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상/서양의 사상/고대의 사상/고대의 사상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고대의 사상〔槪說〕[편집]

기원전 6세기경의 그리스에서는 본토보다도 식민지에서 문화가 더 발달되었다. 특히 그리스 민족 중의 한 종족인 이오니아인이 이주한 소(小)아시아 서해안의 식민지는 무역활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다른 여러 나라와의 접촉이 잦은만큼, 전통적인 습속(習俗)이나 관념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학문 탄생의 모태(母胎)인 자유정신, 합리정신(合理精神)의 발생과 출현을 보게 되었다. 특히 이오니아 식민지의 중심도시 밀레투스(Miletus)에 있어서 그러하였다. 철학의 할아버지라 불리는 탈레스와 그의 제자·학우들로부터 그리스 철학의 제1기인 자연철학(自然哲學)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의 그들의 관심사는 외견상 잡다하고, 변화 무궁한 자연현상의 근저에는 어떤 근본물질, 즉 원질(原質)이 있어서 이 원질의 변형·변화에 의하여 만물이 생성하리라는 신념하에, 그러면 이 원질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였다. 탈레스는 이것을 물이라고 하였는데, 그 후 약 100년간 이를 공기(空氣)라고 한 사람(아낙시메네스), 무어라 규정지을 수 없는 '무한자(無限者)'라고 한 사람(아낙시만드로스), 불이라고 한 사람(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수(數)라고 한 사람(피타고라스), 혹은 다(多)와 변화를 감각의 미망(迷妄)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불생불멸(不生不滅)·불변부동(不變不動)·유일절대(唯一絶對)의 신(神) 혹은 '유(有)'를 주장한 사람(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혹은 어떤 한 개의 원질만 가지고서는 삼라만상을 설명하기에 불충분하다 하여 원질을 수(水)·화(火)·공기(空氣)·지(地)의 4종이라고 한 사람(엠페도클레스), 이 4종으로도 부족하다 하여 질적(質的)으로 상이한 무수한 '종자(種子)'를 원질로 한 사람(아낙사고라스), 끝으로 모든 질적 차이를 양적(量的) 차이로 환원하고, 만물은 질적으로는 동일하나 오직 형태상으로만 차이가 있는 불가분할(不可分割)의 '원자(原子)'로부터 성립한 것이라고 주장한 사람(데모크리토스)들이 연달아 나타났다. 이와 같이 그리스 철학의 제1기는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러 완성되었으나 전 5세기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가 정치 문화의 중심지가 되자 자연계보다 인간계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이에 따라 그리스 철학은 제2기인 인간 연구기(人間硏究期)로 들어가는데, 그때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소피스트들이었다. 개인의 문제를 흥미의 중심으로 하고, 따라서 국가 전체를 분리하게 한 그들의 운동이 그리스 시대의 계몽운동이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개인은 자기의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인민집회(人民集會)나 법정(法廷)에 있어서, 상대편을 설복할 수 있는 교양을 간직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교양을 전수(傳受)한 것이 소피스트들인데, 그때 그들에게 있어서는 일체의 인식의 완전한 상대성(相對性)이 철학상의 가정(假定)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부정(不正)도 정(正)으로 만들 수 있다"고 공언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그들의 철학에는 많은 부정적인 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적인 맹아(萌芽)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인간을 고찰의 중심으로 한 것은 인식론(認識論)과 윤리학의 연구를 촉진시켰고, 또 학문·법률·도덕·종교 등에 있어서의 일체의 보편타당성에 대한 소피스트적 부정이야말로 이러한 인류의 재보(財寶)를 위한 전사(戰士)로서의 소크라테스를 분기(奮起)시킨 기연(機緣)이 되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소크라테스는 인심을 거스른 사고로부터 각성시키려고 한 그의 태도 때문에 근시안적인 아테네의 주권자로부터 소피스트로 간주되고 기원전 399년 독배를 마시게 되었다. 그는 실제적인 교육가로서 한 권의 저서도 남기지 않았다. 소크라테스가 비명(非命)의 생애를 마친 뒤에 그의 제자들은 분열하여, 진정한 철학적 견지를 유지하려고 한 일파와, 스승으로부터 단순히 도덕적 자주만을 받아들여 오직 이 일면의 수양만을 문제삼은 사람들로 분파(分派)되었다. 후자에 속하는 것은 키니코스 학파와 키레네 학파이다. 키니코스 학파에 있어서 덕(德)이란 무욕(無欲)이었다. 그들은 이 원칙을 철저히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 실천하고 고대 수도승(修道僧)으로서 각지를 방랑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시범을 보였다. 이 키니코스 학파와 정반대되는 키레네 학파는 '덕이란 향락이다'라는 쾌락주의(快樂主義)의 철학을 창도하였다. 이 두 학파 및 그 밖의 소위 '불완전한 소크라테스의 무리'에 대해 진정한 철학의 길을 걸은 유일한 고제(高弟)로서 대립하는 것은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초기의 <대화편(對話篇)>에서는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하여 주로 도덕적인 개념을 엄밀히 규정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그 후 점점 인식론적·형이상학적으로 심화되어, 모든 감성적인 것의 원형(原型)으로서 영원불멸한 이데아(idea)에 관한 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플라톤의 제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플라톤의 철학은 초월론적(超越論的) 2원론(二元論),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은 내재적(內在的) 2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플라톤은 끊임없이 유전변화(流轉變化)하고, 우리의 감관지각(感官知覺)의 대상인 현실계(現實界)를 넘어선 곳에 그 원형이요 이상인 이데아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초월론적인 세계의 존재론을 인정하지 않고 이데아를 사물 가운데 내재하는 것이라 하였다. 다시 말하면 사물은 이데아(이 말은 형상·본질·본성을 의미한다)와 그 기저(基底)로서의 질료(質料) 등 두 요소로부터 성립하는 것이며, 질료가 그 이데아를 완전히 실현하려고 하는 곳에 운동·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이 세운 학교 '아카데미아'를 스승 사후에 떠나 자신의 학교인 리케이온(Lykeion)을 거닐면서 강의하였으므로, 후세에 그의 학파를 소요학파(Peripatetics)라고도 한다. 그는 철학자·형이상학자일 뿐만 아니라 경험에 있어서 주어진 모든 것을 존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체의 지식을 포괄하려는 희망을 품은 최초의 사람으로서, 자연과학·역사·교육·문학·정치 등의 연구를 자신도 하고 제자들에게도 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22년에 사망하였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시대의 상황에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나고 있었다. 고전적 그리스는 헬레니즘 시대로 들어가고, 국가적 지반의 상실과 더불어 개인주의는 결정적 승리를 거두고 자기 자신 외에는 의지할 곳을 가지지 못한 개인을 위하여 실천적 생활규범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 이 시대 이후에 발생하고 그 후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 여러 학파는 형이상학이나 물리학도 연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윤리학 특히 개인윤리학이었다. 형이상학적 노력은 헛된 것이 되고 주체(主體)는 자기 자신 속에 침잠하였다. 그리고 스토아 학파는 외물(外物)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족(自足)한 현자(賢者)의 심경을, 에피쿠로스 학파는 진정한 내적(內的) 쾌감을 추구하고, 회의학파(懷疑學派)는 외계(外界)의 모든 것을 의심하였다. 스토아 학파의 활동은 기원전 300년경으로부터 로마 제정시대까지 계속되고, 에피쿠로스 학파도 수백 년 동안 큰 영향을 미쳤다. 고대철학은 신지학(神智學, theosophy)에 의하여 완결된다. 인간지(人間知)의 불완전성이 증명되었으므로 구제는 신앙에 의하여 획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후로 다시 또 한번, 여러 선행학설(先行學說)을 기초로 하여 시대의 요구에 응한 일종의 철학을 구성하려는 시도가 행하여졌다. 이에 대한 초석(礎石)은 대부분 플라톤의 이데아 설이 제공하였다. 일체 사물의 정신적 본원(本源)으로서 이데아를 내세우고, 이데아의 창조자로서는 신(神)을 생각하고, 신비적 직관(直觀)에 의하여 신의 경지를 체험하려고 하는 것이 신플라톤 학파의 근본사상이었다. 그 주요 대표자는 플로티노스(Plotinos, 204-270)였다. 신플라톤 학파나 이와 유사한 경향은 이에 대항하는 일대 세력으로서 기독교가 출현하자 압도되었다. <孫 明 鉉>

창성기의 사상[편집]

창성기의 사상[편집]

創成期-思想 유럽 문명에는 두 조류가 있다. 하나는 그리스 사상이며 다른 하나는 유대 그리스도교 사상이다. 따라서 유럽에 있어서 모든 학문은 합리적인 기초를 그리스 사상에 두었고, 또 유럽인에 있어서 종교적 신념의 원천은 그리스도교에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광대한 두 사조는 서구인의 피요 살이다. 이 두 사상에는 유사한 기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화적 우주관(宇宙觀)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우주관은 그리스에서는 오르페우스신의 계보와 헤시오도스의 <신통기(神統記)>, 헤브라이에서는 구약성서의 <창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계는 어떻게 생성되었는가를 말해 주는 일종의 세계창조설이며 발생설이다. 그리하여 창성기의 사상이라고 말할 경우에는 그 어느 것과 관련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 사상의 시원(始原)에 있어서는, 종교적 사색의 변천과 보다 많은 자연철학의 성립을 의미한다. 즉 헤시오도스의 세계발생설에서부터 이오니아 학파 형성까지의 추이이고, 더 나아가서 그리스 철학에서의 우주론 시대, 결국 '소크라테스 이전'까지를 창성기의 사상에 포함시킬 수가 있다. 헤시오도스는 기원전 700년경의 사람으로 보에오티아의 아스크라에 살던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삶의 노고와 환경의 중압을 체험하였고 호메로스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쾌활하다기보다 착실한 시인으로, 그의 시는 교훈시(敎訓詩)였다. 시작(詩作)의 동기는 그가 양을 몰고 있을 때에 여신 뮤즈가 나타나서 우아한 노래를 가르쳐, 진실 그 자체를 부여(附與)하였다고 한다. <신통기>는 그것의 결정이라 하겠다. "먼저 카오스(混沌)가 있었다. 다음으로 가슴팍 넓은 가이아(地)가, 더욱 어둠침침한 황천이, 그리하여 또 에로스(愛)가 …" 이렇게 시작되는 <신통기>의 중요성은 철학적 우주론의 선구가 되었다. 그 선구라고 하는 것은 유일의 근원에서 에로스를 위시한 것들을 끌어낸다고 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에서, 신의 발생설로부터 세계발생설이 분리되려 하고 있다. 여기에 이오니아 철학의 관심과 탐구의 방향이 중복되는 면이 있다. 기원전 6-7세기에는, 그리스 문화의 발전에 있어 개인적 의식의 해방이 진전되고 있었던 시대라고 말한다. 그 지역은 그리스 본토가 아닌 소아시아의 에게해에 면한 이오니아 지방이었다. 무역에 의한 부(富)의 증대는 생활의 순화(醇化)와 정신화를 초래하였고, 상업의 발달은 빈부의 차이와 새로운 계급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에 수반되어 격렬한 정치투쟁이 일어났고, 개인의 능력은 고개를 쳐들었으며, 위대한 인물은 개성을 발휘하려 했다. 그리하여 신변의 사정에 예민한 눈과 마음을 활동시켰으며, 그것도 신화의 형식에 속박되지 않고 경이와 의문을 마음껏 풀어 나갔다. 자유롭게 묻고 자유롭게 답변하는 개념적인 사고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비로소 그리스 학문은 창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자연철학으로, 격동하는 밀레투스에서 탄생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밀레투스 학파[편집]

Miletus 學派 그리스 최초의 철학파이다. 중심지는 밀레투스로서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에 있는 상업도시이다. 학파의 명칭은 그 지명에서 유래하였다. 이 학파의 기원을 이룬 사람은 밀레투스의 탈레스이고 다시 아낙시만드로스와 아낙시메네스로 이어진 세 사람이 대표자이다. 그들을 둘러싼 자연은 그들에게 경이로 다가섰고, 그 경이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여기에 탐구를 주로 하는 철학정신 최초의 특색이 있다. 이 정신은 자연을 설명할 수 있는 아르케(原理)에 부딪침으로써 일단락을 짓는다. 변화무쌍한 현상(現象)의 근저(根底)에는 항상 존재하여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지 않을까. 이 물음이 제1원인에 이르는 길을 촉진시켰다. 탈레스는 물을, 아낙시만드로스는 드 아페이론(혼돈된 原物質로서 無限者)을,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제1원리라 하였다. 여기에 오직 물질만이 만물의 근원이라고 하는 철학이 탄생한다. 탈레스는, 만물은 신(神)들로 충만해 있다고도 말하였다. 물질 자체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가령 쇠를 잡아당기는 자력(磁力)이 그에게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물질 속에는 힘이 있고 생명이 있다. 이것이 근세의 자연과학으로 겨우 제거된 물질관, 즉 '물활론(物活論)'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법은 밀레투스 학파의 한 사고방식을 특징짓고 있다. 또 '질료(質料)'와 '생명'이라는 두 단어에서 만들어진 근세의 용어이다.

탈레스[편집]

Thales(전 640-전 546) 그리스의 철학자. 밀레투스 출신으로, 밀레투스 학파의 창시자이며 서양철학의 개조(開祖). 별의 관측에 열중하여 샘에 빠졌을 정도였고, 일식(日蝕)을 예언하였다. 올리브를 매점(買占)하여 돈을 벌었다는 등 에피소드가 많은 인물로, 이집트에도 건너갔던 것 같다. 만물은 왜 이렇게 있고 그렇게 되어 있는가를 추구하였다. 그리하여 물을 근원으로 앞서 한 질문에 대해 설명하였고 물을 아르케(원인·원리)라 하였다. 무릇 모든 것은 물에서 나와 물로 형성되고 물로 돌아간다. 근본적 물질의 자기운동(自己運動)이 인정될 수 있고 신화적(神話的) 우주관은 학적(學的) 세계관으로 전환되었다. 종교에서 과학으로 향해 가는 깊은 자연철학으로서 출발하게 되었다. 특히 탈레스는 비아스(전 6세기), 피타코스(전 650경-전 570경), 솔론(전 638경-전 559경) 등과 더불어 그리스 일곱 현인(賢人)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한 권의 저서도 남기지 않았다.

아낙시만드로스[편집]

Anaximandros (전 611-전 546 이후)밀레투스 사람으로 그리스의 철학자인데, 탈레스보다 젊었으나 친구였고 제자였다. <자연(自然)에 관하여>라는 최초의 철학적 저서를 썼다고 하나, 단 하나의 문장만이 남아 있다. 수학·천문학·지리학에도 뛰어나서 지도를 만들고 성도(星圖)도 그렸으며, 해시계도 발명하였다. 또한 그는 식민지 건설도 지도하였다고 한다. 학설은 독창적이었고, 만물의 시원을 '무한한 것(apeiron)'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처음도 끝도 없다. 모든 것은 거기서 일어나 거기로 사라진다. 그것은 단순한 개념과 같은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것 혹은 저것이라고 한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물질적인 것이지 정신적인 것은 아니다. 영원히 스스로 움직이는 것으로 거기에서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의 대립이 생겨나고,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성에 따르면서 소멸하여 다시 시원으로 돌아간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낙시메네스[편집]

Anaximenes (전 585-전 528경) 밀레투스 출신으로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이며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달은 태양에 의해서 빛난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였다고 전하며 유성(遊星)을 항성(恒星)과 구별하였다. 특히 그는 만물의 시원을 공기라고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호흡 관찰이 이러한 설(說)을 생각해낸 동기였던 것 같다. 원리는 '농후(濃厚)'와 '희박(稀薄)'이라 하여 모든 것은 공기에서 생기고 공기로 해체된다. 그 과정에서 흙·물·불·바람 등이 생긴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영혼은 공기(空氣)이며, 그것이 우리를 통괄하고 있는 바와 같이 불어서 나는 입김과 공기가 전세계를 포옹하고 있다" 라고 말했다. 이오니아 정통파(正統派)의 철학자로서 큰 영향을 끼쳤다.

