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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외교[편집]

〔서설〕 韓國-外交〔序說〕

한국외교의 환경적인 조건은 결코 유리한 것이 아니었다. 전통적으로 볼 때 한국의 지리·정치·기술 및 이념의 제반 요소는 근대국가체제와의 경쟁 내지 갈등 상황 속에서 적응해 나가기가 매우 불리하였다. 이와 같은 환경적 여건 때문에 한국은 국제환경을 자국에 유리하게끔 개선하거나 혹은 이에 영향을 주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상대적인 제약성에 의하여 외세(外勢)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한국의 외교사는 ① 갈등과 자기고립의 시기(1948∼60년), ② 내정의 혼란과 변화의 시기(1960∼61년), ③ 자아의식과 시련의 시기(1961∼1980년)와 현재(1980∼1990)로 구분될 수 있다.

갈등과 자기고립의 시기(1948∼60년)[편집]

葛藤-自己孤立-時期

한국은 동·서간의 냉전(冷戰)이 시작된 초기에 수립된 국가였기 때문에 당시의 한국의 외교정책은 냉전의 양상을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다. 또한 한국의 외교정책은 한국동란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반공노선(反共路線)이 더욱 뚜렷이 반영되었다.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의 집권기(1948∼60년)는 한국 외교정책의 형성기인 동시에 시련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 집권시기의 외교정책의 특징은 ① 철저한 반공주의(反共主義)를 표방하는 외교정책, ② 중립국이나 중립노선을 표방하는 국가에 대한 적대주의 외교정책, ③ 철저한 반일주의(反日主義)의 표방, ④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우방 국가와의 우호증진정책, ⑤ 유엔의 통한결의한(統韓決議案)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정책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상의 정책을 공고히 하고 한국만이 대한민국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과시하기 위하여 채택한 할슈타인(Hallstein) 원칙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외교정책의 중요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할슈타인 원칙이란 '두 개의 한국'을 거부하는 정책으로, 한국과 외교관계를 가진 국가가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경우 한국은 국교관계의 단절을 불사한다는 강력한 보복정책이다. 그러나 이 원칙은 다행스럽게도 196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적용(適用)될 만한 사건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한국의 안보외교(安保外交)는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이를 보완하고 있는 유엔참전 16개국 선언과 '박·닉슨' 공동성명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1954년 11월 17일에 발효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목적은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즉 첫째, 공산주의자들의 침략행위의 재발을 방지한다는 것과 둘째, 미국은 한국의 안보에 대한 관심을 공식조약의 형태로 표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약 3조에 명시된 '헌법적 절차에 의한' 출병(出兵)이란 구절은 한·미간의 관계에 상당한 문제점을 야기시키고 있다. 여기에도 유엔참전 16개국의 선언도 점점 그 효력에 있어서 의문을 야기시키는 상태에 놓여 있다. 물론 이 선언은 그 효과면에 있어서 공식조약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혼란과 변화의 시기(1960∼61년)[편집]

混亂-變化-時期

갈등과 고립의 시기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정권(李政權)의 외교정책은 지나치게 탄력성을 결여한 견고하고 일방적인 정책이었기 때문에 시시로 변천하는 국제정세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 당시(1948∼60년)의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정책이 그 나름대로 한국의 국가이익에 공헌해 온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여기서 부언해 두어야 할 것은 이정권이 붕괴되기 전까지의 국제정세의 변동이 다행스럽게도 이정권의 붕괴후의 변동 속도보다 느렸다는 점이다. 그러나 1950년대 말경에 이정권은 외부의 변화에 대한 민감도가 지나치게 둔하다는 빈축을 면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한국 외교정책의 신축성은 1960년 4월 19일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임시 내각의 수반(首班)과 외무장관을 겸하고 있었던 허정(許政)은 건국후에 처음으로 대일정책(對日政策)과 대중립국정책(對中立國政策)의 재조정에 관한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강조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집권한 장면(張勉) 국무총리도 탄력성 있는 한국 외교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정권 당시의 구호였던 북진통일(北進統一) 정책을 배격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은 유엔헌장에 입각한 한반도의 총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통일정책이 강조되었다.

자아의식과 시련의 시기(1961∼80년)[편집]

自我意識-試鍊-時期

허정 과도정권을 이은 장면(張勉) 정권의 외교목표는 사실상 이행되지 못한 채 5·16 군사정변을 맞았다. 당시 군사정부의 혁명공약에 나타난 외교정책 부분을 보면 과거의 정책과는 다른 일면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군사혁명정부는 경제력의 증강과 반공결의의 공고화에 의한 국토통일의 목표달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혁명정부의 외교정책은 1963년에 5·16 군사정변의 주체였던 박정희(朴正熙) 장군이 대통령에 피선됨으로써 더욱 뚜렷이 부각되었다. 제3공화국의 박정권(朴政權)은 3개의 외교정책의 목표를 이행하려고 하였다. 즉 박정권은 첫째 중립노선(中立路線)을 표방하고 있는 국가와의 외교관계 수립, 둘째 경제외교(經濟外交)의 강화, 셋째 일본과의 관계정상화 추진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한국의 외교정책을 현실화시키는 한편 한국외교의 방향전환에 기틀을 제공했던 것이다.

