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한제국의 성립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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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제국의 성립과 발전〔槪說〕[편집]

진(秦)나라의 급격한 통일 정책이나 일반 농민의 과중한 요역(?役)은 시황제의 죽음과 함께 각지에 반란을 유발시켜 드디어 기원전 206년 옛 6국 중의 초나라 귀족인 항우(項羽)가 진나라를 타도했다. 이후 항우와 그의 협력자였던 유방(劉邦)과의 5년간에 걸친 사투(死鬪)가 벌어졌다. 항우는 진에 의해서 비롯된 중앙집권체제를 부정하고, 중국 전토에 여러 장수들을 봉건(封建)하여 전국시대(戰國時代)의 구질서를 부활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즉 회왕(懷王)을 받들어 의제(義帝)라 일컫고 침(?)에 옮긴 후에 이를 죽인 후, 자신은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이라 일컫고, 팽성(彭珹)에 도읍을 장하여 쟝쑤(江蘇), 안후이(安徽) 등 9군(郡)을 지배했다. 그리고 여러 장수에 대해서는 군공(軍功)과 협력의 정도에 의거하여 각지에 분봉(分封)했다. 유방에게는 파촉(巴蜀), 한중(漢中)의 땅을 떼어 주어 한왕(漢王)이라 하고, 기원전 206년 4월에는 군대를 해산하여 각각 봉국(封國)으로 철수시켰다. 그러나 항우가 실시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은 많은 불만을 남겼다. 특히 회왕(懷王)의 약속에 위반하여 벽지(僻地)의 한왕에 봉해진 유방은 가장 불만이 큰 사람이었다.그해 8월, 유방은 관중(關中)을 공격하러 나섰다. 순식간에 관중 일대를 정복하여 역양(?陽)에 도읍을 정한 유방은 이듬해 3월에는 의제(義弟)의 복수를 주장하고 반초(反楚) 세력을 결집하여 항우와 대결하게 되었다. 그후 약 2년여에 걸쳐 항우와 유방은 잉양(滎陽) 부근을 끼고서 동서에 대치하여 격투를 계속했다. 그동안, 유방은 싸움이라는 싸움에서는 모두 다 항우에게 패했으나, 진평(陳平) 등의 반간계략(反間計略)을 써서 교묘하게 항우의 여러 장수들을 이반시키는 한편, 한신(韓信)을 제왕(帝王)에 봉하여 배후에서 항우를 겨누게 했다. 또한 팽월(彭越)에게 명하여 초나라의 양도(糧道)를 끊게 하는 등, 서서히 항우를 괴롭혔다. 기원전 203년 8월에 일단 화의(和議)가 성립됐으나, 유방은 이를 어기고 항우를 추격하여, 그해 12월 항우는 사면초가(四面楚歌) 속에서 자살하고, 초·한의 싸움은 한나라의 승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유방(한나라의 高祖)은 중류 농민 출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한 그가 옛 귀족들을 물리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춘추·전국시대에 있어서의 사회의 대변동을 예측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유방은 기본적으로는 진나라의 지배제도를 계승했으나 봉건과 군현 두 제도의 병용(郡國制) 등 교묘한 정책에 의해서 한제국의 기초를 굳혔다. 그의 사후 황태후 여씨(呂氏) 일족의 전횡(專橫)에 따른 일시적인 위기는 있었으나 경제(景帝) 때에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반란을 진압하고 무제(武帝)의 치세가 되자 한나라는 극성기(極盛期)를 맞았다.무제는 중앙집권 체제를 정비함과 동시에 외정(外政)에도 적극책을 써서 영역을 확대시켰다. 그러나 빈번한 정벌은 국가 재정의 궁핍을 초래했기 때문에 그러한 그의 치정(治政)도 만년에는 파탄의 빛이 짙어졌다. 다음 소제(昭帝)·선제(宣帝) 시대는 무제 말년의 실정을 만회하여 어느 정도 효과를 올릴 수가 있었으나 한편 이즈음부터 대토지 소유자로서 호족의 세력이 강대해져서 차츰 황제의 권력에 의한 통일적 행정을 문란케 했다. 여기에다 원제(元帝) 이후 궁정 내에서는 외척(外戚)인 왕씨(王氏)가 세력을 휘두르게 되어 기원후 8년 드디어 전한(前漢)은 왕망(王莽)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항우[편집]

