편집] 마리니

Marino Marini (1901∼1980) 그는 이탈리아의 피스토이아 출신이며 휴머니스틱한 전통을 계승한 조각가이다. 피렌체 미술학교를 졸업 후 1928년 파리에서 조각을 연구하였다. 나중에 유럽 각지와 그리스를 여행하며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는 금세기의 전위운동에 관여하는 일도 없이 오로지 고대 이탈리아의 에트르스크 미술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여겨진다. 1931년 레슬러나 서커스의 곡예인(曲藝人)을 주제로 한 작품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었고 전후에는 세계 여러 곳의 국제 전시회에 출품하여 가끔 상을 받기도 했다. 그의 소박하면서 힘있는, 그리고 사실적인 형태와 형태의 말단을 절단하여 빚어내는 긴박한 표현력은 현대조각에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여 이채를 띠고 있다. 한때 스위스에서 제작을 하였지만 현재는 밀라노에서 정주, 최근에는 말이나 말탄 사람을 다룬 작품이 많다.

[편집] 무어

Henry Moore (1898∼1986) 현대 영국 조각의 개척자로 알려진 그는 요크셔의 가슬포드에서 탄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 그는 장학금을 받아 교직과정을 이수하여 초등학교의 교사가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자원으로 참전하였고, 전후인 1919년부터 조각을 배우기 위하여 1921년까지 리즈 미술학교에서 배웠다. 1925년 유학생으로서 이탈리아로 여행, 귀국하여서는 왕실 미술학교에서 조각을 가르쳤다. 1928년 런던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어 주목을 받았고, 1931년부터 1939년까지 첼지아 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전후에는 모교인 리스 미술학교의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45년 이후부터 그는 미국·에스파냐·이탈리아 및 발칸 제국(諸國)을 방문했으며, 베네치아 비엔날레를 비롯한 많은 국제전에서 상을 탔고, 그의 작품 전시회도 세계 각지에서 개최하여 현대 영국조각에 있어서 제1인자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무어의 초기 작품에는 퀴비슴의 영향을 볼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특히 아르키펜코와 브랑쿠시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도잇에 그리스·이집트 그리고 프레 코론비어의 원시미술도 그의 제작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1930년경 그는 독특한 작풍을 세웠는데 그것은 인간상-특히 가로 누운 자태가 중심적인 테마가 되었다. 추상적인 형태와 구상적인 형태는 그의 작품에 있어서는 혼연 일체를 이루며 드물게 보는 강한 표현력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조상(彫像)의 내부가 이따금 뚫어진 공동(空洞)인데 이른바 이 허(虛)의 형식이라고나 할 공동이 억센 구성과 유기적인 선의 흐름을 가진 실상(實像)에 무한한 변용(變容)을 주고 있다. 특히 그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서는 노산프턴의 성 마타이 교회를 위한 <성모와 그리스도상(像)>과 다린턴 기념관의 조각 등이 유명하다.

[편집] 헤프워스

Barbara Hepworth (1903∼1975) 무어와 더불어 영국 조각을 대표하는 여류 조각가인 그는 요크셔의 웨이크필드에서 태어났다. 런던의 왕실 미술학교를 졸업, 1924에서 1925년까지 이탈리아에서 조각을 연구한 후 귀국하여 1928년 런던에서 개최한 최초의 개인전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녀는 처음 무어의 영향을 많이 받아 허의 형식으로써 소재의 양감을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나 뒤에는 몬드리안, 가보, 브랑쿠시, 아르프의 작품에서 시사하는 바를 터득하여 기하학적인 형태와 그 구성에로 진전하여 갔다. 1934년 이후에는 구상의 형식을 버리고 추상적 작풍으로 옮아갔고, 전후는 영국 현대조각의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서 많은 국제전에서 활약하고 있다. 특히 영국 추상회화의 제1인자 벤 니콜슨(1894∼1982)은 그녀의 남편이며 죽을 때까지 남편과 함께 영국 서남부의 어촌인 세인트 아이위스에서 제작활동을 하였다.

[편집] 프라이머리 스트럭처

Primary Structure 기본구조라는 의미이다. 프라이머리 스트럭처는 1966년 주이시 뮤지엄의 막사인이 기획한 전시회의 명칭에서 개념화된 영국 및 미국에 있어서의 조각의 경향을 가리킨다. 소재에서 새로운 공업용 재료를 사용하여 직사각형·원형·구형(球形) 등 단순하고 기본적인 형태를 주로 한 대규모의 공간구성을 의도하고 있다. 대체로 단색 또는 소수의 색으로 선명하게 칠하여져 있는 것이 특색인데 그 목표는 소재의 재질감이나 중량감의 경감(輕減)을 꾀하려는 데 있으며, 동시에 빛깔 그 자체를 공간적으로 조형하려는 데에 있다. 영국의 안소니 카로의 1959년 이래의 작품을 선구로 하여 영국의 윌리엄 터거와 미국의 로버트 그로스브너 등이 그 뒤를 잇는다. 더욱이 팝 아트와 누보 레알리슴 또한 키네틱 아트 등 최신의 경향을 통하여 회화와 조각의 경계는 더욱더 애매하게 되었다.

[편집] 세자르

Baldaccini Cesar (1921∼1998) 프랑스의 추상조각가로 마르세유에서 출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대표적인 조각가로 마르세유 미술학교와 파리 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하였다. 1947년 이후에는 금속에 흥미를 갖게 되어서 금속을 소재로 한 추상조각을 발표하였다. 처음에는 연판을 이용하였으나 차차 철사, 철근, 볼트, 스프링, 쇳조각 등의 폐품을 이용하여 오브제적인 조각으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제르맹 리시에의 영향으로 표현주의적 곤충과 인간의 브론즈상을 제작하였다. 1965년 이후부터는 자동차를 압축하여 만든 '프레스 조각'과 폴리우레탄, 폴리에스테르 등의 플라스틱을 녹여서, 액체를 부어 응고시킨 독특한 수법을 사용하여 물체와 인간 사이의 긴장관계를 전위적인 조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편집] 아미티지

Kenneth Armitage (1916∼ ) 영국의 조각가로 리즈에서 출생하였다. 리즈 미술학교와 런던의 슬레이드 학교에서 공부하고 1939년부터 7년간 군에 복무하였다. 현대 영국 조각계를 대표하는 조각가로 1952년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고, 1956년 크레펠트 전승기념비 제작 콩쿠르에 입상하였다. 1958년 베니스 국제미전에 입상하였다. 그는 헨리 무어의 영향을 받았으며 데포르메 인체에 의한 표현주의적 작품을 만들었다. 1960년 후반부터 팔, 등, 몸의 부분으로 인간을 표현하려는 작품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2인의 좌상> 등이 있다.

