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계약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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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계약설, 정치적 권리의 원칙
지은이: 루소
   역자: Anii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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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1762년 논문인 《사회 계약설, 정치적 권리의 원칙》에서 불가분하고 양도될 수 없는 국민주권의 개념을 토대로 새로운 개념의 계약설의 윤곽을 드러내었다. 주권의 불가분하고 양도될 수 없는 특성은 루소의 대의제에 대한 반감과 직접민주제에 대한 옹호를 나타낸다. 루소의 이론은 개인주의인 로크의 자유주의적 관습과 많이 유사하지만 또한 어떤 주요한 부분에서는 차이점도 있다. 루소에 의하면, 개인은 이기주의자가 될 수 있고 공동체의 이익을 짓밟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 개인은 "일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이기심을 제쳐둔다. 국민의 주권은 전체로서 사회의 선한 것을 결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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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편집] 제1 권

나의 목적은 어떤 합법적인 그리고 확실한 정부의 원리가 존재하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나는 항상 권리와 이익이 상호대립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항상 통합적으로 보고자 한다.

내가 정치에 관한 서술을 하려는 것에 대해서 누군가는 내가 군주나 입법자가 아닌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그것이 내가 그렇게 연구하는 이유라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군주나 입법자였더라면 나는 나의 시간을 낭비하면서 무엇을 해야 된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 나는 그것을 직접 해야 되거나 아니면 침묵해야 할 것이다.

나는 자유로운 국가의 시민으로 태어났으며, 그 정치 체제의 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투표를 해야 한다는 그 사실로 인해서 나는 공공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 속에서 나의 영향력은 아주 미미하다. 그리고 내가 정부에 대해서 숙고할 때마다, 나는 나의 연구가 나의 국가를 찬양해야 할 신선한 이유를 주기 때문에 행복하다.

[편집] 제1 장 이 책의 주제

사람들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에서나 쇠사슬에 묶여있다. 그들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은 참으로 그들 노예보다 더 노예이다. 이러한 변형은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 나는 모른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합법적인 것일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해서는 나는 대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내가 만약 단지 힘과 그 힘의 영향력에 대해서만 고려한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 "사람들이 복종하게끔 강제되는 한 복종하면 ‘힘’이라는 것은 그 역할을 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 그 억압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그 힘이라는 것은 더욱더 자신의 역할을 잘 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자유를 제거한 자와 동일한 권리를 갖는 것에 의해서 사람들이 권리를 되찾게 된다면 사람들은 그들이 되찾은 권리를 정당화하게 되고 반대로 그들의 권리를 빼앗은 자들은 정당하지 못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질서(the social order)는 모든 다른 권리의 기초적인 역할을 하는 신성한 권리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적 권리가 아니므로 사회적 계약(covenants)에 기초를 둔 것이어여야 한다. 문제는 그러한 무엇을 사회적 계약으로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기 이전에 나는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을 구체화해야만 하겠다.

[편집] 제2 장 최초의 사회

모든 사회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한 자연적인 사회는 ‘가족’이다. 즉 아이들은 그들이 그들의 보존을 위해서 필요로 하는 한 자연적으로 그들의 아버지에게 묶여져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이러한 필요가 끝나는 순간, 자연적 속박은 해제되게 된다. 아이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지고 있는 복종의 의무로부터 해방되고 아버지는 자식들에 대해 질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 양쪽 모두 똑같이 그들의 독립을 얻게된다. 그들이 계속해서 결속되어 있는 상태라면, 그것은 그들을 결속하고자 하는 그들 자신의 선택에 의하지 않고서는 자연스러운 것이 못 된다. 그리고 또한 그와 같이 선택에 의한 결속이라는 것은 동의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다.

이 일반적인 자유는 인간 본성의 결과이다. 인간 최초의 법칙은 그들 스스로를 돌보는 것이다. ; 그의 가장 최초의 보존은 그 자신에게 속해있다. ; 그리고 그가 이성을 가지고 생각할 나이에 접어들면, 그는 그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수단에 대한 유일한 판단자가 된다. ; 그는 그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은 아마도 정치적 사회의 가장 첫 모형으로서 보여지는 것이다. 국가의 우두머리는 아버지에, 국민들은 아이들에 비유될 수 있다. 그리고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난 모두는 단지 그들의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때만 그들의 자유를 양도할 수 있다. 유일한 차이점은 가족관계에서는 자식이 아버지가 준 사랑에 대해서 되갚는 데 반해서 통치자와 시민의관계에서는 그러한 감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단지 명령의 기쁨만이 그 사랑을 대체함에 틀림없다.

Grotius는 모든 인류의 정부는 통치자의 이익에 의해서 성립되었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는 노예제도를 예로 든다. 그의 추론의 특징적 수단은 항상 권리를 증명하는데 사실을 제시하는 데 있다. 그것은 논리적인 수단을 채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나, 군주에 대해서는 그것만큼 좋은 일이 없다.

그러므로 Grotius에 따르면 인류애(humanity)가 백명의 사람들에게 속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 백명의 사람들이 인류애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의심하고 있다. 물론 그는 홉스와 같이 그의 책을 통해서 볼 때 이 관점 중에서 전자의 것을 채택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이러한 논지들은 우리들에게 인류는 소떼의 무리들처럼 나눠져 있고 단지 그 무리들의 구성원들을 먹일 목적으로 그 무리들을 보존할 주인을 각각 가지고 있다고 한다.

목자가 그의 무리들의 본성보다 더 우월한 본성을 소유하고 있듯이, 인간에게 있어서의 목자, 즉 통치자도 그들의 국민들보다 더욱 우월한 본성을 소유하고 있다. 혹은 철학자인 Calicula 황제가 결론적으로 충분히 이와 같은 분석에 합리적으로 기반을 두고 왕들은 신이요, 국민들은 동물로서 논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Calicual의 추론은 우연히도 홉스와 Grotius의 추론와 일치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들중의 누구보다도 앞서서 몇몇은 노예로서 다른 몇몇은 주인으로 태어난 것으로 보아 인간은 자연적으로 평등하지 않다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옳을지는 모르나 그는 결과를 원인으로 오해하고 있다. 노예제도 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노예로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다. - 이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 노예들은 이러한 제도하에서 모든 것을 잃은다. 심지어는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바람마저도 잃어버린다. 그들은 Ulysses의 무리들이 야수로서의 그들의 삶조차 사랑했듯이 그들의 노역을 사랑한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노예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자연을 거슬러 노예제도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힘이 최초의 노예를 만들었으며, 노예들의 그 힘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의 노예 신분을 영속화시켰다.

나는 Adam 왕, 즉 Noah 황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Adam 왕은 세 명의 위대한 군주의 아버지로서 그들은 우주를 나누어 가졌으며, 몇몇 작가들에 의해서 그들은 토성(Saturn)의 아들로 묘사되기도 했다. 나는 나의 독자가 이와 같은 적정화(moderation)을 흔쾌히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다 할지다로 Adam이 섬 안의 로빈슨 크루스와 같이 세계의 왕이었음에 대한 이견은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유일한 거주자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왕국의 큰 이점은 군주는 자신의 왕좌를 튼튼히 하면서 반역이나 전쟁, 음모를 두려워 할 경우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편집] 제3 장 강자의 권리

가장 강한자는 그가 힘을 권리로 바꾸고 복종을 의무로 바꾸지 않는 한 모든 시대를 걸쳐서 주인이 될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다. 그러므로 '강자의 권리'에서 권리는 역설적으로 들리는 경향이 있을 수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하나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강자의 권리'에 대해서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일까? 여기서 힘은 물리적인 힘이다. ; 나는 그것의 효과가 도덕성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 알지 못하지만, 힘에 복종하는 것은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기껏해 봤자 타산에 의한 행동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그것은 도덕적 의무가 되는 것인가?

잠시 이와 같은 권리가 존재한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그것이 단지 황당한 비합리적인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한번 힘이 옳은 것으로 여겨지면, 원인과 그 효과가 전치되고 다른 힘을 능가하는 힘은 피지배인들에게 속하는 그 권리들을 상속받게 된다. 사람들이 아무런 처벌도 없이 복종하지 않아도 되자마자, 그들의 불복종은 곧 합법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강자가 항상 옳다면 단지 하나의 문제는 어떻게 해서 그 강자가 되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힘에 의존하는 권리가 그 힘이 사라져버렸을 때 그 권리의 타당성은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만약 힘이 복종을 강요한다면, 의무에 복종하라고 할 필요가 없다. 만약, 힘이 복종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의무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와 같이 ‘권리’라는 것은 ‘힘’이라고 말해 지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 그것은 의미없는 것이다.

'힘에 순종하라’ 만약 이것이 ‘힘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교훈은 옳지만, 불필요한 것이다. 내가 숲의 가장자리에서 강도를 만났다면 힘은 나로 하여금 나의 지갑을 건네주게 한다. 그러나 만약 내가 어떻게든지 그럭저럭 그로부터 나의 지갑을 지킬 수 있다면 내가 여전히 그것을 줘야할 생각에 의무를 지고 있을까? 결국, 강도의 손 안에 있는 권총이 의심할 여지없이 '힘'인 것이다.

확실히 힘이란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복종의 의무는 단지 합법적인 힘에 의해서 부여되는 것이라는 것은 인정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우리들은 끊임없이 나의 근원적 질문으로 소급해 들어갈 수 밖에 없다.

[편집] 제4 장 노예제도

사람들은 그들 동료들에 대한 어떤 자연적인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힘은 그 홀로 어떤 권리를 줄 수 없는 까닭으로 인간들 사이에서의 모든 합법적인 권위는 계약에 기초해야만 한다. Grotius는 말한다. 어떤 한 개인이 그의 자유를 제거하고 주인의 노예가 되기로 한다면, 왜 전체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를 양도하고 왕의 신하가 되고자 하지는 않는가? 여기에는 설명을 필요로 하는 몇몇 애매한 단어들이 있다. 우리들이 그것을 하나로 한정해 보자. - ‘양보한다는 것’ 양보한다는 것은 주거나 판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그 자신을 그냥 주지 않고 최소한의 생명유지에 대한 대가로 그 자신을 판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우리들은 무엇으로써 사람들이 그 스스로를 판다고 할 수 있을까? 왕은, 그의 피지배인들을 부양하는 것과는 별도로, 그들로부터 그의 부양물(nourishment)를 이끌어 낸다. ; Rabelais에 따르면, 왕은 약간의 부양물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그 때 또한 피지배인들은 왕이 그들의 재산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그들의 인격을 왕에게 바치려 할까? 만약 그러하다면, 남겨서 보존할 수있는 것은 없다.

전제 군주가 그의 피지배인들에게 시민들의 평화를 확실히 보장해 줄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음.. 그러나 전제왕권의 야망의 결과로부터 파생된 다른 권력들과의 전쟁, 왕의 끝임없는 탐욕, 그의 집행장관들에 대한 가혹한 요구 등은 시민들의 투쟁이 발생시키는 것 보다 더 많은 황폐함이 존재하게 된다면, 그것이 그들을 무엇으로써 이익되게 할 것인가? 시민들의 평화로운 상태가 그들의 고충의 원인 중의 하나라면 사람들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지하감옥 속에는 평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그리스의 사람들은 Cyclope의 동굴에서 그들이 게걸스럽게 먹혀질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면서 평화롭게 살았다.

어떤 사람이 그 자신에 대한 보답으로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음은 불합리하고 생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행동은 실제로 마음이 있어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비합리적이고 무효이다. 전체 사람들에 대해서도 동일하다. 정의는 미친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만약 각 개인이 그 스스로를 양보할지라도, 그는 그의 아이들을 양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유로우며, 그들의 자유는 그들에게 속해 있다. 아무도 그들 스스로를 제외한 누구도 그들의 자유를 처분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이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접어들기 전에 그들의 아버지는 그들의 보호와 복지를 위해서 어떠한 규칙을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자유를 침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개입은 자연의 결과에 배치되는 것이며, 부권의 남용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재적인 정부는 단지 모든 세대들이 그것을 찬성 혹은 반대할 수 있을 때 합리적인 것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경우에는 독재적인 정부는 더 이상 독재적인 것이 아니다.

자유를 거부하는 것은 그들의 인간성, 즉 사람들으로서의 권리와 의무 모두의 거절을 말한다. 모든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대용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 실제로 그와 같은 거부은 인간의 본성에 배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자유에서 의지를 제거해 버린다면, 모든 행동에서 도덕적 중요성을 벗겨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한 쪽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나 다른 쪽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전제로 체결된 계약은 비합리적이고 무효의 것이라 하겠다. 모든 것을 요구할 권리를 부여받은 사람이 아무 것도 할 의무를 지니지 않는 다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리고 상호 의무 조항이 없다는 단순한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그 계약을 합리화시킬 수 있는가? 무슨 권리로 나의 노예들은 나에게 대항할 수 있는가? 그가 가진 모든 것이 나에게 속한다면, 그의 권리는 나의 권리이다. 그리고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권리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을 비상식적이라고 할 것이다.

Grutius와 그 외의 사람들은 전쟁에서 노예에 대한 권리의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승리자가 포로들을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 것은 포로가 그의 목숨을 자유와 맞바꿈으로써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교환은 그것이 쌍방에 대하여 이익이므로 더욱 더 합법성을 가진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포로를 죽일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은 전쟁의 상태로부터 추론된 것이 명백하다. 단지 이런 이유로, 독립된 원시적 상태에서 살아가는 그 사람들은 평화의 상태 혹은 전쟁의 상태 중에 하나를 만들어 낼 충분한 정식적인 상호작용을 가지지 않는다. ; 그리고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적이 아니다. 그것은 물건에 대한 투쟁이지 전쟁을 구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다툼이 아니다. 전쟁의 상태는 단순한 사람들 관계로부터 파생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재산관계에서 발생될 뿐이다. 어떤 사람과 다른 한 사람간의 개인적 다툼은 일정한 재산이 없는 자연 상태 혹은 모든 재산적 가치를 가진 것이 법의 권위 하에 있는 사회 하에서는 전쟁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적인 다툼이나 갈등과 투쟁이 어떠한 어떤 국가를 형성할 수는 없다. 루이Ⅸ에 의해서 선포에 의해서 촉발되고, ‘하나님의 평화(the peace of God)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중단된, 사적인 다툼에 관하여, 이것은 순히 봉건 정부의 권력 남용이다.

결국 전쟁이란 것은 사람들 사이의 것이 아니라 국가간의 것이다. 전쟁에서 개인은 우연히 전체적으로 적이 된다.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군인으로서 그렇다. ; 그들 국가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국가의 방어자로서 그렇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국가는 적으로서 사람들이 아닌 다른 국가를 상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다른 본질적 속성을 지는 것 사이에서는 실질적인 관계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원리들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성립된 법률과 모든 정치적 사회의 끊임없는 경험적 실천의 소산이다. 전쟁 선포는 그 국가보다 그 국가에 예속된 사람들에게 더 큰 경고가 된다. 그가 왕이던, 개인이던, 아니면 전체 국민이던 간에 다른 군주에 대한 또 다른 군주의 선전포고 없이 훔치고 죽이고 감금하는 그 외지인들은 적이 아닌 약탈자일 뿐이다. 전쟁의 중간에서 조차도 적의 영토에 있는 공공의 재산중에서 노획할 수 있는 것을 노획한 정의로운 군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생명과 개인의 재산을 존중할 줄 안다. 그는 그 자신의 권리가 기초하고 있는 그 원리를 존중한다. 전쟁의 목적이 적대적인 국가를 정복하는 것인 까닭으로, 그들이 무장되어 있는 동안 공격적인 전쟁이 그 국가의 수비자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자마자 그들은 더 이상 적이 되지 못한다. ; 그들은 단순한 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의 생명을 앗아갈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 그것은 가끔씩 적의 구성원들 중에 한 명도 사살하지 않고서 그 국가를 파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필요한 만큼의 파괴 이상으로 하는 파괴를 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원리들은 Grutius에 의해서도 발견된 것도, 시인들의 권위(the authority of the poets)에 의해서 발명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사물의 본질로부터 추론된 것이다. 그 원리들은 이성에 기초하고 있다.

정복에 대한 권리는 강자의 법규에 기초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리고 전쟁이 정복자에게 정복당한 사람들을 대량학살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와 같은 권리는 그들의 노예화를 정당화 시켜줄 수 없다. 사람들은 그들의 적을 노예화시킬 수 없을 때 그들을 죽일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일 권리로부터 노예화시킬 수 있는 권리를 도출해 내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피정복자가 승리자가 합법적으로 요구할 수 없는 생명을 교환하게 하는 것은 사악한 물물교환일 뿐이다. 노예화시킬 수 있는 권리를 전제로 한 삶과 죽음에 대한 권리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권리를 전제로 한 노예화시킬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논쟁은 논쟁의 악순환만 되풀이 하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이러한 끔찍한 대량학살에 대한 권리가 존재한다고 하면, 전쟁에서의 노예 혹은 정복당한 사람들은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강요당한 것 이외에는 더이상 그들의 주인에게 복종할 아무런 의무도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희생물의 생명과 동등한 가치물을 취함으로써 승리자는 그에게 아무런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이익도 없이 그를 파괴하는 대신에 그는 그를 착취함으로써 그를 파괴한다. 그러므로 승리자가 패배자에게 힘으로써의 승리와 더불어 몇몇 권위를 획득하는 것과는 별도로 전쟁의 상태는 계속된다. ; 그들의 상호 관계는 전쟁의 영향이다. 그리고 전쟁의 권리가 계속된다는 것은 평화 조약이 없었음을 암시한다. 확실히 하나의 조약이 만들어졌다고 하나 그 조약이라는 것은 전쟁 상태를 끝내는 것과는 별도로 그것의 지속을 예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 질문들에 대해서 살펴봐도 노예에 대한 권리는 무효이다. 무효라는 것은 그것이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비합리적 즉, 그것은 아무른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노예제도와 권리라는 단어는 상호모순적이다. 그것들은 서로를 배제한다. 한 사람과 다른 사람 사이에 혹은 한 사람과 전체 사이에서처럼 어떤 것이든 간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 "나는 여기서 당신과 함께 계약을 체결하는 데 있어 전적으로 당신이 희생하여 전적으로 내가 이익을 보도록 하자. ; 내가 기쁘하는 한 당신은 그것을 존중해야 하고, 내가 바라는 한 당신은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

[편집] 제5 장 최초의 계약으로 복귀해야 하는가?

내가 지금까지 논쟁한 것을 거부한다 할지라도 전체주의의 승자는 더 이상 좋은 것이 아니다. 다수인을 복종시키는 것과 사회를 통치하는 것 사이에는 항상 큰 차이점이 있다. 만약, 어떤 한 사람이 대를 이어서 각각의 개인을 노예화한다면, 아무리 그 숫자가 많더라도, 단지 주인과 그의 노예이며, 통치자와 피통치자가 됨을 부인할 수 없다. 확실히 사회(association)가 아니라 집단(aggregation)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공선도 아니며 정치체도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그와 같은 사람이 세상의 절반을 가진다 할지다로 그는 사적인 한 개인으로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익과 구별되는 개인적 이익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가 죽게되면 그가 남긴 제국은 조직적 연대감의 부재로 산산히 부서질 것이며 그것은 마치 불이 떡갈나무를 숲을 태워 그것이 가루로 되어 한 줌의 재로 되어 버리는 것과 같이 같다.

Grutius가 말하기를 사람들은 그 스스로를 왕에게 바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Grutius에 따르면 왕에 대한 선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사람은 사람으로서 존재한다. 그 선물 그 자체는 시민적 행위이다. 그것은 공공의 숙고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왕에게 제출한 그 조약을 고려하기 이전에 (집단적 의미의)사람이 (연대감을 지닌)사람이 되는 행위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것에 선행해서 필수적으로 존재했던 그 조약은 사회의 실제적인 기초이기 때문이다.

사실 만약 더 이른 조약이 없다면, 또한 그 선거가 만장일치가 아니라면 다수의 결정을 수용하게 하는 소수에 대한 의무부과가 어떻게 해서 있을 수 있는가? 투표할 한 명의 주인을 가지고자 하지 않는 열 명 대신에 이러한 주인을 가지고자 하는 백명에게 어떻게 권리가 주어질 수 있는가? '다수결의 원칙'은 그 자체로 여러 사람들의 동의를 거친 것으로, 최소한 하나의 경우에 만장일치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편집] 제6 장 사회계약

자연상태에서 생존에 대한 장애가 그 상태에서 자신들을 보존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힘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는 지점에 인간들이 도달했다고 생각해 보자. 이러한 지점을 넘어서 원시상태는 지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때 인류는 자신의 생존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멸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새로운 힘을 창조할 수 없고 단지 기존의 있는 힘들을 조합하고 조정할 수 밖에 없는 까닭으로, 그들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분화된 힘을 어떤 저항에 극복할 수 있도록 충분히 강한 조합으로 결합함으로서, 또한 그것을 결합해서 그들이 힘이 공중의 집회 장소에서 유일한 하나의 동기와 행동으로서 지휘됨으로서 가능하다.

그와 같은 힘의 결합은 단지 분화된 사람의 결합으로서 만들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자유와 힘은 또한 그들의 보존을 위한 주요한 수단으므로 어떻게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다른 사람의 힘과 결합할 수 있는가? 나의 현재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러한 어려움을 다음과 같은 단어들로 표현할 수 있다. :

“모든 사람들의 합쳐진 힘으로써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수 있는 사회의 형태를 찾는 법. 그리고 그 사회하에서는 각각의 사람들은 그를 다른 사람들과 결합시키는 도중에 그를 제외한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도 복종하지 않고 전처럼 자유롭게 남아 있는다”이것은 사회계약이 이에 대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문제가 된다.

이러한 계약은 행위의 본질에 의해서 조그마한 변경도 계약을 무효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정밀하게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한 것은 아마도 이전에 공식적으로 결정되지 않았더라도 그것들은 모든 곳에서 같고, 모든 곳에서 묵시적으로 수용되고 인식되어야만 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언제든지 그 계약이 위반된다면 모든 사람들은 그의 근원적인 권리를 되찾게 되고, 그가 자연적 자유(natural freedom)를 회복하면서 그가 아울러 그것을 위해서 바꿨던 시민적 자유(civil freedom)를 잃게된다.

사회에 대한 이러한 계약이 올바르게 이해된다면 하나의 말-전면적인 양도(alienation)-로 요약할 수 있다. 이와같이 태초에는 개인의 모든 것을 양도하였기 때문에 모든 측면에서 조건이 동일하다.

두 번째로, 양보라는 것이 무조건적인 까닭으로, 그 결합은 최대한 완벽할 수 있으며, 연합한 개인은 요구할 수 있는 더 이상의 어떠한 권리도 가질 수 없게 된다. ; 왜냐하면 권리가 개인에게 남겨져 있다면, 그들과 공중 사이에서 판단할 높은 권위가 없는 상태에서 각각의 개인이 몇몇 이유에서 그 스스로 자신의 사건을 판단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각각의 사람들이 그 스스로의 권리를 모두에게 준 까닭으로 그는 그 자신의 권리를 특정한 누군가에게 줄 수는 없게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를 통해서 얻은 것만큼 자신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 뭔가를 얻지 못하는 연합은 성립할 수 없는 까닭으로 각각의 사람들은 그가 잃는 것과 동등한 정도의 것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거래에서 그는 그가 가진 것을 보존할 수 있는 더 큰 힘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사회적 계약으로부터 중요하지 않는 것을 모두 제거해 버린다면 우리는 이와 같이 쓸 수 있음을 알게된다. : "우리 각각은 공동체 속으로 모든 우리들의 힘은 일반 의지라는 최상의 지휘아래 놓는 것이다. 우리들은 각 개인을 전체의 일원으로 구체화하게 된다.

즉 계약 당사자들의 개인적 영역에서는, 투표한 사람들의 숫자만큼에 따라 구성된 인공적이고 협력적인 구성체를 만든다. 그리고 동일한 행동에 의해서 그 조직은 단결력, 자아와 의지를 획득하게 된다. 여러 사람들에 의해 구성된 그와 같은 공적인 사람을 한번은 도시(city)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지금은 공화국(republic, body politic)으로 알려져 있다.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state라고 불리어지며, 그것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을 때에는 sovereign이라고 한다. 그것이 그것과 같은 종류의 다른 것과 비교되었을 시에는 그것은 힘(power)이다. 그곳 안에 모여진 사람들은 통치권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집합적으로 '인민(a people)'이라고 불리어지며, 개별적으로는 ‘시민(citizens)'이라고 한다. 또, 국가의 법 아래 통치된다는 점에서 '예속인(subjects)'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들은 자주 혼동되는데 각각의 것이 다른 것으로 잘못 이해되기도 한다. ;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그것을 정확한 의미로 사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편집] 제7 장 주권자

이러한 원리는 계약이 사회나 개인 사이의 상호 의무 분담의 행위로써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계약을 만드는 데 있어서 스스로와 함께 각각의 사람들은 두 번의 행위로 행동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주권자의 일원으로서, 두 번째는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이다. 여기에는 시민법 원리에 호소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복종의 의무를 가지는 것과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복종의 의무를 가지는 것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공공의 결정이 국가에게는 그 자체로 어떠한 의무를 부과하지 않지만 국가의 구성원에 대해서는 의무를 부과하게 된다. 주권 국가는 계약을 만들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뿐이며 이는 곧 사회적 계약은 물론이거니와 사람을 하나의 연합체로 묶을 수 있는 어떠한 종류의 기본적인 법률도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주권 국가가 다른 국가에 대해서 의무를 부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외국의 힘과의 관계에서 그 정치체는 단순한 하나의 실체로 하나의 개인과 유사하다.

그러나 정치체나 통치권이 그것의 존재를 홀로 그 계약의 신성함에 의존하고 있는 까닭에 그것은 외세와의 조약에서조차도 조직의 원초적 행위를 훼손할지도 모르는 어떠한 것을 그 자체로써 행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예를 들어 다른 통치권에게 그 스스로의 일부를 양보하거나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통치권이 존재할 수 있게끔 하는 행위를 위반한 것은 그것 자체로써 모든 것을 전멸시킬 수 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는 것이다.

다수인이 하나의 구성체로 묶여지자 말자 구성원은 누구도 전체를 공격하지 않는 한, 어떤 부분의 개인에게 상처를 입힐 수는 없다. 물론 각자가 느낄 수 없을 만큼 아무 조금 전체를 상처 입힌다면 몰라도 말이다. 의무와 자기이익은 계약한 쌍방에게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서로 서로 도움을 주고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도 똑같이 쌍방의 관계는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이익을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자! 그럼 통치권이 그것을 구성하는 개개인에 의해서 전적으로 형성되었다면 그것에 반하는 어떠한 이익도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된다. 그래서 통치력은 그 피통치자에게 확신을 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구성체가 그것의 모든 구성원에게 상처를 주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그것은 어떠한 특정한 구성원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이처럼 단순한 사실에 의한 통치력은 그것이 항상 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통치력에 예속된 하인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의 공동의 이익에도 불구하고 예속인은 그들의 위원회에 묶히려 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의 충성을 보장할 수 있는 수단이 갖추어 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사람으로서 개개인은 그가 시민으로서 가지고 있는 일반의지와 달리 혹은 반대로 사적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적 이익은 일반적 이익의 그것으로부터 매우 다른 목소리로 말해질지도 모른다. 그의 절대적이고 자연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는 그를 그가 공통 원인(일반의지?)에 빚지고 있는 것을 부담이 가는 의존으로 간주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손해는 그 지불이 그에게 부당을 주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 적은 고통이 될지도 모른다. ; 그리고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인공적인 사람들이 가상의 실체라고 생각해 보면(그것이 사람이 아닌 관계로) 그는 피지배인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고 시민의 권리를 누리려 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정의롭지 못한 것의 증대는 정체적의 쇠락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계약이 공허한 공식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것은 일반의지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구성원들에 의해서 그렇게 하기를 제한받아야 함을 모든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그 위원회에서 암묵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자유롭게 놔둬라는 것을 의미한다. ; 왜냐하면 이것은 각각의 시민들을 국가에 내맡김으로써 모든 개인적 의존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필요 최소의 조건이기 때문이며, 정치 체제의 구성과 작동 모두를 형성하는 조건으로서 그리고 단지 그것만이 시민적 계약에 정의를 부여하는-그것이 없을시 그와 같은 계약은 무효이며, 포학하고 전제 권력의 남용이기 때문이다.- 조건으로 남겨질 수 있다.