項羽 (전 232

전 202)

진나라 말기의 무장이다. 초나라의 옛 귀족 출신. 우(羽)는 자(字), 이름은 적(籍)이다. 기원전 209년 숙부 항양(項梁)과 함께 회계(會稽, 江蘇省)에서 봉기하여 장강(長江)을 건너 서쪽으로 진격하여 각지에서 진나라군을 격파하고 기원전 206년 유방과 협력하여 진나라를 타도했다. 초나라 구왕조의 한 사람을 옹립하여 의제(義帝)로 삼고, 공적이 있는 군웅(群雄)을 제후(諸侯)로 봉하고 스스로는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이라고 자칭하여 천하의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의제를 살해하기에 이르렀고, 항우의 논공행상의 불공평에 불만을 품은 제후들의 배반을 초래하여 기원전 202년 가이샤(垓下, 安徽省) 싸움에서 유방에게 패하여 죽었다.

전한[편집]

前漢

중국의 통일 왕조(전 202

후 8)이다. 유방이 초나라의 옛 귀족 항우를 격파하고 진나라의 뒤를 이어 창설한 왕조. 장안(長安, 陝西省)에 도읍했기 때문에 뤄양(洛陽, 河南省)에 도읍했던 후한을 동한(東漢)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서한(西漢)이라고도 한다. 14대로서 외척 왕망(王莽)에 의하여 나라를 빼앗겼다.

유방(한의 고조)[편집]

劉邦(漢-高祖) (전 247

전 195, 재위 전 202

전 195)

한제국 초대 황제. 패(沛)의 중류 농민 출신이었으나 협기(俠氣)가 강했다. 기원전 209년 부로(父老)와 자제(子弟)들의 지지를 얻어 패공(沛公)이라 자칭하고 북상해 온 항우와 합세하여 서쪽으로 진격했다.기원전 206년 항우보다 앞서 진나라 수도인 셴양(咸陽)을 함락시켰으나, 항우는 약속을 어기고 유방을 그곳에서 쫓아내어 한중(漢中, 陝西省)에 한왕(漢王)으로 봉했다. 항우가 의제(義帝)를 죽인 것을 계기로 하여, 유방은 반격으로 나아가 드디어 기원전 202년 가이샤(垓下) 싸움에서 항우를 타도하고 한제국(漢帝國)을 창설했다.

군국제[편집]

郡國制

한제국이 채택한 지방제도. 유방은 급격한 중앙집권을 꾀한 진나라의 군현제 실패를 참작하여, 황제의 직할 통치인 군현제 외에, 일족(一族)과 공신을 왕후(王侯)로 봉하고 영국(領國)을 갖게 하는 봉건제도도 병용했다. 이 2원제(二元制)를 군국제라고 한다. 그러나 한나라는 유방의 생존 당시부터 타성(他姓)인 공신의 봉국(封國)을 몰수하는 등 일관하여 왕후의 실권을 빼앗는 방침을 취했기 때문에,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을 거쳐 무제(武帝)에 이르자, 실질적으로는 군현제와 다름없는 통치가 되었다.

가의[편집]

賈誼(전 200∼전 168)

중국 전한(前漢)의 문인·정치가로 뤄양(洛陽:河南省) 출생이다. 어릴 적부터 사문에 뛰어나고 제자백가에 정통하여 문제(文帝)의 총애를 받았고, 23살에 박사(博士)가 되었다. 1년만에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어, 기원전 174년(문제 6년) 유학과 5행설에 입각한 신제도의 시행을 상주(上奏)하였으나, 당시 주발(周勃) 등 고관들의 시기로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 태부로 배소(配所)로 갈 때, 도중의 상수(湘水)를 건너면서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굴원(屈原)과 비유하여 「복조부(?鳥賦)」와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었으며, 후에 양왕(梁王)의 태부가 되었다. 저서에 『신서(新書)』,『치안책(治安策)』과 진(秦)의 멸망 원인을 추구한 『과진론(過秦論)』 등이 있다.

