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3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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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 연연[편집]

1[편집]

「옛 대통령이라구요?……」

준길은 놀랐다.

「그렇다. 오늘밤 백 영민과 신 성호와 장 일수가 오랫만에 한 좌석에 모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좌석을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하여 신 성호는 자기의 애인이었던 춘심을 부른 것이다.」

애꾸눈인 준길은 최 달근의 이 치밀한 추리에 혀를 채지 않을 수 없었다.

「자아, 박군, 내 육감이 맞는가 안 맞는가 ── 한번 시험해 보는 것이 어때?」

「갑시다! 천일관으로 갑시다!」

준길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음, 가 보자! 그러나 고기는 크다! 너무 조급히 굴다가는 놓쳐 버빌지두 모르니까.」

「본부에 응원대를 청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별 한 개를 여럿으로 쪼개 갖구 싶은가?」

「에?……이, 참, 잘 알았읍니다.」

최 달근은 공을 독차지 하고 싶은 것이다. 두 눈이 무섭게 타올랐다. 장일수를 체포한다는 일념이 그의 모든 정열을 붙들었다.

이 보다 약 三十[삼십]분 전의 일이다.

청량리 밖 장 일수가 몸을 숨기고 있는 집 대문 밖에서 자전거를 멈춘 한 사람의 용달인이 편지 한 장을 손에 들고 굳게 잠근 대문을 두드리며

「허 운옥씨 편지요.」

하고, 고함을 쳤다.

이윽고 운옥이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허 운옥씹니까?」

「네 ──」

용달사에서 왔는뎁쇼 「 . 어떤 손님 한분이 이 편지를 전해 드리라고요.」

「네 그러세요?」

운옥은 편지를 받아 쥐었다. 뒷등을 보니 발신인 주소 성명이 없다.

「그럼 잠깐만 기다리세요.」

운옥은 봉투를 뗀다.

「회답은 안하셔도 괜찮으시다고요. 갖다만 드리면 된다고요.」

그러면서 용달인은 자전거에 올라타자 휘바람을 불면서 골목 밖으로 사라졌다.

「누굴까?……내가 여기 와 있는 줄을 아는 사람은 없을텐데?……혹시 선생님이 무슨 급한 환자가 있어서 보낸 편지가 아닐까?」

그러나 그것은 김 준혁 박사의 필적은 아니었다.

운옥은 분주스레 봉투를 뗐다. 봉투를 떼니 속에는 또 하나의 봉투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봉투에는

「운옥씨, 이 편지를 장군에게 전해 주시요. ── 신 성호 ──」

하고, 씌어 있었다.

「아이, 난 또 누구라구? 신 선생이 장 선생께 보내는 편지 아냐?」

그렇다. 그것은 몸을 숨기고 있는 장 일수의 이름을 공공연하게 겉봉에 쓸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 선생께서 편지가 왔어요.」

운옥은 방으로 들어가자 책상 앞에서 무슨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장 일수에게 편지를 내 주었다.

「전 또 제 이름을 부르기에 저한테 온 편진 줄만 알았지요.」

「미안합니다. 하하하하……」

장 일수는 유쾌한 듯이 웃으며 편지를 뜯었다. 거기에는

「대통령 각하! 꼬마가 상경하였네. 오래간만에 만나서 한 잔 푸른 술에 막혔던 구정을 풀어봄도 또 한 통쾌지사가 아닌가. 군의 상처도 인젠 완쾌되었으니, 아울러 군의 건강도 축복을 할겸……이편지 보는대로 곧 와 주게. 장소는 천일관 ── 바루 동대문 밖에 있는 二[이]류 요정인데 전차 길에서 조금 들어간 골목 막달은 집이네. 호신법(護身法)이 남달리 능난하다는 군의 변장술을 한번 구경함도 불역락호(不亦樂乎)아!」

「으와, 핫, 핫, 핫……」

편지를 읽고난 장 일수는 유쾌해서 못견디겠다는 듯이 한바탕 웃어 댔다.

「으와, 핫, 핫, 핫……」

하고, 장 일수는 연거퍼 웃어 대며

「야아, 이거 참 유쾌한걸!」

「아이 깜짝 놀랐네. 참 장 선생님두……뭐가 그리 기쁘세요?」

운옥은 눈이 동그래 진다.

「가장 다정턴 구년 친구가 한 자리에 모여서 한잔 술을 나누며 막혔던 구정을 풀어 봄도 또한 통쾌지사가 아닌가! 하, 하, 하……」

「누가 오셨나요?」

「꼬마 신랑 ── 저번 말한 그 꼬마가 왔답니다.」

「꼬마라구요?……」

그러다가 그만 운옥은 흑 ── 하고 숨이 막힐 듯이

「아, 저…저……」

하고, 다음 말을 잇지 못한채 오똑이처럼 오뚝 섰다.

「네, 열세 살 때 약혼을 하였다는 그 꼬마 신랑 ── 백 영민군이 왔답니다.」

「……」

운옥을 대답을 못했다. 입을 열면 말이 나오기 전에 이 세상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커다란 감동의 덩어리가 먼저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불덩어리가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핏뭉치가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동경 들어 가는 길에 잠깐 들린 모양인데 아아, 얼마만인가! 四[사]년 만! 중학시절의 동무를 만나면 어쩐지 가슴속이 고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지요. 더구나 백군은 나처럼 성격이 거치럽질 않구요. 학과 덕이 겸비한 진실한 학도랍니다. 어딘가 운옥씨의 인격과 비슷한 데가 있지요. 자아, 그럼 잠깐 다녀 오겠읍니다.

