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의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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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집]

산(生)다는 말은 그저 막연히 사는 사람의 생(生)을 의미하고 생활(生活)한다는 말은 그저 막연히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어떠한 난관이라도 돌파하면서까지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생(生)을 이름이라고 한다면 수택이의 지금의 생은 이 후자(後者)에 속할 것이다. 사실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그는 남이 살아 있듯이 그저 막연히 살아왔던 것이다. 남이 살듯이 살아왔고 보니 남이 죽듯이 또 죽었어야 할 것이로되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은 그가 지금까지 그만큼 살기 위해서 애를 썼다는 증좌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죽듯이 그런 모진 병에 걸리지 않았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수택 자신에게는 적이 미안한 일일지 모르나 지금까지의 그의 생에 대한 태도란 이런 정도에서 몇 걸음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도 하루에 밥 세 끼니를 얻기 위해서는 실로 피비린내나는 노력을 해왔다 할 것이다. 동경 유학 때는 실로 일곱 끼니의 때를 거르면서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했었고 일금 오십원의 월급 봉투를 위해서는 여름 아침의 그 단잠도 희생을 해왔고 X광선을 비추면 월식하는 달처럼 일부분이 뿌예진 폐를 가지고도 한결같이 오년이란 긴 세월을 버티어왔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서는 젊은 결기로서는 도저히 참기 어려웠을 모든 굴욕 앞에서도 인종(忍從)의 덕을 지켜왔으며 한 때의 찬거리를 사기 위해서 마포에서 광화문까지의 먼 거리를 터덜터덜 걷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살아 있는 그 누구나가 사는 방법이요 또 살아나갈 방법이다. 좀더 잘산다―보다 더 값있게 산다. 좀더 깨끗하게 살고 보다 더 건실한 생활자가 된다―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한 구원한 이상처럼만 생각해왔었다. 그리고 그것은 위대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요 자기와 같은 범인에게는 생각할 수도 없는 지난한 일이라 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가 직을 내던지고 농촌으로 기어든 동기가 어떤 것이었다든가, 그 의기(意氣)가 어느 정도의 것이었다든가 하는 것은 막론하고 타기만만한 자기 생(生)의 새로운 국면(局面)을 타개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대학 출신의 이력서가 수십통씩이나 누룩머리를 앓는 영예로운 직업을 한푼의 미련도 없이 내던진 데는 우선 경의를 표해둔다 하더라도농촌으로 돌아온 이후의 생(生)이 그대로 생활하는 사람의 ‘생’에 편입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도시를 떠난 후 4개월간의 농촌생활이란 그대로 도시생활의 연장이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형식이었다.

양복에, 모자를 쓰고 구두를 신고 살던 수택이가 머리에 밀짚모자를 얹고 고의 적삼에 고무신 짝을 끌고 살았다는 차이뿐이었다. 그의 생활 의지는 여전히 모호한 것이었으며 막연한 것이었다. 생활 의지라기보다는 그것은 차라리 기분이었다.

아니 그것은 도시 생활 시대라기보다도 한층 더 헐값으로 평가될 허영이었다. 대학을 졸업한(시골사람들에게는 중등 이상이면 그대로 대학으로 통용이 된다)당당한 일류 신문기자가 농촌에 와서 땅을 파고, 지게를 지고 오줌장군을 져 나르며 거름을 친다―이렇게 보아주는 고향 사람들의 경이(驚異)에 홀로 만족하고 우월을 느끼는 허영―이것이 그의 생활 의지(生活意志)였다.

“지금은 너희들과 이렇게 살지마는 그래도 너희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너희들은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지마는 나의 노동은 그것이 아니다. 같은 노동을 한다드라도 내가 하는 노동에는 더 값이 있다…”

물론 이런 말을 한 적도 없고 자기가 이런 우월감―허영에 들떠 있다고도 생각지는 않았다. 생각지는 않으면서도 역시 수택은 무의식중에 그런 허영에 지배되었다. 서투른 지게질을 할 때나 소를 몰고 갈 때나 동리 여편네들과 노인들이 자기를 비웃기 보다도 대견하게―장하게 보아주리라는 막연한 의식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지배가 되었고 열칠팔세의 아이들이 수월하게 지고 일어나는 볏섬을 땅짐도 멋 시키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부끄러워했어야 할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교육받는 사람의 특징이기나 한 것처럼 수치는커녕 오히려 자랑처럼 생각한다는 것도 그 자신은 의식치 못하나마 사실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대학 출신의 지게질이라도 한두 번 보면 족한 것이다.

그것이 늘 그렇게 신기할 것이 없을 것이며 대견할 것도 없고 장할 건덕지가 못 될 것이다.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별이 비치고 하는 것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적어도 수택이의 지게질에 늘 그렇게 놀라기만 할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렇건마는 수택에게는 그것이 섭섭했다. 물론 표명을 하는 것도 아니요, 또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을 인식해본 일이 없기는 했지마는 동리 사람들이 벌써 자기를 경이의 눈으로 보아주지 않는 것을 섭섭히 생각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수택이는 서울 있는 몇몇 친구한테는 자기의 근황을 알려왔다. 자기의 일을 근심해 줄 우정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지마는 그는 자기의 생활을 비교적 자세히 보고한 일도 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소풀을 베었다든가 오줌 장군을 자다가 깨빡을 쳤다든가 거적을 깔고 앉아서 밤을 새워 물꼬를 지켰다든가… 이런 이야기까지도 보고를 했든 것이다. 시굴생활을 보고하는 데는 물론 이런 사실을 뺄 수는 없다 치더라도 그런 편지를 쓰던 때의 그의 심리를 한 번 더 깊이 파볼 때.

‘나는 이렇게 초월했다. 나는 문화인 너희들이 불쌍히 여긴다…’

이러한 의식이 그 어는 구석에든지 잠복해 있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에 족한 일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순수한 농촌생활은 추수기가 끝난 직후― 다시 말하면 그의 지게질과 서투른 낫질이 벌써 동리 사람들에게 신기한 사건이 못 되게 된 때, 그리고 한여름 동안 밤잠을 못 자고 피땀을 흘린 총수확이 벼 넉 섬으로 보리 때까지 연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 직면한 그 순간부터였다.

‘저것으로 삼동을 나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며 수택은 몇 번이고 뜰팡에 포갬포갬 쌓아논 볏섬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내년 보리가 나기까지에는 적어도 반년이나 있었다. 그 오륙 개월을 벼 넉 섬으로 산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었다. 그 벼 넉 섬으로 양식도 해야 하고 호세도 해야 하고 사람이 병이 나지 말란 법도 없고 보니 영신환 봉도 사게 될 게고 석유며 심지어 성냥 한 갑까지도 저 벼를 내야만 한다. 금년은 볏금이 좋아서 팔전이다. 이백 근 잡고 십육 원, 넉 섬을 다 낸댔자 육십원이다. 잡용으로 아무래도 한 섬은 내야 할 판이다. 그렇다면 오십여원을 가지고 반년을 살아야 한다… 육칠은 사십이.

수택은 온종일 키질에 저녁술을 놓기가 무섭게 곯아떨어진 아내를 내려다보며 이런 구구를 쳐본다. 어린것이 둘, 자기내외에 창문이 놈까지 넣으면 알톨 같은 다섯 식구다. 어린것 둘로 어른 한 몫을 친다 해도 네 식구에, 매인당 십원이다. 창문이의 바지저고리는 뭣으로 해주며 어린것들의 알궁둥이는 뭣으로 가려주어야 할 겐가. 그나 그뿐인가. 아내는 서울서 입던 찌꺽지를 꿰매 입는다 친대도 나만은 바지저고리 두어 벌은 가져야 삼동을 날 계다. 버선을 기워댈 도리가 없을 게니 양말짝이라도 사 신어야 이면이 옳잖은가…부지깽이도 살림값에 간다는 데 연모 하나 없이 어떻게 농가에서 부지를 하며 담배는 누가 사준다는가. 아직 식구가 다 죽지는 않았으니 친구고 아내 집으로 통신도 해야 할 건데 우표는 뭣으로사며 종잇장 봉투장은 뉘게서 갖다 쓰나…

이런 생각을 곰상곰상 하고 보니 자기의 농촌생활 설계가 얼마나 무정견한 것이었으며 얼마나 로맨틱한 것이었던가가 새삼스러이 돌아다보여지는 것이었다.

수택은 털퍽하니 문간에 앉아서 턱을 괴었다. 벌써 마고를 두 개째 태우고 저도 모르게 다시 불을 붙이다가 벌떡 일어난다. 테이블 서랍에서 종이와 연필을 꺼내다가 주먹구구로만 따지던 셈수를 일일이 적어가면서 다시 한번 계산을 한다. 그러나 석유, 성냥, 담배, 우표―이렇게 조목조목 적다 보니 주먹구구로 칠 때는 매인당 팔구원은 되든 것이 겨우 오 원 부리에서 조금 벗어난다.

‘장정 한 사람이 오원으로 반년을 살란다?’

수택은 그것이 그 어떤 사람의 명령이기나 한 것처럼 저도 모르게 이렇게 분개했다. 꼭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한테 속은 것만 같았다.

그는 다시 담배를 한 개 피워물고 꼬부리었다. 예산을 좀더 삭감해보잔 것이다. 담뱃값 일원 오십전이 일원으로 감해졌고. 석유 네 사발이 세 사발로, 통신비 삼십전이 십오전으로 이렇게 줄일 수 있는 데까지 졸아붙였다. 그러나 이렇게 삭감해도 일인당 한 달 생활비가 일원 오십전이 못 된다.

아내는 요새 며칠째 앓는 소리가 버쩍 심하다. 열병처럼 호된 몸살을 닷새나 앓고 일어난 지가 불과 대엿새밖에 안 된다. 대엿새에 한 번씩은 반드시 눕는다. 그렇게 친다면 십오전짜리 몸살 약첩을 쓴대도 볏섬은 들어갈 게다…

이런 생각을 하다 말고 수택은 계산하던 종잇장을 벅벅 찢고 일어났다.

벌써 십사오 년 전 일이었지마는 대수(代數)문제 하나를 두어 시간이나 풀다가 노트를 벅벅 찢고 일어나던 기억이 불현듯 머리에 떠오른다. 그때는 이튿날 학교에 가서 선생이 일부러 문제를 잘못 냈다는 것을 알았었거니와 이 풀 수 없는 문제는 누가 잘못 낸 것인가 했다. 사람도 붕어처럼 물을 먹고 살기 전에는 영원히 풀 수 없는 문제였다.

달은 지나치게 밝다. 아직 초저녁이건만 천 명 가까운 인간이 모여 사는 동리는 관 속처럼 괴괴하다. 동구 밖에 있는 물레방아 홈통에 떨어지는 물소리만이 칙칙칙 들려올 뿐 늦은 가을이란건만 다듬이 소리 한마디 안 들린다. 서글프기만 했다. 시적(詩的)이라고만 생각해온 농촌의 달밤이 이렇게 서글프기만 한 것인가 했다. 뽕나무 가지로 얽은 삽짝을 사뿐히 들어 자치고 돌아서려니까 뽑다 둔 채 만 텃밭 모솔기에서 누가 이쪽을바라보더니 말을 건넨다.

“어디 가려나.”

“누구요?”

“나야. 용훈일세.”

“아, 똥훈인가.”

“망할 사람, 어른을 몰라보고.”

똥훈이란 용훈이의 별명이었다.

그는 수택이와 나이도 비슷했고 어렸을 적에는 사람학교에도 같이 다니었다. 부잣집 자식들 대개가 그렇듯이 용훈이도 이탠가 삼 년을 두고 낙제를 했다. 똥훈이란 별명이 붙은 것도 배꼽까지나 수염이 내려온 한문 선생이 그때만 해도 옛날이어서 이태조가 누구냐고 묻는 말에,

“떡전꺼리 기름집 늙은이유!”

하고 호기있게 대답을 했다. 지금은 죽은 지도 오래지마는 기름집 영감의 이름이 이태주(李泰柱)였다. 용훈이는 마침 기름집에서 대여섯 집 어긋난 맞은편에 살았던 것이다.

“에이. 똥 같은 녀석! 오늘부턴 용훈이라지 말고 똥훈이라고 그래라!”

똥훈이란 이렇게 생긴 별명이었다.

수택은 원근 어려서 고향을 떠났고 몇 해에 한 번씩 그나마 하루 아니면 이틀, 길대야 사흘, 이렇게 과객처럼 다녀간 터라 같이 주먹코를 씻던 어렸을 적 동무들과 농담 한 번 할 기회도 없이 삼십고개를 넘기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부러 농도 걸고 우스운 소리도 하고 해서 어렸을 적의 동무를 여나못 찾았다. 똥훈이도 물론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똥훈이에게 대한 지식이란 천여 석 하던 재산이 재작년 저의 아버지가 돌아가면서 반으로 줄었고 지난 일년 동안에 또다시 약 반은 축을 냈다는 것, 그 대부분은 읍에 드나드는 자동차비와 요리값으로 소비되었다는 것.

서울 다니는 자동차의 여차장을 첩으로 얻었다는 것, 그저 그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뭐, 이러니저러니 할 것 없이 옛날 똥훈이가 나이 삼십이 됐다고만 생각하면 틀림없지.”

역시 사립하교 시대의 동무로 지금은 신작로 가에 이발소를 내고 있는 종대가 이렇게 말하던 생각이 나서 수택은 ‘이태주’를 연상하고 속으로 혼자 웃었다.

“어디 볼일이 있어 가나?”

용훈이가 이쪽으로 다가오면서 묻는다. 아무것도 하는 일은 없으면서도국방복은 입었다.

“아니, 왜?”

“자네 좀 볼려구 왔던 길인데.”

“날? 무슨 소관이 있나?”

“별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 오래간만이니 맥주나 한잔씩 나누자구…”

“어디 내 술을 먹던가?”

수택은 좀 야박할 만큼 잡아뗀다. 거의 반년 가까이 도화를 그리우고 산 터다. 맥주란 말만 들어도 반갑기는 했으나 어떤 편이냐만 소위 여덟 달반처럼 어리무던한 용훈이의 술을 얻어먹었다는 소문도 나쁘려니와 그 자신 지금 이야기도 통치 않을 용훈이를 상대로 술을 마실 기분이 되어 있지 못했다. 자기 혼자로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벼 넉 섬으로 다섯 식구가 반년 동안을 먹고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운 숙제를 풀지 않으면 안 되는 지금의 그였다. 이런 문제를 푸는 데는 아버지가 나으리라 한 것이다. 나이는 그보다 어려도 농촌에서 자란 스물넷 된 조카도 책상물림인 자기보다는 좀더 이런 문제를 푸는 묘득을 알고 있으리라―이렇게 생각이 되어 용훈이한테는 후일을 다시 약속하도 중말 자기 원집으로 내려왔다.

2[편집]

삽짝은 활짝 열려져 있었다. 사람이 얼른만 해도 지붕이 들썩이도록 짖어대던 흰둥이란 놈도 인저는 낯이 익었는지 ‘으응―’ 한마디 을러보고는 깍지광 옆 사랑 부엌으로 기어들어간다. 수택은 먼저 안을 뻐끔히 들여다보았다. 불은 희미하니 넉가래 같은 짚신짝이며 편리화 한 짝에 고무신 한 짝이 눈에 뛴다. 그는 다시 사랑으로 나왔으나 사랑에서도 역시 마실꾼이 와 있는 모양이다.

문구멍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려니 아랫말 정택수가 그의 아버지와 마주앉았다. 방바닥에는 무슨 종이쪽지가 두세 창 펼쳐진 채 있고 그 종이 위에 그가 어렸을 적부터 보아온 산(算)가지가 널려 있다. 정택수는 손바닥 반만한 장돌뱅이 주판을 들고서 무엇인지 심을 맞추는 모양이다. 이야기가 중단이 됐는지 끝이 났는지 잠잠하다. 수택은 정택수가 돈놀이〔高利貸金〕를 해서 형세가 훨씬 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이야기를 좀 엿들어볼까 하다가 궁금한 채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에는 그의 어머니와 형수와 고모, 읍으로 출가했다가 바로 몇 달 전수택이가 고향에 돌아온 지 달포는 되었을 때 이 동리로 이사를 해온 맏누님 외에도 두붓집 과댁. 바로 사랑에 와 있는 정택수의 맏며느리 ― 이렇게 방안이 그득하게 모여앉었다. 다 흉허물없는 터였다.

