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서울대학교 교수 시국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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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위기적 상황을 어떤 사람은 노사 갈등 또는 노정 갈등으로 봅니다만 우리는 다소 견해를 달리 합니다. 이해를 달리하는 집단 사이의 갈등은 쟁점에 따라 항상 일어날 수 있는 성격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현난국의 핵심은 정부와 여당이 어떤 말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날치기의 방식으로 안기부법과 노동관련법 등을 개정함으로써 민주주의의 토대인 절차적 정의를 파괴한 데서 온 것이며, 이로 인하여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와 후퇴가 초래된 데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난국을 상궤의 노사갈등이나 노정갈등을 넘어서 문민정부의 옷을 입은 신권위주의와 양식있는 국민대중 사이의 균열로 파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수많은 지식인, 종교인, 교육자, 중산층, 화이트칼라 등의 분노와 요구를 제대로 파악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개정된 안기부법이 국가안보의 현실을 반영했다거나 노동관계법이 선진국형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는 유의 합리화는 초점을 빗나간 것으로 우리는 파악합니다. 백보를 양보하여 설사 이렇게 이해될 수 있는 면이 있다 하더라도, 절차적 정당성을 상실한 법은 그 자체로 원인 무효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우리는 판단합니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시민이라면 이 점에서 결연해야 한다고 확신하며 이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상황논리에 얽매어 한 치도 전진하지 못하지 않을까 우리는 우려합니다.

법개정 정당성 결여의 두 가지 이유

정부와 여당은 이번의 법개정이 합법적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근본적으로 정당성이 결여되었다고 판단합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국민의 대의기구인 국회의 본회의 개최에 관한 국회법의 절차를 무시하고 집권 여당이 소속의원만으로 새벽에 법을 날치기 통과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국회를 통과했다고 선포된 법개정이 궁극적으로 입법권자인 국민의 주권을 반영했다고 볼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법이 국민 의사를 표현하려면 우선 자유로운 토론이 선행해야 하고 이를 근거로 해서 사회 구성원 사이의 협상이나 타협이나 합의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형성된 타협이나 합의를 하늘처럼 받들고 보호하며 관철하려는 것이 법 제정에 바로새겨진 국민주권의 뜻이라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또 그래야만 법이 사회통합의 매체가 되고 민주주의가 법치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고전적인 명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신한국당은 이번에 국민주권의 법이념을 송두리째 유린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의 극명한 보기를 우리는 미약하나마 이런 타협의 산물로 볼 수도 있었던 노개위와 정부가 노동관련법 개정안을 집권여당이 최종 순간 주무장관도 모르게 바꾸어 날치기 통과시킴으로써 노동계의 심대한 반발을 불러 일으킨 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법을 보는 집권층의 태도가 놀라울 만큼 과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입법권자인 국민의 뜻은 안중에도 없고 권력만 있다면 막후 로비에 따라 마음대로 법을 고칠 수 있다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권위주의적 발상이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민주화에 역행하는 안기부법과 노동관계법 등에 대한 우리의 견해

이런 후진적인 정치문화를 가지고 선진적인 노동관계법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가당착적이라고 우리는 봅니다. 우리는 이제 이런 권위주의 유산과 확실히 선을 그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이번의 법개정이 무효라고 선언합니다.

민주주의의 요체가 법치주의에 입각한 국민주권의 실현에 있다고 할 때 법의 정당성 확보는 민주주의의 핵심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법이 정의와 인권을 구현하기보다는 정치권력의 도구로 전락해온 권위주의 시대를 겪어온 우리로서는 문민정부를 맞이하여 참된 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리기를 간절히 소망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해 12월 26일 새벽에 집권당인 신한국당이 소속 의원들만으로 아무런 토론 없이, 야당에 통보도 하지 않은 채 불과 7분만에 안기부법과 노동관계법을 날치기 통과시킨 것을 보고 깊은 충격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민주화의 시대적 요구에 역행하고 적법절차를 유린한 이번 사태는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입법과정의 부당성과 내용의 문제점을 우리의 견해로 밝히고자 한다.

이번에 개정된 안기부법은 국가보안법상의 찬양고무죄, 불고지죄 사건에 대한 안기부의 수사권을 부활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은 1993년 김영삼 정부의 출범 이후 인권 침해의 소지가 많다는 비판을 받아 삭제된 내용을 되살린 것이며, 그 점에서 현정부의 민주화 업적을 스스로 부정한 것이다. 우리는 이번 안기부법 개정이 국민의 자유로운 사상과 표현을 제약하면 민주적 공론의 형성을 크게 저해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다.