[편집] 제8 장 시민사회

자연상태에서 시민사회로의 변화는 인간에게 있어 주목할 만한 변화를 낳았다. 그것은 행동의 기준으로 본능 대신에 정의를 두게 되었으며, 인간들이 그 이전에는 부족하였던 도덕성을 자신의 행동에 더하게 되었다. 그들 스스로를 생각하던 인간들은 그 자신을 다른 원리에 의해서 행동하도록,또한 그의 경향이나 기질을 연구하기보다는 그의 이성에 의해서 살피도록 강요했던 것은 '의무’의 목소리가 육체적인 충동을 대신하였고 ‘권리’가 자신의 바람을 대신한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시민 사회에서 자연 상태에 속해있던 이익의 일부를 양도했다고는 하지만 그 대신에 그는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능력은 단련되고 발전되며, 그의 마음은 확장되고 그의 감정은 고상해지며 그의 모든 정신력은 높게 평가될 정도로, 그가 이전에 버렸던 것보다 더 나쁜 것으로 그 자신의 품격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는 자연 상태의 제한된 동물에서 자신의 품격을 끌어올린 행복한 시간들을 누릴 수 있다.

우리들은 대차대조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손실과 이익을 비교해 보자. 인간이 사회의 계약을 통해서 손해를 본 것은 자연 상태 속의 자유(natural liberty)와 그가 하려는 것과 그가 취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absolute right)이다. 그가 사회 계약을 통해서 이익을 본 것은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그가 소유한 재산에 대한 법적 권리(legal right)이다. 만약 우리가 계약을 통해서 본 손해와 이익을 측정하는 데 있어서 실수함이 없다면, 우리는 명백하게 개인의 물리적인 힘과 관계한 것을 제외하고는 한계가 없는 본원적 자유(natural liberty)와 일반적인 의지에 의해서 한계가 있는 시민적 자유(civil liberty)를 구분해야만 한다. 또한, 힘과 가장 첫 번째로 점유한 것에 의존한 단순한 '소유'와 법적 권리에 의존해야만 하는 '소유권' 사이를 구분해야 한다.

우리들은 사람들이 시민사회와 함께 유일하게 그를 그 스스로의 주인되게끔 하는 도덕적 자유를 습득해야 함을 또한 덧붙혀야 할 것이다. ; 왜냐하면 단지 욕망에 의해서 통치되는 것은 방종이며, 반면에 누군가가 그 스스로에게 규정하고 있는 법에 대한 복종은 자유이다. 그러나 나는 이 주제에 대해서 이미 충분히 말했으며 이 단어에 대한 철학적 의미는 여기 있는 나의 주제의 한 부분이 아니다.

[편집] 제9 장 소유권에 관하여

공동체의 구성원은 그 자신의 존재가 그의 물품을 포함한 모든 자원과 함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동체가 존재의 형태로 나타나는 순간에 그 공동체에 그들 자신을 헌신하게 된다. 이것은 이러한 행위에 의한 소유가 소유에 대한 속성을 변화시켜서 통치자의 손안에 있는 재산이 되게 한다는 말은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외국인의 눈으로 볼 때에는 어쨋던 더 합법적인 것이 없이는, 개인의 자원으로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한 국가의 자원으로서 혹은 사적인 소유보다는 단순한 사실로써 더 안전하고 변경할 수 없는 공공의 소유로서 존재하게 한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국민과의 관계에서 국가는 국가 안에서 모든 다른 권리의 기초로써 역할을 하게되는 사회계약 덕택에 그는 모든 그들의 물품의 주인이 된다. ; 반면에 외국과의 관계에서 국가는 그 국가는 단지 ‘첫 점령의 권리’만을 가지며, 국가는 개인으로부터 그 권리를 도출해 낸다.

'강자의 권리’보다 더 실제적이라고는 하지만, ‘첫 점령의 권리’는 ‘재산제’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진실한 권리는 아니다. 모든 사람은 그가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자연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 ; 그러나 어떤 곳에 대한 인간의 소유권을 만드는 긍정적 해동은 그를 그 밖의 모든 것으로부터 배제시킨다. 그의 지분이 정해지게 되면 그는 mr 자신을 그것에 한정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그는 그 사회에 대해서 더 이상의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첫 점령에 대한 권리가 그것이 비록 자연상태에는 약하다 할지라도 정치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존경을 강요하는 법을 보게 된다. 이 권리가 사람들에게 깨닫게 만드는 것은 그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것 보다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이 더 적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한 조각의 땅에 대한 권리를 판단하기 위해서 다음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 첫 번째 그 땅은 그 밖의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도 거주되고 있지 않아야 하며, 두 번째로 소유권자는 그가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 이상 점유하지 말아야 하고, 세 번째로 그는 허례적인 의식이 아니라 직접 땅을 활용하고 경작하는 것에 의해서 소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첫 점유에 대한 권리’가 필요와 노동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그것이 미치는 범위까지 소유권을 확장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진실로 그 소유권에 대한 무제한적인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그것에 대한 소유권을 즉시 인정받기 위해서 보통의 땅에 누군가가 발을 디디는 것으로 충분한 것인가? 그들에게 되돌려 줄 권리를 빼앗기 위해서 한동안 다른 사람들을 떼어놓을 권력을 가지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인가? 어떻게 해서 사람들이 광대한 영토를 범죄적인 침입을 제외하고 다른 여타의 인종들을 배제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이러한 배제는 자연이 그들에게 공통으로 준 주거와 식량을 여타의 다른 사람들을 베제하기 때문이다. Nuntz Balbao가 해변가에 서서 Castille의 왕관의 이름으로 남쪽바다와 남아메리카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을 때, 모든 주거자에게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게끔하고 세계의 모든 왕들을 (그 영토로부터) 베제하기에 충분한 것일까? 만일 그러하다면 그와 같은 바보같은 의식은 끝이 없을 것이다. ; 그리고 카톨릭의 왕들은 그의 제국의 한 부분이 다른 왕들에게 속하지 않았을 경우에 한하여 그의 제왕의 거소를 떠나지 않고 모든 우주를 소유하였을 것이다.

우리들은 사적인 개인의 땅이 합쳐지고 조화되었을 때 공공의 영토가 되는 방법을 볼 수 있다. ; 그리고 통치권력이 피지배인들에서 그들이 점유하고 있는 영토에 이르기까지 확장되면서 재산과 인신을 모두 구속(cover)하게 되는 법을 보게된다. ; 그것은 소유자들을 더욱 의존적으로 만들고 그들 자신의 힘이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데 쓸 수 있게끔 한다. 이러한 이점은 단순히 그들 자신을 페르시아와 스키타이인 혹은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불림으로서 그들 국가의 왕으로써보다 차라리 사람의 통치자로써 간주하게끔 하는 고대의 군주에게는 예외인 것처럼 보인다. 현재의 군주는 그들 자신을 더욱 예리한(more shrewdly) 프랑스, 스페인, 영국의 왕으로 부른다. (즉 그들 왕들이 인신의 직접적 구속을 좀 더 치밀하게 해 들어가고 있다.) ; 이와 같이 땅을 확보하고 있으면서 그들은 바로 그 거주민들을 확실하게 장악한다.

사회적 계약에 의해서 수반되는 양도에 대해서 특징적인 것은 개인의 물품을 수용하는데 있어 공동체는 결코 각각의 재산을 빼앗을 수 는 없다는 것이다. ; 반대로 공동체는 단순히 그들의 법적인 자유를 보장한다. ; 그것은 ‘침입’을 ‘타당을 권리’로 단순한 ‘즐김’을 ‘합법적 소유’로 변화시킨다. 모든 소유주가 공공재산의 수권자로 간주됨에 따라 그의 권리는 국가의 모든 다른 구성원들에 의해서 존경받게 된다. 그리고 외국인에 대항한 집단적인 힘으로 보호된다. ; 공공에게 유익하며 그 자신에게는 더욱 그러한 한번의 양보에 의해서 사람들은 그가 포기한 모든 것을 가졌다. 이와 같은 역설은 나중에 보여지겠지만 같은 재산에 대하여 통치권이 가지는 권리와 소유자가 가지는 권리 사이를 구별함으로써 설명되어질 수 있다.

사람들은 어떤 것을 소유하기 이전에 (그것을) 합치기 시작하고 그들 모두를 위해 충분히 큰 영토까지 확장하였다면 그것을 공익을 위해서 즐기기 시작하고 혹은 그들 사이에서 그것을 똑같이 혹은 통치권에 의해서 결정된 지분만큼 나누기 시작한다. 이와같은 습득이 어떠한 수단을 통해서 이뤄졌던지 간데 그의 땅에 대한 개개인의 권리는 모든 것 위에 존재하는 공동체의 권리에 항상 종속적이다. ; 왜냐하면 이것 없이는 사회적 결속에 작용하는 힘도, 통치권력이 실행을 위한 효과적인 힘도 있지 아니하게 될 것이다.

나는 모든 사회 system의 기초로써 작용하는 한 가지 관찰결과로 이 장(BookⅠ)을 마치려한다. ; 이름하여 사회계약이라는 것이 자연적 평등을 파괴함과 별도로 오히려 반대로 자연이 인간에게 강요할 지도 모르는 어떠한 물리적 불평등에 대하여 도덕적이고 법적인 평등성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 그래서 힘과 지적 능력에 있어서 똑같지 않다고 하지만 사람은 계약과 권리에 의해서 평등해 질 수 있다.

[편집] 제2 권

[편집] 제1 장 양도할 수 없는 통치권력

지금까지 성립된 원리의 가장 최초의 그리고 중요한 결과는 일반의자만이 일반선이라는 국가가 달성하기 위하여 성립된 그 목적에 조응하여 국가의 힘을 지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왜냐하면 사적인 이익 사이에서의 갈등이 요구되는 시민사회의 기초를 만들었다면 그와 같은 유사한 이익 사이의 조화는 그것을(일반의지의 지시를) 가능하게 만든다. 그것은 사회적 결속을 창출하는 그와 같은 다른 이익들에서 공통적인 것이다. ; 별개의 이익이 우연히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사회의 존재를 생각해 볼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가 통제되어야만 하는 이 공동이익에 기초한다.

그러면 나의 논쟁은 통치권이 일반의지의 실행과 다름 아니라면 그것은 양보될 수 없는 것이다. ; 그리고 단순히 집합적인 것이라면 그 자체가 아니고서는 누군가에 의해서 대표될 수도 없다. - 힘은 위임될 수 있지만, 의지라는 것은 그렇게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지로 사적인 이익이 일반의지와 몇몇 관점 혹은 다른 관점에 의하여 우연히 일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전체하에서 그와 같은 일치가 규칙적이고 영원한 것은 불가능하다. ; 왜냐하면 사적의지는 그 자연적 속성상 차별화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일반의지는 평등으로 향하게 된다. 그것은 일반의지와 사적의지 사이의 조화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있다는 것을 더욱더 생각할 수 없게하고, 비록 조화가 계속이어진다 할지라도 그와같은 지속적인 조화는 계획의 결과가 아니라 우연의 결과이다. 통치자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 “내가 현재 원하는 것은정확하게 이 사람이 원하는 것이거나 최소한 그가 원한다고 말한 것이다” ; 그러나 어떤 통치자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 “이 사람이 내일 원할 것은 내가 또한 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미래에도 그 자신을 묶기를 원하리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리고 어떤 인간 존재가 그 자신의 이익과 대조되는 어떤 것을 동의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모순이다. 사람들이 단순히 아무 이유도 없이 복종하기를 약속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 맹세에 의해서 그것 자체를 해소해 버리는 것이다. ; 그것은 국민이 되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한번 주인인 이상 더 이상 통치권자가 아니며 그러므로 정치체제는 해체되어 버린다.

이것은 만약 통치권자가 그것들에 반대할 자유를 가지고 있는한 그렇게 한다면 지도자의 명령이 일반의지에 대하여 우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경우에 사람들의 침묵은 사람들이 동의한 가정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뒷 장에서 더욱 충분히 설명되어 질 수 있을 것이다.

[편집] 제2 장 나눌 수 없는 통치권력

통치권력이 양도될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이유로 분리될 수도 없다. ; 왜냐하면 의지라는 것은 보편적이거나 특수하며, 그것은 사람들 전체의 의지이거나 부분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가장 첫 번째로 의지의 선언은 통치권력의 행동이고 법을 제정한다. 두 번째로 그것은 단지 개별적 의지의 선언이거나 정책의 집행이며 기껏 해봤자 단순한 행정명령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치 이론가들은 통치권력에 대한 원리를 나눌 수 없다고 하면서 그것을 그것의 목적에 의해서 나누고 있다. ; 그들은 그것을 힘과 의지로 나눈다. 즉 다시 말해서 입법부와 집행부로 나누었으며, 조세징수, 법무, 선전포고와 같은 권리로, 내무부와 외무부로 나누기도 하였다. 때때로 우리의 이론가들은 모든 부분을 혼동하고 때때로 그들은 그것들을 분할한다. 그들은 통치권력을 마치 그들이 인간의 몸을 눈을 가진 것, 다리를 가진 것, 발을 가진 것과 같이 몇몇의 부분으로 조합할 수 있는 것처럼 환상의 창조물로 만들었다. 그것은 일본의 재담꾼이 구경꾼 앞에서 아이들을 잘라 던져 올릴 수 있어 공중으로 여러 부분을 던져 아이들이 떨어지게 되면 각각의 부분이 살아서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해 질 수 있다. 이것은 우리의 정치학 이론가들이 행하는 다소간의 속임수이다. 사회 구조를 재빠르게 분할 한 후에 박람회에 알맞게 분할한 후에 그들은 어떻게든 다시 그 부분들을 합한다.

그 실수는 무엇이 통치권력인가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없어서이며 권위에 대한 단순한 확인을 그것 자체로 권위 각각의 부분으로 오인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선전포고나 평화조약이 그렇지 않은데 통치권력의 행위로 간주된다. ; 왜냐하면 이 둘은 법을 구성하지 않으며, 단지 법을 적용할 뿐이다. 특히 법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내가 '법'이라는 단어에 덧붙히는 그 생각을 정의하게 되는 순간 이 모든 것은 명확해 질 것이다.

우리가 같은 방식으로 다른 추측된 통치권력에 대한 분할을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통치권력이 나눠졌다고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실수를 범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통치권력의 한 부분으로 여겨지는 그 권리들은 사실상 그것에 종속된 것이라고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권리는 최고의지(the supreme will)의 존재를 미리 전제하게 되는 그 권리들은 그 최고의지가 효과를 가질 수 있도록 한다.

이 정밀함에 대한 요구는 법률이론가들이 그들 자신의 원리를 왕과 국민들 각각의 권리를 결정하는데 적용할 때, 법률 이론가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게 된다. Grotius의 첫번째 책 3장과 4장을 읽은 모든 사람들은 배운 사람들과 그의 번역가, Barbeyrac이 그들 자신의 유식함의 덧에 걸려 있음을 알 수 있다. Grotius가 프랑스에 망명해 있을 때 그가 그의 책을 진상했던 루이 13세에게 아첨하면서 국민의 권리를 박탈하고 왕에게 국민의 권리를 바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것은 Grotius의 저작을 영국의 왕 조지 1세에게 진상했던 Barbeyrac의 취향에도 맞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임스 2세의 추방은 그로 하여금 윌리엄 3세가 압제자라고 표현하지 않기 위해서 조건부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 말하게금 했다. 이 두 저작자가 합리적인 원리를 수용했더라면 모든 그들의 어려움은 사라졌을 것이고, 그들의 논설은 합리적인 것이 되었을 것이다.

[편집] 제3 장 일반의지가 오류를 범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그것은 내가 일반의지가 항상 정당하며, 공공선을 지향하려 한다는 것을 논의하면서부터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숙고함이 항상 옳다는 것을 전제하지는 않는다. 우리들은 항상 우리들에게 이익되는 것을 원하지만, 우리들은 항상 그것을 구별해 낼 수는 없다. 사람들은 결코 부패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자주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기도 하고 단지 그것이 그 때에는 잘못된 것으로 의도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두의 의지(모든 개인이 원하는 것)와 일반의지 사이에는 자주 큰 차이점이 있다. ; 일반의지는 단지 공공이익을 연구하는 반면에 모두의 의지는 사적이익을 연구한다. 그리고 실로 개인 욕망의 총합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같은 의지로부터 서로 상쇄되어 가감된 것을 뺀다면 같은 의지로부터 남은 균형점이 일반의지이다.

사람들의 숙고로부터 적당히 알려지고 그것들의 구성원이 그들 사이에서 어떠한 의사소통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대한 수의 조그만한 차이점은 항상 일반의지를 양산해내고 그 결정은 항상 좋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단체로 있다면 부분적 조합은 거대 조직의 소멸로서 형성된다. 이러한 단체의 각각의 의지는 그것의 구성원에 비해서 일반적이고 국가에 비해서는 사적일 것이다. ; 우리는 사람 숫자만큼이나 많은 투표권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단체만큼의 투표권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차이점은 숫자가 적을 뿐이며 덜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해 낸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단체중의 하나가 나머지를 버릴 수 있을 만큼 거대해진다면, 그 결과는 더 이상 많은 작은 차이점의 총합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분할되는 차이점이 될 것이다. ; 그 때 더 이상 일반의지가 아니며 우세한 여론이 사적 여론과 다름 아닌 게 된다.

이와 같이 일반의지가 명확하게 표현된다면 국가 안에는 어떤 부분적 조합도 있지 않을 것이며, 모든 시민이 그 자신의 힘으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 이와 같은 것은 위대한 Lycurgus의 독특하고 거대한 발명이다. 그러나 만약 부분적인 조합이 존재한다면 Solon, Numa, Servius가 했던 것처럼 그들의 숫자를 늘리고 그들 사이의 불평등을 방지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 된다. 이것들이 확실히 일반의지(the general will)를 명백히 하고 사람들이 오류로부터 보호되는 것이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예방책이다.

[편집] 제4 장 통치권력의 한계

국가가 단지 구성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결합체이며, 그리고 그것의 주목적이 구성원을 보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전체에게 유익한 것이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각 부분을 움직이고 처분할 보편적이고 강제적인 힘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연이 각각의 사람들에게 모두 그의 육체를 넘는 절대적인 힘을 주는 것처럼 사회적 계약은 정치체제(the body politic)에게 모든 그들 구성원을 능가하는 절대적인 힘을 주게된다. ; 그리고 내가 말한 것처럼 일반의지에 의해서 통치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지시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힘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인(the public person)외에도 그것을 구성하는 사적인 사람들(those private person)에 대해서도 고려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사적인 사람들의 생명과 자유는 자연적으로 그것(the public person)과 독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시민 각자의 권리와 통치권력 각자의 권리를 명백하게 구분해야만 한다. 그리고 피지배인으로서 져야하는 의무를 그들 인간으로서 당연히 즐겨야만 하는 자연적 권리로부터 구분해내야만 한다.

우리들은 사회적 계약에 의해서 그의 권력, 재산, 자유를 양도하게 되며 그것이 수용될 수 있는가는 단지 주권(sovereign)에 의해서만 허용된다.

주권이 원할 때면 언제나 시민은 어떠한 서비스라도 제공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 그러나 주권은 공동체에 필요없는 부담을 그 구성원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 주권은 그러한 것을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자연의 법과 마찬가지로 이성의 법을 따른다는 것은 그러한 경우를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결합하여 사회를 형성하는 계약들은 강제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해서 계약의 속성은 계약을 이행하는데 있어 나 자신에게 적용시킬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의지는 어떻게 해서 항상 옳으며,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행복을 바랄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은 권리의 평등, 정의의 개념이 각가가 그 자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편견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일반의지가 그것의 속성에서뿐만 아니라 목적에서의 일반성도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힌다. ; 즉 그것은 어떤 특정한 그리고 제한된 대상으로 지시될 때 그것의 자연적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이질적인 어떤 것을 판단할 때 우리들을 올바르게 인도할 공평성의 원리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전에 합의를 보지 못한 사실이나 권리를 다룰 때면 언제나 논쟁이 발생한다. 그것은 사익과 공익이 위치하는 영역이 달라서 발생하는 문제이다. 이와 같은 논쟁이 명백한 일반의지의 결정에 의해서 내려진다고 보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결정은 경쟁하는 한 쪽 정당에 유리하게 내려진 결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당에 의해서 보면 이질적이고 편파적인 의지로 비춰질 것이며, 공평하기 못하기 쉽고 따라서 결과적으로 오류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일반의지가 개별사건을 다루려고 해서는 안되며 그렇게 된다면 일반의지는 스스로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테네의 사람들이 그들의 리더를 임명하고 교체하며 누군가에게 명예를 수여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벌을 줄 때, 그리고 수많은 개별 법률에 의해서 무차별적으로 행정부의 기능을 행사할 때, 아테네의 사람들은 일반의지로 올바르게 이해된 것을 더 이상 가지지 못하게 되었으며 주권자(sovereign)로서 행동하지 못하고 판단자(magistrate)로서 행동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모순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그것은 좀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의지는 다수의 목소리보다는 그들을 묶어내는 공통 이익에 의해서 그 일반성이 도출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말한 바에 의하면 명백하다. - 왜냐하면 일반의지는 하나의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 제도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부과했던 의무를 나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부과할 수 있는 제도이다. ; 이익과 정의의 조화를 통해서 사회적 숙고에 평등이라는 가치를 더하게 된다.

우리들이 그것을 어떻게 보든 동일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다시 말해서 사회적 계약은 동일한 조건하에서 스스로에게 맹세를 하고 같은 권리를 향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민들 사이의 평등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계약의 속성상 일반의지의 모든 진정한 행위, 즉 다시 말해서 일반의지의 모든 진정한 행동은 모든 시민들을 공평하게 묶어내고 그래서 주권자는 국가를 인식하게 되고 그 국가를 구성하는 구성원들 사이의 차별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러면 ‘통치권력의 행위(an act of sovereignty)’라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그것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계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구성원 각자가 행하는 공동체에 대한 계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의 기초는 사회적 계약이 되며 그것은 곧 평등한 것이 된다. 즉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유용한 것이며, 궁극적으로 선의지(the common good)를 향하게 된다. 그것은 또한 군대와 절대적인 권력에 의해서 보장되므로 지속성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각자가 그 계약에 따르는 한 자기 자신을 제외한 다른 누군가에 복종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주권자(the sovereign)와 시민(the citizen)의 권리가 어느 정도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은 곧 이 둘이 각자(‘시민’ 각자를 의미하는 듯)가 모두(‘주권자’를 의미하는 듯)에게 그리고 모두가 각자에게 스스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 맹세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과 동일하다.

이로부터 통치권력은 일반적 합의의 한계를 넘을 수는 없다.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계약에 의해서 그에게 남겨진 재산과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 이로부터 주권자는 다른 사람보다 더 큰 부담을 어떤 사람에게 부과할 수 있는 어떠한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 그 문제는 사적인 것이 되고 그런 사적인 것은 주권자의 능력 범위 밖에 있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개인이 사회 계약에 의해서 권리포기를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 그것들은 불확실한 삶을 독립적이고 안전한 삶으로 바꿔나갈 것이며, 자신을 능가하는 힘을 침해할 수 없는 권리로 대신할 것이다. 그들의 삶은 사회 계약에 의해서 보호되고 그것이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서 그들의 삶이 위험에 처한 경우조차도 국가로부터 넘겨받은 것을 돌려주는 것 외에는 계속해서 그들의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다.

[편집] 제5 장 삶과 죽음에 대한 권리

자신을 죽일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러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는 개인이 어떻게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주권자에게 위임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잘못 구성되었기 때문에 답하기 어려워 보인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위험에 처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만약 어떠한 사람이 불을 피하기 위해서 창 밖으로 뛰어 내렸다면 이것이 자살의 죄를 구성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배에 탑승했을 때 위험을 알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폭풍우로 죽었을 경우에 자살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사회계약의 목적은 계약 당사자들의 보존에 있다.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목숨을 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할 때 자신 또한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 시민으로서 개인은 더 이상 위험에 대한 판단자가 될 수 없으며, 법이 그를 위험에 노출시킬 필요가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군주가 말하기를 "네가 국가를 위해서 죽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죽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생명은 조건부로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것이지 더이상 자연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범죄에 가해지는 사형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 어떤 사람이 자신이 살인자가 될 때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은 살인자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사회적 계약하에서 생명을 박탈하는 것은 별도로 하고, 사람들은 단지 그것을 확실히 해 두려고 할 것이며 계약의 당사자들은 교수형을 당할 것을 좀처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어떠한 범법자들도 그의 행동에 의해서 국가의 적이 될 것이며, 그가 법을 어겼다는 것은 그가 국가의 일원이 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된다. ; 그는 국가에 대해서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국가의 보존과 그의 보존은 양립할 수 없다. ; 둘 중의 하나는 죽어 없어져야 한다. ; 범법자가 사형을 당하게 될 때 그것은 시민으로써가 아니라 적으로써 죽게 되는 것이다. 재판은 그가 사회 계약을 깨뜨렸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며 그 결과로 그는 더 이상 국가의 일원이 되지 못한다. 그의 저항에 의해서 그는 그 사회에서 추방당하거나 사형을 당해야 한다. : 그와 같은 것은 가상이 아닌 실제 현실에서의 인간이며, 전쟁의 권리는 그와 같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해 준다.

하지만, 범죄에 대해서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은 개별적인 행동이며, 주권과 관련된 것은 아니다. ; 범죄에 대한 유죄판결은 주권이 수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주권의 기능이 아니다. 나의 생각은 여기까지 모아졌다. 하지만, 여기서 더 이상 정교화시킬 수는 없다.

어떤 경우에라도 징벌이 자주 이루어진다는 것은 정부의 취약성을 말해 준다. 무엇을 위해서 유익할 수 없는 그런 나쁜 사람은 없다. 사회를 위험에 처하게 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사형을 당할 수는 없다.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권리는 재판과 법률보다는 상위에 있는 주권의 실체와 관련이 된다. ; 이러한 불분명한 권리는 좀처럼 행해지지 않는다. 잘 통치되는 국가에서는 형벌이 주어지지 않는데 그것은 많은 용서가 이루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범죄가 거의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패한 국가에서 많은 범죄는 벌 받지 않음을 의미한다. 로마 공화정에서는 원로원도 집정관도 범죄를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 빈번한 용서는 곧 범죄가 어떠한 용서도 필요치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낳을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글을 쓰는 것을 멈추려 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실수를 하지 않고 그래서 어떠한 용서도 필요치 않는 좀 더 정당한 사람에게 남기고자 한다.