“어이쿠, 서울 양반 오시는군.”

언제나 너실대는 두붓집이 그 안반만한 엉덩판을 한쪽으로 옮기며 자리를 내준다. 정택수 며느리는 나이 사십이 가깝건만 아직 피둥피둥한 번화한 얼굴이 희미한 등잔불이라 그런지 더욱 훤해 보인다. 수택은 정택수 며느리가 열일곱 수택이가 열두 살때 혼인 말이 있던 여자다. 그는 시굴 내려와서 그런 말을 듣고야 알았지마는 그가 싫다고 내찼던 여자인지라 좀 겸연쩍어했으나 그쪽에서는 그런 것은 다 잊었다는 듯이 말도 걸고 또 늘 놀러도 왔다. 벌써 며느리까지 보았다는 의식이 그 여자로 하여금 그렇게 대범하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거의 전부가 사십 이상의 여인들인지라 앞집 뒷집의 흉보기보다 사는 이야기에 화제가 집중되어 있었다. 거기 모인 중에서는 그래도 정택수 며느리가 제일 나은 모양이었다. 그 무서운 가물에도 걷은 것이 이십여 석에 도지 들어온 것이 삼사십 석 되는 모양이었다.

“자네네가 뭔 걱정인가. 올 같은 흉년에도 육십 석이나 됐는데―제년에는 벼 백이 실하잖었나.”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한숨을 가만히 쉬어본다. 그가 고향을 떠나기 전만해도 연사가 좋은 해면. 칠팔십 석은 무난한 그들이었다. 논 이십사오 두락에 가물 타는 논은 단 한 마지기가 없었다. 밭만 해도 사흘갈이가 실했었다. 언제나 잡곡이 십여석 들어쌓이는 호농(豪農)이었다.

그렇던 집안에 벼 열댓 섬―그나마도 그 태반은 볏값이 나지는 대로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숨이 나올밖에 없는 일이다.

수택이가 그런 사실을 안 것도 기실 얼마 안 된 일이다. 그의 아버지는 모처럼 돌아온 자식에게서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도 자식을 붙들어두기 위해서 집안식구의 입을 틀어막았던 것이다. 그에게 땅을 줄때도,

“부모 자식 사이에도 심은 심대로 해야 하느니라. 더구나 이간 네 형이 장자니까 형은 나가 돌아다니드라도 역시 네 형 살림이거든. 장성한 조카가 있으니까 도지대로 해야 정오가 옳잖으냐.”

이렇게 마치 정말 집의 소유이기나 한 것처럼 푸근하게 말했던 것이다.

수택은 그래서 꼬박이 속았었다. 그러다가 며칠 전에 그것도 아내가 어디서 듣고 와서 귀띔을 해준 것이다. 타작을 하던 바로 닷새 전인가 엿새 전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심정을 잘 아는 터라. 물론 그런 내색은 하지도 않았다. 모르는 척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런 비밀을 지니고 있을 수는 없다 싶었다. 자기도 자기려니와 아버지도 그 무슨 타개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싶었다.

그가 다시 사랑에 나간 때 정택수는 가고 없었다. 손님이 간 터라 남포불을 등잔불 처럼 낮추고 책상다리를 한 양쪽 무릎에 두 팔꿈치를 세우고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 조각(彫刻)처럼 앉아 있다. 담뱃대를 물기는 했으나 빠는 법도 없고 대꼬바리에서 연기가 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라기보다 담뱃대를 물고 명상하는 늙은 농부의 궁상이었다.

“헴!”

수택은 일부러 문구멍에서 두어 발짝 멀찌감치서 인기척을 하고 방문을 열었다.

“접니다.”

“오, 너 내려왔느냐.”

아까의 궁상은 간데없이,

“아이들은 자든?”

“네.”

수택은 남포 심지를 훨씬 돋우고 오늘쯤은 무슨 이야기나 나옴직해서 윗목에 도사리고 앉았었다.

“네. 네 형 있다는 데 편지 좀 해봤느냐?”

“했더니 돌아왔습니다.”

“허, 미친 자식이로군.”

그의 형 근택은 십 년래의 방랑아였다. 한때 전 동양을 풍미하던 사상에 휩쓸려들더니 십년 전에 홀연 집을 떠나서 돌아오지 않았다. 교육도 별로 받은 것은 없으면서도 그는 자기에게 필요한 지식만은 충분히 얻고 있었다.

최근에는 만주 방면에 있는 것만은 분명했으나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는 의연 확실치 않았다. 상해가 중심이기는 한 모양이나 일년에 몇 번씩 오는 편지의 주소가 매번 변하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한 것은 상상할 수 있었다.

수택이는 어떻게든지 오늘만은 아버지의 숨김없는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땅이라는 것이 도시 대엿 마지기에 밭 두어 뙈기밖에 남지 못했다는 것은 이미 들어 안 터이지마는 그밖에 채무 관계는 어떻게 돼 있으며 금년과 과동준비와 보릿고개를 넘길 성산이 어떻게 서 있는가도 알고 싶었고 장차 살림을 어떻게 꾸려가려는가도 듣는대로야 별 뾰족한 수는 없다 해도알고만은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수택이는 그 독실하고 부지런하고, 면과 군의 농업 기수(農業技手)까지가 농작물에 대한 그의 의견을 참작한다는 이 훌륭한 농부가 삼십여 두락에 가까운 자기 재산을 탕진하기까지의 경로가 알고 싶었다. 그가 얼마나 부지런한 농부인가는 군에서 두 번 도에서 한 번 그를 표창했다는 것만으로도 족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는 단 한 번도 그 상장을 타러 읍에는 고사하고 가까운 면에까지 ‘출두’하기를 거절했지마는―이렇듯 부지런하고 이렇듯 노농(老農)이며 거기에다가 술 한 잔 입에 대는 법이 없고, 여자라고는 일평생 자기 아내밖에 모른 채 육십을 넘긴 한 자작농(自作農)이 불과 십 년 동안에 맨주먹만 쥐고 나앉았다는 사실은 벼 넉 섬을 가지고 다섯 식구가 반년을 살아야만 한다는 어려운 수학 문제와도 비슷했던 것이다. 그것은 조그만 일인 동시에 또한 큰일이었다.

“아버지, 이번 연사가 어떻게 된 셈입니까.”

하고 참다못해서 수택은 자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지금 집에 있는 것만으로 과동은 할 만합니까?”

“암, 그야 되구말구!”

이렇게 응당 대답했어야 할 그의 아버지는 웬일인지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다보고만 앉았다. 그것은 실로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리고 또 그 침묵은 예상보다도 긴것이었다. 침묵이 계속되는 동안 알톨같이 여문 귀뚜라미 소리만이 쨍쨍하다.

급기야 침묵은 깨지고야 말았다. 그것도 수택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에 의해서였다. 그는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야라미없을 만큼 늙은 아버지의 고생에 찌든 주름잡힌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눈자우는 폭하니 꺼졌다. 흉할 만큼 긴 겉눈썹이 신경질로 움직인다.

수택이가 집을 떠나던 열두 살 때까지 아버지 눈이 무서워서 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던 동자도 인저는 늙고 지친 토끼눈처럼 충혈이 되어 보인다. 몇 해 전 그가 신문사 일로 근읍에까지 왔다가 하룻밤을 자고 가던 때만 해도 그의 아버지는 늙기는 했을망정 단 두 주먹으로 육십 년간 생활과 싸워온 악지와 강단이 그 눈과 코와 입언저리에 차차분하니 들어박혀 있었다. 육십 년간에는 살인 광선과도 같은 폭염(暴炎)도 있었을 것이며 살점이 에이는 추위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 더위에도 추위에도 굴치 않고, 하루돌이로 태풍처럼 덮치는 토구질에도 잘 견디어 생명을 유지했던 것만으로도 장하다 하겠거늘, 그 김 영감이 지금 자기 아들 앞에서 한숨을 내쉬었고 주먹으로 눈물을 닦는 것이다.“수택아.”

늙은 아버지는 목메인 소리로 아들을 불러놓고서 다시 오랜 침묵에 잠긴다. 수택은 자기 아버지에게서 늙은이라는 인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은 김 영감 자신에게도 그랬을 것이었다.

“너 혹 누구한테서든지 우리 집안 이야기를 듣지 못했더냐?”

“들었습니다.”

“들었어?”

순간 영감은 깜짝 놀라는 눈치더니,

“질됐다. 애비 입으로 그런 이야길 한 것 보다는 잘 됐다. 어차피 한 번 알고야 말일 게고… 그래, 인전 그럼 넌 어떡할 작정이지?”

“어떡하다니요?”

수택은 무슨 의민지 몰랐다.

“장차 말이다. 그래도 여기서 살아볼 작정이냐?”

“아버지 생존해 계실 때까진 여기서 살아볼까 합니다.”

“나 살아 있을 때까지? 뭐 내가 살 날이 며칠 남았드냐?”

아직 십 년 하나는 염려없다고 수택은 거의 확신했다.

“수택아, 내가 이렇게 자식 앞에서라도 궁상을 떨기는 육십 평생에 오늘이 처음이다. 아니지, 나 혼자서도 아래본 적이 없다. 허지만 인저는 나로서도 할 수가 없구나. 아마 내 팔자는 인저 딴길을 접어든 모양이다.”

이렇게 김 영감은 장황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일찍이 들어보지도 못하던 어떤 가난한 농부의 일대기(一代記)였다.

김 영감은 일곱 살에 고아가 되었다. 고아는 무보의 유산을 많이 타고났어도 고생을 하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다. 그러나 그는 바지저고리 한 벌에 삼베 행전 한 켤레만을 타고난 고아였다. 그는 고아의 누구나가 밟는 갈을 밟아서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혹은 엿목판도 졌고, 또 어떤 때는 장돌림의 봇짐을 지고 따라다니기도 했다. 오늘은 이가의 집에서 밥을 먹었으면 내일은 또 박가의 집이다. 이렇게 그는 컸고 장성했다.

그러나 김 영감이 고생을 하도록 운명지어진 도 한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의 불행은 고아가 된 것이었고 둘째의 불행은 정직이었다. 입 우의 소년에게는 맘만 따로 먹으면 살 도리가 나설 여러 번의 좋은 기회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 남을 속일 줄을 몰랐다. 그것은 남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친 자기 아버지의 피를 받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이 강직한 고아는 엿목판을 베고 논두렁에서도 잤고 손을 호호 불며 다리 밑에서 긴 겨울 밤을 새우기도 했다. 찬 돌을 어머니의 팔인 양 베고하염없는 공상의 나라를 헤매기도 했고, 흐르기가 무섭게 쩍쩍 얼어붙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가며 동리에서 동리로, 혹은 내를 건너고 혹은 산모퉁이를 돌아서 살 곳을 찾아 헤매었다.

‘열다섯만 되어라.’

그의 희망은 오직 이것이었다. 열다섯만 되면 금시 발복을 하고 비단옷에 고량진미를 마음껏 먹는 그런 팔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할 수 있게 되겠기 때문이었다.

열다섯이 되었다. 그는 소원대로 반 새경을 받고 머슴으로 들어갔다.

뜨끈한 밥, 쩔쩔 끊는 방, 그는 이것으로 족했다. 10년간의 긴 머슴살이가 끝난 때 그의 수중에는 엽전 삼백 냥이 꾸려졌다. 송아지도 한 마리 생겼다. 그는 그제서야 아내도 맞았다. 자식도 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헤매는 고달픈 몸이었다. 장돌뱅이가 된 것이다.

세상이 한 번 뒤바뀌었다. 정부에서는 국유지를 일반 백성들에게 연부로 불하하는 새 법령을 냈다. 김 영감이 한 섬지기의 땅을 장만한 것도 그때였다.

“그 후 내가 얼마나 지독하게 일을 했으며 얼마나 규모있게 살림을 했는지는 너도 어려서 보았으니까 잘 알 바라. 나는 일년 가야 술 한 잔, 인절미 한 개 사먹은 일이 없다. 언젠가 내 일년간 용돈이 한 냥(십전)을 못 넘는다니까 너는 곧이듣기지 않는 모양이드라마는 백중날 아이들 떡푼어치 사주는 게 내 용돈이다. 이렇게 난 오늘날까지 한결같이 해왔다.”

김 영감은 이렇게 긴 이야기를 막금했다. 그것은 무슨 고대 소설과도 같았다. 고대 소설과 다른 것은 그보다 더 실감이 있다는 것뿐이다.

이 긴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머리를 들고 일어나던 의문이 또 생긴다. 그렇게 정직하고 그렇게 부지런하고 그렇게 알뜰한 자기 아버지는 어째서 좀더 부유하게 못 되고 땅마지기 지니었던 것까지 놓아버리게 되었을까?…

수택은 조심조심 물어보았던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는 농촌에 있어서의 금후의 생활을 설계할 자격도 없다 싶었다.

“어떻게 돼서 그랬느냐고? 그건 나두 모른다. 나뿐이 아니지. 누가 알겠니? 하느님이 아실 뿐이지.”

이렇게 딴전을 쓰고는.

“세상이 변한 탓이지, 옛날에야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그리고 예의범절만 있으면 살았느니라. 그런든 것이 이 근년에 와서는 짚신이 없어지고고무신이 생기고, 감발이 없어지고 지까다비가 나왔지. 물가(物價)는 고등하지, 학교는 보내야지, 학교 다니구 나니 농산 싫지. 듣구 보았으나 양복때기라두 걸쳐야지. 화차, 자동차가 생겼으니 어디 갈 땐 타야 배기지?

네 생각해봐라. 읍내까지 오십리로구나. 부지런히 서둘면 점심 한 끼만 사먹으면 다녀올 데를 지금은 소불하 일원 오십전은 가져야 하는구나. 갈 적 올 적 차비만 해두 일원 삼십전이지. 점심 한 끼만 사먹구 마느냐?

그래노니까 몸은 점점 약해질밖에… 더위도 더 타지 치위도 더 타지. 젊은 애들두 털내복을 입어야 견디지, 편할라구만 하니 먹는 게 나라니? 체하지.

소금 한줌만 먹음 될 게라두 영신환 사야지. 옛날 사람들이 지금처럼 약값이 많구야 살았겠느냐?”

“그 대신 소출이 그전보다 많이 나잖습니까?”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니었다. 소득과 지출의 비례를 좀더 정확하니 알고 싶었다.

“너 되로 주고 말루 받아야지 말루 주고 되루 받아서 소용 있겠냐?”

풀쑥 이런 말을 하고는,

“결국은 기계가 사람을 죽이느니라. 사람이 기계를 부리는 게 아니라 기계가 사람을 부려먹는 세상야. 그야 산미증산 산미증산 해서 소출이야 더 나지. 허지만 그 대신 대두박이니 암모니아니 거름값이 더 들지. 전엔 모두 찬밥 한술만 떠먹으면 손으로 해치우던 걸 인잔 기계 아니면 못하는 줄 알잖니? 우리네 농군이 일년내 피땀을 흘려서 대처〔都會〕 사람 좋은 일만 시키느니라. 모두 그리 가져가지. 농군한테 지까다비가 하상관야? 몸뚱이가 튼튼하면야 쇠를 먹어도 색이지. 병원이 뭔 소관이구? 움찔하면 똥이라더니 이건 움찍하면 돈이로구나…”

수택은 일생 처음으로 긴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지금까지 무조건하고 자기 아버지를 경멸해왔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김 영감은 훌륭한 세대에의 반역자였다. 허다한 신진 사상가(思想家)들의 기계 파괴론(機械破壞論)을 보다 더 알기 쉽게 설명을 하고 있지 않은가.

표현은 다를지언정 김 영감은 훌륭한 사상가였다. 인간은 지금 기계의 노에 가 되어 있다. 그러나 결국은 인간은 기계에게 멸망을 당하고 다시 흙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지금의 사람들은 흙의 고마움을 모른다. 그러나 한번 사람들이 다시 흙으로 돌아올 때 흙은 언제나 다름없는 관대(寬大)와 애정으로 인간을 맞아준다는 것이다. 이 흙의 관대를 인간은 모른다.

모르는 데 그치지만 않고 경멸하기까지 한다.

김 영감은 다시,“너 정택수란 어른 알잖니?”

하면서 그가 흙을 배반한 좋은 표본이라고 한다.

