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중부지방-남부지방/서울특별시/서울의 사회·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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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서울의 사회·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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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우리나라 문화활동의 중심지가 되고 있으며, 수많은 각급 교육기관을 비롯하여 도서관·박물관·신문사·출판사·방송국과 기타 문화시설들이 집중되어 있다.서울은 2002년말 현재 8개의 학구(學區)에 542개의 초등학교 357개의 중학교와 204개의 인문고 및 78개의 실업고가 있다. 또 대학 41개교, 교육대학 1개교, 방송통신대 1개교, 산업대 1개교, 전문대 12개교 등이 있다.도서관은 23개 소가 있으며, 장서(藏書) 100만여 권을 가진 국립도서관과 국회도서관, 그리고 공공 및 대학도서관이 있다. 국립박물관을 비롯하여 60여 개의 박물관이 있다. 그 외 국립미술관과 민속박물관·국립극장·세종문화회관·예술의 전당 등의 문화시설이 있다. 또한 132개의 국보(國寶), 380개의 보물, 61개소의 사적(史蹟), 11개의 천연기념물, 32개의 무형문화재, 46개의 중요 민속자료 등이 전기한 여러 시설에 잘 보전되어 있다. 또한 경복궁·창덕궁·덕수궁·종묘 등의 고궁과 어린이대공원, 서울대공원, 용산가족공원 등이 있어 시민들과 외국 관광객들에게 좋은 휴식처와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운동경기장으로는 동대문·효창 운동장과 장충체육관 등이 있고, 잠실에는 종합운동장, 상암동에는 서울월드컵경기장이 있다.
목차 |
[편집] 경복궁
景福宮 조선왕조의 건립에 따라 창건되어 초기에 정궁으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폐허로 남아 있다가 조선 말기 고종 때 중건되었다. 이성계가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이때의 궁의 규모는 390여 칸으로, 수조지소(受朝之所)인 근정전(勤政殿)이 5칸에 상하층 월대(越臺)와 행랑·근정문·천랑(穿廊)·각루(角樓)·강녕전(康寧殿) 7칸 등이 조성되었다.
[편집] 덕수궁
德壽宮 임진왜란 뒤 선조(宣祖)가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였는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1897년(고종 34) 고종(高宗)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큰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1905년 즉조당(卽祚堂)·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다.1906년 대안문(大安門) 이 수리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고 정문으로 삼았다. 1907년(순종 1) 순종(純宗) 즉위 후 고종은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편집] 창덕궁
昌德宮 조선시대 임금이 상주하며 정치를 하던 궁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1912년부터는 창덕궁의 후원인 비원(秘苑)과 아울러 인정전(仁政殿) 등의 중심부와 낙선재(樂善齋) 등을 일반에게 공개 관람시키고 있다. 창덕궁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고궁이며, 특히 비원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궁궐후원이라는 점과 우리나라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편집] 경희궁
慶熙宮 경희궁은 광해군 9년인 1617년에 창건된 이후, 8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부지 7만 2천8백 평에 정전, 동궁, 침전, 별당을 비롯해서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다.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이다. 그나마 초석과 기단이 남아 있고,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잘 보전돼 있어 궁궐의 자취를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편집] 창경궁
昌慶宮 고종 때까지 본래의 웅장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으나, 일제가 궁 안에 일본식 건물을 세우고, 궁궐 전체를 동식물원, 박물관 등을 설치하여 유원지로 조성하였다. 1983년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이름을 되찾았으며, 동물들은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지고, 궁 안에 있던 벚나무는 모두 뽑아 없앴다. 이제 창경궁에서 벚꽃을 찾기 어렵다. 대신 잘 가꿔진 소나무가 볼만하다. 특히 춘당지 뒤쪽의 <한국자생식물화단>은 한국식물로서 월동이 가능한 중부지방 자생식물을 모아놓은 화단으로 세계적 희귀식물인 미선나무를 비롯해 400여 종 600여 포기가 심어져 있어 도시 어린이들이 자연생태를 익힐 수 있는 공간이다. 창경궁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장희빈을 처형한 일과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일 등 크고 작은 궁중 비극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편집] 남산
南山 높이 262m이며 대부분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북쪽의 북악산(北嶽山), 동쪽의 낙산(駱山), 서쪽의 인왕산(仁旺山)과 함께 서울의 중앙부를 둘러싸고 있다. 목멱산(木覓山)·종남산(終南山)·인경산(仁慶山)·열경산(列慶山)·마뫼 등으로 불렸다.정상에는 조선 중기까지 봄과 가을에 초제(醮祭)를 지내던 국사당(國祀堂)과, 통신제도의 하나인 봉수제(烽燧制)의 종점인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 또 남산 주변에는 조선시대에 축성된 도성(都城)의 성곽 일부가 남아 있다.
