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I·세계문학·논술/남서 유럽 문학/프랑스 문학/중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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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그리스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중 세〉

16세기

목차

[편집] 중세 문학

三國時代文學-特性 삼국시대 이전의 원시문학을 집단가무시대라 한다면 삼국 문학은 개성 자각(個性自覺)의 문학시대라고 집약(集約)해서 말할 수 있다. 이 시대의 문학은 어떠한 부족이나 국가를 대표하는 영웅에 대한 이야기와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영웅일지라도 개인으로서의 영웅의 부귀와 영화, 그리고 평범한 필부(匹夫)나 촌녀(村女)의 기쁨이나 슬픔을 노래하였다. 이 시대의 문학은 집단적·객관적·영웅적인 것에서 개인적·주관적·서정적인 것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이 시대 문학은 전대(前代)보다 발전된 것은 사실이나 아직도 가요와 설화가 확연히 구분되지 않고, 가요의 유래에 대한 설화가 반드시 수반되어서야 겨우 그 생명을 유지한 사실로 보아 아직도 전대 문학의 잔영(殘影)을 그대로 물려받고 있다. 고구려는 민족 이동 초기에 한반도를 개척한 씩씩한 기상(氣像)을 물려받은 웅용(雄勇)한 부족이었기 때문에 웅혼(雄渾)한 서사문학이 특히 발달하여 많은 설화문학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또 한반도의 동남과 서남쪽에 위치한 신라와 백제는 풍요한 자원과 온화한 기후에 만족한 생활을 누리면서 살았기 때문에 특히 서정적인 가요문학이 발달했다.

[편집] 중세 라틴어 문학

三國文學-展開 삼국시대에 있어 문화 교류의 중요한 기틀이 된 학자는 유교문화뿐 아니라 불교문화의 큰 힘을 입게 되었는데, 불교의 전래는 그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되었다. 고구려는 제19대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에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이 보낸 중 순도(順道)를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가 전래되었다. 백제는 제15대 침류왕(枕流王) 원년(384)에 동진(東晋)으로부터 들어온 인도의 중 마라난타(摩羅難陀)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고, 신라는 눌지왕(訥祗王=재위 417-457) 때 고구려의 승 묵호자(墨胡子)가 민간에 전래하고, 법흥왕(法興王=재위 514-539) 때 이차돈의 죽음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이후 불교는 거의 천년간 한민족의 신앙을 지배하여 찬란한 불교문화를 이룩했고, 이 때부터 한문과 같이 들어온 유교와 고구려 말에 들어온 도교(道敎)의 사상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정신적·사회적 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다.

[편집] 성자전

三國時代-漢文學 기원전 2세기경 한자가 전래된 이후 2천여 년간 한문화가 파상적인 영향을 끼쳐 모든 면에서 우리 고유 문화는 쇠잔·위축된 반면 또 새로운 외국 문화의 수용(受容)으로 고도의 세련된 문화를 이룩한 것도 사실이다. 애초에 문자를 가지지 못한 한민족(韓民族)이 한문화와 함께 전래된 한자의 사용으로 이제까지 구송된 역사·문학을 정착시켰다. 처음 한민족은 한자에 대하여 고대 동방에 새로운 광명을 가져온 한족(漢族)의 찬란한 문화의 상징으로서 애써 배웠을 것이며, 유(儒)·불(佛)·선(仙) 삼교의 심오한 교리는 또한 인생의진리와 대결하는 무기가 되었다. 또한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솟구치는 시정을 서술하는 데 한문학은 한문자와 아울러 삼국의 귀족을 매료(魅了)시키고 여기에서 이식의 문학으로서의 한문학이 싹트고 꽃피게 되었다.

[편집] 성 알렉시스전

[편집] 무훈시

高句麗-漢文學 삼국 중 중국에 가장 가까운 고구려는 대략 3세기인 산상왕(山上王=재위 196-227) 때부터 위(魏)·오(吳)와 교통했으므로 많은 문물과 함께 한적(漢籍)을 가져왔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 일례로 광개토대왕 비문(廣開土大王碑文)이 남아 있어 그 웅대한 판도와 아울러 찬란한 문물을 짐작케 한다. 또 기록에 의하면 애초에<유기(留記)> 백 권의 사기(史記)가 있었는데 영양앙 때에 이문진이<신집(新集)> 5권으로 줄였다고 한다. 또한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오언고시(五言古詩)<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는 대국(大國)인 수(隋)나라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던 늠름한 무인다운 면목이 엿보인다.

[편집] 롤랑의 노래

[편집] 역사작품

百濟-漢文學 백제는 육상(陸上)으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나중에는 해상으로 중국과 연락하여 문화 교류가 활발했고, 중국의 동오(東吳), 왜(倭)와도 교역하여 그 문화적 수준이 높았다. 근구수왕(近仇首王) 1년(375)에는 박사(博士) 고흥(高興)에 의하여<서기(書記)>가 이루어졌고, 그 당시 박사 왕인(王仁)은 일본에<천자문(千字文)><논어(論語)>를 전래시켜 일본 문화에 획기적인 변혁을 가져오게 했다.

