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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집]

아홉 시에서 아홉 시 반까지, 현저동 사식 차입집 앞까지, 차 한 대만 꼭 보내게 해 달라고, 며칠 전부터 신신 부탁이지만, 바쁜 틈에 혹시 잊어버리지나 않을까 근심되어서, 최무경(崔武卿)이는 사무실을 나오려고 할 때에 다시 한 번 자동차 영업소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마침 말하는 중이었다. 다른 또 하나의 전화 번호를 불러도 통화 중이었다. 수화기를 걸고 의자를 탄 채 바람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고, 캘린더를 무심히 스쳐 보고, 그리고는 다시 수화기를 쥐었으나, 그 때에 전화는 밖으로부터 걸려 와서, 책상 밑에 달린 종이 요란스럽게 울었다.

"야마도 아파트 사무실이올시다."

하고, 언제나 하는 버릇대로 먼저 지껄여 모았으나, 이내,

"네, 저올시다. 제가 최무경이에요. 안녕하신가요? 네,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네? 내일루요?"

그리고는 다시 대답을 이어 나가지 못하고, 그저 들려 오는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그는 탁상 전화를 틀어 쥐듯이 하고 입을 바싹 들여 댄 뒤,

"내일루 연기라지만, 그러다가 아주 틀어지는 거나 아닌가요?"

하고 따지듯이 물어 본다. 그러나 한참 만에,

"글쎄요. 그렇다면 몰라두요. 무슨 본인의 잘못 같은 걸루 일이 시끄럽게 되는 건 아니겠지요? 네, 그럼 안심하겠읍니다. 내일은 틀림없겠죠? 그럼 그렇게 알구 있겠읍니다. 안녕히 계세요."

맥없이 전화를 끊고 멍청하니 의자에 기대어 본다.

클라이맥스를 향해서 한 장면 한 장면 접쳐 올라가던 판에 필름이 뚝 끊어진 때처럼 허파의 공기가 쑥 빠져 버리는 것 같다.

내일 이맘때까지 스물 네 시간, 눈이 뒤집힐 듯이 바쁘던 며칠이 있은 끝에, 갑자기 찾아온 텅 빈 공간 같은, 예측하지 않았던 시간이다.

회전 의자여서 분김에 발뿌리로 책상 다리를 차면, 몸은 핑그르르 돌아가 저절로 강 영감을 보게 된다.

강 영감은 꾸부리고 앉아서 손주딸이 날라 온 벤또에 차를 부어서, 훌훌 소리가 나게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으나, 전화 받는 뭄으로 대강한 사연을 짐작은 하였다는 듯이, 힐끗 젊은 여 사무원의 얼굴을 쳐다보곤,

"그저 재판소 일이란 게 그렇다니께. 제에길."

그러더니 먹은 그릇을 덜그럭거리며 치우고 나선,

"그래, 또 무슨 까닭인구?"

하고 뻐끔히 주름살이 구긴 얼굴로 무경이를 바라본다.

"전들 무슨 심판인지 알 수 있세요. 변호사의 말은 예심 판사가 아직 검사의 승낙을 못 받았답니다. 언제는 검사의 승낙을 얻기에 힘이 들구 애가 씨었다더니. 나와야 나오는 게지, 변호사의 말이라구, 제멋대로 주어 섬기는 걸 믿을 수가 있어야죠. 그렇다구 하나하나 따져 볼 수도 없는 일이구……"

"아무렴. 그런 일이란 건 으레 그런 법인걸. 이편은 바쁘지만 저이들야 무어 바쁠 것 있어. 제 볼일 다 보구 생각 나믄 뒤적거려 보는걸. 그러나 머, 낙심허실 것 없이, 여태 기대렸으니께 그깟 것 하룻쯤야. 또 그래야 만나 뵈시는 데 재미두 더 허구, 흐흐흐……"

이가 군데군데 빠져서 입김이 샌다. 선량한 늙은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쓸쓸하고도 정다운 생각이 들어서, 무경이는 빙그레 웃음을 입술 위에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웃음은 강 영감과의 오랜 생활에서 거의 습관처럼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속으론 딴 것을 희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집으로 가서 어젯밤의 되풀이를 또 한 번 치를 것인가. 저녁은 외식을 하고, 나오는 분을 맞이다가 아파트에 안내한 뒤, 일러도 열 한 시나 자정이 되어야 집으로 들아오게 될 것이라고, 아침에 나올 때에 일러 두었는데……역시 간단히 무어든간 사 먹고 가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무경이는 택시 영업소로 전화를 걸고 사무실을 나와서 구내 식당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에 강 영감이 있듯이 식당에는 산쨩이라는 어린 소년이 있어서, 그는 이 안에 들어설 때마다 반가운 표정을 짓게 된다. 새로 빨아서 깨끗이 다린 흰 옷을 입은 어린 소년은,

"어유, 최 선생님이 어쩐 일이유. 저녁 진지를 식당에서 다 잡수시구."

그의 뒤를 달랑달랑 쫓아오면서 생글거리기 시작한다.

무경이는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서, 눈이 마주친 손님들께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데, 상 머리에 서서 나막신 끝으로 시멘트 바닥을 울리면서 말끄러미 무경이의 눈동자를 지키고 섰던 산쨩은,

"사진 구경 가실려구. 어딘지 맞치리까?"

하고 똥구란 눈을 삼빡거린다.

"사진 구경은 누가 산쨩인 줄 아는 게군."

유쾌로운 얼굴로 백을 식탁에다 놓고 웃어 보이니까.

"오오라, 참, 부민관, 내 참, 음악횐 걸 까빡 잊었네."

쉴 새 없이 핑글핑글 돌아가는 전기 시계를 펀뜻 쳐다보더니,

"늦었수. 어서 가세야지. 무어 잡수실려? 라이스모논 카레에하구 하야시만 남았는데. 빨리 될 걸룬 가께우동."

무경이는 소년의 지껄이는 것이 재미나서,

"그럼 가께우동 하지."

마치 음악회나 가려는 것처럼 대답해 보내는 것이다.

음악회――참말 음악회의 표를 미리 사서 간직해 두었던 것을 지금서야 생각한다. 까빡 잊었었다. 첫날 치였으니까, 벌써 시효도 넘었다.

백에서 속갈피를 뒤적이니까 한편 구석에서 티켓이 나왔다. 일 년에 잘 해야 한 차례씩이나 얻어 들을 수 있는 교향악단의 밤이었다. 지금쯤은 차이코프스키의 파테티크가 연주되기 시작하였을 얷을. 그는 요즘 며칠 동안 제 정신이 어디로 팔려 버렸던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해 본다. 그러나 기뻤다. 어떤 숭고한 일에 정성을 썼다는 만족이 그의 마음을 느긋하게 어루만져 준다. 음악회 티켓 같은 것, 열 장 스무 장이 무효로 되어 버려도 그는 도무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음악회라면 하찮은 학생들의 연주회에도 빠지지 않고 쫓아다니던 것을……

우동이 왔다. 두어 젓가락으로 빨간 국물만 남는 깜찍한 우동 그릇이 오늘처럼 그의 마음에 합당한 때는 없었다. 그는 따끈한 국물을 마시고 식당을 나왔다. 그 길로 삼층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이다. 복도를 돌아서 그는 하나의 도어 앞에서 발을 멈춘다.

방 앞에 서면 언제나 감격이 새로워서 가슴이 울렁거린다.

이 년이 되어 온다. 그런데 아직 예심 종결도 나지 않았다. 예심이 종결되기 전에 보석 운동을 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처음은 면회도 할 줄 몰랐다. 변호사를 대고 차츰 이력이 나서, 졸라 보고, 떼를 쓰고, 계교도 꾸며 보고, 갖은 애를 써서 면회도 비교적 잦아졌고, 그리고 두 달 전부터는 보석 운동에 손을 댈 욕심까지 가져 본 것이다. 그러한 정성이 지금 여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핸드백에서 열소리르 꺼내 잠갔던 문을 여니까, 쌍끗한 꽃의 향기가 몸에 안기는 것 같아서, 그는 그것을 함뿍이 들이마시면서 눈을 감고 한참 동안 문지방에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서편 창으로부터 맞은편 언덕을 넘어가는 낙조가 푸른 문장에 비껴서 은은한 광선이 꽃병이 놓인 나지막한 서가를 비스듬히 비치고 있다. 서가의 두 칸대는 텅 비었으나, 가운데 칸대에는 신간과 새 달의 종합 잡지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그 가운데 경제 연보가 두 책. 하얀 바람벽에는 흰 테두리 속에 들은 수채화가 한 폭. 흰 요를 깔아 놓은 침대는 북쪽 바람벽에 붙어서 누워 있고, 침대 머리맡에 전기 스탠드, 그 밑에 철필과 잉크를 놓은 작은 탁자. 양복장과 취사장이 지금 무경이가 서 있는 옆으로 나란히 설비되어 있으나, 물론 그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훤하게 유리알이 발린 남쪽 창문이 옆으로 하고 간단한 응접 세트와 사무 탁자. 응접 테이블 위에는 화분이 하나.

무경은 구두를 벗고 신장을 열어서, 거기에 들어가 있는 새 슬리퍼를 꺼내어 신고 방 안으로 들어선다. 이 커다란 건물 안에서 그 중 좋은 방이거나, 제일 큰 방은 아니지만, 조촐하게 독신자가 들 수 있을 남향으로 된 아파트의 한 칸이다. 침대 위에 놓인 옷 보퉁이를 한옆으로 밀어 놓고 그 옆에 털석 걸터앉아서, 그는 벌써 한 일주일째나 하루 두세 번씩은 해 보굿 하는 마음과 눈의 작은 절차를 오늘도 세 번째나 되풀이해 본다.

――무어 부족한 거나 없는가?――방 안을 쭉 돌려 살피는 것이다. 옷 보퉁이에는 새 잠옷이 있고, 침대는 이만했으면 쇠약한 몸을 편하게 가로눕힐 만큼은 편안하고, 방 안의 장치도 설비도 만족할 정도는 아니지만 간소한 대로 정성을 다한 것, 오랫동안 새로운 지식에 굶주렸으니 그 동안의 사회 정세의 변동이나 추세나 짐작할 정도의 신간, 경제를 전문하던 터이니 경제 연보의 새것을 두 권, 그리고 복잡한 세계의 분위기나 두루 살피라고 종합 잡지를 사다 꽂았다. 꽃을 한 묶음 화병에 꽂고, 집에서 정성들여 기르던 꽃화분을 하나 탁자에 준비하고……이만 했으면 우선 그를 맞아들이기에 시급한 준비는 된 것이라고 그는 거듭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한참 동안 입술 가에 만족한 웃음을 그러면서 앉아 있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핸드백을 들고 그 안에서 사나이의 회중 시계를 하나 꺼내었다. 커다란 크롬 껍질의 월쌈이 제깍제깍 소리를 울리며 기다란 쇠줄을 끌면서 나타났다. 손에 쥐어 보면 묵직한 것이 믿음성이 있다.