“너 오기 바루 전에두 다녀갔다마는 땅마지기 있는 걸 톡톡 팔아서 장살 했느니라. 다 털어올렸지. 그러다가 몇 푼 남은 것으루 돈놀이를 했느니라.

돈냥이나 좀 잡았지. 허지만 사람이 돈만 가지면 사는 줄 아냐? 의리도 있어야 하구 인정두 쓸 덴 써야하구 어수룩할 땐 또 어수룩해야지. 사람이 돈에 녹이 나면 못쓰느니라. 돈을 만지면 사람이 이악해져 어떻게 생각을 했는지 다시 돈을 땅에 묻더라. 지금 모두 치면 벼 백이 되지. 그러더니만 제년부터 또 돈이 탐이 나서 요샌 금광을 하지. 그래서 남의 산수 밑을 모두 파제키구 야단이구나. 법이야 어떻건 법만 가지구 사람이 산다든?

그래, 낮잠 자는 것을 깨워두 열 가지 악(惡)의 하나라는데 돈 벌자구 흙 속에 묻혀 곤히 잠든 남의 조상에다 남포질을 하구 야단이야! 우리 농군네겐 그런 법이 없거든!”

그러나 이 긴 이야기보다도 수택이를 가장 흥분시킨 사실은 수택이가 부치기로 한 여덟 마지기의 소작권이 내년부터는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부치는 소작답열한 마지기도 똑같은 운명에 놓여 있었다.

김 영감은 이 사실을 이야기해야 옳을지 어떨지를 퍽 주저한 모양이었다.

열한시나 되어서 인사를 하고 일어날 때까지도 무슨 말을 할듯 말듯 하더니만 그가 문고리를 잡은 때서야.

“잠깐만 더 좀 앉거라.”

하다가 일어난 길에 안에 들어가 뭐 먹을 것 좀 뜨뜻하게 해 내오라고 이르고는 돌아온 후에도 다시 얼마를 망설인다. 그러다가 비로소 그런 슬픈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럼 그게 뉘 땅입니까?”

그도 맥이 탁 풀리었다.

“뉘 땅은 뉘 땅. 원래야 우리 땅이었지. 그렇든 것이 야곰야곰 빚을 지게 되어 재작년에 닷 마지기만 남기고 통 지금 말하던 정택수한테로 넘어갔지. 재작년엔 연사두 좋았구 곡가두 그럴 듯해서 웬만하면 이자라두 끄구 어떻게 해보잔 것이… 너만 듣으라마는 네 조카놈이 어떻게 못된 놈들하구 섭쓸리더니 또 읍에 가서 돈냥이나 좋이 털어올리고 오잖았느냐.”

“상태가요?”

“그랬느니라.”

순간 수택은 지금까지 들어온 이야기는 간데없이 자기 집이 망한 원인이상태란 놈의 난봉으로 인한 것처럼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물론 그런 내색은 않았다. 그 자신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메밀목에 고춧가루를 얼근히 쳐서 먹었건만 땀 한 점 안 난다.

땅마지기를 믿고 내려온 것은 아니었지마는 믿었던 줄이 탁 끊긴 것처럼 맥이 풀린다. 누가 샀는지는 모르나 정택수를 찾아가서 소작권을 이어받을까 짧은 순간 그런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잇을 바에야 아버지가 솔선해서 그런 도리를 차라지 않았으랴 싶으면서도 그것을 다져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대답은 역시 그의 예기한 바와 같았다. 매주는 읍내 사는

‘기다하라’라는 철물상인데 중간에 든 사람이 작권을 얻기로 하고 구문까지 포기했다는 것이었다.

수택은 자정이 넘어서야 집으로 올라왔다. 그의 너무나 어두운 마음을 비웃기나 하는 듯이 달은 차도록 밝다. 물방아 물레 돌아가는 소리가 한결 더 바쁘다.

서리가 오려는지 밤도 찼다.

3[편집]

지금 수택의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는 생각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그것은 대신문의 사회부 기자요 일금 팔십원의 문화생할자인 그를 이 궁벽한 농촌에까지 끌고 내려온 것은 진실한 문학생활도 아니었으며 논마지기나 부치고 채마나 심어서 처자와 함께 안락한 가정생활을 영위(營爲)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내려가서 해보다가 안 되면 다시 기어올라오지―서울을 떠날 무렵에 생각하던 이런 소극적인 태도도 아니었다. 끝장이야 뭐이 되든 고향땅을 물고 뜯어보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어떤 굴욕이라도 달게 받으리라 했다.

처음 그가 이 결심을 하기까지에는 상당히 방황했다. 첫째는 비록 소작일망정 모한 폭 꽂을 땅 한 조각도 없다는 것이 가장 그를 방황시킨 무엇보다도 큰 원인이었고, 둘째는 설사 남의 소작을 한다고 친대도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 낸 대수 문제와도 같아서 영원히 풀 길이 없다는 것을 일년 농사의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이었고, 섯째의 원인은 역시 그들의 건강이었다. 어느편이냐먄 수택 자신은 시골 온 후로 훨씬 건강이 나아진 편이었다. 꾹꾹 누르면 두어 술밖에 안 되는 밥을 먹고도 그것을 못 삭여서 꼴깍꼴깍하던 그는 벌써 아니었다. 혈색도 벌써 창백한 기는 가시었고 책상한 개를 드다루는 데도 엄두를 못 내서 쩔쩔매던 그런 수택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고향에서 영주하기로 결심했다. 낯이 설기는 하나마 그대로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뉘 땅을 얻어부치더라도 대엿 마지기 얻을 상도 싶었고, 그것으로써 생계가 안 설 것은 빤한 일이나 그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농촌 소설을 쓰자면 그만 경험쯤은 얻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정 부족한 것은 허섭쓰레기 원고장을 쓴다든가 신문에 발표한 채로 있는 어떤 장편소설의 출판을 재쳐서 양미를 보태리라했다.

수택은 이렇게 결심을 하고 걸핏하면 어디로 뺑소니를 치려는 상태를 달래었다. 그러나 상태로 본다면 농촌생활은 도저히 수지가 안 맞아서 그렇잖아도 자리를 떠볼까하던 터에 마침 수택이가 돌아온 터라 그 결심을 버리지 못한다. 알아듣도록 이야기를 해도 그때뿐이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는 흘려버린다.

언제든지 한 번은 도회에 가서 살아봐야 할 아이라고 수택은 옆에서 눈치만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택으로 하여금 용기를 내게 한 것은 사내자식의 의기였다. 농촌을 잘 알았든 못 알았든 처자까지 데리고 솔가해온 이상 다시 엉금엉금 서울로 기어올라갈 수는 없다 했다. 여러 친구들이 회비까지 모아서 송별연까지 베풀어준 터가 아닌가. 그들 앞에 반년도 못 되어서 다시 무슨 낯으로 나설 수가 있을까?

“우리 가족의 뼈는 고향에다 묻자!”

그는 이렇게 센티한―그러나 비장한 결심까지 했다.

일단 이렇게 결심을 하고 나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수택은 이렇게 마음을 작정하는 길로 용훈이를 찾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아직 달은 뜨지 않았으나 동쪽 하늘이 벌겋게 상기된 것이 미구에 달이 뜰 모양이다.

중말 술회사 앞을 돌아서 일부러 샛길로 접어들었다. 용훈네 집은 어렸을 적에도 늘 놀러다닌 집이나 대문도 돌려내고 앞채는 상점 방으로 꾸미어져 있었다.

용훈이는 마침 저녁을 먹고 나가고 없었다. 그러나 용훈이를 찾기는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이발소 아니면 묵장사를 하는 복순네 집이나 면소 숙직실, 거기 없으면 중말 병아리 갈봇집이었다.

예측한 대로 그는 복순네 집 윗방에서 복순 아주머니와 팔뚝 맞기 화투를 치고 있었다.

“아. 이거 별일이네그려. 자네가 다 나 같은 사람을 찾아다니구.”용훈이는 고동색 세루 두루마기 자락을 걷어치우며,

“들어오게, 우리 죄수 볼기 치기보다는 날 게니 이 색시허구 팔뚝 맞기 화투나 한번 치세그려.”

“그래 볼까…”

어쩔까 했으나 사람이란 모가 나서는 못쓴다고 그가 내려오던 이튿날부터 그의 아버지가 주장질하던 생각이 나서 수택은 대엿 번이나 화투를 쳤다.

한 번은 이기고 내리 쳤다.

“수택이, 우리 마작 한케 하러 갈려나?”

하며 용훈이가 화투에 진이 떨어진 틈을 타서 수택은 그를 끌고 집으로 왔다. 똑똑한 편도 못 되는 용훈이 같은 사람을 데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떳떳치 못한 것 같은 느낌도 없지는 않았으나 이발소 종대 말대로 계집한테만 어리무던하지 친구들간에는 ‘능구리처럼 음흉’하다고 한다면 사양할 것도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지금의 수택에게는 그런 말을 할만한 사람은 역시 용훈을 내놓고는 없었다.

“자네 맥주는 내가 낼 게니 나 땅 한 자리 주어야겠네.”

이렇게 처음부터 툭 털어놓고 자기의 계획을 설명했다. 물론 어려운 이론은 캐지도 않았지마는 고향에 와서 어렸을 적 동무들과 앞집 뒷집을 정하고 살고 싶다는 그의 계획에는 다소 감동된 것도 같았다. 그러면서도 역시 대학까지 졸업하고 그 큰 신문사에 다니던 그가 이런 궁촌에 와서 농사를 짓고 살겠다는 그 심경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눈치였다. 한편 장한 생각 같기도 했고 못생긴 짓 같기도 했다.

‘뭘 잘못하구 쫓겨나니까 갑자기 어쩔 수도 없고 해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이려니…’

이렇게 생각했다,

“글쎄, 내가 거저 주는 것두 아니겠구 대엿 마지기 떼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만, 어디 지금 세상엔 논인들 맘대루 뗄 수가 있어야 말이지. 농지령 때문에 작권두 모두 계약을 하게 돼놔서…”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도 그럴듯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지금 소작하는 땅을 떼어달라는 건 아닐세. 나 살자고 남한테 못할 노릇을 시키고 싶진 않네. 내 말은 자네네가 삼십여 마지기나 광작을 한다니까 자네네는 대엿 마지기 더 지으나 덜 지으나 대찬 없을 것 같구, 해서 말하자면 자네 부치는 걸 좀 떼달란 말일세. 안 되겠는가.”

“난처한데…”용훈은 좋이 입맛이 쓴 표정이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자네가 맏는 타격이 크다면 난두 굳이 그렇게 해서까지…”

“아냐, 뭐 타격이랄 건 없지만… 글쎄. 어디 보세. 오늘 낼 작정해야만 할 것두 아니겠구…”

그만큼 하고 수택은 용훈을 데리고 먼저 갔던 복순네 집에 가서 제육을 구워놓고 약주를 몇 잔씩 나누었다. 헤어질 무렵에,

“자네 술만 먹어서 되겠니, 내 술도 한잔 해야지.”

하며 끄는 바람에 수택은 고향에 온 지 처음으로 술집에를 끌려갔다.

그들이 간 집은 역시 병아리집이었다. 얼굴이 병아리처럼 생겨서가 아니라 아랫말에서 역시 술장사를 하는 이복동생의 얼굴이 달걀처럼 생기었다고 해서 먼저 난 형이 병아리가 된 것이다. 병아리는 용훈이와도 범연한 사이가 아닌 듯싶어 한 되들이 금천대(金千代)병을 안고 욱자베기를 하면서도 연상 눈짓들을 하고 회영수가 어우러졌다.

“송 주사. 요샌 아주 막 뽐내십디다그려”

“뭘.”

“술 한잔을 자셔두 고향 사람들 술을 팔아주는 게 아니구 꼭 읍내루만 행찰 하시구…”

말은 술 이야기를 하나 술강짜치고 심각한 표정이다. 병아리는 분명히 술만의 강샘을 일으키는 것은 아닌 상싶었다. 그래도 용훈이가 통 받아주지를 않으니까 병아리는 찍어누르는 소리로 “석탄 백탄 타는데…”를 제 성에 못이겨서 부르고 있었다.

병아리집을 일선 때도 과음(過飮)이었는데, 그들은 다시 한 짐을 들렀다.

물론 병아리의 동생 달걀집이었다. 달걀집은 부풀었다. 병아리보다 훨씬 젊기도 했거니와 얼굴도 시골 주모로는 깨인 편이었다. 소학교는 다녔는지

‘도죠’니. ‘고엔료나꾸’니 하는 말도 툭툭 던졌고 어서 귀동냥을 한 것인지 ‘폴리이스’니. 가는 손 보고는 ‘굿나잇’하고 주척도 댄다. 술은 맥주를 청했으나, 맥주는 두 병밖에 없어서 여기서도 제육을 굽고 너비를 몇 점 구워만 놓고는 강술로 서너 홉씩을 말리었다. 일어선 때는 용훈이도 수택이도 까부러지게 취했었다.

어디선지 용훈이와 헤어진 것은 자정이 가까웠었다. 면소 앞 신작로를 건너서 역시 술집 뒤를 돌아가려니까 술꾼들의 싸우는 소리가 요란하다.

뜻밖에 그 맞욕질을 하는 싸움 소리 속에서 조카인 상태의 목소리를 발견하고는 물론 취중이었지마는,‘이 녀석이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술집에를 다녀?’

하는 쾌씸한 생각이 불컥 나서 그대로 뛰어들어갔다. 상태와 면서기 김용승이가 싸우고 있었다. 꼬단은 알 수 없었다. 또 캘 필요도 없었다.

그는 싸움의 시비를 가리러 들어갔던 터가 아니었으므로 군중을 헤치고 들이닿는 길로 상태의 뺨을 정신이 나게 한번 붙이었다.

“이리 나와!”

상태는 고분고분히 끌리어 나왔다.

상태한테서도 술기운이 마주 확 풍긴다. 그 술내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불끈했었다. 무슨 감정의 관련이었던지는 몰랐어도 상태 입에서 술내가 확 풍긴 그 순간 그는 집안을 들어먹은 것은 상태라는 착각이 일었던 것이다.

그것은 무서운 착각이었다. 논 이십 두락을 털어먹은 것은 김 영감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상태도 아니었다. 그러나 무서운 착각인 반면에 그것은 또 무서운 증오였다. 송곳 한 개 꽂을 땅이라도 물고 떨어야 할 처지에 요릿집에다 전재산을 털어올려… ―그는 거의 발작적으로 상태를 무수히 난타했다.

상태는 끽소리 없이 맞았다. 봇둑에 선 포풀러를 의지하고 한 번 말대꾸도 없이 맞으며 울고 섰다. 수택이도 얼만지 조카를 때리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울고 있었다.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도 없는 설움이 걷잡을 수도 없이 내장 저 아래에서 부걱부걱 기어올라온다. 나중에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었으나 수택은 얼마 후에는 역시 상태가 기대인 포플러나무에 얼굴을 틀어박고 흑흑 누끼어 울었었다.

상태가 먼저 울음을 그치었다. 그러나 수택이의 울음은 좀처럼 그쳐지지 않았다. 상태는 맞은 설움이었으나 수택의 울음은 때린 설움― 그나마도 일시의 착각으로 감정에 격한 경솔을 뉘우치는 울음이었다. 형도 자기도 없는 동안 어린 나이로 그 크나 큰 림을 도맡아본 상태한테 무슨 죄가 있었으랴?…

“작은 아버지, 그만 돌아가시지요. 제가 요릿집에 다니느라고 땅을 팔아먹었다는 건 작은 아버지 오해십니다. 몇 번 가긴 갔었지만 그건 마름이라도 하나 얻어 살림을 벌여볼까 했던 것인데…”

하다 말고 그대로 다시 울어버린다.

“안다, 안다. 그만둬라.”

이렇게 말하며 수택은 조카의 손을 잡았다.

여자는 섧지 않은 때도 곧잘 우는 수가 있다. 그러나 남자는 절통할 때라야만 운다― 두 사나이가 맞잡고 우는 정경―그것은 정말 옆에서보기에도 딱한 정경이었다.

