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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족의 유래〔槪說〕[편집]

한민족(韓民族)의 기원과 형성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만족할 만큼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실제로 민족의 종족적 구성과 문화의 기원이란 문제는 자료 결핍으로 말미암아, 문헌(기록)만으로는 인식하기 어려운 것이고,

고고학·인류학·언어학·신화학(神話學) 등 인접 과학의 종합적 연구가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고고학을 비롯한 이러한 과학을 원용(援用)한 한민족의 연구가 우리나라에서는 뒤늦게 시작되었고, 게다가 고고학 외에는 이 분야에 대한 업적이 적은 편이었다.
한편 일반 사가(史家)들도, 제각기 '전문 분야의 연구 과제가 산적(山積)'한 관계로, 이 문제에 대한 연구는 일반적으로 적었던 듯하다. 그런 중에도 근년(近年)에는 고고학·인류학 등에 대한 연구에 진전을 보고 있으며, 또 이들의 연구 성과와 문헌(연구)의 성과를 종합하는 경향이 보이고 있어, 앞으로의 결과가 기대되는 것이다.
한민족은 보통 단일 민족이라 하나, 학문 상으로 엄밀히, 단일 인종 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라, 그 중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수개(數個) 이상의 다른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즉 한인(韓人)·몽골인·만주인(滿洲人)·왜인(倭人) 기타 남방[폴리네시아]계통 등 요소가 포함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고 하여 '혼잡다이(混雜多異)한 복합체'라고는 할 수 없으며, '한민족으로서의 주(主)된 기본적 요소'는 언제나 '지배적 지위'를 가지며, 여기에 또다른 요소가 가미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한민족을 다른 민족에 비해 순수한 단일 민족이라 할 수 있는 점일 것이다.

한민족의 근간(根幹)은 몽골족·만주족·터키족(土耳其族)=> 즉 ‘우랄 알타이어(語)’ 계통족(系統族)과, 공통된 먼 공동조상(共同祖上)에서 분파(分派)된 일족(一族)이라고 생각되며, 그것이 문헌 상으로 '한(韓)이나 예맥(濊貊)'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믿어진다.

이들은 '중국 북방'에서 '만주와 한반도에 살던 선주민(先住民)들을 구축'하면서, '동으로 이동하여 왔던 것' 같다.

여기에서 '선주민'이란 '구석기 시대인'과 '즐문 토기 문화인(櫛文 土器 文化人)'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한국의 구석기 문화 유적지로는 함경북도의 동관진(潼關鎭)과 굴포리(屈浦里)·부포리, 충청남도의 공주 석장리(石壯里) 등지에 불과하나 앞으로 한강과 낙동강 및 수원·안성 등지이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석장리(유적)'이라고 '최근에 논의되는'바, 이곳에는 '전기·중기·후기(선주민)들이 거쳐간 흔적'이 '보인다고 지적'된다. 
이 유적의 4·5층의 것은 15만년 이전의 전기 구석기로, 그 위층의 중기 구석기 문화는 410만년 전으로 추정되며,

또한 후기 구석기 문화층에 속하는 상층은 방사선탄소측정법에 의하면 30,690년 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이 '3기의 인종이 같다고 볼 근거'는 없으며, 각 '시기의 인종은 그때마다 멸망'했거나 '타지로 이동해 갔을 가능성'도 있다.
이 같은 '구석기 문화가 상당한 기간 지속'되었고, 그 후 '신석기 문화[즐문토기 문화]인들이 '북쪽에서 이주하여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신석기 문화'는 약 '5천년 전에 시작'되어, '기원전 6,7백년 쯤'에 '청동기(시대)'로 '들어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즐문토기 문화이고 즐문토기는 기본적으로 바이칼호(湖) 지역의 시베리아 토기 문화에 연결된다.
그 부족이 주로 하천 유역에서 어로(漁撈)를 생활 수단으로 하였던 점으로 보아, '인종적'으로 '현~시베리아~고아시아족(古Asia族)'으로 '생각하는 견해'도 있으나, 이보다 먼저 '만주와 한반도에 정착한 예맥인'들이 '시베리아 토기 문화(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데'서 '즐문 토기를 사용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즐문토기(유적)은 '광범하게 분포'되어, '한때는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서 번성'하였다고 하겠으며, 나아가

'일본의 규슈(지방)'이나 '오키나와(지방)'에도 번지고 있다하겠다.

즐문토기 문화와 무문토기 문화(無文土器文化)와의 시간적 관계는, '두 문화가 층위적(層位的)으로 발견된 유적이 없기 때문'에,
'선후(先後)를 단정할 수'는 없겠으나, '현재까지의 연구'로 보아 '기원전 7세기 경'까지의 '즐문토기인'들은 그 '이전부터 서쪽에서 대량으로 이주하여 오는 무문 토기[문화인]들에게 정복'되었거나, 혹은 '연해주(沿海州)~시베리아(지역)으로 구축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등장하는 '무문 토기 문화인들이 오늘날의 한국 민족의 근간이 된다 할 수' 있으며, 이들이 '예맥이라고 불린 종족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예맥의 원주지(原住地)는 중국의 북방'이었으며, 이곳에서 '허베이(河北)의 구청현(固城縣) 방면'으로 옮겨가, '한 줄기는 중국 산둥(山東) 방면으로 내려'갔고, 또한 줄기는 다시 동으로 가,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분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각처에 거주하던 예맥이 중국인들에게 동이(東夷)라는 범칭(凡稱)으로 불리었던 것이다.
이들이 동으로 이동하게 된 이유는 보다 생활 조건이 좋은 곳을 찾게 되었다는 점도 있지만 한편, 서쪽으로부터 한(漢)족의 동천(東遷)과 서북으로부터 흉노(匈奴)의 압력 때문인 것 같다. 이리하여 적어도 기원전 10세기 전부터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정착하기 시작한 예맥은 북방적 요소가 강한 청동기문화를 수용하면서 각처에서 부족국가를 건설하여 갔던 것이다.
그 중에도 가장 먼저 정치적 세력을 성장시킨 것이 대동강 유역에 정착한 예맥족이었고, 이들이 고조선(箕子朝鮮)을 세운 것이다.
한편 중국의 산둥 방면으로 남하(南下)한 예맥의 일파는 산둥 반도로부터 화이쓰(淮泗) 유역에 걸쳐 거주하면서 진(秦)에 의하여,

'중국이 통일될 때까지 동이 지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때 이들이 '남긴 신화나 설화(說話)'가 바로, '산둥성 자샹현(嘉祥縣)의 무씨 사당(武氏 祠堂) 석실(石室)의 벽화'와 '서언왕 설화(徐偃王 說話)'였다.

이 중, '무씨사당 석실(武氏祠堂 石室)의 벽화' 내용은 '고조선의 단군 신화'를 나타내며,
'서언왕 설화(徐偃王 說話)'는 '고구려의 주몽 설화(朱蒙 說話)와 대비'되며, 이들은 같은 계통의 신화로 생각된다.
더욱이 '고고학 적'으로도 '무문 토기인들의 분묘: 지석묘(支石墓)·석상분(石箱墳)·옹관묘(甕棺墓)의 분포'는 '만주나 한반도 및 산둥 반도(지방)에 미치고' 있어, '이들과의 관련'을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