피타고라스 학파[편집]

Pythagoras 學派 그 명칭이 나타내듯이 이 학파는 피타고라스를 기원으로 하여 출발한 학파이다. 또는 그 학설과 신조를 신봉하는 이른바 피타고라스의 교단(敎團)을 뜻하기도 한다. 피타고라스 자신은 '피타고라스의 제자'와 '피타고라스 주의자'를 구별하였다. 그리하여 '피타고라스의 제자'를 정통적인 후계자로 정하였다고 전한다. 그 제자들 가운데는 이론과 실천을 결부시킨 테베의 필로라오스(전 5세기), 탈라스의 아르키타스 등을 꼽고 있다. 이 학파의 교설은 수학과 종교이며 나아가서 가족·생활법·음악·의술·정치·조화(調和)·우주생성론에 이르고 원리가 물질이 아닌 사고물(思考物)로 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즉 "만물의 원리는 수(數)이며 만물은 수를 모방한다"라고 말하였다. 윤회(輪廻)·전생(轉生)을 신봉하고 재산을 공유로 공동생활을 영위하며 살생을 피하고, 조화적 생활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학파는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기원전 1세기에는 신(新)피타고라스파라고 불리었다.

피타고라스[편집]

Pythagoras (전 583경-전 497경) 그리스의 철학자·수학자. 보석 세공사의 아들로, 사모스 섬에서 출생하였다. 페레키데스와 헤르모다모스에게 사사하였다고 한다. 이탈리의 크로톤에서 20년간을 지냈으며 그 곳에서 법률을 제정하고 제자들과 더불어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특히 피타고라스 교단을 조직하여 의술(醫術)로써 육신을 닦고 음악으로 마음을 닦는다는 지론을 몸소 실천하였다. 후에 메타폰타온으로 이주하여 80세 혹은 9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엘레아 학파[편집]

Elea 學派 이 학파의 진정한 창시자는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인데 콜로폰의 크세노파네스(Xenophanes)라고 하는 설도 있다. 중심지는 남이탈리아 소도시인 엘레아(Elea)이며 후계자로서는 엘레아의 제논(Zenon), 사모스의 멜리소스(Melissos, 전5세기) 등이 있다. 이 학파는 그때까지의 우주론적(宇宙論的) 사색을 반성하여 형이상학적인 사색을 전개해 나갔다. 유일한 것으로서 변화하지 않는 존재를 추구하였고, 영원의 유전(流轉)을 존재로 하는 헤라클레이토스와는 대조적인 입장이었다.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인 멜리소스는 원리를 불생(不生)·불멸(不滅)이라 하였다. 영원과 무한(無限)을 주장하고 더욱이 존재자(存在者)는 유일(唯一)의 것으로서 무형(無形)이라고 하였다. 이 학파의 특색은 논증(論證)과 설득이라는 학(學)의 방법에 기여한 것이다.

크세노파네스[편집]

Xenophanes (전 565-전 480) 그리스의 시인·철학자. 소아시아의 콜로폰에서 출생하였다. 페르시아군의 침입을 받자 엘레아로 망명했고, 생활을 위하여 자작(自作)한 시를 읊으면서 방랑하였다. 그는 80세가 넘도록 장수하였다고 한다. <자연에 관하여>란 교훈시가 있으며, 시형(詩型)은 서사시로서 애가조(哀歌調)이다. 그는 전통적 종교에 대한 통렬한 비판자로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까지도 공격을 하였다. 그들이 인간의 도둑질·악덕·간음 등의 업(業)을 만들어 내고는 그것을 신(神)에게로 돌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철학은 자연철학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시와 반성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탈레스나 피타고라스와는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즉 신이란 태어난다든지 죽는 것이 아니고, 신은 불변부동하여 하나이면서 동시에 일체인 것이며 비물체적인 것이다. 생성(生成)하는 것은 흙과 물이며, 모든 것은 흙에서 나와 또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일자론자(一者論者)이며 그리스 철학사를 일보 전진시켰다고 보겠다.

파르메니데스[편집]

Parmenides (전 515경-전 445경) 그리스의 철학자. 엘레아 출신으로 크세노파네스의 제자이다. 그러나 그의 스승을 크세노파네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가난하였지만 훌륭한 아메이니아스(Ameinias)와 사귀어 그의 지론을 신봉하였고 조용한 생활을 보냈다. 플라톤(Platon)의 저서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기원전 515년에 출생했으리라고 추정되며, 적어도 65세 이상은 살았다고 여겨진다. 판아테나이아 대제(大祭)에 제논(엘레아의)과 더불어 아테네에 나타났을 때에는 이미 고령이었고, 젊은 소크라테스와 만난 적이 있었던 것이다.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 중에서 짐작하건대 모든 점에서 고귀하고 무언지 모를 심오한 것이 있었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하였다. 그의 철학은 철저한 존재론(存在論)이다. 이것은 <자연에 대하여>라는 서사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시는 <진리의 길>과 <억견(臆見)의 길>로 나누어져 있으니 전자는 탐구의 길, 후자는 탐구되지 않는 길이다. 앞의 경우 그것은 있다, 그것은 있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란 바로 존재자(存在者)요, 그것에로의 길이 진리에 따르는 설득의 길인 것이다. 뒤의 경우, 그것은 있지 않다, 있지 않는 것은 필연, 없는 것은 알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존재(非存在)이기 때문이요, 그것에로의 길이 억견의 길이다. 사유(思惟)란 존재와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사유하는 것과 있는 것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있는 것만을 있다고 하고 또한 생각하는 일이다. 존재자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완전무결이며 부동(不動)의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구체(球體)라고도 한다. 그의 철학은 그리스 존재론의 극단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논증력(論證力)을 웅변으로 말하여 준다. 그래서 그를 논리학의 시조라고 일컫는다.

제논[편집]

(엘레아의) Zenon (전 490-전 430경) 그리스의 철학자. 엘레아 출신으로 파르메니데스의 수제자로서, 변증법(辨證法)의 발견자이다. 엘레아 학파에 속하였고 운동부정론(運動否定論)과 제논의 역설(逆說)로 유명하다. 만약 나눌 수 있는 크기를 가정한다면 그것은 한없이 작아지고 반대의 것은 한없이 커진다. 나눌 수 있었던 것이 크기를 갖지 않으면 그것이 모인 것도 크기를 가질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이 그 역설의 한 예이다. 운동의 부정은 아킬레스(Achilles)의 논증(論證) 및 나는 화살의 정지론(飛矢靜止論)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빠른 주자(走者)도 느린 주자를 결코 앞지르지 못한다. 말하자면 느린 주자가 도달한 지점에 빠른 주자가 도달하는 동안에 느린 주자는 느린 주자대로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보면 이 일은 한없이 반복될 따름이지 결코 빠른 주자라고 하여 느린 주자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의 반복에 불과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또한 나는 화살도 각 순간에 있어서 부동(不動)이다. 공간(空間)의 무한 분할(無限分割)과 중심의 설정 등이 그 논증의 거점(據點)이 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연속(連續)과 무한(無限)의 포착하기 어려움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것은 획기적인 논증이었고, 이 문제가 극복된 것은 근대에 들어선 후의 일이었다. 헤겔은 이러한 논증을 변증법의 원리에 결부되는 것이라 하였다.

헤라클레이토스[편집]

Heracleitos (전 540경-전 480경) 그리스의 철학자. 에페수스(Ephesus) 왕가 출신으로서 어느 누구의 제자도 되지않고, 자신(自身)을 추구하여 모든 것을 독자적인 자기 자신으로부터 배우는 길을 걸었다. 그의 절개가 고매하여 '어두운 사람(ho skoteinos)'이란 별명이 붙었다. <자연에 대하여>란 저서를 저술한 듯한데, 그것은 우주론(宇宙論)·정치론(政治論)·신학론(神學論)의 3부로 되어 있다고 전하지만 현재 단편(斷片)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만물의 유전설(流轉設), 불의 철학자, 로고스(logos) 개념의 발견자로 저명하다. 로고스(logos)의 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기에 말해 둔 것은 항상 그대로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모르고 지나쳐 버린다. 비로소 그것이 들려와도 들리지 않던 전과 다름이 없다. 만물의 생성이 여기에 말해 둔 대로 행해지고 있는데도 그들은 그런 범례(範例)를 모르는 듯하다. 그러나 말에도 행동에도 그런 범례는 마땅히 있을 것이다."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불. "이 세계는 신이 만든 것도 아니며 어떠한 인간이 만든 것 또한 아니다. 언제나 살아 있는 불로서 정해진 만큼 연소되고 정해진 만큼 꺼지면서 언제나 있었고 또 있으며 언제까지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유전은 "만물은 움직이고 있어서 무릇 모든 것이 머물러 있지 않는다. 사람도 두번 다시 같은 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생성(生成)의 원리로서의 대립. "선(善)도 악(惡)도 하나인 것이다. 위로 향하는 길이나 아래로 가는 길도 다 같이 하나인 것이다. 우리 가운데에 있는 생(生)과 사(死), 각성(覺醒)과 수면(睡眠), 젊음과 늙음의 양상도 모두 같은 것이다. 이것이 전화하여 저것이 되고 저것이 전화하여 이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독창적인 사상가로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스토아 철학에 끼친 영향은 크다. 그리고 변증법적 유물론의 싹이 그 속에서 움텄다는 설(說)도 있는 등 여러가지로 말하지만 그의 철학은 만물의 근원을 불(火)이라 하는 일원론(一元論)이며, 우주론적 사색을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다.

다원론[편집]

多元論 그리스 사람의 두뇌는 대체 어떻게 되어 있기에 우리에게 경이(驚異)만 안겨 주는 것일까. 그때만큼 계속해서 뛰어난 성과를 만들어 낸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인간을 둘러싼 현상(現象)에 대하여 철저하게 탐구함으로써 자연철학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들 학문의 세계가 강력한 원리(原理)와 로고스(언어)를 획득한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 자신이 원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데에 있다. 정신이라든가 사랑과 미움 등이 설명의 원리로 된다. 처음에는 질료(質料:물·불 따위)로써 일체를 설명하였고 다음에는 형상(形相:一者·로고스)으로 대체하였다. 더 나아가서 이들 상호간 대립의 지양(止揚)을 생각해 냈으며, 특히 운동이란 것이 그 요결(要訣)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빠뜨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안이하게 운동을 운운해서는 안 된다고 훈계하고 있다. 어쨌든 자연과 세계, 일체의 구조를 일원론이나 이원론에 묶어 둔다면 넘쳐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 철학이 다원론 시대를 맞이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질료에 내재(內在)하는 원리는 원소(元素)를 한 개 또는 두 개로 한정해 버리면 포착할 수가 없다. 무수(無數)인 것이다. 보인다, 안 보인다, 그리고 잡힌다, 안 잡힌다에 구애받지 않고 다원(多元)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낙사고라스의 누스(Nous, 知性)도 지성물질(知性物質)이며, 엠페도클레스의 사랑과 미움은 여러 원소간에 작용하는 것이다. 더욱이 레우키포스의, 그리고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原子論)에 이르러서는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아낙사고라스[편집]

Anaxagoras (전 500경-전 428경) 그리스의 철학자. 소아시아의 클라조메네 명문가 출신으로 아테네에 30년간 체재하였다. "태양은 작열하는 금광(金鑛)의 덩어리"라고 말하여 고소(告訴)를 당하자 란프사코스로 떠났고, 72세로 사망하였다. 아낙시메네스의 제자이며, 누스(정신)를 물질의 상위(上位)에 둔 최초의 철학자이다. <자연에 대하여>를 저술하였는데 서두에 "모든 것이 다 같이 있었다. 그리하여 거기에 정신이 생기게 되면서 이것들에게 질서를 지어 주었다"라고 씌어 있다. 이 말에서 그는 누스의 사람이라 불리었다. 모든 것은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있는 것은 오로지 혼합(混合)과 분리(分離)뿐이다. 혼합하여 되는 것에는 갖가지 스페르마타(Spermata, 종자)가 포함되어 있다. 누스는 무한하여 무엇에도 혼합되지 않고 자기 혼자만으로 선회(旋回) 운동을 지배한다고 말했다.

엠페도클레스[편집]

Empedocles (전 493경-전 433경) 그리스의 철학자. 시칠리아의 아크라가스(Akragas)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의사이며 또한 달변의 변론자였고, 예언자에다 마법을 부렸다는 말도 전해진다. <자연에 대하여>와 <청결>은 5000행에 이르렀다고 하나 그 일부만 잔존한다. 그의 설(說)에 의하면 만물은 흙·바람·물·불의 4개 원소로 되어 있다. 즉 이들은 4개의 리조마타(Rizomata, 根)이다. 더욱이 불생(不生)·불멸(不滅)인 모든 것은 사랑에 의하여 결합되고 미움에 의하여 분리된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4원소(元素)와 그것의 결합과 분리의 원리인 사랑과 미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랑과 미움을, 운동이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는 시초로서의 운동인(運動因)이라 하였다. 엠페도클레스의 시적(詩的)인 자세는 횔덜린과 로맹 롤랑을 감격케 하여 시적인 표현에 있어서 그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었다.

레우키포스[편집]

Leucippos (전 440경) 그리스의 철학자·원자론자(原子論者). 엘레아 출신 또는 아브데라 혹은 밀레투스라 하여 일정하지 않으며, 생애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제논에게서 배웠다는 말도 있고 데모크리토스를 가르쳤다는 설도 있다. 생성(生成)도 소멸(消滅)도 부정하지 않으며,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수히 많다는 점도 인정하고 있다. 말하자면 지각(知覺)과 일치한다고 말하였으며, 현상(現像)은 그것에 적응하여 인정하였다. 운동을 인정하고, 그 귀결점을 충실한 것과 공허한 것으로 돌렸다. 충실이란 원자를 가리키며, 있는 것은 오로지 충실한 것이다. 그 수는 한 개가 아니고 무한(無限)인데 그 뭉쳐 있는 것이 작기 때문에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 원자나 운동도 공허가 없으면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이 초기 원자론이다. 그 후계자는 데모크리토스로서, 원자를 그리스어로 아토몬(Atomon)이라 하였는데 원래는 '불가분(不可分)'이란 의미이다.