오시형(吳時亨)이가 학생 시대부터 차고 다니던 것이다. 사건의 취조가 끝나고 검사국으로 송치가 된 뒤, 검사 구류 기간 열흘이 지나서 드디어 예심으로 회부가 되어 시형이가 영영 영어의 몸이 되어 버렸을 때, 입고 들어갔던 옷가지와 함께 취하(取下)해 가져온 물건 중의 하나였다. 그 때로부터 이 년 가까이, 이 묵직한 회중 시계는 주인의 품을 떠나서, 언제나 무경이의 핸드백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장침과 단침은 대체 몇천 번이나 빤뜩빤뜩한 흰 판을 달리고 돌았는가. 초침이 한 초 한 초씩 시간을 먹어 들어가는 소리를 물끄러미 듣고 앉았다가 그는 시계를 가만히 제 얼굴에다 부비어 보았다. 차갑다. 그러나 가슴 속에선 누르고 참았던 감정이 포근히 끓어 올라서, 이내 그의 볼편의 체온은 크롬 껍질을 따끈하게 데우고야 만다. 가슴을 복받치는 울렁거리는 혈조를 가라 앉히기 위해서 그는 한참이나 낯을 침대에 묻고 가만히 엎드려 봤다.

어머니에게 저희의 관계를 승인시키기에 얼마나 애가 쓰였는가. 집과 인연을 끊듯이 한 시형의 차입을 대고, 보석 운동을 하느라고 얼마나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고, 뼈가 시그러지도록 일을 하였는가. 그 때문에 직업에도 나서 보았다. 재판소, 변호사, 형무소를 통하는 길을 미친 년처럼 쫓아도 다녔다――

그는 가슴 속으로 맑고도 숭고한 쾌감을 포근히 느껴 보면서 침대에서 낯을 들고 시계를 백에 챙겨 넣은 뒤 방을 나왔다. 내일, 내일 저녁이며, 그러한 정성이 하나의 보답을 받는다……

밖은 벌써 땅거미가 꺼멓게 기어들고 있었다. 아직도 채 식지 않은 공기가 바람에 불려서 훈훈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땀발이 잡히려던 피부엔 넓은 언덕에서 흔들리는 저녁 바람은 선뜩하였다. 북아현정 쪽의 푸른 주택지를 잠시 바라보고 섰었으나, 오랫동안의 습관으로 거리 위에 나서면 그는 늘 바쁜 사람처럼 종종걸음으로 서두른다. 감영 앞, 종로, 안국동, 이렇게 세 군데서나 차를 바꾸어 타는 것도, 어쩐지 분주한 듯이 서둘러 대고 싶은 마음에 합당한 것 같아서, 오늘 저녁의 그에게는 다시 없는 가벼운 흥분으로 즐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화동 골목까지 치마폭에서 휘파람 소리가 날 지경으로 활개를 치며 걸어 올라간다.

――어머니보고도 같이 가시자고 말해 보리라. 처음엔 믿음직 못하다고 한사코 나무랐으나, 그런 것 때문에 이 년 만에 돌아오는 그를 대견하게 맞아 주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인저 누가 뭐래도 장래의 사위가 아닌가. 예식만 갖추면 아들 맞잡이, 단 하나의 어머니의 사위가 아닌가. 어머니도 요즘엔 은근히 기다리고 계셨다. 같이 가시자면 기뻐하실 것이다. 나오는 당자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을 게구……

저희 집 대문을 들어설 땐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엄마 있수?"

하고 응석을 담아서 불러 본다. 꽃화분이 쭈루니 얹히어진 높직이 층계가 진 선반 옆에 선 채 무경은 어머니 방을 향하여 불러 보는 것이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식모 방에서, 이 집에 들어온 지 겨우 한 달밖에 안 되는 식모가 툇마루로 뛰쳐 나오며,

"아이구, 아가씨가 오셨네."

하고, 얼굴에 크림이라도 바르고 있었는지, 당황히 옷고춤을 매만지고 섰다.

"마님은 손님이 오셔서 같이 나가셨는데, 인제 늦지 않게 돋 다녀오신다구서……그런데 아가씬 웬일이세요?"

"내일 저녁으루 연기야."

하고 대답해 주곤 무경은 곧바로 제 방문을 열었다.

"대야에 물 좀 떠 놔 ! 그리구 밥 있어?"

식모는 댓돌에서 해진 고무신을 발뿌리에 꿰면서 뜰로 내려선다.

"네. 그래두 찬이 씨언찮으신데……아가씬 왜, 저녁, 밖에서 잡수신다구 허시군……"

수도에서 물을 받아서 놋대야를 대청으로 나르고 비루곽과 수건을 갖다 놓고는 부엌으로 들어간다.

무경은 낯을 씻었다. 다시 제 방으로 들어가서 볼편에 크림을 바르고 있는데,

"진지상 이리루 디릴까요?"

하고 식모가 문지방 밖에서 엿보듯 한다. 안방 어머니 방에서 함께 모여서 먹는 것을 알고 있는 식모는, 밥은 역시 그 속에서 먹는 것을 정측으로 생각하고라도 있는 것 같다.

"그래. 내 인저 건너갈께. 어머니 방으루 딜여다 놔."

"찬은 머, 굴비허구 장아찌밖엔 없는데 어떻거실까……"

하고 걱정하는 것을,

"그게문 되지, 찬물에 풀어서 한술 들면 될걸 뭐."

분첩으로 볼편을 두어 번 뚜들기고 무경은 어머니 방으로 건너가서 상 앞에 주저앉았다. 밥술을 막 들려고 하는데, 길마리 머릿장 밑에 보지 않던 부채가 한 자루 있었다. 무경은 그것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아이, 손님이 부채를 노시구 가셨네."

무경의 눈길을 따라가 본 식모는 대청 마루에 엎드리듯이 턱을 받치고 주인 아가씨의 진지 드는 모양을 바라보려다가, 눈에 띈 부채에 대해서 그러한 설명을 들려 주었다. 그러나 벌떡 상반신을 일으키더니 부채를 들어서 책상 위에 올려놓고 다시 뜰로 나가 버렸다.

무경은 술을 든 채 밥그릇으로 손을 옮기진 못하였다. 그는 술을 놓고 일어서서, 지금 식모가 챙겨 놓고 나간 부채를 가져 다 펼쳐 보았다. 틀림없는 사나이의 소유물이었다. 곱게 색채를 써서 그린 산수화가 있고, 위 하곡대인청상( 爲河谷大仁淸賞)이라고 쓴 밑에 청산(靑山)이란 화가의 낙관이 찍혀 있다. 이것으로 보아, 청산이란 화가가 그림을 그려서 하곡이란 분에게 선물로 보낸 부채라른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부채의 임자는 하곡이란 아호를 가진 분이다. 그러고 어머니는 이 하곡이란 분과 함께 외출하신 것이다――그런 것을 알 수 있었으나, 무경이는 첫째 하곡이란 분을 알지 못하였다.

"하곡? 하곡."

하고 입 안으로 두어 번 뇌어 봤으나 그러한 아호와 함께 나타나는 환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낯도 잘 알고, 이름도 잘 아는 분이면서도, 내가 그이의 호를 모르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부채를 다시 책상 위에 놓은 뒤에 밥상 앞으로 돌아왔고,

"많지두 않은 찬에 어란을 잊었었네."

하고 변명하듯 하면서, 가지고 들어온 식모의 손에서 접시도 그대로 묵묵히 받아 놓았으나, 어쩌지 마음은 말끔히 가시지 않았다.

어머니와 같이 나간 손님이 어떻게 생긴 분인가를 식모에게 물어 보려다가 그것도 그만두었다. 그는 잠시 멍청하니 상 앞에 앉아 있었으나, 식모에게 눈치 채일까 저어하며, 이내 밥통을 열고 물대접에 밥을 말았다. 그리고는,

"나 혼자 먹을께 나가 있어."

하고 식모도 밖으로 쫓아 버렸다.

마른 반찬에 얼려서 두어 술 떠 넣고 그는 다시 방 안을 살펴보지 않을 순 없었다. 장농과 의걸이, 문갑, 책상, 책상 위의 성경책들, 모두 다 놓았던 자리에 놓여 있다. 그러나 책상 밑을 들여다보았을 때 무경이는 다소 마음이 띠끔했다. 치레 거리로 놓아 두던 놋 재떨이에 피우다 버린 담배 꽁초가 하나 부비어 꽂혀 있기 때문이다. 손님은 담배를 피우는 분이었다는 것을 그것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고 그것은 결코 대수롭지 않은 발견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아는 분으로서 담배를 피우는 이는 무경의 기억 속에는 들어가 앉아 있지 않았다. 이 십여 년 동안 예수교 풍속에 젖어 온 분이고, 그 속에서 청상 과부를 지켜 온 어머니로서 끽연의 습관을 가진 사나이 손님을 가지고 있었을 리 만무하다.

"다 먹었으니께 상 치어."

하고 외치듯 하고는 무경은 제 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부채, 하곡, 담배――이런 것이 함께 엉켜 돌면서 종시 그의 머리를 놓아 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의심은 다시금 얼마 전에 경험한 한 가지 사건을 그의 머리 속에 불러 내는 것이었다.

달포 전의 일이었다. 화창한 초여름의 공일날, 벌써 몇 해째의 습관에 따라 무경이는 오랜만에 만나는 휴일을 집에서 책을 읽었고, 어머니만 예배당에 가신다고 집을 나갔었다. 오정이 좀 넘으면 으레 예배당에서 돌아오셨으므로, 그는 돌아오시는 어머니와 함께 점심을 먹고, 잠시 본정이라도 다녀오려고 그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쩐 셈이신지 한 시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강설이 길어져서 예배 시간이 오래 되는 것이라고 얼마를 더 기다렸으나 두 시가 되어도 종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무경이는 혼자서 점심을 먹고 집을 나왔다. 안국동 네 거리를 거진 나왔는데, 예배당 전도 부인을 길에서 만났다.

"오래간만이올시다."

하고, 이 근년에 신통치 않아진 '타락된 교인'은, 목사도 전도 부인을 만나면 다소 면구스러워져서 그다지 기다란 인사를 늘어놓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면 도회인답게 경우가 빠른 목사나 전도 부인도 이내 무경의 태도를 눈치 채고, 그 이상의 긴 수작을 늘어놓으려고 하지 않았었으나, 오늘만큼은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어머님이 예배당엘 안 오셨게 무슨, 몸이래두 편치 않으신가 해서, 난 있다 저녁녘에 잠시 들려 볼려던 참인데……"

하고 무경이를 붙들어 세우려 들었다.

"아뇨, 별일 없으신데, 그리구 어머닌 예배당에 가신다구 오전에 나가셔서 여태 안 들어오셨는데요."

그러나 그 이상 이야기를 연장시키고 싶지 않아서,

"아마 도중에서 누굴 만나셔서 예배당에두 못 들리시구 어데 급한 일이 있어 그리루 가신 게구먼요."

하고 간단히 처치해 버렸다. 그러니까 전도 부인도,

"글쎄 그러신 게구먼."

하고 가 버렸다.

초여름의 태양이 쨍쨍하고 유쾌해서 전차도 안 타고 본정까지 걸어가면서도 무경이는 그것에 관해서 별로 깊은 생각은 품어 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볼일을 보고 그는 두어 시간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그 때에도 돌아와 있지 않았다. 참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 해서 궁금했으나, 어머니는 해가 질 녘에야 낯이 좀 발그레하니 끄슨 것처럼 되어서 총총한 발걸음으로 돌아왔다.

"가정 심방에 같이 따라 나섰다가 진력이 났다."

하고 묻기도 전에 어머니는 변명한다. 무경이는 깜짝 놀라 어머니의 낯을 건너다보지 않을 순 없었다. 가정 심방? 예배당에도 안 가셨던 분이 전도 부인과 목사와 함께 가정 심방이라니 어떻게 하시는 말씀일까? 어머니는 그 때 옷을 벗어서 옷장 안에 들여 걸고 있었으므로 다행히 딸의 변해진 눈초리와 놀란 표정을 눈치 채진 못하였으나, 무경이는 한참 동안 마루 위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굳어진 조각처럼 서 있었다. 다시 어머니가 마루로 나오면서,

"난 김 장로 댁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너희들이나 어서 먹어라. 그러구 얘, 나 물 좀 다우."

