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극장/1권/4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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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나비[편집]

1[편집]

눈이 개인 이튿날 오후, 부산행 급행 열차 三[삼]등실에는 어머니와 김 준혁의 전송을 받는 오 유경과 신 성호의 전송을 받는 백 영민이가 서로서로의 존재를 확실히 느끼면서도 모르는 사람처럼 외면을 하고 찻간에 올랐다.

「얘 너 몸조심 잘 해라. 먹을것 주의하구. 또 맹장염 걸리면 어떻거니?」

어머니는 아까 멀리 三[삼]등 차표를 살 때부터 하는 걱정이다.

「어머니두 참……맹장염은 한 번 수술을 함 종신 면역이래두 그르셔?」

「그래두 너 글쎄 하필 왜 三[삼]등 차냐?」

「유경씬 三[삼]등 차에 맛이 들었답니다.」

김 준혁이가 옆에서 싱글벙글 한다.

「글쎄 어머니, 웃어 죽겠어요. 오빠가 동생보구 씨자 붙이는것, 어머니 보셨슈?」

그러면서 싱글벙글 웃고 섰는 준혁이에게 유경은 뜻 깊은 웃음을 익살맞게 한 번 웃어 보이며 눈을 흘긴다.

어머니는 무슨 뜻인지 얼른 알아 듣지 못해 어리 벙벙 하여 있다.

그때 저편 찻간 앞에서 영민과 이야기하고 섰던 신 성호가 김 준혁을 발견하고 사람들을 밀치며 다가 왔다.

「김 선생, 누구 전송 나오셨읍니까?」

「예, 잠깐……」

준혁은 들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어머니와 마주섰는 유경을 쳐다보았다.

신 성호도 따라 쳐다보았다.

「그래 신군도 누굴?……」

네 동경 가는 내 친구를 「 , 전송하러 나왔읍니다. 그런데 저 장군이 말입니다.」

「아, 정말 오늘 아침 파출부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장군이 떠났대지요?」

「네, 하마트면 어젯밤……」

그러는데 발차의 종이 째르랑 하고 구내를 울렸다.

「아, 그럼 전 저리로 가 보겠읍니다.」

신 성호는 사람의 물결 속을 헤엄치듯이 하며 백 영민의 찻간 앞으로 달려갔다.

「그이가 누구야?」

먼발로 바라보구 있던 영민이가 달려온 신 성호에게 물었다.

「그이가 바루 장군의 파트론이야. 김 준혁 박사라구, 아주 진실한 의학도라네.」

아, 유경이의 소위 진실한 과학자라는 이가 바로 저이로구나 하였다.

「춘심인 종시 나오지 않는가 보네. 자네 서운한가?」

하는, 신 성호의 말에

「나오지 않는 것이 자네에겐 유리하지 않은가?」

그러면서 두 젊은이는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정답게 웃었다.

「그러나 춘심이 말루를 일장춘몽일세!」

「응?……」

「사흘 후엔 춘심이가 오 창윤씨의 소실로 들어 앉는다는 말이야.」

「뭐, 오 창윤씨?……아니, 장 일수가 협박을 하러갔던 바로 그 오 창윤이 의?……」

「글쎄 그런가 보이.」

「음……참 이상한 인연인걸!」

영민의 신음 소리가 무척 깊었다. 바로 그 오 창윤의 딸 유경이와 영민과의 사이를 신 성호가 알았다면 이상한 인연이라는 한 마디가 좀더 깊은 뜻을 가지고 신 성호의 고막을 흔들었을 것이다.

그때 이편 찻간에서는 기차가 움직이려는 순간, 준혁의 귀밑에 입을 대고 유경이가 속삭인 한 마디는 이러하였다.

「오빠, 나 一[일]년만 더 오빠의 동생 노릇을 할테야!」

2[편집]

부산까지 가는 이 二[ ]등 차표를 한 장 손에 들고 춘심은 용산 역에서 차를 탔다.