데모크리토스[편집]

Democritos (전 460?-전 360?) 그리스의 철학자·원자론자. 아브데라(Abdera) 사람으로 '웃는 철학자(Ge La Sinos)'라는별명이 있었다. 아낙사고라스가 노년(老年)이었을 때에 그는 청년이었으며, 소년시절부터 천문학과 신학을 배웠다. 아테네에도 간 듯하나 그를 알아본 사람은 없었으며, 그만큼 그는 명성을 경멸하고 세상에 알려질 것을 스스로 원하지 않았다. 그 시대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많은 곳을 여행하였고 또 그만큼 많은 학자들과 사귀어 그들의 학설에 접할 수 있었으며, 그 당시 증명과 작도(作圖)에 그를 능가할 사람은 없었다. 저작은 윤리학·자연학·수학·음악·기술에까지 이르렀으나 주목되는 것은 원자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는 물체에 대해서 가장 학문적으로 일관된 이론을 세워서 설명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는 요소(要素)를 원자(atoma)와 공허(空虛=kenon)라 하였으며, 원자는 형태와 배열 그리고 위치의 차이로 달라진다. 그런데 그 원자는 공허 속에서 운동한다. 공허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원자와 원자가 합하면 생성이 되고 그들이 분리하면 소멸되며 또한 그들이 접촉되면 작용한다. 한 개의 원자에서 많은 것이 생성되지는 않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1에서 다(多)가 나올 수 없다. 공허는 원자와 원자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무(無)라고 하는 존재이다. 그렇다고 하면 원자에 있어서 최초의 운동은 어떻게 하여 일어날 것인가. 이것이 원자론에 남겨진 과제였다. 그 과제를 둘러싸고 에피쿠로스(Epicouros)와 루크레티우스(Lucretius)가 나오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원자론은 근대 물리학의 선구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아테네기의 사상[편집]

아테네기의 사상[편집]

Athene期-思想 강대국이었던 페르시아에게 굴복하지 않고 기어이 자유의 승리를 쟁취한 아테네는 그리스 전토의 폴리스군(群)을 규합하고 동맹을 맺어 맹주국이 되었다. 신구세력의 격렬한 분쟁 속에서 특히 페리클레스가 실현한 적절한 민주정치는 아테네 시민의 활동을 정치와 문화의 모든 영역에 걸쳐 충분히 신장시켰다. 이 시기에 그때까지 동과 서의 식민 도시에서 발생·발전한 학문과 사상이 일시에 아테네로 모여들었다. 그 전수(傳授)를 담당한 자는 아낙사고라스와 같은 자연철학자와 프로타고라스나 고르기아스와 같은 소피스트들이었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로도토스도 페리클레스에 심취하여 튜리오이(남이탈리아)의 식민활동에 참가하다가 아테네에서 <역사>를 저술하였고, 아낙사고라스는 페리클레스의 초청을 받아 아테네에서 30년간을 체재, 과학자로서 활동하면서 합리사상(合理思想)을 고취하는 한편 아르케실라오스와 에우리피데스를 가르쳤다. 페리클레스가 권력을 잡을 무렵(전 443) 젊은 소크라테스는 불타는 지식욕으로 인하여 아낙사고라스의 서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아르케실라오스와 오랫동안 친교를 맺었으며, 유명한 소피스트들과 대담할 기회도 있었다. 아브데라에 있던 프로타고라스는 몇 차례나 아테네를 방문하여 페리클레스와 알게 되었고, 범(汎)헬레네스 정신에 입각하여 식민 도시인 튜리오이의 헌법 제정을 위촉(전 444)받았다. 또한 에우리피데스와 사귀게 되었다. 그는 민주주의 사회에 유용한 지도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교사라 칭하여 당시 많은 청년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 인간 중심의 상대주의적 지식론은 혁명적이었으며 계몽적이고 실질적인 의의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르기아스는 레온티노이의 사절로서, 아테네에 와서(전 427) 그 호화로운 변론으로 아테네의 청년들을 매혹하였고, 그리하여 이소크라테스(전 436-전 338)와 아가톤(전 446?-?) 및 아이스키네스(전 390?-전 330 이후)를 배출시켰다. 그는 변론술을 엠페도클레스에게 배웠고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회의적 니힐리즘을 역설하였다. 아테네 태생의 소크라테스는 일찍이 새로운 지식의 영향으로 소피스트화(化)하여 진취적·비판적으로 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아테네 사람은 외래의 것에 대하여 매우 포용적(包容的)이기는하였으나 종교심은 대단히 보수적이었고, 설혹 그것이 정치적인의도로 더욱 촉진되었다고 해도 여하튼 아낙사고라스나 프로타고라스를 불경죄로 추방하였고, 심지어 애국자인 소크라테스까지도 불경한 소피스트의 일당으로 몰아 옥사케 하였다. 그 소피스트들의 언론기술도 아류(亞流)로 되면 에리스티케(문답 경기)에 빠져 플라톤의 격렬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인간 음미의 철학적인 사색과 활동에 전념하던 만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의 패배로 종결을 보았다. 이 전쟁을 그 때에 추방당한 몸이면서도 처음부터(전 431) 계획적으로 자료를 모아 냉정하게 관찰하여 온 투키디데스(전 471?-전 400)는 <전사(戰史)>를 저술하여 그와 같은 보수당의 키몬을 추방한 페리클레스의 탁월성을 칭찬하였다. 그러나 아테네도 30인 참주(僭主) 등의 이상행위(異常行爲)를 거쳐 폴리스로서는 쇠퇴 일로를 걷게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사후에 소(小)소크라테스파는 각국으로 흩어져 갔고, 그들의 철학은 논리 연구나 단순한 처세술로 변해버렸다. 한편 스승의 옥사를 당하여 아테네의 정치에 등을 돌린 플라톤은 이상국가(理想國家) 건설의 꿈을 서쪽에 있는 시칠리아에 걸면서 아테네에는 학원(아카데미아)을 세웠다. 이 학원은 이소크라테스의 학교에 대항해, 아테네 그 자체가 페리클레스에 의하여 그리스 전체에 대한 학교(파이데우시스)라고 불리는 데에 대신하여 진정한 학문의 전당으로서 천년에 가까운 역사(후 529 폐쇄)의 제1보를 내딛게 되었다. 그 동안 북방 마케도니아 제국의 세력이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에 미치게 된다. 여기에 대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케도니아로부터 아테네로 와서 아카데미아에서 연구에 전념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차 아테네로 돌아와(전 335) 리케이온을 설치하여 실증적·과학적 제학(諸學)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전 323) 이듬해에 그의 철학적 활동도 끝났다. 아테네에서의 반(反)마케도니아 운동의 투사였던 데모스테네스와 신기하게도 생몰(生歿)의 해를 같이하였다. 순수한 아테네 사람으로 폴리스 재건을 뜻하여 이데아의 철학을 설파하던 플라톤과, 아테네 사람은 아니었으나 플라토니스트로 출발하여 폴리스를 근거로 하면서 거기에서 나와 독자적인 실체(實體)의 체계를 구축한 아리스토텔레스, 아테네의 고전기(古典期)를 대표하고 동시에 후세 철학의 2대 조류의 시조가 된 이 2대 거두(巨頭)가 사라짐과 동시에 폴리스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아테네에는 아카데미아파와 페리파토스파, 그리고 아테네 사람인 에피쿠로스의 유물론적인 학원과 이방인 제논을 시조로 하는 같은 유물론적인 스토아파의 병존이 시작되었다.

소피스트[편집]

Sophist 그리스어의 원래 의미는 '현자(賢者)' '알고 있는 사람' '지식을 주고 가르치는 사람'이었으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궤변가(詭辯家)'라는 나쁜 의미로 평가되었다. 소피스트의 등장은 그리스가 페르시아에 이기고, 아테네에서 페리클레스가 민주주의의 이념하에서 국가를 건설해 가는 시기였다. 이러한 정치체제에 따라 사회적으로 유용한 인재의 교육을 표방한 것이 그들이었다. 그리하여 이오니아 지방과 이탈리아 지방에서 발전한 자유로운 지적 활동을 계승하여 그들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여러 도시를 편력하면서 기술적인 지식과 사회적인 지혜를 청년들 속에서 개발하려 했다. 그 최초이며 최대의 소피스트가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이다. 전자는 개인을 위주로 한 지식의 상대성과 전진성을 강조하였고, 덕의 교사로서는 종래의 귀족적인 덕에 대신하여 욕지(辱知)와 정의와 우애를, 민중 일반이 가르침을 받아 공유(共有)해야 할 폴리스의 덕이라고 역설하였다. 비싼 수업료를 거두었기 때문에(이는 소피스트 일반에게 해당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먼저 직업인으로서 경멸을 받게 되었다. 고르기아스는 존재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허무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나 동시에 언어가 감정에 미치는 극적 효과를 중시하여 기만과 설득에 의하여 사람들을 시의적(時宜的)인 행동으로 유도해 가는 일에 노력하였다. 이처럼 긴장한 비극성을 아류(亞流)인 카리쿠레스와 프라시마코스에서는 기회주의적이고 배덕적인 것으로 타락시켜 힘이 즉 정의라는 논법을 펴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는 케오스의 프로디코스가 아테네를 방문하여 변론의 공연(公演)을 하여 호평을 받았다. 자연에서 출발하여 언어·지식을 전달한 문명의 인위적인 발전을 강조하였는데, 특히 '헤라클레스의 선택'이란 덕론(德論)이 유명하다. 백과전서적인 관심을 보였던 엘리스의 히피아스(전 5세기 후반)는 전반적인 지식 위에 웅변가와 정치가의 교육을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또 자연의 법과 인위의 법의 대립을 조정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수학을 교육의 중요 부분으로 한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총괄하여 말한다면 소피스트는 종래의 시인들에게 이어받은 교육 문화의 전통을 깨는 일이 없이 신화를 인용하여 개성을 존중하면서 고등교육의 촉진에 기여한 바가 컸다. 그러나 4세기 이후 에우티데모스 형제처럼 아류인 소피스트가 언론의 공정성을 무시하고 전적으로 에리스티케에 열중함으로써 악명을 뒤집어쓰게 된 일은 프래그머티즘의 원류(源流)라고도 할 소피스트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었다.

프로타고라스[편집]

Pr tagoras (전 490?-전 421?) 그리스의 대(大)소피스트. 아브데라 출신으로 동향의 데모크리토스보다 10세 이상 연장이다. 아테네에 와서 페리클레스의 지우(知遇)를 얻어 튜리오이 건설의 헌법 초안 작성을 위촉받기도(전 444) 하였고 또한 소크라테스와 대담도 하였다. 부유한 청년들에게 민주정치하의 폴리스에 유용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길을 깨우쳐 주는 덕의 교사라 칭하고 많은 액수의 수업료를 징수하였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아 파르메니데스에 반대하여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다"라는 개인의 감각을 근본으로 한 지식의 상대주의를 역설하였다. 다른 한편, 개인의 감각(경험)을 거듭 쌓음으로써 현명한 정도에 우열이 있으므로 공공단체는 그 우수한 것에 인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개인은 감각(자연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는 공공적으로 뛰어난 지식을 지니도록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 그의 또다른 주장인 "약한 언론을 강한 언론으로 한다"의 목표였다. F.C.S.시러는 프래그머틱한 휴머니즘의 시조라고 하여 높이 평가하고 있다.

고르기아스[편집]

Gorgias (전 500/484-전 391/375?) 그리스의 대소피스트. 시칠리아섬에서 출생. 엠페도클레스의 제자. 기원전 427년에 사절로서 아테네에 왔다. 그의 유창한 웅변과 호화로운 문체는 커다란 영향을 끼쳐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주요한 이름을 들어보면 이소크라테스(전 436-전 338), 크리티아스, 아르키비아데스(전 450?-전 404), 투키디데스 등이다.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에 반대하여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더라도 알 수가 없다. 알 수 있어도 전하지 못한다"라는 허무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한편 언론이 감정에 주는 극적 효과를 중시하였고, 또한 카이로스(시의적)한 행위의 정당성을 인정하였다.

소크라테스[편집]

Socrates (전 470/469-전 399) 그리스의 철인·철학자. 아테네 사람으로 기원전 399년 2월 혹은 3월경에 아테네 감옥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나이 70세 때의 일이다. 아내인 크산티페는 악처의 모델인 것처럼 전하여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원죄(寃罪)였다. 그때 도망을 쳤더라면 사형을 면할 수 있었지만, 도망을 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죽임을 당하였을까. 여기에 소크라테스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매력, 그 특출한 인격, 기인성(奇人性) 등이 앞서 말한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 그 중 하나로 '사명(死命)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현대에 사는 우리들을 깨우쳐 주는 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인류사와 더불어 계속 살아가는 철인임에 틀림없다. 페르시아 전쟁 말기에 태어나서 만년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만났고 중년에는 세 번이나 종군한, 실로 용감한 사람이었다. 이 시대는 인간성이 궤멸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모랄도 국가가 있으므로 개인이 있는 것이며, 개인이 있고 후에 국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인생론도 논해졌고 자연철학은 지식을 부분적으로 잘라 판다고 말해졌던 소피스트의 등장으로 인하여 인간학(人間學)으로 바뀌고 있었다. 페리클레스(전 495?-전 429)도 각광을 받아 어느 의미에서 아테네는 문화적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고 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조각사(彫刻師)의 아들로서 모친은 조산원인 듯하다. 어려서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젊은 시절부터 다이몬(神靈)의 소리를 듣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철학의 길로 들어서게 된 동기는 아낙사고라스의 <자연에 대하여>였으나 거기에서 중대한 결점을 발견해 냈다. 즉, 그것은 자연의 현상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본질(무엇인가)을 묻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으로는 미흡하여 소피스트에게도 비판적이 되어 구하는 것 자체가 철학인 것 같은 그러한 길을 밟아 가게 되었다. 구하는 것은 진실에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보증하는 로고스, 관념(觀念)이며, 개념이 되었다. 이것들이 진리로 향하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다시 그 동기가 있었다. "아테네에는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는 없다"라는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폴론의 말이 카이레폰에 의하여 그의 귀에 들려왔다. 그 진의는 '무지(無知)의 지(知)'를 자각하고 있는가 또는 없는가에 있다. 그것을 자각하면 할수록 사람은 지(知)를 사랑하고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는 발견이었다. 여기에 언제 어느 경우일지라도 지(知)를 진정으로 추구해 마지않는다고 하는 신념이 확립된다. 즉 '사명(死命)의 사상'이 성립한다. 그로부터 그는 자기를 말파리로 비유하고, 타락하는 아테네를 말에 비유한다든지 하여, 태만한 잠을 깨운다고 말하면서 무지(無知)의 지(知)의 음미를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많은 공명자와 반대자가 생겨났다. 특히 아이러니를 근거로 한 그의 언동은 때로 괴상하게도 여겨졌다. 청년을 타락시킨다든지, 새로운 신을 도입한다고 하는 구실을 반(反)소크라테스의 무리들에게 주었다. 그 가운데는 아니토스 등 소크라테스를 없애려고 노리던 사람들이 있었고, 결국 그는 아테네 법정에 고소를 당하였다. 소크라테스는 변명한다. 그러나 결국 사형 판결이 내렸다. 가령 옳지 못한 결정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조국의 법에 비추어진 것이라면 그것을 파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많은 제자들이 애석해 하는 가운데 그는 영혼의 불멸을 믿으면서 태연하게 독배를 들었다. 그의 위대한 제자인 플라톤은 그 경위를 거의 완전하게 그리고 있다.

소소크라테스 학파[편집]

小Socrates 學派 소크라테스는 죽은 후에 오히려 되살아난 철인이다. 그의 제자들은 누구 한 사람도 스승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때 어느 경우에도 진실을 추구하여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사표(師表)를 살려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단을 내리도록 재촉받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첫째이며 최고인 제자는 플라톤이었고 그 외의 제자들도 나름의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것이 통틀어 소소크라테스 학파인데 여기에는 키니코스 학파(學派), 키레네 학파, 메가라 학파, 엘리스 학파 등이 있다. 키니코스 학파는 안티스테네스가 열었는데, 시노페의 디오게네스와 테베의 크라테스(전 365경-전 285)가 속해 있었다. 그들이 주장한 바는 덕(德)이란 결국 무욕(無慾)의 행동이다. 만사에 무관심하여 오로지 자유스럽고 독립되어 자기 충족을 추구한다. 이러한 주장에 의하여 이 학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키니코스(Kynikos : 개와 같은)라 불리었다. 크라테스는 교양도 높은 사람이었으나 스스로 부귀를 버리고 고귀한 신분의 재원(才媛) 히파르키아와 더불어 거지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키레네 학파는 아리스티포스가 열었고 무신론자라고 불리던 테오도로스와 자살권유자란 별명이 있었던 헤케시아스가 있다. 덕이란 향락할 수 있는 능력이라 하여 순간의 쾌락을 삶의 척도로 하였다. 그러나 그것에도 싫증이 나서 자살을 인정하게도 되었다. 메가라 학파는 에우클레이데스가 열었으며 에우부리데스와 스틸폰이 속해 있는데 스틸폰은 변증의 재능과 궤변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메가라 학파의 특색은 논쟁술이었다. 엘리스 학파는 파이돈이 엘리스에서 창설하였으나 후에 메네데모스가 에레토리아로 옮겼다. 때문에 엘리스 에레토리아 학파로 불리었다. 파이돈은 플라톤의 대화편(對話篇)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에우클레이데스[편집]

Eucleides (전 450?-전 380?) 그리스의 철학자. 메가라 출신으로 소크라테스의 제자. 엘레아 학파가 주장한 존재론과 소크라테스의 윤리 사상인 선과의 결합에 노력하였다. 필연적인 것만이 현실적이며 현실적이려고 하는 것만이 가능적이라고 한다. 특히 그는 논쟁술에 뛰어났다.

아리스티포스[편집]

Aristippos (전 435?-전 350?) 그리스의 철학자. 북아프리카의 키레네 출신으로 향락가였다. 인생의 목적은 쾌락이며 그것이 지고선(至高善)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갖기 위해서는 식견과 극기와 절제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다운 일면을 엿보이게 한다. 그가 창시한 키레네 학파에는 철학사상(哲學史上) 최초로 나타난 여성이라는 그의 딸 아테도 참가하였다. 교양을 잃기보다는 차라리 거지가 낫다고 말하였던 것으로 전한다.