오초칠국의 난[편집]

吳楚七國-亂

기원전 154년 경제(景帝)는 과격한 정치가 조조(?錯)의 적극책을 채용하여 제후왕의 죄를 폭로한 다음에 조(趙), 교서(膠西), 초(楚) 등의 영지를 깎아 왕국의 축소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해갔다. 이에 화가 자신의 몸에 미칠까 두려워한 오왕(吳王) 유비(劉?)는 초, 교서, 조, 교동(膠東), 치천(?川), 제남(濟南)의 제후왕과 공모하여 황제 측근의 간신인 조조를 칠 것을 구실로 선수를 쳐서 군사를 일으켰다. 이 사건을 오초7국(吳楚七國)의 난(亂)이라고 한다. 이 제후왕의 반란은 주아부(周亞夫)가 거느린 정부군의 교묘한 전략에 의해 오왕은 살해당하고, 오와 공모한 제후왕도 모두 살해당하여 전란은 불과 3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이 싸움에서 한의 조정이 승리를 거둔 것은 제후왕에 대한 조정의 우위(優位)를 결정지어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한초(漢初)의 정치사상 오초7국의 난의 평정이 지닌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국내의 제후왕 문제는 오초7국의 난을 계기로 하여 크게 진전되었으나, 한편 진말(秦末), 한초(漢初)의 중국의 혼란을 틈타 중국에 침입해 들어온 흉노(匈奴)에 대한 대책은 국내사정으로 인해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국내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그 국력을 발휘하여 흉노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중국의 국위(國威)를 신장하는 것이 다음 위정자에게 남겨진 커다란 정치과제였다.

무제[편집]

武帝 (전 156

전 87, 재위 전 141

전 87)

전한(前漢) 7대 황제로서 본명은 유철(劉徹)이다. 기원전 141년에 즉위하여 한제국의 전성시대를 이룩했다. 그는 경제(景帝)의 뒤를 이어 더욱 봉건 제후의 힘을 약화시키는 방침을 실행하여 전제 지배 체제를 확립하였다. 또한 관리의 임용 제도를 정비하고, 나아가서 유교를 국가 공인의 교학(敎學)으로 하여 전제 지배의 관념적 지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지배 권력의 강화를 배경으로 대규모의 치수 관개사업을 일으켜서, 광대한 농지를 조성하여 국내의 경제 개발을 진행시켰다. 대외적으로는 한초(漢初) 이래의 소극정책을 버리고 북방의 흉노를 공격하고, 서북 변방에 새로운 군현(郡縣)을 설치했기 때문에 서역(西域)과의 교통도 활발해졌다. 또한 남으로는 인도차이나 북부까지 세력을 뻗쳤다. 동북방으로는 한반도(韓半島)까지 진출하여 낙랑(樂浪) 이하 사군(四郡)을 설치했다. 이렇게 하여 무제는 내외(內外)에 국위를 과시했으나, 한편으로는 국가 재정의 궁핍을 초래하여 이것을 타개하기 위하여 소금과 철의 국가 전매제, 평준법 및 균수법(均輸法)에 의한 국영 상업과 각종 조세(租稅)의 증징(增徵) 등을 실시했다. 이러한 것은 농민의 부담을 증가시켰고, 따라서 기원전 1세기 초부터 화베이(華北) 동부 일대에 농민반란이 일기 시작하여, 번성했던 무제의 치정도 만년에는 파탄의 빛이 짙어졌다.