그러나 二[이]등 찻간을 죄다 뒤져 보았으나 백 영민의 자태는 통 보이지 않는다. 한강 철교를 건느고 영등포까지 가는 동안에 춘심은 세 번이나 二 [이]등 찻간을 왔다갔다 하였다. 식당에도 들어가 보았다.

승강구에도 나가 보았다.

「설마 三[삼]등에야 탓을라구?」

그러면서도 춘심은 식당을 지나 三[삼]등 찻간으로 들어 갔다. 앉은 사람보다 선 사람이 더 많아 보이였다. 춘심은 간신히 한 찻간을 뚫고 나가니, 인젠 정말 더 뚫고 들어갈 용기가 없어졌다. 하는 수 없이 춘심은 찬바람이 회오리치는 승강구에 서서

「후우!」

한숨을 지었다.

그렇다. 四[사]년 전, 역시 남행 열차에서 춘심은 영민을 만났다. 달빛 어린 승강구에 쪼구리고 앉아서 춘심이의 털붙이 외투를 나눠 쓰고 군밤을 까 던 그 시절의 입맛을 잊지 못하여 기차에 오른 춘심이다. 부산까지 바래다 주는 오늘의 하룻밤을 춘심은 전 생애의 금자탑처럼 고이고이 마음속 깊이 모시려 하였다.

더구나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되 집을 쫓겨났다는 영민의 경제적 궁핍을 조금이라도 도와줄 요량으로 오늘 아침 나오는 길에 종로 뒷골목 전당포에 들려서 시계, 반지, 금비녀 등의 금부치를 잡혀 현금 천 원을 장만한 춘심이었다. 그러노라고 시간이 바빠서 용산 역으로 택시 ─ 를 몰아나간 춘심이었다.

춘심은 마음을 먹고 또 한 찻간을 힘들여 지나 나갔다, 그러나 거기도 영민은 보이지 않는다.

춘심은 인젠 정말 기운이 쭉 빠졌다.

「그러나 한 찻간만 더……」

비상한 결심을 하면서 춘심은 또다시 찻간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 들여 놓는 순간, 불현듯 던진 춘심이의 시선이 외인편 들창가에 않은 영민의 뒷모양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한 걸음 내짚었던 춘심의 발이 뒤로 움쳐 들기 시작하였던 것이니, 영민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영민과 마주 앉아서 생글생글 웃으면서 다정스레 이야기하고 있는 학생풍의 여자를 춘심은 분명히 어디서 한 번 본 것 같았다.

「어디서 보았을까?……」

춘심은 사람들의 등뒤로 자기 얼굴을 감추면서 골돌히 생각을 한다. 그러나 어디서 본 것만은 기억을 하겠으나 누군지를 좀처럼 알아 낼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 여자와 영민이가 같이 일어 선다. 일어 서서 사람들을 헤치며 이리로 걸어 나오질 않는가. 춘심은 얼른 세면소(洗面所)로 나와 몸을 감추었다.

「식당두 만원임 어떡해요?」

춘심이 코 앞으로 영민이가 지나 가고 그뒤를 따르면서 하는 여자의 말 소리였다. 종달새처럼 어여쁜 음성이다. 그 어여쁜 음성이 춘심의 가슴 속에 욱하고 불을 질러 놓았다.

간격을 두고 춘심이도 식당 문 밖까지 두 사람을 따라갔다. 그러나 차마 식당까지 따라 들어갈 용기가 춘심에게는 없었다. 공연히 치가 떨린다. 금 부치를 팔아 모은 천 원이 고스라니 들어가는 핸드ㆍ백을 춘심의 손톱이 바드득 소리가 나도록 긁어댄다. 마치 과거에 있어서 영민이가 자기 남편이었던 것처럼 춘심은 분해 진다.

「어디서 보았을까?……」

그러나 기억은 좀처럼 튀어 나오지 않았다.

3[편집]

한 시간 후, 천안(天安)서 차를 바꾸어 타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찻간 승강구에서 춘심은 누엿누엿 넘어가는 석양과 우뚝 마주 서 있었다.