4[편집]

농한기(農閑期)라는 삼동(三冬)은 그러나 구택에게 있어서는 조금도 한가로운 기간이 아니었다. 퇴직금 끄트러기가 몇 푼 남기는 했으나 실상 지나보니 그의 예산과는 달랐다. 이제 열댓 된 창문이의 손으로만은 부엌 나무도 댈 길이 없었다. 더욱이 보림령(保林令)은 낙엽 긁는 것까지도 제한이 되어 있어서 그나마도 긁게 되지 않아 ‘나무도 못 긁어댈 바에야―’하고 창문이도 내보내고 말았다.

본의는 아니나마 그는 몇 개의 잡문도 써야 했고 소설도 몇 편 마련해야 할 계제다. 아직 반년도 못 되는 경험으로서는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노농」{老農}이란 장편소설의 제1부만이라도 마물러야 얼마간의 모개돈이 들어올 것 같다. 다행히 신문사에서도 왼편만 되면 검열에 지장이 없는 한 고료를 선불해줄 수도 있다는 회답도 받은 터라 공연히 마음만 바빴다.

수택은 매일 농군들 봉놋방에 가서 살았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도 그랬거니와 인저부터는 생활 방편을 위해서라도 그들과 같이 살고 그들과 같이 호흡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맷방석을 들여 펴고 밤나무 장작윷도 놀앗고 일찍이 중학에 들어가서 ABC를 배우던 정열과 또 그만 못지않는 노력으로 투전 글자를 배우기도 했다. 그들을 위해서 서울 이야기로 밤도 새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어떤 때는 막걸리 내기 화투도 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대문(南大門)에 써붙인 큰 대(大)자가 아래로 쳐졌더냐 위로 올라붙었더냐―이런 토론으로 욕지거리를 해가며 싸우는 머슴들한테 끌리어가서 남대문이라고 씌어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주기도 했다.

“거들 봐라. 남대문이라고 안 쓰였드라구 그렇게 일러줘두 빡빡 우겨대드니!”

건달 덕문이다 기염을 토한다.

“이 자식아, 그래 네가 보면 안단 말야!”

하고 득만이도 지지 않고 대든다. 큰 대자가 내려붙었다고 고집하던 친구였다.

“네깐놈이나 내나 남대문이라고 썼는지 북대문이라고 썼는지 보면 알택이 뭐야! 사칠팔(四七八)가보라구 쓰진 않았든, 왜?”

“저놈이 글쎄, 양반 행세 한답시구 우리 아버지 포두청이라고 한놈이라니께!”

방안이 떠들썩하게 웃음이 터졌다.

매양 방안에는 열 명 이상의 농군들이 모였다. 어떤 때는 이십 명 가까운 사람이 들구끓은 때도 있었다. 마치 상자 속에 과자를 주워담은 것처럼 포갬포갬 앉는 수도 많았다. 한쪽에서는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면 한쪽에서는 「조웅전」(趙雄傳)「추월색」(秋月色)같은 이야기책을 보고 이 모퉁이에서는 계집 이야기를 하면 저 구석에는 먹는 이야기다. 그러나 매양 화제가 집중되는 데는 역시 음식타령이었다. 모두가 장정들이요, 모두가 일년에 한두 번밖에 허리끈을 끌러놔 보지 못하는 그런 축들이다. 놀음이야기, 나무하다 산감한테 경친 이야기, 읍내 이야기, 이렇게 어수선하던 화제도 어떤 구석 누구 입에서든지 음식 이야기 한번 나면 그대로 좌중의 귀가 다 그쪽으로 기울어진다.

“난 이러니저러니 해두 검정 밤콩을 드문드문 논 마구설기가 좋더라.”

칠성이가 무슨 결론이나 짓듯이 이렇게 말하자 아까부터 칠성이와 토작이던 돌이가 왼새끼를 꼰다.

“저 자식이, 그래, 저게 입이야. 떡엔 콩을 노면 겉물이 돌아서 못써!

백설가라야지.”

“그래, 저 자식이 왜 아까부터 남의 말이면 쌍지팽이를 짚구 나서는 게야! 그래, 이자식야, 똥구멍으로 막지 않는 바에야 씹는 맛이 좀 있어야지.”

“허, 방구가 잦으면 똥이 나오는 법이야.”

하고 아랫목에서 주의를 시켰음에도 칠성이와 돌이는 기어이 쌈이 되고야 말았다.

“에이끼. 동물에 튀해 죽일 자식, 저걸 낳구두 그래 횃대 밑에서 멱국을 먹었을 테지!”

칠성이가 결을 버쩍 세우는데,

“그만두세. 인제, 그렇잖어두 우리 어머닌 날 낳구 조당죽이나마 옆집에 가서 얻어 다 먹었다네!”

하고 비장한 소리를 해서 웃는 사람, 언짢아하는 사람, 별 표정이 다 나타났다.

수택이가 여럿한테 인사를 하고 막 문을 닫고 나오려니깐 희만 노인이,

“낼 순경 차례니 사람 얻어 보내유.”

하고 소리를 친다.

“네― 그럽죠.”그도 길게 대답을 하고 봇독을 타고 올라갔다.

밤 사이에 된내기가 하얗게 내렸다. 뜰팡에 뗘놓았던 자배기 몰에 살엄음이 잡히었다. 간밤은 장편의 첫 장면을 찾지 못해서 거의 밤을 밝히듯시피 했건만 아침은 여전히 일찍 깨었다. 머리가 별로이 무겁지도 않다. 울안 우물에 가서 세수를 하고 헌 바구니를 들고 동저고릿바람으로 천변에 나갔다. 아삭아삭 서리 기둥을 밟는 발의 감촉이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좋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하는 대로 가며오며 소똥 개똥 같은 것을 들고 간 바구니에 담아들고 들어왔다.

“아빠, 또 개똥 주웠수.”

필년이라 년의 말소리도 인저는 제법이다.

“그래, 너두 낼부터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빠하구 개똥 주러가 , 가지?”

“응, 엄마, 나두 낼부터 아빠하구 개똥 주러 가우!”

“오냐.”

아내가 어린것을 업고 부엌에서 나오면서 대답을 한다.

“좀 쓰셨수?”

“웬걸.”

아침을 치우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보았다. 오랜 동안 머리를 쓰지 않아서 그대로 굳어지기나 한 것처럼, 통 풀리지 않는다. 수택은 다시 천변을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역시 두서가 풀리지 않는다.

“수택이 있나?”

용훈이가 읍내를 또 가는지 국방복도 벗어던지고 자르르 흐르는 능견 두루막에 중절모자를 바드름하니 쓰고 들어왔다.

“또 어디 가는가?”

“아, 읍에 좀.”

“들어오게나그려”

“아냐, 첫자루 가얄 겐데. 거 말야. 요전에 말하던 거 거 그렇게 하기루 했네. 자넨 서투른 솜씨구 해서 물길 좀 놈으루 엿 마지길 뗐네.”

“고마워.”

한 가지만이라도 낙착이 되고 보니 갑자기 딴힘이 생긴다. 수택은 그 길로 내려가서 아버지한테 용훈이가 말하던 논이 어떤가고 물어보았다.

“모이 앞의 엿 마지기? 좋―지, 좋은 논이구말구. 거 그 사람 큰심 썼다. 그래, 도진 얼마라든?”“그건 아직 못 물어봤습니다.”

“저런 사람 봐. 농군이 먼저 그걸 알아봐야지. 암만 논이 좋면 뭐하나.

도지가 호되면 천수답만두 못한걸.”

“설마 턱없이야 매기겠어요.”

김 영감은 새끼 꼬던 손을 쉬고 쌈지에서 가루가 된 희연을 손바닥애 쏟아놓더니,

“담배라구 예전처럼 잎새가 있어야지. 이건 하루만 넣구 다니면 바짝 말라서 가루가 돼버리니―”

하면서 침을 퉤퉤 뱉어 곰방대에 담아 문다. 담배를 피며 새끼를 꼬며 또 이야기까지 하자니까 침을 줄줄 흘러 떨어진다.

“거, 뭐하실 겁니까?”

“집을 이어야잖니, 금년에 마초(馬草)를 하기 때문에 지붕을 잇재도 허갈 내야 한대서 면장한테 신청을 했는데 모르겠다. 온 , 이집이야 금년쯤 걸러가지고는 별일 없겠다면서두 너 집은 샐 게다. 어리라두 좀 해둬야지.”

수택이도 짚 몇 오리를 맞동여서 발 새에다 끼고 새끼를 꼬기 시작했다.

다른 일은 대강 흉내는 내나 새끼를 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마치 매맞은 구렁이 몸처럼 고르지가 못하면서도 손바닥은 얼얼하다. 그래도 한 이십 발은 실하게 꼬고서야 일어났다.

“왜, 그만 갈테냐?”

“네, 올라가서 뭐 좀 써봐야겠습니다.”

수택은 일어나서 안에도 들러보았다. 어머니도 형수도 없다. 뉘 집 아이들인지 조무래기만 서넛이 집을 보고 있다.

집에 올라오니 어머니는 수택의 집에 와 있었다. 형수는 벌써 사흘째 담배 조리(調理)를 다닌다는 것이다. 이 고장은 전 조선에서 제일가는 담배 소산지다. 백여 호 되는 동리에 담배 찌는 곳간이 다섯 채나 있다. 누렇게 된 담배를 새끼에 꿰어서 난방장치가 되어 있는 곳간에다 매어달고 불을 땐다. 그래서 누렇게 마른 담뱃잎을 상엽, 중엽, 막치기―이렇게 세 종류로 나누어서 짝 편다. 편 것을 다시 한 춤 씩 되게 담뱃잎으로 대궁을 싸서 흡사 총채처럼 만든다. 이것을 조리한다고 하는 것이다.

수택이도 어렸을 적에는 매년 여름이면 담배를 엮었다. 다섯 발 가량 되는 새기에 한 잎은 엎고 한 잎은 젖혀서 어금막기로 엮어간다. 열 발에 삼전인가 삼전 오린가 되었으나, 담배를 엮는 기간이 마침 여름방학인 때라 웬만한 집 아이들은 다 머리를 싸들고 덤빈다.“하루 사십전씩인데 아이들은 내 봐줄 게니 아이 어미도 좀 해보잖으련?”

어머니는 아내와 그의 눈치를 번갈아 보면서,

“그걸루 큰 보탬이 될 건 아니지만두 잔용은 뜯어 쓰느니라.”

“가볼까”

아내는 그의 눈치를 본다. “그까짓 것”하고 내찰 줄 알았던 터라, 그는 적지 않아 의아했다.

“정말 해볼려우.”

“해볼 테유―”

아내는 이 지방 사투리로 ‘유우’를 길게 잡아 늘인다.

“해볼 템 해보구려. 동무들두 사괼 겸.”

“그래라. 그래서 어떡허든지 끈을 잡아가지구 살아야지. 너 아버진 아주 너희들 때문에 잠두 통 못 주무신다.”

“왜요?”

“그렇잖겠니? 모처럼 자식이 이 부모를 바라구 왔는데 땅뙈기나마 다 팔아먹구 집 한 칸 못 장만해주니 어째 너 아버진들 맘이 졸 리가 있겠니.

요샌 아주 죽을 지경이다. 전에야 참 하늘이 무너진대도 눈 한 번 깜짝 않던 양반이 어떻게 맘이 여려졌는지 그저 한숨만 휴휴 내쉬는구나.”

“그렇게 걱정을 끼출 줄 알았더면 오지 않을 건데 괜히 왔나봐요.

어머님, 그래두 필년 애비는 우리가 가기만 하면 아버지 어머닌 여간 좋아하시지 않는다구!”

“그야 좋지, 좋지 않을 거야 뭐 있니, 단지 살도록 마련을 못해주니까 그렇지.”

“뭘요. 인젠 아버님께 얻어먹을랴고 했나요. 그럭저럭 살게 되겠지요.”

“암만해두 너 아버지두 몇 해 더 못 살려나부다. 가만히 보니 망령이 나는가봐.”

“벌써 뭘.”

하고 수택이가 웃으니까,

“벌써가 뭐냐. 네 좀 봐라. 요샌 이슥하도록 좀이 다 먹은 문서 보따리만 끌러놓구 앉으셨구나.”

“문서 보따리가 무슨?”

“땅문서지 뭐냐. 죽은 자식 나이 헤어보기지. 그건 왜 궁산맞게 들여다보구 앉았담. 이동두 다 해간 빈 문서를 신주 위하듯 하시는구나, 글쎄.” 어머니의 이런 이야기는 수택에게 이상한 충동을 주었다. 물론 수택이가 나기 전 이야기라 얼굴도 본 일은 없었으나, 번화하게 생겼던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그 형이 사고무친한 김 영감의 첫아들이었다. 그러나 불행히 그는 네 살 때 죽고 말았다. 그때도 그는,

“인명은 재천이라는데, 죽은 걸 생각하면 살아나나.”

단 한마디 했을 뿐, 일평생을 두고 다시는 죽은 자식의 말은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는 매사에 그랬다. 한 번 단념하면 단념한 순간이 완전한 과거가 되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가 이미 남의 소유가 된 휴지 조각을 밤마다 들여다보고 앉았다는 것이다…

“여기다!”

하고 수택은 그 길로 책상 앞에 다시 앉았다.

한 자작농(自作農)이던 늙은 농부가 밤을 낮삼아 일을 했건만 한 마지기 두 마지기 남의 손으로 넘어가고 그의 수중에 남은 것은 이미 완전한 휴지가 된 서류뿐이다. 늙은 농부는 지금 희미한 등잔불에 그 ‘휴지’를 비춰보고 있다. 커다란 도장이 꽉꽉 찍힌 그 종이에는 분명히 자기 이름이 씌어져 있다. 그는 마른 바가지 속처럼 된 자기손등을 내려다본다. 그 손에는 무수한 흉터가 잇고 핏기 없는 굵다란 힘줄만이 기운없이 서리웠다.

손은 거칠 대로 거칠어 종이를 만질 때마다 버석버석 소리가 난다. 그는 언제까지나 자기 이름 석자를 응시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 한숨이 후유 나오고 고생에 찌든 늙은 얼굴에 눈물이 천천히 흐른다.

“나의 육십 평생은 이 종잇장을 위해서 살아온 것이다. 이 종잇장을 위해서는 단잠도 못 잤고 허리끈도 졸라매었고 피와 땀도 흘렸다. 남이 쌀밥을 먹을 때는 조밥을 먹었고, 남이 조밥을 먹을 때는 나는 조당죽을 멀거니 끓여 먹었다. 이렇듯 육십 년 동안 정성을 바쳐온 이 종잇장이 아무짝에두 쓸 수 없는 휴지가 돼버렸다?… 그럴 수도 있는 겔까?…”

이렇게 한탄할 때 눈물 한 방울이 땅문서에 뚝뚝 떨어진다.

―이런 데서 장편 「노농」(老農)의 첫장면을 시작하리라 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아버지를 통해서 그의 어렸을 때와 젊었을 때의 사회 기구며 풍습, 인정세태(人情世態), 물가(物價), 이런 것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오동나무로 싼 길이 두 자에 폭 한 자, 높이가 반 자 가량 되는 궤짝 속을 뒤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장방형의 궤짝에서는 수택이가 일찍이 보지 못하던 여러 가지가튀어나왔다. 아버지가 장사를 그만두던 해 마지막 쓰던 치부책도 한 권 나왔다. 그것은 장사를 마감하면서 외상값을 받던 것이다. 그가 놀란 것은 기역(ㄱ)자를 씌우지 않은 것이 거의 태반은 되었다.

“이런 건 어떻게 그대로 있습니까?”

수택은 책장을 뒤적이며 이렇게 물었다.

“그건 다 못 받은 게다. 예나 지금이나 하던 장사를 떨어엎으면 어디 주더냐. 송살(訟事)하면 받기야 받지. 허지만 그때만 해두 난 내 일평생 밥은 끓여 먹을 게 되느니라 싶었으니까 그만둔 게지.”

“그땐 여유가 좀 있으셨든가요?”

“어디 그런 건 아니지. 허지만 그때만 해두 논이 이십여 마지기만 있으면 살 때다. 재물이란 탐을 낼 필요가 없는 게거든. 난 지금두 그렇게 생각한다. 재물이란 덜퍽 있어두 되려 액이니라. 그저 밥이나 굶잖으면 그게 상팔자지. 상태(조카)보군 늘 그렇게 일러 왔느니라마는 너두 하루 세끼 밥거리 이왼 아예 바라지를 말아! 먹구 입구 남는 게 있으면 물욕이 자꾸 생기는 법이니라. 먹구 입구 하는 건 한정이 있지만 여유에는 한정이 없거든. 돈이 많아서 못 쓰는 법은 없지만 먹구 입구 하는 덴 조금씩 차인 있으리라두 한정이 있는 법이다. 남은 먹두 입구 못하는데 어떻게 낭비하기 위해서 욕심 낼까부냐. 그렇잖으냐, 사람 사는 이차란 게?”

