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현대 문학/현대 전기 문학/개화기와 신문학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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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의 의미[편집]

開化-意味

유럽의 근대사회는 르네상스 이후 종교개혁·산업혁명·프랑스 혁명 등 문화적 혁신과 과학적 문명의 진보를 통해 획기적인 근대화의 과정을 밟아 왔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실학운동과 동학혁명이 고질적인 봉건왕조의 폐쇄성으로 인하여 개화(開化)를 보지 못한 채, 갑오경장이라는 타율적인 힘에 의해 외세 자본주의가 이룩한 서구적 근대화 과정으로 이행하게 되었다. 따라서 봉건왕조의 유교적인 형식 논리, 양반 관료의 가렴주구(苛斂誅求), 그리고 은둔적인 쇄국정책(鎖國政策)은 일제의 식민지화를 촉진시켰고, 조수(潮水)처럼 밀려든 근대사조를 주체적으로 수용·극복하기에는 너무나도 힘에 겨웠다.

그리하여 문화와 생활 면에서도 서양문물의 영향이 직접·간접적으로 침투되어 근대화의 구호가 바로 개화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었다. 당시에 유행한 '개화장(開化杖)' '개화당(開化黨)' '개화 주머니' '개화군' 등의 색다른 이름까지 나올 정도로 개화기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개화란 것은 '문명개화(文明開化)'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구시대의 문화 및 생활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의 문화를 흡수하고 새로운 생활양식으로 변모·동화함을 뜻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개화란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양 문물에 동화(同化), 즉 서양화한다는 말이요, 시대적인 의식 전환으로 근대화한다는 뜻까지 포함한다.

갑오경장과 개화·계몽기[편집]

甲午更張-開化·啓蒙期

한말(韓末)에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갑신정변(甲申政變)·동학혁명 등은 극도로 부패한 조선왕조와 양반계급에 대한 민중의 자아 각성에 의한 반발(反撥)이며, 누습에 젖은 수구파(守舊派)에 대하여 신제도로 개혁하려는 개화파의 혁신의 부르짖음이었다.

그러나 민중의 자아각성과 근대적 혁명을 기도한 동학혁명은 마침내 외세의 개입으로 소기의 성과를 보지 못하고, 청·일전쟁(淸日戰爭)을 유발시켰다. 그리하여 무력한 한말 정부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다난한 속에 자주의식의 각성과 함께 일본의 침략을 전제로 한 강압에 못이겨 국내 개혁이 이루어지니 이것이 1894년의 갑오경장이다. 갑오경장은 외세에 의한 피동적인 제도상의 개혁이기는 했으나 이것이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획기적인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첫째 정치적 면에서는 귀족정치에서 평민정치에의 전환을 밝혔고, 외국에의 종속적인 위치로부터 주권의 독립을 분명히 했고, 둘째 사회적인 면에서는 개국 기원의 사용, 문벌과 신분계급의 타파, 문무 존비제(文武尊卑制)의 폐지, 연좌법(緣坐法) 및 노비제의 폐지, 조혼(早婚)의 금지, 부녀 재가(再嫁)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셋째 경제적인 면에서는 은본위의 통화제, 국세 금납제(金納制)의 실시, 도량형의 개정, 은행 회사의 설립 등 이 밖에 2백여 조항의 개혁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말 정부로서는 이를 주체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자주 역량이 부족하고, 외세에만 의존하는 한편, 이 새로운 개혁을 저지하는 기존 봉건세력의 힘이 컸기 때문에, 불행히도 실질상의 큰 성과를 얻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한편 이 때부터 한말 사회에서는 인습과 전통의 구속을 벗어나 자유로운 지식을 보급하고, 일반 민중으로 하여금 무지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개화·계몽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것은 당시의 유교적인 인습과 전통에 사로잡힌 재래의 누습을 타파하고, 그 굴레에서 벗어나 자아를 각성하고 과학문명에 입각한 새로운 지식을 체득하게 하려는 시대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개화 계몽기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겠다는 의욕보다는 낡은 것에서 벗어나겠다는 욕구가 더 선행했으며, 모든 것은 신(新)과 구(舊)로 대립되었고, 낡은 것은 일차 부정의 단계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근대 사조의 영향[편집]

