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그리스도교의 성립/남인도의 안드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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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도의 안드라 왕국〔槪說〕[편집]

갠지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성립한 농경사회(農耕社會)는 카스트적 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인도적 농경사회는 점차 인도 전체에 확대되었다. 인도인의 생활 전반을 카스트 제도에 따라 규정한 『마누법전(法典)』이 성립한 것은 기원전 200

기원후 200년경까지이다.마우리아 제국의 판도에 들어간 남(南)인도는, 북방 선진 문화의 영향을 받아 문화적으로 크게 진보했다. 마우리아 제국 쇠퇴 후, 이 지방 주민은 북인도에 있어서의 여러 왕국의 흥망과는 별로 관계없이 국가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남인도 여러 나라 중에서, 데칸 지방에서 일어난 사타바하나 왕조(안드라 왕조)가 특히 중요하다. 안드라 왕국은 반도의 동서 항구를 거점으로 한 해상 무역으로 번영했다. 특히 로마 제국과의 무역이 활발하게 행해지고, 보석·향료 등과 교환하여 로마의 금화나 유리 제품이 대량으로 수입되었다. 국내에서는 브라만교(敎)가 왕실 보호하에 번영했다. 한편 불교의 신앙도 성해서 영내에는 아마라바티를 비롯해서 많은 불교 유적이 남아 있다. 안드라 왕국의 남쪽에는 촐라, 체라(케랄라), 판드야라는 드라비다계의 3왕국이 수세기에 걸쳐 번영했다.

마누 법전[편집]

-法典

산스크리트어의 운문(韻文)으로 쓰인 12장 2,684조(條)로 이루어져 있는 고대 인도의 법전. 인류의 시조 마누(Manu)의 이름이 붙어 있는데, 현존하는 법전은 기원전 200

기원후 200년에 완성된 것으로 국왕이나 종성(種姓)의 의무, 민법이나 형법, 의례나 제사, 일상 행사 등 인도인의 생활 전체를 규정한 법전이다. 4종성 제도에 입각한 사회를 유지하고 브라만의 특권을 지키려고 하는 의도로 쓰여 있다. 이 법전은 가장 권위 있는 힌두 법전으로 과거 2000년간 존중되어왔다. 동남아시아 각국에 이 법전이 준 영향은 크다.

안드라 왕조[편집]

-王朝 Andhra

기원전 3세기 말 시무카왕(王)에 의해 창설되고, 데칸을 중심으로 번영한 왕조. 최근에는 사타바하나 왕조라고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예로부터 인도 역사의 주인공 구실을 해온 북쪽의 여러 지방과는 달리 데칸지방과 인도 남단(南端)의 지방은 두드러진 존재가 못되었는데, 아리아인의 침입이나 베다의 문명에 대해서도 강력한 저항을 보여왔다. 이러한 지방들은 남단의 몇몇 지방을 제외하고는 마우리아 제국(帝國)의 국경의 나라로서 병합되기까지는 독자적인 종교적·문화적 유산을 계속 지녀왔다. 데칸지방에는 갠지스강의 골짜기로부터 철의 가공기술이 도입되었으며, 그 이후로 문화는 가속도적으로 향상했다. 이 데칸지방에 대규모의 토착인(土着人)에 의한 왕조(王朝)인 안드라 왕조가 성립되었는데, 도읍은 서부 데칸의 푸라티슈타이다. 지배자가 아리아계였는지 드라비다계였는지에 대해 의론이 구구하다. 1

2세기경 나온 가우타미푸트라 사타가르니의 시대가 전성기였지만 이후 차차 쇠퇴하여 3세기 초에 멸망했다.

사타가르니 왕[편집]

-王

안드라 왕조가 위대한 권세를 누리도록 한 왕은 사타가르니로서, 다키나파티(남쪽 군주라는 뜻)라고도 불렸다. 그는 당시에 압도적인 힘을 지녔던 불교에 대항했으며, 또한 남쪽지방의 순수한 드라비다적인 전통, 즉 아리아인의 영향을 받지 않은 토착의 전통에도 대항하여 열심히 힌두교를 지지했다.한편, 이 사타가르니 왕은 위와 같은 종교·문화 정책을 취하면서도 베다의 의식(儀式)에 따른 ‘말의 희생(아시바메다)’을 두 차례에 걸쳐 거행했으며, 전승(戰勝)을 축하한 적도 있었다. 또한 이 왕의 위업은 1세기경의 그리스의 무명작가가 쓴 『에리트라 해(海) 안내기(案內記)』에 인용된 늙은 사라가노스의 모습에 기억되어 후세에 남겨진 듯하다. 왕의 후손 가운데에서 인도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로는 할라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