[편집] 제6 장 법에 관하여

우리들은 사회 계약을 통해서 정치체에 생명을 불어 넣었다. ; 지금부터는 입법활동을 통해서 실제로 운동력과 의지를 부여하는 것을 다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체를 형성하는 원초적인 계약은 그것은 그 자체를 보존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선의의 것 그리고 질서와 일치하는 것은 사물의 본성과 관련되어 있으며 인간의 사회적 합의와는 무관하다. 모든 정의는 하느님으로부터 나오고 그 분만이 그것의 원천이 된다. ; 우리가 그 원천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받는 방법을 안다면 정부도 법도 필요 없다. 의심할 나위없이 우주적 정의는 단지 이성으로부터 나온다. 자연적 정의에 대한 법은 인간들 사이에는 소용이 없다. 사실 그러한 법은 단지 사악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뿐 정의로운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피해가 된다. 왜냐하면 정의로운 사람은 그것을 존중하지만,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렇게 때문에 권리를 의무와 연계시키고 정의를 그것의 목적과 연결시키는 법이 필요하다. 나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은 그들에게 아무 것도 빚 지지 않는다. 또한, 나에게 쓸모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것은 더 이상 모든 권리가 법에 의해서 결정되는 시민사회의 경우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법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그것을 형이상학적으로 정의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이해도 없이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 된다. ; 그리고 우리가 자연법이 무엇인지를 말할 때 우리는 여전히 국가의 법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이미 일반의지가 어떠한 특정한 대상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말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특정한 대상은 국가 안에 혹은 국가 밖에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것이 외부에 존재한다면, 양도한 의지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 만약 그것이 국가 내부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국가의 일부를 형성한다. 이와 같이 부분과 전체의 두 개의 분리된 실체 사이에 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부분보다 덜 특정성을 가지는 전체는 더 이상 전부가 아니다. ; 그리고 이러한 관계가 존재하는 한 전체는 없고 단지 불평등한 두 부분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한 사람의 의지는 더 이상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내가 법의 영역이 항상 일반적이라고 말할 때, 나는 법이 모든 피지배자들을 집합적으로 고려하고 모든 행위가 추상적이다라는 것을 의민한다. ; 그것은 어떤 특정인이나 특정한 행동을 고려하는 것은 아니다. ; 법은 시민들을 몇 개의 계급으로 나눌 수도 있다. 심지어는 이와 같은 몇 개의 계급에 접근할 수 있는 자격을 특정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 저라한 사람들이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 법이 왕정을 성립시키거나 대대로 이를 이어가게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법이 왕을 선출하거나 왕족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개인을 다루는 기능이 입법권의 영역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분석과 관련하여 우리는 누가 법을 만드는 것인지 물어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법은 일반의지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 더 이상 군주가 법 위에 군림하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는 단지 국가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법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물어볼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자신에게 정의롭지 못하게 대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 더 이상 어떻게 하면 법을 지키면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법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단지 기재한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권자 자신이 특정한 목적과 관련하여 지시한 것은 단지 행정명령일 뿐 법이 아니며, 주권의 행위가 아니라 정부의 행위일 뿐이다.

나는 법에 의하여 통치되는 국가를 공화국이라고 부른다. ; 왜냐하면 공익이 단지 지배할 뿐이며, 공적인 것이 단지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법이라는 것은 시민사회가 존재하는 조건이 된다. 사람들은 법에 종속되면서 법을 곧 제작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법을 적시에 만들어서 공포하고, 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대중들의 이익을 식별해 내고 이를 체계적으로 입법화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일반의지는 항상 옳으나 그것으로 인도하는 판단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욕망으로부터 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또한, 즉각적이고 구체적인 이익과 멀리 있고 숨어 있는 피해를 비교하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감각을 필요로 한다. ; 대중들은 유익한 것을 바라지만 그것을 잘 보지 못한다. 개인은 자신의 의지를 그들의 이성에 다가갈 수 있도록 강제되어야 한다. ; 대중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인식할 수 있도록 가르쳐져야 한다. 그러므로 입법자는 필수적이다.

[편집] 제7 장 입법자

국가에 가장 적당한 사회의 규칙을 사회 규칙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월한 지적 존재가 필요하다. 그는 사람들의 열정을 이해하나 그들에 대한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며, 우리의 본성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그것을 전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들의 행복이 우리들의 행복과 독립하여 존재하고 있으나 우리들을 행복하게 만드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또한, 먼 영광을 오랜시간 동안 기다리고 자기 세대에서는 노동을 해서 다른 세대에게 그 열매를 즐길 수 있도록 한다.

플라톤은 Caligula가 경험적으로 사용했던 방법을 그의 저작 '정치가'에서 동일하게 사용하였다. 그러나 위대한 군주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면 또 얼마나 자주 위대한 입법가가 나타날 것인가? 업법가는 기계를 만드는 엔지니어와 같은 존재이다. ; 군주는 단순히 그것을 작동시키는 기계공에 불과하다. 몽테스큐는 "정치적 사회가 탄생할 때 제도를 만드는 공화국의 리더가 존재하나, 나중에는 공화국의 리더를 만드는 제도가 있다"라고 말한다.

국가를 기초하는 사람은 인적 구조를 강화시키기 위해서 인적 구조를 약화시켜야 한다. 즉 자연으로부터 받은 물리적 독립적인 존재를 도덕적이고 공동의 존재로 바꾸어야 한다. 즉 개인은 그 자신의 힘을 벗어버려야 한다. 인간의 자연적 힘은 소멸되고 더 강하고 오래 지속되는 습득된 힘은 사회적 제도이다. 각 시민이 다른 사람과의 협력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전체의 후천적 힘이 각 개인의 자연적 힘의 합과 동일하다면, 우리들은 법을 만드는 사람이 완벽에 가깝게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입법자는 모든 면에서 국가에서 비범한 사람이다. 비범하다는 것은 그가 천재적이라는 이유에서 그런것만은 아니고 그의 직무 때문이다. 그것은 정부의 것도 주권자의 것도 아니다. 공화국의 헌법을 제정하는 일은 헌법 그 자체에 내재해 있지는 않다.

Lycurgus가 그의 나라의 법을 제정할 때 군주의 기능을 폐지하면서 시작하였다. 그것은 외국인들에게 그들 법의 틀을 잡도록 하는 그리스 도시의 전통이였다. 근대 이탈리아의 공화국들도 이러한 제도를 그대로 가져갔으며, 제네바 공화국도 또한 그러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잘 작동하는 것을 알았다. 로마는 폭군들의 범죄가 되살아나서 로마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것은 입법하는 권한과 주권자의 권력을 하나로 통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마의 관리들은 어떤 법을 만들 권리를 침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당신에게 제안한 어떤 것도 당신들의 동의 없이는 법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로마인들이여! 당신의 행복을 확실하게 할 수 있는 법의 제작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이 법의 틀을 잡는 사람들은 어떠한 입법권도 가지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이와 같이 이전할 수 없는 권리를 빼앗지 못했다. ; 왜냐하면 기본적인 계약에 따르면 개인을 묶어주는 것은 일반의지이며, 개인의 의지와 일반의지가 일치하리라고 확신할 수 없다. 이것은 내가 이미 말했던 바이고 이것은 반복할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들은 입법자의 일 중에서 두 가지의 모순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일이다는 것이며, 다른하나는 그것을 실행시키기 위한 비실체적인 권위에 대한 것이다.

또한 말해야만 하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평민들이 쓰는 말 대신에 그들 자신의 고상한 언어로서 평민들에게 말해야 하는 그런 현인들은 이해되기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통속적인 어휘로 수많은 생각들이 전달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것과 먼 목표라는 것은 일반인들을 넘어서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 그 자신의 이익에 복무하기를 원할 뿐이며 정부를 구성하는 것에는 무관심한 개인이 좋은 법이 강요하는 금욕적인 생활에서 도출되는 이익에 감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새롭게 형성된 사람들이 정치의 원리를 이해하고 정치의 기본적인 법칙을 따르는 것은 결과가 원인이 되었어야만 하는 일이다. ; 사회적 제도의 산물인 사회적 계약이 그러한 제도를 만드는 것을 관리해야만 하는 것이다. ; 법의 출현 전에 인간이 되어야만 하는 상태는 사실은 법의 결과물로서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로 입법자는 힘도 논쟁도 사용할 수 없으므로 폭력 없는 강요나 강제 없는 설득이 가능한 질서의 권위에 의존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국가의 기초자들이 전 역사를 통해서 신성한 개입에 호소하고 그들 자신의 현명함을 신적인 것에 돌리게 한 이유이기도 하다. ; 왜냐하면 그 때 사람들은 자연의 법과 동일하게 국가의 법에 종속되어 있다고 느끼게 되며, 인간과 국가를 형성하는 동일한 어떤 손을 감지하면서 자유롭게 복종하며 순종적으로 공공복리의 족쇄를 참아내게 된다.

일반인의 머리 위에 높이 솟구쳐 있는 위대한 추론은 그 자신의 결정을 영원 불멸의 것으로 갖다 놓을 때 입법가에 의하여 사용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려분별에 의하여 움직여질 수 없는 신성한 권위를 지닌 사람에 의해서 강요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자신이 신성한 말의 통역관이라고 한다고 신뢰를 얻는 것은 아니다. 입법가의 위대한 영혼은 그의 임무의 진실을 입증할 진정한 기적이 될 것이다. 기적을 꾸며대고 비밀스런 영적 교제를 선언하기도 하며 새를 훈련시켜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일 수 있게금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은 한 무리의 바보들을 데려다 놓는 것에 불과하다. 그는 결코 제국을 형성할 수 없으며 그의 기괴한 창작물들은 그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무용한 요술은 일시적인 결속을 이룰 수는 있으나 단지 현명함만이 지속적인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아직도 살아 있는 헤브루인들의 법과 10세기 동안 세계의 절반을 지배한 이스마엘의 후손들의 법만이 오늘날 인간의 위대함을 선언하고 있다. ; 비록 허영에 찬 철학자들과 눈먼 정신의 도당들이 그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즉 운 좋은 협잡꾼으로 매도하고 있으나 진실된 정치가들은 그들의 제도를 알아채고 존경하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들은 정치와 종교는 인간 사이에서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 국가의 탄생시점에 단순히 하나는 다른 하나의 수단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편집] 제8 장 人民1

건축가가 큰 건물을 지을 때 그 지반을 조사하고 살펴보는 것과 같이 현명한 입법가는 그 법이 그들 자신에게 유용한가를 판단지 않고 그것이 사람들에 의해서 지지받을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이러한 이유로 플라톤이 아카디아의 사람들이나 Cyrenea 사람들에게 법을 제공해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부유한 사람들은 평성함을 참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Crete는 좋은 법과 나쁜 사람들에 대한 좋은 예를 보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Milos가 훈련시키려는 사람들은 그들의 악덕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에는 훌륭한 법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번영한 수많은 국가가 있으며, 설사 좋은 법을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짧은 기간에 불과할 뿐이였다. 사람들처럼 국가도 어렸을 때 가르쳐야 한다. ;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고치기가 쉽지 않다. 관습에 익숙해지고 편견이 뿌리 깊을수록 위험하고 무익한 계획이 된다. ; 사람들은 그들의 악이 고쳐지는 것을 참지 못한다. 단지 그 근원을 제거할 수 있을 뿐이다. ; 의사를 보고 벌벌 떠는 멍청하고 무기력한 병자와 같다.

물론 나는 어떠한 고통이 사람들의 정신을 흐뜨리고 과거의 기억을 추방하는 것처럼 국가에 있어 혁명은 개인에게 위기가 어떠한 영향을 주듯이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 과거를 잊는 대신에 그것을 두렵게 되돌아 보고 시민전쟁 후에 국가는 잿더미에서 다시 태어났고 죽음의 무기에서 탈출하여 다시 젊음의 생기를 얻었다. 이와 같은 것은 Lycurgus 시대의 스타르타의 경험이며, Tarquins 이후의 로마이며, 근대에서는 군주를 추방한 이후의 네덜란드나 스위스와 같은 경우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예외적인 것이다. ; 관련된 국가의 특별한 헌법에 의해서 설명되어지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동일한 사람들에게 같은 일이 두 번씩 일어나지는 않는다. ; 사람들이 개화되지 않았을 때에는 자유로워질 수 있지만, 시민적 에너지가 소진되었을 때에는 그럴 수 없다. 혼란은 혁명이 다시 시민사회를 복구할 수 없을 정도 파괴시킬 것이며, 그 결과로 사회를 묶어주는 고리는 파괴될 것이며 국가는 무너지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그 때 필요로 하는 것은 주인이지 해방자가 아니다. 자유로운 사람들은 이 격언을 기억하라. : "자유라는 것은 얻어질 수 있으나, 결코 다시 얻을 수는 없다."

인간처럼 국가 또한 법에 복종하기 위해서는 성숙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 그러나 사람들의 성숙이 항상 쉽게 인지되지는 않는다. ; 그러고 너무 빨리 성숙하는 것은 유산이 될 것임을 증명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서로서로 다르다. ; 어떤 사람들은 시작부터 단련되기 쉬운 사람들도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고 심지어는 10세기 이후에 그런 단계에 이르기도 한다. 러시아는 그들을 다스리려는 시도가 너무 일찍 이루어져서 결코 효과적으로 통치되지 못할 것이다. 위대한 피터는 복제가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 그는 무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만들어 내는 천재는 아니다. 그가 한 몇몇은 훌륭한 것이기는 하다. ; 하지만 대부분은 잘못 인도되었다. 그는 그의 백성들이 개화되지 못한 것은 알았으나, 정부를 구성할 준비가 되지 못한 것은 보지 못했다. ; 그는 그들을 가르쳐야 했을 때 개화시키고자 했다. 그는 그를 러시아인으로 만드는 대신에 독일인이나 영국인으로 만드려고 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있지 않았던 곳으로 가도록 강요했으며, 그래서 그들이 있어야만 하는 상태로 만들어 가는 것에 실패했다. 이것은 프랑스인 교사가 그의 학생을 그가 어린 시절 잠깐 빛나게 만드는 방법이며, 이러한 방식에 의해서는 그들은 실체가 없는 존재로 자라나기 쉽다. 러시아 제국은 유럽을 정복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 자신이 정복당하고 말았다. 타타르인들과 그의 피지배인들 및 그의 이웃들은 그들의 주인이 되었고, 우리들 또한 그러하였다. 이와 같은 혁명은 우리들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유럽의 모든 왕들은 혁명의 도래를 위해서 일제히 노력하고 있다.

[편집] 제9 장 人民2

자연적으로 인간이 그 신체를 통하여 제한되듯이 국가 또한 통제되기에 너무 크거나 그 자체를 유지하기에 너무 작지 않으면 그 크기에 대한 제한이 존재한다. 정치체에서는 넘지 말아야 할 힘의 최고치가 있으며, 또한 그 힘의 최고치라는 것은 확장의 결과로서 자주 부족해지기 쉽다. 사회적 결속이라는 것은 확장 될수록 더욱더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 일반적으로 크기가 작은 국가는 상대적으로 크기가 큰 국가보다 사회적 결속이 더 강하다.

생각을 해보면 이러한 것은 증명해 낼 수 있다. 첫번째로 관리라는 것은 먼 거리에 있으면 무게가 지렛대의 끝으로 가면 갈수록 더 무거워지듯이 통제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정부는 그 범위가 확장되면 더 부담이 가해진다. 왜냐하면, 각 도시는 그 도시를 관리하는 행정부가 있어서 그 행정부에게 세금을 납부해야 하며, 그 도시를 관리하는 행정부 위에 지역을 관리하는 행정부가 존재한다면 다시 그 지역을 관리하는 행정부에 세금을 납부해야 하며 그 지역을 관리하는 상위 행정부가 존재한다면 시민들은 이중 삼중의 세금을 다시 납부해야 된다. 이처럼 계속적으로 더해지는 부담이 국민들을 힘들게 할 것이다. ; 이러한 지위체계에 의해서 잘 다스려지는 정부와는 별도로 그들이 하나의 정부를 가지게 되었을 때보다 상황은 더욱더 악화된다. 비상사태에 대비해 놓은 준비금이 존재하지 않게 되고 국가는 그러한 필요가 발생할 때 멸망의 위기를 맞게 된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정부가 법을 존경하게 만드는 것, 불법을 방지하고 권리남용을 바로 잡으며 치안을 방해하려는 선동을 막는 등의 일을 하는 데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행정관료들과 국가 및 동료 시민들에 대한 애정이 덜 할 것이다. 법은 다양한 지방에 맞추어 나가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지방들은 그들의 다양한 생활 관습이나 기후 때문에 같은 형태의 정부를 받아들일 수 없다. 다른 법을 가지는 것도 같은 정부 하에서 살면서 서로 서로 계속적인 의사소통을 해 나가는 사람들 사이에는 오해와 혼란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 그들은 서로 섞여서 살겠지만, 다른 종류의 법이 우세해진다면 과연 세습된 전통들이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의 정부로 모아진다면 재능은 숨겨지며, 미덕은 무시되고 악덕은 벌을 받지 않은 채 남아 있을 것이다. 통치자는 해야될 일이 많다. ; 그들의 관리들이 국가를 통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흩어진 관리들이 침범할 지도 모르는 공적 권위들을 계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수단들은 모든 정치적 관심을 흡수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사람들의 행복을 연구하기 위해서 남겨져 있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필요한 경우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남겨져 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헌법에 비해서 너무나 큰 국가는 이처럼 자신의 무게에 의해서 스스로 붕괴되고 멸망될 것이다.

반대로 만약 국가가 힘을 가지고 있다면 국가 스스로에게 굳건한 기초를 마련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국가는 막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는 충격에 저항할 수 있고,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해야할 노력들을 계속해 나갈 수 있다. ; 모든 사람들은 일종의 원심력을 만들어 내는데 원심력에 의해서 사람들은 서로 갈등하게 되고 서로의 이웃을 이용하여 마차 '데카르트의 혼란'처럼 스스로 확장해 나가려고 한다. 이와 같이 약자는 항상 강자에 의해서 삼켜질 위험에 처해있는 것이고 사람들은 일종의 균형상태에 다다르게 됨으로서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다. 이러한 균형상태는 어디에서나 모두에게 일정한 정도로 압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것이 확장과 수축의 이유를 말해준다. ; 국가의 보존에 기여하는 정확한 균형을 판단하는 것이 정치적 지혜의 가장 큰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확장의 이유는 수축의 이유보다 더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강하고 건강한 헌법이 찾아야 할 우선의 것이다. 왜냐하면 좋은 정부로부터 오는 강함은 거대한 영토가 만들어 내는 자원보다 더욱더 믿을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국가의 정치구조가 정복자의 필요성에 의해서 헌법을 구성하는 것이고 그들 자신을 온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들 자신을 확장시키는 것이 국가라고 한다. 어쩌면 그들은 상황이 좋을 때에는 이러한 것에 만족할지도 모른다. ; 하지만, 그들의 위대함 끝에 쇠락한 시절에는 동일한 이유로 그들은 멸망의 순간을 피할 수 없다.

[편집] 제10 장 人民3

정치체를 측정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영토의 크기와 사람의 숫자이다. ; 그리고 국가가 최적의 크기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 둘 사이의 어떤 균형이 존재함에 틀림없다. 사람들이 국가를 만들고 영토는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 ; 이와 같이 적당한 균형이 요구하는 것은 거주민들을 충분히 먹일 땅과 땅이 먹여 살릴 수 있는 거주민들이 있음을 의미한다. 주어진 사람으로 최대의 강력을 가져올 수 있는 비율이 존재한다. ; 왜냐하면 너무 많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관리하는 데 부담이 있다. 즉 완전히 경작하기에도 부적당하고 과도한 생산물로 인해서 방어적인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원인이 된다. ; 반면에 너무 작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면, 그 국가는 다른 나라의 결정으로 수입할 수 있는 것에 의존하여 살아야 하고 이것은 곧 공격적인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상업과 전쟁 중에 선택을 해야 하는 국가가 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약한 것이다. ; 그것은 이웃에게 의존하는 것이 된다. ; 그것은 부족하고 불확실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 그 국가는 정복을 해서 그 곤경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정복당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누구도 땅의 크기와 거주민들의 숫자들 사이의 정확한 수학적 비율을 제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역적 속성도 다르고 사람들의 기질도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지역의 사람들은 비옥한 지역이지만 적게 먹고, 또 어떤 지역에서는 척박하지만 많이 먹는다. 즉, 우리는 여자의 다산성, 땅의 특징, 사람들을 끌어들이는지 여부를 고려해 봐야 한다. ; 이로부터 그는 그가 본 것을 가지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가 예상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결론을 내려야 한다. 결과적으로 필요로 하는 땅보다 더 많은 땅을 가져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산악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넓게 퍼져있고, 바닷가 지역에서는 좁게 집중되어 있다.

또 다른 조건으로 평화를 들 수 있다. 전쟁상태나 기아 혹은 선동이 난무하는 국가는 필연적으로 전복되기 마련이다.

물론 혼란기에 정부가 세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부가 국가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압제자는 공중이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법을 혼란기에 만든다. 압제자와 입법가를 구분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사람들이 헌법을 만드는 시기가 어떤가를 보면 된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법을 수용하기에 적당한가? 나는 깊은 관습이나 미신에 뿌리를 두지 않는 사람이라고 답할 것이다. 또한, 갑작스런 침입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모든 구성원들이 모든 구성원들에게 알려져 있고, 자기가 감내할 수 없는 부담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는 상태의 사람들이다. 입법가가 그 스스로의 일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를 세워야 한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파괴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것이 왜 잘 구성된 국가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 것이다.

유럽에 법을 잘 수용하기에 적당한 국가가 하나 있다. 그것은 코르시카 섬이다. 이 용감한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를 수호하고 회복한 용기와 충성은 자유를 보존하는 방법을 잘 보여준다. 나는 이 작은 섬이 언제가 전 유럽을 놀라게 할 날이 오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편집] 제11 장 다양한 법제도들

모든 법 제도가 지향해야 할 최상의 선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묻는다면, 우리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대상에 주목하게 된다.

나는 이미 자유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문제는 평등인데, 평등은 절대적인 평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합법적인 권위와 법에 의하여 권력이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어떤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을 살 정도로 부유하지 않고 반대로 자신을 팔 정도로 가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귀족들은 재화와 영향력에 있어서 중용을, 비천한 사람들은 탐욕에 있어서의 중용을 의미한다.

그와 같은 평등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남용이 피할 수 없다고 그것을 제어하지 말아야만 하는 것인가? 주변의 환경이 아무리 평등을 훼손하려 한다고 해도 입법의 힘으로 그것을 보존하려고 해야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반적인 목표는 지역적 특색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혹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특징에 맞추기 위해서 수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그것 자체로 최선이 아닌 그 국가를 위해 결정된 특정한 형태의 헌법을 그 국민들에게 부여해야 한다. 예를 들어 토질이 메마르고 국토가 좁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때는 공업을 일으켜서 생산한 제품을 부족한 천연자원과의 교환을 통해서 보완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비옥한 국토를 가지고 있지만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적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와 같다면 농업을 일으켜서 인구를 늘리고 장인이 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 혹은 길고 편리한 해안선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바다를 배로 채우고 무역과 항해술을 발달시켜라. 아니면 해변이 접근할 수 없는 바위투성이로 덮혀 있는가? 그럴 때면 수렵에 의존하는 야만적인 상태로 내버려 둬라. 아마도 더 평화롭고 행복할 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원리를 떠나서 모두들 이러한 원리를 자기 식으로 적용할 수 있으며 그 자체로 스스로에게 맞는 법을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것은 과거에 해부르 인들이나 최근에는 아랍인들이 종교를 자신들의 주요한 목적으로 삼는 반면에 아테네 인들은 문학, 카르타고와 Tyre는 무역, 로도스 사람들은 해상운송, 스파르타 인들은 전쟁, 로마인들은 시민적 덕성을 각각 자신들의 주요한 목적으로 삼은 것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법의 정신의 저작자인 몽테스키외는 입법자의 일이 헌법을 그들 각자의 목표로 어떻게 이끌고 가는지를 수많은 예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국가의 헌법을 진정으로 강하고 지속성 있게 만들려면 자연적 법칙과 법이 어떻게 모든 면에서 조화를 이루는지를 세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그래서 법이란 것은 자연적인 것을 확실하게 만들고 함께 나아가며 또한 그것을 올바르게 만드는 것이 된다. 만약,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그들의 목적을 잘못 알거나 환경이 요구하는 것과는 다른 원리에 의존하여 법을 만들어 간다면 즉, 환경은 자유를 요구하는 데 법은 복종을 요구한다거나, 어떤 사람들은 부를 어떤 사람들은 인구를 증가시키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평화를 유지하고자 하는데 또 어떤 사람들은 정복하고자 하는 식의 상황에서는 법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약해지고 헌법은 쇠퇴하여 국가는 마침내 파괴되거나 변형될 때까지 혼란상태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위대한 자연은 그의 제국을 다시 찾게 될지도 모른다.(즉, 우리 모두는 자연상태로 다시 되돌아 가게 된다.)

[편집] 제12 장 법에 대한 분류

모든 것이 질서있게 잘 정리되고 최선의 형태가 공화국에 주어지기 위해서 고려해야 할 다양한 관계가 있다. 첫번째로 모두의 모두에 대한 관계, 즉 주권과 국가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정치체제의 행위에 주목해 보자.

이러한 관계를 규정하는 법은 정치법이라고 칭하며, 또한 기본적인 법이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현명한 법일 때에만 그렇다. 왜냐하면 각 국가가 법을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의 좋은 방식을 찾았다면 그 방식을 찾은 사람들은 그것대로 유지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성립된 법이 나쁘다면 그들의 존재를 유익하게 보존해야 하는 것이 법인데 왜 그러한 나쁜 법을 기본적인 것으로 간주하겠는가? 게다가 사람들은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 법이라도 선택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 그렇게 좋은 법으로 바꾸지 못할 이유도 없다.

두번째는 정치체제의 구성원들 간의 관계를 혹은 구성원과 전체 사이를 규율하는 법이다. 각 시민들은 동시에 독립적이고 시민들은 또한 공화국에 지나치게 의존적인 까닭으로 시민들 사이의 관계나 시민과 전체 공동체 사이의 관계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결과는 국가가 시민들을 자유롭게 하고자 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두 번째 관계로부터 시민법이 탄생되었다.

이제 사람과 법 사이의 세 번째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자. 불복종과 처벌에 관한 이러한 법은 형법을 탄생시켰으며, 이러한 형법은 모든 법의 배후에 있는 도덕적 구속성보다는 좀 더 일반적인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법에 덧붙혀 네 번째로 돌조각이나 청동에 새긴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마음 속에 새겨진 가장 중요한 법이 있다. 국가의 진정한 헌법을 형성하며 매일 새롭게 힘을 축적해 내고 다른 법이 시들어 갈 때에도 그것들을 대체해 가면서 새롭게 생명력을 불어 넣는, 제도의 정신으로 국가를 유지하고 관습의 힘을 합법적 권의 힘으로 바꾸어 내는 바로 그러한 법이다. 나는 그것을 도덕, 전통이라고 명명하며 결국에는 믿음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의 정치학자들에게는 생소한 이것은 다른 법이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대한 법 제정자는 비밀스런 주의를 그것에게 부여한다. 왜냐하면 그가 세부적인 법 조항에 몰두한다 할지라도 그는 천천히 형성되는 도덕이 궁극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법의 유형들 중에서 나의 주제와 관련된 것은 정부를 형성시키는 정치법이다.

[편집] 제3 권

다양한 형태의 정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확정해 보자. 그것은 지금까지도 잘 설명된 것은 아니다.

[편집] 제1 장 정부에 대한 일반론

나는 독자들에게 이 장은 주의깊게 읽어야 된다고 주의를 주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주의를 집중하지 않기를 바라는 독자들에게 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기술이 없다.