안티스테네스[편집]

Antisthenes (전 455?-전 365) 그리스의 철학자. 트라키아 사람을 모친으로 아테네에서 태어났으며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지팡이를 짚고 자루를 등에 메고는 거지 행세를 하였다고 한다. 인간이란 자기 이외에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 정도에 응해서 그 사람의 우열이 정해진다. 자기는 말(馬)은 볼 수 있으나 말 그것은 볼 수 없다고 하여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공격하였다. 그는 쾌락에 빠지기보다는 오히려 미쳐버리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였다.

디오게네스[편집]

(시노페의) Diogenes (Sinope) (전 412?-전 323?)그리스의 철학자. 흑해 남해안의 소도시인 시노페 출신으로 전설이 많은 것으로유명하다. 코린트에서 사망. 기지에 넘친 기인(奇人)이었다. 맑은 날에는 태양 아래서 명상에 잠겼고, 비 오는 날이면 통 속에서 지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안티스테네스의 제자였는데 그가 다른 모든 제자를 파문시켰을 때에도 디오게네스만은 남겼다고 한다. 사람이란 이성을 갖지 않으면 안 되며 그렇지 않으면 목매는 끈을 가져야 한다고도 하였다. 갖가지 고통과 노고를 견디어 어느 때에도 완전한 평정(平靜)으로 충족을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거지와 같은 꼴로 무슨 일에나 자연스럽게 행동하여, 사람이 보고 웃으면 그는 조소와 야유를 퍼부을 따름이었다. 오늘날의 시니시즘은 습속과 일반적인 모랄을 무시한 이 학파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무관심의 관심'이 근본에 있었다고 하겠다.

크세노폰[편집]

Xenophon (전 434?-전 355) 그리스의 역사가. 아테네에서 출생. 젊은 시절에는 미청년(美靑年)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어디에 가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나"라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받고 망설이던 그에게 "그렇다면 따라 오라. 그리고 배우라"고 하여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 기원전 401년경 키로스의 원정에 참가하여 바빌론으로 갔는데, <아나바시스>는 그 때의 일을 쓴 것이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할때에는 키로스의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직업군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기원전 396년 스파르타 왕 아게시라오스를 섬겨 전 394년 아테네의 군대와 싸웠기 때문에 조국으로부터 추방당하였다. 그러나 후에는 저술에만 전념하여 <향연(饗宴)> <변명> <그리스사(史)> 등을 썼다. 기원전 385년경 <소크라테스의 회상록>(메모라빌리아)을 저술하였다. 철학자로서 역사를 기술한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소크라테스의 언행을 맨 먼저 기록 공개한 사람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의 회상록(메모라빌리아)[편집]

Socrates-回想錄 (Memoranbilia) (전 385?) 크세노폰이 쓴 소크라테스의 회상록이다. 역사적인 소크라테스를 아는 데에 귀중한 문헌이다. 소크라테스는 한 권의 저서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사실적(史實的) 자료는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및 <소크라테스의 회상록>밖에는 없다고 하겠다. 그 중 크세노폰은 그가 본 그대로 소크라테스를 전하여 주고 있으나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심오한 경지에까지 파고들지 않은 점에서 플라톤보다 떨어진다. 내용은 전 4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1권 최초의 2장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이고, 그 뒷부분은 착하고 아름다운 소크라테스의 인격을 사모하는 기념탑이라 하겠다. 제4권은 전부가 교육론으로서 제3권과 중복되어 있다. 계속해서 집필한 것이 아니라 띄엄띄엄 기록한 듯하다. 4권으로 나누어 장과 절을 매긴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학자이다(메모라빌리아라는 라틴어 제목은 16세기에 붙여진 것이며, 그 이전에는 그리스어로 아폼네모네우마타라 불리었다. 뜻은 모두가 '회상록'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덕(德)은 지(知)라고 하는 근본 원리가 실천에 알맞게 기술되어 있다. 또한 우인(友人)의 가치는 절대적이어서 모든 재보를 능가한다는 우인론(友人論)을 말하고 있다. 효(孝)와 형제애(兄弟愛) 등과 신·법의 문제, '불문(不文)의 법' 등도 언급했다.

히포크라테스[편집]

Hippocrates (전 460?-전 376?) 그리스의 의학자. 코스섬 출신으로 그의 가계(家系)는 의술의 신인 아스크레피오스에까지 소급한다고 전해진다. 80세 내지 90세 이상 장수하다가 테살리아에서 죽은 듯하다. 의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몇몇 전기(傳記)가 남아 있으나 정확한 생애에 대해서는 뚜렷하지 않고 저작의 진위도 잘 알 수 없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취급하였다. 다만 어느 전기를 보나 그는 여기저기로 여행하였다고 씌어져 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과학에 관한 저작은 거의 남겨져 있지 않으나 의학만은 예외였다. 기원전 5-4세기의 것은 <히포크라테스 집전(集典)>이란 명칭으로 전해지고 있다.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직업인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의학은 철학과 같이 생겨났다. 히포크라테스 의술의 특징은 미신·마술과의 싸움이기도 했으며, 철학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경험에서 출발하여 경험에 의하여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상적인 의학자로 간주되어 왔다.

플라톤[편집]

Platon (전 427-전 347) 그리스의 철학자. 타르게리온의 달(5월),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태어났다. 부친 아리스톤의 선조는 코로도스왕, 모친 페리크치오네의 선조는 솔론의 친구인 드로피데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말하자면 명문 출신이었다. 젊어서는 시작(詩作)에 열중했고 비극의 창작을 시도했으나 20세경에 만년(晩年)의 소크라테스에게 사사받자 자작시를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28세 때에 경애하는 스승 소크라테스가 부당한 죄상(罪狀)으로 사형을 당한다. 소크라테스의 사형은 플라톤으로 하여금 평생을 공직 생활에서 물러나 오로지 저작에만 전념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40세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라고 불리는 아카데미아 창설까지를 그의 편력시대라고 한다. 그동안 그는 메가라, 이집트, 키레네, 이탈리아, 시칠리아 등 해외 여행을 하는 한편 많은 대화편을 썼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이온> <고르기아스> <프로타고라스> <라케스> <카르미데스> <히피아스> <에우티프론> <메논> <리시스> 등이 그것으로, 이것들을 그의 초기 작품이라 한다. 이 작품들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전면적으로 계승하여 타고난 재질과 철학적 재능으로써 지난날의 소크라테스를 부각하였다고 하겠다. 시칠리아 여행 후 플라톤은 아테네 북서쪽 교외에 교육과 연구를 겸한 학원 아카데미아를 창설하고 지도를 담당하였다. 그는 학원의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지어다"라고 써 붙였다. 이것은 신은 항상 기하학을 익히고 있다는 플라톤의 신념을 표시한 것이며,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수학적 추진력과 결부시키려 했던 그의 의욕을 표현하고 있다. 그로부터 20년간 그의 60세까지를 아카데미아의 교사시대라고 칭하며 그는 <파이돈> <향연> <국가> <테아이테토스> <파르메니데스> <메네크세노스> <에우티데모스>를 발표하였다. 이것을 중기 작품이라하며, 스승 소크라테스의 사상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학설을 세우고 있다. 이것은 보통 이데아론이라 불린다. 그런데 그의 이데아론이란 어떠한 것인가. 이 점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그 실마리로서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우리가 삼각형을 생각할 경우에 현실적으로 삼각형을 아무리 정확하게 그린다고 해도 어느 하나도 완전하게 그려 낼 수 없다. 그것은 이미 한 변의 직선마저 완전하게 긋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정확하게 긋는다 해도 전자현미경으로 본다면 정확한 것이 못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한 직선, 완전한 삼각형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으면 그 존재를 인정하고 계산도 하여 해답한다. 결국 현실에 있어서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삼각형의 이데아이며 직선의 이데아이다. 현실의 삼각형은 이 이데아를 인정하는 까닭에 삼각형으로 인식할 수가 있다고 하겠다. 수학의 대상뿐만 아니라 선(善)의, 미(美)의, 용기의 이데아라는 것도 거기에서 생각해 낼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완전한 선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겠으나 완전한 선의 이데아는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보다 이것이 낫다고 하는 비교는 할 수 없게 된다. 아름다운 꽃은 조락(凋落)하고 아름다운 경치가 폐허가 되어도 아름다움 자체는 그것 때문에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미의 이데아이다. 이 미의 이데아에 현실의 개체가 의탁될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개체가 된다. 즉 미의 이데아는 아름다운 개체의 원인이다. 이것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라고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다. 사람의 영혼은 원래 이러한 이데아계(界)에 있었는데 육체를 갖추고 이데아를 망각하여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진·선·미를 인식하는 것은 영혼이 원래 살던 이데아계를 상기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想起說). 소크라테스는 아직껏 도덕에 관한 인식을 성립시키는 근거를 확립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에 대한 해답이 이데아였다고 하겠다. 플라톤은 60세경부터 80세경까지 사이에 시칠리아의 독재자 디오니시오스 2세와 조카인 디온(전 448?-전 354/전 353)의 초청으로 철인정치(哲人政治)의 꿈을 안고 두 번이나 시칠리아로 건너갔으나 결과는 실패, 디오니시오스 2세는 디온에게 추방당하였고 디온은 암살당해 버렸다. 이러한 와중에서 그의 만년은 결코 평온하지 못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파이드로스> <소피스테스> <폴리티코스> <필레보스> <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 <법률> 등 만년기의 대화편을 많이 발표했다. 그는 기원전 347년 80세를 일기로 일설에 의하면 집필하면서 죽었다고 한다. 그의 철학은 서구 사상의 밑바닥에 플라토니즘이 되어 흘러오고 있다. 에머슨이 "철학의 역사는 플라토니즘의 역사이다"라고 단언할 정도이다. 이데알리즘(理想主義)이란 언어도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가장 좋은 생활을 하기 위한 근본 조건인 절대로 빗나갈 수 없는 선의 이데아를 목표로 현실을 높이고 노력하는 태도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편집]

Socrates-辨明 플라톤의 4복음서(<변명> <크리톤> <파이돈> <향연>) 중의 하나로 그의 초기 대화편(對話篇)이다. 기원전 399년 부당한 죄상으로 피소된 소크라테스의 법정(法廷) 변론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부당한 죄상의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은 무지(無知)에 대한 지(知)의 가르침이었다. 즉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는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과 같으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만큼 다른 사람에 비하여 얼마간은 지자(知者)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첫째가는 현자(賢者)이다"라고 하는 델포이의 신탁(神託)에 대한 그의 해석이었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무지를 깨우치는 일이 신의 뜻에 좇는다고 생각하여 엄격한 대화를 통해서 사람의 억단(臆斷)의 꿈을 깨뜨려 나갔다. 이것이 사람들의 앙심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무지를 자각하게 하고 알게 하는 일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들은 신의 지(知)에 대해서는 무지와 다름없으므로, 그러면 그러할수록 진지(眞知)를 사랑하고 정신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신체나 재산보다 먼저 이 일에 마음을 써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지를 사랑하고 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가장 큰 열쇠라고 하였다. "아테네의 제군, (중략) 어떻게 하든 나는 결코 나의 행동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설사 몇 번이나 죽음의 운명에 위협을 받는다 해도"라고 애지(愛知)에 대한 각오가 언급되고 있다. 결국은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시종일관하여 두려움 없이 자기의 소신을 말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떠날 때가 왔다. 나는 죽기 위하여, 제군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그 어느 것이 더 행복한 경우를 만나느냐에 대해서는 신 이외에 아는 자는 없다." 이것이 이 글의 마지막 구절이다. 또한 이 책은 위대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의 영혼의 서(書)이며 제자인 플라톤이 심혈을 기울여 지난날의 소크라테스를 같은 세대의 사람이나 후세에 전해 주려고 한 불후의 명저이다.

크리톤[편집]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중 하나로 <변명>에 이어 씌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사형집행일을 이틀 앞둔 날 노우(老友)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에게 탈옥을 권하기 위하여 이른 아침 감옥으로 그를 찾아간다. 그 곳에서 교환되는 소크라테스와 크리톤의 대화가 이 작품의 내용이다. 크리톤은 온갖 이유를 들어 소크라테스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가령 자기의 행동이 정의이고 국법이 틀린 것이라고 하더라도 언론에 의해서 개정하든지 아니면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게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고 하여 조국과 국법에 대하여 부정(不正)을 행하여도 좋다고 하는 이유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조국이란 어머니나 아버지보다도 존엄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 노여움에 대해서는 오직 마음이 풀어지도록 우리가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국의 보호 아래 아버지는 어머니를 맞아들여 우리를 낳았다. 조국이 인종(忍從)을 명하는 경우에 그것이 구타든 투옥이든 묵종(默從)해야만 한다. 도망을 치거나 맡은 자리를 떠난다고 하는 것은 부모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 이상으로 나쁜 짓이다.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이 말하면서 오히려 크리톤이 권하는 탈옥에 대하여 꾸짖는 것이다. 플라톤은 여기에서 죽음을 목전에 두면서도 평시와 조금도 변하지 않는 정의의 사람 소크라테스를 선명하게 묘사하는 한편, 국법과 개인의 정의, "악법도 법이다"라는 불행한 모순을 문제로서 제출하였다고도 생각된다. 이에 대한 해결은 그의 '국가'일 것이다.

프로타고라스[편집]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이 글은 소피스트로서 유명한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와의 덕(德)에 관한 대화이다. 덕이란 무엇이며 과연 덕은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일까라는 문제가 음미된다. 소크라테스는 절제·경건·용기·정의·지혜라고 하는 여러 가지 덕이, 그것들이 정말로 덕이라고 할 수 있는 공통된 덕의 본질을 문답 형식으로 탐구해 나간다. 만약 이러한 여러 덕의 본질이 지식임을 안다면 덕은 가르쳐진다고 해도 좋으며, 덕은 지식이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다. 한편 프로타고라스는 덕은 가르쳐지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덕이 지식이라는 점을 부정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프로타고라스는 정의·용기·절제 등 여러 덕이 마치 얼굴 가운데서 코나 눈이나 입처럼 각각 다른 것이라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경건한 태도를 갖지만 바르게 행동하지 않는다든지, 지혜롭지는 못하지만 사려가 깊다고 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반론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덕이 황금의 일부분처럼 동일하다고 한다면 용기·절제·경건 등등으로 구별되는 것은 무엇에 의해서인가. 결론으로서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은 지식이지 않느냐, 그러므로 가르쳐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암시가 전체를 통하여 풍기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인 것을 추구하여, 정의(定義)에 마음을 쏟았다"라고 하였는데 이 경우 그 보편적인 것에 해당하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한 지식이라 해도 좋다. 그가 말하는 지식이란 머리에서 생각만 하는 이론적인 지식은 아니다. 그것을 가지면 악을 저지를 수 없는 체득적(體得的) 지식이라 하겠다. 그러한 지식을 얻는 것이 덕이며 사람들의 행복으로 연결되어 간다고 하는 소크라테스의 이른바 "지(知)는 덕(德)"이며 "덕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윤리가 이 대화편에 암시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파이돈[편집]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 중 하나로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사상으로부터 구별되는 소위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 이 작품부터라고 하며 이는 영혼의 불사론(不死論)이다. 파이돈(전 417?- ? )은 소크라테스의 애제자로서 소크라테 최후의 날의 상황을 친구인 에케크라테에게 들려 준다. 소크라테스는 해질 무렵인 사형집행 때까지 주로 시미아스와 케베스라는 두 사람의 피타고라스 학도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태연자약하여 평소와 조금도 다른 바가 없었다. 한편 그 대화를 듣는 편이었던 제자들은 "방금 웃으며 떠드는가 하면 곧 눈물을 흘린다"라는 식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혼은 육체라는 침침한 유리를 통하여 보는 것이므로 진리를 좀처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참다운 지(知)를 사랑하는 자(철학자)는 살아 있을 때부터 육체를 정화하여 영혼의 감옥이라 할 만한 육체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즉 살면서 죽음을 행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었을 때 육체는 없어지지만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에서 플라톤은 영혼의 불사(不死)를 증명하기 위하여 이데아의 생각을 끌어낸다. 이데아는 우리가 현실의 개체를 현실의 개체로 인정할 수 있는 원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 이데아의 원인설이 영혼 불사론의 제1전제가 된다. 그런데 눈(雪)은 눈으로서 눈의 이데아가 현실적인 눈의 원인인 동시에 눈의 이데아는 그것과 본질적인 관계에 있는 냉(冷)의 이데아도 받아들여 그것과 반대 관계인 열(熱)의 이데아를 배척한다. 뜨거운 눈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제2전제이다. 그런데 혼은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더욱이 현실의 생명은 생명의 이데아가 원인이다. 그렇다면 영혼은 생명의 이데아와 본질적인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이리하여 눈이 냉(冷)의 이데아와 반대되는 열(熱)의 이데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영혼은 생명의 이데아와 반대되는 죽음의 이데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영혼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에 불사인 것이다. 이것이 이데아 원인설에 의한 불사의 증명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근거로 하여 태연하게 독배를 마셨는가. 거기에는 절대로 동요하지 않는 정의에의 확신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에서 플라톤은 윤리적 근거로서 이데아를 안출하여 <파이돈>에서 스승 소크라테스의 태연한 죽음의 근거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향연[편집]