아버지의 이런 이야기에서 수택은 십오룩 년 전 자기의 중학시대를 회상하는 것이었다.

그의 고향은 지리적으로나 산물(産物)로나 도시와는 인연이 먼 농촌이었다. 읍에까지에는 문전에서 자동차가 다니기는 하나 오십리나 되었고 서울을 가재도 자동차길 밖에 없었다. 노정은 삼백리 정도였으나 차임은 십원 각수나 되어 웬만한 사람은 서울 가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기계문명이 한창 기세를 올리던 현대에 살면서도 백 호나 되는 동민 중에는 기차나 전처를 본 사람은 불과 몇이 못 되었다. 경성 유학생이래야 그와 거기서 한 십리 떨어진 화석리(化石里)라는 촌에서 한 사람, 전 면을 통해서 삼사인밖에 없었다. 기차를 타자면 조치원까지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으나 조치원까지는 이백삼사십리나 되는 터라 부득이 경성을 갈 사람도 직로인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서울로 가본 사람도 기차를 타보지 못한 채 죽은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읍이나 서울 갔다 오는 사람들이 조금 이상한 물건 한 개만 사가지고 와도 그것이 그대로 굉장한 뉴스가 되어 온 동리에 퍼졌다. 지금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나 어떻게 굴렀던지 기름집 손자가 대판으로 건너가서 메리야쓰 공장에 다니다가 어떤해 여름 자기 집에 돌아왔었다. 그는 팔뚝시게를 찼었고 안경을 쓰고 구두를 신었었다. 이것이 그대로 동리 청년들의 좋은 선망이 되었고, 동리 처녀들의 동경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그가 가진 ‘희한한 불’회중전등에 아깝게도 희생이 된 처녀가 둘이나 있었고 뒤이어 예쁘기로 이름이 있던 달룡이 댁이 이 희한한 불을 가진 청년과 자취를 감추었다.

―이렇듯 문화와는 인연이 먼 샌터였으나, 그땐 전 조선을 휩쓸던 사상은 회중전등 보다도 먼저 이 동리에 들어와 있었다. 동경 가서 유학을 하던 면장의 사위가 이 동리로 들어온 것이었다. ‘신화청년회’(新和靑年會)가 생긴 것도 그때였고 노동야학, 부인야학이 생긴 것도 그 즈음이었다.

수택은 그때 중학 이년이었다. 그는 여름방학에 돌아왔다가 자기 또래의 소년들이 ‘평등’이니, ‘계급’이니, ‘무산자’니 하는 말을 쓰는 것을 보고서 어린 마음에도 자기가 뒤진 것을 깨달았었다. 그가 박 선생의 총애를 받는 소년이 된 것은 그 다음해 역시 여름방학부터다. 박 선생은 근동 청년들의 선망의 적(的)이었다. 그러나 겨우 언문 글밖에 못하고 두더지처럼 오십 평생을 두고 흙만 파온 그의 아버지는 이 박 선생을 더 업수이 여겼다. 말 잘하는 사람일수록에 행함이 적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고. 처음 사귄 사람을 길래 사귀지 못하는 것이 그의 둘째 결점이었고, 정말 없는 사람의 ‘편’이 되자면 먼저 저 자신이 그런 처지에 놓여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맘과 몸뚱이가 한뭉치가 되어야지, 맘이 암만 그렇다 해도 제 몸뚱이가 말을 안 들으면 소용있나. 너들 두구 보렴. 그 사람은 변호사나 하라면 잘할지 몰라두 저러다가 마느니라…”

이 무자한 농부의 예언이 오 년도 못 가서 들어맞았던 것이다. 박 선생은 그가 일찍이 옳다 하고, 아름답다 하고, 의(義)라고 말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의 말로가 대개 그렇듯이 그는 그가 일찍이 욕하던 직업을 가졌었고 한번 그런 데로 길을 트기가 무섭게 머리가 좋았더니만큼 눈부신 발전을 했다. 그러나 김 영감의 말따라 그는 처음 사귄 친구를 길래 사귀지 못하는 사람이듯이 한 번 가졌던 생각도 늘 변하는 사람이었다. 말만은 많이 하고 또 잘하나 일평생을 두고 참 말을 몇 마디도 못하고 죽는다는 변호사에다 그를 비교한 자기 아버지의 예언이 근 이십년 후인 오늘날 와서 그와 비슷한 직업인 브로커로서 나타난 것이었다.

점심때는 되어서 수택은 좀이 먹은 그 오동나무 궤짝째 가지고 일어섰다.김 영감은 무슨 큰 보물이나 되는 듯싶게 잘 간수하라고 당부당부하는 것이었다.

“거깄는 건 단 한 장이라두 없애지 말아라. 땅은 다 남의 것이 됐다만 그것조차 없어진다면…”

하다가 갑자기 말이 뚝 끊어진다.

그가 문을 열다 말고 돌아다봤을 대 김 영감은 그 궤짝이 자기의 사랑하던 땅이요 그 땅이 지금 자기 손으로부터 영원히 남의 손으로 넘어가기나 하는 듯이 언짢아하는 것이었다.

수택도 아주 마음이 좋지 않아서 집으로 올라왔다.

맥이 하나 없이 논둑 지름길을 건너서 삽짝 앞에 이르니까 제 동생을 데리고 흙장난을 하던 필년이란 년이 며칠 못 봤던 듯이 달려들어 안기는 것도 아는 체 만 체하고 안마당으로 들어서려니까.

“엄마, 아빠 오셨수―인저 닭국 먹을 테야!”

하고 필년이가 쫓아들어온다.

“오오냐. 상현이하구 와서 손 씻구.”

“닭이 웬 닭이오!”

그의 말소리가 퉁명스러웠던 것은 아버지의 상심하는 양을 본 때문만도 아니다. 씨한다고 닭 한 마리 남겨둔 것을 잡았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뭐예요? 무슨 광장한 보물 궤짝 같구려.”

하다가 남편의 눈치가 좋지 않은 것을 보더니 냉큼 묻던 말에 대답을 한다.

“옆집에서 가져왔어요. 간밤에 닭 풍기는 소리가 나구 법석을 하더니 살쾡이란 놈이 암탉 두 마리를 모조리 물어 박질렀다는군요.”

그래도 남편의 얼굴이 퍼지지 않으니까. 그는 마치 무슨 죄나 진 듯이 어리둥절하고 섰다가, 조심조심 또 말을 붙인다.

“벌써 메칠 전부터 닭이장을 뱅뱅 돌더래요. 그래 새루 문을 해 달구 야단을 했더니 지붕을 뚫구 들어갔다는군요.”

“애들하구 당신이나 먹우.”

수택은 제 방으로 들어가는 길로 번듯이 자빠졌다. 아내가 근심이 되어 바로 뒤따라 들어와서 머리맡에 앉는 것을 알고도 그는 언제까지나 눈을 딱 감고 움직이지 않았다.

5[편집]

구럭 그믐께까지에는 수택의 장편도 거의 절반까지나 진척이 되어있었다. 낮에는 산감의 눈을 피해서 가까운 사나에 가서 낙엽을 긁어오기도 하고 봉놋방에서 농군들과 잡담을 하기도 하며 보내는 날도 많았다.

처음에는 마치 자기네를 감시하러 오는 사람처럼 서먹해하던 농군들도 인저는 무관한 동무처럼 만나면,

“밥 잡섰이유.”

하고 인사를 했고 원고를 쓰느리고 종일 나가지를 않으면 지나는 길에 찾아와보기도 한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대명사도 인저는 없어지고 딸년의 이름을 붙여서 ‘필년아버지’가 되었다.

“모두 보령산으루 산나무들을 간다는데 한번 안 가보실래유?”

이렇게 일부러 찾아와서 귀띔을 해주기도 한다.

“보령산이라니, 저 까맣게 쳐다보이는 산?”

“야―”

보기만 해도 염두가 안 났다. 그러나 가보기로 하고, 그날 밤은 여느때보다 좀 일찍잤다. 여섯시에 일어난 때는 아내는 어느 틈에 일어났는지 벌써 밥을 잦혀놓고 있었다. 김칫국에 고춧가루를 얼근히 풀어서 푹푹 퍼먹고 있는 옆에서 아내는,

“너무 욕심 내지 마시구 조금만 해 지셔요. 모두들 그러는데 여간 험한 산이 아니래요.”

하고 그만뒀으면 하는 눈치다.

“뭘, 아이들만큼야 못해 질라구.”

이렇게 말하면서도 물론 자신은 없었다.

요기를 하고 양말을 버쩍 추키어 감발 대신을 하고 솔버선에

‘지까다비’를 신고는 곰방대에 담배를 한 대 피워물었다. 아내가 담배 조리를 다닐 때(아내는 보름 남짓하게 하고 말았지마는)황색 엽초(葉草) 부스러기를 두어 뭉치 얻어왔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수택에게는 독했다.

그래서 장수연을 사서 섞어 피운다. 곰방대에 담배를 피워 문 것도 인저는 그리 어색하지도 않은지 아내는 보고 웃지도 않는다. 이 보령산 나무 덕에 수택이는 이틀이나 앓았으나 그래도 배운 것은 많았다. 그가 먼산나무에 용기를 냈던 것은 소위 하이킹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던 것이었으나, 그러한 기술은 먼산 나무에는 조금도 이용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일찍이 학창에서 배운 모든 학문이 실생활에서는 그다지 응용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처음 발견하던 때처럼 우울한 심정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두번째 수택이에게 순경 차례가 돌아온 것은 금년 겨울 접어들면서 첫 추이가 시작된 지 사흘 만인가 나흘째 되던 날이다. 마침 그날은 아들놈상현이의 생일날이라고 어머니가 인절미를 해왔다. 그래서 수택은 신문지에다 여나무 개를 싸들고 언 별만이 가상할 만큼 떠는 하늘을 순경 방안 구장 집 사랑으로 내려갔다.

“저녁 진지 잡수셨어유?”

마침 구장 집 일꾼 천보가 평북 어떤 철산(鐵山)에 가 있는 자기 형한테 편지를 쓰려고 기다리고 있는 길이었다. 그는 지금까지에도 벌써 무려 이삼십 통의 편지를 쓰지 않으면은 안 되었다. 출생 신고도 몇 장 썼고 사망 신고도 한 장 썼다.

“안부하시구유, 요전 말한 일은 어떻게나 됐느냐구 알아보시구유, 난 잘 있으나 흉년이 들어서 곤란이라구 쓰시구유.”

천보가 이렇게 사연을 부르는 대로 그는 받아 썼다. 요전 말하던 일이란 천보가 그쪽으로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편지를 써주고 잠시 잡담을 하다가 그날 당번인 네 사람은 둘씩 가라서서 한 패는 윗말로 또 한 패는 아랫말로 갂 몽둥이를 짚고 나섰다. 수택이는 득만이라는 그의 집에서 넷째 집 떨어진, 벌써 이태째 중씨름에 광목을 탔다는 장정과 한 패가 되었다. 처음 그들은 윗말이었으나 다음 번에는 아랫말로 섞바뀐다. 순경패를 달래기에는 아직 이쁜 시각이었지마는 득만이는 장난삼아서 집집마다,

“패 주―”

소리를 친다. 매일 한 번씩 구장은 순경패를 어떤 집에다 감춘다. 그래서 패를 맡은 집에서는 두 홰 닭이 울어야만 패를 내주도록 마련이었다.

“어젯밤엔 꿈을 잘 꾸었으니까 어쩌문 오늘은 한 놈 앙겨들 상두 싶구먼서두.”

득만이가 작대기를 질질 끌면서 혼잣말처럼 한다.

“한 놈 앙겨들다니?”

“도적놈 말이죠. 한 놈만 붙들면 수가 나는 판이지요. 돈이 댓 냥씩 생기죠. 밤참에 막걸리가 한사발이니 배 뚜들겨가며 먹잖어유?”

하고 들었던 작대기로 삽짝 기둥을 뚜드리며 고함을 친다.

“몽동이 가지구 왔으니 패 주―”

수택은 문득 어느 해 겨울 자기 집에서 도적을 잡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용감하고 재치있게 도적을 잡은 그의 무용담(武勇談)은 헛되이 아버지의 격분을 샀을 뿐이었다. 장하다는 칭찬 대신에 지겟작대기로 아랫종아리를 얻어맞은 후 수택은 얼마를 두고 해석에 괴로웠었다. 그러나 오래 두고두고 생각할수록에 자기 아버지에게는 그만큼 위대한 일면이 생각되었다.이날 밤 수택은 뜻하지 아니한 것을 발견했다. 두번째는 아랫말 차례라 잠깐 몸을 녹였다가 득만이와 같이 또 나갔다.

별빛도 눈발에 애여서 촌보를 요량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밤이었다. 그때 수택은, ‘만일 도적을 잡는다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었다. 득만이는 돈 오십전과 막걸리 한사발을 위해서 그를 주재소에 넘길 것이다. 물론 자기가 오십전을 내고 술 한사발을 사주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제지할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때리듯이 그만큼 이 득만이를 미워할 수가 있을까?

그런 자신은 역시 그에게는 없었다. 그것을 그는 진심으로 슬퍼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득만이의 뒤를 따라가려니까 득만이가,

“필년 아버지, 야학당 구경하구 가세유―”

한다

“야학당?”

“야,”

“지금두 야학이 있어?”

수택은 실로 의외였다. 이 동리에 야학을 처음 개설한 것은 박 선생이었고 야학이 성황을 이룬 것도 역시 그가 이 동리에 머물러 있던 동안이었다. 그후 청년회는 동 소유가 되어 무슨 회나 공동판매 같은 데 쓰게 되었고 야학도 자취를 감춘 줄로만 그는 생각하고 있는 터이었다.

여름방학이면 그도 야학 선생의 한 사람이었었다.

“전엔 청년회를 빌려서 하다가 지금은 못 쓰게 하니까 겨울 동안만 남의 집 사랑방을 빌려서 한대유.”

“그래, 선생은 누구구?”

“김선달 집 둘째아들이지유.”

“걔가!”

그는 놀랐다. 김 선달 둘째 아들이라면 작년에 농업학교를 다니다가 학비 관계로 이 학년에서 퇴학하고 왔다는 빈혈증인 왜소한 소년이었다.

교실이란 두 칸 장방이었다. 아랫목으로 칠이 다 벗겨진 칠판이 걸렸고 그래도 명색의 난로까지 놓였다. 한가운데를 한 줄 비워놓고 사십 명이나 되는 조무래기들이 혹은 쓰고 혹은 책을 보고 있다. 칠판 한복판에 칸이 막힌 것을 보면 두 반인 것이 분명했다. 한쪽 칠판에는 1‧2‧3‧4가 씌어 있고 딴쪽에는 가감 문제가 네 개 붙었다.

수택은 거의 이십 분 동안이나 김 소년의 교수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김소년의 교수를 들은 것도 아니었고 쓰고 책을 보고 하는학생들을 구경한 것도 아니다. 석유 궤짝에 대패질을 해서 먹칠을 한 칠판과 그 앞에서 선 빈혈증의 소년, 그리고 한 자라도 더 눈여겨두려고 늘어앉은 어린 아이들―이것을 한 번 논 것으로 족했던 것이다. 수택은 이 초라한 교실에서 이십 년 가까운 옛날을 연상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이십 년 전 그대로였다. 칠판도, 사람도, 아이들도, 변한 것은 오직 자기뿐이다. 그때의 그 정열을 잃었고, 그만큼 약해졌고 공리적으로 변한 자기가 있을 뿐이었다. 가르치는 사람의 생각과 배우는 사람의 생각도, 이십 년 전 그때와 추호도 다른 게 없을 게며 또 달라질 수도 없을 것이었다. 한 자라도 더, 그리고 잘 가르치자, 한자라도 더, 그리고 또 빨리 배우자―이 진리에 연대가 하관이며 시대 변천이 하관이랴! 오직 거기에는 배우려는 저열과 가르치려는 정열이 있을 따름이었다.