소금, 철의 전매화[편집]

-鐵-專賣化

무제의 외정(外征)과 그 성공은 표면만을 본다면 눈부신 성과이지만 반면에 오랜 세월에 걸친 대군(大軍)의 외국 출병, 병사들에 대한 은상(恩賞), 투항자에 대한 상품 수여 등으로 말미암아 그토록 풍부하던 재정도 바닥이 났으며, 게다가 호방한 무제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비롯된 상림원(上林苑)이며 건장궁(建章宮) 등의 대규모의 토목(土木)공사에 박차를 가했다. 그로 인하여 새로운 재정 정책이 국가의 긴급 과제로 대두되었다.무제가 시행한 재정 재건을 위한 경제정책으로서 주목되는 것은 소금과 철의 전매(專賣)이다. 소금은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계절도 춘추(春秋) 후기 이후로 철제 농기구의 보급에 따라 농민의 필수품으로 되어, 제염이나 제철업자는 물론, 그것을 판매하는 상인은 막대한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에 무제는 소금과 철을 국가의 독점사업으로 삼아 생산지에 염관(鹽官) 및 철관(鐵官)을 두고, 소금의 경우에는 제염업자한테서 사들여 판매하고, 철은 채광으로부터 제조, 판매에 이르기까지 정부가 일관하여 담당했다. 소금과 철 중에서 특히 소금은 후세에까지 재정이 궁핍해지면 손쉽게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서 전매의 대상이 되었고, 송(宋) 이후의 근세에는 이것으로 군사비(軍事費)의 대부분을 마련했다고 한다. 그 시초는 한 무제(漢武帝) 시대에 비롯된 것이다.

평준법·균수법[편집]

平準法·均輸法

무제(武帝) 때에 실시된 경제 정책. 기원전 110년, 뤄양(洛陽)의 상인 출신인 상홍양(桑弘羊)에 의해서 입안 실시되었다. 중앙의 대사농(大司農)에 평준령(令)을 두고, 지방에는 균수관(官)을 두어 지방의 조세는 그 땅의 특산물로 균수관에게 바친다. 균수관은 이것을 그 물품의 값이 비싼 곳에 매각하는 것 외에는 중앙의 평준령으로 보낸다. 평준령에 축장된 산물(産物)은 가격의 등귀(騰貴)를 기다려서 매각한다. 결국 균수법은 지역적 가격차를, 평준법은 시간적 가격차를 이용한 국영 상업이었다. 이러한 일은 인민 수탈의 성격이 강하고 인심을 얻지 못하여 소제(昭帝) 때에는 폐지된 것 같다.

유교의 성립[편집]

儒敎-成立

유교는 시조 공자(孔子)의 이름을 따서 공교(孔敎)라고도 하는데, 그 내용은 신분의 존비와 가까운 데보다 먼 곳에 미치는 인애(仁愛)를 근본으로 하면서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길을 가르치는 일종의 정치학·윤리학이다. 따라서 유학(儒學)이라고도 한다. 공자는 자기의 교학(敎學)이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성덕(聖德)을 갖춘 옛 성왕(聖王, 先王)의 도(道)에 합치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이 ‘선왕의 도’는 주공(周公)을 비롯하여 주나라 왕조의 창설자들에 의해 밝혀져서 시(詩)나 서(書) 등의 경전(經典, 經書)에 수록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공자의 사상은 전국시대에는 맹자(孟子)·순자(筍子) 등에 의해서 계승되어 진(秦)·한(漢)에 미쳤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서 시와 서 외에 역(易)·예(禮)·춘추(春秋)가 경서에 추가돼서 오경(五經)이 성립되었다.오경의 성립은 중국인 공통의 규범이나 신앙이 유가 사상을 핵(核)으로 하여 집대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의 무제는 전중국의 지배자로서의 한왕조의 권위를 이데올로기 면에서 정당화하기 위하여 동중서(董仲舒) 등의 협력을 얻어 유교를 한제국 공허(公許)의 학문으로 채용하였다. 이것으로 유교는 강대한 전제 권력에 의해서 전면적으로 지지를 얻게 되고 관료와 그 후보자적 존재에게 있어서는 필수적인 교양이 되었다. 따라서 그 이전의 재야(在野) 여러 학문의 하나였던 때에 비해서 차차 그 사상적 내용의 긴장성(緊張性)을 잃어갔다.