[편집] 남프랑스 서정시

新羅-漢文學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 비슷한 시대에 한자가 전래되었으리라고 추측되나 신라의 거칠부(居柒夫)가<국사(國史)>를 수찬한 것은 진흥왕(眞興王) 6년(545)이므로 백제보다 2세기나 뒤졌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한문학 작품인 진덕여왕(眞德女王)의<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은 비록 굴욕적인송시(頌詩)이나 외교문학의 소산으로 현재까지 전한다. 또 한문학의 전래와 함께 당나라에 많은 유학생들을 보내어 새로운 지식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힘썼다. 그리하여 이름이 전하는 한문학자로서는 태종무열왕 때의 강수(强首)를 비롯하여 제문(帝文), 수진(守眞), 양도(良圖), 풍훈(風訓), 골번(骨番) 등이 있고, 신라<국사>를 수찬한 거칠부 등은 그 사적은 없어졌으나 영원히 이름을 기억할 만한 사람들이다.

[편집] 궁정풍 문학

李文眞 (생몰연대 미상) 고구려 제26대 영양왕 때의 태학박사(太學博士). 왕 11년(600)에 왕명으로 그 때까지 나온 책을 간추려 쓴<신집(新集)> 5권을 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책은 전하지 않는다.

[편집] 트리스탄 이야기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이 611년 수나라 장수 우중문(于仲文)에게 지어 보냈다는 오언절구(五言絶句). 이 시를 받은 우중문은 때마침 피로하고 굶주려 전의(戰意)를 잃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니 이 틈을 타서 을지문덕이 추격하여 살수(薩水), 곧 지금의 청천강에서 대승(大勝)했다 한다. 그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신기한 계책은 천문을 헤고 교묘한 계산은 지리를 꿰뚫었네. 싸움에 이겨 공이 하마 높았으니 만족하고 이만 그쳐 주게나.)

[편집] 크레티앵 드 트로와

王仁 (생몰연대 미상) 백제의 학자.근구수왕 때 일본에서 아라타와케(荒田別) 등을 보내어 학자와 서적을 청하자 왕의 손자 진손왕(辰孫王)과 함께<논어> 10권과<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오진 천황(應神天皇)의 태자를 가르쳐 일본에 한문학을 일으켰다. 그의 후손들은 일본의 서부 고치(河內)에서 살았다.<고지키(古事記)>에는 이름이 와니키시(和邇吉師)라 기록되어 있고,<니혼쇼키(日本書記)>에는 와니(王仁)라 기록되어 있다.

[편집] 교훈문학

高興 (생몰연대 미상) 백제의 학자. 375년(근구수왕 1)에 박사가 되어 백제에서 최초로 역사책<서기(書記)>를 썼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그는 또 의약(醫藥)·시귀(蓍龜)에 의한 관상술·음양오행술(陰陽五行術)에도 능했다 한다.

[편집] 장미 이야기

[편집] 풍자문학

居柒夫 (생몰연대 미상) 신라 진흥왕 때의 대신으로 성은 김씨. 일명 황종(荒宗)이라 함. 내물왕의 5대손으로 545년(진흥왕 6) 대아찬으로서 왕명으로<국사(國史)>를 수찬했으나 지금 전하지 않는다. 551년에는 백제와 연합, 고구려를 공략하여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철령) 이남의 10여 군을 빼앗고 576년(진지왕 1) 상대등(上大等)이란 벼슬에 올랐다.

[편집] 여우 이야기

신라 진덕여왕(재위 647-654)이 650년(진덕여왕 4년)에 법민(法敏)을 시켜 당나라 태종(太宗)에게 지어 보냈다는 한문 오언시(五言詩).이 시는 사대(事大)의 예의를 갖추어 당나라의 환심을 사기 위한 아첨문학(阿諂文學)의 효시(嚆矢)이기는 하나 신라 외교술의 문학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 시풍(詩風)은 비록 한문이지만 아름답고 풍치가 깃들여 신라 한문학의 수준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삼국사기>와 중국의<전당시(全唐詩)>에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大唐開洪業 巍巍皇猷昌 止戈戎衣定 修文繼百王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 深仁諧日月 撫運邁時康 幡旗何赫赫 鉦岐何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淳風凝幽顯 遐邇競呈祥 四時和玉燭 七曜巡萬方 維嶽降宰輔 維帝任忠良 五三成一德 昭我唐家皇"

[편집] 파블리오

[편집] 결혼의 열다섯 가지 재미

[편집] 신백화

[편집] 북프랑스 서정시

强首 ( ? -69) 신라의 한학자·문장자. 초명은 두(頭), 내마(奈麻) 석체(昔諦)의 아들. 어릴 때부터 한문학에 뛰어나 벼슬길에 오른 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654년(태종무열왕 1년)에 당나라에서 온 어려운 국서(國書)를 쉽게 해석, 그 답서(答書)를 유창하게 지어 왕의 신임을 얻었다. 성품이 본래 청렴하여 집안이 가난했고, 문무왕 때는 외교문서를 능숙하게 다루어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 또 설총(薛聰)과 함께<구경(九經)>을 풀이했다고 한다.