饗宴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 중 하나로서 <파이돈>에 이어 써졌다고 추측된다. 이 글은 말하자면 플라톤의 <연애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기원전 416년 아테네의 비극 작가인 아가톤이 비극 콘테스트에서 우승했는데, 축하연이 그의 저택에서 개최된다. 이 자리에 파이드로스, 아리스토파네스, 소크라테스, 아르키비아데스 등 약 8명이 등장, 연회에서 각자가 에로스(사랑) 찬미의 연설을 하게 된다. 플라톤은 여기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안드로기노스족(남녀가 등과 등을 마주 대어 일체가 되어 있는 인간의 조상)론(論)을 교묘하게 인용해 가면서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으로 유도한다. 소크라테스는 옛날 현녀(賢女) 디오티마에게서 배웠던 일을 그녀와의 대화 형식으로 연설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임신을 하고 있어 낳기를 바란다. 그 뜻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도 죽기 싫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출산의 대상은 추(醜) 속이 아니라 미(美) 속인 것이다. 이 미에의 생산욕, 이것이 에로스(사랑)이다. 사랑의 첫 단계는 육체의 미 속에 낳는 것이고 그것은 육체에서의 불사(不死)를 구하는 일이며, 아기라고 하는 형태로 실현된다. 그 다음에 정신의 미 속에 낳는 것을 추구하게 되며 또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육체의 미 따위는 근소한 가치밖에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은 정신의 미라고 하는 대양(大洋)을 향하며, 아름답고 장대한 언론이나 사상을 낳고 결국에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영역, 영원히 존재하여 생성 소멸하지도 않고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지만 다른 면에서는 추악스러운 일도 없이,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추하다는 것도 아닌, 항상 불변하여 단일한 에이도스(姿)를 갖는 미 자체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미 자체를 보면서 그와 더불어 있으며 거기에서 사람은 참다운 덕을 낳고 불멸하면서도 행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에로스는 처음에는 육체의 미, 다음에는 정신의 미, 그리고 최후에는 미 자체의 세계로 사람들을 높여 불사(不死)하는 보물을 얻게 하는 조력자였다. 그러한 에로스를 찬미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이 에이도스라든가 미 자체라는 언어로 표현된다. 최후로 아르키비아데스가 애지(愛知)에 살고 있는 소크라테스야말로 정신의 미 속에서 생산하고 미 자체를 직감하는 진정 사랑의 구현자라고 소크라테스를 찬미한다. 여기서 찬미하는 아르키비아데스는 플라톤 자신이라고 하여도 좋다. 결국 플라톤의 에로스는 이데아의 사랑에 있어서 완성된다. 이것이 참된 플라토닉 러브일 것이다. 극적인 구성과 교묘한 수사(修辭) 그리고 깊은 진리를 칭송한 이 명저(名著)는 세계의 문헌 가운데 최대의 빛을 발하고 있다.

국가[편집]

國家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 중 하나로서 10장으로 되어 있으며 <법률>에 버금가는 대작이다. <파이돈> <항연> 등에서 제시한 이데아론에 입각하여 어떻게 하면 참다운 정의(正義)를 실현하느냐 하는 문제를 다룬 것이 <국가>의 내용이다. 그는 정의의 본질을 생각함에 있어 그 방법으로 먼저 사상 위에서 국가를 성립시키고, 어떠한 국가가 정의의 덕을 실현하고 있는지를 검토하고 그런 연후에 그 국가에서 개인은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한다면 개인에게 있어서의 정의의 덕도 발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살기 위하여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4-5인의 모임이 이루어지고 거기에서 갖가지 욕망을 충족시키는 국가가 형성되면 국내의 통치나 외적의 방어에 종사하는 계급이 생겨난다. 그 결과 국가는 세 계급으로 성립된다. 맨 아래에 서민 계급으로서 농공상인, 그 위에 수비(守備) 계급으로서 군인, 최고의 자리에 통치자로서 철인(哲人)이 있어 국가통치의 임무를 담당하게 된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 통치자는 '선(善)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 계급에 각자가 목표하는 여러 덕이 있어야 한다. 서민계급에는 절제의 덕, 군인 계급에는 용기의 덕, 통치자의 그것은 지혜의 덕이며, 각각의 계급이 제각기 덕을 보존하여 자기 일을 실천할 때에 국가 전체는 정의를 실현한다고 생각했다. 이 국가에서는 서민 계급은 사유 재산도 가정생활도 할 수 있으나 다른 두 계급은 그것이 허락되지 않고 국법에 의하여 우생학적인 결혼이 이루어지며, 출생하는 아이도 출생과 동시에 모친의 품에서 떨어져 공동 육아소에 보내져 엄격한 교육을 받게 된다. 이 아이들 가운데서 우수한 자는 교육을 더 받아 국가통치 계급에 들어간다. 이러한 세 계급의 덕은 개인의 정신 속에서도 발견될 수가 있어서 서민 계급에 해당하는 것이 정신의 정욕적(情欲的) 부분, 군인 계급에 해당하는 것이 정신의 기개적(氣槪的) 부분, 통치자 계급에 해당하는 것이 정신의 이성적(理性的) 부분이라 하여 그는 각각 절제·용기·지혜의 덕을 목표로 두었다. 이 세 부분이 영혼 중에서 이성적 부분을 통치자로 하여 지배·복종의 관계를 조화적으로 유지할 때에 사람은 정의의 덕을 지닐 수가 있고, 이러한 국가 밑에서 처음으로 정의가 실현된다고 역설하였다. 이것은 플라톤 윤리학의 골자가 된다고 하겠다. 플라톤에게 이와 같은 국가적 윤리학을 쓰게 한 계기는 먼저 소크라테스의 비극적인 죽음이었다고 하겠다. 한 개인의 영혼이 정의의 덕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을지라도 국가가 그것을 실현하고 있지 않을 경우에는 비극적인 결말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다음에는 시대적으로 이미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를 지나 개인의 쾌락에서 규준을 구하는 개인주의 풍조의 대두와 폴리스 유대의 이완(弛緩)에 대한 우려를 들 수 있다. 플라톤에 있어서 폴리스는 의연한 부모보다 귀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이러한 국가가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국가의 이데아로서 현실의 국가가 여기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해야 할 모범이었다. 그러나 시대정신은 그 후에 이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고아카데미아[편집]

古Academia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는 전후 약 1,000년간 존속하는데, 특히 플라톤으로부터 크란토르까지를 고아카데미아라고 부른다. 플라톤이 죽고(전 347) 조카인 스페우시포스(전 400?-전 339)가 2대째 학두(學頭)가 되었다. 그는 시칠리아의 디온과도 관계를 맺었으며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와도 친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인정하지 않았으나 만년의 사상에는 영향을 받았다. 1과 다(多)로써 이루어지는 수학적인 것만을 존재하는 것이라 하여 이것과 이성이나 영(靈)이나 감각적인 여러 물체를 구별하였다. 이러한 것에서, 말하자면 삽화적(揷話的)으로 이어져 맞춘 그의 자연관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맹렬하게 비평하였다. 그리하여 수학화한 아카데미아에 만족하지 않은 채 그 곳을 떠났던 것이다. 노쇠한 스페우시포스는 8년 후에 학두 자리를 칼케돈 출신인 크세노크라테스(전 396-전 313?)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람도 피타고라스파, 특히 필로라오스에게 관심을 보여 수학을 철학의 예비로 삼았다. 철학을 자연학·윤리학·논리학으로 3분하였고 수학적인 것을 이데아와 동일시하였다. 불멸의 영혼은 스스로 움직이는 수(數)여서 우주를 위에서 아래까지 꿰뚫는다고 하였다. 약 20년간 학두 자리에 있었던 그의 고결하고 자주적인 성격을 필리포스 2세도 크게 존경하였다. 아카데미아에는 벌써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전 408?-전 355?)도 참가하여 플라톤을 위시하여 학료(學僚)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수학자·천문학자·의사·법제가(法制家)를 겸하고 있던 그는 이데아의 초월성을 비판하고 내재성을 설파하여 쾌락을 최고선(最高善)이라 하였다. 이 시기의 수학과 천문학과 종교적 감정을 결부시킨 경향은 <에피노미스>의 저자라 하는 오프스의 필리포스에게서 뚜렷이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다음 기(期) 학원의 경향은 윤리학으로 옮겨갔다. 크세노크라테스에 의하여 철학에 들어서게 된 4대째의 학두 폴레몬(전 314-전 276)은 방종한 생활을 벗어버리고 감정에 움직이지 않는 인물이 되어 자연을 따라 사는 것을 윤리 원칙으로 하였다. 폴레몬에 이어 학두가 된 크라테스에 관한 일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 두 사람의 우정은 같은 묘에 합장하는 정도였다. 그들의 동료인 크란톨(전 340-전 290)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주석(註釋)을 처음으로 써서 세계의 영원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슬픔에 대하여>는 후세에 많은 <위안(慰安)의 서>의 본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편집]

Aristotel s (전 384-전 322) 그리스의 대철학자. 트라키아 지방의 스타게이로스(이오니아의 식민도시)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니코마코스는 마케도니아 왕 아민타스 2세의 시의(侍醫)였고, 모친인 파이스티스는 칼키스의 이민 출신이다. 왕자 필리포스의 소꿉동무로 궁정에서 자랐으나 어려서 양친을 여의어 연고자인 프록세노스가 후견인이 되었다. 17세 때(전 367)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입문하였다. 이후 플라톤의 사망시까지 약 20년간 그곳에서 연구에 정진, 학생 지도도 담당하였다. 이오니아 문화를 배경으로 의가(醫家)의 실증정신(實證精神) 아래 성장한 그에게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은 큰 영향을 주었다. 충실한 플라토니스트로서 출발한 그는 맹렬한 이데아 비판을 하면서도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는 체계로서 일괄적으로 포착하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오늘날 여러 학자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바와 같이 그의 독자적인 사상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생애의 단계에 알맞게 사상 발전사적으로 추구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의 연구와 교수(敎授) 및 저작 활동은 대략 3기―아카데미아기(期)와 편력기(遍歷期)와 학두기(學頭期)―로 나눌 수 있다. 아카데미아기―저작은 기원전 360년경부터 시작된다. 먼저 플라톤의 대화편을 본떠서 <그릴러스> <유디머스> <프로트렙티커스>(철학에의 권유) <향연(饗宴)> <소피스트> <정치가> <메닉시너스> 등 많은 대화편과 기타 글이 씌어져 간행되었다. 동시에 자연학을 비롯하여 그 밖의 연구도 시작되어 <자연학>의 일부(제1, 2, 7권) <천체론(天體論)> 제1권과 <정치학> 제2권의 일부, <데 아니마> 제3권과 <논리학>의 일부(<토피카> 등)와 <형이상학>(제12권) 등이 씌어졌다. 편력기―플라톤이 죽기(전 347) 직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참주(僭主) 헤르미아스의 초청으로 아타르뉴스로 갔다. 아카데미아 학두에 취임한 스페우시포스의 수학주의(數學主義), 피타고라스주의에 만족하지 못한데다 올린토스의 함락으로 아테네에 반(反)마케도니아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강대한 군대를 가지고 있던 참주의 보호 아래 왕의 질녀인 피티아스와 결혼하여 그 곳 가까운 아리스에 살면서 3년간을 강의와 연구로 보냈다. 학우인 에라스토스와 코리스코스도 같이 참가하였다. 여기에서 <철학에 대하여>를 썼고 이데아나 이데아 수(數)의 비판이 시작되었다. 또 <형이상학> 제1, 2, 4, 5권과 <유디머스 윤리학>(미완), <자연학> 제3-6권, <천체론>(현재의 형태), <생성소멸론> 등을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플라톤의 수제자 중 한 사람으로 레스보스 태생인 테오프라스토스의 알선으로 미치레네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곳에서는 특히 생물학에 대한 연구가 발전되어 있었다. 기원전 342년에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의 의뢰와 헤르미아스의 추천을 받아 알렉산드로스 왕자의 가정교사로서 미에차로 갔다. 왕자를 위하여 호메로스를 가르쳐 주었고 <호메로스 문제>를 썼다. 또 <군주정치론> <식민정책론>도 저술하였다. 기타 그리스인에 관한 국가제도의 수집이나 기록을 하였다. 그 일부인 <아테네인의 국제(國制)>의 태반이 1891년에 재발견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헬라스의 통일, 즉 그리스의 폴리스군(群)과 마케도니아 제국(帝國)의 통일에 열심인 애국자였고 이것이 필리포스 2세의 야심에 합치한 듯하나, 후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서융합책(東西融合策)에는 동의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은 변하지 않아 알렉산드로스는 동정(東征) 중 생물학상의 표본을 위시하여 다른 선물을 보냈다고 한다. 기원전 340년 알렉산드로스는 섭정(攝政)이 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타게이로스로 물러가 연구생활을 계속하였다. 기원전 338년 그리스 연합군이 카이로네이아에서 패배,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왕은 암살되고 알렉산드로스(20세)가 즉위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 335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재차 아테네로 돌아왔다. 학두기(學頭期)―마케도니아의 총독 안티파트로스의 원조로 아테네 동쪽 교외인 아폴론 리케이오스 성역(聖域) 중 일반에게 공개하는 김나시온(體育所)을 빌려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리케이온이라 불리었는데 이곳에서 12년간 강의와 연구로 세월을 보냈다. 오전에는 상급반 연구자를 위하여 논리학과 제1차 철학을 강의하였고, 오후에는 수사학(修辭學)(辯論術), 정치학, 윤리학 공개 강의를 하였다. 현존하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학두기의 강의 초고이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이 전하여지자 반마케도니아 운동이 재연(再燃)되었다. 마케도니아와 관계가 깊었던 그는 불경죄로 문책을 받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사전에 모친의 고향인 칼키스로 떠났다가 이듬해 위장병으로 63세의 생애를 마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전술한 바와 같이 외부 일반을 위한 대화편이나 연구 메모, 수집 자료집이나 강의 초고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외부를 위한 것은 당대에 빨리 유포되었고 또 단편(斷片)만을 남기고 없어져버렸다. 현재 베커판(版) 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것 가운데 위서(僞書)로 간주되는 것을 제외하면 다음과 같다. <범주론(範疇論)> <명제론(命題論)> <분석론 전후서>-<자연학> <천체론(天體論)> <생성소멸론(生成消滅論)> <기상론(氣象論)> <데 아니마> <자연학 소론집(小論集)>-<동물지(動物誌)> <동물부분론(部分論)> <동물의 운동> <동물의 보행> <동물발생론>-<형이상학>-<니코마코스 윤리학> <대도덕론(大道德論)> <유디머스 윤리학> <정치학>-<수사학> <시학(詩學)> <아테네인의 국제(國制)>.