동중서[편집]

董仲舒 (전 200?∼전120?)

한(漢) 무제(武帝) 때의 유학자(儒學者). 무제로 하여금 유교에 의하여 사상통일을 하도록 하는 정책을 건의하였다.어려서부터 공양춘추(公羊春秋)를 수학하고, 경제(景帝) 때에는 박사가 되었다. 그의 저서 춘추번로(春秋繁露)는 공양사상(公羊思想)에 의한 춘추(春秋)의 해석으로, 여기에 나타난 것은 전한(前漢)의 금문학(今文學) 사상이다.인간과 자연의 사이에는 기능의 일치가 성립되는데, 양자는 서로 상관관계에 있다고 하는 철학상의 입장에 서서, 행정조직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정치사상을 설명하였다. 그 기초는 전국(戰國) 이래 지배적이었던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에 의하여 주어졌다. 인군(人君)이 만일 천의(天意)에 거역하는 행위가 있으면, 하늘은 재앙 또는 이변(異變)을 내려 경고한다고 하는 재이설(災異說)은 이렇게 하여 성립되었다. 또한 경제정책으로서 한전(限田)·노예 해방을 주창한 것은 국가권력의 집중화를 꾀한 것이었으나 실시되지 않았다.

오경박사[편집]

五經博士

중국의 관명(官名). 한나라 무제는 동중서 등의 협력으로 유교를 제국 공허의 학문으로 삼았는데, 기원전 136년에 오경박사를 두고 대학(大學)을 설치했다. 대학에서는 오경박사의 관장 아래 오경이 과목(課目)으로 되었다. 당시 임명된 것은 서경의 구양(歐陽), 예경의 후창(后倉), 역경의 양하(楊何), 춘추의 공양(公羊) 등 4박사이며, 시(詩)박사는 이미 문제(文帝)·경제(景帝) 때부터 두었다.후에 각 경(經)마다 박사의 수가 불어서 전한(前漢) 말기에는 14박사가 되었다.

대월지국[편집]

大月氏國

기원전 2세기부터 1세기경 중앙아시아 암강(江) 상류에 터키계 또는 이란계라고도 하는 대월지족(大月氏族)이 세운 나라이다. 대월지는 기원전 2세기 전반 흉노족에 의해서 중국 서북부 간쑤(甘肅) 지방의 근거지에서 쫓겨나 서쪽 이리 지방으로 도망했으나 다시 남하하여 암강(江) 유역에 들어가서, 박트리아에 대체되어 이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토하라 (『史記』의 大宛傳에 나오는 大夏의 對音이라는 설도 있다)의 세력을 누르고 건국했다. 한(漢)의 사신 장건(張騫)이 이 곳에 온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대월지국(大月氏國)이라 부르고, 그 뒤 45년경부터 대하(大夏) 제후의 하나인 쿠샨(貴霜)이 강력하게 되어 대월지 대신으로 이 지방 전역을 지배했는데, 그 뒤에도 중국에서는 쿠샨왕조를 대월지국으로 불렀다. 1세기 중엽 그 지배하에서 쿠샨 왕조가 일어나게 되자 멸망했다.

장건[편집]

張騫 (?

전 114)

