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권48/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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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편집]

劒君, 仇文大舍之子, 爲沙梁宮舍人, 建福四十四[九]年丁亥秋八月, 隕霜殺諸穀, 明年, 春夏大飢, 民賣子而食, 於時, 宮中諸舍人同謀, 盜唱翳倉穀分之, 劒君獨不受, 諸舍人曰, 衆人皆受, 君獨却之, 何也, 若嫌小, 請更加之, 劒君笑曰, 僕編名於近郞之徒, 修行於風月之庭, 苟非其義, 雖千金之利, 不動心焉, 時, 大日伊湌之子, 爲花郞號近郞, 故云爾, 劒君出至近郞之門, 舍人等密議不殺此人, 心有漏言, 遂召之, 劒君知其謀殺, 辭近郞曰, 今日之後, 不復相見, 郞問之, 劒君不言, 再三問之, 乃畧言其由, 郞曰, 胡不言於有司, 劒君曰, 畏己死, 使衆人入罪, 情所不忍也, 然則盍逃乎, 曰, 彼曲我直, 而反自逃, 非丈夫也, 遂往, 諸舍人置酒謝之, 密以藥置食, 劒君知而强食, 乃死, 君子曰, 劒君死非其所, 可謂輕泰山於鴻毛者也

번역문[편집]

검군은 대사를 지낸 구문의 아들로, 사량궁 소속 사인이었다. 건복 44(9) 정해년[1] 8월 가을에 큰 서리가 내려 곡식이 모두 죽었고, 그 다음해 봄여름에 대기근이 닥쳤다. 백성들은 자식을 팔아 잡아먹었고, 이때 궁궐 안의 무릇 사인들이 함께 꾀를 내어 창예창의 곡식을 털어 나누어 가졌는데, 오직 검군만이 그것을 받지 않았다. 무릇 사인들이 말하길, “모든 사람들이 받았는데, 자네만 물리쳤으니, 어째서인가? 만약 적어서라면, 청컨대 다시 주겠네.” 검군이 웃으며 말하길, 나는 근랑의 낭도로 이름을 올렸고 풍월의 뜰[2]에서 수행하고 있으니, 진실로 의로운 것이 아니라면 비록 천금의 이익이라도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이때 이찬[3] 대일의 아들이 있었는데, 화랑으로 이름을 근랑이라 했다. 이런 까닭에, 검군이 나와서 근랑의 집 문앞에 이르렀는데, 다른 사인들이 밀의하기를, “저 놈을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말이 새나갈 것이다.” 드디어 그를 부르니, 검군이 그들이 자신을 모살하려 함을 알고 근랑에게 말하길, “오늘 이후로 다시 뵙지 못하나이다.” 근랑이 묻자, 검군은 말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더 묻자, 이에 그 이유를 간략히 말하니, 화랑이 말하길, “왜 관청에 말하지 않는가?” 검군이 말하길, “자기가 죽는 것이 두려워 여러 사람들이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제 마음이 참아낼 수 없나이다.” “그렇다면 어찌 도망가지 아니하는가?” 말하길, “저들이 잘못하고 저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달아남은 대장부답지 못하나이다.” 드디어 가니, 무릇 사인들이 술자리를 차려놓고 음식에다 약을 숨겼는데, 검군은 이를 알면서 억지로 먹다가 죽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하길, “검군은 죽을 바 아니었는데 죽었으니 가히 태산을 홍모보다 더 가벼이 여긴 사람이라 이를 수 있겠다"라고 하였다.

주석[편집]

  1. 서기 627년.
  2. 화랑도를 뜻함.
  3. 신라의 둘째 가는 벼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