[편집] 파올로치

Eduardo Luigi Paolozzi (1924∼) 영국의 조각가로 에든버러에서 출생하였다. 양친은 이탈리아인이다. 에든버러 미술학교, 런던 슬레이드 미술학교를 나온 후 1949년 센트럴 미술·디자인학교 옷감 디자인 교사로 재직하였다. 1947년 런던에서 개인전을 처음 갖기 시작하여 구미에서 자주 개인전을 가졌다. 그리고 1952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전(展) 이후 수많은 국제전에 출품하였으며, 세인트마틴 미술학교 조각교사, 왕립미술대학 도예강사로 있으면서 미술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그의 작품은 기계와 로봇에 관심을 쏟아 SF적 이미지를 입체화한 것이 특색이다. 1981년 이후 뮌헨 조형미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원과 사각을 지닌 도시> 등이 있다.

[편집] 카로

Anthony Caro (1924∼) 영국의 조각가로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케임브리지 대학·왕립미술원 학교를 졸업한 후 1951년부터 2년간 헨리 무어의 조수로 일하였다. 1953년부터 1979년까지 세인트 마틴 미술학교 강사로 재직하였다. 그는 1950년대에는 인체상을 제작하였으나 1959년부터 미국에 체류할 때 현대회화에 강한 자극을 받고 귀국 후에는 철재를 조립하고 채색하는 구성적인 작품을 하였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베닝턴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6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조각상을 수상하였다. 1970년대에 와서는 채색을 하지 않고 철의 거친 면을 강조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저 곳> 등이 있다.

[편집] 뷰리

Pol Burry (1922∼) 벨기에의 조각가로 에느 상 피에르에서 출생하였다. 몬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고, 그는 화가로서 출발하였지만 후에는 키네틱 아트에 속하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1955년 파리의 운동전(展)에 출품한 이래로 많은 키네틱 아트의 국제전에 작품을 발표하였다. 작품의 특징은 작품 표현양식이 매우 자유롭고 다양하며, 작품은 미묘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시각(視覺)으로는 그 움직임이 움직이고 있는지 아니면 정지하고 있는지 잘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룹 코브라의 창립회원의 한 사람으로 그의 대표작으로 <흰점>이 있고, 1988년 우리나라에서 서울올림픽 기념으로 열린 국제 야외조각 심포지엄 및 국제 야외조각 초대전에 작품을 출품하였다.

[편집] 팅겔리

Jean Tinguely (1925∼1991) 스위스의 조각가로 프리부르에서 출생하였다. 바젤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52년 이후로는 파리에서 거주하였다. 1955년부터 고철폐물을 조립하여 이를 모터로 움직이게 하는 작품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강력한 파괴적인 운동 속에서 인간적인 비애를 느끼게 하는 것이 특징이고, 1960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거대한 기계더미로 만든 작품인 <뉴욕 찬가>를 발표하여 화제를 모았다. 현대의 폐물 조각과 키네틱 조각의 일인자로 꼽히고 있다.

[편집] 생 팔르

Niki de Saint Phalle (1930∼) 프랑스의 여류조각가로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미국에서 살다가 1951년 파리로 돌아왔다. 1955년경부터 아르누보풍의 인형을 색칠을 하거나 아니면 물감을 채운 총으로 인형을 쏘는 등 <나나>라는 인형 시리즈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66년에는 스톡홀름 미술관에서 팅겔리와 합작하여 <혼(그녀)>란 인형작품을 발표하여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 작품은 종이세공의 극채색 여체상으로 대지모신(大地母神)의 생명력이 흐르고 있고, 그 표현은 여자의 음부로 관중들이 들어가서 태내를 돌아다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편집] 플래니건

Barry Flanagan (1941∼) 영국의 조각가이다. 그는 작품 재료의 선택에 있어서 다양하게 채택한 작가로 1966년부터 1968년 사이 개인전에서는 로프나 천을 사용한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1970년대 전반에는 이질적인 소재의 조합에 의한 형태의 결정체를 추구하여 거치른 마포를 커다란 원통형이나 원추형으로 끼워 맞춘 것에 모래를 담은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모래를 사용하여 만든 작품이 다수 있는데, 1969년 베를린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태도가 형태로 바뀔 때' 전과 1970년 일본에서 열린 '인간과 물질'전 등에 모래를 이용한 작품이 출품되어 랜드 아트의 일원으로 간주되었다. 1973년부터는 개념미술이 비판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부터는 대리석 조각, 에칭, 도자기 등의 작품도 만들기 시작하였다.

[편집] 타키스

Takis (1923∼ ) 프랑스의 조각가로 실제는 그리스인으로 아테네에서 출생하였고 프랑스로 귀화하였다. 키네틱 아트의 조각가로 파리로 가서 자코메티, 세자르 등과 교제하면서 키네틱 아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54년 빛이 점멸하는 시그널 조각을 만들었으며, 1958년 전자기구를 응용한 작품을 만들었는데 철선이나 구(球)가 이상한 움직임을 만드는가 하면 철가루가 자력의 회전에 따라 여러 가지 패턴을 만든다. 그는 '조각의 비밀은 개인의 천분이 아닌 자연의 힘 안에 감추어져 있다'라는 조각관을 갖고 있다.

[편집] 20세기의 건축

[편집] 멘델존

Erich Mendelsohn (1887∼1953) 에리히 멘델존은 아렌슈타인 출신이며, 베를린과 뮌헨에서 수업한 뒤 1915년 베를린에서 건축사무소를 열었다. 그의 <아인슈타인탑(塔)>(포츠담 1921)은 표현주의 건축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1926년부터 1930년에 걸쳐 뉘른베르크, 슈투트가르트 그리고 켐니츠에 세운 <쇼켄 백화점>은 그의 대표적인 건축작품이다. 1933년 나치스에게 쫓겨 국외로 탈출하여 런던과 예루살렘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정주하게 되었으며 시민권도 취득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시나고그'(유대인 집회소)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또한 브루노 타우트(1880∼1938)의 1921년 마구데부르크시(市)의 색채도시 계획도 표현주의 건축의 예로 알려져 있으며, 타우트는 1925년부터 1933년까지 베를린에서 많은 지트룬그(집합주택)을 설계하였다.

