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쿵 저러쿵
이러쿵 저러쿵
사람이란 먹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살려고 먹는 것이라(Man lebt nicht um zu essen, sondern ißt um zu leben.) 함은 독일의 俚諺[1]이라던가. 더군다나 우리 동양으로 말하면, 어느것은 口腹小人이라니, 여지없이 모욕하고 멸시하고 눈썹을 찡그리고 침을 배앝았다.
사람이 살기란 먹기 위함인가 아닌가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으리라. 과연 먹자고 산다는 것은 만물의 영장 되는 사람에게 최대 모욕이리라. 다른 동물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면 남들을 상에도 창피한 일이리라. 생각만 해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시방 효연소연히 전세계를 울리고 움직이고 뒤흔드는 문제가 무엇인가. 분명히 빵의 분배 문제라 한다. 먹자는 시비요, 다툼이요, 싸움이다. 가장 위대한 두뇌와 가장 신랄한 수완들이 이로써 골몰하고 이로써 헐떡이고 이로써 분주하다. “나에게 빵을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죽음을 주소서”하는 부르짖음이 九泉에 사무친다.
“사람은 먹자고 사느냐, 살자고 먹느냐?”
“물론 살자고 먹는 것이지!”라고 모욕적으로, 단정적으로 쉽사리 해결되었던 이 문제가 새삼스럽게 중대한 의문을 일으킨다. 먹자고 사는지 살자고 먹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풀기 전에 먼저 알아둘 항구불변의 진리가 있다.
“사람은 먹어야만 산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희극 〈사람과 超人〉 가운데 이런 장면이 있다. 타나라는 청년이 자동차를 몰고 에스파니아의 세에라에 다다랐을 제 산적이 달려들며 외치기를,
“나는 부잣집놈을 벗겨먹기로 爲業하는 도적이다”하니까, 소리에 응하는 울림모양으로 그 청년이 대답하기를, “나는 가난뱅이를 벗겨먹기로 爲業하는 부자다”라고 하였다. 그 얼마나 신랄한 풍자인가.
도적의 말이 난 김에 또하나 적어볼까. 러시아 어느 작가의 단편 ― 작자의 이름은 벌써 잊었고, 찾아보니 책이 없는 걸 보면 어느결에니 헌책전의 신세를 졌나보다 ―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어느 부잣집 문 파수 보는 작자가 주인댁 창고던가 어디에 얼무적얼무적하는 도적을 잡았다. 처음에는 무슨 利器[2]나 가졌나 보아서 조금 겁도 내었지만 아무 저항이 없는 걸 보자 문 파수는 기고만장에서 어르딱딱거리며 파출소인지 어디인지에 끌고가려 하였다. 파출소도 멀었던지, 가면서 그 도적이란 자가 종용종용히 문 파수를 꾀고 달래기를 ― 네가 나를 잡아갈 게 무어냐, 대관절 네가 문 파수를 보게 된 까닭을 생각해볼 게 아니냐, 그 까닭으 우리같은 도적놈이 있기 때문이지 우리가 없다 하면, 왜 너의 주인이 미쳤더냐? 너를 밥 먹이고 돈 주어가며 문에 세워두게. 그러고보면 우리 도적은 너의 직업을 얻어준 은인이 아니냐, 주인의 물건을 못 훔쳐가게 했으면 너의 직책은 다한 것인데, 은혜를 원수로 삼아 나를 잡아가서 욕을 보일 거야 무엇 있니……
이렇게 한참 梁上君子[3]가 事理[4]를 타서 이르매, 문 파수는 이윽히 생각하더니 “그도 그래”하고 도적을 놓아주었다 한다… 그 도적놈도 도적질을 해먹을망정 철학자의 風度가 있거나와 파수 보는 작자도 매우 아량이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이 말은 예술가 또는 예술가 되려는 이에게 그 얼마나 많은 감흥을 주었으랴. 매력을 끼쳤으랴. 인생 칠십 古來稀[5]라고, 오래 살았자 70년이나 80년의 목숨이 아닌가. 이것을 영원무궁한 詩의 長流에 비길 것같으면 그야말로 부유이고 춘몽이다. 그야말로 “번개가 번쩍할 제 나고, 그 번쩍임이 아직 사라지기도 전에 죽는다”고 할 수 있는 짧은 찰나다. 이렇듯이 하잘나위없이 덧없는 사이에 지어내뜨린 錦繡文章[6]이 천수만세를 내려가며 불멸의 광채를 흘릴 것을 생각할 제, 글 가지고 노는 이의 어깨는 으쓱하고 바람이 아니 날 수 없다.