시학[편집]

詩學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두기 강의록이라고 하는데, 기초 부분은 아카데미아 시기로 소급될 것이다. 비극과 희극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 듯하지만 희극을 다루었을 제2부는 현존하는 책에서는 볼 수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의 첫머리에서 포이에시스(詩作)는 그 종류를 통틀어 모두 미메시스(모방)라고 하였다. 이 점은 플라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진실에서 멀어져가는 외관물(外觀物)이라 하여 댄스와 음악과 같은 화사한 것이나 서사시나 비극 등 시작품은 덕(德)의 형성을 해치는 것이라 하여 이상국가(理想國家) 건설의 교육 계획에서 배제하였다. 아울러 사회나 인생에 쓸모가 있다고 하는 변호가 있으면 그것을 용인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플라톤의 말을 받아들여 특히 비극의 본질을 구명하면서 시작(詩作)이 인생에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해답하려 하였다. 이 목적에서 그는 리듬이나 멜로디 등 시의 형식면에는 그다지 깊이 들어가지 않고 실질면인 모방과 효과를 주로 논하였으며, 특히 작품으로서의 시보다도 시의 제작 내지는 기술의 구명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는 인간에 있어서 본성적인 모방을 시작의 영역에서 발전적·단계적으로 추구하고, 드라마적인 모방을 완성한 최고 단계로 포착하여, 성실하고 고귀한 즉 선량한 행위의 모방인 비극이야말로 진정 그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비극은 상당한 길이로써 완결된 중대 행위의 모방이다. 그 가운데에는 리듬과 음악적인 언어가 있으며, 등장인물은 연민(憐憫)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행위의 카타르시스(淨化)를 성취하는 것이다. 이 정의(定義)에서 그는 비극은 정념(情念)의 정화(淨化)를 이룩하는 점에서 많은 효과가 있다고 하였으나 이 정화가 실은 이미 무대 위에서 모방되는 행위 그 자체 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복잡한 행위의 구성, 사건의 연쇄, 미토스(줄거리)의 구성 속에서 특히 파리페티아(急轉)와 아나그노리시스(認知) 등이 정화와 관계하는 것이다. 선량한 사람, 가령 문벌의 사나이인 오이디푸스왕 등의 육친 살해, 기타 욕되고 무서운 행위는 무지(無知)에서 오는 실책으로 일어나는 것으로서 그 때문에 부당한 불행 속으로 빠져 가련한 대상이 된다. 그러나 무지를 인지하는 행위 가운데 이미 오욕(汚辱)의 정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인간적 약점이라는 점에서 비극적 영웅에 대하여 관람하는 사람편에 공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한 비극의 구성은 그 자체가 살아 있는 하나의 아름다움이어서 그 속에서의 연민과 공포의 감정도 쾌감으로서 이미 정화되어 있다. 요컨대 비극 속의 행위를 보고 얻을 수 있는 정화는 지적 정화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거론되는 사상이나 언어의 표현이나 무대화(舞臺化)도, 인물의 성격적 일관성이나 행위나 줄거리의 필연성 등도 모두 비극적 행위에 연결되어 있다. 시작이 역사보다 철학적이며, 서사시보다 비극이 발전적으로 뛰어났다는 것, 비극의 전형(典型)을 소포클레스에서 찾은 것은 그의 독자적 행위관, 특히 형이상학적인 에네르게이아(現實態)관에 기인하고 있다. 호라티우스의 <시학(詩學)>과 더불어 때로는 혼합되면서 르네상스 이후 근세 유럽의 문예비평이나 극작에 끼친 영향은 큰데, 그것은 이 책에 들어 있는 시의 실례(實例)나 시작의 일반 규칙뿐만 아니라 철학적으로 철저한 통찰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편집]

形而上學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가 기원전 1세기 후반 로마에서 편집 간행한 전전(全典)에서 <자연학>의 뒤(Meta)에 놓인 위치로 해서 <자연학의 뒤의 서(書)>라고 불리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후세의 형이상학에서 의미하는 내용의 것을 '프로테 필로소피아(Prote Philosophia)'(제1의 철학) 또는 '테올로기케(Theologike)'(신학)라 하여, 존재 내지 실체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일을 중심 과제로 하였다. 14권으로 된 본서는 그 과제를 다룬 논문의 집성(集成)이며, 처음부터 체계적 순서를 따라 써내려간 것은 아니었다. 각권 내용의 불일치에 주목하여 거기에 플라토니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독자적 철학에의 사상적인 발전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에겔의 연구(1923) 이래, 각각의 논문 집필 시기에 대해서 사상 발전사적으로 추정하려는 시도가 오늘날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몇몇 논문군(群)으로 분류된다. 1권은 아소스 체재 중의 철학사적 고찰, 이어서 3권은 철학 난문집(難問集), 나아가서 4권·6권이 계속되어 제1 철학의 대상인 존재로서의 존재와 존재의 다의성(多義性), 제1 철학은 보편학(普遍學)이냐 또는 신학(神學)이냐가 문제된다. 7권·8권·9권은 학두기의 실체론, 10권은 1과 다(多)의 문제, 12권은 8장을 제외하고는 초기의 신학론, 13권과 14권은 수(數)와 이데아 내지 이데아 수의 관계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13권 1-9장이 그 뒤를 받아 같은 주제가 거론된다. 아리스토텔레스 가문에는 조부대대(祖父代代)로 의가(醫家)의 경험적·실증적인 정신의 혈통이 흘러 그것이 동력이 되어 자연학, 특히 생물학 영역에서 큰일을 하게 했다. 한편 플라톤의 수제자로서 이데아론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플라토니즘의 정신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두 정신의 견제 가운데서 존재 내지 실체의 포착 방법에서도 그의 사색은 말하자면 양극 사이를 항상 크게 동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때문에 형이상학의 내용 규정에 있어서도 플라톤 주의로부터 실증경험주의(實證經驗主義)에로 직선적으로 사상이 발전하였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이데아론을 엄격하게 비판하면서 그의 독자적인 존재론이 형성돼 오기는 하지만 신학적인 면이 완전히 불식(拂拭)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경험 형이상학이라고나 칭할 수 있는 것은 1권에서도 엿보인다.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알고자 한다. 그 증거로서 감각의 애호가 간취된다. 그 뜻은 결국 감각은 그 효용을 빼고 생각하더라도 이미 감각하는 것만으로써도 애호되기 때문이므로"라고 말한다. 이 생래적(生來的)인 지식욕이 감각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경험으로, 나아가 기술과 학문으로 발전되는 양상을 발생적으로 포착하여 "경험자보다도 기술자 편이, 또한 직공보다는 동량(棟樑)의 편이, 그리하여 제작적인 지(知)보다도 관조적·이론적인 지의 편이 한층 더 많은 지혜를 가진다"고 설파한다. 최고의 지혜는 오로지 인식시키기 위하여 인식한다고 하는 특권을 가지며, 무릇 모든 제1 원인을 대상으로 하는 학(學), 모든 학의 왕자, 최고선(最高善)을 알며 그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유일하고 자유로운 학, 가장 신적(神的)이어서 외경(畏敬)될 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것에 있어서 원인의 하나이며 어떤 종류의 원리(始動因)라고 생각되며, 또 이와 같은 학은 신만이 소유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1 원리 원인의 학, 즉 제1 철학은 동시에 신학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정리한 4원인(質料, 始動, 形相, 目的)론에서부터 그 이전의 학설은 모두 불충분한 것으로 밀어버렸고, 특히 스승인 플라톤의 이데아(形相)론은 이재성(離在性)·초월성으로 인하여 감각물의 존재와 해명에 아무런 소용이 되지 못한다고 거부한다. 더욱이 이 이데아의 감각물로의 내재화(內在化)가 그의 생애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12권의 신학에서 목적론적으로 포착된 자연의 생성과 운동의 원인인 신을 부동(不動)의 동자(動者)로서 사유(思惟)의 사유, 자기 사유라고 역설했으며, 종장을 "많은 통치자는 바람직하지 못하며 하나의 통치자야말로 바람직하다"고 결론을 맺으면서 만년에 당시의 천문학적 산정(算定)에 의한 천체 운동의 수에 맞추어 다수의 부동의 동자를 도입한 8장이 병존(倂存)하는 것은 그의 제1 철학의 복잡성을 생각하게 한다. 이데아의 내재화 노력은 존재를 실체로 좁히고 감각물을 실체로 보아 그 본질을 아토몬 에이도스(最低의 種)에 있어서 정의하려고 한 7권과, 더욱이 그러한 실체를 가능성(質料)과 현실성(形相)의 결합으로서 동적으로 포착하려고 한 8권에 선명하여, 자연의 개별적 구체성과 동성(動性) 속에 이데아로서 파고들려 하는 날카로우면서도 집요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사색에 경탄할 만한 것이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편집]

Nicomachos 倫理學 학두시대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 초고. 전 10권. 그의 아들 니코마코스가 편집(전 300)했으므로 이러한 명칭으로 불린다. 대체로 원리론(1권-3권 5장)과 현상론(3권 6장-10권)으로 되어 있다. 먼저 윤리학은 정치학에 직결되고 그것과 일체로 되어 있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들의 행위는 모두 그 어떤 선(善)을 희구하는데, 최고선(最高善)은 국가(폴리스)가 추구하기 때문이다. 개인에 있어서의 선의 실현보다도 국가적 선의 실현이 궁극적이고 신적(神的)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때문에 모든 선을 연구하는 윤리학도 통수(統帥)나 가정(家政)이나 변론이란 제학(諸學)과 더불어 정치가에게 결부되는 것이어서, 이 사실은 10권의 종장(終章)에서 명백해진다. 선 내지 최고선은 행복이 되므로 행복의 문제가 1권 4장 이하에서 다루어지고 다시 10권에서 결론적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행복은 결국 영혼의 덕(德)을 따른 유동(流動)에 불과하므로 영혼의 두 부분―아로곤(無理的)·로곤(有理的)―에 입각한 두 개의 덕, 즉 윤리적 덕과 지성적 덕을 논하게 된다. 2권에서 5권에 걸쳐 에티케 아레테(윤리적 德)에 관한 일반론과 각론이 전개되고 다시 6권에서 지성적 덕이 논구(論究)된다. 윤리적 덕은 에토스(습관)에 의하여 생기는, 즉 쾌고(快苦)를 수반하는 행위의 습관화에 따른 것이다. 덕이란 이(理)에 의하여 결정된 중용(中庸)에서 성립되는 행위 선택의 상태라고 규정된다. 중용이란 두 개의 악(超過와 不足)의 중간을 일컫는다. 덕을 로고스(比)적으로 본다면 중간이지만 '최고선'이라든가 '좋음'에서 본다면 정점(頂點)인 것이다. 요컨대 덕이란 파토스도 능력도 아닌 성격의 상태이며 그 본질은 중용에 있는 것이다. 갖가지 덕의 표(表)를 갖가지 중용으로 들고 있는 점,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 지극히 현실적·구체적임을 나타내고 있다. 5권 전체를 충당한 중용으로서의 정의론에도 이러한 사실은 찾아볼 수가 있는데, 더 나아가 6권의 사려(思慮) 규정에 있어서 더욱더 명백하다. 프로네시스(思慮)는 지성적 덕이지만 누스(理性)나 소피아(知慧)와도 다르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의 온갖 선과 악에 관하여 이(理)를 수반한 진실 행위가 이루어지는 상태이다. 이론적인 학문이나 제작 기술과도 달라서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개별적으로 관계되는 사려야말로 가장 중요한 덕이다. 말이 지니는 본질적 의미의 사려도 정치적 사려이다. 사려를 실천적으로 포착한 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독자적인 입장과 커다란 공적이 있다. 7권 후반과 10권 전반에 쾌고(快苦)와 선악 내지는 덕과의 관계가 언급되는데, 전자는 아소스기의 것이며, 다시금 발전한 후자에서는 쾌(快)를 에네르게이아(現實態)로서 포착하여 젊은이의 상냥함에 비유된다. 인간의 쾌라 함은 지복(至福)한 사람의 활동을 궁극적으로 완전하게 하는 것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다운 적극적인 평가가 이루어진다. 8권·9권의 필리아(友愛)론도 행복인 덕론(德論)을 보충하는 중요한 것이다. 필리아는 서로가 알려져서 마음에 지니는 호의(好意)이다. 완전한 필리아는 덕이란 점에서 동류(同類) 사이에 성립되지만 드물다. 자기의 이성을 사랑하는 자애(自愛)를 중심으로 이기(利己)와 이타(利他)가 문제로 되어 있다. 10권 후반에는 궁극적인 행복을 이성의 활동에서 구하여 그것이 자족적(自足的)이고 한가해서 인간에게 가능한 한도의 무피로적(無疲勞的) 기타 조건을 모두 갖추어 신적(神的)으로 되면서도 이 순수 관조(觀照)로서도 이것을 함께하는 자가 있다면 더욱 좋다고 하는 부언을 잊지 않는다. 결국 덕과 행복의 절정을 이루는 자족적인 순수 관조마저도 인간의 경우에는 친애에 의하여 보완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덧붙여 말하면 10권 종장에서 청소년을 덕으로 바르게 인도함에는 법률이 필요한 것과 법률과 국제(國制)의 수집이나 검토가 인간에 관한 철학을 완전하게 한다고 역설한 점은 전술한 바와 같이 윤리학과 정치학의 관련을 알려준다.

정치학[편집]

政治學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두기(學頭期)에 강의한 초고. 전8권, 다만 2권·3권·7권·8권(未完)은 아카데미아 시절의 것이라 한다. 1권은 서론으로서 폴리스(국가)의 정의(定義)와 구성에 대하여 논했으며, 국가의 고찰에는 분석적·발생적 방법이 쓰였다. 국가의 최소 부분인 가정은 일상생활을 위하여 자연적으로 구성되는, 즉 생산을 위한 한 쌍의 남녀와 주인과 노예의 상호보전적인 결합으로 성립된다. 이어 하나 이상의 가정에서 마을이 되고, 하나 이상의 마을에서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하여 자족적인 공동체가 성립한다. 이것이 국가(폴리스)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궁극적 목적인 국가는 자연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으로 국가적(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전체는 부분보다 우선하는 것이 필연적(必然的)이므로 국가는 가족이나 개인보다 우선한다고 강조된다. 공동할 수 없는 것이나 공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국가의 부분이 아니며 그것은 새나 짐승이 아니면 신이라고 한다. 3장 이하에서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거론된다. 지배와 피지배는 자연적·필연적이어서 유용하다는 확신 아래 노예지배를 도덕적으로도 정당화하려고 한다. 결국 노예란 살아 있는 도구이며 가축 정도밖에 유용하지 않다. 이에 대하여 자유인은 전쟁과 평화의 일을 가져서 국민생활에 유용하다고 한다. 다시 주인과 노예의 바른 구별은 덕(德)·부덕(不德)에 의한다고도 한다. 또한 부녀자에게는 남자와 다른 덕을 인정하고 있다. 2권은 플라톤이 말한 이상국의 이론이나 현실의 최선이라고 하는 국가제도(스파르타, 크레타 등)를 비판한다. 3권에서는 국민과 국가와 국가제도의 관계를 논한다. 사려(思慮)의 덕을 가진 훌륭한 지배자 아래서만이 훌륭한 인간과 선량한 국민이 일치한다고 한다. 4권에서는 정치학은 현실의 것을 취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여 현실의 여러 국제와 그 변종(變種)을 서술한다. 참주제(僭主制)는 최악의 것이고 과두제(寡頭制)는 그 다음, 민주제는 중용을 취한 것이라 하여 "빈부 중간의 안정된 사람들이 인구로 보아 다수인 국가에서 정치하는 자가 중간에 위치하여 생활하기에 충분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좋다"라 하여 결국 중간적 국제가 최선이라고 주장한다. 4권의 다음에는 민주제와 과두제의 조직 방식을 논한 6권이 나온다. 그리하여 5권에서 국제의 변혁을 평론한다. 이익이나 명예 때문에 '균등'이란 잘못된 이해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내란부터 시작된다. 끝으로 플라톤의 <국가>에 있는 변혁에 관한 주기성(周期性)이 사실(史實)과 맞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7·8권에서는 최선의 국제가 고찰되는데 전술한 바와 같이 플라토니스트로서의 색채가 짙다. 각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행복은 같은 것이며 최선의 생활은 철학자의 사유(思惟) 활동이라고 하는 점이 주목된다. 지배자의 교육에 대해서 이지(理智)를 목표로 한 인간의 발전 단계에 따라서 먼저 출산, 유아 교육, 음악 중심인 소년의 덕육(德育)을 구체적으로 논하면서 미완으로 그치고 있다. 요컨대 <정치학> 전체는 권(卷)으로서 부족한 점이 많아 이상론과 현실 기술(記述)이 짜여 이루어지면서 말하자면 자연주의적인 덕과 중용론(中庸論)으로 일관되어 극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이지만, 그러면서도 윤리학과 마찬가지로 소수자의 신적인 관상(觀想) 생활을 국가 존립의 최선의 목적으로 하고 정점으로 삼은 국가론이, 동시에 노예의 자연필연성과 유용성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페리파토스 학파)[편집]