특히 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초반은 세계정치의 격변기였다. 따라서 한국 외교정책의 시련기이기도 한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 한국과 미국은 동북아시아의 안보문제에 사실상 동일한 견해를 취해 왔었다. 이 지역에 있어서의 미국의 정책목표는 중국과 북한을 군사적으로 봉쇄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한국은 판문점(板門店) 휴전협정 이래 미국의 냉전목표의 테두리내에서 안보정책을 형성해 왔다. 그러나 월남전으로 가속화된 미국내의 여론과 1960년대에 세계 도처에서 파생된 변화는 세계구조의 점진적인 변모를 야기시켰다. 이러한 국제적인 권력구조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미국의 '닉슨 독트린'은 동북아시아의 안보문제에 대한 견해차를 드러냈다. 미국은 한국의 반대와 한국군의 파월(派越)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주둔한 미군병력을 1개사단 감축시키고, 비무장지대(DMZ)의 경제지역에 배치되었던 전방미군사단을 후방으로 옮겼다. 이와 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한국으로 하여금 한국의 안보는 한국 자체의 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고 동시에 한국의 대미일변도(對美一邊倒) 정책을 재검토하게 만들었다.

한국은 이미 1960년대의 국제 역학구조 변화에 대비하여 1966년 아시아·태평양 각료회의를 중심으로 지역협력에 노력하였다. 그 당시 한국은 이 지역기구가 포괄적인 역할을 담당하도록 의도하여, 정치·경제·문화를 포함하는 장래의 통합기구로 구상하였다. 따라서 한국은 이 기구 자체를 지역안전 방위체제로 유도하려고 노력했으나 일본·말레이시아·뉴질랜드 기타 회원국의 반대로 문화 및 경제협력기구로 만족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특히 1970년도 초경부터 동북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아시아·태평양 각료회의의 성격을 전환시키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국제적인 상황은 다른 분야의 외교정책에도 계속적인 변화를 강요했다. 한국의 대유엔정책은 1960년의 제15차 유엔총회에서 인도네시아가 제의한 남북한 동시 초청안을 계기로 계속 시련을 겪어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비록 한국은 유엔에서 북한의 한국문제 토의를 계속 봉쇄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이러한 제안들이 문제도 되지 않았던 1960년도 이전의 유엔외교와 비교해 보면 상당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제15차 유엔총회에서 유엔주재 미국 대사였던 스티븐슨이 제안한 '스티븐슨안(Stevenson案)'은 북한의 한국문제 토의 참여는 어디까지나 북한이 유엔의 권위와 권능을 수락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단서로 붙여 두었다. 북한은 이러한 제의를 거부함으로써 유엔에서의 한국문제 토의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변화에 따라 1960년에 조정되었던 한국의 대유엔정책은 1971년에 이르러 재조정되었던 것이다. 한국은 제26차 유엔총회 때부터 운영위원회를 통한 한국문제 토의의 연기를 종용하였으며, 제27차 총회에서도 같은 방법을 채택하여 한국문제 토의를 연기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정책의 성공은 남·북적십자회담의 진행에 장애를 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많은 회원국들이 유엔에서 한국문제를 토의할 경우, 남북간에는 새로운 긴장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고 일반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따라서 유엔에서의 한국문제 토의는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하에 놓여 있다. 즉 2차대전 이후 지금까지 누려오던 유엔에 의한 단일 합법정부의 특권이 1960년대에 접어들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여 1970년대에 와서는 유엔을 도외시해야만 되도록 변해버린 것이다. 연례 행사처럼 한반도 문제가 상정되어 한국측에 유리한 결의안을 통과시키던 유엔이 1973년에는 북한측 대표가 참석하게 되어 언커크를 해체시켰으며, 1975년에는 서방측의 주한 외국군 주둔안과 공산측의 외군 철수 결의안이 동시에 통과되는 사태까지 빚었다.

세계 외교무대의 발판으로 삼고 있던 유엔의 분위기가 이렇게 바꿔지자 한국은 아예 유엔에서의 한반도 문제 토의를 저지하는 정책을 펴기에 이르렀다. 다만 공산측에서 먼저 한국에 불리한 결의안을 제출할 경우에는 이를 저지시키기 위한 별도의 상정안을 낸다는 것이 당시 한국 유엔외교의 기본자세였다.

국제정세의 바로미터인 유엔의 변화에 따라 한국 외교는 유엔총회 그 자체보다 비동맹·중립지역의 국가들과 깊은 유대를 갖는 방향으로 차츰 전환해 가고 있다. 따라서 한국이 오랫동안 고수해 왔던 할슈타인 원칙은 더 이상 유리한 외교전략이 아니었으므로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즉 우리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가 비록 북한과 수교를 해도 단교까지는 취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로 북한과 수교중인 중립·비동맹 국가와 외교관계를 갖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비동맹 국가와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위해서는 이미 1975년 페루의 리마에서 열린 비동맹회의에 가입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가입신청을 제출한 북한은 승인되었으나 한국은 거부당하였는데 그 이유가 한국의 대미·친서방 편향 및 베트남 전쟁참전에 대한 비동맹국가들의 배타였음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동안 지나치게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집착해 있던 한국의 외교정책은 북방외교 선언을 기점으로 공산권 국가와의 수교 및 '86 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개최 등을 통해 보다 적극적이고 다각적인 측면에서의 외교에 나섰다. 또한 1991년 남북한 공동 유엔가입과 1996년 OECD에 가입하면서 이제는 유엔 185개 회원국 중 GNP 11위의 중견국가로 성장했다.

