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I·세계문학·논술/북서-중부 유럽 문학/독 일 문 학/16·17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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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16·17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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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편집] 16·17세기문학
高麗後記-歌謠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 이후 무신(武臣)들이 집권함에 따라 문신은 산간에 숨어 술을 벗삼아 은둔생활을 하게 되었으나 고려 중기부터 여진·요(遼)·금(金)·원(元)나라 등 끊임없는 외적의 침입은 옛것에 대한 망각과 새로운 퇴폐적 사조를 불러일으켰다. 향가 같은 고도의 서정시보다 민요적인 속요(俗謠)가 궁중 유연(遊宴)에 쓰이게 되었으며, 고종 시대의<한림별곡(翰林別曲)>도 어떤 서정적인 정서보다도 리듬의 도취가 앞선 느낌이다. 고려 가사(歌詞)의 대부분이 간직하고 있는 여음(餘音)의 존재는 이런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다. 더욱이 음사(淫詞)의 존재는 향락적인 생활에 도취하던 왕과 더불어 고려사회가 지배층인 귀족계급과 피지배 계층인 일반 민중간에 양극(兩極)으로 분열된 증거라 할 수 있다. 유·불·선 삼교가 공존하던 고려사회는 정신적인 깊이와 육체적인 방일(放逸)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전례화(典禮化)한 조선과 같이 까다로운 예법도 없고 사람이 죽으면 다비(茶昆)에 붙인다는 허무감은 고려인의 심리 속에 어떤 분열을 가져왔을 것이다. 이렇게 고려문화는 복잡 다양한 문화 유형을 형성하면서 현실 속에서 겪은 인간의 왜소(矮小)한 좌표를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마음의 여유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고려가요는 다양한 폭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민요적인 다양한 성격에서 연유된다. 그 중 풍류와 애정에 관한 것이 많은데 풍류는 문인의 노래에서, 애정에 관한 것은 민요가 대부분이다. 별도로 풍요(風謠)가 있고, 불찬(佛讚)·참요(讖謠)·송가(頌歌)가 존재했는데 이들은 제각기 시가의 유형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고려 제23대 고종(재위 1214-1259) 때에 거란·몽고 등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특히 1231년부터 여러 차례 몽고의 침입을 받고 강화(江華)에 천도(遷都)하여 28년간이나 항쟁했다. 전후(前後)를 통해 몽고의 화(禍)를 입은 40년간은 고려문화의 난숙기로 당시 상류계급의 사치와 함께 새로운 가요 형식으로 등장한 경기체가(景幾體歌)<한림별곡>은 한림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 때에는<쌍화점(雙花店)><사룡(蛇龍)><쌍연곡><태평곡(太平曲)><만수산(萬壽山)><양화사(揚花詞)> 등의 노래 이름이 전하고 있으나<쌍화점>의 가사만이 현존한다. 제27대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 1332-1339) 때에는 안축(安軸)의 작<관동별곡(關東別曲)><죽계별곡(竹溪別曲)>의 경기체가와 채홍철(蔡洪哲)의<자하동(紫霞洞)><동백목(冬栢木)>이 전한다. 다음 충혜왕(忠惠王, 재위 1330-1332, 1339-1344)도 주색(酒色)과 방탕(放蕩)을 일삼아 기강(紀綱)이 문란했으며,<후전진작(後殿眞勺)> 같은 음사도 이런 생활의 직접적인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충목(忠穆), 충정(忠定), 공민왕(恭愍王) 때에 이르러 왜구를 물리친 수자리 병사가 노래한<장생포(長生浦)>를 비롯해'장단(長端)송산(松山)'의 민요와<목자득국(木子得國)> 외에 몇 개의 참요가 있으나, 이는 문학의 권외에 속하는 것들이다. 민요 이외의 고려가요의 서정시적 형태 발전에서<정과정곡>까지는 향가의 흐름에 속하며, 고종 때부터는<한림별곡>과 장가(長歌=歌辭) 등에 있었으며 말기에 이르러 몽고의 침입 이후부터 신곡(新曲)·신조(新調) 등의 형태가 나타나매, 시조(時調) 즉 그 당시의 단가(短歌)가 발생하여 새롭고도 고유한 가요를 형성하게 되었다. 고려 말에 형성된 시조의 몇몇 작가 중에 조선 태종(太宗)인 방원(芳遠)과 정몽주(鄭夢周)가 서로 응수했다는 단가<하여가(何如歌)>와<단심가(丹心歌)>는 고려가요의 말기를 장식하는 노래이다.