하고 서둘러 댈 때엔 무경이는 낯을 돌리고 딴 쪽을 향하여 일부러 어머니의 얼굴을 피하였다. 어머니의 하는 말이 지어 낸 공연한 거짓인 걸 아는 바엔, 당황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려고 벙뗑하니 서둘러 대는 어머니의 표정을 정면으로 추궁하기가 겸연쩍은 것이다.

어머니는 어디를 갔었기에 이렇게 나를 속이시는 것일까――따져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일 것 같으면서도, 홀어머니의 자식으로서 믿고, 의지하고, 응석을 부려 오던 어머니인만큼, 자기를 속였다는 그것 한 가지 사실만으로 그는 한없이 쓸쓸하고 슬퍼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뒤엔 그것을 깊이 기억하고 있지도 않았었지만, 그 때로부터 달포나 지내었을까 한 지금, 추측할 수 없는 사나이 손님이 어머니와 같이 외출을 하였다는 사실에 부딪치면, 민첩한 처녀의 예감은 벌써 어떤 길하지 못한 사태에 대하여 생각의 촉수를 뻗어 보게 되는 것이다.

무경이는 제 방에 와서도 일손이 잡히질 않아서 멍청하니 책상머리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어젯밤처럼, 세상에 나올 오시형이를 생각하면서 즐거운 환상을 향락하고 있을 마음의 여유도 생겨나지 않는다. 상상력이 뻗을 수 있는 턱까지 공상을 거듭하면서 사정의 이면으로 파고들려 애써 보나, 엉크러진 생각이 붙드는 결론은 언제나 그의 마음을 쓸쓸한 구렁텅이로 떨어뜨리고 만다. 그럴 때마다 그는 다투기나 하듯이 머리를 흔들었다――설마 어머니가……그럴 리는 없다. 나 하나를 믿고 청춘을 짓밟아 버린 어머니가 아닌가. 모든 잡념을 털어 버리고 유혹의 손을 물리쳐 버리기 위해서, 젊은 감정과 정서를 송두리째 뜯어서 파묻어 버리기 위해서 살림에 군색지는 않은 처지면서 스스로 원하여 병자를 다루는 직업 가운데 자기의 위치를 선택하였던 어머니가 아니었던가. 스물 다섯의, 서른의, 서른 다섯의, 어려운 고비를 성스럽게 넘기고 사십의 고개를 이미 넘어 버린 어머니가 설마 그럴 리야 있는가――

제 생각을 채찍질하고 제 마음에 모욕을 주면서 어머니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렸으나, 열 한 시가 가까워서 어머니의 발자국 소리가 대문 밖에 들릴 때엔, 그는 기계적으로 전기 스탠드의 줄을 낚아서 불을 끄고 캄캄한 방 속에 숨어서 어머니의 얼굴과 마주 대하기를 스스로 피하여 버렸다. 식모가 어머니에게, 그가 일찍이 돌아오게 된 사연을 아뢰는 것을 귓결에 들으면서도, 그는 귀를 틀어막듯이 하고 방바닥에 엎드려서 숨을 죽이고 어깻죽지를 가느다랗게 떨고 있었다.

2[편집]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끝이 없이 뻗어 나간 것 같은 붉은 벽돌의 높직한 담장에 위압을 느끼듯 하면서, 불광이 흐릿한 굳이 닫힌 출입구 앞에서, 최무경이는 벌써 한 시간 동안이나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너무 일찍이 찾아왔었다. 그러나 다른데서, 언제라고 꼭 작정이 없는 시간이 오기를 멍청하니 보내고 있을 수는 없어서, 그는 해가 그믈그믈할 때 아파트의 구내 식당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고는 곧 영천행의 전차를 잡아타고 예까지 쫓아와서, 이렇게 혼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내왕도 드문 언덕이었으나, 그가 와서 기다리고 있는 한 시간 남짓한 동안엔, 오늘 검사굴에서 간단한 취조를 마치고 새로이 이 곳에 입소하는 피의자의 패거리와, 공판정이나 예심정에 취조를 받으러 나갔던 피고들을 태운 자동차가, 두세 차례나 이 커다란 문을 드나들었고, 낮일을 여태까지 보고 늦게야 집으로 돌아가는 간수들도 작은 문을 열고는 안으로부터 꾸부정하니 허리를 꾸부리고 불쑥 양복 입은 몸뚱어리를 나타내곤 하였다. 이럴 때마다 문 열고 닫는 소리는 깜짝깜짝 무경의 신경을 때리고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 년 가까이 차입을 하느라고 드나든 관계로 그 중에는 안면이나 어렴풋이 있는 간수도 있었으나, 문 밖에서 만나면 그들은 언제나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지나치곤 하였다.

밖으로부터 들어갈 사람이 다 끝났으니까, 인제 안으로부터 석방되는 사람이 나올 시간도 되었을 게다, 혹시 오시형이를 석방하라는 검사와 예심 판사의 영장을 아까 재판소에서 돌아오던 간수 부장의 커다란 가방이 가지고 들어간 것이나 아닌가, 지금쯤은 오랫동안 친숙해진 미결감의 한 방에서 영장을 받아들고 밖으로 나올 준비에 바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이런 공상에 취하였다가, 덜카당 하고 문에서 쇠 여는 소리가 나면 그는 깜짝 놀라서 그편으로 쫓아가 보곤 하였으나 그 때마다 문으로 나타나는 것은, 간수거나 사식집 사환 아이거나, 그런 사람들이어서 그는 번번히 속아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아홉 시가 넘어서 한참이 되니까 부탁하였던 자동차도 왔다. 자동차가 세가 나는 요즘 같은 때에 오랜 시간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미안해서, 그는 자동차에서 내려서,

"아직 시간이 멀었읍니까?"

하는 운전사에게로 가까이 가며,

"인제 얼추 시간이 되었을 거야요. 미터를 돌려서 시간을 계산해 주세요. 바쁘신데 자꾸 무리를 여쭈어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머, 딱이 정한 시간이 아니니까 따루 도리가 있어야죠. 대개 아홉 시 가량이면 나올 수 있다니까 인제 얼마 기다리지 않을 거예요."

자꾸만 시계를 불에다 비추어 보면서 운전사에게 미안의 변명을 늘어놓아 보는 것이었다. 아파트에서 특약하고 쓰는 곳이 어서 안면이 있는 운전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운전대에 올라가선 카드를 들고 연필로 무엇을 끄적거려 보고 앉았다. 미터의 시계가 짤각거리다가 딸깍 하고 십 전씩 넘어서는 소리가 조용한 가운데서 무경의 초조한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러나 십 분이 넘고 이십 분이 되어도 아무러한 소식이 없었다. 이러다가 오늘도 또 헛물을 켜는 것이나 아닌가――그렇게 생각하면 꼭 그럴 것만 같이 생각되어 그는 더욱더 초조하게 바지바지 타는 심정을 누를 길이 없었으나, 누구에게 물어 볼 수도 없고, 저만큼 전차길 있는 데까지 뛰어내려가서 변호사한테 다시 전화를 걸어 보고 싶은 조바심까지 생겨나는 것을 인내성 있게 안타까이 참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어떤 양복 입은 신사가 하나 휘우청휘우청 올라오고 있었다. 맥고자를 벗어 들고 조끼 입지 않은 가슴을 부채질하면서 자동차의 옆을 지나다가 가벼운 양장으로 몸을 꾸민 무경이를 발견한즉, 그 곳으로 가까이 오면서,

"당신 누구요?"

하고 퉁면스럽게 물었다. 미처 대답할 말이 없어서 멍청하니 서 있으려니,

"당신 이름이 무언가 말요?"

하고 신사는 다시 제 물음을 설명하였다.

"최무경이에요."

"최무경? 누구 나오는 걸 기대리구 있소?"

"네. 오시형이란 사람이 보석으로 나온다구 마중 왔읍니다."

신사는 수첩을 꺼내 들고 불빛 밑으로 무경이를 오라고 하였다.

"나는 서대문 경찰서 고등계에 있는 사람인데 성함이 누구라구 했지요?"

그리고는 무경이가 말하는 대로를 수첩에다 옮겨서 썼다.

"주소는 화동정……× 십 오 번지."

그렇게 나직이 흥얼거리다가,

"오시형이가 당신의 무엇이 됩니까?"

하고 말한다. 무경이는 돌연한 물음에 잠시 말문이 막힐 듯이 되었으나 이내,

"약혼한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러니까 형사는 한참 묵묵히 붓방아를 찧고 있다가,

"나이엔노쯔마(내연의 처)와는 그럼 다른 셈이죠?"

하고 물었더니, 대답도 별로 기다리지 않고 무어라고 수첩에 기록하고 있었으나,

"연령은요?"

하고 또다시 질문을 던졌다.

"스물 넷입니다."

"그럼, 오시형이가 나오면 이 주소에 있게 되는가요?"

삐끔히 무경의 낯을 건너다본다.

"아니올시다. 죽첨정에 있는 야마도 아파트 삼층 삼백 이십삼 호실에 있게 되겠읍니다. 바루 경찰서에서 마주 바라다뵈이는……"

그러나 형사는 연필을 든 채 머리를 끼우뚱하고 있다가 다시 무경이를 쳐다본다. 어째서 거처할 곳이 그리로 되는가를 채 이해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무경이는,

"아직 예식을 올리지 않았다구 조선 풍속에 따라 그 때까지 아파트에 드는 겁니다."

하고 설명을 첨부하였다.

"그럼, 이 아파트에는 아무도 같이 있지 않는 거지요?"

"네."

"그럼 좀 곤란한데요. 이렇게 되면 당신이 책임 있는 신원의 책임자가 되기가 힘들게 됩니다. 물론 자기가 저지른 사건에 대해서 개전(改悛)의 빛이 확실히 나타났으니까 재판소에서두 보석 같은 걸 허가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일단 형무소 밖으로 나오면 책임은 그 시가부터 경찰에게로 옮겨지는 거니까요. 만약에 행방이라도 자세치 않아지는 경우가 생기면 큰일이 아니여요? 똑똑한 인수자가 없으면 경찰서에서 당분간 신원을 보호해 줘야 합니다. 주소나 다른 당신을 믿고 미가라(身柄)를 석방하기는 힘들지 않습니까. 형식상이로래두……"

"제가 낮에는 거기서 사무를 보고 있읍니다."

하고 무경이는 다시금 생기는 난관을 넘어서려고 열심한 태도로 말해 본다.

"그런게야 무슨 조건이 될 수 있읍니까?"

하고 미소를 띄우더니 잠시, 어떻게 하나? 하는 자세로 머리를 끼우뚱하고 생각한다.

"못처럼 재판소에서 허락해서 세상에 나오는 분이고, 또 몸도 몸이려니와 그만큼 판사나 검사도 인격을 신용하고 석방하는 것이니까, 나오는 날로 불쾌스럽게 다시 유치장 잠을 재운다든가 해서야 피차에 유쾌하지 못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건 법측상 위법이지만 내일 안으루 아파트의 책임자라든가, 누구, 한 주소에 사는 분을 보증인으로 정해서 알려 주시오. 그렇게 한다면 오늘 밤으루 최 선생을 신용하고 그대로 데려내다가 맡겨 버릴 터이니까요. 내일 아침에 보고서를 작성해서 주임께 바쳐야 하니까 그 전에 알려 주십쇼."

