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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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내 모든 것이 싫었다. 말하자면 속옷을 갈아입고 넥타이를 반듯하게 잡아매고 그 귀에 양복을 말쑥하게 손질해 입는 것이 귀찮을 뿐 아니라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도 기실 큰 짐이었다. 어쩌면 국이 덤덤하고 장맛이 소태같이 쓰고 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사렸다. 그러자니 혹 전차 안에서나 다방 같은 데서 친한 동무를 만나서도 꼭 않아서는 안 될 인사말밖에 건네지 않았다. 속마음으로는 미안한 줄도 아는 것이지마는 하는 수 없었다. 대관절 사람이 모두 귀찮은 데는 하는 수 없었다. 그래서 금년 여름 동안은 아주 사무적인 이외에 겨우 몇 사람의 동무와 만나면 바둑을 두거나 때로는 빌리어드를 쳐봐도 손들이 많이 오는 데보다는 될 수 있으면 한산한 곳을 찾았다. 그다지 좋아하던 맥주조차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그만이었다. 그다지 자주는 못 만나도 그리울 때면 더러는 찾아가 보고자 한 적도 있었건만 도무지 몸이 듣지 않는다. 대개는 제대로 만들어진 기회에 길손처럼 만나서는 흩어지고 잠자리에 누워서 뉘우쳐 보는 것이어서 이제야 비로소 뉘우친다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 여름 동안은 책 한 권 책답게 읽어 보지 못했다. 전과 같으면 하늘이 점점 맑고 높아 오는 때면 아무런 말도 없이 내 가고저운 곳으로 여행이라도 갔으련만 어쩐지 여정(旅情)조차 느껴지지 않고 몸도 마음도 착 까라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짐짓 가을에 뺨을 부비며 항분(亢奮)해 보고 울어라도 보고자 한 네 관습이 아직 살아 있었다는 것은 계절을 누구보다도 먼저 느낄 만한 외로움이 나에게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밤에 안두(案頭)에 쌓여 있는 시집들 중에서 가을에 읊은 시들을 한두 차례 읽어 봤다. 그 중에서 대표적이고 세상의 문학인들에게 한 번씩은 으레 외지는 것으로 폴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를 비롯하여 르미이 드 구르몽의 <낙엽시>와 <가을의 노래>는 너무도 유명한 것이지마는, 이 불란서의 시단을 잠깐 떠나서 도버해협을 건너면 존 키이츠의 <가을에 붙이는 시>도 좋거니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낙엽시>도 읽으면 어딘가 전설의 도취와 청춘의 범람(氾濫)과 영원에의 사모에서 출발한 이 시인의 심각해 가는 심경을 볼 수 있어 좋으려니와, 다시 대륙으로 건너오면 레나우의 <추사(秋思)>, <만추(晩秋)>는 읊으면 읊을수록 너무나 암담하고 비창(悲愴)해서 눈이 감겨지는 것이나 다시 리리엔 크론의 <가을>같은 것은 인상적이고 눈부신 즉흥을 느낄 수 있는 가을이언마는 철인 니체의 <가을>은 그 애매(愛妹)의 능변으로도 수정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을 찢어 놓는 <가을>이다.

여기서 다시 북구(北歐)로 눈을 돌리면 이곳은 지리적인 까닭일까, 가을이 원체 짧은 까닭일까. 가을을 읊은 시가 다른 지역보다 매우 적은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러시아의 몇 날 안 되는 전원의 가을을 읊은 세르게이 에세닌의 <나는 아끼지 않는다>라든지, <잎 떨러진 단풍>과 <겨울의 예감> 등등은 농민들의 시인으로서 그가 얼마나 망해 가는 농촌의 구각(舊殼)을 애상해 한 데 천부의 재질을 경주했는가 엿볼 수 있어 거듭거듭 외보거니와 여기서 나의 가을 시 순례는 마침내 아시아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그 중에도 시문악의 세계적 고전이며 그 광희가 황황(煌煌)한 3천 년 전의 가을을 읊은 시전(詩傳) <국풍겸가장(國風兼가章)>을 찾아보고는 곧 번역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제 것이나 남의 것을 가릴 것 없이 고전을 번역해 본다는 데는 망령되이 붓을 댈 것이 아니라 신중한 태도를 가질 것은 두말 할 바 아니나, 그것이 막상 문학인 데야 번역 안 될 문학이 어디 있겠느냐는 철없는 생각에 나는 그만 그 일장을 번역해 보고 말았다