모든 자유로운 행동을 만들어 내는 것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가 그 행동을 결정하는 의지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을 실행하는 힘이다. 내가 하나의 물체를 향해서 걸어갈 때 먼저 그 길로 가야될 것을 결심하고 두 번째로 나의 발을 옮기는 것이 필요하다. 마비된 사람이 달리고자 결심할 때나 건강한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자 결심했을 때 그들은 단지 그들이 있는 곳에 계속 있게 된다. 정치체도 같은 두가지의 힘을 필요로 한다. 정치체도 동일하게 그러한 힘과 의지가 없을 때 아무 것도 있을 수 없고 있을 필요도 없으며 따라서 어떠한 것이 이루어 질 수도 없다.

우리들은 입법적인 권력이 사람들에게 속하고 또한 단지 속할 수 있다고 본다. 반대로 집행적 권력은 단지 법과 주권의 범위 밖의 특정한 명령 안에서 실행되는 까닭으로 집행권력은 입법권이나 주권이 가질 수 있는 일반성을 가지지 않는다고 위의 2권 4장과 6장에서 설명하였다.

공적인 권력은 일반의지에 상응하여 그것을 불러들일 수 있고 집행할 수 있는 기관을 필요로 한다. 이를 통해서 국가와 주권자 사이에 의사소통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이 단지 집행기관에 불과하면서 주로 주권자와 혼동하는 정부를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정부란 무엇인가? 피지배인과 주권자 사이의 중개적 기관이며, 법을 집행하고 시민적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러한 기관의 구성원들을 매지스트레이트 혹은 킹이라고 부르며, 통칭하여 프린스라고 한다. 국민들이 군주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조약을 거부하는 학자들은 전적으로 옳다. 왜냐하면 그러한 조약은 단지 위임 조약에 불과하다. 정부의 통치자는 단지 주권자의 하수인으로서 고용관계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 손에 부여된 권력을 행사할 뿐이며, 그러한 권력은 주권자가 제한할 수도 변경할 수도 또한 기꺼이 환수해 갈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권리의 양도는 사회 구성체의 본질과 일치하지 않으며 사회적 결합의 목적에 반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정부를 집행적 권력의 입법적 실행이라고 부르며, 프린스나 매지스트레이트를 그러한 기구의 책임을 맡은 사람이나 기관이라고 부른다.

모두에 대한 모두의 관계 즉 주권자와 국가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매개체는 정부이다. 이러한 마지막 관계는 기하학적 과정에서 처음과 마지막 사이의 하나로 묘사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기하학적 과정 속에서 기하학적 평균이 정부가 된다. 정부가 사람들에게 주는 명령은 주권자로부터 받는다. 그리고 국가가 잘 균형잡혀 있다면 정부가 만들어 낸 권력의 산물과 한 편으로는 주권자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피지배인인 시민의 권력의 산물과 동등해야 한다.

게다가 이러한 균형관계는 비율을 파괴시키지 않고서는 변경될 수 없다. 주권자가 통치하려고 한다든지 집행권자가 입법을 하려한다거나 피지배인들이 복종하기를 꺼려한다면 질서는 무너지고 권력과 의지는 동시에 실행되기를 멈출 것이며 국가는 독재나 전체주의로 빠져들 우려가 있다. 마지막으로 양 극단 사이에 기하평균이 있는 것처럼 어떤 국가를 위한 하나의 가능한 훌륭한 정부가 존재한다. 그러나 수많은 사건들이 국가 내에서 발생할 수 있으므로 서로 다른 정부가 서로 다른 국민들에게도 좋을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시기의 국민들에게도 또한 유익하다.

이 양 극단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관계들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쉽게 비율로써 표현된 사람들의 수로서 예를 들 수 있다. 어떠한 국가가 1만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주권자는 하나의 몸으로 간주되지만 피지배인들은 각 개인으로 표혀노딘다. 따라서 주권자와 피지배인들의 관계는 1:10,000으로 표현되며 어떤 개인이 주권자에게 복종하지만 개인적으로 1만분의 1의 주권을 소유하고 있다. 만약에 인구가 10만명으로 증가한다면 피지배인으로서의 개인의 지위는 변하지 않지만 주권자로서의 그의 참정권은 10만분의 1로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그는 법을 형성하는 데 미치는 영향력이 10분의 1로 줄어들게 된다. 즉 다시 말해서 피지배인으로서의 지위는 항상 한 명의 개인으로 남지만 주권자 대 피지배인의 비율은 시민들의 숫자에 비례하여 줄어들게 된다. 이는 곧 국가의 크기가 커지면 그에 따라서 개인의 자유는 줄어듦을 의미한다.

내가 비율 증가를 말할 때 또 하나 더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일체감의 상실이다. 수학적으로 비율이 증가한다는 것은 인구학적으로 관계성이 소원해지게 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전자는 수학적으로 측정되는 것임에 반해서 후자는 일체성을 고려한 관계성으로 유사성에 의해서 판단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의지와 일반의지 사이의 관계성이 소원해진다는 의미는 국민들의 도덕감과 법 사이의 관계가 또한 그렇게 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강제적인 권력이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좋은 정부는 인구 수에 비례해서 그 힘이 증가되어야 한다.

정부의 크기에 비례해서 공적 권위를 획득한 사람들이 그들의 권력을 남용할 우려가 더 커짐을 의미하므로 그것은 곧 정부가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 필요한 만큼 국민들이 정부를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여기서 절대적 권력의 크기를 말하지 않겠다. 단지 나는 국가의 다른 구성요소들 사이의 상대적인 권력을 말할 뿐이다.

이러한 이중적 관계로부터 도출된 주권자, 군주, 국민 사이의 기하학적인 과정은 임의의 과정이 아닌 정치체제의 본질로부터 나온 필연적인 결과이다. 또한, 피지배인으로서의 국민은 비율의 정도가 크든 작든 단순히 일체감으로 표현되며 정부는 결과적으로 그에 따라 변화하게 된다. 이것은 유일하고 절대적인 정부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즉 다양한 크기의 정부가 존재하는 만큼 다양한 종류의 정부가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시스템을 비웃는 누군가는 기하학적인 평균을 찾아서 정부를 구성하려고 한다면 사람들 숫자의 제곱근을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나는 단지 여기서 사용된 숫자는 예를 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말한 비율은 단지 사람들의 숫자에 의한 것이 아닌 활동량에 의하여 일반적으로 더 용이하게 측정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내가 덧붙히고 싶은 것은 내가 잠시나마 나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하여 수학적 도구를 빌려오기는 했으나 나는 여전히 수학적 엄밀성이 도덕적 계산을 대체할 수 없다고 믿고 있다.

정부는 작지만, 정치제는 크다. 그것은 적극적으로는 주권자와 같이 소극적으로는 국가와 같이 어떠한 기능을 부여받은 가공의 인물과 같다. 그것은 유사한 관계들로 쪼개질 수 있다.

우리들은 그와 같은 개념의 증식 없이 정부를 국가 안에 존재하는 새로운 구성체로 보자.

이러한 두 가지 구성체 간에서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정부는 단지 주권자를 통하여 존재하는데 반하여 국가는 단지 그 자체로 존재한다. 이와 같이 군주의 우월한 의지는 단지 일반의지이거나 일반의지여야 하며 그의 권력은 그의 손에 집중되어 있다. 그가 그 자신의 권위에 의존하여 절대적이고 독립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한다면 모든 결합은 느슨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군주가 특정한 의지를 주권자의 의지보다 더 활동적으로 만들고 이러한 특정한 의지에 복종을 강요한다면 그는 자신 손에 존재하는 공적인 권력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한 공적인 권력은 말하자면 사실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결속은 그 즉시 붕괴되고 정치체제는 와해된다.

정부가 국가와는 구분되는 실제적인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서 있기 위해서 그리고 그 정부의 구성원이 함께 행동하고 정부가 세워진 목적을 충실히 해 나갈 수 잇도록 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자아가 존재해야 한다. 그 자아는 그 구성원들에게 공통적인 것으로 그 자신을 보호하려는 힘이다. 그와 같은 특정한 존재는 의회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 의회는 군주에게 속하는 있는 특권과 권리들에 대해서 숙고할 것이며, 행정장관이 좀 더 노력한 만큼 그 지위를 좀 더 명예스럽게 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할 수도 있다. 더 큰 전체 속에서 이와 같은 더 작은 전체를 질서있게 배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것은 그 자신을 강화시키는 동안에 일반의지를 약화시키지는 않는다. 또한 그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사적인 권력이 전체를 보호하기 위한 공적인 권력과 항상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을 위해서 정부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고 정부를 위해서 사람들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것을 말한다.

더군다나 정부가 비록 일종의 빌려온 하부의 생명체라고는 하지만, 정부가 생명력 있고 재빠르게 행동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정부가 설립된 목적과 다르게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을 설립한 방식대로 그 정도를 변화시키면서 목적에서 어느 정도 일탈할 수도 있다.

모든 이러한 차이점은 정부와 국가 사이에 발생하는 다양한 관계들을 발생시킨다. 같은 국가라고 하여도 이런 우연적이고 특정한 관계들에 의해서 변화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 최선의 국가라고 하여도 국가와의 관계가 정치체제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게 수정되지 못한다면 최악의 국가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 제2 장 서로 다른 형태의 정부 구성에 관한 원리

이러한 이유의 일반적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군주와 정부의 차이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미 인구의 증가에 따라 주권자에 대한 피지배자들의 비율이 증가한다는 것을 보였다. 우리는 관료들의 정부에 대한 관계도 이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정부의 힘이 국가의 힘과 항상 동일하다면, 그것은 결코 변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의 구성원들을 상대로 실행되는 힘이 증가하면 할수록 전체 사람들에게 사용할 수 있는 힘은 감소하게 된다.

그러므로 관료들의 숫자가 증가하면 할수록 정부는 더욱더 약해진다. 이러한 것을 기본으로 깔고 좀 더 이것을 명확히 해 보자.

우리들은 관료들을 세 가지 의지를 지닌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개인으로서 그 자신에게 속한 의지로 단지 그의 개인적인 이익과 관련된 것이다. 두 번째는 관료들의 집합적 의지와 관련된 것으로 단지 군주의 이득과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협력적 의지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정부와 비교해서는 일반적이지만 국가와 비교해서는 특정적이기 때문이다. 세번째로 국민들의 의지 혹은 주권자의 의지이다. 이것들은 국가와 비교해서도 정부와 비교해서도 일반적이다.

완벽한 입법체제에서는 개인 혹은 특정한 의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정부 스스로의 집합적 의지는 매우 종속적이어서 일반의지 혹은 주권자의 의지가 우월하고 항상 그 밖에 다른 것에 대한 독자적인 규제자가 된다.

자연의 질서에서는 반대로 이러한 다른 의지들은 그들이 자기 중심적일수록 더욱 활성화된다. 따라서 일반의지는 항상 가장 약한 것이 되고 협력적 의지가 두 번째, 특정한 의지가 가장 우선시된다. 정부 안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발생한다. 각 구성원 가장 먼저 자신의 이익을, 그리고는 한 명의 관료로서, 가장 마지막으로 시민으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명확하게 사회적 질서가 요구하는 것과는 상반된다.

그것이 이와 같다면 정부가 한 개인의 손안에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 때에는 특정한 의지와 협력적 의지가 완벽하게 결합되어 협력적 의지가 가장 높은 강도로 부상하게 된다. 힘의 행사가 의지의 정도에 의존하고 정부의 절대적인 힘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가장 활동적인 정부는 바로 이러한 한 사람에 의한 정부일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정부와 입법적 권위가 합쳐진다고 가정한다면 그 때에는 일반의지와 합쳐진 협력의지가 더 이상 일반의지만큼 활성화되기 어렵다. 이와 같이 항상 동일한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정부는 상대적으로 최소한의 힘과 활동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논쟁할 여지가 없고 다른 고려들은 그 생각들을 오히려 더 확신케 할 뿐이다. 예를 들어 국가체제 내의 시민들보다 정부 내에서의 행정장관이 더 활동적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특정한 의지가 주권자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보다 정부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더 크다. 왜냐하면 모든 관료들이 정부의 특별한 기능을 위임받은 데 반해서 개개인으로서 시민은 주권과 관련한 어떠한 기능도 위임받지 못했다. 게다가 국가가 팽창하면 그것의 진정한 힘이 국가의 힘에 반드시 정비례해서는 아니지만 아울러 증가하게 되는데 국가가 동일한 크기로 유지되고 있다면 정부가 그들의 실질적인 힘에 아무른 증가가 없다고는 하지만 관료들은 증가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정부의 상대적인 힘과 활동은 그것의 절대적인 혹은 실질적인 힘의 증가 없이도 줄어들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공적인 업무의 처리 속도는 그것을 책임질 사람들에 비례해서 느려진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신중함에 너무 중점을 두면 거대한 개체는 행운을 잡기가 힘들다. 그들은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너무 깊이 숙고하는 바람에 일정한 이득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방금 정부가 집행 관료가 증대되는 만큼 느슨해진다는 것을 보였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사람들의 숫자가 증대되면 될 수록 폭압적인 힘이 더욱더 증가해야만 한다는 것도 보여 주었다. 이로부터 결과적으로 정부에 대한 집행관료의 비율은 주권자에 대한 피지배인들의 비율 간에는 역의 관계가 성립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다시 말해서 국가가 더 크면 클수록 정부의 등급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집행관료의 숫자는 인구의 증가에 비례해서 줄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정부의 상대적인 힘을 말한 것이지 그들 행동의 질을 말한 것은 아니라고 덧붙히고 싶다. 왜냐하면 반대로 집행관료의 숫자가 증가하면 할수록 그들의 집합적 의지가 일반의지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 명의 관료 아래에서는 동일한 집합적 의지도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의 개별적 의지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한 쪽에서 얻은 것을 다른 한 쪽에서는 잃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입법자는 항상 반대로 작용하는 정부의 힘과 의지가 국가에 가장 이로운 비율로 조합될 수 있도록 알 수 있어야 한다.

[편집] 제3 장 정부의 분류

우리는 앞 장에서 왜 다양한 형태의 정부가 그것을 구성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나누어지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이 장에서는 이러한 분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살펴보겠다.

먼저, 주권자가 정부를 전체 인민의 손에 놓여져서 보통의 사적인 시민들보다 더 많은 시민 관료들이 존재하는 정부가 있다. 이것이 바로 민주정이라고 알려진 형태이다.

그리고 주권자가 정부를 소수의 사람으로 한정해서 집행관료들보다 더 많은 보통의 시민들이 존재한다면 이러한 형태는 귀족정이 될 것이다.

또한, 주권자가 전체 정부를 한 명의 집행관료에게 집중시켜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힘을 바로 그 일인으로부터 이끌어 낸다면 이것은 바로 군주정의 형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들은 어느 정도의 탄력성을 가질 수 있다. 즉, 민주정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할 수 있으나 또한 전체 인원의 반 정도를 포함할 수도 있다. 귀족정도 반에서 가장 작은 소수의 인원으로도 귀족정이라 부를 수 있다. 심지어 군주정이라고 불리는 것도 몇 명의 소수를 포함할 수도 있다. 스파르타는 항상 그들의 헌법에 의해서 두 명의 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은 제국이 분열되지 않고 한꺼번에 8명의 황제가 존재했던 적도 있다. 이와 같이 항상 각각의 정부형태는 다음의 정부형태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정부는 단지 세 가지의 이름을 가지지만 실지로는 국가가 시민들을 가지는 만큼 많은 다양한 형태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정부는 어떠한 관계에서는 그 자신을 여러 가지 부분으로 나눌 수도 있기 때문에 세 가지 정부 형태가 다양한 혼합 형태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러한 혼합 형태는 이러한 세 가지 단순한 형태에 의해서 증가된 것이다.

전 시대를 통하여 사람들은 최선의 정부형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논쟁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가능한 형태 중에서 어떤 것이 어떠한 상황에서는 최선이고 다른 상황에서는 최악인지를 알아내는 데 실패했다.

만약에 개별 국가에서 최고 행정관료의 숫자가 시민들의 숫자에 반비례한다면, 일반적으로 민주정은 작은 국가에 알맞고, 귀족정은 그 중간 크기의 국가, 군주정은 가장 크기가 큰 국가에 알맞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러한 규칙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공리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해 낼 수 있다. 하지만, 규칙에 예외를 제공하는 수많은 특수한 상황들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는가?

[편집] 제4 장 민주정

법을 만드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법을 집행하고 해석하는 일을 잘 한다. 그래서 집행권력 입법권력을 융합시키는 헌법이 가장 좋은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이러한 조합은 어떤 관점에서 봤을 때 약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떨어져 있어야 할 것이 그렇지 못하고 군주와 입법자가 동일인인 경우에는 말하자면 정부없는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

법을 만드는 사람이 법을 집행하게 되거나 일군의 사람들이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지 못하고 특수한 관점으로 대상을 접한다면 그것은 좋지 못한 일이 된다. 어떤 것도 공익에 사익의 영향력이 존재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 정부에 의한 법의 남용도 사익의 추구로부터 불가피하게 파생되어 나오는 입법자의 부패만큼 위험하지는 않다.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국가는 부패하고 개혁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국가의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독립성을 남용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항상 잘 통제할 수 있는 사람들은 통제받을 필요성이 없다.

개념적으로 엄격한 의미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존재할 수도 없다. 거대한 다수가 소수를 통치한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공공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한 장소에 계속적으로 모여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통치의 형태가 바뀌어야만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위임자를 임명할 수 있다.

나는 정부가 몇 개의 위원회로 나뉠 때 보다 적은 사람들을 가진 사람들이 보다 큰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공리로 인정하고 싶다.

민주적 형태의 정부는 몇 가지 전제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첫 번째로 사람들이 쉽게 모일 수 있고 시민들이 서로를 알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국가이다. 두 번째로 과도한 일과 복잡한 논의들을 막을 수 있는 법령과 도덕의 단순함이다. 세 번째로 사회적 지위와 부의 평등이 필요한데 이것이 없으면 권리의 평등이 지속되기 어렵다. 네 번째로 사치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어야 한다. 그것은 부자든 가난한 사람들이든 부패하게 만든다. 그것은 국가를 게으름과 허영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것은 몇몇 사람들을 노예의 상태로 만들고 모든 사람들을 여론의 노예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시민이 존재하지 않는 국가를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왜 저명한 학자가 미덕을 공화국의 기본적인 원리로 만들어 낸 것인지에 대한 이유이다. 그러나 이 같은 위대한 천재도 자주 틀리고 불분명해져서 주권자의 권위가 어디에서든지 똑같기 때문에 같은 원리가 모든 국가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또한, 민주정부만큼 시민전쟁과 참혹한 투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큰 정부는 없다. 왜냐하면 다른 형태의 정부로 변화하려는 경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도 하에서는 다른 어떤 형태보다 시민들은 무력과 충성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하며, 그들의 삶 중에 매일 즉, 위대한 행정관이 폴란드의 의회에서 “노예제도를 가진 평화보다는 위험에 처해 있는 자유가 더 낫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들을 반복해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민주적으로 통치되는 나라일 것이다. 그렇게 완벽한 정부는 인간에게 알맞지 않다.

[편집] 제5 장 귀족정

우리는 정부와 주권자라는 두 개의 가공의 인물이 있음을 알았고, 이에 따라 두 개의 일반 의지가 있는데 그 중 한 개는 시민들에게 속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행정부의 구성원들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와 같이 정부가 내부의 구성원들을 그것이 기꺼워하는 방향으로 조정해 낼 수 있지만 정부는 주권자의 이름으로 나머지 사람들에게 결코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최초의 사회는 귀족정의 형태로 다스려졌다. 가족의 우두머리들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적인 문제를 숙고하였다. 어린 사람들은 당연히 경험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북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러한 방식으로 남아 있지만 여전히 잘 다스려지고 있다.

인공적인 불평등이 자연적인 불평등을 능가하는 단계에 이르자 부와 권력이 나이를 대신하여 선호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귀족정이 선택되었다. 마침내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재산과 함께 권력을 세습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하나의 족벌은 귀족으로, 그리고 정부는 세습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때에는 20살의 귀족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귀족정은 세 가지 종류의 것이 있다. 나이에 의한 자연적인 것, 그리고 부와 권력에 의한 선택적인 것, 그리고 이것이 세습된 형태의 것이다. 처음의 것은 단순히 원시적인 형태의 사람들에게 알맞은 것이며, 세번째의 것은 모든 정부의 형태 중에서 가장 최악의 것이다. 두 번째의 것은 가장 최상의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단어에 대한 진정한 의미에서 귀족정이라 할 수 있다.

귀족정은 주권자와 정부를 구분한다는 점에서 이익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행정관료들을 선출한다는 측면에서도 이익이 있다. 모든 인기 있는 정부는 모든 시민들이 행정관료로서 선출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귀족정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행정관료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의회는 보다 쉽게 구성될 수 있고, 나랏 일은 좀 더 쉽게 논의 되고 실행될 수 있다. 국가에 대한 신뢰는 무지하고 품격이 낮은 군중에 의해서가 아닌 덕망이 높은 원로들에 의해서 지지된다.

다시 말해서, 국가의 원로들이 그들 자신의 이익이 아닌 국가의 이익을 위하여 통치한다면 현명한 사람들이 다수를 다스리는 것이 최선의 그리고 자연스러운 형태이다. 사람들은 무용한 도구를 늘리지 않을 것이며 100명의 골라진 사람들에 의해서 할 수 있는 일을 2,000명의 사람들을 고용하여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집단적 이익이 일반 의지와 덜 상응하는 방향으로 나갈지도 모르며 집행 권력이 법의 통제를 벗어날 우려가 있다.

이러한 정부 형태에 알맞은 환경과 관련해서 국가가 너무 작거나 사람들이 단순하거나 순박해서 일반의지로부터 막바로 법의 집행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혹은 국가가 너무 커서 집행관료들에게 주권자의 권한의 일부를 이양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귀족정이 인기 있는 정부보다 덕성을 덜 필요로 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부자들 사이에는 ‘겸손’을 가난한 자들 사이에는 ‘만족’과 같은 그들 자신의 덕성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엄격한 평등이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스파르타에서 조차도 발견되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형태의 정부가 어떤 부의 불평등을 내포하고 있다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공적인 일을 위임하여 그들의 모든 시간을 그 일에 투자할 수 있게 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으며, 그 결과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바와 같이 부자들만이 항상 원로로서 선택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부자인 것보다 실적이 더 중요한 자격요건이 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왔다.

[편집] 제6 장 군주정

지금까지 우리들은 군주를 국가에서 집행권력을 위임받은 가공의 인물로 보았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법에 따라 권력을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를 가진 실제의 인물로 보겠다.

집합적인 존재가 개인을 대표하는 다른 체제와는 다르게 여기서는 개인이 집합적인 존재를 대표하게 된다.

이와 같이 사람들의 의지와 군주의 의지, 국가의 공적인 권력과 정부의 사적인 권력 모두 동일한 원인자에 대응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방해할 갈등적인 움직임은 없다. 아르키메데스가 해변가에 조용히 앉아 노력없이 배를 진수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그의 안방에 앉아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고 그 자신의 움직임 없이 모든 것을 해 나갈 수 있는 훌륭한 군주의 모델이 된다.

군주정만큼 활동적인 정부가 없다면 그것은 또한 그것만큼 개인이 더 많은 명령을 발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의지를 쉽게 지배할 수 있는 정부는 없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은 동일한 목적을 향해서 움직이고 그 목적은 공공의 행복이 아니다. 군주정의 진정한 강점은 계속해서 국가에 불이익한 요소들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왕은 절대적이기를 원하고 사람들은 왕에게 절대적일 수 있는 방법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한다. 이것은 중요한 지침이며 또한 매우 진실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항상 궁중에서 비웃음을 당한다. 사람들의 사랑에 의존한 권력은 의심할 나위없이 강력하지만, 불확실하고 임시적인 것이다. 군주는 결코 그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정치적 설교자들은 군주에게 사람들의 힘이 곧 군주의 힘이요 군주의 최선의 이익은 사람들이 번영하고 인구가 증가하며 강력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군주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들의 개인적 이익은 사람들이 약하고 비열하며 결코 자기에게 저항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나는 피지배인들이 아주 복종적이라면 사람들이 강한 것이 군주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부차적인 이익에 불과할 뿐이고 강한 것은 유순한 것과 양립할 수 없다. 이것은 마키아벨리가 아주 명확하게 증명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공화주의자들의 입문서이다.

우리들은 군주정은 거대한 국가에 알맞다고 논의한 적이 있다. 공적인 관료들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군주 대 피지배인들의 비율이 줄어들면서 평행에 가깝게 가고 결국 1:1의 비율에 이르러서는 민주정이 된다. 이 때 군주와 국민들 사이에 큰 거리가 있어서 통일적 결속이 부족해지게 된다. 이러한 결속은 중간 계급이나 귀족들에 의해서 채워져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작은 국가들에게는 알맞지 않다.

군주정을 공화정에 비해서 열등한 핵심적이고 피할 수 없는 약점은 공화국에서는 인기있는 선택이 현명한 사람들을 항상 높은 자리에까지 오르게 하지만 군주정에서는 하찮은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궁중에 어느 정도의 자리까지 오르면 곧장 국민들을 배신하고 음모와 흉계로서 서로 뒤죽박죽 싸우게 된다. 국민들은 군주보다 선택에 있어 덜 실수를 하게 되고 황실에서 실력 있는 사람들이 적은 만큼 민주정에서는 한심한 바보들이 적다. 그 결과 행복한 순간에 탁월한 군주는 여러 무리의 사악한 관리들에 의해서 난파될 뻔한 군주정이라는 배에서 키를 제대로 잡아서 모든 사람들이 그가 발견한 자원에 대해서 놀라워하기도 하고 그의 통치지역은 역사에 있어서 신기원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군주정에 의해서 잘 통치되어진다면 그 국가의 크기는 통치하는 군주의 능력에 비례하여 넓어질 것이다. 그것은 관리하는 것보다는 정복하는 것이 더 쉽다. 충분한 정도의 지렛대를 가졌다면 손가락 하나로도 세계를 뒤집을 수 있다. 그러나 세계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헤라클레스의 어깨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작다면 군주는 거의 항상 부적당하다. 통치자에 대해서 국가가 너무 작다면 가장 최악의 상태에서 국가가 다스려지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군주는 국민들의 이익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그는 보통의 군주가 그 자신의 불충분한 결점을 가지고 국민을 다스리는 것보다 국민들을 더 비참하게 만든다. 그것은 마치 군주의 능력에 따라서 영토는 넓어지거나 줄어들게 되는 것과 같다. 반대로 공화국에서는 고정된 경계를 가지게 된다.

일인의 통치에 의한 가장 불이익한 점은 다른 두 개의 정치제도 안에서는 이루어지는 연속적인 결속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줄 수 없다는 점이다. 왕이 죽을 때 다른 어떤 왕이 필요하다. 선출이란 위험스런 시간적 간격이 된다. 그것들은 논쟁적일 수도 있다. 시민들이 어떤 고결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뇌물과 부패가 성행하게 된다. 이와 같은 정치체제 하에서는 모든 것이 돈으로 좌우된다. 왕 아래에서 누리던 평화는 왕이 없는 시기의 혼란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 된다.