"아이, 고맙습니다. 내일 아침에 말씀하시는 대로 하겠읍니다."

하고, 마치 이 형사가 오시형이를 석방해 주는 권리를 가진 거나처럼 무경이는 그에게 대하여 감사의 마음을 표하여 보였다.

"그럼, 잠간 동안 기대리십쇼. 대개 준비하구 있을 테니까 인제 들어가서 곧 데리고 나오죠."

하고 수첩을 접어 넣고 문 있는 대로 걸어가는 뒤에서, 무경이는 다시 공손히 머리를 수그리었다.

형사는 문지기 간수에게 안내를 구하고, 문이 열려서 이내 안으로 사라졌다.

"인제 곧 나온답니다. 경찰서에서 오질 않아서 이렇게 늦었던가 봐요. 너무 기대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무경은 다시 운전사에게로 와서 사례의 말을 건넸다.

이러구러 한 십여 분이 지난 뒤에 형사와 함께 양손에 짐을 들고서 휘뚤거리며 시형이가 문 밖에 나타났다. 짐이 많아서 문 안에 섰던 간수가 몇 차례씩 내보내 주는 것을 시형이는 허리를 꾸부리고 받아서 옮겨 놓고 있다. 무경이와 운전사는 그 편으로 쫓아갔다. 운전사는 무거운 책 꾸러미를 양 손에 들고 그것을 자동차로 날랐으나, 무경은 손으로 짐을 거들 생각도 미처 못하고 그 곳에 서 있는 오시형이를 잠시 멍청하니 바라보고 있다. 시형이도 흐릿한 불광 밑으로 잠시 무경을 건너다 보았으나, 이내 형사를 향하여,

"그럼, 그렇게 하죠."

하고 말하였다. 그러니까 형사는,

"최 선생, 틀림없도록 해 주시오. 난 그럼 여기서 갑니다."

하고 무경이 쪽만 바라보며 맥고자를 잠깐 들었다 놓고 그 곳으로부터 언덕 밑을 향하여 사라져 없어졌다.

짐을 차에다 옮겨 싣고 두 사람은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시형이는 흥분을 고스란히 숨기고 가만히,

"아, 저 불 봐라 !"

하고만 말하였다. 차가 움직이었다. 무경이도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서 덤덤한 채 앉았다가,

"불이 그렇게 신기해요?"

하고 웃는 표정으로 시형을 쳐다본다. 사내는 눈을 떨어뜨려 옆에 앉은 애인의 눈길을 받아서 비로소 오래간만에 그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봤으나,

"그럼."

하고 대답하곤, 이내 낯을 돌리고, 이어서 궁둥이께를 음칠거리면서 자리를 도사리고 창 밖에 지나치는 거리의 풍경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다.

무경은 나직이 숨을 짚으며 앞을 바라본다. 왼편 옆구리에는 안에서 보던 책들이 어깨에 닿도록 쌓여 있다. 창고에서 풍기는 냄새가 옷 보퉁이와 책과, 그리고 시형이의 몸에서까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흥분이 가슴 속으로 가라앉고 안심과 만족이 포근히 떠오르는 것을 그는 향락하듯이 느끼고 있다. 이윽고 차는 커다란 아파트의 앞에 와서 멎었다.

강 영감이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 차 소리를 듣고 나와서 짐을 옮겨 주었다. 그러나 승강기도 없는 수면 시간에, 짐을 삼층까지 끌어올리는 것은 여간만 거추장스러운 일이 아니어서 그들은 강 영감의 생각대로 짐을 일단 사무실로 들여 놓았다가 내일 아침에 끌어올리기로 하였다.

자동차가 돌아간 뒤에 무경이는 오시형이를 강 영감에게 소개하고, 그를 삼층 아파트의 한 칸으로 안내하였다. 오래간만에 걷는 걸음이라고, 생각처럼은 쇠약한 것 같지 않았으나, 후뚤거리는 다리가 못 미더워 무경은 시형에게 높직한 층층계를 올라가는 동안 자기의 어깨와 팔을 빌려 주었다. 삼층의 마지막 계단을 돌아 올라가면서,

"제칠 천국 같으네."

하고 무경이가 웃는 것을, 시형은 그저 벌씬하니 감회가 깊은 미소로 대하였고, 복도를 돌아서 어떤 방 앞에 마주 섰을 때, 잠시 동안 쭈루루니 나란히 하여 있는 문들로 하여 지금 다녀 나온 구치감을 연상하는 듯하다가,

"가만, 내 문을 열께."

사내의 어깨 밑에서 빠져 나와서 쇠를 열고 잠갔던 문을 젖혔을 때,

"이런 좋은 방을 다 준비했어."

하고 판장 문의 핸들께를 한 손으로 붙들고 의지하듯이 서 있었다.

"인제 불 켤께요."

무경은 가볍게 뛰어들어가서 바람벽에 설비된 스위치를 켰다. 천정에서 드리운 불과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놓은 스탠드의 불이 일시에 켜져서 크지 않은 방 안은 구석구석까지 대번에 시형의 두 눈 속에 들어왔다.

시형은 잠시 동안 방 안과 장식된 도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제 발을 굽어 보며,

"이년 전에 벗어 놓은 구두를 맨발에 신었더니 발에 곰팽이가 묻었는걸."

하고 쪼그라진 구두 속에서 발을 뽑았다.

"가만 계세요. 내 걸레 갖다 드릴께."

먼저 방 안에 들어가서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시형이가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무경은 취사장께로 나서 낡은 타올에 물을 축여 들고 와서 발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는 신장에서 슬리퍼를 내놓고,

"이걸 신구……"

모시 적삼에 베 고의를 입은 사내를 이끌듯이 해서 침대에다 앉히면서,

"어때요? 비둘기 장처럼 또 좁은 방으루 모시는 건 안됐지만 무경이가 한 주일이나 걸려서 준비한 거래누."

하고 응석을 섞어서 제 두 손을 사내의 무릎 위에 얹는 것이다. 오시형은 무릎 위에 놓은 손을 잡아서 만지면서,

"무경 씨껜 너무 수골 시키구 욕을 뵈서 어떻거나."

하고 나직이 감격을 넣어서 말하였다.

"별소릴 다아."

그렇게 말하면서, 그 대에 사내가 힘있게 쥐어 주는 손을 저도 꼭 쥐어 보고는, 두 손을 쏙 뽑아서 호들갑스럽게 두어 발자국 물러나선,

"내가 뭐, 그런 소릴 듣겠다누."

하고 일부러 샐쭉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떠오른 칭찬에 대한 만족은 자긍은, 무엇을 쫓아가다가 놓쳐 버린 때처럼 손 둘 곳을 모르고 멍청하니 쳐다보고 있는 젊은 사내의 눈에는 적지않이 교태를 띤 것으로 느껴졌다. 시형은 아무 말도 입밖에 내지 못하고 가슴 속으론 우심한 갈증을 의식하면서 무경의 눈만 쳐다보고 있었다. 눈을 바라보던 시형의 눈이 입술로, 그리고 턱 밑으로 떨어져서 가슴패기로 이동할 때, 무경은 영리하게 사내의 마음을 낚아채듯이 발딱 몸을 옮겨서 방 가운데 놓은 탁자 뒤로 돌아가며,

"이게 무슨 꽃인지 아시죠? 제가 봄부터 여름내나 손수 길른 거에요."

코를 꽃 속으로 묻고 발름발름 향기를 맡듯 하다가, 시형이가 나직이 한숨을 짚은 뒤,

"수국이지, 내가 그걸 모를라구."

하고 대답하였을 때, 다시 낯을 들면서,

"아니, 수국을 다 아시네. 상당하신데."

사내가 픽 하고 웃으면서,

"그럼, 그것두 모를라구. 빨간 잉크를 부으면 빨개지구 푸른 물감을 쏟으면 파래지구 헌다는 걸……"

하고 침상에 앉은 채로 말을 받을 때엔,

"아아주, 그런 식물학두 경제학에 있는감 !"

무경은 기쁨이 온몸을 붙든 때처럼 다시 책상 옆으로 가면서,

"이 테이블에선 편지 쓰구 공부하구, 저기선 세수하구 양치하구, 또 저기에단 책을 쭈루루니 꽂아 놓구……"

양복장 있는 데로 가서는 잠옷 한 벌을 꺼내어 침상 위에 놓는다.

"웬 돈이 있어 이렇게 호사를 하구 치레를 했어."

시형은 무경의 애정에 대하여 감격하는 기쁜 마음을 그러한 핀잔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것이 더 무경의 마음에 드는지,

"피."

하고 그는 침대에 앉으면서,

"아아주 주인인 체 하시네. 허긴 인제 주인이지 머. 어머니두 금년부턴 진심으루 허락하셨으니께……인제 또 평양 댁의 허락이 있어야지만……"

또다시 시무룩해지다가 시형의 왼팔의 제 어깨에 감기니까,

"평양 댁에서두 잘 말하면 허락하실 테지. 그렇죠?"

하고 낯을 들어 사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글쎄. 그 안에 있는 동안 아직 아버지 친필룬 한 번두 편지가 온 일이 없었구, 또 무언가 그 전 그러든 약혼 이얘기두 그러허구 있는 모양이니깐……그러나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수. 나를 그 속에 있는 동안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먹여 살린게 무경 씨구, 또 그 속에서 이렇게 나를 살려 내온 게 우리 무경인데……"

시형은 감격조로 말하였다. 그리고 안았던 팔을 그래도 꽉 지리싸면서 뜨거운 입김을 무경의 얼굴에 퍼부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감격 속에 휩쓸리듯이 취하여 버리면서도, 무경은 사내에게 입술만을 주고는 꽉 붙드는 두 팔뚝의 억센 포옹에서 빠져 나왔다.

감정과 정서에 주리었던 사내는 미칠 듯한 어조로,

"왜? 왜 도망해? 내가 미덥지가 못해서 그리우?"

하고 침상에서 쫓아 일어났다. 무경은 시형의 감정과 신경의 상태에 깜짝 놀라면서, 그러나 열심스러운 낯으로,

"일어나지 마세요. 일어나면 전 가겠어요. 다시 거기 앉으세요."

명령하듯 외친다. 이러한 기세에 질리어서 사내는 주춤하니 선 채 잠시 동안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태도였다. 시형은 다시 침상에 걸터앉는다. 흥분된 제 가슴의 불길을 끄려는지 낯을 슬며시 외면하다.

무경은 시형의 낯에 수치심의 색조가 떠오르는 것까지 보고는 그 이상 더 사내의 태도를 지키고 앉았을 수가 없어서 창문께로 몸을 피하였다. 그의 가슴도 달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리만큼 한없이 뛰고 있었다. 맞은편 캄캄한 언덕의 주택지에는 불빛이 빤짝거린다. 하늘에도 까만 호리존 위에 뿌려 놓은 듯한 별들. 마포로 가는 작은 전차가 레일을 째면서 언덕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 굽어 보인다. 산뜻한 밤 공기에 낯을 쏘이면서 천천히 가슴의 동계를 세어 본다.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 온당하다. 건강도 건강이려니와, 결혼식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이 이상 감정의 닻줄을 늦추어서는 아니 된다――

어느 새에 땀이 났었는지, 브라우스의 속 갈피를 스치는 바람에 등이 차갑다. 어떤 가볍지 않은 의무를 단행한 때처럼 그는 달콤한 자위 속에 안겨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이렇게 높은 삼층의 들창으로부터 하늘과 길과 언덕을 바라보고 싶은 심리였다. 그런데 등 뒤에서,

"몇 시나 되었을까. 이 년 동안이나 시간을 모르구 지냈는데 밖에 나오니까 어느 새 시간이 알구 싶어지는 군 그래."