갈대 우거진 가을 물가에
찬 이슬 맺어 무서리 치도다.
알뜰히 못 잊을 그 님이시고
이 강 한 가 번연히 계시련만.
물따라 찾아 오르려 하면
길은 아득해 멀기도 멀세라.
물따라 찾아 내리자 하면
그 얼굴 그냥 물속에 보여라.

이렇게 겨우 3장에서 1장만을 역했을 때다. 홀연히 사지가 뒤틀리는 듯하고 오슬오슬 추우면서 입술이 메마르곤 하였다. 목 안이 갈하고 눈치가 틀리기도 하였지마는 그냥 쓰러진 채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다음날 아침에 자리에 일어났을 때는 머리가 무거운 것이 지난밤 일이 마치 몇천년 전에도 꿈속에서나 지난 듯 기억에 어렴풋할 뿐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나는 병이란 것을 깨달았다. 다만 가을에 대한 감상만 같으면 심경에나 오지 육체에 올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딴은 때가 늦었다. 웬체 나라는 사람은 황소같이 튼튼하지는 못해도 20년 내에 물에 씻은 듯 감기 고뿔 한 번 시다이 못해 보고 병없이 지내온 터이라 병에 대한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고, 때로 혹 으스스하면 좋은 양방(加味淸酒鷄卵湯 이란 것이 있어 酒黨들은 국적을 물을 것도 없어 대개 짐작을 한다)이 있어 요번에도 그것이면 무려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병이라고 생각한 때는 병이 벌써 뿌리를 단단히 박은 때요, 사실 병이 시작된 때는 첫여름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귀찮고 거북하고 말조차 여러 번 하기 싫었던 모양인데, 미련한 게 인생이고 미련한 덕분에 멋모르고 가을까지 살아 왔다는 것은 아무런 기적이 아니라 고열에 시달리면 매약점에 들어가 해열제를 한 봉 사고 아무 데나 다방에 들어가면 더운 가배와 함께 마시면 등골에 땀이 촉촉하게 젖으며 그날 볼 잡무를 다 볼 수 있는 게 신통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권태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여기서 나는 또 한 가지 묘책을 얻었다는 것은 요놈 쉴 새 없이 나를 습격해 오는 권태를 피하려고 하지않고 권태를 될 수 있는 대로 친절하게 달래어서 향락하려고 했다. 그래서 흉보지 않을 만하면 사무실, 응접실, 살롱 할것없이 귀가 묻힐 만큼 의자에 반은 누운 듯 지내왔다. 담배를 피우며 입술을 조붓하게 오므리고 연기를 천장으로 곱게 불어 올리는 것이었다. 거기에 나는 갠 날의 무지개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와 마주 앉은 벗들에게 무료를 느끼지 않도록 체면을 차리자면 S는 희랍이나 로마의 신화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나도 열이 내린 틈을 타서 서반아의 종교 재판이나 <아라비안 나이트>의 어느 대목을 되풀이하면 그 자리는 가벼운 흥분이 스쳐갔다.