[편집] 아우드

Jacobus Johannes Pieter Oud (1890∼1963)J.J.P 아우드는 네덜란드 태생이며 델프트와 암스테르담에 공부를 하였다. 뮌헨에 있던 테오도르 피셔 아래서 수련을 쌓았고 로테르담에 정주하면서 데 스틸파(派)의 유력한 멤버가 되어 활약하였다. 1918년부터 1933년까지 그는 로테르담시(市)의 건축기사로 있으면서 집합주택을 건축하였고 이 분야에서 그는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기능적 양식의 주요한 대표자로 평가를 받고 있어 근대건축 발전에 공헌하여 왔다. 그의 주요한 작품에는 <튀센디켄 집합주택>(로테르담 1921), <와이센호프 집합주택>(쉬토우트갈트 1927) 등이 있다. 특히 데 스틸파의 건축에서는 게리트 토마스 리트펠트(1888∼1964)의 <위트레흐트 저택>(1924)도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편집]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 (1883∼1969) 베를린 출신으로 뮌헨과 베를린의 기술전문학교에서 건축을 이수하여 1907년에서 1910년까지 페터 베렌스의 조수로 근무하였다. 그가 독립하여 최초에 착수한 <파그스 제화공장(製靴工場)>(1911)은 그 단순 명쾌한 기하학적 형태로 세상의 주목을 끌었는데, 콘크리트와 경질(硬質) 벽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글라스와 철로 만든 이 처녀 작품은 그의 합리적이고 기능적인 입장을 일찍부터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1919년 바이마르에 신설한 바우하우스의 교장에 취임하고 건축을 중축으로 하여 모든 예술의 통합을 기도한 새 이념을 발표함으로써 현대미술에 한 기원을 세웠으며 동시에 근대건축 및 디자인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1926년 데사우에 세운 <바우하우스 신교사>는 이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많은 아틀리에와 공방(工房)이 따른 건물이며 근대건축의 모뉴먼트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1925년 그의 저서로서 국제 건축양식을 주창하였고 주택난 해결을 위한 지트룽그(집합주택) 계획에 참가하여 프레하브 주택에 착안하여 건축의 표준화를 추진하였다. 1937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 교수직에 있으면서 1946년 건축가협동집단(약칭 TAC, 타크)을 조직하여 미국 전축계에 공헌하였다. 1949의 <하버드대학원 센터>, 1953년의 <보스턴 센터>는 그의 만년의 걸작으로 저명한 건물이다.

[편집] 미스 반 데르 로에

Lutwig Mies van der Rohe (1886∼1969) 그는 아헨 출생으로 브루노 파울과 페터 베렌스의 지도하에 수련을 쌓은 뒤에 베를린에서 건축사무소를 개설하였다. 대체로 1910년경부터 즉물적(卽物的)인 새 건축양식을 주창하였는데 이 계획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쇠와 글라스의 고층건물'안(案)으로서 제출되어 주목을 끌었으며 1927년에는 슈투트가르트의 집합주택 전시회에서 주택으로서는 처음으로 철골조(鐵骨組) 건물을 건축하였다. 그의 원칙은 합목적성과 논리성에 있으며, 1929년 바르셀로나 만국박람회의 <독일관>을 비롯, 1947년 시카고의 <레이크 쇼머 드라이브 아파트>에 이르는 대표작에는 이 원칙이 일관되어 있다. 1930년 그로피우스의 후임으로 바우하우스의 교장직에 취임하였으나 나치스에게 추방당하여 1938년 미국으로 망명, 일리노이 공과대학의 건축과장으로 있으며 신교사의 설계를 담당하였다.

[편집]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 (1887∼1965) 본명은 샤를 에도아르 잔레이며 스위스의 조 드 폰에서 출생하였다. 처음 동판조각을 배웠으나 1905년부터 빈에 있는 요제프 호프만과 파리의 오귀스트 페레의 지도로 건축을 공부하여 1911년 페터 베렌스의 아틀리에에서 수련을 쌓아갔다. 1917년 파리에 정주하면서 건축 및 회화 방면에서 활약, 화가인 오잔판과 함께 퓌리슴을 선언하기에 이르렀고 또한 잡지 <레에프리 누보>를 발간하여 건축과 회화 및 공예를 총합하는 전위적인 평론을 발표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1922년 종제(從弟)인 피에르 잔레와 공동으로 건축사무소를 개설하여 퀴비슴의 미학을 기초로 한 독자적이고 합리적인 구조이론에 입각하여 개인주택에서 비롯하여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분야에서 기능주의 건축을 추진하였다. 1927년의 '국제연맹 회관안(會館案)'은 그의 근대건축 5원칙(필로티, 옥상정원, 자유로운 프래닝, 긴 창문, 자유로운 파사드)을 구체화한 획기적인 설계로서 유명하다. 1930년대에는 알제리·브라질·바르셀로나 등지에서 '빛나는 도시' 플랜에 입각한 도시계획을 단행하여 여러 가지의 고층건물을 발전시켰다. 1949년의 <마르세유 아파트>는 그의 독특한 표준 척도를 대규모로 실현한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한 작품에는 <모스크바 소비조합 본부>(1928)와 <파리 학생회관의 스위스관>(1932) 및 <난트 루제의 고층 공동주택>(1953) 등이 있다.

[편집] 라이트

Frank Lloyd Wright (1868∼1959)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미국 위스콘신주 리칠란드 센터에서 태어났다. 위스콘신 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에서 1888년부터 1894년까지 아드라 설리반 사무소에 근무하였는데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의 건축에서 동사무소의 치프 디자이너로서 참가하게 되었다. 1894년에 독립한 사무소를 개설하여 처음에는 개인저택을 전담하였으나 20세기에 들어서는 대건축에 착수, <힐사이드 홈 학교>(1902), <라킨 비누회사의 빌딩>(1904), <유니티 교회>(1906), <시티 내셔널 뱅크>(1909) 등의 작품을 세웠다. 이러한 활약을 통하여 설리반의 후계자로서 시카고파(派)를 지도하면서 미국 건축의 절충양식을 타파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1911년 위스콘신에 자택 <타리신 동편장(東便莊)>과 1938년에는 애리조나에 <타리신 서편장(西便莊)>을 세워 이 두 곳에서 제자와 기거를 함께 하면서 새 건축가의 양성에 힘썼다. 그 동안 유럽과 일본을 여행하면서 특히 일본의 <데이코쿠 호텔>과 <자유학원>을 건축하였다. 1930년대의 저명한 작품에는 <존슨회사 사무소>, <카우프만 저택>이 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구겐하임 미술관> 설계와 <존슨회사 연구소>와 <웨이파라의 교회> 등이 걸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1959년 애리조나의 피닉스에서 사망하였다.