[편집] 사육신 공원
死六臣公園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1445)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왕이 되자 이에 불복하고 단종 복위에 힘쓰다 목숨을 잃은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을 모신 곳이다. 이들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고자 숙종 7년(1681) 민절서원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전해오다가, 1955년 5월에 육각의 사육신비를 세웠다.1978년 서울시에서 사육신의 충의 정신을 기리고자 묘역을 확장해 공원화하였다.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그 안 좌우로 신도비, 1955년에 세운 육각비, 불이문을 들어서면 의절사가 있으며, 각종 편익시설도 구비되어 있다.
[편집] 사직공원
社稷公園 조선 태조가 한양에 수도를 정하고 궁궐, 종묘를 지을 때 함께 지은 사직단이 있는 곳으로 1921년 사직단 주변이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사직단은 태조3년(1934)에 고려의 예를 따라 토신을 제사하는 국사단을 동쪽에, 곡신을 제사하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치하고 신좌를 북쪽에 모셔 만들어 1년에 세 번 제사를 지냈다. 사직단 입구에 있는 사직단 정문은 보물 제17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건평 17.4평으로 단층맞배지붕이다.또 사직공원 내에는 단군성전, 시립종로도서관이 있으며 매년 전국 규모의 활쏘기 대회가 열리는 황학정이 있다. 황학정은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5호로 고종 광무2년(1898) 어명에 의하여 경희궁 회상전 북쪽에 지었던 것을 1922년에 현위치로 옮긴 것이다. 한말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마지막 궁술연습장이었던 황학정은 건평 59㎡에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이며 우측으로부터 2칸 추녀 밑에 황학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편집] 탑골공원
塔-公園 사적 제354호. 서울 최초의 근대공원이다. 조선 세조 13년에 원각사로 건립하였던 것을 고종 34년인 1897년 도지부 고문인 영국인 브라운이 공원으로 조성하여 1920년에 개원하였다. 1919년 3·1운동의 발상지로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곳이다.1992년 5월 28일 공원 명칭을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독립운동 봉화에 불을 당겼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 국보 제3호인 원각사비 등의 문화재와 3·1운동 기념탑, 3·1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
[편집] 북한산 국립공원
北漢山國立公園 1983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북한산 국립공원은 북한산과 도봉산 전역을 포함하며 총 면적이 78.45㎢에 달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공원의 동남쪽은 도봉구·성북구·종로구·은평구의 4개 구에 북서쪽은 경기도 고양시·양주군·의정부시에 속한다.북한산은 예로부터 한산·화산·삼각산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왔으며 북한산이라 불리게 된 것은 조선조 중종 때 북한산성을 축성한 뒤부터라고 추정된다. 북한산 국립공원은 지형적으로 볼 때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산맥으로 이루어졌으며 우이령을 경계로 하여 북쪽으로는 도봉산 지역, 남쪽으로는 북한산 지역으로 크게 나뉘어진다.남쪽의 북한산 지역은 최고봉인 백운대를 정점으로 주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북으로는 상장봉, 남으로는 보현봉에 이르며 다시 사방으로 굵직한 지능선을 뻗쳐 웅장한 산세를 이룬다. 특히 북한산 국립공원 전체의 중심에 높이 솟아 그 웅장함을 자랑하는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와 노적봉 일대의 암봉군은 북한산 경관의 으뜸으로 꼽힌다. 북한산의 다른 이름인 삼각산도 북한산을 멀리서 볼 때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 등 세 개의 높은 암봉이 마치 뿔처럼 날카롭게 솟아 있는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북한산 국립공원에는 숙종 37년(1711)에 축성한 북한산성과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선사, 조선 중종 때 신월 선사가 창건한 화계사, 신라의 고찰 승가사·진관사·망월사 등의 유적지가 있다.