近代思潮-影響

19세기 말 급격히 전변(轉變)하는 세계사의 물결은 중국·일본이 세계 열강(列强) 앞에 문호를 개방한 뒤, 1876년 한국도 강제적인 최초의 근대적인 외교로 일본과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였다. 계속하여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 구미 제국과도 개국(開國)의 조약이 맺어지니, 이로써 굳게 닫혔던 쇄국의 문은 열리고, 봉건왕조인 한국도 외세 자본주의가 각축(角逐)하는 와중(渦中)에 빠지게 되었다. 이와 함께 한국 신문학을 촉진시키게 된 서구의 근대사조는 앞뒤의 순서도 없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그 조잡한 흡수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피동적인 외래 사조의 접촉은 결과적으로 전통문학에 대한 등한시 내지는 극단적으로 낡은 것은 모조리 나쁘고 새로운 것은 무조건 좋다는 파행적인 관념을 조장,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외래 사조를 숭상하는 현대적인 사대사상의 풍조를 잉태하게 했다. 이렇게 착잡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현대문학과 연관을 맺게 된 것은 기독교·신교육 사조, 그리고 신문·잡지를 통한 저널리즘이었다. 이미 영·정조 시대에 갖은 탄압 속에서도 중국을 통해 전파해 온 천주교는 여러 차례의 순교(殉敎)의 역경을 거쳐, 한불조약(韓佛條約) 후에야 비로소 신앙의 자유를 획득했다.

그 후 기독교는 신교의 전래와 함께 이 땅의 교육기관인 사학(私學)에 대하여 큰 공헌을 했고, 현대문학의 생성과정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즉 성경(聖經)의 번역을 통해 문장에서도 시문체(詩文體)의 활용과 한글의 보급을 촉진시켰고, 찬송가(讚頌歌)는 새로운 노래인 창가발생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더욱이 기독교 재단에 의해 1885년 한국 최초의 현대적 사학인 배재학당(培材學堂)이 설립되었고, 그 후 이화학당(梨花學堂)을 비롯해 많은 교육기관이 교회의 힘으로 건립되니, 이러한 현대적 교육기관은 그대로 신문학을 생성시키는 촉진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근대적 신문과 잡지[편집]

近代的新聞-雜誌

한편 현대식 신문과 잡지 및 관보(官報)의 종합적 체제인 <한성순보(漢城旬報)>가 1883년 창간되니, 이는 한국에 있어 근대적 언론의 효시이며, 한때 중단된 후 주간(週刊)으로 속간된 <한성주보(漢城週報)>는 국한문(國漢文) 혼용체를 최초로 사용한 신문으로, 그 문체는 신문학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뒤 1896년에 발간된 <독립신문(獨立新聞)>은 그 문장을 순한글로 썼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고 그 후에 창간된 <황성신문(皇城新聞)> <매일신문(每日新聞)>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매일신보(每日申報)> <국민신보(國民申報)>등 많은 일간신문과 <소년(少年)> <청춘(靑春)> 등의 잡지는 초기 문학작품의 대변 또는 새로운 문체를 보급시키는 매개 기관이었다는 점에서 신문학과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되었다.

한성순보(漢城旬報)[편집]

1883년 10월 1일 창간된 순간(旬刊) 신문. 한국 최초의 신문이라 하나 일종의 관보이다. 민영목(閔泳穆)·김만식(金晩植) 등이 주재했고, 일본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가 고문으로 있었다. 문장은 순한문(純漢文)이며, 1884년에 폐간되었다.

한성주보(漢城週報)[편집]

1886년에 간행된 신문. 독자의 대상을 일반 서민에까지 넓혔다. 문장은 국한문으로 김윤식(金允植), 강위(姜瑋) 등이 주동이 되어 발간했다. <한성순보>를 계승한 것이므로 형식상으로는 관보이나 신문으로 볼 수 있으며, 1888년에 페간되었다.

독립신문(獨立新聞)[편집]

1896년 4월에 창간된 신문. 우리나라 신문사상 최초의 민간 신문으로, 서재필(徐載弼)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獨立協會)의 기관지로 발간되었다. 4면 중 3면은 순국문, 1면은 영문으로 문장을 썼다.

서재필을 중심으로 발간했으나 그가 미국으로 망명한 뒤에 아펜젤러(H. G. Appenzeller)를 발행인으로 하여 윤치호(尹致昊)가 맡아 발행하다가 독립협회의 해산과 함께 폐간되었다.