[편집] 액션 아키텍처

Action Architecture 액션 아키텍처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미국의 비평가인 캘만이 지적한 건축의 한 경향인데 포로크의 액션 페인팅에서 감지(感知)되는 다이너미즘과 그러한 동적 공간을 형성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합리적이고 기계적인 질서를 부정한다고 하는 의미에서는 인간성 회복의 동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피터 스미슨, 비토리고 비가노, 루이스 칸 등이 대표적인 건축가라 하겠다.

[편집] 웅거스

Oswald Ungers (1926∼ ) 독일의 건축가로 아이펠에서 출생하였다. 카를스루에 공대를 졸업한 후, 1950년 쾰른에 자신의 개인 사무소를 개설하여 설계업을 시작하였다. 그는 쾰른에 있는 자신의 주택과 베를린의 국경이 있던 시구(市區)에 있는 아파트단지 같은 주거 계획안들을 완성시킨 후 1960년 중반까지 작품활동을 하지 않았다. 1963년부터 1968년까지 베를린 공과대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1969년부터 코넬 대학교에 재직중이다. 그는 저술을 통해 건축에 관계하는 이론의 기반을 구축하였으며 몇가지 중요한 공모전 출품작을 내놓았다. 엔스 헤데 소재의 학생 주거지(1964), 베를린의 동물원에 위치하는 국립박물관(1965), 동물원 재정리 계획(1973), 쾰른 소재의 발라프-리하르츠 박물관(1975), 마르부르크의 리테르시(市) 소재의 주거지 개발계획(1976) 등을 들 수 있다. 1970년 말 베를린의 괴테공원에 있는 주거지와 프랑크푸르트 의사당, 바덴 지방 도서관 등을 지었다. 그는 새로운 합리적인 건축으로 독일을 대표하는 중요한 전문가에 속한다. 그리고 건축에 혁신적인 실험을 시도하였으며 싱켈의 낭만적인 개념과 유사한 부분이 많은 건축가이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신세계의 자치지역> <주제로서의 건축> 등이 있다.

[편집] 오토

Frei Otto (1925∼) 독일의 건축가로 작센에서 출생하였다. 베를린 기술대학교와 버지니아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1952년 베를린에 스튜디오를 개설하였으며, 1957년 베를린의 경량 건물 개발원(EL)의 후신으로 경량판 개발협회(IL)를 만들었다. 또한 1964년 슈투트가르트에서 기술전문대학을 설립하여 경량구조 연구소장이 되었다. 그를 평가하는데 있어서는 한마디로 평가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그의 작품은 합리적인 성향과 동시에 독일식 낭만주의를 함께 갖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경비행기 항공기술로부터 받은 인상과 브르노 타우드의 결정체사원, 알프스 건축스케치 등은 각각 낭만적 성향과 표현주의적 환상을 주어 그의 건축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최초로 독특한 현대적인 텐트를 만들어 냈고 텐트를 경량건물에 적용 가능한 원형으로 판단하고 재응용하는 데 힘썼다. 그의 작품 중 1950년대에 지은 연방 식물원의 여러 작은 직물구조로 된 파빌리온은 서정적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그의 작품은 미적인 요소와 구조적인 요소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음을 말한다. 1960년대 그가 지은 건축은 내부의 저부(低部)와 고부(高部)를 통해 일정치 않게 분할시켜 비대칭적인 지붕 형상을 만들어 자유로운 형태의 정겨운 모양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1970년대 이후부터는 생태학적 현상을 분석하는 데 몰두하기 시작했고 자연을 형성하고 있는 구조체들을 연구·분석했다. 건축학에서 그는 20세기의 첨단 기술원을 연구하여 현대적인 텐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한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몬트리올 만국박물관> <뮌헨 올림픽 경기장 지붕> 등이 있다.

[편집] 스털링

James Stirling (1926∼ ) 영국의 건축가로 글래스고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선박 기술자였다. 리버플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후 1953년 런던을 중심으로 다른 건축가들과 함께 활동을 시작했다. 1956년 건축사무소를 개설하여 당시에 지배적이던 국제주의 양식과는 무관한 독특한 여러 근대적인 건물들을 내놓기 시작하였다. 케임브리지의 처칠대학 공모전(1959), 라이체스터 대학교 공학관(1959∼1963) 등이 그것이다. 1963년부터 1971년까지 독자적인 활동을 하여 독창적인 많은 디자인이 나왔다. 그 이후부터는 그의 보조 건축가인 M.빌포드와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성(聖) 앤드류 대학 소재의 미술센터 계획안(1971), 발라프-리하르츠 박물관 공모전 출품작(1975), 슈투트가르트 주립미술관 확장 계획안(1977:1984년에 개장)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붉은 벽돌과 판유리로 된 온실이 서로 극적인 대조를 이루면서 형태의 정교함이 대담하게 드러난다. 또한 그는 모든 예술적 창조가 지니는 의도적인 성격을 받아들였고, 1945년 이후의 많은 건축물들을 병들게 했던 위선적인 결정주의로부터 그 자신 스스로 자유롭고자 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레스터 대학 공학부 건물> <케임브리지 대학 역사학부 건물> <하버드 대학 포그박물관> 등이 있다.

[편집] 로체

Eamonn Kevin Roche (1922∼ ) 아일랜드의 건축가로 더블린에서 출생하였다. 아일랜드 국립대학교·일리노이 공대에서 공부한 후 여러 사무소를 전전하였다. 1948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51년 사리넨의 사무소에 들어가 1954년부터 수석 설계사가 되어 디자인 부분에서 활동하였다. 1961년 사리넨이 사망한 후에 J.영켈루와 함께 운영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건물을 통해, 미스 반 데르 로에의 추상적인 기하학에 강한 조각적인 표현과 특정한 상황으로부터 발전된 유형성을 결합시키고자 했다. 주요 작품으로 <IBM 박람회관> <오클랜드 미술관> <로체스터 공대> <포드재단 본부> <매사추세츠 대학 미술 센터> 등이 있다.