[편집] 한강시민공원
漢江市民公園 한강을 옛날과 같이 깨끗한 강으로 되살리자는 목표로 1982년 9월부터 한강종합개발이 이루어져 1986년에 사업을 끝냄으로써 서울지역 41.5km의 구간(하일동-개화동)이 평균 수심 2.5m, 강너비 1km의 살아있는 강으로 변했다. 아울러 강변에 시민 휴식공원과 축구장, 배구장, 농구장, 수영장 등 각종 체육시설과 수상스키장, 요트장, 보트장, 낚시터, 주차장 등을 갖추어 시민들의 오락·휴양지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 한강 시민공원은 크게 광나루, 잠실, 뚝섬, 잠원, 반포, 이촌, 여의도, 양화, 망원 등 9개 지구로 나뉘어 있다.
[편집] 올림픽공원
Olympic 公園 올림픽공원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곳으로 6개의 경기장이 있는 체육공원과 벡제 초기 문화유적인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한 부분으로 크게 나뉜다. 올림픽공원은 야외조각공원을 비롯하여 88놀이마당, 음악 분수 등과 같은 휴식공간이 조성되어 있다.몽촌토성은 사적 제297호로 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북쪽의 한강과 남쪽의 남한산성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는 몽촌토송의 비탈면에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어 사철 푸른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주요 시설로는 사이클·역도·펜싱·체조·수영 등 6개 경기장과 올림픽회관, 올림픽 파크텔, 몽촌 역사관 등 각종 편익시설이 구비되어 있다.
[편집] 도봉산
道峰山 도봉산은 우람한 기암괴석과 뾰족이 솟은 바위 봉우리들이 장관이며, 사방으로 뻗은 계곡을 따라 녹음이 우거져 있다. 면적은 24㎢로 북한산의 55㎢에 비해 등산로가 더 조밀하다. 최고봉인 자운봉(739.5m)을 비롯해서 만장봉·선인봉·주봉·관음봉·오봉·우이암 등 암벽이 아름답다.
[편집] 관악산
冠岳山 관악산(해발629.1m)은 한남정맥이 수원 광교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한강 남쪽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우뚝 솟은 산이다. 서울 남쪽 외곽에 위치하며, 산봉우리의 모양이 불과 같아 풍수적으로 화산이 된다. 빼어난 수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고 오래된 나무와 온갖 풀이 바위와 어우러져 철따라 변하는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 하여 소금강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이라고 한다.
[편집] 수락산
水落山 수락산은 도심과 가깝고 산행하기에 알맞은 높이(637m)의 산이다. 대부분 돌산으로 화강암의 암벽이 노출되어 있지만 산세는 그다지 험하지 않다. 수목이 울창하지 않은 대신 동쪽의 금류동·은선동·옥류동의 세 폭포가 있어 사시사철 끊임없는 등산객들이 찾아든다. 봄이 되면 불암산과 잇닿은 쪽의 능선에는 철쭉이 만발해 산행이 더욱 즐겁다. 수락계곡과 노원골 일대 11km 산책로는 삼림욕하기에 좋은 곳이다.
[편집] 아차산
峨嵯山 서울과 구리에 걸쳐 있는 아차산은 해발 300m밖에 되지 않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삼국시대의 전략요충지로 특히 온달장군의 전설이 전해져 온다. 학문적 고증과는 상관없이 이 지역 주민들은 온달장군이 아차산에서 전사했다고 믿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아차산에는 ‘온달샘’이라 불리는 약수터와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지름 3m의 거대한 공기돌이 있다.대성암 뒤에는 의상대사가 수련을 했던 곳으로 알려진 천연 암굴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밖에 석곽분, 다비터, 봉수대, 강신샘 등이 있다.
[편집] 인왕산
仁王山 높이 338m. 정상에 서면 서울 중심가와 청와대 부근이 한눈에 보인다. 바위산이기 때문에 조망도 좋고 기차바위·치마바위·매바위·범바위·이슬바위·모자바위·선바위·지렁이바위 등이 저마다 기이한 모습들을 뽐내고 있다.
[편집] 국립민속박물관
國立民俗博物館 경복궁 안에 있다. 조상들이 남긴 민속자료를 모아 보관하는 곳으로 제1전시관에서는 한민족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데, 선사시대 각종 생활도구에서부터 청동기시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의 인쇄와 조선의 한글창제 등에 대한 자료를 복원, 전시하고 있다. 제2전시관은 생활민속과 문물 등 의·식·주를 살펴볼 수 있으며, 제3전시관에서는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의 일생에 관한 자료들이 구성돼 있다. 또한 신라의 안압지, 황룡사 9층탑, 경복궁 근정전 등의 모형도 있다. 박물관 주변 이곳저곳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돌하루방, 연자방아 등의 전시물들이 있다.
