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신라본기/제1권/유리 이사금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남해 차차웅
삼국사기 (三國史記)
〈유리 이사금 條〉
지은이: 김부식

탈해 이사금

유리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 남해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운제부인이고 왕비는 일지(日知) 갈문왕(葛文王)의 딸이다.<혹은 왕비의 성은 박씨이고 허루왕(許婁王)의 딸이라고도 하였다.>

앞서 남해가 죽자 유리가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는데, 대보(大輔)인 탈해가 본래 덕망이 있었던 까닭에 왕위를 미루어 사양하였다. 탈해가 말하였다

임금의 자리는 용렬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내가 듣건대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齒]가 많다고 하니 떡을 깨물어서 시험해보자.

유리의 잇금[齒理]이 많았으므로 이에 좌우의 신하와 더불어 그를 받들어 세우고 이사금(尼師今)이라 불렀다. 옛부터 전해져오는 것이 이와 같다. 김대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南解)가 장차 죽을 즈음에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姓)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어라.'고 하였다. 그 후에 김씨 성이 또한 일어나 3성(三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서로 왕위를 이었던 까닭에 이사금이라 불렀다.

목차

[편집] 즉위 2년 (25년)

즉위 2년(25년) 봄 2월에 친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편집] 즉위 5년 (28년)

즉위 5년(28년) 겨울 11월에 왕이 나라 안을 순행(巡行)하다가 한 할멈이 굶주리고 얼어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내가 미미한 몸으로 왕위에 있으면서 백성을 능히 기르지 못하여 늙은이와 어린 아이로 하여금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 [왕이] 옷을 벗어서 덮어주고 밥을 주어 먹게 하였다. 그리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곳곳에 있는 홀아비[鰥]와 홀어미[寡], 부모없는 아이[孤], 자식 없는 늙은이[獨]와 늙고 병들어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을 위문하고 양식을 나누어 주어서 부양하게 하였다. 이에 이웃 나라의 백성들이 소문을 듣고 옮겨 오는 자가 많았다. 이 해에 백성의 풍속이 즐겁고 편안하여 비로소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다. 이것이 가악(歌樂)의 시초이다.

[편집] 즉위 9년 (32년)

즉위 9년(32년) 봄에 6부의 이름을 바꾸고 그에 따라 성을 내려주었다. 양산부를 양부(梁部)로 고치고 성은 이(李)로 하였고, 고허부를 사량부(沙梁部)로 고치고 성은 최(崔), 대수부를 점량부(漸梁部)<또는 모량부(牟梁部)라고도 하였다.>로 고치고 성은 손(孫), 간진부를 본피부(本彼部)로 고치고 성은 정(鄭), 가리부를 한기부(漢祇部)로 고치고 성은 배(裵), 명활부를 습비부(習比部)로 고치고 성은 설(薛)로 하였다. 또 관(官)을 설치하였는데, 17등급이 있었다. 첫째는 이벌찬, 둘째는 이척찬, 셋째는 잡찬, 넷째는 파진찬, 다섯째는 대아찬, 여섯째는 아찬, 일곱째는 일길찬, 여덟째는 사찬, 아홉째는 급벌찬, 열째는 대나마, 열한째는 나마, 열두째는 대사, 열세째는 소사, 열네째는 길사, 열다섯째는 대오, 열여섯째는 소오, 열일곱째는 조위였다.

왕이 6부를 정하고 나서 이를 반씩 둘로 나누어 왕의 딸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부(部) 안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무리를 나누어 편을 짜서 가을 7월 16일부터 매일 아침 일찍 큰 부[大部]의 뜰에 모여서 길쌈을 하도록 하여 밤 10시경에 그치는데, 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적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진 편은 술과 음식을 차려서 이긴 편에게 사례하였다. 이에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를 모두 행하는데 그것을 가배(嘉俳)라 하였다. 이때 진 편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며 탄식해 말하기를 "회소 회소(會蘇)"라고 하였는데, 그 소리가 슬프고도 아름다워 후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따라서 노래를 지어 회소곡(會蘇曲)이라 이름하였다.


[편집] 즉위 11년 (34년)

즉위 11년(34년) 서울[京都]에 땅이 갈라져 샘물이 솟았다. 6월에 홍수가 났다.

[편집] 즉위 13년 (36년)

즉위 13년(36년) 가을 8월에 낙랑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타산성(朶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편집] 즉위 14년 (37년)

즉위 14년(37년) 고구려 왕 무휼(無恤)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 5천 명이 와서 투항하였으므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편집] 즉위 17년 (40년)

즉위 17년(40년) 가을 9월에 화려현(華麗縣)과 불내현(不耐縣) 두 현의 사람들이 함께 모의하여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맥국(貊國)의 우두머리가 곡하(曲河)의 서쪽에서 군사로써 막아 물리쳤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

[편집] 즉위 19년 (42년)

즉위 19년(42년) 가을 8월에 맥국의 우두머리가 사냥하여 얻은 새와 짐승을 바쳤다.

[편집] 즉위 31년 (54년)

즉위 31년(54년) 봄 2월에 살별이 자궁(紫宮) [별자리]에 나타났다.

[편집] 즉위 33년 (56년)

즉위 33년(56년) 여름 4월에 용이 금성(金城)의 우물에서 나타났는데, 조금 있다가 폭우가 서북쪽에서부터 몰려왔다. 5월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편집] 즉위 34년 (57년)

즉위 34년(57년) 가을 9월에 왕이 병환이 들자 신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탈해는 그 신분이 임금의 친척이고 지위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며 여러 번 공명(功名)을 드러내었다. 짐(朕)의 두 아들은 재주가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내가 죽은 후에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할 것이니, 나의 유훈을 잊지 말라" 겨울 10월에 왕이 죽어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

[편집] 주석

다른 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