[편집] 벤튜리

Robert Venturi (1925∼ ) 미국의 건축가로 매사추세츠에서 출생하였다.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후 1958년까지 사리넨과 루이스 칸의 사무소 등지에서 일을 하다가 자신의 건축회사를 설립하였다. 1959년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부교수로, 1965년부터 1970년까지 예일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고도의 다양한 표현이 특징인 지각심리학적 요소들을 건축용어로 변환시키고자 노력한 결정체로 나타난다. 또한 이론가로서 형태의 질적 문제를 건축 디자인의 예술적 자극원으로 인식할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

[편집] 크리어

Leon Krier (1946∼ ) 독일의 건축가로 룩셈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슈투트가르트의 기술전문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968년부터 1970년 사이에는 제임스 스털링과, 1971년부터 1972년까지는 클라이흐스 밑에서 활동하였다. 1974년에는 런던에서 개인 사무소를 개설하였고, 1973년부터 1976년까지 건축협회부설학교에서 학생을 지도, 1977년부터는 왕립미술대학교에서 학생을 지도하였다. 그는 건축에서 좀더 급진적인 성향을 제외하고 그의 형인 크리어(R.Krier)처럼 합리주의 건축을 개념적 도구로 삼아서 전기 유럽의 산업도시의 재현을 추구하였다. 또한 19세기 초의 신고전주의를 타당성 있는 영원한 양식으로 간주하고, 수많은 도해를 건축기술로 처리하여 예증시키고자 하였다. 그 계획안(案)으로는 룩셈부르크에 있는 <프랑스의 국립고등학교> 계획안, 런던의 <민트 광장> 계획안, 파리의 <라빌레테 지역> 계획안, 룩셈부르크 중심지역의 계획안 등이 있다. 그의 저서로는 <도시의 재건>이 있다.

[편집] 현대 디자인

[편집] 현대 디자인의 성립

금세기에 들어와서 과학기술의 급속한 진보와 기계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은 미술에서도 이러한 새 기계시대의 현실에 어떻게 대처해 가는가 하는 문제가 클로즈업되었다. 그것은 이러한 현실에서 심각한 영향을 받는 미의식(美意識)의 근본적인 문제인 동시에 가장 구체적인, 그리고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걸친 미적 요구에 관련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정당하게 수용하여 근대건축이 주축이 되고 미술의 제 분야를 총합적으로 결집하여 기계와 기계생산을 본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념과 태세를 확립하고자 설립된 것이 바로 독일의 예술실험학교인 바우하우스였다. 여기는 본디 윤리성이 강한 표현주의와 새로운 소재에 대하여 의욕적인 러시아의 구성주의 그리고 바우하우스와 똑같은 총합적인 이념에 입각한 네덜란드의 신조형주의(新造形主義) 등의 조류를 따르는 미술가와 기능성을 중시하는 건축가의 연구지도 아래 목공·금공·도기·직물·인쇄들로 분류된 각 공방(工房)에서 기계 생산의 원형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시작품(試作品)의 개발이 의욕적으로 진척되고 있었다. 이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실험은 독일뿐만 아니고 세계 각국에서 디자인의 근대화의 저류를 이루고 있어서 20세기의 디자인은 바우하우스에서 시작되었다고까지 할 정도이다. 독일에서의 이와 같은 동향에 자극을 받아 192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쳐 유럽과 미국에서도 각각 디자인 근대화의 운동이 진전되었는데 거기에는 국민성이나 생산기구의 차이에 의한 지역적인 특색이 인정됨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예를 들면 덴마크의 가구나 스웨디시 모던으로 알려진 북구의 디자인은 기능성을 중시하는 바우하우스풍(風)의 디자인과는 대조적으로 수공예적인 특색을 기능보다 앞세우려고 하였으며 그 전아하고 섬세한 형태감각은 20세기 디자인에 이채를 띠는 성과가 되기도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르 코르뷔지에의 아틀리에에서 배출된 여류(女流)인 샬로트 페리앙은 여성다운 자상한 솜씨로 실내장식이나 가구의 표준화를 추진하여 공업 디자인 근대화의 실마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특출한 분야는 그래픽 디자인으로서 특히 카산들과 가르뤼가 그린 포스터류(類)는 명석한 형식감정에 입각하여 있기 때문에 이 분야의 디자인은 타국의 추종을 허락지 않는다. 19세기 말 미술공예운동의 첨단에 있었던 영국은 기계생산의 원칙을 용인하지 않았던 윌리엄 모리스의 영향으로 지연되었고, 수공예에 오랫동안 집착하여 있던 이탈리아는 신시대의 디자인에서는 부득이 여러 외국을 추종하게 되었다. 한편 기계문명의 중심지였던 미국은 상업주의의 요청에 따라 각종 디자인의 개발이 진보하여 티그, 헨리 드레폭스, 로위, 게디스 등이 그 선구적인 디자이너였으며 특히 로위는 다방면에 걸쳐 활약하여 미국 디자인계(界)의 개척정신을 상징하고 있다고 하겠다. 1930년대 말부터 미국에는 그로피우스, 브로이어, 모홀리 나기 등 우수한 바우하우스의 지도자도 건너와서 20세기의 디자인을 강력하게 추진할 기반을 만들어 냈다.

[편집] 바이어

Harbert Bayer (1900∼1985)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인데 처음에는 린츠와 달므시타트에서 건축을 배웠다. 후에 데사우 시대의 바우하우스에서 수학, 칸딘스키의 지도를 받았다. 졸업 후 1925년부터 1928년까지 그는 바우하우스의 인쇄에 관한 전문 코스의 공방에서 후진을 지도하였다. 이 공방에서 광고에 관한 교과를 처음으로 설치한 것은 그였다. 광고·인쇄에 대해서 그는 합리적·기능적인 수많은 신감각을 제시·제창하였는데, 가령 대문자의 철폐나 원과 직선의 단순한 요소에 의한 '유니버설 타입'의 디자인을 고안한 것은 특히 유명하다. 그는 쉬르레알리슴에 가까운 그림을 그린 화가였기 때문에 그 합리적·기능적인 제작은 단순한 형식주의에 빠지지 않고 예술성을 풍부하게 지닐 수 있었다. 1928년부터는 파리와 베를린에서, 또 1938년 이후에는 미국에서 그래픽 디자인의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편집] 브로이어

Marcel Breuer (1902∼1981) 헝가리에서 태어나서 독일의 바우하우스에서 수학하였다. 이어 데사우 시대의 바우하우스에서 교편을 잡아 그로피우스와 협력하여 많은 건축설계를 하였다. 그는 바우하우스에서 가구에 관한 전문 코스의 공방을 담당하였는데 그가 뜻한 바는, 가구는 대량생산에 대응할 수 있는 단순한 형태와 다양한 기능을 가져야 한다고 단정하여 공장과 협력하여 조립될 수 있는 유니트 가구의 개발에 있었다. 1925년에 스틸파이프로 만든 의자는 그의 명성을 단번에 유명하게 만든 수작으로서 대량 생산되는 가구에 있어서의 미적인 가능성을 실증한 최초의 작품이라 하겠다. 1937년 독일의 정치정세가 악화되자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를 맡았다가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설계에 종사하고 있으며,1952년에는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의 설계에 참가하기도 했다.

