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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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전설[편집]

1[편집]

「어머니, 다녀 오겠읍니다.」

새 버선에 분홍 저고리, 검정 치마를 입은 운옥이가 방문 밖에서 인사를 하였다.

「오냐, 다녀 오너라.」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어머니가 방문을 열며 얼굴을 내밀었다.

「너 졸업식이 언제랬지?」

「내일 모레예요.」

「오냐, 어서 가 보아라.」

운옥은 책보를 들고 대문 밖을 나섰다.

오늘은 주일날 밤 ── 뗑 뗑 뗑 태극령 …… …… …… 너머로 예배당 종소리가 평화스럽게 들려오는 밤이다.

「쟤두 인젠 야학을 졸업하는데, 원 영민인 아직껏 뭘하구 있노?…… 그애두 인젠 졸업식이 끝났을 텐데……집에 들리지 않구 곧장 동경 갔는지두 모르지.」

「내야 알우? 아들 하나 없어진 셈 치믄 그만이지. 음……」

「아들이 몇이나 되는 줄 아시우?」

「며누리는 아들 노릇 못 하나?」

「며누리 다르구 아들 다르지 ──」

「애비 말 거역하는 것두 아들이야?」

「아이구 영감두……제 아비 상투 쥐구 제 어미 끌 채 잡는 아들을 못 보셨수?」

「그것두 아들이야?……새끼지.」

「아들은 뭐구, 새끼는 뭐요?」

「아들은 사람의 아들이구, 새끼는 짐승의 새끼야!」

영민이가 돌아 오면 결혼식을 지내려고 만반의 준비를 차리고 기다리는 백초시 내외였다. 二[이]년 전, 운옥이가 예배당 야학엘 다니고 싶다는 말을 석 달이나 별러서 입밖에 내었을 때, 백 초시는 달포가 지나도록 이렇다는 한 마디 대답도 없이 잠자코 있었다.

도대체 예배당이라든가 예수님이라는 말이 백 초시의 구미엔 맞지 않았다.

「가갸거겨나 알구 쉬운 한문짜나 알면 그만이지.」

하였다.

허 상진의 유랑생활 三十[삼십]년은 운옥에게 정규의 교육을 받게할 여유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도 일본인의 기관 밑에서 자기 딸을 교육시킬 생각을 애당초부터 갖지 않은 허 상진이었다. 그래서 틈틈이 한 글과 백수문(白首文)을 운옥에게 손수 가르쳤다.

그러나 일어를 모르면 머리를 들지 못하는 세상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더구나 남편될 사람의 교육 정도가 나날이 향상하는데 비하여 자기 만이 일어 한 마디 모른다는 것이 운옥을 무척 불안하게 하였다. 한 자라도 더 배워서 남편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는 운옥의 초조한 마음을 알자 백 초시는 마침내 운옥의 희망을 들어 주었다.

그것이 二[이]년 전 ── 성심성의를 다한 운옥의 쌓은 공이 드디어 오늘 내일 이루어 지려는 무렵이다.

운옥이 총명하여 부인반의 급장이라는 말을 듣고 백 초시는 저으기 기뻐하였으나 목소리가 남달리 이뻐서 때때로 뭇 사람 앞에서 무슨 창가라든가 하는 노래를 부른다는 말을 듣고는 또다시 입맛을 쩝쩝 다시는 백 초시였다.

── 운옥이가 뒷탑골 예배당 마당에 바로 들어 섰을 때였다.

저편 종각 앞에서 여러 청년들과 모여 섰던 청년 하나가 후딱 머리를 들고 운옥의 얼굴을 쏘아 보았다 . 기름이 뚝뚝 흐르도록 머리를 재워 넘긴 낯설은 청년이다.

「아, 저 삼룡의 아들 준길이가 아닌가!」

운옥은 공연히 마음이 덜컥해 진다.

三[삼]년 전, 만주로 돈을 벌러 갔다던 박 준길이다. 무슨 아편 장사를 한다느니 색시 장사를 한다느니 하고 소문을 놓던 박 준길이가 아닌가.

그 어떤 불길한 예감이 운옥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렇다. 박 준길의 이 돌연한 출현은 불행한 여인 허 운옥의 일생을 폭풍 속으로 휩쓸어 넣는 하나의 중대한 모멘트를 형성하였다.