이와 같은 약점을 방지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왕위가 어떤 가계에 의해서 상속되는 것이다. 승계의 질서는 선출의 불이익을 대신하여 왕이 죽었을 때 어떠한 논쟁도 피할 수 있다. 확실한 평화가 현명한 통치자보다 더 선호된 것이다. 즉 우둔한 자식을 선택할 위험성이 좋은 군주를 선택하기 위한 논쟁보다 선호된 것이다. 국민들은 그들 자신이 이러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도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을 명령하도록 키워진다면 모든 것이 그가 가진 정의감과 합리성을 빼앗도록 하는 것이다. 어린 왕자에게 통치의 기술을 가르친다는 것은 큰 고통이 따른다. 이러한 교육은 그들에게 유익해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국민들에게 복종의 방법을 가르치는 편이 낫다. 역사상 위대한 왕들은 통치를 위해서 길러진 왕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통치한다는 것은 많은 연습을 통해서도 잘 습득되지 않는 기술이다. 사람들은 명령하는 것보다 복종하는 것을 더 잘 배운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알아보는 가장 단기적이고 훌륭한 방법은 너를 제외한 다른 사람이 왕이 된 경우에 너는 무엇이 일어났으면 가장 좋을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통일성 부재의 결과는 정권의 불안정성이다. 이러한 정권은 지속적으로 고정된 목표와 일관성 있는 정책을 가질 수 없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국가를 이 원리에서 저 원리로 혹은 이 계획에서 저 계획으로 표류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황제의 궁전에서는 좀 더 교활한 움직임이 있다면 공화국은 좀 더 현명하다. 공화국이 좀 더 안정적이고 효율적이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왕들은 선왕의 정책을 거스르는 것이 보편적인 통치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일성의 결핍은 왕권을 옹호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기만의 술책을 형성하게 한다. 즉, 시민의 정부를 가사를 관리하는 정부로 군주를 가족의 아버지로 비유할 뿐만 아니라 군주에게 모든 그가 필요로 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으며 군주는 항상 그가 존재해야 하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가정 덕택에 군주의 정부는 명백하게 다른 모든 것보다 선호된다.

그러나 플라톤에 따르면 선천적으로 왕의 자질을 가진 사람들은 드물다. 또한 그러한 자질을 가질 사람이 운이 맞아 왕위를 차지할 수 있는 경우가 얼마가 되겠는가? 그리고 왕자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반드시 타락하게 된다면 통치하기 위해서 길러진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군주의 정부와 좋은 왕의 정부를 혼동하는 것은 계획적인 자기기만이다. 이러한 군주정 형태의 정부를 그 본질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보통의 혹은 최악의 군주가 지배하고 있을 때로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분노한 신이 우리들에게 폭군을 내렸기 때문에 그들은 신성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교훈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학적 이론보다는 단지 설교에 알맞은 논리이다. 기적을 약속하는 의사는 무엇을 약속할 수 있는가? 환자들에게 인내심을 가지도록 가르치는 것은 누구의 기술인가?

우리들 모두는 정부가 나쁠 때 그것을 참아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문제는 좋은 정부를 찾아내는 것이다.

[편집] 제7 장 혼합된 정부 형태들

엄격히 말해서 단순한 형태의 정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의 수반은 하위의 집행관료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분화는 때때로 영국과 같이 헌법상 기구가 서로 상호 의존적이어서 동등한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고 폴란드처럼 각 부분의 권력이 독립적이나 불완전하여 동등한 정도의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에는 정부는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고 국가는 유대감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다지 좋지 못하다. 단순한 형태의 정부와 복합된 형태의 정부 중 어느 것이 더 좋은 것인가? 이것은 정치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이며, 나는 이것들 중에 하나는 이미 대답을 하였다.

단순한 형태의 정부는 단순하기 때문에 좀 더 우수하다고 할 수 있다. 집행권력이 입법권력에 충분한 정도로 종속되지 못하였다면 정부를 분할하는 것으로부터 해결책을 도출할 수 있다.

아니면 정부를 주권자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것을 막는 중계적 권력기관을 만듦으로해서 두 개의 권력들 사이의 균형을 이루어내고 그들 각각의 권력을 확정해 낼 수 있다. 그 때 정부란 혼합된 형태의 것은 아니고 단지 부드럽게 완화시킨 형태의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동일한 처방으로서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 정부가 너무 느슨하다면, 위임을 통해서 정부 기능을 집중시킬 수 있다. 첫 번째의 경우는 정부를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두 번째의 경우는 오히려 그것을 강화시키기 위한 처방이다. 이것이 민주정부의 실재이다. 강한 것을 극대화시키거나 약한 것을 극대화시키거나 하는 것은 단순한 형태의 정부에서나 보여질 수 있는 것이며, 반대로 혼합 정부에서는 힘의 적절한 조절이 이루어진다.

[편집] 제8 장 모든 정부의 형태가 모든 국가에 알맞는 것은 아니다.

자유란 모든 상황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열매는 아니며 따라서 사람들의 능력 밖에 있을 수도 있다. 몽테스큐의 사상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것은 더욱더 확실하다. 그 생각에 도전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러한 생각은 굳어질 따름이다.

세상에 있는 어떠한 정부도 단지 소비를 할 뿐이며 어떤 것을 생산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정부가 소비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정부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노동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공적인 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게끔 하는 것은 사적인 생산물의 잉여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로부터 시민국가는 단지 사람들의 노동이 그들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 이상일 때 성립될 수 있다.

이러한 잉여는 세계의 모든 국가에 동일한 것은 아니다. 어떤 곳에서는 충분하나, 어떤 곳에서는 그것보다 좀 부족하며, 또 어떤 곳에서는 잉여가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오히려 부족한 곳도 있다. 이러한 차이는 토질의 비옥함, 토지가 필요로 하는 노동의 종류, 생산물의 특징, 거주자들의 강함, 그들이 필요로 하는 소비의 정도, 그 외 기타의 요소들에 의존한다.

덧붙혀 모든 정부는 동일한 속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탐욕스러운데 이러한 차이는 공적인 기여가 그들의 자원으로부터 더 멀리 있다면 그들은 더 부담스러워 한다는 원리에 기인한다. 이러한 부담은 정확한 기여의 양에 의해서 측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왔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가야만 하는 거리에 의해서 측정되어진다. 이러한 순환이 빠르고 잘 성립되어 있다면 지불되어야 하는 것이 많은지 적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은 항상 부유할 것이고 재정은 풍족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주는 것은 적고 또한 그 적은 것 또한 되돌아가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곧 지속적 지불로 인해서 지쳐가게 된다. 국가는 결코 부유해 질 수 없으며, 국민들은 가난하게 된다.

이러한 것은 국민과 정부 사이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세금은 더욱더 부담스러운 것이 됨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는 국민들은 최소한의 부담을 지게 되고, 귀족정에서는 그것보다 많은 부담을, 그리고 군주정에서 가장 많은 부담을 지게 된다. 그래서 군주정에서는 부유한 국가에 알맞은 정체이며, 귀족정은 중간 정도의 국가에 민주정은 작거나 가난한 국가에 알맞게 된다.

실제로 생각을 해보면 해볼수록 자유로운 국가와 군주정 사이에서는 이러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전자에서는 모든 것인 공통의 이익을 위해서 쓰여지는데 반해서 후자는 사적인 권력과 공적인 권력이 경쟁한다. 그래서 한 쪽이 우세해지면 반대로 다른 쪽은 그 쓰임이 감소하게 된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치하기 위해서 그들을 비참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어떤 환경에서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수 있는 자연적인 요소들이 있다. 심지어는 환경뿐만 아니라 거주민들의 특징을 문제 삼을 수도 있다.

노동에 대해서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메마른 땅은 개간되지 않고 버려져야 하며, 사람들은 야만적인 상태로 남겨진다. 사람들의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공급되는 땅에서도 어떠한 정치적 사회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야만적인 상태로 남겨진다. 땅이 비옥해서 조그마한 노력에도 큰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곳에서는 군주정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로 군주의 사치가 피지배인들의 생산된 잉여를 소비하게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잉여가 사적인 개인에 의해서 흩어지는 것보다는 정부에 의해서 흡수되는 것이 더 좋은 일이다. 내가 알기로는 물론 예외라는 것이 있지만, 이러한 예외도 자연적 질서로 되돌리는 혁명을 조만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그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들은 ‘일반적인 법칙’과 결과를 수정할 수 있는 ‘특정한 원인’을 구분해야 한다. 남쪽이 공화국으로 뒤덮혀 있고 북쪽은 군주정의 국가로 이루어져 있다면 기후라는 개념으로 독재란 더운 국가에 유리하고 야만은 추운 국가에 유리하다는 것이 여전히 사실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일반적인 법칙은 인정되어야 하며, 그것의 적용은 논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것은 매우 비옥한 추운 국가, 그리고 매우 메마른 남쪽 국가가 있다는 식으로 논쟁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작은 세세한 부분들을 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이다.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어느 누구도 생산, 힘, 소비 등의 요소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두 개의 동일한 크기의 국가를 생각해 보자. 한 국가는 5단위를 생산하고 다른 국가는 10단위를 생산한다. 앞의 국가의 거주자가 4단위를 소비한고 뒤의 국가는 9단위를 소비한다. 한 단위의 잉여가 앞의 국가는 5분의 1의 크기가 될 것이며, 뒤의 국가는 10분의 1의 크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두 개의 잉여 생산의 비율이 그들의 생산량의 크기에 반비례하게 된다. 그래서 5단위를 생산하는 국가는 10단위를 생산하는 국가에 비해서 두 배의 잉여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생산량이 두 배인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나는 추운 국가의 풍성함과 더운 국가의 풍성함을 동등하게 보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단은 동일하다고 가정하자. 예를 들어서 영국과 시실리를 비교해 볼 수 있고, 또한 폴란드와 이집트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그것들보다 더 남쪽에 아프리카나 인도가 있을 수 있으나 그것들보다 더 북쪽에는 아무 것도 없다. 농업 기술 상의 어떠한 차이가 생산량의 동등함을 달성하기 위해서 요구되는가? 시실리에서는 땅을 단순히 갈아놓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반면에 영국에서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들이 필요하겠는가? 동일한 생산물을 얻기 위해서 손이 더 가는 곳에서는 그만큼 잉여는 더 적게 된다.

동일한 사람들의 숫자를 가지고 있으나 더운 지방에서 더 적게 소비를 한다는 점을 더 지적해 보자. 기후가 사람들로 하여금 적당하기 유지하기 위해서 절제하기를 요구한다. 더운 지방에 살고자 하는 유럽 사람들이 그들의 식습관을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면 소화불량으로 죽게 될 지도 모른다. 샤르댕이 말한 바와 같이 아시아 사람들에 비한다면 우리들은 육식성의 야수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페르시아 사람들의 절제는 그들의 국가가 덜 경작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반대로 그들 국가가 거주민들이 덜 필요로 하기 때문에 먹을 것에 대해서 덜 부유하다고 믿고 있다. 그들의 검소가 척박한 토양의 결과라면 단지 가난한 자들만이 그래야 하는데 사실은 그들 모두 조금만 먹고 있다. 땅의 비옥도에 따라서 많이 먹고 적게 먹고를 찾기보다는 전 국가를 통해서 동일한 절제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자랑스러워하며, 그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이 다른 나라에 비해서 얼마나 우월한지는 그들의 체질이나 성격을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페르시아 사람들은 깨끗하고, 그들의 피부는 희고 섬세하며 부드럽다. 이에 반해서 유럽식의 생활방식으로 살고 있는 그들의 피지배인이라 할 수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은 거칠고 부스럼투성이며 그들의 몸은 살쪄서 둔하다.

적도에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일수록 더 검소하다. 그들은 좀처럼 어떠한 고기도 먹지 않으며, 쌀이나 옥수수 등이 그들의 주식이다. 인도에서는 수백만이 하루에 1페니 이하의 비용을 먹는 데 쓴다. 유럽에서는 남쪽 사람들과 북쪽 사람들의 식습관의 차이가 눈에 띈다. 스페인 사람들은 독일 사람들의 식사로 8일을 살 수 있다. 사람들이 좀 더 게걸스럽게 먹는 곳에서는 사치가 사람들이 소비하는 물건으로 옮겨 간다. 영국에서 고기와 함께 식탁에 실려간 것들이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이탈리아에서는 설탕과 꽃으로 실컷 즐긴다.

옷에 대한 사치도 유사한 차이점을 보여준다.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곳에서는 사람들은 단순한 옷을 많이 입는다. 단지 보여 주기 위해서 옷을 입는 곳에서는 사람들은 실용성보다는 보여주는 것에 더 신경을 쓴다. 그리고 옷은 그 자체로 사치품이다. 나폴리에서는 금으로 수놓아 진 자켓과 양말을 신지 않은 채 포실리포를 산책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건물에서도 똑같다. 사람들이 기후에 별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때 건물에 있어서 웅장함을 중요하게 여긴다. 파리나 런던에서는 사람들이 따뜻하고 편안하게 집을 짓고자 한다. 마드리드에서는 그들은 거대한 응접실을 갖추고 있으나, 닫을 창문은 없고 그들의 침실은 마치 쥐구멍 같다.

음식들은 더운 나라에서 좀 더 내실있고 부유하다. 이러한 것이 세 번째 차이점으로 두 번째에 또한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왜 이탈리아에서는 그렇게 많은 채소를 먹는가? 왜냐하면 채소는 영양가도 많고 훌륭한 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채소는 젆 영향가도 없으며 식탁에서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경작지를 가지고 있으며 경작한 만큼 소비한다. 프랑스의 밀보다 열등한 바르바리의 밀이 더 많은 밀가루를 생산하고 프랑스의 밀이 북쪽의 밀보다 더 많이 생산한다는 것을 실험이 증명하고 있다. 이로부터 유사한 변화가 적도에서 극지방으로 갈수록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 동일한 양의 생산물 속에 더 적은 양의 영양분을 가지는 것이 불이익이 될 수 있는가?

이렇게 다양한 생각을 해 보기 위해서는 먼저 더운 국가가 더 적은 거주자를 필요로 하고 부양해야 할 사람들은 더 많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은 독재의 이익으로 두 배의 잉여를 공급한다. 동일한 사람들에 의해서 점령된 땅이 크면 클수록 어려운 폭동이 더 많이 발생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거주민들은 빨리 그리고 비밀스럽게 모일수가 없다. 반면에 정부가 음모를 발견하고 의사소통을 방해하기란 쉽다. 반대로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있으면 정부가 주권자를 침해하기 쉽지 않다. 대중의 지도자는 군주가 자신의 의회에서 하듯이 자신의 사적인 공간에서 깊이 숙고하며, 대중들은 군대가 그들의 막사에 모이듯 공적인 공간에 재빠르게 모인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것은 먼 거리를 두고 행동하는 폭압적인 정부의 이익이 된다. 베개로서의 역할을 하는 힘의 거점의 도움으로 정부의 힘은 지렛대의 원리에 의해서 거리에 비례해서 증가한다.

반대로 국민들의 힘은 그 힘이 집중될 때 효과가 있다. 총의 화약이 땅에 떨어져서 단지 가루 하나 하나가 연소하는 것과 같이 그것이 흩어져버리면 별로 효과가 없다. 결과적으로 가장 인구가 없는 국가는 전제 군주정에 알맞다. 거친 야수는 단지 사막을 통치할 뿐이다.

[편집] 제9 장 좋은 정부의 표징

그러므로 절대적 의미에서 좋은 정부가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그것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면 국민의 절대적 혹은 상대적 위치의 조합에 따라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다.

그러나 만약에 국민들이 잘 통치되고 있는 징표가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이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각각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답하고자 하기 때문에 쉽게 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피지배인들은 공공의 안녕에 중점을 둔다. 하지만, 시민들은 개인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전자는 소유의 안정성을 고려하지만, 후자는 개인의 안전을 생각한다. 피지배인들은 좋은 정부를 엄격함이라고 생각하는 데 반해서 시민들은 좋은 정부를 관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자는 범죄에 대해서 형벌이 가해지를 원하지만, 후자는 그것이 예방되기를 원한다. 피지배인들은 자신이 그들의 이웃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기를 원하지만, 시민들은 이웃들에 의해서 무시되기를 더 선호한다. 전자는 돈이 순환하는 한 만족스러워 하며, 후자는 국민들이 빵을 가질 수 있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점들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어떤 더 발전된 것을 찾을 수는 있는가? 도덕적 차원에서는 어떠한 정확한 측정 표준을 가져다 줄 수 없다. 우리들이 표징들에 대해서 동의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의 가치 정도에 대해서 어떻게 동의할 수 있는가?

나는 항상 사람들이 이러한 단순한 표징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또한 그와 같은 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불성실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치적 결사체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성원들의 보호와 번영이다. 이것 이상을 보지 말라. 모든 상황이 동일하다면 자연적 인구 증가나 이민이 들어오는 식의 외부적 요소를 제외하고 시민들이 증가하는 정부가 의심할 나위 없이 최상의 정부이다. 사람들이 줄어드는 정부는 최악의 정부이다. 통계학자들이여! 이것은 당신들의 문제이다. 계산하고 측정하며 또한 비교하라.

[편집] 제10 장 정부의 폐해와 정부의 퇴보하는 경향

특정한 의지가 멈추지 않고 일반의지에 대항하여 행동하듯이 정부는 주권자에 대해서 계속해서 대항해서 권력을 행사한다. 이러한 권력 행사가 증가하면 할수록 헌법은 좀 더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고 이러한 상황에서는 군주의 의지에 대항해서 균형을 맞춰줄 수 있는 뚜렷한 협력적 의지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조만간 피할수 없이 군주가 주권자를 압박하고 사회적 계약을 파괴하게 된다. 이러한 것은 죽음이 인간의 몸을 파괴하는 것과 같이 정치체제가 발생하면서 본질적으로 그것을 파괴하려는 경향 발생한다는 것은 말해 준다.

정부가 쇠락해 가는 것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그 스스로 계약을 체결하는 때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가 와해되는 것이다.

정부는 그 구성원들이 다수에서 소수로 바뀌게 될 때 계약을 갱신하게 된다. 즉 민주정에서 귀족정, 혹은 귀족정에서 왕정으로 바뀔 때를 말한다. 이것은 정부의 자연적 속성이다.

[1]

만약에 그것이 소수에서 다수로 반대 방향으로 진행한다면 정부는 느슨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역으로의 진행은 불가능하다.

실제로 정부는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기에 에너지를 다 써 버려 너무 약해진 상태가 아니면 자신의 형태를 바꾸려하지 않는다. 정부가 확장해 가는 동안 느슨해진다면, 정부의 힘은 절대적으로 영이 되어 버려서 거의 생존할 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정부가 느슨해지기 시작한다면 그 메카니즘에 다시 활력을 불어 넣거나 단단하게 조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정부에 의존하고 있는 국가가 곧 멸망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국가의 와해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먼저, 통치자가 법에 따라 국가를 운영하지 않고 주권자의 권력을 침해할 때 발생한다. 그 때 주목할 만한 변화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계약을 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것에 의해서 국가는 와해되고 그 속에서 다른 형태의 것이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정부가 주권을 빼앗는 즉시 사회적 계약은 파괴되고 모든 보통의 시민은 복종할 때 도덕적 자발이 아니라 힘에 의한 강제를 통해서 강요된다.

동일한 상황이 통합적으로 행사되어야 할 권력이 정부의 구성원들에 의해서 각각 행사될 때에도 발생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지 위법 행위에 불과하고 더 큰 혼란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행정관료가 존재하는 만큼의 통치자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정부보다 더 많은 숫자로 쪼개진 국가는 멸망하게 되거나 혹은 그것의 형태를 바꾸게 된다.

정부가 와해되었을 때 정부의 폐해는 일반적으로 무정부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진다. 좀 더 정확히 민주정은 중우정으로, 귀족정은 소수 귀족 정치로 타락하게 된다. 그리고 군주정은 전제정치로 타락한다. 여기서 마지막 것은 뜻이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이해되기를 전제 군주는 힘의 의해서 다스려지며 정의와 법은 고려하지 않는 자를 말한다. 전제 군주는 정확히 말하면 그럴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사칭하는 자이다. 그리스 사람들이 전체 군주라는 단어를 이렇게 이해하였다. 그들은 그것을 무차별적으로 그들의 권위가 정당하지 않으면 좋은 군주나 나쁜 군주나 모두 그렇게 불렀다. 결과적으로 전제 군주는 압제자와 완벽하게 동일한 의미로 쓰여진다. 다른 사물에는 다른 이름이 붙혀져야하기에 나는 왕권을 침탈하는 자를 전제 군주(tyrant)라 부르고 주권자의 권력을 침탈하는 자를 독재자(despot)로 부르기로 하겠다. 전제 군주는 법에 반대하여 법에 따라 통치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이다. 독재자는 그 자신을 법 위에 놓는 자이다. 결과적으로 전제 군주가 반드시 독재자일 필요는 없지만, 독재자는 항상 전제 군주가 된다.

[편집] 제11 장 정치체의 사멸

잘 성립된 국가의 자연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경향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스파르타와 로마가 멸망한다면, 어떤 국가가 영원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영원한 헌법을 만들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헌법을 영원하게 만들 꿈을 꾸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단지 불가능한 것을 하려고 하거나 인간의 것에 속하지 않는 영원성을 인간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스스로 우쭐대는 것을 피하는 것으로 단지 성공할 수 있다.

정치체제는 인간의 몸과 동일하게 태어난 순간부터 죽어가기 시작하며, 그 자신 안에 자기 파괴의 원인을 내포하고 있다. 어떤 종류의 체제도 크든 작든 그 자신을 보존할 수 있도록 건강한 헌법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형성은 자연의 작품이다. 국가의 형성은 인공의 결과물이다.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이지만, 국가의 생명력을 최선의 헌법을 만들어 연장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 안에 있다.

정치적 생명의 원리는 주권적 권위 안에 존재한다. 입법적 권력은 국가의 마음이요, 행정적 권력은 국가의 모든 부분을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두뇌이다. 두뇌가 마비되더라도 개인은 살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둔하지만 생존할 수 있으나, 심장이 박동을 멈춰버리는 순간 생명체는 죽을 수밖에 없다.

국가가 살아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법을 통해서만이 아니다. 그것은 입법적 권력을 통해서이다. 어제의 법은 오늘을 묶어내지는 않으나, 침묵은 암묵적 동의가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그들이 한번이라도 그들의 의지가 있다고 선언한 것은 최소한 그것이 취소되지 않는 한 그들은 항상 그에 대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왜 고대의 법이 그렇게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단지 그것이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법이라고 믿고 있음에 틀림없다. 주권자가 그 법을 유익한 것으로 지속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 법들은 몇 번이고 취소되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끊임없이 잘 구성된 국가에서는 법이 약해지기는커녕 계속적으로 힘을 얻어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편견은 그들을 매일 더욱더 존경하게 만들었다. 반대로 법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더 약해지는 곳에서는 입법적 권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는 죽어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편집] 제12 장 입법권력은 어떻게 스스로를 유지하는가?1

주권은 입법적 권력과 다름 아니며, 법은 단지 일반의지의 진실된 행동이므로 주권은 단지 사람들이 모였을 경우에만 실행 가능하다. 사람이 모였다. 그것은 오늘날에 있어서 정말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2,000년 전에는 그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게 많이 변하였는가?

도덕적 영역에서의 가능성의 경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덜 좁다. 그것은 우리들을 제한하는 우리 자신의 약점이자 악덕이며 편견이다. 천한 마음씨는 위대한 존재를 믿지 않으며, 질 낮은 노예들은 자유라는 단어를 조롱한다.

무엇이 하여졌는지의 관점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자. 나는 고대의 그리스 공화국에 대해서 말하지는 못하나, 로마 공화국은 거대한 국가이며, 로마라는 도시는 거대한 도시인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인구 조사에서 4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무기를 날랐다고 하며, 피복속인, 외국인, 여자, 어린이들, 노예들을 제외하고도 4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마도 수도와 그 주변의 사람들을 자주 한 곳에 모으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은 몇 주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모였고, 어떤 경우에는 일주일에 몇 번씩 모이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주권자의 권리를 행사할 뿐만 아니라 정부의 부분이였다. 그들은 어떤 일에 대해서 다루었으며, 어떤 사건에 대해서는 재판하기도 하였다. 공공 의회에 모인 전체 사람들은 행정관들의 역할을 시민들의 역할만큼이나 자주 입법하였다.

국가의 초기 역사로 되돌아 가면 우리들은 고대 정부들의 대다수들, 심지어는 마케도니아나 프랑크와 같은 군주제 국가에서조차도 유사한 모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경우에서도 내가 인용한 그 사실은 우리들의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해 준다. 그것은 실제에서 가능성을 추론해 낼 수 있는 나에게는 좋은 논리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편집] 제13 장 입법권력은 어떻게 스스로를 유지하는가?2

국가의 모든 법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데 사람들이 한 번 모여서 헌법을 구성하는 것으로는 충분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영원한 정부를 만드는 데도 행정관료들을 선임하는 데 있어서도 충분하지 않다. 예상하지 못한 사건에 대비해서 만든 비상적인 모임이외에도 어떤 것도 폐지하거나 중단할 수 없는 고정되고 정기적인 모임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임명된 날에 사람들은 곧바로 어떤 형식적인 소집 없이 법 그 자체의 의해서 소환된다.

날짜가 정해진 이러한 모임과는 별도로 행정관료들에 의해서 소환되지 않는 사람들의 어떤 모임이 비법적으로 열려야만 하며, 모임의 순서는 법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앞의 그 모임이 행한 모든 것은 무효이다.

법적인 모임이 얼마나 자주 있는지에 관해서 이것은 미리 어떤 정확한 규칙을 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다양한 환경에 의존한다. 사람들은 단지 일반적으로 정부가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잇으면 주권자는 의회에서 더 자주 만나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도시에서 유익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여러 개의 도시로 이루어져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주권자의 권위가 나누어져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도시들을 예속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도시에 주권자의 권위가 집중되어야 하는가? 나는 그 어느 것도 행해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자 한다. 첫 번째의 경우는 주권자의 권위는 단지 하나의 유일한 단위이다. 그것은 파괴되지 않는 한 나뉘어질 수 없다. 두 번째의 경우는 국가가 그러하듯이 도시는 합법적으로 다른 도시에 예속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치체의 본질은 자유와 복종의 결합에 놓여 있다. 그래서 피복속인과 주권자는 동일의 상관물인데 이 동일한 상관물이란 단일한 단어 ‘시민’이라는 것에 함께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나는 몇몇 도시를 하나의 국가로 묶는 것은 항상 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단위를 형성하고자 하는 누군가는 자연적 불이익을 피할 수 있다고 스스로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 작은 국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큰 국가의 악에 대해서 불평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작은 국가가 그리스의 도시 국가가 거대한 왕에게 저항했듯이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오스트리아의 왕가에 대항했듯이 큰 국가에 저항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주어질 수 있는가?

국가가 적당한 경계로 한정될 수 없다면 하나의 해결책이 있다. 그것은 고정된 수도를 가지지 않는 것이고 정부의 위치를 하나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시키고 각각 차례로 국가의 각 계급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영토들에 사람들을 균등하게 살게 하고 각자에게 동일한 권리를 부여하며 모든 지역에 동일한 부와 생활을 가질 수 있게 하라. 이런 방법에 의해서 가능한 한 국가는 즉시 강성해지고 잘 통치될 수 있을 것이다. 도시의 벽은 시골 집의 파편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기억하라. 내가 수도에 건설되고 있는 대저택을 볼 때마다 나는 전 국토가 피폐한 집으로 뒤덮이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편집] 제14 장 입법권력은 어떻게 스스로를 유지하는가?3

사람들이 법적으로 주권자의 이름으로 모인 경우 정부의 모든 지배권은 중단된다. 집행권력은 중단되고 가장 비천한 사람들의 지위도 가장 높은 집행관료들의 지위만큼이나 신성 불가침의 것이 된다. 왜냐하면 대표된 사람들이 참여한 상황에서는 또 다른 어떤 대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의 의회에서 발생한 혼란의 대부분은 이러한 규칙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소홀히 대해진 결과로 발생하였다. 집정관은 사람들의 사람들 사이의 사회자일 뿐이고 호민관은 단지 대변자이며[2], 원로원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러한 중단은 통치권자가 누가 우월한 자인지를 알아야 할 때 통치권자에게 경계해야 함을 알려준다. 정치체의 방패이자 정부의 브레이크가 되는 의회는 항상 행정관료들에 대한 악몽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행정관료들은 시민들이 의회에 대해서 반대하도록 문제를 만들고 그와 관련된 약속을 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시민들이 자유보다는 탐욕스럽고 겁이 많으며 무기력하고 평온함을 찾을 때 그들은 정부의 배가된 노력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 결과로 상대방의 힘이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것에 대해서 주권자의 권위는 결과적으로 쇠퇴하고 공화국의 다수는 그들의 시간이 되기 전에 멸망해 버릴 것이다.