하는 느직느직한 오시형의 소리. 깜짝 놀라듯이 제정신을 차리며 무경은 몸을 돌렸다. 시형의 다정스런 미소.

무경은 금시에 두 눈을 반짝거리며 핸드백이 놓인 테이블로 쫓아간다. 백을 들고 와선 시형의 앞에 마주 서며,

"내, 무어 드릴려는지 아세요?"

하고 입술과 눈이 함께 생글생글 웃으려는 걸 꼭 참고 있다.

"거, 알 수 있나."

하고 능청맞게 대답하니까,

"피, 것두 몰라."

그리고는 백을 열고 크롬 껍질의 묵직한 회중 시계를 꺼내서 기다란 쇠사슬의 한 끝을 쥐고 대룽대룽 쳐들어 보이고,

"이거 ! 이걸 제가 이 년 동안이나 갖구 다녔세요."

침판을 들여다보고는,

"아유, 열 한 시 반, 이렇게 늦었어 !"

그러나 시형은, 학생 시대부터 졸업한 뒤 여기, 증권 회사 조사부에 취직한 후에까지 언제나 몸에 붙이고 다녀서, 그것을 꺼내 볼 적마다,

"아유, 무겁지두 않은감 !"

하고 무경이가 놀려 먹던 것을 생각하고, 지금 소리를 내어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이윽고 무경이가 두 발을 모으고,

"그 동안 덕택에 지각도 안 하고 착한 사람이 되었읍니다. 인제 관리인으로부터 소유자에게."

시계를 두 손으로 치켜 들고 꾸뻑 인사를 한다. 시형이가 건네 주는 물건을 기쁜 웃음과 함께 받으니까,

"보관료는 톡톡히 내셔야 해요."

하고 또 다시 웃음조로 다짐을 받고, 핸드백을 챙긴 뒤에 갈 차비를 차렸다.

"내일 아침 일르게 들릴께요. 허긴 시계가 없어져서 지각할런지두 모르지만……이내 불 끄구 푸욱 쉬이세요."

그러나 시형은 시계를 놓고 뒤따라 일어섰다. 잊어버린 것을 채근하려는 듯한 성급한 표정이다. 구두를 신고 섰는 무경의 곁으로 쫓아올 때, 무경은 그러나 그러한 것에는 일부러 신경이 미치지 못하는 척, 이내 도어를 열고 복도로 빠져 나오면서 손가락을 제 입술에 대어 키스를 건넬 뿐, 이미 가라앉은 두 사람의 가슴에 다시금 불을 지르려 하진 않았다.

조용해진 아파트를 나와서 안전 지대 위에 섰다. 전차를 기다리며, 삼층, 오시형이가 들어 있는 방을 쳐다보니 불이 꺼졌었다. 무경은 안심한 마음을 품고 돌아갈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아침 일찍이 짐을 올려다가 방을 정돈해 주고, 의사를 불러다가 건강 진단을 시키고, 어머니와도 정식으로 대면시키는 기회를 만들고, 옳지, 신원 보증인으로 아파트의 주인을 교섭해서 경찰서로 알릴 일이 무엇보다도 바쁘고……

안국동에서 전차를 버리고 그는 그러한 생각에 잠겨서 집을 향하여 걸었다. 길에는 사람의 내왕조차 드물다. 그는 집이 가까운 것을 느낀 뒤에야 비로소 젊은 여자가 거리를 걷는 시간으로선 지나치게 늦은 시각인 걸 생각하고 걸음 재게 놀리며 골목 어귀를 휙 돌았다. 그 때에 어떤 신사와 마주칠 뻔하고, 그는 깜짝 놀라 비켜 섰다. 노타이 셔츠에 회색 양복을 입고 파나마를 쓴 뚱뚱한 신사――그는 잠시 손을 모자 차양에다 대고 실례의 인사를 표하고는 무경의 옆을 돌아 큰거리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무경은 움직이지 못하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신사가 섰던 곳에 신사의 환영을 붙들어 세워 놓고, 가슴이 받는 충격을 가라앉히기에 애를 쓰는 것이다.

골목 안에는 물론 저희 집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스무나문 집이나 남아 쭈루루니 문패가 달려 있다. 지금 골목을 나간 신사가 어느 집 대문으로부터 나온 사람인지, 혹시 집을 찾으려 골목 안에 들어왔다가 헛물을 켜고 돌아가는 사람이지, 그것은 모두 무경에게는 알 수 없는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무경은 첫눈에 그 신사가 자기 집 대문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하는 착각을 받았고, 그리고 지금 그 신사는 하곡이라는 아호를 가진 부채의 주인공은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 붙들려져 있는 것이다.

무경의 가슴은 다시 무거운 압력 속에서 불쾌스런 동계를 시작하였다. 대문이 저만큼 보인다. 문은 닫혀 있고, 문등은 띠꾼하게 요강덩이처럼 달려 있고……언제나 즐거움을 가지고 드나들던 이 대문이 어쩐지 께름직하게 느껴져서 견딜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그쪽을 향하여 걷지 않을 순 없었다.

대문을 미니까 달랑달랑하는 종소리를 내면서 제대로 열려졌다. 식모가 나왔다. 자던 눈이다.

"아가씨, 지금 오세요?"

무경은 대답지 않고 대청으로 올라서서 어머니 방을 건너다 보았다. 자리에 누웠다가 일어난다. 아무 구석을 맡아 보아도 사람이 다녀 나간 기척이 없어서 그는 비로소 의심에 붙들렸던 가슴을 가라앉힌다. 그러나 제가 쓸데없는 억측에 붙들렸던 만큼 제 마음에 대하여 염증과 혐오감이 따르는 것은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지금 오니?"

하고 어머니는 푸른 등을 끄고 촉수가 강한 전등으로 실내를 밝힌다.

"네."

나직이 무경은 대답할 뿐. 그러나 대청 한복판에 유쾌하지 못한 심화를 품고 서 있은 채 그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래, 오늘은 나왔니?"

"네."

"응, 참 잘 됐다. 그래 얼굴이 과히 못 되진 않었든?"

어머니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잠옷도 입지 않고 얇다란 속옷만 입었다. 무경은 머리가 흥클러진 어머니의 살을 처음으로 보기나 한 듯이, 안방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캄캄한 제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어머니가 또다시 무엇이라고 묻는 소리가 들려 왔으나, 캄캄한 암흑 속에 떠오m는 것은, 여자로서의 살의 냄새를 잃지 않은, 군살(贅肉)이 목과, 배와, 허벅다리에 알맞게 오르기 시작하는, 어머니의 육체뿐, 만복한 식욕이 지방이 많은 음식물을 대했을 때처럼, 늑찌한 군침이 입 안에 돌고 비위가 불쑥 목구멍을 치밀어 오르는 것을 무경은 참을 수가 없었다.

3[편집]

이르게 나온다고 약속은 하였지만, 이러구러 집을 나온 것은 여느 때나 다름 없는 오전 아홉 시였다. 세탁해 두었던 시형의 여름 양복과 내의를 싸서 구두약과 함께 옆구리에 끼고 아파트에 이른 것은 반 시간이 넘어서였다. 잠시 사무실에 들렸다가 시형의 방으로 올라가 보니, 그는 잠옷 바람으로 강 영감이 급사와 함께 날라다 준 것이라고 책을 풀어서 서가에 꽂고 있었다.

"제가 차입하지 않은 것두 많은가 보."

하고 무경은 그의 뒤에 가서 본다.

"어머니가 가끔 부쳐 준 걸루 그 안에서 구입해 보았으니까……"

그리고는 마침 농이를 풀다가 맨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암파 문고를 툭툭 먼지를 털어서 보이며,

"그 안에서 읽은 것 중 내가 가장 감격한 책이 이게요."

하고 허리를 폈다. 무경은 아무 말도 아니하고 책을 바아 들었드나.

"아침을 잡소서야지. 그리구 내의허구 양복을 가져왔으니까 이걸루 바꾸어 입으시구, 인제 의사를 청해다 진찰을 받으시구, 그러면 어머니두 보러 나오실 거니께……"

"아침은 강 영감이 안내해서 식당에 내려가 먹었구, 어머닌 내가 찾아가 뵈어야지."

"으응, 인제 나오신댔는데……"

보꾸러미를 탁자 위에 놓은 뒤에야 의자에 손을 짚고 서서 무경은 시형이가 준 책을 보았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辨明)>, <크리톤>이란 책이었다. 무경은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들었을 뿐으로, 책의 내용은 알지 못하므로, 그대로 표지와 서문 같은 것을 들춰 보고 있는데 오시형은 잠옷 채로 침상에 앉아서 혼잣말처럼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사정이 나의 그 때 환경과 비슷한 탓이라구두 말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글의 내용에서 오는 감명은 그런 것과는 달리, 나의 환경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하는 데 있는 것 같기두 해. 읽고 나서 나의 정신이 나의 환경으로 다시 돌아오면, 오히려 소크라테스의 그 훌륭한 태도는 나의 경우에는 직선적으로 통하지 않는 것 같애서 불쾌한 느낌까지 주었으니까……"

물론 무경에게는 이해되진 않는 독백이었다. 무어라고 대꾸할까를 몰라 멍청하고 서 있으려니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옷 보통이를 끌렀다.

"허 허――오래간만에 만나는 그리운 양복이로구나."

하고 그는 감개무량하게 나프탈린 냄새가 풍기는 양복을 펼쳐 안았다. 그것을 잠시 보고 있다가 무경은 경찰서에 신원 보증인을 통지한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파트의 주인은 이 집에 살지 않으므로, 대개 언제나 이 아파트에서 잠자리를 갖는 강 영감에게 부탁하여 보증인이 되어 달랬다. 그것을 경찰서에 알린 뒤에 다시 그는 오시형의 방으로 올라왔다.

시형은 셔츠 밑에 양복 바지를 입고 다시 서가 앞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무경은 신원 보증인에 대해서 결정한 대로를 알리고 구두약을 가져다가 꼬드라진 꺼먼 구두를 닦기 시작하였다.

"그래, 그 안에서 그 책을 다 읽었수?"

하고 솔질을 하면서 무경이가 묻는다.

"어째 ! 절반이나. 대부분이 불허가니까……"

"불허가?"

하고 깜짝 놀라기나 한 듯이 무경은 구두 닦던 손을 멈칫하니 붙이고 시형이 편을 본다.

"경제 방면 서적은 전부가 불허가지."

그렇게 대답하면서 시형은 다시 일어나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나 생각해 본면 다행이야. 경제학에 관한 서적을 읽었다면 생각을 돌려 볼 길이 없었을런지 모르니까. 그런 의미에서 경제학은 나에게 있어서는 변통성 없는 완고한 학문인지두 모르지. 이렇게 무경 씨 얼굴을 명랑한 여름날 아침에 다시 볼 수 있는 건 철학의 덕분인 것이 사실이니까."

시형의 말하는 투는 보통 대화조가 아니고 어딘가 연설 같은 느낌을 주는 어조였다.