[편집] 틸 오이렌피겔
[편집] 루터
高麗歌詞-文學的意義 고려 시가의 명칭은 고려 가사·고려가요 또는 고려 장가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다.<한림별곡><관동별곡><죽계별곡> 등 한문계의 시가는 경기체가 또는 별곡체라 부르고,<청산별곡><서경별곡><만전춘(滿殿春)><정석가(鄭石歌)><이상곡(履霜曲)><쌍화점(雙花店)><가시리> 등의 시가는 흔히 속요라고 분류해서 부른다. 아무튼 고려문학은 한문학이 그 주류적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우리 문학은 민속 문학적 위치에서 겨우 그 명맥을 보존 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연향곡(宴享曲)으로 전래하여 조선 중엽에 편찬된<악학궤범><악장가사>에 실려 있는<쌍화점><동동(動動)><서경별곡><청산별곡><만전춘><이상곡><정석가><사모곡(思母曲)><가시리><처용가(處容歌)> 등은 조선에 와서 덧붙인 가사도 있겠으나 대개 고려의 유음을 그대로 간직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이 노래들은 대개 순간적인 향락 추구에서 퇴영적인 생활감정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고, 표현 기교에서도 순진하고 솔직하며 또한 관능적이고 음일(淫佚)한 수사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시어(詩語)가 소박하면서도 세련되어 있고, 리드미컬한 운율, 기발한 착상(着想) 등은 마땅히 고려 문학의 절창(絶唱)을 이루기에 충분하다. 또 가사가 전하지 않는 가요 속에서도 이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시가 작품이 많았으리라 추측되나 가사를 볼 수 없어 유감이다.<청산별곡>의"살어리 살어리 랏다 청산에 살어리 랏다. 머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 랏다 …"에서 볼 수 있는 소박한 표현,<서경별곡>에서"구스리 바회예 디신달 깃힛단 그츠리잇가. 나난 즈믄해랄 외오곰 녀신달 신(信)잇단 그츠리잇가" 하는 표현에서 함축미와 함께 면면한 정서와 고려 여인의 애절한 사랑을 보게 된다. 또<가시리>의"잡사와 두어리 마나난 섣사면 아니 올셰라. 셜은 님 보내압 노니 나난 가시난 닷 도셔오쇼셔"의 표현에서 가사의 유창함과 절절한 애원, 그리고 기발한 착상은 가히 절창이라 할 만하며,<만전춘>의"어름우희 댓닙자리 보아 님과 나와 어러주글 만뎡 情둔 오날밤 더듸 새오시라"와 같이 안타까운 사랑의 해후(邂逅)와 함께 농도(濃度) 짙은 관능의 불꽃을 보게 된다. 또한 고려가요 속에는 초속(超俗)한 인생관이 담긴 선(禪)적인 관조가 그대로 나타나 무르익은 불교문화가 허물어지는 과정에서 하나는 정신적으로, 하나는 육체적인 것으로 변형(變形)되었음을 보여준다. 고려사회를 뒤흔든 외적의 침입과 아울러 불교가 계시해 주는 피안사상(彼岸思想) 속에서 현실의 괴리(乖離)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 체관과 퇴폐의 양상(樣相)을 우리는 문학 속에서 역력히 볼 수 있다. 또<청산별곡>을 통해 고려 청자의 빛깔 속에 깃들여 있는 유현(幽玄)함을 맛보게 되는 것도 고려가요가 그만큼 세련되고 유창했음을 말해 준다.