또한 노동관계법의 개정은 과거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행사에 장애로 작용해온 독소조항을 거의 그대로 존치시킨 채 정리해고의 요건을 완화하고 변형근로제 등을 도입함으로써 노사간의 힘의 불균형을 더욱 확대하고 노동자의 권리와 복지를 위축시킬 우려가 있음을 염려한다. 이러한 처방은 사회안정을 도모하기는커녕 노사간의 대립과 분열을 초래하며 국제경쟁력에도 역기능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본다. 최근 검찰이 현행법을 내세워 노동자들을 사법처리하겠다는 조치 역시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진실로 걱정하는 것은 법을 권력의 도구로 삼는 잘못된 관행이 문민정부에서도 그대로 답습됨으로써, 정치수준이 더욱 후퇴하고 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법이 국민의지의 표현이 되려면 자유로운 토론과 협상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한국당은 이런 토론과 협상의 결과로 해석될 여지를 다소나마 지녔던 노개위와 정부안을 마지막 순간 주무장관도 모르게 일방적으로 바꾸어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것은 국회 본회의와 개최조건에 대한 하자와 함께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반민주적 처사이며 국민주권의 법이념을 송두리째 짓밟은 것이다. 이번에 통과되었다고 선포된 안기부법과 노동관계법은 완전히 정당성을 상실한 법이며 그에 대하여 국민의 저항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우려의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우리는 정부와 여당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국회법 절차를 무시한 법은 무효이다. 날치기 통과에 대해서 국민에게 사과하라.

2. 공포된 안기부법을 즉각 철회하라.

3. 노동관계법을 국민적 합의하에 정당한 절차를 밟아 개정하라.


1997년 1월 16일

서울대학교 서명교수 일동

서명교수 명단 별첨

인문대학(34)

고원(독문), 권영민(국문), 김영무(영문), 김용덕(동양사), 김은경(서문), 김인걸(국사), 김창민(서문), 김춘진(서문), 김희숙(노문), 노명호(국사), 박낙규(미학), 배영수(서양사), 백낙청(영문), 송기호(국사), 신광현(영문), 안삼환(독문), 오병남(미학), 오생근(불문), 이건우(불문), 이상택(국문), 이선복(고고미술사), 이현희(국문), 윤원철(종교), 장재성(불문), 주경철(서양사), 최감수(서양사), 한정숙(서양사), 홍기선(영문), 홍재성(불문)

사회대학(35)

김세균(정치), 김수행(경제), 김완진(경제), 김진균(사회), 김태성(사회복지), 김흥우(정치), 박명근(사회), 박삼옥(지리), 박승관(신문), 박찬욱(정치), 서봉연(심리), 송호근(사회), 신용하(사회), 양동휴(경제), 양승목(신문), 오명석(인류), 오성환(경제), 원호탁(심리), 유근배(지리), 이광규(인류), 이근(경제), 이장호(심리), 이재열(사회), 이준구(경제), 이지순(경제), 임종철(경제), 장경섭(사회), 전경수(인류), 정운찬(경제), 정진성(사회), 조흥식(사회복지), 하용출(이교), 한상진(사회), 황인수(정치), 안병직(경제)

자연대학(13)

고철환(해양), 국양(물리), 김두철(물리), 김선기(물리), 김영식(화학), 신동우(수학), 신석민(화학), 이명균(천문), 이창복(해양), 장회익(물리), 최무영(물리), 최우갑(대기과학), 황준묵(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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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기계공학), 김윤영(기계설계), 김현철(건축), 박희재(기계설계), 성원용(전기공학), 신효철(시계설계), 유한일(재료공학), 최기영(전기공학)

농생대학(4)

김완배(농경제), 연여창(산림자원), 성진(농화학), 최영찬(농업교육)

사범대학(9)

김광해(국어교육), 김신일(교육학), 소광섭(물리교육), 손봉호(사회교육), 심봉섭(불어교육), 양호환(역사교육), 우용제(교육학), 윤여탁(국어교육), 이애주(체육교육)

법과대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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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익(의학), 김창업(의학), 안윤옥(의학), 황상익(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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