"경제학과 철학과의 차이가 있을라구요. 학문이야 같을 텐데……"

하고 무경은 제 의견을 나직이 말해 보았으나 시형은 그러한 것에 개의치는 않고 다시 제 생각을 펼쳐 보았다.

"내 자신이 서 있던 세계사관(世界史觀)뿐 아니라, 통틀어 구라파적인 세계사가들이 발판으로 했던 사관은 세계 일원론(世界一元論)이라구두 말할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경우에 동양 세계는 서양 세계와 이념(理念)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 세계는 대체루 세계사의 전사(前史)와 같은 취급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었죠. 종교사관이나 정신사관뿐 아니라 유물사관의 입장도 이러한 전제로부터 출발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동야이란 하등의 역사적 세계도 아니었고 그저 편의적으로 부르는 하나의 지리적 개념(地理的槪念)에 불과했었단 말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세계 일원론적인 입장을 떠나서, 역사적 세계는 각각 고유한 세계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도 있고 증명할 수도 있지 않은가. 현대의 세계사의 성립을 이러한 각도에서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가졌던 세계사관에 대해서 중대한 번성을 가질 수도 있으니까……"

물론 남이 말하는데 구두를 닦고 있을 수도 없어서, 그대로 귀를 기울이고는 있으나 무경으로선 시형의 하는 말을 어떻다고 생각할 준비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삐끔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형은 혼자서 저 자신에게 타이르기나 하듯이 창문을 바라보며 이야기에 열을 올려 제 이론을 전개해 보고 있었다.

"가령 동양이라든가 서양이라든가 하는 개념두 로마의 세계에서 성립된 것이고, 또 고대니, 중세니, 근세니 하는 특수한 시대 구분두 근세의 구라파 사학에서 성립된 구분이니까, 이런 것에서 떠나서 동양과 동양 세계를 다원 사관의 입장에서 새로이

반성하구 성립시킬 필요가 있지 않은가. 이것은 동양인의 학문적인 사명입니다. 동양인 학도가 하지 않으면 아니 될 의무입니다. "

그는 말을 뚝 끊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께로 가서 오래간만에 맛보는 흥분을 고요히 식히고 있다. 무경은 구두를 신장 안에 넣고 약과 솔을 치운 뒤에 수도에 손을 씻었다.

"의사를 부르지요. 너무 흥분하셔두 몸에 좋지 않을 텐데요……"

하고 말하니까 시형은 몸을 돌리고 소리 나는 편을 향하였다. 그러나 무경의 물음에 대답하려 하지 않고 그는 창백해진 낯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독일이 파란, 노르웨이, 덴마크를 무찌르고 화란, 백의이을 정복하고 불란서를 항복시켰다는 건 결코 작은 사실이 아니니까. 이러한 세계사의 변동에 제휴해서 동양인두 동양인다운 자각이 있어야 할 거야. "

그리고는 침대로 가서 뭄을 눕히었다.

무경은 무어라고 말할까를 몰랐다. 본시부터 오시형이가 어떠한 사상을 가지든 그것에 간섭할 생각이나 준비는 저에게는 없다고 생각하여 왔다. 그에게는 오직 안에 있는 사람을 건강한 채로 하루라도 이르게 구하여 내는 것만이 임무라고 생각키어졌었다. 그리니까 지금 오시형의 열의 있는 독백을 들어도 그것에 관하여 이렇다할 의견을 건네려 하진 않았다.

그러고 있는데 도어에 노크 소리가 들리고 어머니가 들어왔다.

시형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양복 윗저고리를 두리고 무릎을 꺽어 절을 하였다.

"그만두시게. 고단한데 안 허믄 어떤가. 그래, 그 안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었나. 어데 몸이 과히 말짼 데나 없나."

"네. 건강은 아무렇지두 않은 모양입니다. 밖에 계신 분들께 너무 폐를 끼치구 근심을 시켜서 되려……"

"온 별말을 다 허시지. 이러니저리니 해도 안에서 고생하는 사람에게다 대겠나."

무경은 바륵바륵 웃으면서 어머니와 시형의 옆에 서 있다가,

"어머니, 그게 뭐유?"

하고 손에 들은 것을 물어 본다.

"이거 말이냐? 지금 한약국에 들려서 약을 한 제 지어 갖구 오는 길이다. 건강이 아무렇지 않다구 해두 그대루 두어서야 쓰겠니. 몸을 보허구 그래야지. 그리고 아침은 일러서 헐 수 없다 쳐두 저녁일랑은 집에 와서 먹게 하구, 약두 여기 가스 불이 있다군 하지만 그걸루 어데 대릴 수 있겠니. 다리가 처음은 고단하겠지만 내일부터래두 집에 와서 약을 자시구 끼니두 별건 없지만 집에서 자시게 해야지……남의 눈두 있구 해서 한 집에 있진 못하지만 운동삼아서……그렇지 않니, 무경아?"

시형이가 황송한 낯으로 사양의 말을 건네려 하는데 무경은 이내 어머니의 말을 받아서,

"참, 그렇게 하시지. 아침두 전 일러서 시간에 대어 먹지만 오 선생님은 어머님이랑 같이 좀 늦게 잡숫게 하시지. 그리구 거기서 책이래두 보시면서 노시다가 점심 잡숫구, 약 잡숫구, 저녁 잡숫구 밤에만 여기 와서 주무시지……그렇게 합시다. 며칠은 다리가 아퍼서 걸어 다니시기 힘들 테니까 오늘은 그저요 근방에나 조꼼씩 걸어 보시구……"

저희들끼리 사귄 사이라고 불만해했고, 그 다음은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꺼려했고, 그가 법망에 걸려 들어간 때에는 더욱더 완고하게 무경의 생각을 탓하였다. 그러나 다른 일로는 어머니의 성미에 거역한 적이 없는 무경이도 이것만은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차입을 대기 위하여 처음으로 직업 전선에 나서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얼마간 모녀 새에는 의까지 상하였었다. 그러나 무경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밥과 옷은 여전히 집에서 얻어 먹고 입고, 제가 버는 봉급으론 오시형을 위하여 책과 밥을 차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를 이 년――드디어 어머니는 딸의 열성에 탄복한 것이다.

어쨌든 어머니의 오늘의 태도를 무경은 감동된 낯으로 바라 보았다. 이러한 날이 꼭 찾아올 것을 믿기는 하였지마는 그 동안 제가 겪은 곤욕이 큰 만큼, 지금 눈앞에 그러한 장면을 친히 경험하고 있으면, 그이 가슴 속엔 찌릿한 전류가 흐르도록 기쁨은 감격을 자아내는 것이다.

"오정에 너 나올 수 있건 어데서 같이들 점심이래두 먹자. 요 근방엔 어데 식당 같은 게 없니?"

어머니는 시형의 방을 나가면서 딸에게 말하였다. 무경이도 문지방에 선 채,

"이 부근에야 무어 벤벤한게 있나요. 종로나 본정으루 나가야지. 그럼 내 자동차루던가 전차루던가 모시구 나가께, 어데서 시간 약속하구 기다리시구료."

그래서 결국 본정 입구에 잇는 양식당으로 시간을 정하고 그들은 방을 나갔다. 방을 나갈 때 시형은 종이 조각에 적은 것을 주면서,

"전보 한 장 급사 시켜서 쳐 주시오. 집에, 나왔다는 소기이나 알려야죠."

하고 무경에게 말하였다. 무경은 어머니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틈 나는 대루 박 의사를 좀 와 달랠까요? 그렇잖으면 데리구 나가서 뵈이든지."

딸이 어머니에게 의사의 진찰을 상의하니까,

"사정을 아니까 와 달래두 오실 거다."

하고 어머니는 대답하였다.

일이 밀려서 다섯 시를 칠 때까지 잡념에 머리를 쓰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무경은 점심을 먹고 돌아와서는 오시형이를 삼층으로 데려다주고 줄곧 사무에 골돌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일이 끝나고 다른 일로 손을 옮길 때마다, 자꾸만 어머니의 약속이 머리를 스치군 하는 것은 어떻게 뿌리쳐 버릴 수도 없었다. 일이 바빠서 이내 머리를 털어 버리고 장부 정리와 숫자 계산에 정신을 묻었지마는 다섯 시를 치는 소리에 장부를 접고 고개를 들면 다시 어머니의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유쾌하고도 가벼운 흥분 속에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시형이를 앞세워 놓은 뒤에서 어머니는 무경에게 나직이 귀뜸하듯이 말하였던 것이다.

"너, 오늘 몇 시에 나올 수 있니?"

"네 시면 나오지만 일이 좀 밀려서 다섯 시나 넘어야 퇴근 할거에요."

"그럼, 다섯 시 반까지 경성 호텔루 좀 나오너라. 이야기할 것두 있구……"

"혼자서?"

"응, 너 혼자만 나오너라."

이야기는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다섯 시 치는 소리를 듣고 장부를 접어 꽂은 뒤에도, 어머니의 이야기란 것을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호텔로 나오라는 것일까. 저녁이나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하자는 뜻인 건 추측할 수 있지마는, 점심에 외식을 하였는데 다시 또 저녁을 사 준다는 것도 이상하고, 단 둘이 언제나 집에서 만나 조용히 이야기 할 수 있으면서 새삼스럽게 장소를 밖으로 잡은 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오시형이와의 결혼에 대해서 무슨 색다른 이야기라든가 의논이 있는 것일까. 도무지 어인 영문인 걸 상상할 수가 없었다.

"밖에 일이 있어서 나가는데 저녁은 오늘까지만 이 식당에서 잡수세요. 양식보다두 저녁 정식을 화식을 잘 하니까 화식 정식으로 잡수세요. 내 일곱 시나 여덟 시경에 들리께……"

시형에겐 그렇게 말해 놓고 무경은 아파트를 나와 전차를 탔다. 호텔에 이르니까 로비에 어머니 혼자 앉아 있었다. 무경은 그의 앞에 가서 아무 말도 건네지 않고, 힐끗 어머니의 표정을 엿보면서 의자에 앉았다.

"오신 데 오래유?"

하고 물으면서 다시 어머니의 낯빛을 살피니까, 시계를 쳐다보고는,

"응, 조금 지냈다."

그리고는 이야기를 시작하거나, 식당으로 들어가잔 말도 없이 그래도 낯을 좀 외면하고 멍청하니 유리창을 바라보고 앉았는 것이다. 어려운 말을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이 항용 가지는, 자리 잡히지 않은 태도였다. 얼굴엔 무표정을 의장하지만 속에는 여러 가지 궁리가 오락가락하고 초조한 조바심까지 문풍지처럼 바람에 떨고 있는 것이다.

무경이는 질식할 듯한 시간을 오래 끌고 나가기가 안타까워졌다. 무슨 어렵고 놀라운 이야기라도 쏟아져 나오기를 기다리는 긴장된 자세가 오랫동안 계속해 나아가면 신경은 피곤에 시달려서 관자놀이께가 쑤시는 것 같은 착각까지 느껴진다. 그는 드디어 결심한 듯이 낯을 들고,

"무슨 말인지 어서 하시구려."

하고 어머니를 쳐다본다.

"응?"

하고 낯을 돌렸으나, 다시,

"응, 인제 좀 있다가……"

그리고는 무경의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초리를 피하여 낯을 외면한다. 그러나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어머니는 결심의 표정으로 낯빛이 해쓱해진 얼굴을 다시금 무경에게로 돌리면서,

"이야기랄 건 별로 없구, 어째피 네게 알려야 할 일도 있구……그래서 오늘 누굴 네게 소개 할랸다."