[편집] 비용(프랑수아)

說話文學 일찍이 북방에 자리잡은 고구려는 최초로 한반도를 개척하여 들어온 웅혼(雄渾)한 기상과 함께 광활한 국토를 지배한 활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그 문학적 성격도 정적인 서정문학보다는 동적인 서사문학을 이룩해 놓았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나 일찍이 나라가 망하고 또한 그 문헌을 불살라 버린 외적 조건으로 고구려는 백제와 함께 이렇다 할 문학적 업적을 전할 수 없었다. 웅건한 고구려의 벽화(壁畵)와 함께 그 문학의 수준도 짐작할 수 있으나 나라가 망하자 문헌적 유산도 인멸의 비운을 겪게 되니 예술도 민족·국가와 더불어 융성하고 전통을 살릴 수 있음을 직감케 한다. 고구려의 시가는 앞서 소개된<황조가> 외에<내원성가(來遠城歌)><연양가(延陽歌)><명주가(溟州歌)> 등이 문헌 가운데 전하고 있으나 그 가사는 전하지 않고 줄거리만이<고려사(高麗史)> 삼국속악조(三國俗樂條)에 적혀 있을 뿐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나라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멸할 때 문헌의 진보함에 놀라 불살라 버렸다 하니 애석할 따름이다. 다만 고구려의 대표적 설화인<온달 설화><미천왕 설화>를 비롯하여 몇 개의 설화는 고구려 설화문학의 귀중한 유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그 외에도 질투를 하다 가죽 주머니에 담겨 죽은<관나부인(貫那夫人) 설화>, 나랏 돼지를 잡으러 갔다가 도읍지를 발견하고 주통촌녀(酒桶村女)를 발견하고 혈통을 이을 왕자를 낳았다는<교축일 설화>, 낙랑(樂浪)왕 최리(崔理)의 딸과 결혼하여 그 나라의 수호적인 자명고(自鳴鼓)를 파괴케 하고 마침내 싸움에 이긴<왕자호동(王子好童) 설화>, 활을 잘 쏘며 주춧돌 밑에 감추었던 단검(斷劍)을 발견하고 부왕(父王)을 찾아보았다는<유리태자(類利太子) 설화> 등은 모두 고구려의 설화문학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백제의 대표적 설화로는<도미전>이 전해 오고 있다.

[편집] 극문학

歌謠 우선 백제의 가요를 살펴보면 지리적으로 아늑한 위치에서 생활했으므로 그들의 문화도 찬란했을 것이나 문헌의 유실로 그 모두를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백제 시가의 일부는 고려·조선를 통하여 궁중가악(宮中歌樂)으로 불리기도 했는데,<고려사> 악지(樂志)나<증보 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악학궤범(樂學軌範)> 등의 문헌에<선운산가(禪雲山歌)><무등산가><지리산가(智異山歌)><정읍사(井邑詞)> 등의 민요를 전하고 있다. 백제인들은 온화하고도 치밀하여 음악을 좋아했고, 역대의 왕들은 모두 노래를 좋아하여 그 가락이 청신하고 화려했다. 또 신라의 노래는 유리왕 때의<도솔가>에서 시작되어 가악(歌樂)적인 형태의 조화를 이루게 되었고 1세기의<회소곡><돌아악(突阿樂)>, 3세기의<사내악(思內樂)><물계자가(勿稽子歌)>, 5세기의<우식악(憂息樂)><치술령곡><대악>, 6세기 말-7세기 초의<실혜가(實兮歌)><해론가(奚論歌)><원사(怨詞)> 등의 곡명을 전하다가 7세기에 이루어졌다고 전해지는<서동요(薯童謠)>에 이르러 비로소 향찰(鄕札)로 정착되었다. 같은 시대에 이루어진<혜성가(慧星歌)>, 7세기 중엽에 이루어진<풍요(風謠)>까지는 민요적인 형태를 보여주면서 삼국통일기에 위치한 7세기 말에 이르러 향가의 독특한 형태인 사뇌가가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또 이 향가는 처음에 가요의 성질상 유동문학으로 존재했을 것이나 향찰이나 표기 수단을 빌어 정착되었을 것이며 그 문학적인 성격도 분명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