주권자의 권위와 전제적인 정부 사이에는 지금 우리가 말해야만 하는 그 사이에 존재하는 중계적인 권력이 있다.

[편집] 제15 장 대리인 혹은 대표자

공공서비스가 시민들의 주요한 관심사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리고 그들이 그 스스로 국가에 복무하기보다는 돈으로서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자마자, 국가는 이미 멸망에 가까워진 것이다. 군대가 전쟁을 위해서 행진할 필요가 있을까? 그들은 용병을 쓸 것이며 그 자신은 집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게으름과 돈 덕분에 그들은 나라를 노예화시키는 군인과 그들을 팔아버리는 대리인으로 인해서 속임을 당하게 된다.

개인의 복무를 돈으로 바꾸는 것은 금전에 대한 욕심이요, 안락에 대한 갈망이며, 상업적 갈구이다. 사람들은 쉽게 휴식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이익의 일부를 포기한다. 이와 같이 돈을 사용하게 되면, 너는 곧 족쇄에 매이게 된다. 재정(finance)이라는 단어는 노예라는 뜻이다. 진정한 공화국에서는 그것은 알려져 있지 않는 단어이다. 진정한 자유로운 국가는 자기 손으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하며 돈에 의존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무 면제를 위해서 돈을 지불하기는 켜녕 그들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 스스로 돈을 지불한다. 나는 강제적인 서비스가 세금보다 더 자유에 가깝다고 믿는다.

국가가 잘 구성될수록 공적인 사무가 시민들의 마음 속에 사적인 것보다 우선시되는 관습을 가지고 있다. 공공의 행복의 총량이 개인적 행복의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작기에 사적인 일은 더욱더 작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잘 통제되는 국가일수록 모든 사람들은 의회에 급히 서둘러 모이게 되고 나쁜 정부 하에서는 의회에서 행해진 것에 대해서 작은 이익을 얻게 되기 때문에 의회로 가지 않는다. 좋은 법은 사람들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 낸다. 나쁜 법은 이와는 반대다. 누군가가 국가의 일에 대해서 말하자마자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야?”라고 말하게 된다면 그 때 그 국가는 멸망해 가고 있음이 틀림없다.

애국심이 식어가고 사적인 이익에 대한 추구가 활성화되며 국가의 광대함, 정복, 정부권력의 남용 등 모든 이러한 것들이 대리인 혹은 대표자의 편리성을 제안하는 논거로 쓰인다. 어떤 국가에서는 이것을 제3의 영역이라고 감히 부른다. 사적인 이익의 영역이 제1, 제2의 영역이 되며 공적인 영역이 단지 세 번째 순위가 되는 것이다.

주권이라는 것은 대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양도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주권의 핵심은 일반의지이며 의지는 그것이 일반의지이든 그 밖에 다른 어떤 것이든 간에 대표될 수 없는 것이다. 그 의지를 매개할 수 있는 가능성이란 없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의 대리자는 그들의 대표도 아니고 대표자일 수도 없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기관에 불과하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결정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스스로 인증하지 않은 법은 무효이다. 그것은 전혀 법이라 할 수 없다. 영국 사람들은 그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큰 실수이다. 그들은 단지 의회의 구성원을 선출할 때만 자유롭다. 구성원이 선출되자마자 사람들은 다시 노예로 되돌아 간다. 영국 사람들은 짧은 자유의 사용이 그것을 그 이후의 시간에 잃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대표라는 것은 현대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린 사악하고 불합리한 제도인 봉건적 정부에서 나왔다. 공화국에서 그리고 고대의 군주제 국가에서도 대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호민관을 매우 신성하게 여겼던 로마의 경우는 주목할 만하다. 어느 누구도 인민들의 기능을 침탈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권위를 어느 한 명의 권위자에게 넘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락쿠스 시절에 발생했던 것으로부터 군중들이 때때로 발생시킬 수 있는 혼란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었다.

권리와 자유가 모든 것인 곳에서는 불편함은 아무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정당한 방법으로 주어졌다. 호민관이 감히 무엇을 하지 못하도록 릭토르라는 관리가 선임되었고 릭토르가 그들을 대표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았다.

호민관이 인민들을 어떻게 대표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주권자를 어떻게 대표하는지를 고려해 보면 된다. 법이란 것은 단지 일반의지를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입법권력 속에 일반의지의 대표라는 것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집행권력 속에서는 그러한 대표가 있을 수도 있으며 있어야만 한다. 그 집행권력이란 단지 법을 적용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좀 더 주의깊게 살펴본다면 매우 적은 국가만이 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확실히 집행권력의 어떠한 부분도 차지하고 있지 않는 호민관은 결코 그 자신의 사무적 권리로 로마 사람들을 대표할 수 없으며,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원로원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람들이 해야만 하는 모든 것은 그 스스로 해야만 했다. 그들은 계속적으로 시장에 모여 있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온화한 기후에 살고 있어서 결코 탐욕스럽지 않았으며 노예들이 그들의 일을 해 주었고 그들의 주요한 관심사는 그들의 자유였다. 같은 조건이 달성되지 않고 동일한 권리를 어떻게 누릴 수 있을까? 당신의 거친 기후는 더 많은 필수품[3]을 요구할 것이다. 일년의 반 정도가 공공 장소에서는 사람들이 없을 수도 있다. 당신의 닫혀진 입은 공공 장소에서 어떠한 것도 들리지 않게 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자유보다는 당신의 이익을 더 좋아하게 될 것이며, 당신은 노예가 되는 것보다 굶주리는 것을 더 두려워하게 된다.

어라? 그렇다면 자유라는 것은 단지 노예제도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는 것인가? 아마도 그렇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 이외의 모든 것은 그들 자신의 불리한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시민사회는 더욱더 그렇다.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희생하면서 단지 자신의 자유를 보존할 수 있는 불행한 상황이 있다. 그리고 시민들은 단지 노예가 절대적으로 노예의 역할을 해 줄 때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스파르타의 상황이다. 당신은 근대 사회를 살고 있다. 당신은 노예를 가질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이 바로 당신 자신의 노예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가지고 당신의 자유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당신이 어떠한 특혜를 뽐내는 것은 공허한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노예가 필요하다든지 노예제도가 합리적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그 반대의 것을 증명하였다. 나는 단순히 왜 근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그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으면서 대표들을 가지고 고대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이 대표제를 수용하는 순간 이미 그들은 더이상 자유롭지 못하다.

모든 것이 주의깊게 살펴졌으나, 공화국이 작지 않다면 주권자가 그들 권리의 행사를 계속해 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국가가 매우 작다면 예속되지 않을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나는 나중에[4] 어떻게 거대 인민의 방어적인 힘이 자유로운 정부와 작은 국가의 훌륭한 질서와 결합할 수 있을 것인지 살펴볼 것이다.

[편집] 제16 장 정부의 설립은 계약이 아니라는 것

입법권력이 한 번 잘 성립되면, 유사하게 집행권력을 성립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단지 특별한 행동들에 의해서 운영되는 후자는 본질적으로 전자와 다르고 분리되는 것이다. 주권자가 집행권력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있어야 하는 것’과 ‘있는 것’ 사이를 혼동해서 더 이상 사람들은 법인 것과 법이 아닌 것을 알지 못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폭력을 막기 위해 성립된 정치체제는 반대로 바로 그 폭력의 먹이감이 되고 만다.

모든 시민들은 사회적 계약에 의해서 동등하게 취급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자신이 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이 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모두는 모두가 해야 할 것을 규정할 뿐이다. 왜냐하면 주권자는 정부를 성립시키는 데 있어 통치자에게 정치체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는데 필수불가결한 바로 이러한 권리를 부여한다.

몇몇 이론가들은 이러한 설립 행위가 국가와 행정관료들 사이의 계약이고 그 계약은 두 당사자들 사이에 한 쪽이 명령하고 다른 한 쪽은 복종을 하는 조건으로 명기된 것이라고 한다. 나는 확신하기로 이것은 이상한 계약을 허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좀 더 그 이론이 합리적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최고 권위는 양도될 수 없는 것처럼 수정될 수도 없다. 제한하는 것은 곧 파괴하는 것이다. 주권자가 그 자신을 우월한 자에게 바치는 것은 불합리하고 자기 모순적인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사람들 사이의 계약은 특정한 계약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계약은 법이 아니고 주권자의 행위이다.

계약 당사자들은 단지 자연법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자신의 손에 힘을 가진 이는 항상 무엇을 해야 할 지에 관해서 주인이 되기에, 이것은 곧 당신이 기꺼워 하는 것을 나에게 돌려주는 조건으로 내가 나의 모든 재산을 주겠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사람의 행동에 계약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

국가 안에는 단지 하나의 계약만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태초의 계약을 파괴하지 않는 공적 계약을 상상할 수 없다.

[편집] 제17 장 정부의 설립

그렇다면 개념적으로 정부를 형성하는 계약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먼저 이러한 계약이 법의 성립과 법의집행이라는 두 가지로 구성된 복잡한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 주권자는 성립된 정부가 존재하여야 한다는 것을 규정하게 된다. 이러한 계약은 명백하게 법이다.

두 번째로 국민들이 성립된 정부에서 일할 행정관료를 임명하게 된다. 이러한 임명은 특별한 행위이기 때문에 이것은 법이 아니고 정부의 기능에 불과하다.

정치체는 모순되어 보이는 활동들을 화해시키는 놀라운 특징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러한 활동들은 어떤 명시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것 없이 단순히 모두의 모두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통하여 시민들은 행정관료가 되며, 일반적인 계약은 특수한 계약으로, 그리고 법은 그것의 집행으로 바뀌는 그러한 방식으로 주권자의 갑작스런 변화에 의해서 성립된다.

관계의 이러한 변화는 실제로 예가 없는 사변적인 것인 아니다. 그것은 영국 의회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곳에서는 어떤 사건에 대해서 하원이 그 일을 좀 더 능숙하게 논의하기 위해서 전체 의회의 위원회로 스스로를 변형시킨다. 그래서 이전에는 임시 기구인 ‘주권을 가진 자들의 모임’ 속의 단순한 위원회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나중에 그 의회는 전체 인민의 의회로서 권능을 가지는 그 자신에게 전체 의회의 위원회로서 의제가 설정되고 논의된 것에 관하여 보고하게 된다.

일반의지의 단순한 결행에 의해서 정부가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은 민주정부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과정 뒤에 채택된 정부가 민주정부의 형태라면 임시적인 정부가 권력을 잡고 있거나, 법에 의하여 기술된 정부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주권의 이름으로 성립한 것이 있게 된다. 그리고 나서 모든 것이 질서가 잡히게 된다. 앞 장에서 성립된 원리들을 포기하지 않고 어떤 다른 합법적인 수단으로 정부를 성립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편집] 제18 장 정부의 압제를 방지하는 방법

이러한 설명으로부터 결론적으로 16장을 확신하면서 정부를 설립하는 조치는 계약이 아닌 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집행권력을 가진 자들은 국민들의 주인이 아니라 단순한 사무 집행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을 마음 내키는 대로 임명하고 해임할 수도 있다. 국민들은 단지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할 뿐이다.

국민들이 세습적인 정부를 설립했다면, 국민들은 어떠한 부담을 지니지는 않는다. 세습적인 정부는 단지 임시적인 정부 형태로 국민들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부가 성립되지 이전까지 존재한다.

그리고 사실 그러한 변화는 항상 위험하다. 사람들은 공공복지와 양립하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미 성립된 정부를 건드릴 수 없다고 하지만 그와 같은 것은 정치적인 교훈에 해당하는 것이지 법적인 측면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국가가 반드시 장군에게 군사적인 권위가 있듯이 행정관료에게 시민적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또한, 모든 경우에 있어서 합법적인 행위와 선동적인 폭동을 구별한다거나, 전체 국민들의 의지를 어떤 파벌의 외침과 명확하게 구분해 내기 위해서 요구되는 규칙들을 면밀하게 살필 수는 없다. 결국 이것은 국민들이 법의 엄격한 적용을 받는 것보다 사회적으로 해로운 요구들에 굴복하는 것을 피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통치자는 바로 이러한 의무로부터 국민들을 무시하고 권력을 획득할 기회를 끌어낸다. 왜냐하면 단지 통치자의 권리를 행사하는 동안에 그가 그의 권리를 확대하고 좋은 정부를 재구성하기 위해서 계획된 의회를 방해하기란 쉽다. 결과적으로 통치자는 사람들이 침묵을 깨지 못하도록 하며, 그들이 부정행위를 저지르도록 조장한다. 또한, 그 자신의 취향대로 입이 닫쳐진 사람들의 암묵적 동의를 가정하여 행동하고, 감히 말하려는 사람들을 벌주게 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일 년 동안의 임기를 가진 로마의 10대관이 다른 일 년의 임기를 더 늘리게 되고 마침내는 그들 권력이 영구적으로 보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게 되면서 로마의 민회는 더 이상 소집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그리고 민중의 힘으로 권력을 무너뜨린 세계의 모든 정부는 조만간 이러한 수단으로서 주권을 가진 자들을 압박하였다.

내가 이미 말한 정기 의회가 공식적인 소집을 요구하지 않는 비정기적인 의회라는 악을 방지하고 연기하는 정당한 수단이다. 왜냐하면, 통치자는 그 때서야 법을 어긴자, 그리고 국가의 적이 아닌 이상 그들의 모임을 방해할 수 없게 된다.

사회적 계약을 유지하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이러한 의회가 열릴 때, 절대로 무효로 될 수 없고 분리되어 투표되어져야 할 두 가지 의제가 있다.

첫 번째 : “주권자가 기꺼이 현재의 정부 형태를 유지하고자 하는가?”

두 번째 : “기꺼이 사람들이 행정부를 현재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맡길 것인가?”

나는 여기서 가정하기를 나는 사회적 계약을 제외하고 국가 안에서 취소할 수 있는 기본적인 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국민들이 일반적인 동의로서 이러한 계약을 끝내기 위해서 모였다면 어느 누구도 그것이 합법적인 마침이였음을 의심할 수 없다. 그로티우스가 생각하기를 모든 시민들은 국가에 대한 그들의 일체감을 폐기할 수 있으며, 국가로부터 계약의 철회를 통해서 그의 자연적 자유와 재산을 회복할 수도 있다.[5] 그리고 묶여진 모든 시민들이 그들 개인 각각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비합리적인 일이다.

[편집] 제4 권

[편집] 제1 장 일반의지는 파괴될 수 없는 것

한 데 모인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일체로 생각하는 한 그들은 단지 하나의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의지는 그들의 보존과 복지로 향해 있다.

그 때 국가의 모든 살아 있는 세력들은 원기 왕성한 상태에 있다. 이러한 원리는 분명하고 명확하다. 그들은 양립하거나 갈등하는 이익을 동반하고 있지 않다. 평화, 단결, 평등은 지적 궤변의 적이다. 정직하고 순박한 사람들은 그들이 단순하기 때문에 속이기 어렵다. 복잡하고 어려운 논의가 그것들을 능가하지 못한다. 그들은 누군가를 속일 정도로 세련되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 중에는 떡갈나무 아래에서 일군의 농부들이 국사를 논의하지만 항상 현명하게 행동하는 바로 그런 경우라는 것을 알 때, 다른 국가의 세련됨을 경멸스럽게 우리가 바라봐야 되지 않을까?

이와 같이 다스려지는 국가는 매우 적은 수의 법을 가지고 있고, 새로운 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을 때면 언제나 그러한 필요는 어느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그러한 법을 제안한 사람이 단지 모두가 이미 느끼고 있는 것을 자신의 목소리로 내고, 그가 모든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자마자 이미 이렇게 결정된 것을 입법화 하는데 어떠한 음모나 달변도 필요가 없다.

이론가들을 잘못 이끄는 것은 시작부터 잘못 형성된 국가를 본 결과로 그들은 그와 같은 체제가 유지되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찌들어 있다. 그들은 교활한 웅변가가 파리나 런던의 사람들을 설득해서 범죄를 저지르게 한다는 어리석인 생각을 비웃는다. 하지만, 크롬웰이 베른[6] 사람들에 의해서 강제노역을 하고 보퍼트 공작이 제네바[7] 사람들에 의해서 감옥에 갇힌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사회적 결속이 느슨해지고 국가가 약해지면, 공동의 이익은 부패해지고 반대자를 만나게 된다. 선거는 더 이상 만장일치제가 아니며 일반의지는 더 이상 모두의 의지가 아니다.

결국에는 멸망의 순간에 국가는 비어있고 환상에 젖은 형태로 유지되고 사회적 결속은 모두의 가슴 속에서 파괴되었고 가장 미천한 이익이 공공선이라는 신성한 이름으로 활보하고 다닐 때 그 때 일반의지는 침묵을 지키게 된다. 비밀스런 동기로 움직여지는 사람들은 시민으로서 말하기를 중단하고 법으로 가장한 사적 이익을 그들의 최종 목표로 간주하는 사악한 명령을 법으로 제정하게 된다.

이러한 것이 일반의지가 소멸되고 부패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변화지 않고 부패하지도 않았으며 여전히 순수하다. 단지 일반의지가 그것을 압도하는 다른 의지에 종속되었을 뿐이다. 개인은 그 자신의 이익을 공익과 분리해 내는데 있어서 완전하게 분리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공공의 해악에 기여하는 부분은 배타적인 이익과 비교해서 하찮게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사익과 관련되지 않은 곳에서는 그 자신의 이익대로 공적인 재화를 쓰려고 한다. 심지어 그 자신의 투표권을 돈으로 팔 때도 그는 일반의지를 소멸시키지는 않는다. 단지, 그것을 침해할 뿐이다. 그가 저지른 과오는 질문의 형식을 바꾼 것이고, 그에게 질문된 것으로부터 다른 어떤 것을 대답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투표권으로서 국가에 가장 이익에 되는 것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대신에 그는 이 사람 혹은 이 정당에 어떠한 이익이 있는지를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의회를 통제하는 현명한 방식은 일반의지를 지지하지 않으려고 하면 된다.

나는 여기서 주권자의 행동으로서 투표의 권리에 대해서 많은 것을 설명했다. 이러한 권리는 시민들로부터 함부로 빼앗을 수 없는 것이며 말할 수 있고 제안할 수 있고 나누고 논쟁할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다. 정부는 그 구성원들에게 이러한 권리를 나누는 데 신중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중요한 주제를 하나의 장으로 모든 것을 다룰 수 없어 분리된 장으로 나누어서 다루기로 한다.

[편집] 제2 장 참정권

이전 장에서 말해진 것으로부터 보자면 공적인 일이 행해지는 방법은 명확하게 도덕성의 정확한 수준이 되고 국가의 건강성을 보여준다. 의회에서 이루어진 통치가 조화를 잘 이루면 이룰수록 여론은 만장일치에 가까워지고 일반의지가 우세해진다. 반면에 긴 토론과 의견의 불화 그리고 혼란은 특정 이익의 우세와 국가의 쇠락을 증명한다.

로마의 최전성기 때조차도 귀족 계급과 평민 계급 사이의 다툼이 로마의 의회를 혼란하게 한 것처럼 두 개 혹은 여러 개의 명령이 헌법 속으로 들어갈 때는 이러한 것은 덜 명백한 듯 보인다. 그러나 통치에서의 이러한 예외는 실제보다 더 명백하다. 왜냐하면 로마에서 정치체 속에 잠재해 있는 본질적인 약점의 결과로 하나의 국가에 두 개의 국가가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조차도 사람들의 투표는 귀족들의 방해가 없을 때는 평화롭게 잘 진행되었으며 투표권은 다수에게 주어졌다. 시민들이 하나의 이해관계를 가질 때 사람들은 하나의 의지를 가졌다.

또 다른 혼란기 때 만장일치가 되살아 났다. 고역 속으로 빠져 든 시민들은 더 이상 자유도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였다. 두려움과 아첨이 투표를 환호와 갈채로 바꾸어 버렸다. 사람들은 더 이상 심사숙고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숭배하거나 저주하였다. 이러한 것은 귀족들이 황제 아래에서 그들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비열한 방법이였다. 때때로 이것은 불합리한 예방조치로 취해지기도 했다.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Otho 황제 치하에서 의회 원로들이 Vitellius를 감싸주었으나 동시에 아주 혼란한 상황을 만들어서 Vitellius는 그들 각자가 말한 것을 구별해 낼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다양한 고려에 의해서 투표한 것을 세고 의견을 비교해 낼 수 있는 원리를 고안해 냈다.

만장일치를 요구하는 것은 단지 하나의 법, 즉 사회적 계약에 관한 것일 때였다. 왜냐하면 시민적 결사는 세계에서 가장 자발적인 행위이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고 그 자신의 주인이며 아무도 그의 동의 없이 그를 복종시킬 수 없다. 노예의 아들은 노예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회적 계약이 만들어진 시기에 반대의 목소리가 있다면, 이러한 반대가 사회적 계약을 무효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히 소수를 배제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들은 시민들 사이의 이방인이었다. 국가가 성립 이후에 거주자들은 동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며 영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권을 위임한 상태에 있었다.[8]

이러한 최초의 계약과는 별도로 투표는 항상 나머지 사람들을 묶어 내고 이것 또한 그 자체로 계약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사람들이 즉시 자유로울 수 있고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닌 의지에 따르도록 강요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어떻게 반대하는 소수가 자유로우면서 그가 동의하지 않는 법에 복종할 수 있는가?

나는 그 질문이 잘못 형성된 것이라고 대답한다. 시민들은 모든 법에 동의한다. 심지어 그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 법을 어겼을 때 그 자신을 벌하는 법 조차도 동의하는 것이다. 국가의 모든 구성원들의 변함없는 의지가 일반의지이다. 그것을 통해서 그들은 시민이 되고 자유롭다.[9] 법이 의회에서 제안될 때, 그들이 그 안건에 대해서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일반의지인지 아닌지가 질문되어진다. 투표권을 행사하는 각 개인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그의 의지를 표명해야 하고 표를 세는 것은 일반의지의 선언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이 우세할 때, 이것은 내가 단지 실수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으며 내가 일반의지라고 믿고 있는 것이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내가 개별적인 의견이 일반의지에 반하여 우세하더라도 나는 내가 의지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은 일반의지의 특징이 여전히 다수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거기에 있지 않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다.

이 글의 전반부에서 내가 특정 의지가 어떻게 공공의 숙고로서 만들어진 일반의지를 대체하는지를 보여주었을 때, 나는 실질적인 수단이 그러한 남용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고, 나는 이 주제에 대해서 나중에 설명하겠다고 했다. 일반의지를 선언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투표수와 관련해서 나는 또한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숫자와 관련된 원리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 한 표를 차별하는 것은 동등한 배분을 파괴하는 것이다. 단 하나의 반대 목소리를 만장일치를 파괴한다. 그러나 만장일치와 동등한 배분 사이에는 수많은 불평등한 배분이 있다. 그리고 바람직한 배분은 정치체의 상태와 요구에 상응해서 이러한 지점 중의 어떠한 하나로 결정될 수 있다.

두 가지의 일반적인 금언이 이러한 비율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나는 결정되어야 할 문제가 중요하거나 심각할수록 우세한 의견이 만장일치에 가깝게 가도록 해야 한다. 두 번째로 문제가 요구하는 결정이 더 신속해야 하면 할수록 규정된 다수가 더 적을 수도 있다. 즉시 결정되어져야 할 것에 대해서는 한 명이 충분할 수도 있다. 이러한 금언들 중에서 첫 번째는 법을 제정하는 것에 더 알맞을 수도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행정적인 일을 빨리 해치우는 것에 더 알맞을 것이다. 모든 경우에 우리가 어떤 문제와 관련되어서 결정을 하기 위한 최적의 다수결 숫자를 결심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두 금언의 조합에 의해서 가능하다.

[편집] 제3 장 선거

통치자와 행정관료의 선출은 내가 말한 바대로 복잡한 조치이며 두 가지 방식으로 정리될 수 있다. 즉 선택 아니면 제비뽑기이다. 양쪽 모두 다른 공화국에서 채용되고 있으며 두 개를 혼합한 것이 베니스의 통치자를 선출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제비뽑기에 의한 선출은 몽테스큐가 말하기를 민주주의에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한다. 나는 동의한다. 그러나 왜 그러한가?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제비뽑기에 의해서 선출하게 되면 아무도 상처를 받지 않을 것이며 모든 시민들은 그가 국가를 위해서 복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기대를 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훌륭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우리는 행정관료를 선출하는 것이 정부의 기능이며 주권자의 기능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왜 제비뽑기가 민주주의에 적합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행정은 그들의 조치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것에 비례해서 좀 더 나은 상황에 이르게 된다.

모든 진정한 민주주의에서는 행정관료는 특권층이지는 않지만 중요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단지 한 사람에게 정당하게 행정관료의 책무가 부과될 수 없다. 법은 단지 이러한 부담을 제비뽑기에 의해서 추첨된 사람들에게 부과할 수 있도록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에 조건은 모두에게 동등하고 선택은 어떤 사람의 의지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법의 보편성이 어떤 특정한 목적에 의해서 왜곡되지 않는다.

귀족정에서는 통치자가 통치자를 선택하고 정부는 그 자신의 행동에 의해서 영구화된다. 그 때 선택에 의한 선출이 적당하다.

베니스의 통치자에 대한 선출의 예가 그것을 확신시켜 준다. 그와 같은 혼합 형태는 혼합 정부에 알맞다. 베니스의 정부를 진정한 귀족정으로 보는 것은 실수이다. 왜냐하면, 베니스의 사람들은 정부에 어떤 참여도 하고 있지 않으나, 베니스의 귀족들은 그 자체로 베니스의 평범한 사람들이다. 대다수의 불쌍한 바나바파는 어떤 사법적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이러한 귀족들은 ‘각하’라는 빈껍데기 호칭에 의존하여 대회의에 참석할 권리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의회가 제네바의 일반 이사회만큼이나 그 수가 많기 때문에 그것의 저명한 구성원들이 우리의 평범한 시민들보다 더 많은 특권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제네바의 부르주아들은 정확하게 베니스의 귀족들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들의 원주민들은 베니스의 도시 사람들에 상응하며, 우리들의 농부들은 본토의 예속민들과 상응한다. 종합하자면, 베니스 공화국을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것의 크기와는 별도로 정부는 우리들 자신이 귀족정이 아닌 만큼 그들 또한 귀족정이 아니다. 전체적인 차이점은 우리가 정부의 우두머리가 없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제비뽑기에 의한 선출과 같은 수단에 대한 필요성이 없다.

제비뽑기에 의한 선출은 진정한 민주주의에서는 별로 이익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재산 뿐만 아니라 성격이나 재능이 유사하다면 누가 선출되든지 간에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진정한 민주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에 의한 선출과 제비뽑기에 의한 선출은 모두 다 채용될 때, 선택에 의한 선출은 군사를 통솔하는 영역과 같이 특별한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을 채워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제비뽑기에 의한 선출은 정치의 영역과 같이 상식과 정의 그리고 통합이 충분한 곳에서 필요하다.