[편집] 국립중앙박물관
國立中央博物館 1908년 창경궁 내의 이(李)왕가박물관으로 출발한 국립중앙박물관은 2, 3, 4층 전시실에 10만 점에 이르는 우리 나라의 역사, 고고학, 미술사, 민속 등에 관한 자료가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으며, 총 소장품 7,000여 점에 21개의 상설 전시실, 2개의 기획전시실을 가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유물전시뿐만 아니라 각종 문화강좌도 열린다. 도자기를 직접 만들어보는 도자기 교실을 비롯해서 박물관 교실, 토요 공개강좌 등이 있다.
[편집] 궁중유물전시관
宮中有物博物館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르네상스식 석조건물로 대한제국 때 외국사신들의 접견장으로 쓰였던 궁중유물전시관은 조선시대 임금에서 궁녀에 이르기까지 궁중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을 전시해 놓았다.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관으로 나뉘어 10개의 전시실 중 2층에는 악기류와 정치경제, 과학자료, 오례의, 궁궐건축, 궁중의식과 관련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3층에는 어보, 어책류, 공예품, 궁중 복식 및 장신구류, 회화류, 동궐도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관람 시간은 대략 1~2시간 정도, 음성안내기를 대여하여 들으면 더욱 깊이 있는 관람을 할 수 있다.
[편집] 서대문형무소역사관
西大門刑務所歷史館 1919년 백범 김구 선생은 일제로부터 17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면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청사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여보고 죽게 하소서”라고 기원했다.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김구·강우규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거쳐갔던 옛 서대문형무소 보안과 청사와 옥사로 사용하던 곳이다. 역사현장으로 보존키 위해 옥사와 사형장, 망루와 시구문 등을 원형대로 복원했다.
[편집] 세종대왕기념관
世宗大王紀念館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여 이를 길이 보존하기 위해 1970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준공하였다. 전시관은 한글실, 과학실, 국악실, 일대기실로 구성된다. 한글실은 세종대왕 당시 펴낸 도서류를, 과학실은 과학 관계자료(금속활자 판자기, 수표측우기 등)를 전시하고 있으며 <국악실>은 국악기류를 전시하고 있다. <일대기실>은 김학수 선생께서 수년 동안 그린 ‘세종대왕 일대기 그림’ 14폭이 전시되어 있어 세종대왕의 치덕을 살펴 볼 수 있다.
[편집] 전쟁기념관
육군본부 자리에 들어선 전쟁기념관은 지하 2층, 지상 4층 건물로, 6천여 평 정도의 전시관을 갖추고 있다. 호국추모실, 전쟁역사실, 한국전쟁실, 해외파병실, 국군발전실, 대형장비실 등으로 구성된 7개의 실내 전시실과 옥외 전시실에는 1만 3천여 점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는데, 각 전시실에는 선열의 정신이 담긴 벽화부조, 조형물, 각 전투의 기록화, 각종 무기장비 등이, 옥외 전시실에는 세계 각국의 대형무기 1백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전쟁체험실은 한국전쟁 당시의 야간 전투 상황을 영상·음향·진동·포연·조명·화약냄새 등의 특수효과로 연출해 전쟁터에서의 긴장된 극한 상황과 장병들의 투혼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전쟁기념관 양쪽 화랑에는 한국전쟁과 월남전쟁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전쟁기념관의 녹지공원에는 인공호수와 휴식공간들을 조성해 놓았다.
[편집] 서울의 인물
-人物 서울을 빛낸 인물은 3천여 명이 된다. 대표적으로 몇몇 인물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편집] 유형원
(1622~1673) 조선시대의 실학자. 호는 반계(磻溪). 한성 태생으로 벼슬을 하지 않고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학문에 일생을 바쳤다. 특히 스스로 농촌 생활에서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잘못된 사회 제도와 경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유교적 윤리와 정치의 시정을 바탕에 둔 사회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성리학을 비롯하여 정치·경제·역사·지리·군사·언어·문학에 이르기까지 학문의 범위가 매우 넓었다. 그의 중농적 실학 사상은 이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정약용에 이르러 발달되었다. 토지 개혁을 중심으로 한 사회 개혁을 주장했으므로 중농적 실학자·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자라고 불린다. 저서로 반계수록 기행일록 주자찬요 '경세문답' '정음지남' 등이 있다.