[편집]

Max Bill (1908∼ ) 그는 스위스의 윈터투르에서 출생하였다. 취리히의 공예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부터 1929년까지 데사우의 바우하우스에서 수업하였다. 그는 건축을 중추로 여러 예술을 통합하려던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독자적으로, 가장 전형적으로 구현해서 활약한 예술가였으며 1930년에 건축가가 되어 귀국하고부터 회화·조각·디자인 등 매우 폭넓고 다채롭게 활약하였다.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 두 선배에 관해서는 가끔 예술론적인 저술까지도 발표하였다. 그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점은 금속에 의한 다이내믹한 공간구성인데 1935년부터 1953년에 이르는 동안 무한한 다이너미즘을 테마로 하는 일련의 제작을 하였다. 그의 4차원적인 추구는 디자인 분야에도 시사한 바가 크다.

[편집] 스웨디시 모던

Swedish Modern 스웨디시 모던은 1920년대부터 1930대에 걸쳐 눈부신 약진을 보인 스웨덴의 공예작품에 대한 호칭이며 후에는 여기에 종사하는 미술공예가들도 스스로 이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본디 스웨덴 디자인협회에서 1915년 '예술가를 산업계로'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우수한 디자이너를 산업계로 보내는 중개 알선을 해왔고 이에 호응하여 글라스·도자기 등의 회사에 들어간 빌헬름 코게 시몬, 가테, 이드왈트 하르트, 에드윈 오라시 등은 1920년대에 파리와 뉴욕을 비롯하여 스웨덴 국내외에서 작품을 전시하여 '스웨디시 그레이스(스웨덴적 우아)'내지는 스웨디시 모던이란 찬사로 맞이하였다. 1939년 뉴욕의 만국박람회 출품에 즈음하여 이 '스웨디시 모던'을 호칭으로 결정하면서 그 어필을 대략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① 스웨디시 모던은 디자인에서의 온건을 목표로 한다. ② 현대의 기술보다 만인이 사용할 수 있는 양질의 일용품을 디자인한다. ③ 자연의 형식과 소재에 대한 충실한 처리를 기한다. ④ 미술가와 생산자가 협력하여 미적으로 건전한 제품을 생산한다. 상기한 어필에도 표시한 바와 같이 스웨디시 모던은 기계생산의 비정함에 따스한 사람의 피를 통하게 한 친밀한 디자인을 만들어 냈다.

[편집] 코게

Wilhelm Koge (1889∼1960) 스웨덴의 선구적인 디자이너로 알려져 있다. 그는 처음 화가가 되려고 앙리 마티스에게 사사한 적도 있었으나 뒤에 그래픽 디자인 분야로 옮겨 1910년대 전반은 오직 이 분야에서만 활약하였다. 1915년에는 스웨덴 디자이너 협회가 내건 '예술가를 산업계로'에 따라 구스타프스베루이 도자기회사에 입사하여 스웨디시 모던의 중심적인 디자이너로서 도자기제품에 수많은 우수한 디자인을 만들어 냈다. 그의 작풍은 기능적인 원리에 따르면서도 손작업의 뉘앙스를 담은 유기적인 형체의 미에 특색이 있다. 더욱이 구스타프스베루이 도자기회사에서 코게의 지도를 받은 디자이너로서는 스티그 린드베루이(1916∼)가 있다. 린드베루이는 예술적인 가치를 제일로 내세운 코게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현대 디자인의 유니크한 존재가 되어 있다.

[편집] 클린트

Kaare Klint (1888∼1954) 덴마크의 우수한 가구디자인을 개척한 디자이너로 알려졌다. 원래 소박한 질감과 전아한 형태를 가진 덴마크의 가구에는 빈의 가구공예가 끼친 영향을 볼 수 있었는데 이와 나란히 클린트는 그러한 가구공예에 디자인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그는 처음 화가로 출발하였으나 1920년대에 건축과 디자인 분야로 전환하였다. 그가 디자이너로서 착안한 것은 찬장·책장·책상 등 물품을 넣어 두는 가구인데 그는 수납물(收納物)의 수량과 치수 따위를 신중하게 계산하여 이와 같은 가구의 표준화를 꾀하였다. 1924년 코펜하겐 미술학교에서 가구과(家具科)의 강의를 담당하여 기능주의 이념에 입각한 가구디자인을 지도하였다. 현대에서 눈부신 발전을 한 덴마크 가구는 오히려 반기능주의적인 친밀감이 넘치는 디자인이 특색으로 되어 있으나, 그 근본에는 클린트가 지도한 바와 같은 근대적인 기능을 고려한 구조 이념이 숨겨져 있다.

[편집] 알토

Hugo Alvar Henrik Aalto (1898∼1976) 핀란드의 선구적인 건축가이면서 가구디자이너이다. 1921년 헬싱키의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923년에 건축사무소를 열어 스웨덴의 에테보리 박람회나 파이미오의 사나토리움 등의 설계로 명성을 얻었다. 또한 툴크시(市) 주택지 계획이나 오르 공장 공동체 계획 등 대규모적인 구상을 가진 건설에도 그의 업적을 이룩해 놓았다. 그의 건축은 그로피우스나 르 코르뷔지에 들과는 달라서 곡선을 많이 사용하여 자유로운 인간미를 풍기는 것인데, 이 특색은 1933년에 발표한 자작나무로 만든 곡목의자(曲木椅子)에도 잘 나타나 있었고 널리 구미(歐美)로 보급되었다. 1940년 예일대학과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초청을 받아 학생회관을 세웠다. 특히 그는 가구 외에 천(布地)이나 조명 기구 따위의 디자인에도 손을 대어 기능주의에 반대하는 북유럽 디자인의 새 분야를 개척하였다.