2[편집]

三[삼]년 전 ── 공금 三[삼]백 원을 횡령한 사실이 발각되어 박 준길은 읍(邑) 면소에서 돌연 자취를 감추었다.

곰보딱지 삼룡이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三[삼]백 원을 물어 넣고 사건은 무사하였으나 삼룡이도 그만이 탑골서 살 맛을 잃었는지, 당시 열 일곱 살 먹은 딸 분이를 데리고 평양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만주로 도망간 준길이에게서 동리 청년들에게 한두 번 편지가 왔다.

돈을 벌었느니 돈을 번다느니 하는 그런 만주풍이 끼인 허황한 편지였다.

그러나 지금 제법 양복이랑 입고 돌연 탑골동에 나타난 준길이가 과연 얼마나한 돈을 벌었는지는 알 수 없으되 제법 고향이 그리워 찾아 온 것을 보면 단돈 천원이라도 손바닥에 걸린 모양이다.

운옥은 공연히 두근거리는 젖가슴 밑을 손으로 만지며 예배를 보았다. 예배가 끝난 후 내일 모레 거행할 야학 졸업식 준비를 마치고 예배당을 나선 것은 벌써 밤이 어지간히 이슥했을 무렵이었다.

태극령 고개 위에 반달이 걸렸다.

운옥은 문득 준길의 아내가 될 뻔한 六[육]년 전을 생각한다. 부르르 몸이 떨렸다.

「불쌍한 아버지!」

정말 불쌍한 아버지였다 . 그처럼 아버지를 못살게 굴던 五[오]백 원짜리 돈표가 두 장, 지금 태극령 고개를 넘고 있는 운옥의 눈 앞에서 도깨비불인 양 펄펄펄 타오른다.

「고마운 아버지!」

정말 고마운 시아버지였다.

「그러나…….」

운옥은 긴 한숨을 푸우 내 쉬었다. 지나간 겨울 방학, 자기에게 너무나 쌀쌀히 대해 주던 영민을 생각한다. 비오는 밤이나 눈오는 밤이나 이 태극령 고개를 이태 동안이나 넘어다닌 자기의 공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공부한 영민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한 자라도 더 배우려고 애를 태운 운옥이었다.

평양 학교를 졸업하고 동경 유학을 간다는 말이 났을 때, 출세한 영민의 훌륭한 자태를 장래에 그림 그리고 기뻐하기 전에 캄캄한 절벽이 앞 길을 가로막는 것 같은 그 어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던 운옥이었다.

「그래두 행여나……」

그렇다. 아직 채 끊기지 않은 한 줄기 희망이 운옥에게는 있었다.

「동경을 가셔두, 가기 전에 돌아와 부모를 뵙구 가실텐데……」

태극령을 넘을 때 운옥은 요즈음 매일 밤 하는 것처럼 도라지탑에 길흉점(吉兇占)울 쳐 보았다.

운옥은 모본단 엽랑에서 엽전 한 닢을 꺼내 들고 도라지탑에 머리를 숙였다.

「도라지야! 내 점 좀 쳐다오.」

그러면서 엽전을 반만큼 공중에 튀겼다.

「짤랑 ── 때구르르……」

엽전은 운옥의 고무신 뿌리에서 멎었다. 달이 희다. 불을 안켜도 좋았다.

「이다. 아이구 오늘 밤두 이네!」

엽전을 들여다 보던 운옥의 목소리가 한결 밝다.

「이」는 길조요,「평」은 흉조다.

어젯밤도, 그젯밤도, 그리고 오늘밤도 연달아 사흘이 쭉 길조다.

「무슨 기쁜 소식이 있을래나 보다.」

운옥은 그러면서 탑 옆 주춧돌 위에 가만히 앉아 보았다.

「도라지 혼이 나를 도울래나 보다.」

하였다.

이 도라지탑에는 실로 애달픈 사랑의 전설(傳說)이 한 토막 서리어 있었던 것이니 그 눈물겨운 사랑의 ,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운옥은 자기의 신세가 그 불쌍한 처녀 도라지의 그것처럼 가엾어 지는 것이었다.

운옥은 살며시 눈을 감고 그 애처러운 사랑의 전설을 영민에게 들려 주며 즐기던 지나간 날의 하룻밤을 한없이 그리워 한다.

3[편집]

눈을 살며시 감은 운옥의 망막 속에는 함박눈이 내리는 어떤 추운 날 밤의 고요한 풍경이 한 폭의 필림처럼 나타났다.