장 일수는 경쾌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장소가 어디 시기에?……장 선생님, 위험하지 않으실까요?」

간신히 운옥은 입을 열었다.

그순간, 장 일수는 그 거츠러운 얼굴에 피오르는 듯한 정열을 띠우면서 잠깐 동안 운옥의 오들오들 떨고 있는 눈동자를 물끄러미 들여다 보면서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운옥은 대답이 없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하고 또다시 벙어리가 되어 버리는 운옥이었다. 운옥은 단지 장 일수가 가려는 장소가 알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영민이가 와 있다는 장소가 알고 싶었던 것이다.

「하하하……」

하고, 다음 순간 장 일수는 지금 자기가 붙잡혀 있는 그 불덩어리같은 감정을 먼 곳으로 추방이나 하듯이 웃어버린 후에

「장소는 동대문 밖 천일관이지만……가만 계십시요. 내 운옥씨에게 재미있는 것을 하나 보여 드리지요.」

하고 그는 자기의 조그만 손가방에서 무엇인가를 뒤적거리다가 하나는 눈에 다 끼고 하나는 코 밑에다 붙였다.

「자아, 어떻습니까? 이만 했으면 되지 않았읍니까?」

눈에 낀 것은 색 안경이고 코 밑에 붙인 것은 수염이었다.

「아이, 어쩌면……정말 몰라 보겠어요!」

운옥은 필요 이상으로 놀래어 보인다. 자기의 감동을 감추기 위해서다.

「자아, 그럼 다녀 오겠읍니다.」

장 일수는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섰다. 운옥은 대문간까지 전송을 하면서

「몸 조심하세요.」

「고맙습니다.」

장 일수는 이윽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아, 그이가 왔다! 그이가 이 서울에 와 있다!」

운옥은 방으로 뛰어 들어 가면서 외쳤다.

2[편집]

「그이가 서울에 와 있다!」

안절부절을 못하고 운옥은 텅 빈 방안을 삥삥 돌았다.

「그이의 모습이 얼마나 변했을꼬?……인젠 정말루 어른이 됐을테지! 학교만 마치면 변호사가 된다는데……그이가 변호사가 되구, 내가 저 애꾸눈이 박 준길이에게 붙잡혀서 법정에 서게 되면 그이는 나를 위해서 정성껏 변호를 해 줄까?……」

그런 것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주르르 볼을 적신다.

영민이가 단 한 마디라도 자기를 위해서 변호를 하여 준다면 운옥은 정말 죽어도 한이 없을 것 같았다. 그 한없는 죽음 가운데서 가장 커다란 행복을, 가장 거룩한 행복을 운옥은 찾을 것 같았다. 삶의 보람이, 그리고 수난의 보람이 그 가운데 있을 것 같았다.

눈물 젖은 운옥의 눈 앞에 그때 자기가 심판을 받는 법정의 광경이 한 토막 분명히 떠 올랐다.

재판관 검찰관들이 , 주루루 앉은 높은 단 밑에 삿갓을 쓰고 쇠수갑을 찬한 사람의 불쌍한 여죄수의 자태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옆 변호사석에서 영민이가 손으로 테이블을 치며 그 불쌍한 여죄수를 위하여 열변을 토하고 있는 광경이 눈 앞에 떠올랐다.

「정말 그렇다면 죽어두 한이 없지!」

하였다. 그리고 조만간 법정에 서지 않으면 아니 될 운옥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한번만……단 한번만 만나 봤으면……」

지금까지 운옥은 다시는 영민을 만나지 못하고 죽을 것만 같았다. 만나서 그이를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지 못할 바엔……도리어 그이에게 마음 고생을 시킬 바엔 차라리 운옥을 만나지 않는 것만 못했다.

「그러나 단 한번만 만나 봤으면……」

지금까지는 전혀 단념하여 버렸던 그러한 욕망이 불길처럼 운옥의 마음을 휩쓸기 시작하였다.

만나도 할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을 것 같았다. 그저 영민의 성장(成長)을 한번 눈 앞에 보는 것으로써 운옥은 만족하다.

「먼 발로라도 그이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는지 한번만 봤으면……」

운옥은 후딱 자기 팔목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벌써 여섯 시 반이다. 장일수가 떠난지도 반 시간이 넘었다.

운옥은 그 무엇을 결심한 사람처럼 분주스레 간호복을 벗고 보통 옷으로 갈아 입었다.

「이러고만 섰을 때가 아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영민을 놓칠것만 같았다.

「한 걸음이라도 좀더 가까이……」

그렇다. 한 걸음이라도 좀더 가까이 그이의 옆으로 다가가고 싶은 욕망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할머니, 저 잠깐 나갔다 오겠어요.」

뜰로 내려 서면서, 운옥은 안방을 향하여 말을 하였다.

「다녀 오시우.」

운옥은 대문을 나섰다.

풋득풋득 또 눈이 내린다.

허둥지둥하는 발걸음이다.

천일관으로! 천일관으로!

운옥은 전차를 탈 셈으로 청량리 역으로 걸어 갔다.

걸음이 아니고 절반은 달음박질이다.

꿈 길을 운옥은 걷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