[편집] 페리앙

Charlotte Perriand (1902∼?) 프랑스의 크래프트 디자인 분야에서 제1인자로 지목되는 여류 디자이너이다. 그녀는 젊어서부터 르 코르뷔지에의 아틀리에에서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기능적인 조형이념의 영향으로 금속가구 연구에 종사하였다. 후에 르 코르뷔지에 종제이었고 협력자인 피에르 잔레와 결혼하여 그와 기능적인 건축을 위한 실내장식이나 가구의 표준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만든 가구는 기능 일변도인 딱딱함이 없고 여성다운 우미한 형식을 곁들인 유니크한 것이었다. 특히 회전축(回轉軸)으로 상체를 회전하도록 되어 있는 안락의자는 그의 독창적인 형식과 함께 섬세한 배려로 다듬어진 수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편집] 카산드르

Cassandre (1901∼1968) 본명은 아돌프 젠 마리 무론(A. Jean Marie Mouron)이며 러시아의 하리코프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파리로 나와서부터 그림을 배워 주로 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그림을 그리는 한편 상공업용 포스터도 제작하였는데, 이 작품이 1930년 '아리앙스 그래픽'에게 인정을 받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포스터는 다이내믹한 구성인데도 섬세한 감성이 잘 표현되었던 것이어서 그 명석한 형식 감정은 프랑스적인 감정에 영합되는 것이었다. 그 후에 그는 오로지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만 활약을 계속하여 디자인 근대화의 선구적인 추진자가 되었고 아울러 국제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그는 지로두와 모차르트 가극의 무대장치도 한 적이 있었다.

[편집] 카를뤼

Jean Carlu (1900∼?) 카산드르와 함께 프랑스의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 신풍을 일으킨 선구적 디자이너의 한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 건축을 배웠으나 그래픽의 분야로 전환하여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그의 작품은 오직 그리는 도안화(化)에만 한정하지 않고 추상적인 형태의 레이아웃이나 사진의 몽타주를 구사하여 변화무쌍한 구상의 미를 표현하였다. 샤프한 추상형태에 즉물적(卽物的)인 사진을 배합한 화면은 강한 표현력을 갖지만 세련된 형태 감각과 구성력으로 비참주의(悲慘主義)에 빠지지 않게 되어 있다. 그는 상업 디자인의 분야뿐만 아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프랑스 정보국에서 국가적인 정보 선전 활동에도 종사하였고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나치스 항전을 위하여 많은 포스터를 제작하였다.

[편집] 티그

Walter Dorwin Teague (1885∼1960) 1885년 미국의 인디애나주(州) 티케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11년부터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 활약하다가 1926년에는 공업 디자인 사무소를 개설하였다. 1939년 뉴욕 만국박람회의 회장 5관(館)을 설계한 외에도 U.S스틸, 포드 자동차, 뒤퐁 회사, 베크라이트 회사, 이스트만 코닥 회사 등의 여러 제품의 디자인도 하였다. 그는 미국에 있어서의 디자인 근대화를 이룩한 초창기의 한 사람이며, 사무소를 설치하여 디자인의 근대기업화를 시도한 최초의 디자이너였다. 1944년에는 공업 디자이너 협회(약칭 SID)를 설립하여 초대 회장직을 맡아 명실공히 미국 디자인계(界)의 지도적 지위를 담당하였다. 디자인의 윤리성을 강조하여 상업주의의 독주를 규제하려는 SID의 이념은 그의 기본 정신이기도 하였다.

[편집] 레비

Raymond F. Loewy (1893∼1986) 프랑스 출신의 미국 디자이너. 파리에서 출생하여 그 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1919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귀화하면서 처음으로 잡지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29년 게스테트너 등사기의 디자인을 시발로 하여 공업 디자인 분야에 진출하게 되었고 그 후에는 디자인의 모든 분야에서 활약을 하였기 때문에 디자인의 마술사라고까지 부르게 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펜실베이니아 철도의 유선형 기관차, 샤즈 로박 냉장고, 럭키스트라이크 담배포장, 코카콜라의 병 등이 가장 많이 알려진 디자인이다. 도윈 티그의 뒤를 이어 공업 디자이너 협회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그의 사무소에서 우수한 디자이너를 많이 두어 국제적으로 폭넓은 활약을 하고 있으며 그의 자서전 <입술연지에서 기관차까지>가 있다.

[편집] 게디스

Norman Bel Gaddes (1893∼1958) 미국의 미시간주(州) 아드리안에서 태어났다. 1918년 메트로 폴리탄 오페라 회사의 로스앤젤레스 소극장 무대미술가가 되어 이 소극장을 중심으로 <펠레아스와 멜리잔드> <잔다르크> <햄릿> 등 우수한 무대장치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졌고, 특히 단테의 <신곡> 야외극장을 위한 무대장치 계획은 유명하다. 1927년에 공업 디자인으로 전환하여 극장 계획을 위시하여 자동차·기관차·선박·비행기 등을 디자인하였다. 그의 탈것에 대한 디자인은 유선형을 기능적으로 개발한 것인데 이분야에서 새로운 기축을 내세우게 되었다. 또한 1929년 시카고 미국박람회에 발표한 알루미늄과 스틸 제품인 <회전 공중 레스토랑>은 참신한 아이디어로서 화제를 일으켜 미국은 물론이며 세계 여러 나라의 디자인계(界)를 자극하였다.

[편집] 스트림라인과 다이맥시온

Streamline, Dymaxion스트림 라인이란 유선형(流線形)이란 뜻이다. 원래부터 물이나 공기 따위의 유체의 저항을 가장 적게 하기 위한 곡선으로 구성된 형태를 말하며, 이 형태를 비행기나 기관차나 선박 등의 디자인에 사용한 사람은 벨 게디스나 백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이었다. 이 디자인이 1930년대의 미국에서 대유행을 불러일으켜 속도와 관계가 없는 것까지도 스트림 라인으로 디자인하기에 이르러 한 시대를 구획했다. 특히 풀러는 유선형의 바람막이를 단 아파트의 풀랜까지도 고안하였다. 이 풀러의 상표(商標)가 된 것이 다이맥시온이며 이것은 다이내믹(dynamic:유동적)과 맥시멈(maximum:최대한)을 합성하여 만든 새로운 단어이다. 그는 이 신조어로써 자동차와 주택 등을 디자인하여 공업디자인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편집] 임스

Charles Eames (1907∼1978) 미국의 가구디자이너로 세인트루이스에서 출생하였다. 재학시절에 강철회사에서 일하면서 엔지니어링과 건축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으며 워싱턴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였다. 1930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첫 건축사무실을 개설하여 가구와 공작물, 양탄자와 조각, 건축과 그림을 디자인하고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1941년에 뉴욕 근대미술관 주최로 열린 '오거닉 디자인 설계공모전'에 사리넨과 함께 성형합판 의자를 출품하여 대상을 받은 후부터 의자 디자인만을 주로 하게 되었다. 1946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개최한 '가구신작전(家具新作展)'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1947년부터 밀러사(社)에 의해 제품으로 만들어졌다. 그 후에도 파이버글라스 의자의 개발 등 항상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으며 1961년 그의 부인 레이와 함께 공업 디자인의 국제상인 카프만 대상의 제1회 수상자로 뽑혔다.