하고 더듬더듬 말하였다. 이야기를 끝마치고 난 어머니의 얼굴에 흥분 탓인지 혹은 부끄러움 때문인지 붉은 혈조가 볼편과 눈가상에 엷게 떠오른 것같이 보여졌다. 이야기한 것을 따지자면 내용은 분명치 않았으나, 그런 것을 천착해 볼 겨를도 없이, 어머니의 태도와 표정에서 무경이는 대번에 사건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딱이 제 머릿속에 깊이 의식하지는 못했을 때에, 유리 밖으로 층계를 올라오고 있는 한 사람의 신사를 발견한 어머니는 두 눈은 벌써 당황의 빛이 농후해진 표정 속에서 적이 침착성을 잃고 있는 것처럼 무경에겐 느껴졌다.

아래층 클로크에 모자와 단장을 맡겼는지, 맨머리 바람에 바른손으로 단장 들던 버릇으로 부채를 약간 치켜서 들고 흰 양복 입은 신사는 그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가까이 왔다. 기품 있게 갈라 재운 머리는 짧게 다듬은 수염과 함께 희끈희끈 흰 것이 섞여 있었다. 무경은 얼른 그의 부채를 보았다.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오십을 넘어 얼마가 되었을 점잖은 사내는,

"오래 기다리셨지요."

하고 미소를 띄어 어머니께 인사한 뒤에 다시,

"아, 이 분이 무경 양이시군. 이야기론 늘 들었었지만 여태 뵈온 적이 없었군요. 난 정일수(鄭一洙)라구 합네다. 바쁜데 나오시라구들 해서……"

하고 무경을 바라보았다. 무경은 지금 자기가 경험하고 있는 사태와 입장을 얼겁결에 의식하면서 굳어진 몸 자세대로 고래만 약간 수그려 보인다. 그러니까 정일수 씨는 옆에 와 섰는 보이게게,

"준비가 되었지요?"

하고 물은 뒤,

"자, 그럼, 저리루들 들어가시지."

무경과 어머니에게 뜰 안을 가리키었다.

따로 떨어진 방 안에서 그들은 광동 요리를 먹었다. 일이 고되지나 않는가, 아파느란 것도 새로 생긴 경영 형태지만 요즘 주택난과 하숙난이 심하니까 상당히 수요성을 띠겠다든가, 야마도 아파트엔 방이 얼마나 되는데 그것이 전부 꼭 찼는가, 하는 등속의 이야기로부터, 건축난, 주택난에 대해서 말이 옮아가고, 그러는 동안에 저녁이 끝났다. 그러한 정일수 씨의 말에는 어머니가 가끔 대꾸를 하였을 뿐, 무경은 묻는 말이나 마지못해 나직이 대답하는 정도로 침묵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먹는 것이 끝나니까 정일수 씨는 시간 약속이 있다고 먼저 나가고 모녀간만이 잠시 더 방 안에 남아 있었다. 무경은 음식도 많이 먹지 않았으나, 단 둘이 계속되어도 혼자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별로 이야기를 건네려 하진 않았다――물론 어젯 밤 집 앞에서 부딪칠 뻔하였던 그 신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정일수 씨가 하곡이라는 아호를 가진, 산수 그린 부채의 주인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점잖고 단정하고 기품이 있는 신사의 얼굴을 께림찍하게 생각하여 보기는 이것이 처음이라고 그는 막연히 제 심리를 뒤적여 보고 앉아 있다. 어머니는 혼잣말 하듯이 뜨즉뜨즉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네겐 너무 돌연스레 된 일이 돼서 서먹서먹하구 어인 셈판인 걸 모를 께다. 그러나 벌써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이야기다. 내가 세브란스에 있을 때니께 십 년이나 되지 않니. 그 때 부텀 여태껏 사람을 다릴 놓아서 말을 붙이구, 또 스스로 대면해서 말하는 걸 나는 십 년을 여일하게 거절해 왔었다. 사람이나 그 집 내력이야 무어 하나 탓할 게 없는 분이지만 내가 널 두구 새삼스레 무슨 결혼을 하겠니……그랬더니 어쩐 셈판인걸 나두 모르겠다. 너희들 사일 허락하구 나니 마음이 갑째기 탁 풀려 버리는구나……자식들이 있다지만 다 장성해서 시집 보낼 덴 시집 보내구 아들은 세간까지 내서 딴 살림을 배포해주었단다……나이두 인저 사십을 넘으니께 어찌된 일인지 늙은 몸을 의탁하구야 살아갈 것만 같구나. 어쭙잖게 생각지 말구 에미 하는 짓을 웃구 쓰려쳐 버려라. 너희들 예식이나 올려 주군 천천히 어떻게 채비를 대일까 헌다만……"

어머니는 죄 지은 사람처럼 딸의 눈치를 살펴 가며 간단히 그렇게 말하였다. 무경은 여태껏 제가 품고 있던 생각이 다른 감정으로 뒤바뀌는 것을 경험하고 묵묵히 앉아 있다. 눈시울이 따가워서 손수건으로 그것을 묻혀 내었다. 마흔 둘 ! 아직도 어머니는 젊다.

――나는 왜 좀더 이르게 어머니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못하였을까. 딸 하나만으로 젊은 어머니가 행복될 수 있으려고 얼마나 많은 무리(無理)가 그 곳에 감행되었을까. 그렇던 나마저 어머니의 옆을 떠나면서 어째서 나는 어머니의 행복에 대해선 터럭만큼도 생각함이 없었을까. 스물에 홀몸이 되셔서 나 하나만을 위하여 청춘을 불사르고 화려한 꿈을 짓밟아 버린 어머니가 아니냐. 이제 무슨 염치에 나는 어머니에 대해서 심술이나 투정을 부리려고 하는 것일까. 어머니도 나머지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셔야 한다.

――무경은 눈물을 숨기지 않고 낯을 들어 어머니를 건너다보았다. 젊은 시절의 사진처럼 어머니의 얼굴엔 아름다운 살결이 아지랑이에 싸여 있는 것 같이 눈물어린 누에는 비치어졌다.

"엄마 !"

하고 소리를 내어서 무경은 어머니의 무릎에 낯을 묻었다.

아제 좀 지나치게 걸었더니 발바닥이 솔고 다리가 아프다고 시형은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는 이내 침대에 누워서 잡지와 신간 서적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내일부터나 화동 집으로 약과 밥을 먹으러 가겠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무경이는 사무실에서 입금 전표를 정리하면서, 어떤 기회에 어머니와 정일수 씨와의 결혼 이야기를 시형에게 전달할 것인가 하고 가끔 생각에 잠겨 보굿 한다. 펜을 전표 위에 세운 채 가만히 생각해 본다. 이치로 따져 보거나, 여태껏의 어머니의 생애를 생각해 보거나, 무경으로 앉아 응당히 기뻐하고 찬성해 드릴 일임에 틀림없었으나, 하루 지내 놓고 어머니가 없는 곳에서 문뜩 생각이 그 곳에 미치면, 가슴이 뚱하고는 지긋이 심장을 압박하는 가슴의 동계가 마음을 한없이 설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누를 수 없는 심술이 두 눈에 심지를 꽂아 놓는 것이다.

'내가 왜 이럴까. 어머니와 나와의 평화하고 행복된 생활을 먼저 파괴하고 나선 것은 내가 아닌가. 어머니의 고백에 의하면 어머니는 십 년 동안 나와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정일수 씨에게 고집을 세웠다고 한다. 나는 어머니를 위해서 무엇을 했나. 기독교의 신앙과 풍속 가운데서 안온한 생활을 이어 나가려는 어머니의 마음을 슬프게 교란시킨 것은 내가 아닌가. 기독교율에 의탁해서 젊은 정렬을 희생하고 속세적인 행복에서 자기를 결리시킨 뒤, 그 가운데서 성실한 생활을 설계해 보려던 어머니에게 있어, 딸이, 단 하나의 딸이 예수교의 교율을 거역했다는 것은 얼마나 타격적이고도 슬픈 일이었을까. 어머니의 결혼이 만약 유쾌치 못한 성사라면, 그것의 원인을 이룬 것은 다른 사람 아닌 내가 아닌가?'

이렇게 수없이 자기 자신을 탓하면서, 이러한 생각을 고스란히 그대로 그에게 들려 주면, 처음에는 놀라고 수상쩍게 생각할는지 모를 시형이도, 마지에는 모든 것을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그는 일시 유쾌한 상상을 머리에 그려 보게 되기도 한다.

――우리 결혼식이 있은 위엔 또 한 쌍의 신랑 신부의 혼례식이 있을 텐데, 그게 누굴는지 아세요? 그게 바로 우리 엄마라나, 하고 말하면 아마 오시형이는 깜짝 놀라 경동을 할 것이다. 생각하면 우습기도 해서 그는 혼자 발씬하니 웃고 다시 장부를 들친다.

"허허어. 생각하면 생각하쑤록 기쁜 일이렸다."

하고 멋모르는 강 영감은 시형이가 출감한 것에다 둘러 붙여서 무경이의 웃음을 놀리려 들었다. 그 때에 시계가 열 한 시를 쳤다. 그것이 다 치는 동안을 기다려서 무경은 등을 돌리고,

"제가 무엇 때문에 웃는 줄이나 아시구 그러세요."

하고 말하였으나, 들어온 때문에, 강 영감도 무경이도 함께 이야기를 중단하고 그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신사는 아파트의 현관을 들어서서 그대로 위층으로 뻗어 올라간 층계를 잠시 바라보듯 하였으나, 이내 사무실 쪽으로 낯을 돌리고 가까이 오면서,

"이 아파트에 오시형이라는 사람 있읍니까?"

하고 밭게 앉는 강 영감에게 물었다.

"네, 삼칭 삼백 이십 삼 호실에 계십니다. 삼칭에 올라가셔서 그저 이십 삼 호실만 찾으시면 되겠읍니다."

하고 무경이가 의자에서 일어서면서 사무적으로 대답하였다. 신사는 홀낏 무경의 낯을 건너다보았으나, 이내 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하듯 하고, 막연히 사무실의 구멍을 향해서 사의를 표하듯 모자 끝에 손에 댄 뒤, 흰 단장 끝으로 복도의 바닥을 짚어서 위의를 갖춘 뒤에 알맞추 비대한 몸을 층계 위로 옮겨 놓았다. 무경은 첫눈에 오십을 넘었을까 말까 한 이 시낫의 풍채에서 평양서 부회 의원과, 상업 회의소에 공직을 가지고 있다는 오시형의 아버지를 간파하였다. 그럴수록 신사의 태도에는 자기에 대한 어떤 모멸감이 들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털어 버릴 수는 없었다. 무경은 그의 찾아옴이 너무 돌연스럽고, 그이 태도에서 오는 위압과 모멸감이 너무 몸에 부치늘 것 같아서 의자에 앚을 염도 못 하고 멍청하니 그 곳에 서 있었다.

"오 선생의 춘부장 되는 양반이신가?"

하고 묻는 강 영감에게 무어라고 대답해 주어야 할 것인가 당황했으나,

"그런가 봐요."

하고 새파랗게 질린 채 나직이 대답해 줄 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자기네들의 사정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상세한 집안 내용까지는 모르고 있는 강 영감이었다. 무경과 시형과의 관계를 평양 있는 그의 아버지는 인정치 않으려고 하던 것, 그는 그대로 도지사를 지냈다는 지명 있는 명사의 딸과 약혼설을 진척시키고 있던 것――이러한 미묘한 사정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강 영감이다. 그러니까 시형의 아버지의 방문과 그의 태도에서 받는 충격에 대해서 그는 아무것도 이해할 길이 없을 것이다.