사실 수택 등이 이려서 심심파적으로 한 ‘교육사업’이 그후 그들의 실생활을 얼마나 윤택하게 했던가를 이십 년 후 지금서야 발견했던 것이다.

집금도 수택은 그때의 야학생들에게서 몇 버너이나 이런 말을 들어오던 터이었다.

“참, 그때 그나마 안 배웠더라면 지금쯤은 얘기책 한 권 못 볼 뻔했어유. 그때 중간에서 그만둔 사람들은 지금두 앉으면 한을 하는데유.”

지금 생각해도 좋은 일을 했다 싶었다. 그러나 지금 세대에 누가 그런 생각을 하랴 했었다. 첫째 그 자신에게 그런 용기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는 터였었다.

그후로는 김 소년과 자주 만났다. 석유만은 아이들이 매달 삼전씩 보태서 사나, 분필과 기타는 김 소년 자신이 부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것만은 자기가 떠안았다. 가르치고 싶은 정열에서가 아니라 그런 용기를 잃어버린 자기 자신에게 대한 서글픈 동정에서였다.

“그밖에라두 뭣이구 군색한 게 있거든 와 말을 하렴. 큰돈 드는 게야 낸들 어쩔 도리가 없지만…”

“뭘요, 기름하구 백분만 있으면 겨울은 나유. 나무는 저희들이 날마다 삭정이를 한개피씩 들구 오니까요. 그보다두 아이들이 통 굶어서요―하루 죽 한 끼두 못 먹는 아이들이 파다한걸요. 뭐. 선생님 댁 바루 옆집 정 서방네 아이들도 요샌 통 굶구 다니나 봐요.”

김 소년은 이런 말을 하며 소년답지도 않게 우울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정 서방 집이란 늦은 가을에 닭 두마리를 살쾡이한테 죽이고 닭국을 가져오던 바로 그의 옆집이었다. 그 송아지처럼 위하던 닭을 두 마리나잡아죽인 살쾡이를 못 잡아서 겨우내 애를 박박 쓰는 심정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김 소년에게 그런 말을 듣고 나니 더욱 마음에 사무쳤다. 뻔히 굶으면서도 여전히 책보를 끼고 늦도록 그 찬 방바닥에 앉아서 한 자라도 더 배우겠노라고 눈이 발개서 덤비는 정상이 딱하다 못해서 되려 밉기까지 했다. ‘그걸 배우면 뭐 그리 잘된다고 그렇게까지 들 하는 겐고?…’ 이런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그 가상한 닭을 얻어먹고도 시치미를 떼였나보다.’

이런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 수택은 집에 돌아오는 길로 정 서방을 불러서 쌀 한 말을 퍼주었다.

“아니. 뭘 이렇게 많아요… 인저 낼부턴 구제 공사가 시작이 되니까 벌면 팔아먹을 걸요.”

정 서방이 굳이 사양하는 것을 수택은,

“사양두 두 번 이상 하면 변덕이라우. 받어두슈. 그리구 그놈의 살쾡이 잡을 궁리나 차리시구려.”

이렇게 웃음엣말을 해서 말문을 막는다는 것이 정 서방의 상처를 건드린 모양이다. 그는 살쾡이 소리를 듣기가 무섭게 이를 북 갈며,

“염려 마시유. 내 어떻게 하든지 그놈의 살쾡이를 살려둘 줄 아시유…한 마리만 그랬어두 내 참아요. 저두 오죽 먹구 싶어야 초가을부터 눈독을 들였겠어유. 허지만… 안 되지유. 제 목숨에 못 죽을걸유! 못 죽지!”

―수택은 여러 친구들로부터 그의 소설은 언제나 뼈가 너무 앙상하니 드러나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결점이라는 평을 들어온 터라 그는 이번 장편에서만은 동리에서 생긴 이런 삽화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끌어다가 살을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6[편집]

봄비치고는 철이 좀 이른 것 같아서 또다시 으르르 얼어붙으면 보리마저 바닥 다 본다고 밤새도록 걱정들을 했던 것이 다행히 비가 개이면서 그대로 날이 확 풀리고 말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어디서고 종달새의 소리가 들려오기나 할 것처럼 다정한 맛이 느껴진다.

“이대로만 간다면 보리는 먹겠군.”

동리 사람들은 만나면 인사가 이것이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뒤집히든 세대가 바뀌든간에 벼가 잘되고 보리가 얼어죽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사람이 기어다니거나 날아다니거나 그런 것도 그들에게는 인연이 없는이야기다. 오직 배불리 먹고 추운 때는 따뜻하게 더운 때는 시원하게 입으면 그만인 것이다.

양지바른 밭둑에 냉이잎이 파아랗게 돋아나고 솜옷 입은 등떠리에 소몰소몰 땀이 솟기 시작할 때는 춘경(春耕)준비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겨우내 외양간에서만 웅숭그리고 앉았다 섰다 우기우기 반추(反芻)만을 일삼던 소가 마당으로 끌리어 나간다. 농부들은 몽당싸리비를 들고 겨울 털빛이 변해보이도록 쌓인 소 등의 먼지를 쓰윽쓰윽 쓸어준다. 그러면 소란 놈은 생기가 난다는 듯이 꼬리로 제 엉덩판을 치며 혀끝으로 콧구멍을 쓱쓱 핥아낸다. 흙을 파제키는 닭의 발도 한창 바쁘고 흰둥이란 놈이 번듯이 누워서 양지받이를 하던 울타리 밑 풍경도 한결 한가로워 보인다.

이런 즈음이면 반드시 앞집에고 뒷집에서,

“꼬댁 꼬댁 꼬댁댁…”

하고 알 낳이하는 암탉의 환성이 나른한 춘곤(春困)을 깨뜨려준다.

“봄이군!”

하고 수택이도 거의 다 끝나가는 소설을 쓰는 마음도 바빠진다. 이제 한 삼사십 매만 더 쓰면 손을 떼겄건마 그동안이 더없이 안타까웠다.

“나도 빨리 논길이두 하구 김장밭두 부치구. 밭이랑도 세워놔야지!”

그는 제법 의젓한 농군처럼 이렇게 중얼거려보는 것이었다.

사실에 있어서 수택에게는 이 봄이 더없이 즐거웠다. 일평생 처음으로 내 손으로 흙을 파고 씨를 뿌리고 하는 기쁨으로 봄철이 마치 그 무슨 절대의 행복이기나 한 것처럼 은근히 기다려졌던 것이다. 몸이 우둔할만큼 껴입었던 내복이며, 솜바지저고리를 훌훌 벗어 내던지고 사랑하는 처녀의 손길처럼 포근한 양광(陽光)의 애무를 받아가며 무한한 생명력과 신비가 감추어진 흙을 척척 갈아붙이는 기쁨, 삼십 년간 가죽에 싸여져서 흙과 접촉해보지 못하던 맨발로 징검징검 고랑을 타넘으며 씨를 뿌리는 행복―아런 것을 상상만 하여도 가슴이 뛰는 것이었다.

아니 일생의 절반을 돌 위에서 살아온 이 도시의 청년은 춘경(春耕)이라는 두 글자에서만도 형언치 못하는 매력과 환희를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럴 필요가 조금도 없는 인간층이 싫건 좋건간에 노동을 하지 않으면 운명지어진 사람들에게 즐기어 사용하는‘노동의 신성’에서 오는 기쁨도 아니었고, 일찍이 그가 품고 있던 도시생활에 대한 압박에서 해방된 기쁨도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의 농터가 아니요. 자기 손으로 가꾼 곡식이 아니건만 누우렇게 익은 곡식을 보고는 푸근해하는심정과도 비슷한 그런 무조건의 기쁨이었고 환희였다.

이러한 그의 기쁨은 두푼 정방형의 좁은 칸살이 빽빽하니 들어박힌 원고지에서 해방되던 날 그 최고 절정에 달했었다. 저녁에 정 서방과 일을 맞추어놓고 돌아와서도 그는 늦도록 잠을 못 이루었다. 어렸을 때의 섣달 그믐날 밤과도 같은 흥분이었다. 무한한 행복이 그대로 쏟아질 아침을 기다리는 초조다.

“여보. 당신두 우리 같이 나갑시다. 나는 갈아붙이고 다아신은 흙을 고르고 나는 씨를 뿌리면 당신은 덮고…”

그는 마치 사랑하는 시구(詩句)아 외듯이 이렇게 말하고는,

“필년아, 너두 낼 아빠하구 엄마 따라서 씨부리러 간다구?”

필년이는 바느질을 한다고 꿰매는 시늉을 하던 손을 쉬고 빠안히 아버지를 쳐다보다가,

“쪼꼬레트 사줌 가지.”

“쪼코레트?”

“응.”

“허, 농군의 딸 입에 쪼꼬렛이 당한 개냐. 엿 사주지, 엿. 깨엿 말야, 응.”

“나 엿.”

자는 줄만 알았던 상현이란 놈도 발딱 일어났다.

수택 부처는 어린것들이 잠이 든 후에도 늦도록 생활설계를 했다.

액속대로 신문사에서 원고료를 선불해준다면 사백원의 모개돈이 들어온다.

거기에 정편을 쓰는 여가에 마련한 단편 두 편과 편지 형식으로 된 잡문이 한 편, 무두 합치면 그럭저럭 오백원은 될 것이었다. 그 오백원으로 마땅한 것이 나면 논을 서너 마지기 사든가 밭을 몇뙈기 사기로 했다.

“참. 내 벌써부터 이야기한다면서…”

그의 처는 갑자기 생각이 난 듯이.

“저기요, 우리 장 말이요, 양복장하구 이불장 말야, 팔아버릴까?”

“건, 왜 갑자기, 누구 소설대로 다 팔아가지구 서울루 달아나려우?”

“그럴 용기나 있다면 오죽 좋겠수.”

하며 아내는 웃는다. 수택은 언제나 자기 처의 웃는 입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희미한 불 속에서 그 흰 이를 내다보이며 나긋이 웃고 보니 더한층 아름다웠다.

“당신은 웃으며 참 이뻐.”

이렇게 웃음엣소리를 하고 나서.“왜 누가 사잡디까?”

“심구영 씨 소실이 여간 탐을 내잖어요. 접때 일부러 양복장을 살랴고 읍에까지 갔더라나. 그랬더니 모두 너절해서 그냥 왔대. 두 개 몰아서 일백오십원 주겠다니 팔아버릴까?”

“걸 팔아치우면…”

그는 일백오십원이란 말에 구미도 당기기는 했지만 이렇게 말했다. 사 년 전에 두 개에 팔십원을 준 것이었다.

“그까짓 거, 있으나 없으나… 난 이렇겠으믄 좋겠어요. 기왕 시골 와서 농사질랴믄 정말 농군처럼 그런 세간 다 팔아치우구, 이 집두 이삼십원은 다 받겠다니 남한테 넘기군 아버님네하구 합소를 하지. 골방을 우리가 쓰구 당신은 사랑 윗방을 내라구 해서 쓰시구려. 말만 세간이지 뭐 들여놀 데가 있나, 봉당에다 놔두는 거, 게 발에 편자지.”

아내 말을 듣고 보니 그도 그랬다. 이제 농사철 접어들었으니 어느 하가에 책상 파에 앉아보랴 싶기도 했고 집이구 뭐고 다 쓸어 팔면 그럭저럭 팔구백원 돈이 되는 셈이니 그것으로 땅뙈기나 마련하는 것이 상책일 것도 같았다.

“그까짓 거 테이블이구 의자구 다 쓸어가라지. 농구 녀석이 회전의 잔 있어 뭐하겠수.”

“그렇잖어두 심구영 씨 소설은 찻종하며 다 탐을 낸다우! 심씨가 지금첩한테 홀딱 반해서 그러니까 그런 동안에 살림이라두 장만하잔 수작이지 뭐유.”

심구영이란 포목, 잡화로 이 동리서 돈푼이나 모은 오십객이었다.

그런 거추장스런 세간을 처리하는 데 수택이는 물론 이의가 없었다.

그렇게 말을 하기는 하나 그래도 여자 마음을 생각해서 찬장이니 얌전한 그릇 같은 것은 남기고 거추장스러운 것만을 넘겨주기로 하고 잠을 든 것은 자정도 훨씬 지나서다. 그러나 눈을 붙인 지 얼마가 못 돼서 그는 또 깨었다.

“필년 아버지, 주무셔유.”

하고 정 서방이 울타리 밖에서 소리를 친다. 수택은 몸재게 허리 골춤을 움켜쥔 채 뛰어나갔다. 며칠 달인 뜨느라고 동편 하늘이 막 훤하다.

“정 서방요?”

“야. 이거 주무시는 줄 알았더면 안 올 걸 그랬어유.”

“웬걸요. 아직―”

하며 삽짝을 열고 나가려니까,“이거 좀 보셔유! 이눔 좀.”

하고 뭣인지 시커먼 놈을 눈앞에다 풀쑥 다민다. 수택은 덧없이 주춤하고 물러섰다.

“게 뭐요?”

“뭔가 봅쇼! 흐흐흐흐.”

하고 좋아서 웃는다.

“거, 괭이가?”

“흐흐흐흐… 고양이요? 천만에요, 아주 어젓한 살쾡이올씨다유!”

하면서 살쾡이를 다시 한번 번쩍 들고 아래위를 쓱 훑어보며,

“이눔! 네가 내 닭을 잡아죽이구 무사할 줄 알았드냐! 이눔, 흐흐흐흐…”

허들겁스럽게 한참을 웃어붙이고는,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덜컥합디다유! 그래 잠결에두 뛰어나와 봤더니, 아, 이런 놈 좀 봐유, 모가지가 요렇게 덫에다 치어가지곤

‘캐캐’ 하겠지유! 그래, ‘네 요놈, 잘 만났구나.’하군 지겟작대기루 해골을 한 번 후려갈겼더니 그저 외마디소릴 ‘캥―’하구질르곤 발버둥을 칩디다유! 그래…”

정 서방은 이렇게 한참이나 늘어놓고야,

“주무시는데 이거 참…”

하고는 살쾡이를 추썩대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러구러 잠이 든 것은 첫닭이 울고도 한참이나 있어서였으나 깬 때는 몸도 그리무겁지 않았다. 여자들이 생명같이 여기는 방 세간을 자진해서 처리해버린 일이며 정 서방이 겨우내 치를 떨며 통분해하던 살괭이한테 복수랄 한 일이며 그에게는 다 유쾌한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유쾌한 일은 일평생 처음으로 씨를 뿌리러 가는 그날 아침은 또한 금년 저어들고서는 가장 맑고 따뜻한 날이었다.

정 서방은 새벽같이 달려왔다. 그는 그래도 이야기가 다 끝이 못 났는지 간밤의 이야기를 밥을 먹으면서도 하고 하고 한다.

“그까놈의 닭 몇 마리가 아껍다느니보다도 그놈의 소위가 괘씸하단 말이거든요!”

“하여튼 분풀이는 잘했쇠다. 그깐 살쾡이란 놈한테까지 분풀일 못한다면 억울해 살겠소.”

수택이도 이렇게 맞장구를 쳤다.

수택은 집으로 내려가서 상태도 끌고 왔다.상태는 요새 갑자기 고향을 뜰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도회 생활의 환멸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의 신념은 변하지 않았다. 달래도 보았고 을러도 보았다. 그러나 농촌에서 생활 유지가 안 된다는 것은 그보다도 상태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상태는 고향에 돌아온 수택이를 은근히 비웃고 있는 눈치다. 그는 다시 그 길로 해서 구장 집에 가서 소를 얻어 몰고 큰집에 들러서 쟁기도 소 등에 얹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리에 누워 있었다. 벌써 며칠째 몸살도 누워 있는 터였다. 웬만한 병에는 꾹하니 드러누워 있지 못하는 김 영감의 성미에 더욱이 오늘은 수택이가 처음 씨뿌리는 날이고 보니 웬만만 하면 툭툭 털고 일어서련만,

“정 서방더러 잘 알아서 하라구 그래라.”

이불을 벗기지도 않고 한마디 할 뿐이다.

“네.”

수택은 병들어 누운 아버지를 본 일이 없던 터라 우울했다. 그러나 오늘만은 그런 생각을 않으리라고 박 주부 약국에 가서 약을 지어다 달이도록 상태한테 일러만 두고 부리나케 동리 뒤 개울의 징검다리를 뛰어 건넜다.