[편집] 밀턴

Gleiger Milton 뉴욕에 있는 쿠퍼 유니온 예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몰랑디와 함께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에칭을 공부하였다. 그 후에는 영상 아트와 쿠퍼 유니온 예술학교에서 학생을 지도하기도 하였고 푸쉬 핀 스튜디오를 공동으로 설립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에스콰이어>라는 잡지의 디자인 디렉터이기도 하였다. 1975년 뉴욕 모던 아트 박물관과 브뤼셀의 로열 미술박물관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1977년에는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그 당시에 베네치아 비엔날레 전람회를 대표하였다. 그는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그 중 중요한 활동으로는 뉴욕 사운드 트랙을 완벽하게 갖춘 환경 속에 아이들과 상점을 위해 설립된 아동용 상점을 디자인한 것, 인디애나폴리스에 새로 건축한 연방 사무실 빌딩에 벽화를 제작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빌리지 보이스> <뉴욕 매거진> <서커스> <모어(More)> <뉴 웨스트(New West)> <파리 매치> <큐(Cue)> <렉스프레스(L'Express)>등 수많은 발행물을 디자인하였고, 세계 무역센터에 있는 식당을 위한 그래픽 디자인과 조망대 등을 책임맡아서 일하였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포스터에 그려진 누드와 같은 회화적인 시도부터 1964년 AGI포스터처럼 아주 견고하게 숙련된 그래픽적인 요소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다. 그는 가장 훌륭한 디자이너는 '그 시대의 작품 자체이며 그들 주변에 어떤 상황이 전개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그 나름대로의 견해를 갖고 있었다.

[편집] 뢸링

Marte Roling (1940∼ ) 네덜란드인으로 1956년부터 1962년까지 암스테르담에 있는 주립미술 아카데미에서 드로잉과 페인팅을 공부하였다. 그는 그의 아버지 뢸링교수에게 직접 배우기도 하였다. 19세부터 유럽과 미국의 박물관과 갤러리에서 개인전과 그룹전시회를 갖기 시작하였는데 그녀의 폭넓은 활동 가운데는 개인회사와 미술품 수집가들이 정부 빌딩을 위하여 그에게 위임하여 만든 커다란 조각과 기념비적인 미술작품의 제작이 있었다. 그는 작품 제작에 있어서 자주 사용하는 물질이 플라스틱, 콘크리트, 사진술, 나무, 페인트, 금속, 유리 등으로 재료를 다양하게 사용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독일의 PTT를 위한 포스터를 비롯하여 우표제작, 극장의 무대장치, 의상, 패션, 리놀륨 판화, 드로잉, 실크스크린 등 다양한 종류의 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독일의 우체국을 위한 시리즈로 된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과 독일의 지로센터를 위한 색칠된 5개의 조각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편집] 웨그너

Hans J. Wegner (1914∼?) 덴마크의 가구디자이너로 가구직공으로 일하다가 코펜하겐의 공예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46년부터 1955년까지 코펜하겐의 강사로 있으면서 많은 가구회사의 일을 하였다. 그는 1954년 스칸디나비아 라닝 상을 받았고, 1956년 엥겔벨 상을 받았다. 1958년에는 파리 유네스코 본부 회의실의 디자인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프린트 산세사(社)의 작품으로, 불교 선종의 곡록(曲綠)을 서구적인 디자인으로 응용한 것이 돋보였다.

[편집] 셰르마이예프

Ivan Chermayeff (1932∼ ) 런던 출생으로 하버드 대학과 예일 대학에서 미술과 건축을 공부하였다. 1960년 게이스마르와 함께 합자회사를 창설하였고, 1967년 미국의 건축연합으로부터 산업미술 메달을 수상하였다. 그의 작품은 매우 광범위하고 특히 그래픽 디자인, 회사상표, 전람회 디자인, 건축 그래픽 등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그의 작품의 특징은 시각적인 미술과 매우 유사한 것을 느끼게 해준다. 또한 다양하게 층을 이룬 놀랍고도 명확한 메시지를 제시한다. 그는 디자이너의 정신과 화가의 안목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았는데 그의 작품인 <아이들을 위한 하얀집 협회(Conference)> <고양이 콜라주에 대한 사인 계획>에서는 이 두가지의 조화를 통해 상상의 풍부를 꾀하려는 해결에 이르렀으면서도 목적에서는 빗나가지 않았다. 그의 디자인 철학은 '필요에 독특하게 들어맞는 해결점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1971년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에서 금메달을 수상하였고, 1974년 제5차 애비뉴(Avenue) 연합회에서 도시의 시각적 환경에 대한 공헌으로 그에게 상을 부여하였다.

[편집] 번스

Robert Burns (1942∼ ) 영국에서 출생하였고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회화와 조각을 공부하였다. 1965년 캐나다로 이주하여 2년 동안 텔레비전 아트 디렉터로 활동한 후 1969년에는 자신의 다자인 실습소를 설립하였다. 1971년 쿠퍼(Heathe Cooper)와 번스 앤드 쿠퍼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이 그룹은 그후 14년 동안 캐나다 그래픽 디자인계에 큰 공헌을 하였다. 한때 AGI의 국제 부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1982년 예일대학교에서 '뷰 포인트'라는 이름의 주요 학생회의를 이끌었는데 이 모임은 그 주제를 AGI 멤버들의 작품과 경력에 대한 영향력의 탐구에 뿌리를 두고 있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86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번스 앤드 컴퍼니를 설립하여 컴퓨터의 도움을 받은 디자인 테크놀러지의 개발에 선구자 역할을 하였고, 그의 작품은 그의 전시회에서 5개의 기본적 형태를 상징화하기 위해 아크릴의 명료한 플라스틱 물질이 조각되어진 플라토닉 형상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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