더군다나 조선에서 예술에 뜻을 두는 이 ―― 물질로나 명예로나 零에 가까운 보수밖에 기대할 수 없는 그들은 예술이 길다는 맛에나마, 까마아득한 미래에 희망을 걸고나마 붓을 잡을 뿐이다. 때를 못 만난 탓으로 알아주는 이 없어 오늘은 역경에 전전하지마는 빛나는 앞날의 태양과 함께 영롱히 번쩍이는 칠보관이 나를 기다리렷다 ―― 하는 것이 보수는 고만두고 턱없는 빈저어림과 까닭없는 비웃음을 참아가며 예술의 길에 매진하는 우리 글쓰는 이의 안타까운 희망일 것이다. 이 점에 들어서는 우리네가 외국작가 ―― 물질로든지 또는 명예로든지 상당한 대우를 받는 그네들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이 순결하고 창백하다. 그야말로 秋天에 걸린 皓月[7]이다. 玉壺[8]에 담긴 氷心[9]이다.
그러나 예술이 길다는 것이 참말일까. 속임 없는 참말일까. 예술이란 것도 또한 인생과 같이 덧없는 것은 아닐는지. 꿈을 현실로 기뻐하며, 그 실체는 어찌 같은지 幻影만 보고 좋아하는 사람의 잠꼬대가 아닐는지?
과연 우리는 호머의 시도 읽고 셰익스피어의 희곡도 본다. 하지마는 그런 사람이 도무지 몇몇이나 되는가. 글이 있은 지 몇천년이 지났고, 그동안 몇억만의 사람이 죽고 살고 하였는데 오늘날까지 예술가로 이름이라도 저하는 이는 손꼽아 헤아릴 것이 아닌가. 예술로 일삼던 이가 그뿐이 아닐 터인데. 아아, 그들의 길다고 생각하던 예술은 다 어디로 갔노!
한 사람의 호머, 한 사람의 셰익스피어의 이름이 떠오른 밑에는 기천 기만의 무명시인과 무명작가가 소리없이 자취없이 쌓인 것이다. 모든 것을 약속한 ‘내일’은 그들의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았구나! ‘一將의 성공에 萬骨이 朽’[10]란 글귀는 전쟁에만 쓰일 줄 알았더니, 싱그러운 예술의 왕국에도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 이를 생각하매, 길다는 예술을 가지고도 마침내 길지 못한 이를 위하여 無然[11]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무슨 業寃[12]으로 조선에 나고, 무슨 業寃으로 조선에서 뮤즈의 은총을 입으려다가 남보다 더 쉽사리 사라졌고 또 사라질 우리네 예술가를 위하여 同聲一哭할 일이 아닌가.
사라지는 것은 無名한 이만 아니다. 유명한 이 또한 때 있어 아니 사라지란 법도 없는 것이다. 여기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의 신랄한 문구가 생각난다.
“태양의 열이 점점 식어지면 따라서 지구도 식어질 것이요, 나중에는 사람이 絶種[13]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땅속에 있는 지렁이는 뜻밖에 살아갈는지 모른다. 그러면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지렁이에게 嗤笑[14]를 받을는지 누가 알랴.”
예술이 긴 것도 나는 바라지 않는다. 사람이 짧고 예술만 길면 그야말로 無用의 長物인 까닭이다.
우리는 今世의 부귀영화를 백안시하는 김에 아주 내세에 대한 아름다운 기대도 단념할 일이다. 너무 악착하고 참혹한 노릇이지만.
일본의 극작가요 겸 소설가 菊池寬[15]씨가 〈문예작품의 내용적 가치〉란 평론을 써서 한동안 몰의를 일으킨 일이 있다. 그 평론의 내용을 대략만 따먼 이러하다.
어떤 작품을 읽어보면 잘썼다 잘썼다 싶으면서도 마음이 감동되지 않고, 어떤 작품은 일어보면 못썼다 못썼다 싶으면서도 마음이 감동된다. 이런 경우를 어떠헤 설명해야 옳을까. 예술적 작품으로야 전자가 후자보다 몇백 곱절 우월한 것이언만 마음이 감동되긴 후자라 하면, 전자에게 없는 무엇을 후자가 지닌 것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하고보면, 어떤 작품 가운데는 예술이란 것과는 별다른 가치가 있는 듯싶다. 예술적 표현과는 별다른 가치가 있는 듯싶다. 예를 들면 로맹 롤랑의 소설 가운데 있는 한 삽화 “프랑스 병정이 전선에서 독일의 16,7세 되는 어린 병정을 찔러 죽이려한즉, 그 소년이 손을 들며 엄마! 엄마! 하고 부르짖었다.” 이런 이야기는 소설에 쓰이든지 아니 쓰이든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가졌다. 문예작품의 題材 가운데는 작가가 그 예술적 표현의 마술지팡이로 건드리기 전부터 찬연히 번쩍이는 인생의 보옥이 많은 줄 생각한다. 예술은 예술적 가치만 있으면 물론 훌륭한 예술이다. 그러나 내용적 가치가 문예작품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나는 주장 않을 수 없다.