군주제 하에서의 정부는 제비뽑기에 의한 선출이든 선택에 의한 선출이든 그것이 차지할 자리는 없다. 군주가 단지 유일한 통치자이며 행정관료이기에 그의 대리인에 대한 선택은 단지 그에게 달려있다. 아베 생 피에르가 프랑스 왕의 자문회의를 늘리고 그 구성원들이 무기명 투표에 의해서 선출되었을 때, 그는 그가 정부형태 변화를 제안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의회에서 투표를 하고 그것을 계산하는 정치 수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마도 로마의 정치체계 역사가 내가 구성하였던 모든 원리들을 설명해 줄 것이다. 공적 혹은 사적인 일이 200,000명의 사람들이 모인 의회에서 수행된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은 단지 사려 깊은 독자들의 체면을 깎는 일은 아니다.

[편집] 제4 장 로마의 의회

우리는 초기 로마의 역사에 대하여 믿을만한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들이 듣는 상당수의 이야기는 우화처럼 있음직한 일일 뿐이다.[10] 사람들의 연대기 중에서 가장 교훈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제도의 역사는 가장 부족한 부분이다. 경험은 매일 우리에게 제국 안에서 혁명의 원인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으나, 사람들은 더 이상 제도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들은 어떻게 제도가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할 때는 단지 추측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발견한 성립된 관습은 최소한 그러한 관습이 기원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원을 회상하게 하는 전통은 최고의 권위자의 의해서 지지되고 최상의 이유로 확신되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강인한 사람이 그들의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을 탐구함으로써 내가 따르고자 하는 원리이다.

로마의 형성 이후에 새롭게 태어난 공화국은 Albans, Sabines와 외국인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세 개의 계급으로 나뉘어졌다. 이러한 분화에 의하여 종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러한 부족 각각은 다시 10개의 curiae로 나뉘어져서 각각의 curiae는 다시 decuriae로 나뉘어지며 그 우두머리를 다시 curiones, decuriones로 불렀다.

이에 덧붙혀, 각각의 부족으로부터 일군의 수백의 century라고 불리는 수많은 기사들을 이끌어 냈고 이러한 기사들이 분화가 만들어 낸 순수한 의미에서의 군대였다. 그러나 위대함에 대한 본능은 이러한 작은 로마라는 도시를 시작부터 그 자신을 세계의 수도에 알맞은 구조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러한 최초의 분화는 곧 하나의 불이익한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Albans와 Sabines 부족은 일정한 숫자로 유지되고 있었으나, 더 많은 외국인들이 보충됨에 따라 외래 부족의 숫자는 증가하고 있었다. 그래서 곧 두 개의 부족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숫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Servius가 이러한 위험한 결점으로 인해서 발견한 해결책은 분화의 기초를 변경시키는 것이었다. 인종적 구분 대신에 그는 부족 각자에 의해서 점유되고 있는 도시의 구역에 기초하여 구분하기 시작했다. 세 부족 대신에 그는 로마의 언덕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네 가지 구역으로 나누었다. 그 결과로 그들은 현존하고 있는 불평등을 보정하고 예상되는 불평등을 미리 차단하였다. 그리고 구분이 장소가 아닌 사람이 기준이 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는 한 구역의 거주자가 다른 구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그래서 인종들이 서로 합쳐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그는 300명의 기사를 두 배로 증가시켜 12개의 새로운 기사 대대를 추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이전의 이름을 유지하도록 했다. 이러한 방법에 의해서 그는 후자의 불평없이 기사들 전체를 국민들 전체와 구분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네 개의 도시 부족에 Servius는 15개의 다른 시골부족이라고 부르는 이들을 더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많은 주안에 정렬되어 있는 시골의 거주자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수많은 부족들이 생겨났을 때, 로마사람들은 35개 부족으로 나뉘어졌고 공화국의 멸망까지 그 숫자는 계속 유지되었다.

도시 부족과 시골 부족의 구분은 다른 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리고 로마가 그들의 도덕성과 제국의 성장을 이끈 이유이기도 한 주목할 만한 하나의 결과를 낳게 된다. 그것은 도시의 부족들은 권력과 명예를 곧 독점하고 시골 부족의 지위를 빠르게 감소시킨 것이다. 시골 생활에 대한 초기 로마의 성향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성향은 그들의 현명한 창립자로부터 나온다. 그들은 자유를 시골생활과 군사적 노역과 함께 나갈 수 있도록 하고, 도시에는 수공업, 무역, 부와 노예제도를 도시에 소속시켰다.

로마에 모든 저명한 사람들이 시골에 살고 있으면서 그 땅을 경작했으므로 시골을 공화국의 주요한 거주지로 관례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방식은 고상한 귀족들의 것이었기에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존경받는 삶이기도 하였다. 시골에서의 단순하고 노동하는 삶이 로마의 부르주아들의 느슨하고 게으른 삶보다 선호되었다. 그리고 도시에서 단지 비참한 노동자의 삶은 땅의 경작자로서 존경받는 시민이었다. Varro가 말하기를 전쟁시에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평화시에는 그들을 먹이는 건강한 사람들이 시골에서 양성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Pliny는 시골 사람들이 그들에게 속한 사람들 때문에 존경받고, 겁쟁이로 격하되려고 하면 곧장 도시의 부족들 중 하나로 이송된다면서 시골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말한다. Sabine 부족의 Appius Claudius는 로마에서 그 자신의 인생을 시작할 때 시골 부족의 구성원으로 인식되어 존경과 함께 옮겨왔고 나중에 시골 부족의 구성원이라는 것이 그의 가족 이름이 되었다.

이러한 원리는 훌륭하나 몇 가지 개선사항이 필요하게 되었다.

첫번째로, 그 자신을 시민들이 한 부족에서 다른 부족으로 옮길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사칭하는 검열관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선택에 따라 부족에 등록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러한 것은 지위가 높고 힘 있는 사람들은 시골 부족에 등록하고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여전히 도시 부족에서 일반 사람들과 함께 머무르게 하였다. 그래서 부족은 점차적으로 어떤 지역적 영토적 기반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모두들 섞여서 더 이상 어떤 사람들을 등록 문서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확인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러한 것이 tribe라는 말이 영토적 의미 대신에 인신적 의미를 가지게 된 기원이 되었다.

중심에 가까운 도시 부족들은 그들 자신이 comitia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 중의 하나임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의회를 구성하는 천민들의 표를 사려고 하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국가를 팔아버렸다.

curiae와 관련해서는 창조자들은 각 부족들이 10개의 curiae를 구성하기로 했는데 로마의 도시 벽 안에 살던 시대에 로마 전체 사람들은 30개의 curiae를 구성하였고 각각은 자신의 신전, 신, 사무원들, 성직자와 축제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를 compitalia라고 불렀다. 이러한 것은 나중에 시골 부족들에 의해서 개최된 Paganalia와 유사한 것이었다.

Servius가 그의 새로운 분류안을 내어 놓았을 때, 30이라는 숫자는 그의 네 개의 부족들 사이에 동등하게 나뉘어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변화시키기를 바라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 curiae는 부족과는 독립적인 것이 되었으며 로마 사람들의 다른 범주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시골 부족들 안에서 curiae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부족들이 시민적 제도가 되고 군대를 동원하는 다른 방식이 소개된 이후에는 Romulus의 군대 조직은 더 이상 불필요한 과잉 상태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각 시민들이 부족에 등록하였다 하더라도, curiae의 구성원이 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Servius는 전체 로마 사람들을 여섯 계급으로 나누었고 그러한 분류에는 어떠한 인적인 혹은 지역적인 것이 기초하지 않았으며 단지 부에 의해서 나누었다. 그래서 첫 번째 계급은 부로 충만하였으며 중간 계급은 적정한 수준의 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여섯 계급은 193개의 하위 집단으로 나누었으며 이를 centruries라고 불렀다. 이러한 조직은 너무 광범위해서 첫번째 계급이 그들의 절반을 책임졌고, 마지막 계급은 단지 하나의 것에만 해당되었다. 그런데 그 마지막 하나가 로마 거주자의 절반 이상을 포함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러한 분화의 결과를 잘 인식하게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Servius는 그것을 군대 형식으로 가장했다. 그는 두 번째 계급에 두 개의 기갑 centuries를 속하게 하였으며, 네 번째 계급에 두 개의 무기 제조자 centuries를 속하게 하였다. 마지막 계급을 제외한 각 계급 안에서 그는 나이 든 사람들과 젊은 사람들을 분화시켰다. 즉 다시 말해서 무기를 견딜 수 있는 사람들과 법적으로 면제되는 사람들로 나누었고 이러한 분류는 부 이상으로 통계를 작성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의회는 Campus Martius에서 개최되었고 모든 국방을 담당할 수 있는 나이에 있는 사람들은 무기를 착용하고 참석해야만 했다.

마지막 계급에서 나이를 기준으로 분화시키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그것에 속한 보통의 사람들이 무기를 착용할 만한 명예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장간을 가지고 잇는 사람들만이 그들을 보호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왕의 군대를 장식하는 셀 수 없을 정도의 거지 무리들은 군대가 자유의 수효자인 시절에 로마인들 사이에서 경멸로써 축출당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계급 안에서는 프롤레탈리아와 capite censi라는 불리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은 있었다. 전자는 최소한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고 필요시에는 군인으로서 활동하기 하였다. 하지만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으로 단지 머릿수를 셈으로써 가치를 평가받을 수 있을 뿐이었고, 어떤 실체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Marius는 그들을 등록하고자 하는 겸손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이런 세 번째 분류가 좋은지 나쁜지를 여기서 결정하는 것 없이 사람들은 그것을 매우 실용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초기 로마의 단순한 습관 즉 농업에 대한 관심과 상업이나 이윤 추구에 대한 경멸을 때문이다. 탐욕스럽고 음모 가득하며 부에 대한 지속적인 운동성을 지닌 사람들이 그와 같은 제도들을 국가가 전복되지 않고 20년 동안 지속되도록 한 근대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로마 사람들의 도덕과 검열의 사무는 이러한 제도의 악을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을 가졌고,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를 뽐내게 되면 그 자신이 가난한 계급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비록 6개의 계급이 있었긴 했지만 왜 5개 이상의 로마 계급이 좀처럼 언급할 수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섯 번째 계급은 투표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Campus Martius[11]의 투표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공화국의 어떠한 기능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고려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로마 사람들에 대한 여러가지 분류가 있었다. 지금부터는 이러한 분류가 의회에서 가지는 효과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법적으로 소집되는 의회를 comitia라고 부르고 일반적으로 로마의 광장 즉 다시 말해 Campus Martius에서 개최되었다. 그것은 채용되는 형태에 따라서 comitia curiata, comitia centuriata, comitia tributa 등으로 구별되었다. comitia curiata는 Romulus에 의해서 창립되었고, comitia centuriata는 Servius에 의해서, comitia tributa는 국민들의 호민관들에서 기원하였다. 어떤 법도 제재 규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고, 어떤 행정관료들도 comitia안에서를 제외하고는 선출되지 않았다. 그리고 curia, century, tribe에 소속되지 않은 시민들은 없었다. 그것은 어떤 시민들도 투표할 권리를 배제당하지 아니하며, 로마의 사람들은 법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도 진정한 주권자였다.

comitia가 법적으로 소집되고 그것의 결정이 법적인 효력을 가지는 것과 관련하여 세 가지 조건이 성립되어야만 한다. 첫 번째로 의회를 소집하는 구성원들이나 집행관료들이 필요한 권위를 가지고 있어야만 하며, 두 번째로 의회는 법적으로 허용된 날짜들 중의 한 날에 열려야 하고, 마지막으로 점이 길해야만 한다.

이러한 규칙들 중에서 첫 번째는 설명이 필요 없다. 두 번째도 정책적 문제이다. 의회는 휴일이나 시장이 열리는 날에서는 개최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업차 로마에 오는 국민들이 광장 안에서 하루를 보낼 시간이 없다. 세 번째 규칙은 원로원이 자만하고 들떠있는 국민의 감정을 억누르고 선동적인 호민관들의 행동을 조절할 수 있었다.

법과 우두머리의 선출은 comitia의 판단에 맡겨진 유일한 사항은 아니다. 로마의 사람들이 정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침해하였음을 전제로 사람들은 유럽의 운명이 이러한 의회의 결정에 맡겨졌다고 말할 수 있다. 다양한 공적인 사업이 comitia가 결정해야만 하는 일에 따라서 취하게 되는 여러 가지 형태들을 설명해 준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단지 그것들을 비교해 보면 된다. curiae를 만든 Romulus는 인민들에 대항한 원로원과 원로원에 대항한 인민들 사이의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이러한 배치 하에서 귀족들에게 주어진 ‘권력과 부의 권위’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인민들에게 ‘수에 대한 권위’를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귀족들에게 거대한 이익을 준 꼴이 되었다. 왜냐하면 귀족들은 숫자적 다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평민들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후원자와 고객이라는 제도는 정치와 인류애의 걸작이다. 그것 없이는 공화국 정신에 반대되는 귀족계급들은 더 이상 생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고상한 예는 단지 로마의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고 그 밖의 어느 지역에서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curiae라는 형태는 왕들 아래에서 Servius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타르퀸의 마지막 통치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황제의 법은 일반적으로 leges curiatae로 알려져 있다.

공화국 하에서 여전히 네 개의 도시 부족들으로 제한되고 로마의 인구만을 포함하고 있는 curiae는 귀족들을 이끄는 원로원도 평민들이기는 하지만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시민들을 이끄는 호민관들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처럼 curiae는 신뢰를 잃었고 격이 낮아져서 그들의 30명의 릭토르가 comitia curiae가 해야만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만났다.

century로 나누어진 것은 귀족들에게는 아주 우호적인 것이어서 처음에 원로원이 하루가 지나도록 그 comitia에 머물렀고 그 곳에서 집정관과 검열관 및 중요한 행정 관료들을 선출하였다. 실제로 193개의 century 중에 첫 번째 계급이 98개를 차지하고 있었고, 투표라는 것은 단지 century 단위로 셈해 졌기 때문에 첫 번째 계급이 다른 여타의 계급보다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모든 여기에 속한 century가 동의를 하게 되면 투표의 나머지는 계산되지 않았다. 소수의 결정이 다수의 결정으로 통과된 것이다. 그래서 century에 의해서 결성된 의회는 투표에 의해서가 아니라 돈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말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과도한 권력은 두 가지 방식으로 완화되었다. 첫 번째는 일상적으로는 호민관에 의해서 부유한 사람들과 함께 하나의 계급으로 첫 번째 계급 안의 귀족들의 영향력에 균형을 맞춰주었다.

두 번째는 century는 항상 계급을 따져서 항상 소환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대신에 제비뽑기[12]에 의해서 임의로 소환되었다. 그 century가 선거를 진행하고 나면 다른 century가 선거를 반복하기 위하여 계급의 순서대로 소집되었으며, 일반적으로 그들은 그 선출의 결과를 확인하였다. 결과적으로 계급보다는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서 기회가 주어졌다.

이러한 관습은 또 다른 이점이 있다. 시골로부터 온 시민들은 선거 사이의 시간이 있어 이전에 지명된 후보의 장점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고, 따라서 무지한 상태로 투표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절차를 속도감 있게 진행시키려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관습은 폐지되었고, 양 쪽 투표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comitia tributa는 엄격하게 말하면 로마 사람들의 지방 의회였다. 그것은 단지 tribune들에 의해서 소집될 수 있었고, tribune을 선출하고 그 곳에서 주민투표를 실시하였다. 원로원들은 그 회의체에 참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을 뿐더러 참석할 수 있는 권한도 없었다. 원로원의 의원들은 그 범위에서는 가장 지위가 낮은 시민들보다 덜 자유로웠다. 모든 귀족들이 그들의 권리에 의해서 comitia에 참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한 명의 시민으로서 투표에 어떠한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무산 계급들도 그 투표에서는 원로원의 통치자처럼 중요하게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표를 모아내는 다양한 제도로부터 출현한 질서 외에 이러한 몇몇 수단들은 그 자체로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각각은 어떤 누구를 선출할 수 있는 여론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다.

더 깊숙히 살펴보지 않더라도 이미 설명한 것으로부터 comitia tributa가 대중적 정부에 가장 적합한 의회이며, comitia centuriata가 귀족정에 유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마의 대중만이 단지 다수를 형성하는 comitia curiata의 경우에는 그것들의 전체정치화 되려는 경향은 그들을 불명예로 이끌었다. 그 결과 선동적인 요소들이 이러한 의회가 음모를 꾸밀지도 모른다는 의심으로 인해서 되도록 피하도록 만들었다. 로마 시민의 전체 왕족들이 단지 comitia centuriata에 보여진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것만이 전체 의회이다. 왜냐하면 comitia curiata는 시골 부족들을 배제했고, comitia tributa는 원로원과 귀족들을 배제하였다.

로마인들에 의해서 사용된 투표 제도는 그들의 예절과 도덕만큼이나 단순하였다. 개인들은 구두로 투표를 하였고 사무관이 그것을 기록하였다. 각 부족에서 다수표를 얻은 것으로 결정이 났고, 부족의 다수를 통하여 국민의 의사를 결정하였다. 동일한 과정이 curiae와 centuriae 안에서도 발생하였다. 이러한 것은 정직이 대중들 속에서 우세할 때에는 좋은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모두는 정당하지 못한 원인으로 혹은 가치 없는 후보에게 표를 주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러나 사람들이 부표하고 표를 사게 되면서부터 투표가 비밀스럽게 진행되는 것이 유리했고 그래서 표를 사는 사람은 파는 자의 불신에 의해서 그 자유가 제한되었다.

나는 Cicero가 이러한 방법의 변화를 비난했고 로마 제국의 쇠락에 일정정도 책임이 있다고 알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제국의 멸망을 막기에는 변화의 정도가 너무 적었다. 마치 건강한 사람의 식단이 환자에게는 맞지 않듯이, 부패한 사람들에게 덕성 있는 사람들에게 맞는 법을 적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례도 베니스 공화국이 그들의 법이 사악한 사람들에게 알맞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러한 원리를 공고히 해 주는 것은 없다.

로마의 시민들도 그들 사이에 나누어져 있는 작은 패들이 있었고, 각자는 어떤 누구도 그의 의견을 알지 못하고 투표를 하려 했다. 새로운 제도가 작은 패들을 모아서 계산하고 이를 다시 비교하는 등의 작업을 하기 위해서 생겨났다. 결국 음모와 표의 매수를 방지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공화국이 말기에 다다르게 되면서 로마인들은 자주 법의 부적정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예외적 편의를 자주 사용하게 된다. 때때로 후보자가 뇌물을 사용하기 이전에 의회가 급하게 소집되었다. 때로는 사람들이 선동되거나 잘못된 결정을 내리려 할 때 전체 회기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희망이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믿을 수 없는 사실은 수많은 남용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대의 규칙 덕분에 계속해서 원로원이 그 스스로 명령을 하는 것처럼 수장을 선출하고 법을 입안하며 사건을 재판하고 사적이고 공적인 일들을 수행해 나갔다는 사실이다.

[편집] 제5 장 호민관

국가의 헌법적 기관 사이의 정확한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특별한 다른 행정관료들과는 분리되는 특별한 행정관료가 만들어진다. 이들에 의해서 모든 요소들이 균형이 이루고 군주와 국민 혹은 통치권과 주권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하게 된다.

내가 tribunate라고 부르고자 하는 이러한 실체는 법과 입법권력의 보호자이다. 그것은 정부에 대응하여 로마에서 인민의 호민관이 했던 것처럼 주권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베니스의 위원들처럼 인민들에 대항하여 정부를 지지하기도 하고, 때때로는 Ephor들처럼 양자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도 한다.

tribunate는 공화국의 헌법적 기구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입법권 혹은 행정권 양자 중 어느 곳에서도 지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로 그 자신의 힘은 더욱더 거대해 질 수 있으며, 그것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것을 보호할 수 있다. 법의 수호자로서 그것은 법을 집행하는 통치권자나 입법하는 주권자보다 신성하고 존경받는 존재이다. 이것은 로마의 경우에 가장 확실하게 보여진다. 로마에서는 자만심 강한 귀족들이 신성하지도 않고 법적인 권위도 있지 않은 인민의 평범한 사무관들 앞에서 인사하도록 강요받았다.

현명한 tribunate는 훌륭한 헌법의 가장 강력한 버팀목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필요한 것 이상의 힘보다 약간이라도 힘을 가진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린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약화되는 경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이 단지 중재자여야 하는 집행권을 침탈하려 하고, 보호해야할 입법권을 가지려고 한다면 전체주의로 타락하게 될 것이다. Ephor의 거대한 힘이 부패가 한 번 시작되자 급속히 부패가 확산되었다. Agis의 계승자가 독재자에 의해서 흘려진 Agis의 피에 대해서 복수를 하였다. Ephor의 범죄와 처벌은 동일하게 공화국의 붕괴를 촉진시켰다. 그리고 Cleomenes 이후에 스파르타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로마도 같은 식으로 멸망하였다. tribune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휘두르는 과도한 힘은 결국에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법의 도움으로 자유를 파괴하는 바로 그 황제를 보호하는 격이 된다. 베니스의 10인의 위원들에 관해서 그들은 피의 trinunal이다. 그것은 파괴적이고 법에 최고의 보호를 가하기는 커녕 단지 법의 격을 낮추었을 뿐이다.

정부와 같이 tribunate는 그 구성원의 증가에 따라서 약해진다. 로마의 호민관들이 처음에는 둘이였으나 그 다음에는 다섯으로 점차 그 숫자를 증가시켰을 때 원로원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함으로써 이것에 동의하였다.

이와 같은 무시무시한 실체의 침탈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은 호민관의 임기를 영구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권한이 중단되는 시기를 두는 것이다. 이러한 간격은 법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며 필요시에는 예외적인 권한 위임에 의해서 그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

이러한 수단은 나에게는 별로 이득이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호민관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헌법 기관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헌법에 어떠한 손해를 끼치지 않고 제거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나에게는 효과적인 수단일 수도 있다. 그것은 새로 성립된 행정관료는 그의 전임자가 가진 힘이 아니라 법에 의해서 그에게 주어진 권력을 가지고는 사무에 임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편집] 제6 장 절대권력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법의 불융통성 때문에 그들은 상처받을 수 있고, 어떤 위기 상황에서 국가의 멸망에 이를 수 있다. 법적 절차의 정돈되고 점진적인 과정은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거기에는 입법자가 예측하지 못하는 수많은 돌발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어떤 누군가가 모든 것을 예측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예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법의 신성한 힘은 조국이 위험상태에 처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경우에도 중단될 수 없다. 이런 드물고 명백한 상황에서 공공의 안전을 위해서 그 안전에 책임감 있는 누군가를 임명하는 특별한 조치가 취해진다. 이러한 책임은 긴급 상황의 특성에 따라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정부 활동의 증가가 위험을 줄이는 데 적당하다면, 그 때에는 정부 구성원 한, 두 사람에게 권력을 집중시켜야만 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줄어드는 것은 법의 권위가 아니라 단지 정부의 형태이다. 그러나 위험이 법 자체에 의해서 발생한다면, 그 때에는 최고 권력자가 모든 법을 중단시키고 일시적으로 주권적 권위를 정지시키는 힘을 가진 사람으로 임명되어야 한다. 그러한 경우에도 일반의지에 의한 것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주요한 관심사가 국가가 멸망하지 않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입법적 권위의 중단이 법을 폐지한다고 할 수 없고, 행정관이 그것을 중단시킨다 하더라도 법을 향해서 뭐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법을 만드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방식 중에 처음의 것은 로마의 원로원에서 그들이 집정관들에게 공화국의 안전을 내맡길 때 쓰던 방식이었다. 두 번째 것은 두 명의 집정관들 중 하나가 로마가 Alba로부터 배운 제도 중의 하나로 한 명의 독재자를 임명[13]할 때 사용되었다.

공화국 초창기에 로마는 자주 독재에 도움을 청했다. 왜냐하면 주변의 조건이 아직 국가를 그들의 헌법의 힘에 의해서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도덕적 성격은 그 시기에 다른 시기에 필요로 했던 만큼의 예방장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독재자가 자신의 지위를 남용한다거나 자신의 임기를 넘어서서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려 한다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다. 반대로 힘은 그것을 휘두르는 사람에게 부담이 되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급히 그 자신에서 벗어나려 했는데 그것은 마치 법이 정한 공식석상에 있는 것이 귀찮고 성가신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남용될 우려의 위험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로마의 초창기에는 경솔한 임명에 의해서 그것의 가치가 폄하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공화국이 말기에 다다르게 됨에 따라, 신중해진 로마 사람들은 그들이 한 때 집착했던 독재적 위임을 사용하는 데 있어 절제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독재자는 어떠한 경우에는 시민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그것을 방어해 낼 수 있다. 로마의 인습은 로마 그 자체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로마의 군대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Marius가 Sulla에게 했던, 그리고 Pompey가 Caesar에게 했던 약한 저항들이 외부적 힘에 직면한 내부적 권위에 대해서 무엇이 기대되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실수는 로마 사람들이 큰 잘못을 저지르도록 했다. 예를 들어 카틸리나 사건에서 독재자를 임명하는 데 있어 실패한 사례가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한 도시의 일, 즉 이탈리아의 지방에서 발생한 사건인데 법이 독재자에게 준 무제한적 권위가 우연적 사고에 의해서 진압될 수 있는 음모를 좀 더 쉽게 괴멸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독재자를 임명하는 대신에 원로원은 모든 그의 권력을 집정권에게 위임하기로 했다. 그 결과로 Cicero는 그의 권력을 넘어서게 되었다. 로마의 사람들에 그의 행위에 찬동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나중에 법의 파괴로 인해서 흘리게 된 국민들의 피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그의 국가보다는 그 자신의 영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국가를 위해서 합법적인 어떤 수단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그 자신을 위해서 영광스러운 일을 찾으려고 했다.[14] 결과적으로 그는 로마의 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 칭송되었지만, 로마의 법의 파괴자로서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추방에서의 소환이 화려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단지 용서의 행위였다.

어떤 방식으로 독재적 위임이 이루어졌는지 간에 결코 임기를 연장할 수 없게끔 기간을 제한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비상시에 국가는 멸망하거나 구해지거나 할 것이고, 비상시의 요구가 종료된다면 독재적 권능은 폭압적이거나 무용한 것이 된다. 로마에서는 그 기간이 6개월 정도였고 독재자의 대부분은 그 기간이 넘기 전에 사임하였다. 그 기간이 더 길어진다면, 그들은 일년의 임기를 가진 로마의 10대관들처럼 자신의 임기를 더욱더 늘리려고 할 것이다. 임명을 가능하게 한 필요가 충족된다면 독재자는 더 많은 계획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편집] 제7 장 검열관의 법정

일반의지가 법에 의해서 선언되는 것처럼 공중의 재판은 검열관에 의해서 선언된다.

검열관이 사람들 사이의 의견을 중재하는 사람이기는 커녕 그는 단지 대변인에 불과하다. 검열관이 이러한 사람들의 의견과 동떨어져 있을 때, 검열관의 결정은 무효이고 효력이 없다.

국가의 도덕을 존경의 대상과 분리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양자는 같은 원리에서 발생하였고, 필수적으로 통합된다. 세상 사람들 속에서 그들의 행복한 선택을 통제하는 것은 본성이 아닌 여론이다. 사람들의 여론을 개혁하라. 그러면 그들의 도덕이 그 자신들을 정화시킬 것이다. 인간들은 항상 선한 것 혹은 그들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에도 실수는 발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판단은 통제되어야 한다. 도덕적인 것을 판단하는 것은 존경받을 수 있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며, 존경받을 수 있는 것을 판단하는 것은 여론을 법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여론은 헌법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온다. 법이 도덕을 통제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입법이 도덕의 탄생에 이바지하게 된다. 입법의 기능이 약화된다면 도덕도 쇠퇴하게 된다. 그리고 검열관의 통치가 법이 달성하지 못한 것을 달성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결과로부터 검열관을 도덕을 유지하는 데 있어 유용하나, 결코 도덕을 재건할 수는 없다. 법이 여전히 활동적일 때 검열관을 세워라. 왜냐하면, 생기를 잃어버린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법이 더 이상 힘을 가지지 않는다면 합법적인 것 모두가 힘을 가질 수 없다.