[편집] 작스
現存-歌謠 고려 이전의 국문으로 정착된 가요는<악학궤범><악장가사> 및<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 수록되어 전하는데 그 숫자만도 21편에 이른다. 비록 이 가요들은 조선에 들어와 당시의 언어로 약간은 윤색(潤色)되었다 하더라도 고려 이전의 가요 원형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학 유산이다. 먼저<악학궤범>에는<동동><정읍사><처용가><정과정곡> 등 4편,<악장가사>에<정석가><청산별곡><서경별곡><사모곡><쌍화점><이상곡><가시리><한림별곡><만전춘> 등 9편,<시용향약보>에<유구곡(維鳩曲)><나례가(儺禮歌)><상저가(相杵歌)><성황반(城皇飯)><내당(內堂)><대왕반(大王飯)><삼성대왕(三城大王)><대국(大國)> 등 9편, 계 21편으로 몇 편의 가요는 서로 중복되어 수록되어 있다.
[편집] 오피츠
景幾體歌 고려 중엽 정중부의 난에서부터 최충헌(崔忠獻) 등의 무신이 장기 집권함에 따라 문신은 산간에 도피, 정치에 대한 의욕을 잃은 채 은둔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지러운 세태에 실의(失意)하여 문신들은 주회(酒會)를 통한 유흥과 도피적이고도 퇴폐적인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가체(歌體)를 형성하게 되니 이것이 곧 경기체가이다. 경기체가는 별곡체라고도 하며 경기하여가(景幾何如歌)라고도 하여 시대적으로 고려 고종 때부터 조선 중엽까지 계속된 일종의 긴 연시(聯詩)이다. 이 경기체가는 순 한자로 표기하면서 중국 사(詞)의 영향과 한시(漢詩)의 리듬을 교묘하게 절충시킨 것이다. 향가의 유음을 잊고, 민요나 속요에 만족하지 못한 당시 귀족 문인들이 창작해 낸 독특한 형태의 문학이며, 주로 양반들의 유흥 향락적인 생활감정을 시로 나타낸 고답적인 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 형식은 분장 가사(分章歌詞)로 한 연(聯)이 2절로 나누어지고'경긔(景幾) 엇더하니잇고' 또는'景幾何如'라는 후렴구가 있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 기본 자수율(字數律)은 3·3·4조이다. 이 노래의 명칭을 경기체가 또는 경기하여가라 하는 것은 후렴에'景幾 엇더하니잇고' 또는'景幾何如'가 있기 때문이다. 고려 때의 작품으로는<한림별곡><관동별곡(關東別曲)><죽계별곡(竹溪別曲)>이 있으며,<한림별곡>은 13세기 중엽 고종 때 여러 한림들의 합작이고,<죽계별곡>과<관동별곡>은 여말의 문인 안축(安軸)의 작품이다. 이 경기체는 13세기 중엽부터 조선시대인 10세기 중엽까지 300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조선에 와서는<상대별곡(霜壹別曲)><화산별곡(華山別曲)><화전별곡(花田別曲)><독락팔곡(獨樂八曲)> 등의 작품이 있다. 이 경기체가는 조선 때 들어와서부터 점차 그 형식과 내용이 파괴되어 가더니, 임진왜란으로 인해 양반 계급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자 몰락하고 새로운 가사로 변천하였다.