전한(前漢) 때의 서역(西域) 탐험가이다. 무제는 대월지와 손을 잡고 흉노를 협격하려고 기원전 139년 장건을 대월지국에 파견했다. 그런데 왕복마다 도중에 흉노의 포로가 되어 13년간이나 걸린 고난의 여행이었는데, 대월지는 암강 상류 지방에 안주하여 이미 흉노와 싸울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목적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장건은 대월지에 체재하고 있었을 때 대하국 등을 여행하여, 대월지의 남방에 신독국(身毒國:인도), 서방에는 안식국(安息國:파르티아 왕국)이 있는 점이라든지, 각 지방의 진기한 풍속이나 물산(物産) 등, 서역(西域)의 사정을 보고 듣고 할 수 있게 된 것은 커다란 수확이었다. 장건은 결과적으로 그 사명을 달성할 수 없었지만, 그가 견문한 서역 제국(西域諸國)에 관한 상세한 보고는 무제(武帝)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켜 무제의 서역에 대한 야망을 북돋우게 되었다. 장건은 후에 이리강(江) 유역의 오손(烏孫)과 동맹을 맺어 흉노를 협격할 것을 진언하고 금은포백(金銀布帛)의 예물을 가지고 부하 3백 명을 거느리고 또다시 서역으로 출발했다. 이 때의 오손과의 군사동맹도 실패로 끝났으나, 장건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부하를 서역의 각국에 파견하여 교통을 열고 저마다 사절을 데리고 귀국했다.장건의 두 차례에 걸친 서역 원정은, 서역의 사정을 처음으로 한나라에 전했을 뿐만 아니라, 대완(大宛)이나 대월지(大月氏), 오손(烏孫), 대하(大夏) 등의 서역제국에도 한 제국(漢帝國)이 부강함을 알려 주게 되어, 그 후로 사신이나 상인의 왕래를 촉진시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역으로부터는 포도, 석류 등의 진귀한 산물이라든지 진기한 동물, 잡기(雜伎), 음악 등이 중국에 들어오게 되었고, 반대로 중국에서 가지고 나간 것 중에는 견직물에 특히 호기심에 찬 눈길이 돌려졌다. 이 중국산의 견직물은 서역을 경유하여 멀리 로마의 땅에까지 운반되어 갔으며, 이 때부터 비로소 비단의 교역로(交易路)라는 의미에서 실크로드가 개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왕소군[편집]

王昭君(생몰년 불명)

한나라 원제(元帝)의 관녀(官女)이다. 이름은 장(?), 자(字)가 소군이라고도 또는 그 반대라고도 한다. 기원전 33년 흉노와의 화친 정책으로 흉노의 선우(單于, 王)인 호한사(呼韓邪)에게 시집갔다. 이른바 정략결혼(政略結婚)의 본보기로 또는 희생자로서 많은 슬픈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며 후세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아들 딸을 낳고 호지에서 사망하였으며, 청총(靑塚)에 장사지냈다.

서남이 정복·월인 정복[편집]

西南夷征服·越人征服

무제(武帝)는 장건이 서역으로부터 가져온 정보에 따라서 중국 서남방에서 인도에 이르는 길을 열려고 했다. 이 때문에 쓰촨(四川)·윈난(雲南)·구이저우(貴州) 방면에 있던 서남이(西南夷)를 정복하여 기원전 111년에 장가군 등의 5군을 설치했다. 그러나 인도에의 길을 여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또한 같은 무렵 저장(浙江) 남부에서 푸졘(福建)·광둥(廣東)·광시(廣西)·베트남 북부에 있던 월인(越人)을 내분에 편승하여 정복하고, 그 일부를 화이허강(淮江) 유역으로 옮겼으며, 남쪽에는 교지군(交趾郡) 등 9군을 설치하여 하이난섬(海南島)·베트남 북부까지를 한나라의 지배하에 넣었다.

호족[편집]

豪族

한나라 초의 평화는 농업생산의 안정을 보장했기 때문에, 문제(文帝) 때에는 부유한 대토지 소유자가 생기게 되었다. 그들은 그 재산에 의해서 자제를 분가시켜 동족의 수를 불려 나갔고, 증가된 동족끼리의 결합으로 지방에 있어서 커다란 세력을 가지게 되어, 상업·고리대금·소작·고용관계 등을 통해 차츰 일반 농민을 지배하에 넣게 되었다. 이와 같은 존재를 호족이라 부르는데, 그들은 무제의 시대가 지나면서 본격적인 발전기에 들어가 후한(後漢)이 되자 더욱 세력을 뻗쳤다. 개개의 소농민을 황제 권력이 직접 지배하는 것을 국가 구성의 근본으로 했던 한제국은 여러 번 그들을 억압하려고 했으나 현실 정치는 그들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