주홍색, 분홍색으로 물든 화려한 하늘 밑에 자줏빛, 암록색으로 저문 먼 산 기슭에 한 마리 검은 독수리가 유유히 떠돌고 있는 것이 춘심의 눈에는 한 없이 부러웠다.

태극령 고개에도 저녁 노을이 지건만 춘심이가 자연을 그리워 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독수리야, 네 신세 부러워라!」

춘심은 나즈막한 어조로 중얼거려 보는 것이다.

「백구야! 훨훨 날지 말아. 너 잡을 내 아니로다, 스승이 버리심에 너를 따라 여기 왔다……」

구슬픈 산염불이 요란한 궤음을 누비듯이 춘심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멀지 않아 오 창윤의 시들은 피부가 자기의 청춘을 마음대로 희롱할 것을 생각하니, 소리에도 있지마는 야속하기 그지없다.

「춘심아, 울지 말아 네 울음 구슬퍼라.」

달콤한 눈물이 주루루 흘러 내린다. 춘심은 혀 끝으로 눈물을 받아 맛을 본다. 짭짤하다.

「돈……, 돈……, 돈……」

춘심은 승강구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턱을 고이었다.

「돈, 돈, 돈…… 돈 실러 가자. 양평 바다에 돈 실러 가자……」

춘심의 손이 무의식중에 들었던 핸드ㆍ백을 열었다.

十[십]원 짜리로 백 장을 모은 지폐 뭉치를 꺼내 눈물젖은 자기 볼에다 갖다 대고 춘심은 부벼본다.

회오리치는 바람에 그때 十[십]원 짜리 한 장이 휙 하고 날아 났다. 날아난 지폐가 허공중에서 한참 동안 맴을 돌다가 밭 고랑으로 떨어진다.

재미가 나서 춘심은 또 한 장을 이번에는 제 손으로 날렸다. 그러나 그놈은 휙하고 바퀴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재미가 없다. 이번엔 두 장을 한꺼번에 날려 보았다. 한 놈은 날고 한 놈은 역시 바퀴 속으로 들어갔다.

다음엔 한 여나믄 장을 휙하고 내던졌다. 나는 놈, 기는 놈, 따라 오는 놈들이 황홀한 저녁노을 속에서 범나비인 양 춤을춘다.

신이 나서 춘심은 벌떡 일어나자 쥐었던 지폐 뭉치에서 절반쯤을 떼어 힘껏 허공에 내던졌다. 미친듯이 나붓기는 수십 장의 지폐, 지폐, 지폐의 나비!

「오오, 돈……돈……돈이다!」

기차가 커 ─ 브를 했기 때문에 몇 장은 뒤에 달린 찻간 들창에 척 붙어버린 놈도 있었고 열어놓은 들창 속으로 날아들어 가는 놈도 있다.

사람들이 하나 둘 들창으로 머리를 내민다.

춘심은 그때 손에 남은 지폐 뭉치를 한꺼번에 휙 하고 허공에 풀어 놓으며 미친 사람처럼 외쳤다.

「돈이다……돈이다……돈이다!」

사람들이 뭐라고들 떠들면서 우르르 뛰어나왔다.

그 중 형사 비슷한 한 사람이 춘심의 몸둥이를 뒤에서 부등켜 안으며

「당신, 미쳤소?」

하고, 고함을 쳤다.

「호호……돈을 뿌리면 사람이 미치는가요?」

춘심의 눈물젖은 얼굴이 삥 둘러싼 군중을 향하여 화려하게 웃는다.

「아니, 온전한 사람 치구야 가짜두 아닌 진짜 돈을 어떻게 뿌린단 말이요?」

진짜를 「 뿌리니까 재미가 있지, 가짜야 무슨 재미로 뿌려요?」

「하여튼 이리 오쇼. 차장실로 갑시다!」

「호호호, 돈을 뿌려서 죄가 된다면 명월관의 뿌리는 양반들은 왜 못 잡아가슈? …… 하, 하, 하, 핫……하, 하, 핫……」

춘심은 형사의 뒤를 따라가면서 유쾌히 웃어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