예술적 가치, 예술적 감명만을 짓는 걸로써 또는 있는 걸로써 만족하는 이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만족치 않는 이도 많을 줄 안다. 물론 예술적 가치, 예술적 감명이 인생에 필요치 않다는 건 아니다. 인생을 향상시키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그런 그것만이라면 너무나 미약하다, 희박하다. 예술이 예술되는 所以然은 거기 예술적 표현의 유무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로되, 그 결정된 예술이 인생에 대하여 중대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오로지 그 작품의 내용적 가치, 생활적 가치를 따라서 결정될 것이라 생각한다.
입센의 근대국, 톨스토이의 작품이 一代의 인심을 진동시킨 이유의 하나는 그 속에 있는 사상의 힘이다. 그 예술만의 힘이 아니다. 예술에만 숨어서 이생을 알력 않는 작가는 상아탑 속에 숨어서 은피리를 불고 있는 셈이다.
문예는 經國의 大事라고 하지마는 내 생각 같아서는 생활이 제1이요, 예술이 제2다.
이 논지를 고대로 승인하기에는 주저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로되, 쓸데없이 예술의 환영만 따르며 실생활을 무시하려는 우리에게는 頂門의 一鍼[16]이라 하겠다.
러시아 단편작가 체홉의 자료는 무한하다 일렀다. 아무렇지 않은 日恒茶飯[17] 사이에서도 절묘한 자료를 잡아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금을 모래 속에서 찾아내었다고 모래가 모조리 금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구만 있고 기술만 있고보면 深山窮谷[18]에 바위를 뚫고 금을 캐냄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금도 무수하거나와 石金도 무수하다. 체홉의 자료가 무한하다면 알란 포우의 자료도 무한할 것이다.
쉬운 듯하고도 어려운 것은 작품이 될 자료의 선택이다. 은을 가지고도 잘만 다루면 훌륭한 미술품이 되겠지만 同價紅裳[19]이면 금으로 만들고 싶다. 다같은 솜씨로 다같은 힘을 들인다며 미술품이 미술품 된 그것에는 아무 우열이 없겠지만, 바탕이 다르고 속되게 말하면 싯가가 다르지 않으냐.
그래, 싯가가 다르다. 요새는 금이 은보다 귀하지만, 영겁의 장래에 사람의 好惡[20]가 뒤바뀌면 은이 금보다 귀할는지 누가 알랴.
그러나 금이 은보다 귀한 오느랄에는 그 오묘한 솜씨를 은에 보다 금에 베풀려는 것이 떳떳한 일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오늘날이 우리 인생에게 가장 귀한 것을 만들어낼 일이다.
뒷걸음을 쳐서 先人이 점령한 곳을 비집고 한몫을 보려는 것도 추접스러운 짓이지만 그렇다고 왕청되게 발을 날려서 後人의 설 자리를 미리 차지하려는 것도 그리 거룩한 일이 아니다. 제가 서 있는 자리인 이날 이때에 제가 서 있는 제 땅을 할 수 있는 대로 힘있게 밟아서 깊고 굵직한 足跡을 남길 따름이다.
주석
[편집]- ↑ 俚諺(이언): 속담
- ↑ 利器(이기): 무기나 다른 도구
- ↑ 梁上君子(양상군자): 들보 위의 군자. 즉 도둑
- ↑ 事理(사리): 이치. 즉, 사리를 타서 = 조리있게
- ↑ 古來稀(고래희): 예로부터 드묾
- ↑ 錦繡文章(금수문장): 비단의 수 놓은 듯이 아름답고 훌륭한 문장, 또는 그런 문장가
- ↑ 皓月(호월): 밝게 비치는 달
- ↑ 玉壺(옥호): 옥으로 만든 작은 병
- ↑ 氷心(빙심): 맑고 티가 없는 마음
- ↑ 一將功成萬骨枯(일장공성만골고): 장군 한 사람의 공은 만 사람의 뼈가 부러진 끝에 이루어진다.
- ↑ 無然(무연): 무관심하다
- ↑ 業寃(업원): 전생의 업보
- ↑ 絶種(절종): 멸종, 대가 끊어짐
- ↑ 嗤笑(치소): 비웃음
- ↑ 기쿠치 칸
- ↑ 頂門一鍼(정문일침): 따끔한 충고.
- ↑ 日恒茶飯(일항다반): 항시 있는 일
- ↑ 深山窮谷(심산궁곡): 깊고 막막한 산곡
- ↑ 同價紅裳(동가홍상):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 ↑ 好惡(오호): 좋고 나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