그때는 벌써 처마 끝에 제법 굵은 왕벌들이 날아들었다 간 다시 먼 곳으로 날아가고, 들길가에 보랏빛 들국화가 멀지 못한 서릿발에 다투어 고운 날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나는 또 길들을 걷기에 재미를 붙여 보려고도 했다. 혼자 아침 이슬이 아직 마르기도 전에 시외의 나만가는(나는 3,4년 동안 나 혼자 거닐어 보는 숲이었다) 그 숲속으로 갔다. 거기도 들국화는 피어 햇살을 기울게 받아들일 때란 숲속에서만 볼 수 있는 운치와 어울려 마치 보랏빛 연기가 피어 오르는 듯 그윽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곳을 오래 방황할 수는 없다는 것은 으슬으슬 추워지는 까닭이며 따라 내 몸이 앓고 있다는 표적이라 짜증이 나고, 그래서 짚고 간 지팡이로 무자비하게도 꽃송이를 톡톡 치면 퉁겨진 꽃송이들은 낙화처럼 공중을 날아 내 머리와 어깨 위에 지는 것이고, 나는 그만 지쳐서 가쁜 숨을 돌리려고 마친 사람처럼 길을 찾아 나오곤 했다.

길옆 잔디밭에 앉아 숨을 돌리며 생각해 본다. 아무리해도 올 곳은 마음은 아니었다 하지마는 길 가는 놈은 어째서 나를 비웃고 지나는 거냐? 대체 제놈이 무엇인데 내가 보기엔 제가 미친 놈이 아니냐 ? 그꼴에 양복이 무슨 양복이냐? 괘씸한 녀석하고 붙잡아 쌈이라도 한판 하지 않으면 내 화는 풀릴 것 같지 않아서 보면 벌써 그 녀석은 어딘지 가고 없다. 이 분을 어디다 푸느냐? 곰곰이 생각하면 그놈 한 놈뿐만 아니라 인간 놈이란 모두가 괘씸하다. 어째서 나를 비웃고 업신여기는 거냐, 내가 누군줄 알고, 나는 아직 이 세상에 네까짓 놈들 하고 나서 있지 않다. 나는 아직 이 세상에 네까짓 놈들 하고 나서 있지 않다. 또 언제 이 세상에 태어날는지도 모르는 현현(玄玄)한 존재이다. 아니꼬운 놈들이로군 하고 별러댈 때에는 책상에 엎어진 채로 열이 40도를 오르락내리락한 때였다.

벗들이 나를 달랬다. 전지 요양을 하란 것이다. 솔깃한 말이라 시골로 떠나기로 결정을 했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갈 곳이 어디냐? 한 번 더 생각해 보지 않 수 없었다. 조건을 들면 공기란 건 문제 밖이다. 어느 시골이 공기 나쁜 데야 있을라구. 얼마를 있어도 싫증이 안 날데라야 한다. 그러면 경주로 간다고 해서 떠난 것은 박물관을 한 달쯤 봐도 금관, 옥적(玉笛), 봉덕종(奉德種), 사사자(砂獅子)를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날 까닭은 원체없다. 그뿐인가, 어디 일초 일목(日草一木)과 일토 일석(一土一石)을 버릴 배 없지마는 임해전(臨海殿) 지초(支礎)돌만 남은 옛 궁터에서 가을 석양에 머리칼을 날리며 동남으로 첨성대를 굽어보면 아테네의 원주(圓柱)보다도, 로마의 원형 극장보다도 동양적인 그 주란 화각(朱欄畵閣)에 금대 옥패(金帶玉佩)의 쟁쟁한 옛날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거기서 나의 정신에 끼쳐 온 자랑이 시작되지 않았느냐? 그곳에서 고열로 인해 죽는다고 하자. 그래서 내 자랑 속에서 죽는 것이 무엇이 부끄러운 일이냐? 이렇게 단단히 먹고 간 마음이지만, 내가 나의 아테네를 버리고 서울로 다시 온 이유는 시골 계신 의사 선생이 약이 없다고 서울을 짐짓 가란 것이다. 서울을 오니 할수없어 이곳을 떼를 쓰고 올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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