[편집] 박종화
(1901~1981) 소설가. 호는 월탄(月灘). 1920년 휘문 의숙을 졸업하였다. 졸업하던 해 문학 동인지 '문우'를 발간하면서부터 문학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1922년 '백조'의 동인으로 활약하면서 시와 소설을 발표하였다.1924년 처녀 시집 '흑방비곡'을 발간했고, 그 후'시인' 등을 쓰면서 소설로 전향했다.1935년 장편 '금삼의 피'를 '매일신보'에 연재하면서부터 역사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그 후 '아랑의 정조' '다정불심' 등 많은 역사 소설을 발표했다. 1954년 예술원 회원, 이듬해 원장이 되었다. 1964년 문인 협회 이사장을 지냈고, 1965년 ‘월탄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통일원 고문, 통일 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이 되었고, 문학박사 학위와 문화 훈장 대통령장, 5·16민족상과 국민 훈장 등의 상을 받았다. 작품으로 '여인천하' '임진왜란' 등이 있다.
[편집] 맹사성
(1360~1438) 조선 초기의 문신. 호는 고불(古佛). 황희와 더불어 조선 초기의 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청렴 결백하였을 뿐 아니라 시문·음악에도 능하였다.'태종 실록' 편찬을 감독했고, '팔도지리지'를 편찬하고 당시의 향악(鄕樂)을 정리하였다.
[편집] 박팽년
朴彭年 (1417~1456) 조선 세종 때의 문신. 호는 취금헌(醉琴軒). 1434년 문과에 급제,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가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세조가 즉위한 다음 해인 1456년, 형조 참판의 자리에 있으면서 성삼문·하위지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사형당했다. 사형시키기 전에, 세조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서 마음을 돌려 보려고 하였으나, 흔들리지 않았다. 뒤에 아버지와 동생, 아들까지 사형당했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글씨로 「취금헌 천자문」이 전한다.
[편집] 김굉필
(1454~1504) 조선 중기의 학자. 호는 한훤당(寒暄堂). 김종직의 문하에서 '소학'을 읽고 스스로 ‘소학동자’라 일컬었다. 평소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성리학에 능하였으며 실천 궁행을 위주로 하는 학자였다.1498년의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일파라 하여 희천으로 귀양 갔다가, 귀양지에서 조광조에게 자신의 학문을 전해 주었다.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다.저서로 '한훤당집' '경현록' 등이 있다.
[편집] 방정환
아동문학가. 호는 소파(小波). 묘가 망우리묘지(묘지번호 203703)구리 지역에 있다. 17세 때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 취직했으나, 이곳이 토지조사사업을 담당하여 조선인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곧 사직하고 천도교청년회, 개벽사(開闢社), 천도교소년회 등 천도교와 관련을 맺었다. 이후 청년문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활동하면서 어린이 운동에 열성을 보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자신의 집에서 등사판으로 '독립신문'을 발행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1921년 서울에서 ‘천도소년회’를 만들었다. 한편 방정환은 전국 순회강연을 하였는데, 강연내용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것이었다. 이때 그는 아동을 지칭하는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었다.1923년에는 월간 '어린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아동잡지를 창간했고, 이어 동경에서 어린이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했다.1957년 그를 기리기 위해 ‘소파상(小波常)’이 제정되었으며, 1978년 금관문화훈장, 1980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1983년 어린이날 망우리 묘소에 「소파방정환 선생의 비(碑)」가 건립되었으며,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에 그가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되었다.
[편집] 이문열
(1948∼) 소설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중퇴하고 1977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입선한 뒤 '대구매일신문' 편집기자를 지냈다. 이어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새하곡(塞下曲)'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같은 해 중편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전개하여 1980년대에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그의 소설의 특징은 탄탄한 구성과 문장의 탁월함으로, 자전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주요작품으로는 '젊은날의 초상(1981)' '황제를 위하여(1982)' '영웅시대(1987)' '변경(邊境)' 등이 있으며 '사람의 아들' '그해 겨울' '금시조(금시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소설집과 번역서인 '삼국지'와 '수호지'가 있다. 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