국제환경 변화와 한국외교[편집]

國際環境變化-韓國外交

국제환경과 국가간의 관계에서 영향을 주기보다는 영향을 받는 경향이 더 강한 약소국들의 경우, 외교 정책을 결정하는 데 있어 선택의 범위가 극히 한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의 외교 정책은 이념적 요인, 지정학적 요인, 국가 건설 과정에서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외세의 개입과 그로부터 파생된 국가의 성격과 행위 범위의 제약 등 국제환경으로부터 투입되는 여러 가지 제약을 받고 있다.

그러나 국제환경의 변동 과정에서 국가의 안전보장 및 위신, 국민의 경제 복지, 민족 통일 등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외교정책결정자들의 노력들을 살펴볼 때 한국의 외교 정책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보이고 있다.

첫째, 한국의 외교 정책에서 이념의 중요성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즉, 건국 후 6·23선언까지 한국의 외교 정책은 반공 이념에 의해 강력히 지배되어 왔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과 국력 신장으로 인해 남·북한간의 역학 관계가 역전되고, 국제환경의 탈이념화 추세에 힘입어 1970년대부터 경제 실리에 비중을 크게 두면서 외교 정책에서 탈이념화가 뚜렷한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최근의 변화는 국제 사회의 구조적 변화도 중요하게 작용했지만, 한국 국민들의 민주화 운동에 따른 정치 체제 전반의 민주화의 영향도 크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외교 정책의 결정 과정과 내용도 합리적 모델에 수렴할 것이다.

둘째 특징으로 내용의 다양화를 지적할 수 있다. 즉, 생존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안보 문제 위주에서 국민 복지에 관계되는 경제·통상 문제, 국가의 위신에 관계되는 문화·체육, 산업화의 진전과 국제사회에서의 활동영역 확대에 따른 자원·환경 문제 등으로 건국 초기보다 외교 정책의 내용이 풍부해졌다.

셋째,외교 상대 국가의 다변화를 지적할 수 있다. 미국 일변도에서 일본, 유럽,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 구·현 사회주의권 국가 등 외교 상대국의 수가 현저히 늘어났다. 그리고 그들과의 외교 관계가 기능적으로 휠씬 더 긴밀해졌다.

넷째, 한국 외교의 주체가 한편으로는 전문화되면서 동시에 비정부 차원의 기관들의 역할이 중요시되는 다원화 현상이 보이고 있다. 즉, 외교 사안들이 복잡해지고, 외교 활동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전문 직업 외교관의 역할도 중요시되지만, 해당 영역의 민간 외교 활동의 활성화도 뚜렷이 보인다. 그런데 지방 자치가 실시되면서 권려과 기능의 분산으로 이런 추세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다섯째, 외교 정책에서 여론 및 사회 단체의 비중이 증대되고 있다. 즉, 외교 정책의 내용이 국민들의 일상 생활과 이익에 직접 관계되는 사안들로 확대되고, 민주화에 따른 정치 체제의 투입 기능이 신장됨에 따라 특정 외교 사안에 직·간접적으로 관계되는 국민들의 입장이 정책 결정에 반영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이 유엔이 가입하여 평화 유지군을 파견하고, 안보리 이사국 가입을 내다보는 등, 국제 무대에서의 주체적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국제사회에서 그 위상이 현저히 신장되었다. 그리고 대미·대일 외교에서도 과거보다 주체적 역량이 크게 신장되었다.

그러나 한국 외교 정책은 이와 같은 긍정적 변화와 함께 다음과 같은 과제들을 안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민족 통일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북한과의 평화 공존의 제도적 장치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남북기본합의서가 실천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대북한 및 대외 정책을 전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한·미 양자 체제로 한반도에서의 전쟁 방지에 부족함이 없었을지 모르나, 냉전 체제의 붕괴, 한국의 러·중과의 수교 등으로 안보 환경이 이미 변했고, 남·북한 관계가 진정한 평화공존을 추구할 만큼 진전되면 한·미 양자 체제는 한계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동북아 다자간 안보 협력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도 외교적 노력을 경주해야 될 것이다.

경제·통상 부문에서 국제 경쟁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민·관 합동으로 종합 계획을 수립하여 합작 투자·기술·자본 진출 등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전방위 외교를 전개해야 될 것이다.

현재까지 한국의 대외 정책에서 가장 미약했던 부문이 문화 외교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나, 국제시장 점유율과 상품의 등급을 고려할 때 문화 외교에 혁신적인 강화 노력이 있어야 될 것이다. 특히, 한국의 대외 이미지가 일본의 문화 외교에 의해 가려지거나 왜곡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