상태가 박 주부를 데리고 진맥을 하려 했을 때 김 영감은 웬일인지,

“아니다. 약이 무슨 약. 내가 어디 몸이 아퍼 그런다더냐!”

이렇게 한마디 했을 뿐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는 손도 못 대게 하는 것이었다. 의원 뿐이 아니었다. 손자고 며느리고 아내고 일체 방에도 들어오지 못하게 안으로 문을 걸어잠그고는 불러도 대답조차 없다. 온 집안이 겁을 집어먹고 수선을 피우니까.

“왜 이렇게 수선들을 대는냐. 잠 좀 자게 내버려둬라.”

하고 고함을 치는 것이다.

문 밖에서 서성대던 가족들은 모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김 영감은 자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거동을 못할 만큼 병이 난 것도 아니었다. 삼사 일 동안 별로 먹은 것이 없어서 오직 매적지근할 뿐이었다.

아무도 김 영감의 병 원인을 아는 사람은 없다. 그는 해동이 되면서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어슬렁어슬렁 집을 나간다.

동구를 빠져서 대장간 앞을 왼쪽으로 꼬부라지면 천변으로 나선다.

개울을 건너서면 조그만 아카시아 숲이 있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무도 모르게 이 숲속으로 들어간다. 숲속에는 잔솔 여남은 개가 섰고 사람 하나 숨겨줄 만한 반송도 한 개 섰다.―이 반송 밑이 그가 매일시간을 보내는 자리였다.

먼저 그는 숲속에 들어서면 이 반송 밑으로 온다. 대개는 반송 밑에 두 무릎을 세우고 무릎을 끌어안아서 깍지를 낀다. 그러고는 우두머니―무엇을 보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조는가 하면 조는 것도 아닌 자세로 언제까지나 한 곳만 내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 얼굴은 지극히도 행복스럽던 옛 꿈을 더듬는 것같이도 보이었고 또 어떻게 보면 그는 최후를 장식하는 자기만의 추억에 잠겨 있는 것같이도 보인다. 웃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니다. 격하는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마음의 평온을 얻은 사람의 표정도 아닌―그런 때가 많았다.

그는 오직 앉았을 따름이요 앞을 내다볼 뿐이다.

그는 별로 동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그것을 꺼리었다.

어쩌다 누가 그리 지나다가,

“어째 치운데 거 와 그러구 계시유?”

하고 물을라치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누구 말이 이 숲속이 집터가 좋대서 보고 있는 길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을 하기 싫으니까 그는 자기가 거기와 있는 것을 아무에게도 보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 아카시아 숲에서 두 다랑이 건너에 이미 완전히 한 장의 휴지가 되어버린 그의 사랑하던 땅이 있는 것이다. 그의 반생―아니 육십 평생을 완전히 바친 논과 밭―그러나 그것은 이미 남의 수중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소유권이 이전된 데만 그치지 않고 소작권까지도 이미 남의 손으로 넘어가고 만 것이다.

“저 논다랑이와 뽕나무가 둘러선 밭은 확실히 내 땅이었다. 그것은 이 동리 사람들이 다 잘 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나는 손을 대어도 안 되고 씨를 뿌려도 안 된다…황차, 이 땅에 심은 곡식이랴…”

이렇게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금의 김 영감이었다. 더욱이 이번 비로 해서 논바닥에는 물이 흥건하니 괴어 있었다. 작년 같은 가뭄에도 편작은 된 놈이었다. 꺼뭇꺼뭇한 땅, 홍건한 논물, 가래를 지르기만 해도 기름이 지르르 흐르는 바닥 흙이 철컥철컥 나자빠질 것 같다.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아랫종아리에 흙과 물이 뛸 때의 그 감촉, 띄엄띄엄 소가 발을 드놓을 때마다 철벅거리는 물소리… 흙에서 나서 흙을 만지며 늙은 이 농부에게는 논과 밭 가는 사람의 팔자는 그대로 신선이었다.

이런 농부에게 있어서는 흙―땅은 그대로 희망이었고 기쁨이었다. 그것은그대로 종교였다.

이 늙은 농부의 손으로부터 땅은 멀리 떠나갔고 인저는 자기 땅이던 이 기름진 흙덩이를 만지는 자유까지도 박탈된 것이었다― 지금 그에게 주어진 특권은 오직 자기 땅에 자기 아닌 딴사람이 씨를 뿌리고 김매이를 하고 이듬을 매고 물을 대고 대궁이 척척 휘도록 여문 벼를 베어가는 것을 멀리서 바라볼 수만은 있다는 데서 그치는 것이었다.

김 영감은 마침 오늘 신작인(新作人)인 춘성네가 논갈이를 한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었다…

‘내 땅에 딴놈이 들어선 꼴은 안 보리라!’

김 영감이 이렇게 결심을 한 데는 조그마한 부자연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김 영감은 역시 흙의 아들이었다. 아니 그는 비열한 만큼 충실한 ‘흙의 노예’였다. 제 땅을 남의 쟁기가 들어가 파제키는 것을 옆에서 바라보고만 있지 않으면 안 되는 농부에게는 참을 수 없는 그 굴욕도 며칠을 굶어가며 이를 악문 그 결심도 멀리 풍기어 오는 구수한 흙내만은 어쩔 도리도 없었다. 흙에서 받는 굴욕보다도 흙에서 풍기는 그 향훈이 몇 백 배 그에게는 즐거운 것인지 몰랐다.

―흙의 완전한 포로가 되어 있는 이 늙은 농부는 모든 굴욕감을 물리치고 오직 흙내를 더듬어 헌청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다시금 아카시아 숲속에 나타나고야 말았던 것이었다.

맑고 따뜻한 봄날이었다. 몸과 마음이 함께 힘든 그에게도 햇살은 오히려 따뜻했다.

그는 언제나 앉는 그 자리에 등을 소나무에 기대고 벌을 향하고 앉았다.

상방 십리라는 샌골 벌은 농부들로 찼다. 소 모는 소리와 방울소리와 철벅이는 물소리가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들려온다. 겨우 알아볼 만한 위치에 수택이네도 보였다.

수택이는 머리에다 수건을 질끈 동이고 쟁기질을 하고 있고 정 서방은 밭둑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밭머리에는 자기 아내가 상현이 남매를 데리고 놀고 있고 서울 며느리는 얼굴도 잘 안 보일 만큼 수건을 푹 내려쓰고 고무래로 흙덩이를 바수고 있었다.

수택의 처는 그래도 어울리는 편이었다. 그러나 수택의 쟁기질에는 소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가끔 우두머니 서서 쟁기가 바로 대어지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들이 억지로 그린 자유화(自由畵)와도 같은 것이다.

쟁기가 빗가면 정 서방이 담뱃대를 문채로 이러구저러구 가르치는 모양이다. 바로 그의 앞에는 일찍이 자기의 땅이던 논에 춘성네 부자가 신이 나서 거름을 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가 지금 거기 있는 것을 보고 일부러 뽐내느라고 더 떠들고 퉁탕거리는 것만 같이 보여지는 것이었다.

그의 눈에는 이 춘성네 부자가 더없이 얄미웠다. 미운 대로 한다면 당장 뛰어들어 가서 아비와 자식을 논구럭에다 거꾸로 처박고 짓밟아주고 싶기까지 했다.

“흥, 되잖은 놈들! 그놈들 아주 제 땅이나 되는 상싶은가베!

아니꼽살스런 놈들 같으니루!”

무엇이 되잖은지 무엇이 아니꼬운지 모른다. 그러나 김 영감한테는 그렇게밖에 보여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수택이가 뭐라고인지 외마디소리를 쳤다. 영감은 깜짝 놀라서 그쪽을 건너다보았다. 소도 쟁기질꾼을 업수이 여기는지 아무리 소리를 쳐도 자국도 안 떼놓는다. 정 서방과 수택의 처는 옆에서 깔깔대고 있다.

정 서방이 쟁기를 내라고 그러는 모양이나 수택은 고집을 세고 소만 몰구친다.

겨우 소는 움직였다. 그러나 소는 또다시 딱 섰다. 쟁기는 쟁기대로 놀고 소는 소대로 가고 사람은 사람대로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쟁기가 사람을 끌고 가는 형상이었다.

이런 꼴을 얼마동안 바라다보고만 있던 김 영감은 이상한 마음의 충동을 받아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자기가 벌써 며칠째 변변히 먹지도 않고 누워 있던―그나마도 환갑이 지난 늙은이라는 것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지금 그는 벌써 병자도 아니요, 굶은 사람도 아니요, 늙은이도 아니었다.

그는 오직 농부였다. 비열할 만큼 충실한 ‘흙의 노예’였다― 그는 허우단심 쫓아가서 아들의 손에서 쟁기를 뺏이들고는 신이 나서 흙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었다.

“자, 봐라. 쟁기날을 이렇게 대고는 사람은 여기 서야지. 그래야만 소가 힘을 제대루 쓰지. 사람이 한쪽으루 기울어져 노면 소가 한쪽에만 힘을 써야잖는냐. 정 서방, 자넨 골을 치게. 얘, 아가. 고무랜 또 없느냐!”

지금의 그에게는 굴욕도 없었고 흙에 대한 원한도 없었다. 오직 기뻤고 즐거웠다.

육십 평생을 두고 한결같은 충성을 다해왔건만 또 한결같이 육십 년을 두고 모욕하고 혹사(酷使)해온 나머지 핏기 하나 없는 늙은 병든 육체만을 그에게 떠안긴 흙이건 마는 그 흙에 대해서 억제할 수 없는 감격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그는 지난 육십 평생에 땅을 치며 울기도 했었다. 원망도 해왔고 저주도 해왔다. 그 극진한 충성에 비해서 너무도 가혹한, 너무도 알아주지 않는 흙의 마음에 걷잡을 수 없는 격분도 느껴왔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가슴에 넘쳐흐르고 있는 감정은 오직 흙에 대한 감사였다.

그는 그만큼 흙을 사랑했다.

아니 그만큼 그는 흙의 너무나 충실한 노예였다.

7[편집]

한식(寒食)이 지난 이후의 농군들에게 있어서 된내기가 올 때까지의 팔구 개월 동안은 터진 모래 제방(堤防)을 막는 것과도 같이 눈코 뜰 사이 없는 그날그날을 보낸다.

봄보리밭에 호미질을 하기가 무섭게 논갈이에 이어 거름내기가 시작되고 연달아서 못자리를 붓는 한편 밭을 일구어야 하고 밭곡의 파종이 끝나기도 전에 벌모 내기가 시작된다.

“박 서방, 낼 어디 일 마쳤지유?”

그들은 해만 지면 이렇게 일꾼 얻기에 바쁘다. 일꾼을 어어야 하고 일꾼을 얻어노면 이집 저집 다니며 쌀, 보리를 꾸어야 한다. 일년에 한두 번밖에 없는 기쁜 날이니 하다 못해 북어 꽁댕이 하나라도 찢어놓아야 하는 것이 그들의 예의요 또 관습이다.

그들의 농사란 생나무 휘어잡기다. 억지 춘향으로 끌어내고 꾸어대고 휘어잡고―마치 아닌밤중에 물난리나 치르듯이 모심이를 끝내노면 또 딴쪽 일고가 터진다. 채소밭도 손질을 해야 하고 기장이나 수수밭도 매주어야 하고 논에 물도 끌어야 한다. 철맞추어 참외포고 심어야 하며, 밭골에 강남콩에 새새 묻어두어야 한다. 논둑의 그루콩은 누가 심어주며 엉터리로 끌어다댄 일꾼은 누가 앗아주나. 파 한 뿌리, 마늘 한 쪽까지도 자기 손으로 심어야 하고 매주어야 하고 가꾸어야 한다. 심지어 옥수수, 깨, 아주까리 같은 일용품까지도 제철에 손을 못 대면 알톨 같은 벼를 주고 바꾸어 들여야 한다.

이 무섭게 많은 일거리가 한 집에 하나 아니면 둘밖에 없는 농군의 손을 거쳐야 하는 터라 마치 손을 떼기도 전에 일꼬가 터져 마음만 바쁜 때다.

‘봄이면 씨를 뿌리고 가을이면 걷어 챙겨놓고 추운 삼동은 뜨끈하니 불을 때고 드러누리라.’이렇게만 단순히 생각해온 수택이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날짜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봄을 지냈다.

물론 농촌생활이라고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 것쯤은 생각 못한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단순하게 생각 한 것은 사실이었다.

씨를 뿌리고 한두 번 매주고 그러고 걷어들이면… 그만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택 부처는 당해보고서야 알았다. 돈만 있으면 가지고 나가서 쌀도 사고 기름도 사고, 고기·파·마늘, 무엇이고 사오분이면 광주리에 담아들고 들어오던 도시 생활의 고마움을 그들은 새삼스러이 깨달았다.

그러나 자급자족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농촌에서는 그 허다한 생활품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손으로 시어야 했고, 가꾸어야 했고, 걷어들여야 했다. 그러나 걷어들인 그대로 먹는 것도 아니다. 말려야 했고 찧어야 했고 까불러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불리한 조건은 모든 일에 서투른 점이었다.

그만큼 애도 더 키었고 노력도 더 들었으며 시간도 더 요구되었다.

이렇듯 일에 치여서 경황이 없는 그들에게 또 한 가지 일이 덮쳐 있었던 것이었다. ―봄내 개량개량하던 김 영감이 모내기를 한 길로 그대로 싸매고 눕고 말았던 것이다. 수택 부처는 아침 저녁은 물론 논이나 밭에 나갔다가도 몇 차례씩 들어가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때는 수택이네도 딴집 살림을 계획대로 걷어치우고 합소를 하고 있었다. 신문사에 교섭중이던 소살도 달포째 살리는 중이었고 고료도 반만은 손에 들어와 있었고 집이 예상 외로 일백구십원이나 평가가 되어 그의 수중에는 이럭저럭 팔백원 돈이 있던 터라 쓸 만큼 약도 써보기는 했으나 김 영감의 병은 시약(施藥)만으로 완치될 병은 아니었다. 김 영감은 생리적으로 보다도 정신적으로 더 큰 병을 얻고 있었다. 그 사랑하던 땅에 대한 억제할 길 없는 미련이 그의 마음을 약하게 했고 괴롭게 했고 드디어 생리적으로까지 이상을 일으킨 것이었다.

수택이는 김 영감이 눕는 그 길로 이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들의 시약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내 병은 약으로는 안 된다.”―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아들의 돈을 없애주는 것이 딱해서 그러는 줄로만 알았었다. 또 그의 성격으로 보아 그렇기도 했다. 그러나 며칠 지난 때 거의 정신은 못 차리면서도 김 영감은 논 구경을 간다고 온종일 애를 먹었다.

“수택아, 자, 날 좀 일으켜라. 내 병엔 약보다도 그게 더 낫다. 구수한흙내. 퍼언한 들. 익어가는 보리…”

이렇게 말하는가 하면 이번에는,

“얘들아, 모싹이 어떻든? 자꾸 돌아봐라. 곡식이란 갓난애와 같으니라.

갓난앤 물기나 하지. 얼마 안 있어서 강충이가 생긴다. 고놈 참 귀신같이 파먹느라. 이번 맬땐 암모니알 푹 질러둬라, 응?”

하고 딴소리를 한다.

아픈 곳도 어딘지 통 집증을 못하는 모양이었다. 어떤 때는 허리가 끊어진다고 소리를 지른다. 또 어떤 때는 팔다리가 쑤시어서 옆에서 보고 있을 수도 없을 만큼 못견디어한다. 그런가 하면 열이 바쩍 오르고 또 어쩌다 보면 전신이 얼음처럼 차다.

“여기다, 여기! 아규규…”

이렇게 하소연을 하며 가리키는 곳은 분명히 허리다. 그러나 병자 자신 어디가 아픈지 적확히는 모르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밖에, 전신에 안 아픈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모양이었다.

육십 년간의 긴 노동에 자기도 모르는 동안에 그의 육체는 성한 데가 없이 좀먹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강단으로 버티어왔다. 살려는 욕심과, 살 수 있을 것 같은 희망과 당장 일하지 않으면 조석 끼니가 간데 없다는 무서운 긴장으로 버티어온 것이다.