[편집] 그림멜스하우젠
別曲·別曲體'별곡'이라 하면 본래 있는 어떤 곡과는 별다른 곡이라는 뜻이며, 또한 중국의 가곡을 정곡(正曲)이라 한 데 대하여 우리나라 시가를 부르는 말이다. 시가의 형태적인 면에서'별곡'과'별곡체'는 별도의 것으로 곧<서경별곡>은 고려 속악인<서경곡(西京曲)>과는 전혀 다른, 같은 이름의<서경곡>을 나타내는 듯하며, 그러나 이'별곡'이란 명칭은 뒤에 우리말의 노래란 뜻으로 쓰였다. 다음'별곡체'는 이른바'경기체가'의 이름이니, 고려 고종 때부터 한문화에 완전히 압도, 침식되어 우리의 고유문학이 사라진 뒤 귀족, 양반, 문인들이 한시 아닌 새로운 우리 시가를 지어 보려고 애쓴 나머지 발생한 시가이다. 즉 무관(武官)들에게 권세를 빼앗긴 문신들이 산간에 도피하여'기로회(耆老會)' 또는'죽림칠현(竹林七賢)' 등의 교계(交契)를 맺고, 자연에 파묻혀 한가히 잔치놀이를 베풀고 읊었던 경기체가가 바로 이 노래이다.<한림별곡>의'별곡'이란 이름은 중국 시가와 같은 운(韻)이나 가락이 없이 된 한국의 독특한 시가란 뜻이며, 따라서 별곡체는 중국 시체(詩體)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시체란 뜻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별곡'은 순 우리말로 된 노래의 명칭을 말하며,'별곡체'는 한문체의 노래임이 크게 다른 것이다.
[편집] 바보 이야기
현존하는 최초의 경기체가.고려 고종 때 한림(翰林)의 여러 선비들의 합작으로 모두 8장으로 이루어짐. 고종 때는 정중부가 집권, 무신의 전횡(專橫)시대라 문신들은 정치의 일선에서 물러나 무신들의 문객(門客)으로서 무신들의 호화로운 연락(宴樂)에 참여, 현실에 영합하는 등 퇴폐적인 향락에 취하거나 산수간에 시주(詩酒)를 벗삼아 현실 도피적인 풍류를 일삼았다.<한림별곡>은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귀족 양반 계급의 현실 도피에서 오는 은둔적이고 향락적인 풍류생활을 별곡체의 음률에 맞추어 노래한 기악(妓樂)의 가사이며, 귀족·한림 사이를 풍미한 한문체의 문학이다. 각 장은 시부(詩賦)·음악·누각(樓閣)·서적(書籍)·명필(名筆)·명주 (名酒)·화훼(花卉)·추천 등의 순으로 노래했다. 각기 명문(名文)·명집(名集)·명필·명주·명화(名花)·명악 (名樂) 등 당대의 명류(名流)를 늘어놓아 노래함으로써귀족들의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생활감정과 풍류생활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끝연에 이르러 치정(痴情)의 절정으로 대단원을 맺는다. 가사의 형식은 구투(舊套)를 벗어나 종래의 악부(樂府)나 사곡(詞曲) 등 중국 시가의 형식인 별곡체의 독특한 운율과 구법(句法)을 사용했다. 곧 전편 8연의 각 연은'엽(葉)'을 경계로 전후 2강(腔)으로 나뉘며, 4구 후강 2구, 모두 6구체로 되어 있다.<한림별곡>은 1연이'334·334·444·334·4444·334'로 그 기본형을 이루고 있다.<한림별곡>이 귀족의 신체가요(新體歌謠)로, 공사(公私)의 연석이 성행함에 따라 이 별곡체는 고려·조선를 통해 많은 모방을 보게 되었다. 즉 고려 충숙왕대 안축이 지은<관동별곡>과<죽계별곡>은<한림별곡>의 형식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며, 조선에 들어와서는<한림별곡>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새로운 가사 형식을 취하여 이를 계승·모방했다.<한림별곡>의 가사는 고려사 악지와<악학궤범><악장가사>에 전하는데,<고려사>에 수록된 가사는 한문과 이두로 되어 있다. 가사 중 하나를 들면 다음과 같다.(백과사전 22권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