만세보(萬歲報)[편집]

1906년 손병희(孫秉熙)가 창설한 신문. 나라일을 걱정하는 강개조(慷慨調)의 신문으로 사장에 오세창(吳世昌), 이인직(李人稙)이 주필로 있었다. 이인직의 신소설 <혈(血)의 누(淚)>를 연재, 신문소설의 기원을 만들었고, 1907년 경영난으로 폐간, <대한신문>으로 바뀌었다.

황성신문(皇城新聞)[편집]

구한말 1898년 3월에 시작된 주간 <경성신문(京城新聞)>을 그해 9월에 남궁억(南宮檍), 나수연(羅壽淵) 등이 인수, 일간으로 바꾼 신문. 문장은 국한문으로, 애국적 논조로 일관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보고 당시의 사장 장지연(張志淵)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비분에 넘친 논설을 실어 투옥된 일이 있으며, 국권강탈로 폐간되었다.

매일신문(每日新聞)[편집]

1898년(광무 2)에 창간된 순한글 신문. 협성회(協成會)의 회보가 폐간된 후, 양홍묵(梁弘默)·유영석(柳永錫)·이승만 등에 의해 민족의 대변 기관지로 등장. 3-4면에는 외국 소식과 개화 문명을 실었으며, 독립협회 사건으로 1년 만에 해산되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편집]

1905년 양기탁(梁起鐸)이 영국인 배설(裵說=T. E. Bethell, 1872-1909)과 함께 창간한 일간신문. 사장 겸 발행인에 배설, 양기탁이 운영을 담당, 철저한 항일운동지로 문장은 국한문을 혼용했다. 1907년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기사가 문제되어 정간되었다가 1909년에 속간되었고, 그 후 많은 곡절을 겪다가 1910년 8월 국권 강탈 후 통감부의 기관지 <매일신보>로 바뀌었다.

대한민보(大韓民報)[편집]

1909년 대한협회의 기관지로 창간된 신문. 오세창·윤효정(尹孝定)·정운복(鄭雲復) 등이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한 대한자강회(大韓自彊會)에서 낸 월보(月報). 한일협약 때 해산되었으나 그들은 다시 대한협회를 조직, 속간하다가 1910년 8월 국권 강탈로 폐간되었다.

매일신보(每日申報)[편집]

1910년 <대한매일신보>가 국권 강탈 때 강제로 매수되어 총독부 기관지로 되면서 이름을 고친 것임. 이인직의 <모란봉>, 이광수의 <무정(無情)> 등이 여기에 연재되었고, 1945년까지 속간했다.

국민신보(國民申報)[편집]

한일합방 직전 일진회에서 발간한 친일적 신문. 최영년(崔永年) 주필로 한석진(韓錫振)이 주재했다.

역술과 번안소설[편집]

譯述-飜案小說

우리나라 신문학은 창가나 신소설이 나오기 이전에 외국의 작품을 국문으로 번역한 작품이나 번안소설이 그 준비과정으로서 먼저 나타났다. 번안소설이라 하면 외국소설을 번역할 때 그 내용이나 줄거리는 원작대로 하고, 인명·지명·풍습 같은 것은 우리나라 것으로 고쳐서 번역한 것으로, 우리 신소설은 일본의 신소설을 번안한 것이 많다. 즉 1898년 이해조(李海朝)의 역술로 나온 <철세계(鐵世 界)>는 최초의 번안소설이며, 신소설 이전에 출현한 것이다. <철세계>가 번안되기 이전에 이미 <성경> <찬송가>의 우리말 번역이 이루어졌고, 문학적인 작품으로는 1895년 선교사 게일(J. S. Gale)에 의해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그 후 1907년 번간(飜刊)의 정치소설 <서사건국지(瑞士建國誌)>는 초기의 신소설에 영향을 주었고, 계속하여 번안소설은 구연학(具然學)의 <설중매(雪中梅)>를 비롯하여 조중환(趙重桓)의 <장한몽(長恨夢)> <쌍옥루(雙玉淚)> <불여귀(不如歸)>, 이상협(李相協)의 <해왕성(海王星)> <재봉춘(再逢春)> <정부원(貞婦怨)>, 민태원(閔泰瑗)의 <무쇠탈> 등 외국작품이 번안되어 일반에게 널리 읽혀졌다. 이 번안소설은 신소설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그 내용도 유사한 것이 많다.