Aristoteles 學派(Peripatos 學派)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도들과 산책하면서(페리파테인) 강의하고 논의한 페리파토스(산책길)에서 유래되어 페리파토스 학파(소요학파)라고도 불린다. 이국인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아 있는 동안의 학교(리케이온)는 일반 공개의 김나시온(體育所)을 차용한 것이었으나 2대째 학두 테오프라스토스에 이르러 파레론의 데모토리오스의 원조로 비로소 부지(敷地)나 시설, 성전을 갖춘 학원이 되었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칼키스로 떠난(전 323) 뒤에 학교의 지휘를 이어받아 또 한 사람의 수제자인 로도스의 유디머스와 공동으로 직무와 연구에 임했다. 먼저 스승의 강의와 기타 편집과 간행에 종사하면서 스승의 학설을 발전시키는 데에 노력하였다. 제자들은 스승의 학문적 방법 중 하나인 학설사적(學說史的) 연구를 진전시켜 각각 전문분야에서 전기(傳記)나 사상을 정리하였다. 테오프라스토스는 자연학 특히 감각론의 역사를, 유디머스는 기하학·산수·천문학 등의 역사를, 탈라스의 아리스토크세노스는 음악사를, 디카이아르코스는 그리스인의 생활사를 썼다. 특히 마지막 두 사람의 학설에는 피타고라스파 학설(영혼의 조화설 등)이 들어 있다. 3대째의 학두인 람프사코스의 스트라톤( ? - 전 270/268)은 모든 물체는 무게를 가지며 그 하강(下降)운동만이 유일한 자연운동이라 하였다. 즉 스승의 목적론적 자연관을 떠나 에피쿠로스파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원자론(原子論)과 달라서 세계의 내부에만 무한과 공허(空虛)를 허락하였고 스승의 질적 역동설(質的力動說)에 따라 시간과 운동의 연속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혼을 육체 전체로 퍼지는 프네우마라고 하여 지적 활동도 그 운동이며 사상은 감각적 인상이 약한 반향(反響)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주의는 순수한 감각주의가 되었다. 이에 대하여 키프로스의 크레아르코스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젊었을 때 주장한 것과 같이 영혼의 유리(遊離)를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두 경향이 있다는 것은 도그머티즘(독단주의)에 빠지지 않는 이 파(派)의 특색임과 동시에 다른 학파처럼 영속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4대째 학두인 라이콘(전 270-전 226) 및 후계자들은 실천철학적(實踐哲學的) 관심이 주가 되었다. 6대째 학두 크리트라오스는 최고선(最高善)을 테오프라스토스가 말한 영혼과 육체와 운동 등 세 개의 선(善)을 총체라고 한다든지, 7대째 학두인 티로스의 디오도로스는 덕에 무고(無苦)를 더한다든지 하여 스토아 학파와 유사해진다. 또한 로도스의 하이어로니머스는 쾌(快)의 결여(缺如)로서의 아포노이아(無苦)를 최고선이라 하여 에피쿠로스 학파와 흡사하게 되면서도 부동의 쾌(快)를 아파티아(無苦)라고 한 에피쿠로스와도 다르다. 그런데 테오프라스토스가 유언으로 스케프시스의 네레우스에 맡겨 지하실에 비장된 그 문고는 그 후 애서가(愛書家) 아페리콘이 아테네로 가져 오게 되었고, 다시 스라가 로마로 반입하여(전 86) 곳곳의 사설 문고에 수장되었다. 이런 경로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의 원고는 문법가 티라니온의 복사를 기초로 10대째 학두인 안드로니코스에 의하여 로마에서 간행되었다. 그는 그때까지 유포되고 있던 여러 저작(대화편 등)에 이들 학문적인 저작을 대립시켰다. 먼저 오르가논을 만들어 철학적인 예비 학문으로 삼음과 동시에 다른 저작도 체계적인 견지에서 배열하였다. 이것이 오늘날에 와서도 아직껏 근본적인 개혁이 어려운 아리스토텔레스 전전(全典)(코르브스)인 것이다. 이 전전을 기초로 하여 그 후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주석과 연구는 진행되었다. 페리파토스파의 최후이며 최대 주석가는 3세기 후반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드로스이다. 그는 <형이상학> <분석론 전서(前書)> <감각에 대하여> <기상학(氣象學)>, 기타 주석을 썼다. 그는 아테네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있었는데 그의 누스론(論) ―― 우리들의 지성은 결부되어 있어서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지적 대상을 알 때에 신 스스로가 우리들 속에서 사유하고 있다 ―― 은 에스파냐의 아베로에스 해석의 본이 되었다.

테오프라스토스[편집]

Theophrastos (전 370?-전 288?)그리스의 철학자. 레스보스섬의 에레소스 출신. 그곳의 아르키포스에게 배웠고 이어서 플라톤의 제자가 되었다가 아리스토텔레스 밑에서 활동했다. 스승이 칼키스로 물러갔을 때(전 323) 학교를 인계받았다. 또 한 사람의 수제자인 로도스의 에우독소스와 공동으로 저작물 간행이나 학설의 보충 및 발전에 노력하였다. 먼저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학설사(<감각론> 등)를 정리하였고, 논리학 영역에서는 삼단논법에 제1형식의 간접양식을 도입한다든지 명제나 결론의 양상(蓋然·可能·必然)과 가정적(假定的) 또는 이접적(離接的)인 복합명제(命題)를 연구하여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형이상학에서도 문제의 정리를 하고 있다. 자연학에서는 스토아 학파의 설에 반대하여 우주의 영원성을 변호하였다. 윤리학에서는 행복을 최후의 목적으로 삼았으나 외적 생활 상황도 중시하였다. 그러나 그의 공적은 스승의 생물 연구를 식물 연구로 확대하여 분류법을 구사함으로써 식물학을 확립시킨 일이다. 더욱이 스승의 윤리학서에서도 볼 수 있는 성격 분류를 진전시켜서 <성격론>을 저작하였다. 라 브뤼예르의 <성격론>은 이것을 모방한 것이다.

헬레니즘·로마시대의 사상[편집]

헬레니즘·로마시대의 사상[편집]

Hellenism·Roma時代-思想 그리스의 철학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까지 도달되었다. 이 높은 수준이란 학(學)으로서의 완성도를 의미한다. 수없이 그것을 돌이켜 보고 그것에 비추어서 사물을 생각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우리들의 피와 살이 되는 것을 준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의 사상은 철학은 물론 갖가지 학문의 원천(源泉)도 되었다. 그러나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이다. 그들도 그 시대의 인간임을 벗어날 수가 없다. 뒤에 뒤따르는 것이 있다. 현실도 변화한다. 현실의 변화에 관해서 그것을 설명하는 원리가 되어 있어도, 그 설명의 원리를 사용하는 사람과 장소와 정세(情勢)와는 추이(推移)가 불가피한 것이다. 철학의 존재방식도 그것들과 무관(無關)한 채 계속될 수는 없었다.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에 걸쳐 이미 그리스의 명운(命運)은 다하고 있었다. 폴리스(도시국가)는 붕괴되고 사람들의 교류가 성해지니,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자랑하는 문화를 통해서만 격류(激流) 속을 헤엄쳐 나가야 했다. 더욱이 그 변용(變容)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재위 전 336-전 323)의 동정(東征)은 그 속도를 촉진시켰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 문화는 변화 가운데 놓이면서 지중해 세계로 침투되었다. 시대는 세계정신(世界精神)으로, 세계국가에로의 동향을 띠기 시작하였다. 그리스 정신의 세계화인 것이다. 이것이 헬레니즘이라 불리는 시대이다. 철학의 무대도 아테네에서 알렉산드리아, 로마, 기타로 옮아 갔다. 그 내용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는 아니다. 작은 학파로 나뉘고 이론철학에서 실천을 주로 하는 철학으로 변하였다. 사람들에게는 의지할 것이 없었다. 국가는 자유를 잃어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외부적 혼란에 자신을 내맡길 수는 없었다. 비록 혼자 힘으로라도 안에 은거하면서 자기 내면(內面)에 의지해야 했다. 이렇게 하여 에피쿠로스 주의, 회의론(懷疑論), 스토아 철학 등이 등장한 것이다. 철학은 지식을 위한 지식임을 벗어나게 되었다. 행복을 위한 처세지(處世知), 인생지(人生知)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였어도 사람은 행복에 대한 소원(所願)을 전적으로 채울 수는 없었다. 동방의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정신을 구제하고자 서방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로마 시대의 종교철학이 되고 그리스 사상과 합류한다. 철학의 역사는 관념(觀念)에서 영혼의 평정(平靜)으로, 그 뒤에 영혼의 구원과 겹쳐진다. 이 인간의식(人間意識)의 변천은 행복의 내용의 추이를 의미한다. 여기에 헬레니즘·로마 시대의 사상적 특색이 있다. 또한 이 시대에 있어서 간과될 수 없는 것이 있다. 과학의 철학으로부터의 독립이 촉진된 것이다. 수학(數學) 분야에서 우선 에우클레이데스가 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사람으로 유클리드 기하학의 <원론(原論)>을 저술한 수학자이다. 이어 아르키메데스(전 287?-전 212)는 시칠리아섬에서 태어나 알렉산드리아에 유학, 부력(浮力)의 원리 등을 발견한 수학자·물리학자이다.

에피쿠로스[편집]

Epicouros (전 342/341-전 271/270) 그리스의 철학자. 사모스섬 태생의 아테네인으로 부친은 아테네 태생의 교사였다. 검소한 환경에서 성장한 그는 12세-14세경에 철학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읽고 쓰는 선생을 경멸한 때문인 것 같다. 진정한 동기는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을 깨우친 데에 있다. 18세 때에 아테네로 나아가 32세 때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35-36세 때 아테네에 있는 자기 집 정원에 철학학교를 개설하여 죽을 때까지 이를 주재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정원학교(庭園學校)'이다. 그의 철학은 아타라쿠시아(心境의 平靜)를 구하였다. 다수의 제자들과 검소하고 우정(友情)에 넘치는 생활을 함께 하였다. 그리고 부인(婦人)은 물론 심부름꾼이나 노예들도 참가를 허용하였다. 저술은 다작으로서 300권을 헤아렸다고 한다. 그러나 잔존되어 있는 것은 <서간>과 <주요교설(主要敎說)> 그리고 <단편(斷片)>뿐이다. 그의 철학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原子論)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원자의 운동, 자유의지(自由意志), 결정론(決定論) 등의 문제로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였다. 원자론적 유물론(原子論的唯物論)이라고도 한다. 그 스스로는 불가분(不可分)·불변(不變)·무수(無數)한 원자가 근본물질이라 한다. 그것이 무수의 공허(空虛) 속을 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윤리학설에서는 개인주의(個人主義)의 형태를 취한다. 에피쿠로스의 고유한 사업은 사람들을 종교적 미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오로지 학문에만 의지케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각 개인에게 선택과 기피(忌避)의 자유가 있어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라고 한다.

에피쿠로스 학파[편집]

-學派 이 학파를 창시한 것은 신(神)과 같이 추앙을 받던 에피쿠로스이다. 다수의 제자가 쾌락주의(快樂主義)를 계승하여 그리스어로 논문을 쓴 피로데모스, 메트로도로스(전 331/330-전 278/277)가 유명하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설을 라틴어로 남김없이 철학시(哲學詩)로 정리해 낸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더욱 유명하다. 메트로도로스는 란프사코스의 사람으로 열렬한 에피쿠로스 동조자(同調者)였다. 그를 안 후 그의 곁을 떠난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스승보다 7년 앞서 53세로 타계하였다. 그는 에피쿠로스의 모사(模寫)라고까지 불리었던 선량한 사람으로, 곤란에 부딪혀 또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 학파의 사람들은 철학을 행복추구의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행복이란 일종의 정신적 쾌락으로, 그것을 구하며 그것을 얻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단순히 그때그때의 일시 쾌락으로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언제 어떤 때에도 마음이 '어지럽혀지지 않은 상태'를 쾌(快)로 보았다. 공(公)의 생활을 단념하라, 숨어서 조용히 살라고 권하고 있다. 국가는 한사람 한사람이 서로를 지킬 필요에서 계약을 맺은 단체에 불과하다. 이 사상은 근세 국가계약설의 선구가 된 것이다.

서간·주요교설·단편[편집]

書簡·主要敎說·斷片 에피쿠로스는 많은 책을 저술하였으나 대부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세 가지의 <서간>과 <주요교설>로부터 취해진 집록(集錄)이 전해진다. 제1의 서간―헤로도토스에게 보낸 것. 철학의 주요 원칙을 논하고 있다. 자연학(自然學)에 관한 것이다. 제2의 서간―퓨토그레스에게 보낸 것. 천계(天界)의 여러가지 일을 취급하고 있다. 제3의 서간―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낸 것. 생활에 관한 가르침이다. 이러한 편지를 통해 에피쿠로스 철학의 기본선(基本線)을 알 수 있다. <주요교설>은 40개의 단편을 모은 것. 제신(諸神), 죽음, 쾌락, 고통, 정말로 있는 것의 증표, 정의 그 자체 등이 기술되어 있다. <단편>은 <에피쿠로스의 권고>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윤리적인 사안(事案), 그의 사람 됨됨이, 윤리학 등을 알 수 있다. 서간과 교설은 현대에 있어서 에피쿠로스의 인품과 사상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3세기 전반)가 <저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학설> 중에 <에피쿠로스전(傳)>이라는 저서를 남겨준 덕분이다. 타인의 저서로부터의 인용은 하나도 없고, 에피쿠로스의 말만이 수록되어 있다.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질에 관해서>와 더불어 고전적(古典的)인 저작이다.

루크레티우스[편집]

Lucretius (전 94-전 55) 로마의 시인·철학자. 재능과 영감(靈感)이 뛰어난 사람. 그의 시는 극히 기교적(技巧的)이며, 열렬한 에피쿠로스 신봉자(信奉者)였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설에 의하면 미약(媚藥)으로 인해 발광하고 광란 발작의 사이사이에 수권의 책을 썼다. 40세경에 자살하였다고 전해진다. 조국의 난세(亂世)를 개탄하고 마음을 편히 하여 의론을 행할 수 없음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야만스러운 전쟁의 즉시 중지와 평화를 희구하였다. 그런데도 현자(賢者)들의 가르침으로 이룩된 굳은 결의의 조용한 전당에 들어박혀 <자연론(自然論)>을 저술하였다고 전해진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시경(詩境)을 개척함을 즐거운 일이라고 노래한, 교훈적 시인이기도 하였다.