그것은 운옥이가 열 여섯 살, 영민이가 열 네 살 먹는 해 겨울이었다.

어른들은 모두 뒷탑골 친척댁에 상가 난데를 가고 운옥은 영민과 함께 집을 지키게 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거위 배를 앓던 영민이가 그날 밤 갑자기 허리를 꼬며 엉엉 울어댔다. 운옥은 시어머니가 하듯이 영민의 배를 쓸어 주었으나 영민은 한층 더 울어만 댔다.

「아이구 배야……아이구 어머니……」

어머니를 부르며 우는 영민이가 운옥은 동생처럼 애처러워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때 시어머니는 옛말을 즐겨하는 아들에게「흥부 놀부」의 이야기도 하여 주고「심청이」와「장화홍련」의 이야기도 하여 주었다. 그래서 운옥이도 배를 쓸면서

「옛말 할까요?」

「응 ──」

「도라지탑 이야기 ──」

「도라지탑?」

「태극령 도라지탑 말이야요.」

운옥이의 열 여섯 살은 나 어린 영민이 보다 먼저 도라지의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게 하였다.

「옛날…… 아주 옛날 이야기래요. 태극령 고개에 태극사라는 절깐이 있었대요. 그 절간에선 해마다 사월 파일만 되믄 재를 울리는데, 재를 다 올리구 나선 밤이 늦도록 탑돌이를 했대요.」

「탑돌이가 뭐야?」

영민이가 관심을 갖는 모양에 운옥은 점점 신이 나서

「탑돌이라구, 동네 색시와 처녀들이 절에 모여서……탑을 삥삥 돌면서 노래두 하구 춤두 추구 ── 그러는 거래요.」

「그래서?……」

「그런데 말이야요. 그 색시들 가운데 도라지라는 처녀가 있었는데 아주 퍽 곱게 생겼대요. 도라지 꽃처럼 곱게 생겼대요.」

「…………」

「그런데 어떤날 밤, 도라지는 태극사에 있는 젊은 중을 한번 보구 그만 맘이 포옥 쏠렸대요. 그 젊은 중의 이름이 뭐 법월이래든가 그래요.」

「뭐 버버리(벙어리라는 사투리)?……」

「버버리?……호, 호, 호……아이 참 웃기네. 저 말 못하는 버버리가 아니구 법법(法)자, 달월(月)자 ── 법월이 말이야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

「심청전」과「장화홍련전」에 눈물을 흘리던 영민의 눈 앞에 처음으로 전개되는 청춘도(靑春圖)의 황홀하고도 아름다운 한 폭이었다.

「그래서 도라지는 포옥 쏠린 정을 가슴속 깊이 품고 매일 밤 태극사로 법월을 엿보러 댕겼는데……법월인 도를 닦는 승려의 몸이라, 도라지의 뜻을 알구두 모르는 척했대요. 그러믄 그럴수록 도라지는 더 안타깝구…… 그러던 어떤 날 밤, 태극사 늙은 주지가 법월일 불러 놓구 하는 말이, 네가 이 절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다가는 몸을 망칠테니 하루바삐 봇짐을 싸가지구 태극살 떠나라구요…」

「왜 몸을 망치나?」

영민은 그 이유를 몰랐다.

그 말에 운옥은 문득 얼굴을 붉히며 텅 비인 방안을 돌아 보았다. 자기와 영민과 ── 아무리 보아도 두 사람 밖에는 없었다.

「도를 닦는 승려의 몸으로서 남의 처녀를……」

「…………」

창 밖에 함박눈은 소리없이 쏟아지고 삼경오야 겨울 밤은 저으기 깊으려 한다.

4[편집]

펄럭거리는 등잔불이 영민의 배를 쓰담는 운옥의 그림자를 벽 위에 조용히 아로 새겼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법월은 주지의 말대로 태극살 떠났대요.」

「암 말두 않구?」

「암 말두 않구…… 잠자쿠 태극살 몰래 떠나 버렸대요.」

「…………」

아무 말도 없이 떠나버린 법월일 영민은 무척 나무라는 것이다. 그 나무라는 영민의 표정을 운옥은 분명히 그 영롱한 눈동자 속에 보았다.

「그래 영문을 모르는 도라지는 매일 밤처럼 태극사에 올라가서 울었대요.