검열관은 여론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고 현명한 통치로 통합성을 유지하며 불확실한 여론을 분명히 함으로서 도덕을 유지해야 한다. 결투에서 보조자를 사용하는 문제는 왕의 한 마디 칙령에 의해서 폐지되었다. 이러한 판단은 공중의 판단을 미리 해 버린 것이고 그의 한 마디 말로서 해버린 것이다. 또한, 동일한 칙령이 결투를 하는 것이 비급한 것이라고 선언했을 때, 공중은 이러한 결정에 대해서 조롱하였다.

나는 여론은 어떠한 제약도 가해지지 않기 때문에 성립된 법정 안에서 어떠한 제한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고 어디에서나 말해왔다. 우리들은 이러한 도구가 로마나 스파르타인들에 의해서 효력을 가질 수 있는 기술에 대해서 경탄해 왔다.

[편집] 제8 장 시민종교

처음에 사람들은 신을 제외하고서는 어떠한 왕도 가지지 않았다. 그들의 유일한 정부는 신정정부였다. 그들은 Caligula처럼 생각하였다. 사람들이 그들 종 가운데 한명을 그 자신의 주인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결심을 하기 이전에는 감정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오랜 변화가 필요했다.

신이 모든 정치적 결사체의 정점에 있다는 이러한 단순한 사실로부터 민족만큼이나 다양한 신들이 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서로에게 이질적이고 또한 항상 적으로 대해 온 두 개의 민족에게 같은 주인을 인식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전장으로 향하는 두 개의 군대가 동일한 장수에게 명령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처럼 민족적 분열은 다신교를 낳았고 차례로 이것은 종교적 시민적 관용을 만들었다.

그들 자신의 신이 야만족에 의해서 숭배되고 있다는 아주 환상적인 생각은 그리스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여러 종족들에 대한 자연적 주권자로 여기는 습성에서 발생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의 시대에는 다른 민족들 사이에 신의 동일성을 연구하는 것은 Moloch, Saturn, Chronls가 동일한 신일 수 있다거나 페니키아 사람들의 Baal, 그리스 사람들의 Zeus, 로마 사람들의 Jupiter가 동일하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마치 다른 이름을 가진 상상의 물건들이 공통성을 지닌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만얀에 각 국가가 자신의 종교과 신을 가지고 있을 때 왜 종교전쟁이 발생하지 않느냐고 묻게 된다면, 나는 그 자신의 정부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국가는 그들의 신과 그들의 법 사이에 어떠한 구분도 없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정치적 전쟁은 많은 부분 종교적 성격을 지녔다. 신의 영역은 국가적 경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어떤 민족의 신은 다른 민족들에게는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교도의 신은 어떠한 의미로도 시샘이 많은 신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 사이에서 세계를 분할해서 가지고 있다. 모세와 유대인조차도 이스라엘의 신을 말하면서 이러한 생각에 동의를 한다. 그들은 멸망할 운명에 처해있고 그들의 나라는 점령당하게 될 가나안 사람들의 신을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바빌론의 왕에게, 나중에는 시리아의 왕에게 예속된 유대인들은 그들 자신의 신 외에는 어떤 다른 신을 인식하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 이러한 거부는 그들의 정복자에게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역사에서 보는 박해를 가져왔으며 이러한 박해는 그리스도가 출현하기 이전에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처럼 각각의 종교는 국가의 법에 의해서 배타적으로 공격당하였고, 그들을 억압하는 것외에는 그들을 개종시킬 방법이 없었으므로 유일한 선교자는 정복자였다. 그리고 믿음을 바꾸도록 하는 구속은 정복자의 법의 일부였기에, 개종을 설교하기 전에 정복이 필요로 하였다. 사람들이 신을 위해서 싸우기는 커녕 Homer에서처럼 신이 인간을 위해서 싸웠으며 각각의 민족은 신에게 자신들의 승리를 요구하였다. 로마의 사람들은 그들의 신에게 그것을 포기하도록 요구했다. 로마 사람들은 피정복자들이 그들 자신의 신을 계속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그들이 로마의 법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신전의 Jupiter에게 헌납된 왕관이 그들이 강요하는 유일한 공물이었다.

결론적으로 로마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과 신을 그들의 제국과 함께 퍼뜨렸을 때 이러한 광대한 제국의 민족들은 다양한 신과 믿음을 가진 그 자신을 점차적으로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이교도들이 하나가 되었고 모든 알려진 세상을 통해서 동일한 믿음을 가지게 된 방법이다.

예수가 지구상에서 정신적인 왕국을 건설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환경 속에서였다. 신학적 체계와 정치적 체계를 구분함으로써 이 왕국은 동일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것이 내부의 분열을 가져와서 크리스트교 사람들을 동요케 했다. 지금 이러한 새로운 생각들은 이교도들의 생각 속에 결코 들어갈 수 없으므로 그들은 항상 크리스쳔들을 진정한 반역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위선적 순종의 망토 아래에서 그 반역자들은 그들이 독립적이고 최상의 존재가 될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교활하게 그들이 약할 때에는 존경하는 척하는 그 권위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것이 박해의 원인이었다.

이교도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보잘 것 없는 크리스쳔들이 그들의 태도를 바꾸어 이른바 세계의 폭력적인 독재가 되고만 또 다른 왕국을 열었다.

그러나 왕과 시민들의 법이 계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던 이유로 이러한 전투적 힘의 결과는 판결의 끊임없는 갈등을 유발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크리스쳔 국가 안에서는 불가능한 정치체를 만들었다. 즉 그것은 그들이 시민적 통치자에게 복종을 해야하는 것인지 성직자들에게 복종을 해야하는지 알지 못하게 했다.

유럽과 그 주변의 많은 민족들이 고대의 시스템을 보존하고 재건하려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완전하게 승리하였다. 종교적 열광은 항상 주권의 독립을 유지하게 하였고 그것은 국가와의 필요한 결합을 부족하게 만들었다. 마호메트는 그의 정치적 구조에 결속을 부여할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왜냐하면 그의 정부 형태가 칼리프 아래에서 유지되는 한 정부는 분열되지 않을 것이며, 훌륭한 정부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랍 사람들이 번영하고 부드러워지면서 다른 야만인들에게 정복당하였다. 그 때 두 개의 힘 사이의 분열이 발생하였다. 그 분열이 크리스쳔 사이 보다는 모슬람 사람들 사이의 분열이 덜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결국 Ali의 영역과 페르시아와 같은 국가 사이로 나뉘어졌다.

우리 세계에서는 영국이 교회의 우두머리를 세웠고, 짜르 또한 같은 행동을 취하였다. 그러나 명함을 가지고도 그들은 그 자신을 주인이라기보다는 심복으로 만들었으며, 교회를 변화시킬 권리를 가지기보다는 차라리 그것들을 보존하는 권력을 가지고자 하였다. 그들은 입법자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최고 집행자이다. 성직자의 하나의 구성체[15]를 결성할 때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서에 주권과 입법권을 동시에 가졌다. 그 결과로 영국과 러시아는 두 개의 권력과 주권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크리스쳔 작가들 중에서 홉스만이 그 악과 치료법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그 만이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를 재결합하고자 제안을 하였으며 정치적 결합을 재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결합없이는 국가도 정부도 잘 구성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크리스쳔의 지배적인 정신은 그의 시스템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군주의 이익은 국민의 이익보다 항상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바로 홉스의 이론에서 끔찍하고 오류이기 보다는 정의롭고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는 역사적인 사실이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분석된다면 우리들은 Bayle과 Warburton의 반대되는 믿음을 쉽게 논박할 수 있다. 한 명은 어떤 종교도 정치체에 유용하지 않다고 했으며, 다른 한 명은 크리스쳔은 정치체의 가장 최고의 지지자다라고 말했다. 우리들은 첫 번째에 대해서는 어떤 국가도 종교 없이는 그들의 기초를 찾을 수 없다는 것에 의해서, 두 번째는 크리스쳔의 법은 그 바닥에 국가의 건전한 헌법에 복무할 수 있기보다는 상처를 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 의해서 논박할 수 있다. 이것이 명확하게 이해가 된다면 나는 애매한 종교적 생각에 좀 더 정밀한 생각을 보태야만 하겠다.

사회와 관련된 종교를 고려함에 있어서 일반적이든 특수하든 간에 종교라는 것은 두 개의 범주로 나뉘어질 수 있다. 인간의 종교와 시민의 종교가 바로 그것이다. 첫 번째의 것은 사원, 제단, 의식 및 내부 신봉자에게 제한된 것이 없으면 복음에 대한 순수하고 단순한 종교가 되며, 신성한 자연적 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민의 종교는 단 하나의 국가에서 성립된 종교이다. 그것은 그 국가에 신과 특별한 수호신을 주며, 법에 의해서 제정된 교리, 의식, 외부적 형태의 숭배 등이 존재하게 된다. 이 종교를 실행하는 한 국가에게 외적인 모든 것은 이단이며 야만적인 것이다. 종교가 종교의 제단을 확장하는 만큼 인간의 권리와 의무가 확장된다. 초기의 민족 종교가 이러한 형태를 지닌다. 우리들은 그것에 ‘시민적 혹은 궁극적인 신성한 법’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세 번째의 종교가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두 개의 입법적 질서와 두 개의 통치자, 두 개의 고향을 주게 됨으로서 그들에게 두 개의 모순되는 의무를 부여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동시에 교회의 사람이 되거나 시민이 되는 것을 방지한다. 이러한 것은 Lama의 종교, 일본의 종교 카톨릭의 종교가 그러하다. 사람들은 이것을 성직자의 종교라고 부른다. 그것을 일종의 혼합된 반사회적인 법적 시스템이다.

정치적 관점에서 봤을 때, 이 세 가지 종류의 종교 각가은 결점을 가지고 있다. 세 번째는 설명할 것도 없이 명백하게 나쁘다. 사회적 결속을 파괴하는 모든 것은 가치가 없다. 그리고 사람들을 그 자신과 불일치하게 설정하는 모든 제도는 가치가 없다.

종교에 대한 두 번째의 것은 법에 대한 사랑으로 신성한 숭배에 참여한다는 점에서는 훌륭하다. 그리고 그들의 조국을 시민들의 숭배의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것은 그들에게 국가에 대한 복무가 수호신에 대한 복무라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신정정치의 일종이다. 그 곳에서는 군주와는 다른 제사장이 있을 수 없다. 행정관료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성직자도 있지 않다. 그 결과로 한 국가를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순교자가 되는 것이며 법을 파괴하는 것은 경건하지 못한 행동이며,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공공의 저주에 순종하게 하는 것은 그를 천벌에 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종교에도 나쁜 점이 있으니, 그것은 오류와 거짓에 기초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을 무엇이든 잘 믿게 하고 미신에 현혹케 할 수 있다. 그것은 공허한 의식으로 신에 대한 진솔한 숭배를 묻어 두게 된다. 또한 배타적이고 폭압적이게 될 때 그래서 사람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고 관용을 모르게 해서 살인과 대량학살을 저지르고 그들의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신성한 행위로 생각한다면 더욱더 문제가 된다. 이것은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전쟁의 자연상태로 두게 되는 것이며 곧 이것은 우리 자신의 안위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종교가 남아 있다. 즉 그것은 크리스쳔의 종교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의 크리스쳔의 종교는 아니다. 단지 함께 다른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는 복음의 종교이다. 신성하고 숭고하고 진솔한 종교 아래에서는 신의 아이처럼 인간은 모든 다른 존재들을 형제로 간주한다. 그들을 통합시키는 사회는 죽음에 의해서조차 와해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특정한 정치체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러한 종교는 법이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힘을 소유한 법을 남기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사회가 결속하는 데 있어 필요한 요소가 부족하다. 이것이 모든 것이 아니다. 국가를 향하여 시민의 마음을 가지기는 커녕 이러한 종교는 국가로부터 국가에 대한 충성을 떨쳐버리게 한다.

크리스쳔들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사회를 형성하였다고 말하곤 한다. 내가 보기에는 이러한 가설에 가장 큰 결점은 크리스쳔의 사회는 인간의 사회가 아니라는 데 있다.

나는 이런 상상된 사회는 그와 같은 완벽에도 불구하고 가장 강하지도 가장 지속적이지도 않다. 그것이 완벽하다 할지라도 사회적 결속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의 터무니없는 결점은 그 체제의 완벽함 속에 있을 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그의 의무를 준수한다. 사람들은 법에 복종하려고 할 지도 모른다. 통치자는 정당하고 절도가 있어야 한다. 행정관료들은 정직하고 부패하지 않아야 한다. 군인들은 죽음을 경멸해야 한다. 허영도 사치도 있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것이 훌륭한 것의 모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좀 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자.

크리스트교는 전적으로 정신적 종교이다. 단지 하늘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크리스쳔들의 고향은 이 세상이 아니다. 크리스쳔들은 그의 의무를 준수한다.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행동의 훌륭한 혹은 불충분한 성공에는 무관심하게 그러한 행동을 취한다. 그가 그 자신에 대해서 책망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지구상의 모든 것이 잘 되어 간다거나 잘못 되어 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국가가 번영한다면 그는 좀처럼 공중의 행복을 즐기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가 그의 국가의 영광을 자만하게 되지 않을지를 두려워 한다. 국가가 쇠망한다면, 그는 하느님의 손으로 축복을 바라게 된다.

그와 같은 사회가 평화롭고 조화가 우선시된다면, 모든 시민들은 예외 없이 동등하게 좋은 크리스쳔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불행하다면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다. 위선자나 음모가 예를 들어 크롬웰과 같이 그의 신성한 동포들을 쉽게 이용하려고 한다. 크리스쳔들의 자선은 우리들이 쉽게 우리 이웃들을 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무를 부과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공적 권위의 일부를 획득하게 될 정도로 교활하게 될 때, 신이 존경받도록, 신이 복종하도록 의도하였다고 한다. 그가 힘을 남용해도 되는지 생각해 보자. 그 때 그는 신이 그의 아이들에게 내려준 천벌과 같은 존재이다. 크리스쳔들은 압제자를 몰아내는 데 양심을 가책을 느끼곤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적인 평화를 혼란으로 내모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크리스쳔의 온화함과 배치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사람들이 자유롭거나 눈물의 골짜기에서 노예로 살거나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중요한 것은 천국으로 가는 것이고, 체념은 단지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외국과의 전쟁이 발생했다고 하자. 시민들은 마지못해 전장으로 행진한다. 그들 사이의 어느 누구도 도망갈 생각을 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그들의 의무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승리에 대한 열정 없이 그 일을 할 것이다. 그들은 정복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나은 방법임을 알고 있다. 그들이 승리자가 될 것인지 패배자가 될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신의 섭리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맹렬한 적을 이롭게 하는 것은 그들의 금욕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당신의 크리스쳔 공화국이 스파르타나 로마에 의해서 위기에 빠졌다고 생각을 해 보라. 당신의 신성한 크리스쳔들이 구타당하고 그들의 지혜를 모으기 전에 파괴당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혹은 그들이 그들의 적이 그들을 향해서 가지는 모멸감에 의존하여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나는 나 스스로 Fabious의 군인들에 의해서 취해진 맹세를 훌륭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정복하거나 죽기를 맹세하지 않았다. 단지 정복자로부터 되돌아 올 것을 맹세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약속을 지켰다. 크리스쳔들은 감히 이러한 것을 할 수 없다. 그들은 그것이 하느님을 시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나는 크리스쳔의 공화국을 말하는 것은 오류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개념들의 각각이 다른 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단지 예속과 복종을 설교할 뿐이다. 그것의 정신은 폭군정에 우호적이다. 진정한 크리스쳔들은 노예화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은 좀처럼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짧은 인생이 그들의 눈에는 너무나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

크리스쳔의 군대는 훌륭하다고 말한다. 나는 그것을 부정한다. 나에게 그러한 크리스쳔의 군대를 보여달라. 개인적으로 나는 알고 있지 못하다. 당신은 십자군을 언급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십자군의 용기를 논할 것 없이 나는 말하건대 그들은 결코 크리스쳔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성직자의 군대이다. 그들은 교회의 시민이다. 그들은 정신적 고향을 위해서 싸웠다. 그 고향은 이상한 방식으로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이것은 이교도의 습성에서 온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결코 어떤한 국가적 종교를 성립시키지 않기 때문에 신성한 전쟁은 크리스쳔 사이에서는 불가능하다.

이교도들의 제국들 아래에서는 크리스쳔의 군대는 용감하다. 모든 크리스쳔의 작가들은 우리들에게 이것을 말한다. 나는 그것들을 믿는다. 하지만, 이러한 군인들은 이교도들의 군대에 대항해서 명예를 쌓으려는 행위일 뿐이다. 황제들이 크리스쳔이 됨에 따라 이러한 경쟁은 중단되었다. 십자가가 독수리(역자 주 : 로마의 상징)를 한 번 몰아내자, 모든 로마 사람들의 용기는 사라졌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고려를 차지하여 두고 권리에 대해서 고려해 보자. 이러한 중요한 문제를 다스릴 수 있는 원리들을 고안해 보자. 사회적 계약이 주권자에게 준 권리는 내가 말한 바와 같이 공적인 유용성[16]의 경계를 넘어서 있지 않다. 예속인들은 주권자에게 그들의 믿을 설명할 어떠한 의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금은 각각의 시민들이 그가 그의 의무를 사랑하게 만들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종교의 교리가 국가와 그 국가의 구성원 모두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게다가 모든 사람들은 주권자의 간섭없이 그들이 기꺼워하는 대로 의견을 표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권자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는 경쟁할 수 없다. 다가올 피지배인들의 운명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이 훌륭한 시민이라면 주권자와는 관계가 없다.

결과적으로 신앙고백은 순수하게 시민적이고, 주권자의 기능은 법 조항을 결정하는 것이며 엄격하게 말하면 종교적 교리로서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 인식의 표현으로서 결정을 하는 것인데, 사회적 인식이란 그것 없이는 훌륭한 시민이라든가 황제의 신민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17] 주권자가 이러한 법 조항을 믿는 것을 강요할 수 없다 해도, 주권자는 믿지 않는 그들을 국외로 추방할 수는 있다. 물론 그들 추방하는 것은 신앙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반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떤 누군가가 이 같은 교리를 공식적으로 인식한 이후에 마치 그것들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 때에는 그를 사형에 처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법 앞에서 거짓을 저지르는 엄청난 법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시민적 종교의 원리는 단순함에 틀림없고 또한 수적으로도 몇 개가 되지 않는다.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신성의 존재, 정의로운 자의 행복, 죄를 얻은 자를 벌줌, 사회적 계약과 법의 신성스러움 등 이 모든 것들이 긍정적인 교리이다. 부정적인 교리에 대해서는 나는 한 마디로 정리하건데, 불관용이라고 할 수 있다. 관용이 없다는 것이 우리가 반대하는 종교이다.

내 생각으로는 시민적 관용과 종교적 관용을 구분하는 것은 오류이다. 이러한 두 가지 관용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저주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 신학적 관용이 허용되는 곳이라면 반드시 시민적 결과물을 가질 수 있다. 그 때 주권자는 더 이상 주권자가 아니고, 성직자가자 주인이 되며 왕은 단순히 그 사무의 집행자일 뿐이다.

배타적인 국민 종교가 있지도 않고 더 이상 있을 수도 없으므로 다른 종교를 관용하는 모든 종교들은 시민적 의무를 수용하는 한 관용이 베풀어져야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가 감히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으리라”라고 말한다면 국가가 교회이고 통치지가 고위 성직자가 아닌 이상 국가로부터 추방당해야 한다. 그와 같은 교리는 단지 신정 정부에서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정부에서는 유해할 뿐이다. 헨리 4세가 카톨릭을 포용하였다고 말해지는 이유는 모든 정직한 사람들이 그것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던 점도 있다.

[편집] 제9 장 결론

정치적 권리에 대한 진정한 원리를 확립하고 그러한 원리에 입각하여 국가를 성립시키려 한다면 나는 국가와 관련된 다른 연구들을 고려함으로써 완성시키려 한다. 여기에 포함되는 다른 연구는 국제법, 상법, 전쟁과 정복에 관한 권리, 행정법, 동맹, 협상, 조약 등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나의 얕은 견식에 비하면 너무나 광대하다. 그리고 나는 항상 나의 범주 내에 있는 더 많은 것들에 나의 눈을 고정시켜 보려고 한다.

[편집] 주석

  1. 늪 속에 있는 베니스 공화국의 느린 형성과 발달은 이러한 과정의 중요한 예시가 된다. 1,200년이 지난 후에도 베니스의 사람들이 두 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두 번째 단계는 1198년의 Serrar di Consiglio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로마 공화국을 인용하여 나에게 대항하는 논리를 편다. 로마 공화국은 오히려 반대로 군주정에서 귀족정으로, 다시 귀족정에서 민주정으로 발달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의견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로물루스의 첫 헌법은 혼합정의 형태였으며 그것은 즉시 독재로 타락해 갔다. 특별한 이유로 그 국가는 마치 어린 아이가 성숙하기 전에 죽은 것처럼 시간이 되기 전에 멸망해 버렸다. 타르퀸을 축출한 시점이 진정한 공화국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공화국은 처음에는 고정된 형태가 아니었다. 귀족 계급을 폐지한 것에 대한 실패가 그 일을 반 쯤 끝내놓은 상태로 남겨 놓았다. 왜냐하면 합법적인 통치 형태 중 최악인 세습적인 귀족정이 여전히 민주정과 갈등하고 있는 상황에 있었고 그러한 불완전한 형태의 정부는 마키아벨리가 증명하듯이 호민관이 성립되기 이전에는 안정되지 못했다. 단지 호민관이 성립된 이후에야 말로 진정한 형태의 정부이며 진정한 형태의 민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지로 국민들은 그 때 주권자일 뿐만 아니라 또한 행정관료이자 판사이기도 했다. 의회는 단지 조정하는 종속적인 위원회에 불과했다. 반면에 집정관은 단지 전쟁에서 주요한 행정관료 혹은 절대적인 명령자의 역할을 하는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로마에서 국민들의 대통령과 같은 존재였다.
    이 시기로부터 정부는 그의 자연적 속성에 따라 귀족정으로 강하게 흘러가는 경향이 있었다. 귀족 계급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베니스와 제노바처럼 귀족들 사이에 귀족정이 더 이상 안착되기 힘든 상태에 있었다. 말이 일의 성질을 바꾸어 내지는 못하기에 국민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우두머리들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그들이 어떠한 이름을 갖다 붙혀도 여전히 귀족정이다.
    귀족정의 폐해는 시민전쟁과 삼두정치를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술라, 시저, 아우구스투스는 사실은 군주만큼이나 좋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티베리우스의 독재 아래에서 로마는 와해되었다. 그렇다면 로마의 역사는 나의 이론과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더 확신할 수 있다.
  2.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다소 영국 의회가 가지고 있는 어감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기능의 유사성은 비록 모든 관할권이 중단되었다 하더라도 집정관과 호민관 사이의 갈등을 유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3. 추운 나라에 동방의 사치와 관대함을 적용하기란 그들에게 더 구속될 것과 동방의 사람들보다 더 복종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4. 이것이 내가 이 작업은 나머지 부분에서 할 것이다. 그 때 외국과의 관계를 다루면서 나는 국가의 연합이라는 주제를 다루게 될 것인데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으로 그것의 원리는 성립 중에 있다.
  5. 그것은 어느 누구도 그의 의무를 피하기 위해서 국가를 떠날 수는 없고 국가가 그를 필요로 할 때 그가 국가를 구원하지 않기 위해서 떠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한 경우에 탈출은 범죄이며 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것은 ‘계약의 철회’가 아니라 ‘버림’이다.
  6. 문자적으로 ‘벨을 울린다’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베른의 관습에서 공적인 노역을 하는 노동자들로 고용된 죄수의 목 주변에 벨을 감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7. 문자적으로 '훈련시키다'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제네바에서 도시의 길들이기 힘든 악한들을 위한 감옥이 있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8. 이것은 항상 자유로운 국가를 언급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밖의 가족, 재산, 도피처의 부족, 필요 혹은 폭력은 마지못해 그 국가에 살게끔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그의 단순한 거주는 계약에 대한 동의 혹은 계약을 파괴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9. 제노바에서는 자유라는 단어가 모든 죄수들의 문 앞, 그리고 죄수들이 노 젖는 배의 족쇄에서 보여진다. 이러한 구호의 사용은 훌륭하고 정의로운 것이다. 사실, 시민들이 자유롭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모든 국가의 범죄자이다. 범죄를 저지른 그러한 사람들이 죄수들이 노 젖는 배에 갇혀 있는 국가에서는 최상의 완벽한 자유가 누려질 수 있다.
  10. Romulus라는 이름으로부터 도출되었다고 말하는 로마는 실제로는 그리스어이다. 그것은 힘을 의미한다. 'Numa'라는 이름 또한 그리스어인데, 그것은 법을 의미한다. 그 도시의 처음 두 왕이 그들이 행한 업적과 관련하여 명백하게 그 이름이 널리 퍼지기 전에 태어났었어야만 하는 데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11. 나는 comitia centuriata가 만나는 곳을 Campus Martius라고 부른다. 다른 두 가지 의회에서는 사람들은 광장과 그 외의 지역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 때 capite censi는 지도적 위치의 시민들 만큼의 영향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12. 결과적으로 century는 투표를 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첫 번째 절차였기 때문에 'praerogativa'라고 불렀다. 이것이 바로 'prerogative(특권 혹은 대권)'의 어원이다.
  13. 이러한 임명은 마치 그들이 법 위에 있는 사람을 임명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듯이 밤에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다.
  14. 그가 독재자를 임명하자고 제안을 했다면 이것을 확신할 수는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감히 그 자신을 임명하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의 동료들이 그를 지명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었다.
  15. 그것은 프랑스와 같은 성직자를 하나의 부서에 묶는 형식적인 단체가 아니라 차라리 교회의 연합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연합과 파문은 성직자들의 사회적 계약이다. 그들은 항상 그것을 통해서 왕과 국민들의 주인이고자 했다. 모든 성직자들은 그들이 지구의 반대편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동료시민들이 되었다. 이러한 발명은 정치의 걸작이다. 이교도들의 성직자들 사이에는 이와 같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직자의 단체를 결코 구성할 수 없다.
  16. Marquis d'Argenson이 ‘공화국 안에서’라는 책에 “모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 않는 한 완벽하게 자유롭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변할 수 없는 경계가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나는 그것이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저명하고 존경할만한 사람에 대한 기억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또한 이것을 인용하게 되어서 기쁘다. 그는 국가의 장관으로서 정의롭고 건전한 의견으로 그의 정부에 대해서 헌신을 다한, 진정한 시민으로서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17. Caesar가 Catilina에게 간청하면서 영혼불멸의 교리를 성립시키려고 했다. Cato와 Cicero는 그것을 비평하면서 철학을 가진 시간 낭비가 아니라고 했다. 그들은 Caesar가 나쁜 시민인 것처럼 말하고 국가에 상처를 주는 이념을 발전시키는 것을 보여주는 데 만족했다. 그리고 이것은 상원이 판단해야 하는 것이고 신학적으로는 어떠한 의문도 있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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