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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섭관 정치와 헤이안 문화〔槪說〕[편집]

헤이안 시대의 전반 9

10세기는 율령국가(律令國家)의 해체기였다. 나라(奈良) 시대말에 동요하기 시작한 율령 체제는,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자 붕괴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국가를 밑받침하는 조세(租稅) 체제도 커다란 변역(變易)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조(調)·용(庸)의 수취(收取)는 곤란해져서 중앙 재정의 기초가 흔들렸다. 10세기 이후의 사회 토대를 이루는 국아령(國衙領)·장원(莊園)의 체제와 새로운 조세 체제의 싹은 이 헤이안 초기에 탄생되었다. 이 시기는 율령 국가의 커다란 전환기가 되었다. 먼저 정치적으로는 후지와라씨(藤原氏)에 의한 섭관 정치가 확립되었다. 율령제 자체를 지탱하고 있던 반전수수제(班田收授制)는 10세기가 되자 완전히 무너져, 인큐오신케(院宮王臣家) 등 유력 귀족층에 의한 대토지 사유, 즉 장원이 증대되었다. 이것은 각지의 부호층에 의한 반(反)율령적 활동의 격화와도 결부되고 있었다. 이는 동시에 율령 수세(收稅) 체제의 붕괴와 국가 재정의 결핍을 초래했다.한편 지방 농촌에서는 다토(田堵)라고 불리는 유력 농민이 성장하여 농업 생산의 중핵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시기에 대륙 제국(諸國)의 정세도 크게 변화하여, 조정은 874년 견당사(遣唐使) 파견을 중지한 다음 각국과의 정식 국교 관계를 맺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대신하여 민간인에 의한 무역선의 왕래는 왕성해졌다.헤이안 전기의 문화는 덴표(天平) 문화의 연장 발전이라고 볼 수 있으며, 당풍(唐風)의 기반 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덴표 문화가 당 문화의 직역(直譯)이라고 볼 수 있다면, 헤이안 전기의 것은 당풍이기는 하나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 문화로서는 먼저 한문학(漢文學)을 들 수 있다. 헤이안 중기, 즉 9세기 말이 되자 당의 쇠퇴, 항해의 위험 등으로 견당사가 폐지되었고, 10세기에 들어서자 문화의 모든 면에서 일본적인 것이 득세했으며, 특히 9세기에 들어서 발생한 가나(假名)는 일본 문화사상 가장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일본의 문자는 중국의 한자 전래로 비롯되는데, 한자에서 변화하여 생긴 표음(表音) 문자가 가나이다. 가나란 만나(眞名), 즉 한자에 비교한 말이다.

간무천황[편집]

桓武天皇 (737∼806)

본명은 야마노베(山部), 지방관과 불교계의 세력을 누르고 정치·사회적 혼란기인 9세기에 가장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했다. 혼슈(本洲) 북부와 홋카이도(北海島)에 정착해 있는 아니누족을 정복하였고, 수(隋)·당(唐)의 수도 장안(長安)을 본떠 천황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수도를 나라에서 헤이안으로 옮겨 헤이안시대의 기초를 닦았다.

헤이안시대[편집]

平安時代

헤이안으로 수도를 옮긴 간무천황이 즉위한 781년부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를 성립할 때까지의 400년 간을 가리킨다. 이 시대는 귀족계급의 정권이 유일한 정권으로서 일본을 지배한 시대로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우선 정치면에서는 율령(律令) 체제 재편의 뜻을 갖는 여러 가지의 신관제(新官制)가 발생하고, 셋칸정치(攝關政治:셋쇼(攝政) 및 칸파쿠(關白)가 천황을 대신 하여 하는 정치)와 인세이(院政:상황(上皇)이 천황을 대신하여 하는 정치)가 성립되었다. 또 사회 경제면에서는 장원(莊園)의 발달과 귀족계급의 성장 및 무사(武士)의 발흥이 있었고, 문화면에서는 귀족문화의 번영, 즉 불교계에 있어서의 밀교(密敎)의 발달, 신불습합(神佛習合) 사상의 발달, 미술계에서의 신덴즈쿠리(寢殿造:궁전 건축 양식의 하나)·야마토에(大和繪:일본화(日本畵)의 한 유파) 등의 발생, 문학계에서의 가나(假名)의 발달을 기초로 한 와카(和歌:일본 고유의 시가)와 여류문학의 융성 등을 들 수 있다. 이를 대관(大觀)하면 이 시대는 나라시대(奈良時代:710∼784)에 완성된 대륙식 전제국가체계와 그의 기초가 된 사상문화가 쇠퇴 내지는 보강·수정된 시대이며, 또한 혁신을 위한 새로운 계급이 무사(武士)를 중심으로 서서히 대두하기 시작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견당사[편집]

遣唐使

나라(奈良)·헤이안(平安) 시대에 일본에서 중국의 문물제도를 수입하기 위해 당(唐)에 파견하였던 사자. 일본은 이미 쇼토쿠 태자(聖德太子) 때에 수(隋)에 견수사(遣隋使)를 보내고, 유학승(留學僧)을 파견하여 중국의 문물제도를 섭취하는 데 힘썼다. 이러한 사자의 파견은 618년 수가 망하고 신흥의 당제국(唐帝國)이 성립된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이 견당사의 파견은 다이카(大化) 개신 뒤에는 국제관계의 긴장으로 인해 주로 정치·경제상의 목적으로만 행하여졌다. 그러나 그 후 7세기 말엽까지의 약 30년간 율령제(律令制) 국가건설의 중요시기에는 견당사의 파견이 중단되었었으나, 702년에 다시 문화목적을 주로 한 견당사의 파견이 재개되어, 9세기 중엽까지 파견된 횟수는 전후 13회에 이르렀다. 항로는 처음 한국의 서해안을 따라서 북상하여 산둥반도(山東半島)에 이르렀으나, 7세기 후반부터는 동(東)지나해를 횡단하여 양쯔강으로 이르는 남로(南路)가 개척되었고, 9세기에는 양쯔강으로 직행하였다. 당시의 당은 인도, 페르시아, 아라비아를 포함하는 세계적 문화권의 중심이었는데, 일본은 이 성당문화(盛唐文化)를 섭취함으로써 비로소 덴표(天平)시대의 대륙적 문화가 개화할 수 있었다. 이 견당사에 의해 수입된 서적과 기술자가 습득한 여러 기술은 이후 일본문화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