불쌍한 도라지! ……그러나 암만 울어두 떠나버린 법월이가 뵐 리 있나요?…… 한 해 가구 이태 가구 三[삼]년이 돼두 법월인 도무지 보이지 않구…… 그래서 도라지가 생각하길, 옳지 태극사가 불이 나면 법월이가 할 수 없이 법당에서 뛰어 나오려니 ── 그렇게 생각하구 절에다 불을 놨대요……」

「옳지, 그래서 태극사가 불이 붙었군!」

영민은 신기한 듯이 눈을 반짝 떴다.

「그럼요. 그러나 벌써 三[삼]년 전에 떠나 버린 법월이가 글쎄 뛰어 나올 리가 만무하지! 태극산 그래서 다 타버리구 뜰 가운데 돌탑 하나만 남았대요.」

「지금 있는 도라지탑이 그거나?」

「그거래요…… 그래두 불쌍한 도라지는 법월일 못잊구…… 어디서 선뜻 나설 것만 같아서……비 오는 날이나 눈 오는 날이나 매일 밤처럼 탑을 등지구 멍하니 법월일 기다리기를 또 五[오]년 ──」

「그럼 八[팔]년이나 기다렸나?」

눈을 크게 뜨고 영민은 지금 사랑의 정의(定義)를 배우는 것이다.

「그럼요. 그러나 八[팔]년을 기다려두 법월은 돌아 오질 않구…… 그러다가 도라지는…… 가엾은 도라지는 十[십]년만에 그만 탑 앞에 쓰러져서 배리 배리 말라 죽었대요. 아아, 불쌍한 도라지!」

「음, 불쌍한 도라지!」

영민의 눈에 글성글성 눈물이 고인다. 그 눈물을 보는 순간, 금후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이처럼 동정심이 많은 영민이가 자기를 버릴것 같지 않아 귀엽고 탐탁하여 눈물이 핑 돌았다.

운옥은 저고리 고름으로 눈 자욱을 한번 부비고 나서

「그랬는데 글쎄 웬 일인지, 바루 도라지가 죽은 탑 앞에 고운 꽃이 한떨기 폈더래요. 보오얗게 보라빛 도는 고운 꽃이…… 그래 동네 사람들은 그 꽃을 도라지 꽃이라구 불렀대요.」

「아, 그래서 도라지 꽃이구먼!」

「그렇대요. 그런데 글쎄 十[십]년만에 법월이가 도를 다 닦구 훌륭한 도사가 되어서 돌아 오질 않았겠어요?」

「법월이가?……」

「예, 그래 돌아와 보니 도라지가 그 모양이 되었으니 오죽하겠어요? 그래서 법월이는 불쌍한 도라지를 위해서 도라지 꽃을 금강산 유점사루 옮겨 가려구 파 보았더니, 글세 인삼보다도 더 큰 하얀 뿌리가 있는데 그것이 꼭 사람의 형상을 했더래요. 아니, 十[십]년 동안이나 애를 태우다 죽은 도라지와 꼭 같더라구요!…… 법월인 그만 기가 막혀 대성통곡을 하면서 그 사람의 형상을 한 하얀 뿌리를 조선 八[팔]도 방방곡곡을 찾아 다니며 산이란 산엔 죄다 심었대요. 그래서 도라지 꽃이라는 이름이 생기구…… 그래서 우리 조선엔 옛날부터 도라지 꽃이 어디든지 많다구요 ── 불쌍한 도라지지요?」

「음, 불쌍한 도라지!」

그래서 눈 오는 하룻밤을 이야기로 새운 운옥이와 영민이었다. 벌써 五[오]년 전 일이다.

잘못하면 자기의 운명도 도라지와 같아질 것만 같아서 운옥은 꺼질 듯한 긴 한숨과 함께 주춧돌에서 몸을 일으키었을 바로 그때였다.

「운옥이……운옥이……!」

하고 어디선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사내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깜짝 놀래어 운옥은 등 뒤를 돌아다 보았다.

「앗, 준길이다!」

아까 예배당 문 옆에서 운옥을 유심히 바라 보던 박 준길이가 지금 태극령 고개를 헐레벌떡 넘어 오고 있지 않은가.

「운옥이 잠깐만……잠깐만……」

그러나 그때는 벌써 총소리에 놀란 사슴처럼 태극령 고개를 앞탑골을 향하여 쏜살같이 뛰어 내려가는 운옥의 그림자가 달빛 속에서 감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