천로역정(天路歷程)[편집]

(The Pilgrim's Progress)

영국의 목사이며 소설가인 존 버니언이 지은 우화. 신앙에 깊이 젖은 꿈같은 이야기로 성서에서 따온 간결한 말과 변화성 있는 인물과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근대소설의 모태로서의 의의가 크다. 우리나라에서는 1895년(고종 32) 영국의 선교사 게일에 의해 국문으로 번역되어 널리 읽혀졌다.

철세계(鐵世界)[편집]

(1898)

이해조가 지은 번안소설. 프랑스의 작가 쥘 베린의 원작을 번안한 것으로 과학의 놀라움과, 근대문명의 계몽을 꾀한 소설.

서사건국지(瑞士建國誌)[편집]

박은식(朴殷植)의 번안으로 1907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장편소설. 문장은 한문에 토를 단 정도이고 내용은 실러의 원작 희곡 <빌헬름 텔>을 중국 정철관(鄭哲寬)이 개작한 것을 대본으로 하여 중역 서술한 것.

설중매(雪中梅)[편집]

1908년(융희 2) 구연학이 지은 번안소설. 이는 일본 작가 스에히로 데스초오(末廣鐵腸)가 개화·계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쓴 정치소설 <설중매>를 번안·개작한 것이다.

구연학[편집]

具然學 (생몰연대 미상)

개화기의 신소설 작가. 1908년 번안소설 <설중매>를 발표하여 개화기 소설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약간의 정치 논설도 발표했다.

조중환[편집]

趙重桓 (1863-1944)

개화기에 활동한 신소설 작가. 서울 출생. 호는 일재(一齋). 신소설 <국(菊)의 향(香)> <단장록(斷腸錄)> <비봉담(飛鳳潭)> 등을 냈고, 번안소설로서 <장한몽> <불여귀> <쌍옥루> 등을 내었다. 대개 일본 작품을 번안했다. 윤백남(尹白南)과 극단 '문수성(文秀星)'을 창립했고, 최초의 희곡 <병자 삼인(病者三人)>을 1912년에 <매일신보>에 연재했다.

장한몽(長恨夢)[편집]

(1913)

조중환이 지은 번안소설. 일본 작가 오자키 고요(屋崎紅葉)의 <금색야차(金色夜叉)>를 번안한 것. 연애소설로 한국에 유행되어 사랑에 대한 새로운 풍조를 일으켰고, 남녀 주인공인 이수일과 심순애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불여귀(不如歸)[편집]

(1912)

조중환이 지은 번안소설. 일본 작가 도쿠도미 로카(德房蘆花)가 지은 가정소설 <불여귀>를 번안·개작한 것으로 1910년대 신파극의 대본으로 무대에 상연되었다.

쌍옥루(雙玉淚)[편집]

(1912년)

조중환이 지은 번안소설. 일본 작가 기쿠치 유호(菊池幽芳)의 <나의 죄>를 번안·개작한 것으로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이 작품은 연극 대본으로 무대에 상연되기도 했다.

이상협[편집]

李相協 (1893-1957)

언론인·소설가. 호는 하몽(何夢). 일본 게이오 대학(慶應大學)에서 수업. 초기에는 매일신보사 기자로 활약. <해왕성(海王星)> <정부원(貞婦怨)> <재봉춘(再逢春)> 등을 번안하였고, <눈물> <정조원(貞操怨)> 등 신소설도 창작했다.

해왕성(海王星)[편집]

이상협이 지은 번안소설, 1915년 <매일신보>에 연재되었고, 내용은 뒤마(페르)의 <몽테 크리스토 백작>을 번안한 것.

정부원(貞婦怨)[편집]

(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된 이상협의 번안소설. 내용은 일본 개화기 작가 쿠로이와 루이코(黑岩淚香)의 <사소주(捨小舟)>를 번안한 것.

재봉춘(再逢春)[편집]

(1912년)

이상협이 지은 번안소설. 일본 작가의 원작 <상부린(相夫憐)>을 번안한 것으로 연극으로서 무대에 상연되기도 했다.

민태원[편집]

閔泰瑗 (1894-1935)

소설가·번역가·언론인. 호는 우보(牛步). 충남 서산(瑞山) 출생. 작품에 번안소설 <무쇠탈> <서유기(西遊記)> <부평초(浮萍草)>(<집 없는 아이>의 번안) <애사(哀史)>(<레미제라블>의 번안) 등이 있다.

무쇠탈[편집]

1923년 민태원이 지은 번안소설. 원작인 보아고베의 <철가면(鐵假面)>을 번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