무경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다시 펜을 들었으나 머리를 사무에 묻을 수는 없었다.

이 년 동안 친필로는 편지도 안 하였다던 아버지가 전보를 받고 아들을 찾아왔다. 물론 부자간의 정의로 당연한 일임에 틀림은 없으나, 사상과 여러 가지 가정 문제로 의견을 달리 하던 부자가 오늘 이 년 만에 만나서 다시 아름답지 못한 충돌이나 거듭하지 않을 것인가. 그 동안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제가 가졌던 생각과 태도와 고집에 대해서 반성하는 곳도 양보하는 곳도 생겼을 것이다. 아버지는 과연 아들의 결혼 문제를 순순히 허락할 만한 준비를 가지고 올라온 것일까. 불안과 궁금증과 초조와 공포심과 의혹이 뒤섞이고 합치고 엇갈려서 무경은 고래를 푹 수그린 채 정신 없는 사무를 보고 앉아 있다.

한 삼십 분 만에 시형의 아버지는 층계를 내려왔다. 그러나 단장도 모자도 두고 잠시 다니러 나오는 모양이었다. 얼른 눈을 유리창 밖으로 돌렸으나 그의 태도와 무표정한 얼굴로부터는 아무러한 암시도 받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척이 된 모양같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맨머리 바람으로 어디를 나가는 것일까. 그는 나갔다가 한 십 분 만에 다시 돌아와서 역시 사무실 쪽은 보고 못 본 척, 무표정한 얼굴에 위엄기만을 나타내고 층계를 올라가 버렸다. 무경은 어디다가 발을 붙이고 공상의 줄을 뻗어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또다시 한 이십 분 만에 자전거 탄 양복장이가 샘플을 보꾸러미에 싸 가지고 아파트를 들어와서 꾸뻑 인사를 하고 위층으로 올라가려 하였다.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강 영감이 소리를 치니까, 양복점원은 멈칫하고 층계에 한 발을 올려 놓은 채 이편을 바라보며,

"삼층 이십 삼 호실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편에서 별로 말이 없으니 점원은 그대로 위층을 향하여 올라가 버렸다. 열 두 시의 사이렌이 울었다. 양복장이는 주문을 받았는지 인사성 있게 웃어 보이면서 사무실을 지나 밖으로 나간다. 그러나 그와 엇바뀌듯이 하여 이번에는 구둣방에서 찾아왔다. 자전거 뒤에다 커다란 트렁크를 두 개나 싣고 온 양화점원은 모자를 벗고 공손히 사무실 앞에서 안내를 구하였다. 강 영감은 신이 나서 대답하였다. 양화점원이 올라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무경이 쪽을 돌아 보면서,

"아버지가 오시드니 양복 짓구 구두 사구 한 벌 미끈히 채려 내세우실 모양이군."

하고 반갑게 웃었다. 무경은 펜대를 든 채,

"그런가 봅니다."

하고만 대답한다. 그는 지금 속으로 적지않이 불안스런 사태를 한 갈피 한 갈피 분석해 보듯이 뒤적여 보고 앉았는 것이다.

――아까 시형의 아버지가 맨머리 바람으로 밖에 나갔던 것은 양복점과 양화점을 부르러 갔던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상점을 부르기 위하여 그는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전화를 걸러 밖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는 어째서 일부러 전화를 걸러 밖으로 나갔던 것일까. 사무실 전화를 쓰지 않고 일부러 밖으로 나간 것은 무슨 때문일까.

여기까지 생각해 보고는 무경은 잠시 멈칫하니 물러선다.

――나를 피하기 위하여, 나의 낯을 대하기가 싫어서 나 있는 사무실의 전화를 쓰지 않기 위해서, 그는 밖으로 딴 전화를 찾아 나갔던 것임에 틀림없다. !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시형의 아버지가 무경을 모욕하는 것으로 된다. 무경과 시경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된다.

그래서 무경은 생각을 딴 데로 돌려 보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형의 아버지가 밖으로 나갔던 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그의 무경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인가.

――정식으로 대면이 있기 전에 며느리 될 사람을 이런 처소에서 만나는 것을 꺼리는 지도 모르지. 직업이 나쁜 것은 아니나 역시 그들의 습관으로 보아 이러한 처소에서 며느리 될 여자와 낯을 대한다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일일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는 일부러 사무실 쪽을 못 본 척, 무경의 존재를 무시하려고 앴는 것인지도 모르지.

한참 만에 구둣방 점원도 나가고, 또 얼마 뒤엔 오시형의 아버지도, 이번엔 모자와 단장을 쓰고 들고 시형의 방으로부터 내려와서 밖으로 나갔다. 시형은 그의 아버지가 나간 뒤 십 분이나 지나서야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사무실에 얼굴을 나타내었다.

"아버지가 오셨어 !"

그렇게 말하고는,

"이거 구두두 한 컬레 얻어 신었는걸 ! 이게 온 오십 오 원이라니 !"

번쩍 다리를 들어서 보이었다.

"어제 전보를 보시구 오신 게로군요."

하고 천연스럽게 무경이도 대꾸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차에 내리셨답니다."

"그럼 어데 여관에 들으셨게?"

"저, 무언가, 비전옥에 !"

무경은 앞서서 사무실을 나와서 식당으로 갔다. 점심을 주문해 놓고 두 사람은 뻐끔히 마주 쳐다보았다. 묻고 싶은 사연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무경은 그것을 토설하기가 어쩐지 무서운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종내 꺽이었지. 아무 말씀 없이, 몸이 과히 상한데나 없니 하구 물으시던데……"

하고 벌쭉벌쭉 웃어서, 무경이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무경은 제 질문을 꾹 눌러서 억제하며 다시 시형의 말을 기다리려는 자세를 취한다.

"부자간의 정이란 우스운 건가 봐."

하고 시형은 혼잣말처럼 지껄였다.

"이 년 동안이나 편지 한 장 없으시던 분이 나왔다니까 그날루 쫓아오신 걸 보면."

무경은 그러한 말에도 별로 대꾸하지 않았다. 주문한 점심이 와서 두 사람은 덤덤히 식사를 마치었다. 다 먹고 나서 차를 마시며 시형은 다시,

"아버지가 시굴루 내려가자는군 그래."

하고 무경의 낯을 건너다보았다. 무경은 그 때에 가슴이 뚱하고 물러앉는 것 같은 충격을 경험하였으나 애써 낯색을 흥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입데 가져가던 찻종만 그대로 들고 있었다.

"몸두 쇠약했는데 서울 있어 가지구야 치료가 되겠니, 집에 가서 몸이나 좀 추세거던 어데 온천에래두 가서 정양을 해야지, 그리군 또 재판소에서두 이런 데서 주소두 일정치 않고 옛날 친구래두 내왕이 있구 그러면 앞으루 예심 종결이 공판에두 지장이 생기지 않겠느냐구……"

아버지의 말을 옮기듯 하고는 찻종으로 눈을 가리며 훌쩍 차를 마셨다.

무경은 마음이 좀 진정되는 것을 느꼈으나 시형의 말에 대해서 무어라고 대꾸할 만한 기력은 생기지 않았다. 그들은 식당을 나왔다. 테이블을 돌아 나오려고 할 때에 무경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고 잠시 탁자 언저리를 붙든 채 서 있다가 간신히 시신경(視神經)에 힘을 주면서 시형의 뒤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복도에 나와서는 곧바로 층층계를 향하여 걸었다. '제칠 천국' 같다고 하던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면서 무경은 덤덤히 생각에 잠긴다. 아파트에 들어와서 침대에 걸터앉은 시형의 낯을 보고야 무경은 의자에 앉으면서,

"도횐 공기도 나쁘구 그런데, 갈 데만 있으믄야 조용한 데루 가셔야죠. 그리구 재판소에서두 역시 서울서 빈둥거리는 것보다는 가정이 있는 곳으루 가 계시는 걸 좋아할 거에요."

하고 비로소 명랑한 어조로 말하였다. 시형은 힐끗 무경의 웃는 낯을 건너다보았으나, 그의 심정을 모를 마치 둔감도 아니란 듯이 침대에 눕더니,

"옛날과는 모든 것이 다른 것 같애. 인제 사상범이 드무니께 옛날 영웅 심리를 향락하면서 징역을 살던 기분두 없어진 것 같다구 그 안에서 어느 친구가 말하더니……달이 철창에 새파랗게 걸려 있는 밤, 바람 소리나, 풀벌레 소리나 들으면서 잠을 이루지 못할 때엔 고독과 적막이 뼈에 사모치는 것처럼 쓰리구…… "

그렇게 가느다랗게 독백처럼 말하고 있었다. 무경은 돌아서서 창 밖을 바라보는 척하면서 수건으로 가만히 눈을 닦았다.

그렇게 하고 그렇게 하고 사흘째 되는 날이다. 한 달을 두고 가물던 날씨가 물쿠고 무덥고 그러더니 드디어 장마가 시작되었다. 비가 내리다간 그치고 그쳤다간 또 맥없이 내리고 하는 오후에, 오시형은 저희 아버지를 따라 평야으로 떠났다. 종내 그들은 무경이를 정식으로 알려고도 소개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나, 무경은 그런 것에 개의하지 않고 정거장까지 나가서 시형의 떠나는 것을 보았다.

정거장을 나와서, 아주 영영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떠나 보낸 것 같은 슬픈 심회를 가슴에 지니고 비 내리는 전차에 올라탔다. 후줄구니 젖어서 물이 흐르는 우장 외투를 그대로 입은 채 그는 사무실에도 들리지 않고 곧바로 시형이가 들었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새 양복과 바꾸어 입은 뒤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고 간 세탁 한 낡은 시형의 양복이 침대 위에 뒹굴고 있었다. 신장으로 여니까 무경이가 손수 닦았던 꼬드라진 낡은 구두도 초라하게 들어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수구의 화분――며칠째 물을 못 먹고 그것은 희끄므레하게 말라들고 있었다. 다시 물감을 부처도 빨개질 것 같지도 파래질 것 같지도 않게 시들어 버리고 있었다.

――시형이를 위하여 얻었던 방이었다. 시형이를 맞기 위해서 저금 통장을 빈텅이를 맨들면서 장식해 보았던 방이었다. 그는 인저 가 버리고 여기엔 없다.

――시형이를 위하여 나섰던 직업 전선이었다. 시형의 차입을 대기 위해서 선택하였던 직업이었다. 시형이도 나오고 인제 직업도 목적을 잃어버렸다.

무경은 가만히 앉아서 빗발이 유리창 위에 미끄러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회색빛의 멍한 하늘이 얼룩덜룩하게 얼룩이 져서 보인다.

――어머니에겐 정일수 씨가 생기고, 인저 나는 어머니에게도 필요치 않은 딸이 되었다.

울고 싶은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제 몸에서 빈 껍질만 남겨 두고 모든 오장과 육부가 몽땅 빠져 나가는 경우가 있었으면 하고 막연히 그런 경지를 생각해 보고 있었다.

그런데 똑똑 노크 소리가 나고 급사가 문을 열었다.

"주인님이 나오셔서 장부 좀 보시잡니다."

급사의 말에 그는 정신을 차려 몸을 일으킨다. 그는 문에 쇠를 잠그고 층계를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점점 제 다리에 기운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방도, 직업도, 이제 나 자신을 위하여 가져야겠다 !)

그런 생각이 사무실을 들어설 때에 그의 마음 속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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