그것은 실로 오랜 동안의 긴장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긴장이 일시에 확 풀려버린 것이다. 땅도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갔고 작권까지도 잃어진 오늘날 긴장은 그 자신의 심신을 파괴시키는 이외에 다른 아무런 성능(性能)도 갖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한다면 수택은 자기 아버지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사랑은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의무적인 사랑이었다. 자식 된 자 마땅히 어버이를 공경해야 한다. ―이러한 도덕이 요구하는 극히 제한된 애정으로 김 여감을 사랑해온 것이었다.

이전― 그가 직업을 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오기 직전까지도 그는 자기 아버지를 사랑하기는 고사하고 되려 경멸해왔었다. 아니 그것은 경멸이라고 이름질 성질도 못되었을지 모르는 것이었다. 경멸이란 존경의 반동이니까.

그는 일찍이 자기 아버지를 존경해보겠다고 생각한 일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농부의 아들 ― 양복을 입고 동경유학을 하고 이름이 신문에도 나고

“선생님, 선생님.” 하고 따르고(실제로 그런 사람도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기가 두더지처럼 일평생 흙만 파는 일개 무지한 농부의아들이라는 데 일종의 모욕까지 느끼어온 수택이었다. 양복때기만 입은 사람 앞이면 그저“네, 네”하고 굽실거리는 것은(김 영감 자신은 똥이 무서워 피하느냐고 했다. 그러나 최근까지에도 수택은 그가 오직 무지한 때문이라고만 생각해왔던 것이다) 자기의 위신이 깍이는 일이라 했었다.

남의 아버지처럼 책이나 보고 장죽이나 물고 앉아서 호령이나 하고 남을 보고도 “여보게, 여봐라!”하며, 호호 백발의 노인을 보고도 “자네, 어쩌구, 어쨌나?”하는 그런 아버지가 못 되고 일평생 흙만 파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할 아무런 의무도 그에게는 없다고 생각해왔었다. 새파랗게 젊은 애들한테도 ‘허우’를 하고 또 그런 아이들한테서 반말지거리를 받아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을 하는 자기 아버지를 그는 일종의 군더더기로까지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벌써 아니었다. 물론 다른 부자간들처럼 아기자기한 애정은 몰랐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적어도 자기 아버지가 자기의 위신을 해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만은 깨닫고 있었다. 비록 땅은 팔지언정 김 영감은 훌륭한 철학자였다. 그 자신과 같이 김 영감을 업수이 여겨온 모든 인가보다는 분명히 그는 위대했다. 오직 근면하고 오직 겸손하고, 그리고 오직 청렴한 일생에. 일년 동안에 십전 미만의 용돈을 쓰면서도

‘거지〔乞人〕도갓집’이라는 별명을 일평생 면치 못했으리만큼, 거지들의 시중을 든 일이며 자기 물건을 훔치러 온 도적을 때렸다고 자기 아들을 사그리 내려 퍈 시설이며, 하루 밥 세 끼를 끓이는 이외의 재물을 탐하는 것은 욕심이라 하고 모든 채권을 포기했다는 사실―이런 모든 것은 지금 유식한 아들로 하여금 무식한 아버지를 재인식시키는 좋은 자료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지금 수택의 가슴속은 아버지에게 대한 새로운 감격으로 차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존경해온 그 어떤 위대한 사람보다도 일개 무식한 농부인 자기 아버지한테 감격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아버지를 구하자 했다. 그는 지금 일시적인 감격 때문만이 아니라 자기 아버지를 구할 수만 있다면 그 애지중지하는 삼십 평생에 처음 만지는―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는지도 모르는 팔백원의 ‘큰돈’을 희생하는 것은 물론 지금까지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지식과 이름과 지위를 일시에 몽땅 잃어버린대도 조금도 사양치 않으리라 했다. 아버지의 ‘무지’는 자기의

‘학문’보다도 몇십 배 아니 몇 백 내나 값이 있다는 것을 이 아들은 뒤늦게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네, 아버지.”하고 그는 며칠을 두고 김 영감의 손을 잡고 하소연을 했던 것이다.

“아버지, 맘을 돌리시구 약도 좀 잡수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서든지 잃어버린 우리 땅을 찾겠습니다.”

“땅을 찾아?”

김 영감은 귀가 번쩍 뜨이는 모양이었다.

“찾지요! 지금 제게 천원 돈이 있잖습니까. 인저 신문사에서 또 돈이 옵니다. 지금 사기로 매마지기에 일백삼사십원이면 되니까, 우선 이 달 안으로 열 마지기만 찾지요.”

“그 사람이 큰 부자라는데 그 땅을 팔까?”

김 영감의 말에는 금시로 생기가 났다.

“판답니다!”

수택은 거짓말을 했다.

“되판대?”

“매평에 오 전씩만 남겨주면 지금이라두 판답니다!”

“오전씩 이오 십―한 마지기에 십원이로구나! 얘,사자, 그럼! 위선 아카시아 숲 앞의 여덟 마지기라두 찾자!”

“그러구 나머진 필년 어미가 저 집에 가서 말을 좀 해본다구 했습니다.”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그의 아내는 그런 말을 한 적도 없고 또 그만한 여유가 있는 집도 못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안위시키기 위해서는 이만 거짓말쯤은 주저할 여지도 없었다. 그러나 영감은,

“필년 어미가 말이냐?”

하고 다지더니만,

“에이끼, 못생긴 자식! 요대루 굶어죽으면 죽었지 사둔한테 손을 내밀어!”하고는 그대루 홱 돌아누워버리는 것이다.

수택은 인사하다가 뺨맞은 격이었다. 그래서 터진 모래둑을 막듯이 변명을 했다. 처는 그렇게 말하나 자기는 단연코 거절을 했다. 이렇게 꾸며대는 도리밖에 없었다.

“잘했다.”

얼마 후에는 김 영감도 기분을 돌리었다. 만일 그날 밤, 여기에서 이야기를 막음하고 수택이가 쓰러져 자기만 했었더라면 혹 어땠을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감격에 잠긴 아들은 어쩐지 그대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약을 잘 잡수셔서 하루라도 빨리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그래야만 약값도 덜 든다. 약값을 아끼다가는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게 된다―이렇게 약을 쓰도록 강권했던 것이다.

―그러나 슬픈 일이다. 김 영감은 자기 아들의 이렇듯 알뜰한 애정을 칼로 치는 듯이 거부했던 것이었다.

센터 벌의 벼가 한참 어울리고 보리가 구수한 내를 풍기며 익어가던 어느 날 밤, 김 영감은 고달프던 일생애를 청산하기 위해서 쓴 잔〔盃〕을 들었던 것이었다.

써도써도 낫지 않는 병에 그 소중한 돈을 자꾸 퍼넣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찍이 단념을 해서 약을 쓰는 한 푼이라도 수택으로 하여금 땅을 찾는 데 보태게 하리라―이렇게 생각을 하고 김 영감은 자진해서 생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가 고달프던 생을 청산한 데 쓰여진 약은 양잿물이었다. 그것은 이른 봄, 그가 자리에 눕던 바로 그날 심구영네 상점에서 사다 두었던 것이었다.

수택이가 약그릇을 발견한 것은 시간도 모르는 밤중이었다. 그는 김영감의 고민하는 소리에 눈이 뜨여 아랫방으로 뛰어내려갔다. 원근 다량이었다. 몇 시간 후에는 혀가 굳었고 생선 내장 썩은 물 같은 불그레한 피가 입으로 철철 흘러넘쳤다. 그는 몇 번이나 아들과 손짓을 해서 불러놓고는 말도 한마디 하지도 못한 채 숨을 걷고 말았다.

“찾어―땅―”

정신은 멀쩡한 모양이다. 그는 혀가 헤어져서 말은 못하나 연방 손으로 머리맡의 궤짝을 가리키었다. ‘휴지’가 들어 있는 오동나무로 짠 궤짝이었다.

전화를 해서 공의가 달려온 것은 이튿날 오후였다. 그러나 그때 김영감은 이미 그럴 필요도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공의는 손을 댈 여지도 없다고 했다.

김 영감이 숨을 거둔 것은 그날 밤중이다. 꼭 돌 만이었다.

8[편집]

모든 것이 꿈이었다. 어떻게 장례를 치렀는지. 어떻게 산에서 돌아왔는지 수택에게는 기억이 전혀 없었다.

장례가 지나고도 십여 일 간은 집안에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생각하면 꿈 같다. 꿈이었던가 하고 나면 꿈이 아니다. 수택은 울음소리를 낸다고 집안 식구를 주장질하면서 자기도 울었다. 그 슬픔은 아버지를 생각하는아들의 슬픔이기도 했지마는 ‘학문’을 조상하는 ‘무지’의 슬픔이기도 했다. ‘무지’를 경멸해온 ‘학문’의 참회였다.

수택은 방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날이 며칠을 두고 계속되었다. 조카 상태만이 신푸장하게 매일 들에 나갔다. 상태는 아직도 농촌 탈출의 꿈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는 되려 최근에 와서 더욱 그런 결심을 굳게 한 모양이었다.

“너두 생각이 없는 아이지, 할아버지나 생존해 계시다면 또 물라도 집안이 이꼴이 되는데 너만 쓱 빠져나간다면 어떻게 된단 말이냐?”

이렇게 사정을 하듯이 하는 수택의 말에,

“그럼 집에만 엎드려 있으면 뭘해유! 작은아버진 몰르시니까 농사 농사 하시지만 제 땅 가지구 농살 지어두 안 되는게 남의 땅 소작을 해서 우리 십여 명 식구가 먹구 살어유?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데는 수택이도 더 할말이 없었다. 간다면 어디고 보내리라 했다. 나는 도시에서 기어들었으니까 너는 한번 도시로 나가보아라 했다.

그래서 네가 다시 농촌으로 기어들든지 내가 다시 도시로 기어나가든지 사람은 체험을 해보아야 안다했다.

“그러나 난 이 동리에서 단 한 발자욱 움찍두 않을 게다!”

했다, 아버지가 잃어버린 땅을 찾는 것이 내 일생의 사명이다. 매 평에 일원은 고사하고 오원이 간다더라도 찾으리라 했다. 아버지는 내게 그것을 당부하고 가셨다. 믿고 가셨다. 아니 그렇게 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까지도 바치셨다.

이 아버지가 어디가 무식하냐! 했다.

‘어디로 보나 소설줄이나 끼적이는 자식한테 멸시를 받을 존재냐!’

수택은 벽에 걸릴 노출(露出)도 분명치 못한 김 영감의 사진을 쳐다보며 이렇게 마음에 부르짖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방안에 엎드려 있는 동안에 수택은 금후의 방침을 딱 세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장만했던 땅을 찾자는 것이었다. 지금 시가(時價)로 약 삼천원어치다. 지금그의 수중에는 약 팔백원의 현금이 있었다. 신문사의 고료가 마저 왔었고 장례에는 이백원 돈도 다 못 들었다.

그러나 그중 약 반은 부의로 들어온 것이었다. 이 팔백원이나마 살리리라 했다.

그는 먼저 현재 이 집을 조그만 집과 바꾸기로 했다. 장터 한복판에 이렇게 거추장스런 집을 지니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제 지단이 끼어 있으니만큼 육칠백원 시가는 되었다. 이것으로 구석진 집을 산다면사오백원은 떨어졌다. 일천삼백원이면 우선 아카시아 숲 앞 여덟 마지기 값은 된다.

이렇게 작정을 하고 그는 가족회의를 열었다. 이야기가 그의 계획대로 아물어지자 그는 심구영을 찾았다. N면으로 통하는 신작로가 그의 바로 문전을 기점(起點)으로 하고 뚫릴 것이요 장터에서 면소로 들르는 길도 그의 집 앞을 지나갈 계획이고 보니 현재 심구영네 상점보다는 어느 모로 보나 자리가 날 것이다.

처음부터 잠자코 그의 계획을 듣고만 있던 심구영은,

“참 장한 일이시오! 훌륭한 생각이시오!”

이렇게 찬성을 해주었다.

“내 처지가 이렇게 되어 내가 자진해서 청하는 게니만큼 정당한 값을 달라는 것두 아닙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셔서 편의만 좀 보아주십시오.”

수택이가 말한 값은 칠백원이었다.

“긴상두 잘 아시겠지만 그 자리가 그만 값은 됩니다. 첫째 제 터전이 삼백 평이나 되구 집이 그만하겠다 터두 좋지요. 그 값에 내맡아드리리다…”

거짓말처럼 이야기는 순조로이 진행이 되었다. 그럴밖에 없었다.

심구영은 영리(營利)에 눈이 밝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어떻게? 가다라하상이 그 논을 되판답디까?”

“건 아직 못 알아봤습니다. 허지만 내 심경을 잘 이야기하구 한번 졸라보렵니다.”

“글쎄, 그 사람이 놓을까? 땅이 원근 좋아노니까!”

이렇게 말말끝에 읍내 새 지주의 면장과의 사이가 퍽 절친한 사이라는 말이 나서 그는 먼저 면장을 찾았다. 면장은 이전 철도국에도 다년간 있은 일이 있는 비교적 지식계급이었다. 성은 그는 처음 보는 경(慶)씨였다.

경 면장과는 일찍이 안면도 있는 터고 김 영감과도 자별한 사이였다. 이 동리서 김 영감을 존경할 사람도 오직 그뿐이었다. 그러니만큼 이야기는 훨씬 쉬웠다, 그도 역시 수택의 계획에 감동한 빛으로,

“긴상 같은 청년이 우리 면에 자꾸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턱도 없이 농촌들을 싫어해서 큰 탈입니다. 이것은 단지 우리 면에 한한 것이 아니고 우리 국가로 본대도 크게 찬동할 만한 일입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런 의기를 농촌 청년이 본받도록 해달라고 당부당부하며 신 지주한테 보내는 긴 편지도 써주었다.“기다하라상두 기꺼이 응할 겝니다. 값도 산 값으루 넘기도록 잘 말했습니다. 만일 안 된다면 내라두 가 드리리다. 내 말이면 못 떼겠지요.

나와는 전에 철도국에 있을 적부터의 친구인 터니까… 하여튼 긴상 같은 분이 우리 농촌 진흥 운동에 좋은 표본이 되어주어야 하지요…”

이렇게 해서 며칠 수 수택은 심구영에게서 현금 칠백원을 받아쥐었다.

그러나 그가 현금을 받기 전에 그의 집은 심구영의 손을 거치어 벌써 제삼자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의 집 일대가 장차는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그 자리에는 자동차부가 설치된다는 것도 그는 모르고 있었던 터였다.

칠백원은 며칠 새에 오백원의 새끼를 쳤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모르는 수택은 심구영에게 그 호의를 눈물이 나게 치하를 했다. 사흘 후 수택은 착착 개커서 버들상자 속 깊이 간직해두었던 여름 양복을 꺼내 입었다. 만 일년 만에 입는 양복이었다. 읍에 가서 새 지주를 만나보려는 것이다.

그는 아내가 신발에 손질을 하는 동안에 역시 양복을 입고 안마당 한가운데 넋잃은 사람처럼 서 있는 상태를 방안으로 불렀다.

“너 언제 올지도 모르니 할아버지께 다녀가거라. 나두 가뵙겠다.”

이렇게 조카한테 말을 하고 자기도 일어서 제청으로 들어갔다. 절을 하는데 그대로 눈물이 좌르르 쏟아진다. 아버지가 한 달만 더 살아 계셨던들 싶었다.

여름 햇살은 아침부터 뜨겁다. 그는 모자를 든 채 자전거를 끌고 신작로로 나왔다. 자동차 정류소 앞에는 그의 가족이 벌써 죽 모여서 있었다.

상태가 기어코 서울로 가는 것이었다. 그의 수중에는 돈 백원이 들어 있다. 그 돈 백원이 없어져도 직업을 못 얻는 때는 두말없이 돌아온다는 조건부로 수택은 몇몇 친구한테 편지도 써주어 보내는 것이다.

“그럼 잘 가 있다 오너라. 난 오늘 되돌아와야 할 게니까 떠나는 것 못 보겠다―”

“네―”

하는데 상태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히 괸다,

“부디 몸을 조심해!”

이렇게 다시 당부를 하고 자전차에 올랐다. 비탈길이요 면소 앞인 터라 길도 골라서 자전차 바퀴가 그지없이 여하게 돈다.

수택은 발에 힘을 부쩍 주어 페달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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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