자연론[편집]

自然論 루크레티우스는 높은 긍지를 갖고 있던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미묘한 점에 이르기까지 시(詩)로 재현시키려 하였다. 로마인으로서는 처음 있는 시도였다. 그가 취급한 것은 에피쿠로스의 자연학 부분이다. <자연에 관하여>의 라틴역(譯)으로, 그 의미를 본다면 <사물의 본질에 관하여>라고 번역된다. 그것이 이 <자연론>이다. 사물(事物)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의 일체(一切)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자연학이 주로 되어 있고 에피쿠로스파의 주장이나 윤리관, 주관적인 것을 간혹 첨가시켜 놓은 데 불과하다. 그는 자연학을 기술한 후 윤리 방면에도 확대하려 하였다. 작품 내용의 추이(推移)상 명백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이 작품도 미완성이다. 에피쿠로스는 원자(原子) 상호의 충돌은 중량의 차에 의한 낙하 속도(落下速度)의 상위(相違)가 원인이라 하고 있다. 루크레티우스는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경운동(斜傾運動)'을 일으키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도 이 생각으로 해결하려고 했으나 그 논지는 애매하고 난해했다. 이 작품은 키케로의 주선으로 출판된 듯하나 대중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일부 사람은 일찍부터 충분히 진가를 인정하고 있었다. 후배인 베르길리우스(전 70-전 19)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시인 오비디우스(전 43-후 17)는 언제인가 대지(大地)가 멸망하는 날이 있다면 그날이야말로 숭고한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멸실하는 날일 것이라고 하여 이 작품의 영속성(永續性)을 예언하고 있다.

스토아 학파[편집]

-學派 '스토아'란 원래 전방을 기둥으로, 후방을 벽으로 둘러싼 고대 그리스 여러 도시에 있어서의 일종의 공공건축(公共建築)을 의미한다. 이 학파의 창시자 제논이 아테네의 한 '주랑(柱廊)'(스토아)에서 강의를 한 데서 연유하여 이 말이 학파 전체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 학파는 통상 역사적으로 3기로 구분되어 기원전 3세기를 '고(古) 스토아' 시기(제논, 클레안테스, 크리시포스), 기원전 2-1세기를 '중기스토아' 시기(파나이티오스, 포세이도니오스), 기원후 1-2세기를 '후기 스토아' 시기(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고 부른다. 지리적으로 고찰한 경우 고스토아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중기 이후는 주로 로마로 활동무대를 옮기고 있다. 또 파나이티오스(전 185?-전 109)를 제외하고 이 학파에는 순수한 그리스인이 없고, 대부분 소아시아의 신흥무역도시 출신의 셈계(系)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의 출신계층과 직업도 상인의 자제·고학생·노예·황제와 같이 잡다했다. 스토아는 반드시 하나의 핵(核)을 중심으로 형성·계승되어 고정화된 사상체계(思想體系)는 아니다.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 사상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고 내용은 다양성(多樣性)을 갖고 있다. 스토아파 사람들은 학문을 우주의 구성·생성(生成)을 주된 대상으로 하는 '자연학'과 '논리학(論理學)'·'윤리학(倫理學)'의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3개 부문은 각각 독립하고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논리학을 매개로 하여 상호 관련되어 자연학에서 윤리학에 이르는 독특한 세계관(世界觀)을 형성하고 있다. 다만 사람과 시대에 따라 초첨(焦點)의 추이는 엿보여 고스토아에서 후기로 넘어감에 따라 윤리학에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스토아 사상은 윤리학 면에서는 주로 키니코스 학파의 계보(系譜)를 좇고, 자연학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갖가지 요소가 혼재(混在)하며 절충되어 있어 선행하는 특정 학파와 관련짓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 다만 이 학파의 사람들에게서 지배적인 현상은 외적 권위(外的權威)나 세속적인 것을 거부하고 금욕과 극기(克己)의 태도를 갖고자 하는 것인데, 실천적 경향과 유물론적 일원론은 각각 키니코스 학파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은 흔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살던 시대가 이전과 같이 좁은 특정의 폴리스(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한 동·서(東·西) 양세계에 걸친 지배권의 확립이나 로마 제국의 성립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생활 공간이 확대된 시대이며, 또한 정치적으로도 과도기이던 사실에 기인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시대에 개인은 생존 근거를 추상적인 공론(空論)이나 정치적·사회적 현실 중에서가 아니라 자기의 의지라든가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사실 중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스토아의 근본 특징은 이 세계(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물체이며, 어떤 불(火)과 같이 미세한 물질(퓨르·테크니콘=創造的 火, 스페르마티코스 로고스=種子的 로고스, 프네우마=氣息·靈氣 등 사람에 따라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린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자연학에 있다. 신(神)조차도 예외는 될 수 없이 인간이나 그것을 둘러싸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물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만물은 이 근원적 불로부터의 생성과 그 곳으로의 환귀(還歸)의 과정을 반복하도록 결정지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물체로서의 신(神)이 마치 봉밀(蜂蜜)이 벌집 속으로 번져나가듯이 우주 만물을 관철하여 순환하는 것이 섭리이며, 인간의 측면에서 말하면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스토아에게는 우주 만물은 동질(同質)이며 상호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한발 나아가 신·자연·운명·섭리는 동의어로 되어 있다. 다만 작용을 하는 것과 작용을 받는 것과의 상위가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작용의 원천(源泉)도 감각(물체로부터의 자극과 그것에 대한 반응)에서 구해지고 있다. 스토아의 사람들은 종종 "인간은 우주라는 큰 도시의 시민(코스모폴리티스)이다"라고 주장하는데 이 발상(發想)도 이상과 같은 관점과 관련이 있다. 이런 견해를 취하는 한 스토아의 입장은 유물론적 일원론(唯物論的一元論)·결정론(必然論)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유물론은 근원적 물체(根源的物體)가 '프네우마(氣息·靈氣)'라고 표현되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어딘가 포착될 수 없는 것으로, 유물론과 표리(表裏) 관계에 있는 유심론(唯心論)으로 전체계(全體系)를 전환시켜 버릴 가능성을 갖고 있다. 사실 스토아는 후기로 접어들면서 그런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스토아의 유물론적 일원론은 앞서 본 신(神)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일종의 범신론(汎神論)과 표리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스토아의 사상은 전체로 볼 것 같으면 이러한 모순된 면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표면상의 주장 내지 학파가 창설된 당시의 주장과 상반되는 사실이 점차 강조되어 온 경우가 있다. 가령 윤리학 면에서 우주를 지배하는 필연성 중에서 "인간이 여하히 자유를 획득하여 사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필연과 자유와의 관계가 문제이다. 스토아의 사람들은 "일관하여 산다" "자연에 순종하며 산다"라는 것을 목표로 하여 강조한다. 이는 본시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을 통찰함으로써 인간의 유덕(有德)한 생활에 의해 유익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선택하면서, 우주의 커다란 흐름에 순응(順應)하여 조화있게 살고자 하는 주체적·적극적 태도를 의미했다. 논리학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주법칙의 인식수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후기가 되면서 자기의 권능내(權能內)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여 후자를 선악(善惡)과는 무관한 것으로 무시 내지 체념하는 태도를 취하려 한다. 스토아의 사람들은 종종 아파티아(어떤 것에도 마음의 동요를 받지 않는 것)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것도 후기로 옮아감에 따라 소극적 의미로 강조되었다. 스토아의 사상은 고대(古代) 말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종교·문학 분야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가령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을 스토아의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이른바 '신플라톤 주의'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150 ?-221/220)나 오리게네스도 그리스도교를 신학으로 체계화하는 데 있어서 스토아의 입장을 원용(援用)하고 있다. 자연사상(自然思想)의 성립이나 브루노·스피노자의 사상 등 근세에 있어서도 신과 자연을 동일시하려는 스토아의 관점이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 후기 스토아의 윤리사상은 몽테뉴 등의 모랄리스트들에게 일종의 처세훈(處世訓)으로 애독되었다. 현대에 있어서는 논리학 분야에서 말과 말의 관계가 아니라, 명제(命題) 상호의 관련을 문제 삼으려는 스토아의 논리학이 재평가되고 있다.

제논[편집]

(키티온의) Zenon (전 334-전 262) 스토아 학파의 체계적 창시자·수립자. 키프로스섬의 키티온 출신이다. 원래 무역상인의 아들이며 그 자신 상업상으로 항해 중 난파되어서 아테네에 기착한 것이 철학에 종사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가 스토아에서 강의를 행한 것이 이 학파의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 그는 '모순이 없는 것' '수미일관(首尾一貫, 호모로기아)'이라는 것을 특히 강조하였다고 전해지며 이것이 그 후 스토아의 기조(基調)가 되었다. 그의 저작으로는 <자연을 좇는 생활에 관하여>등 몇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하나도 현존(現存)하는 것은 없고, 후대 저작가들에 의해 그 내용이 단편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데 불과하다. 이는 다른 고(古)·중기(中期) 스토아 사람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클레안테스[편집]

Kleanth s(전 331-전 232)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 제논의 후계자. 철학자. 소아시아의 아소스 출신으로 물 긷는 노동을 하면서 제논의 강의를 듣고 후일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스토아의 신학자(神學者)라고 일컬어져, 신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발상은 그에 의해 확립되었다고 한다. 특히 시(詩) 형태로 사상을 전개하는 것을 장기로 하여 <제우스 찬가(讚歌)>가 전승(傳承)되고 있다.

크리시포스[편집]

Chrysippos (전 280?-전 207?) 초기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클레안테스의 제자. 소아시아의 소로이 출신. 엄청난 다작가이며 반드시 독창적인 사상가는 아니었으나 스토아 사상을 체계화하는 데 공적이 있었다. 특히 논리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자신만만한 사람이어서 "내가 없으면 스토아 학파는 존재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스토아 사상은 파나이티오스, 포세이도니오스(전 135 ?-전 51)(中期 스토아) 등 로마의 지배계급과 친교가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 로마로 중심이 옮겨졌다. 중기 이후의 스토아는 한편에서는 플라톤의 입장이 대폭적으로 받아들여져 2원론적 색채를 농후하게 하였다. 다른 한편, 로마인의 실리적 국민성에 적응하기 위해 처세훈화하여 가고, 또 종교적 경향을 띠며 학파로서는 상당한 변질을 보았다.

세네카[편집]

Seneca(전 54-후 39) 후기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에스파냐 코르도바 출신으로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 부친은 당시 유명한 수사학자였다. 그 자신은 이미 젊어서부터 변호사·작가로서도 명성을 떨쳐 궁정에 출입했다. 클라우디우스제(재위 41-54)의 비(妃) 메사리나에게 경원받아 8년간 코르시카섬으로 추방되었다. 이때의 고독한 체험이 스토아 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게끔 하였다고 한다. 그 후 네로 황제(재위 54-68)의 가정교사를 하였으나 음모에 말려들어 혈관에 독액을 주사하여 자살하였다고 한다. 그는 플라톤적인 영혼과 육체의 2원론을 바탕으로 인간에 있어서의 근원악 존재를 인정하고, 악에 있어서의 인간 평등과 인인애(隣人愛)·인간애를 강조하고 있다.

행복한 생활에 관하여[편집]

(저술된 연대는 未詳) 그에게는 <대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12권의 저작이 남아 있다(일부는 斷片的). 실제 내용은 대화가 아니고 서간이다. 이 책은 그중 한 가지로, 그의 형에 대해 씌어진 것으로 스토아의 관점에서 행복을 논하고 있다. 재산·명예·쾌락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한 행복의 제1 조건이 아니고 정신(靈魂)의 건전성이야말로 필요한 것임을 많은 실례를 들어가면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경우 재산·명예 등을 전적으로 부정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런 것을 이용하고 지배하라고 주장한다.

에픽테토스[편집]

Epictetos (55?-135?) 후기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소아시아의 프리기아 출신으로 원래 노예였는데 팔려서 로마로 왔다. 그의 이름 자체가 '뒤에 산(買) 사람'을 의미한다. 그 자신 자기의 생애를 "노예 에픽테토스로서 나는 태어나 절름발이이며 곤궁하기는 이로스(호메로스의 시에 등장하는 걸인의 이름)와 같다. 그러나 제신(諸神)의 친구"라고 2행시(二行詩)에 읊었다고 한다. 후일 해방되어 학원을 개설하고 강의를 하였다. 그는 우리들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지배할 수 있는 내적(內的)인 것과, 육체·부(富)·주위 환경이라든가 하는 의지에 의해 좌우될 수 없는 외적인 것과를 구별한다. 그리고 우리는 후자를 무리하게 얻으려 한다든가 피하려 하지 말고, 자기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아 무관심한 태도를 취해야 하며, 전자에 대해서만 세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은 최대의 선(善)인 자유를 획득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해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내하고 억제하라'를 모토로 하였다고 전해진다.

어록[편집]

語錄 에픽테토스는 아무 저작도 남기지 않았다. 제자인 아리아노스(95년경-175)가 그의 담화를 필록(筆錄)한 <데이아토리바이>(語錄·談話)라고 하는 것이 전해진다. 더욱이 아리아노스는 <엔케이리디온>(提要·要錄)이라 불리는 <데이아토리바이>로부터 적당하게 발췌·요약한 소책자를 편집하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편집]

Marcus Aurelius (121-180) 로마 황제. 그가 재위하던 시대는 국외에서는 게르만족의 침입에 의해, 또 국내에서도 전염병의 유행, 천재 등이 계속되어 로마 제국이 위기에 직면하였던 시대였다. 그는 소년시대로부터 에픽테토스의 영향을 받아 스토아 사상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명상록[편집]

暝想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저서. 원제(原題)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한 일>을 의미하며, 12권으로 되어 있다. 대우주(大宇宙)와 그 속에 사는 소우주로서의 자기 자신과의 대비(對比)를 기조로 하는 내면적 자기 반성의 기록. 특히 죽음의 문제가 끊임없이 논해지며 또 세계(宇宙) 시민의 발상이 되풀이하여 강조되고 있다.

회의파[편집]

(스켑시스 학파) 懷疑派 이 파를 창시한 사람은 엘리스 출생의 피론이다. 회의파는 초기가 고회의파(古懷疑派), 중기가 중(中)아카데미아, 후기가 신회의파이다. 회의론은 주관성이 강하다. 그 방향이 가장 철저한 것이다. 주관과 객관과의 통로를 파괴하며, 보편적인 학(學)도 인식도 진리도 부정한다. 주로 주관적 의견 가운데 파묻혀 버리고 만다. 명백한 주장을 피하는 것이다. 가령 무엇을 말할 때에도 "그렇게도 말할 수 있다" "그럴는지 모른다" "그럴 것이다" "내게는 그렇게 생각된다" "단정(斷定)은 않는다" 등의 말을 쓴다. "단정 않는다"는 것도 "단정은 않는다"라고까지 한다. 결국 에포케(判斷中止)에 의해, 행동의 목적인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철학의 목적은 행복하게 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고회의파에는 피론의 제자 플리우스 출생의 티몬(전 320-전 230?)이 있다. 회의파 이외의 모든 그리스 철학자에게 총명하고 기지에 찬 조소를 가하였다. 중기 아카데미아의 아르케실라오스(전 316-전 241)는, 플라톤학파에 처음으로 회의론을 도입하였다. 카르네아데스(전 214/213-전 129/128)는 이 파의 후일의 학두이다. 신회의파에는 회의 10조(條)를 모아 해석을 붙인 아이네시데모스가 속해 있다. 이 10조란 판단을 삼가야 할 10가지 이유이다. 아그리파, 섹스토스, 엠피리쿠스(후 200년?)도 이 파의 사람들이다. 섹스토스는 그리스의 회의론 연구의 주요 자료로 되어 있는 <제학자반박(諸學者反駁)> 11권을 쓴 의사이다. 이러한 사상은 근세 초기에 몽테뉴 등에서 부활을 보았다.

피론[편집]

Pyrrh n (전 360년?-전 270년?) 그리스의 철학자. 엘리스 출신으로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연배인 아낙사르코스에게 사사하였다. 30세 때 아낙사르코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정(東征)에 참가하여 인도에 갔다. 거기서 고대 인도의 나체 수도자를 알았다. 그것은 육체적 쾌락을 피하고 자연의 관상(觀想)을 주로 하는 것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비술(秘術)·금욕·현자의 도(道)를 배웠다고 한다. 인도에서 돌아와 철학자로서의 생애를 시작하고 엘리스에 학교를 개설하였다. 신(神)과 같이 혼의 안정(安靜)을 얻은 사람으로 유명하였다. 저서는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애초에는 일개 화가에 지나지 않았다. 데모크리토스설을 공부한 것이 동기가 되어 회의론의 기초를 만든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고대회의론이 그의 이름에서 연유하여 피론 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제자인 티몬이 그의 학설을 전하고 있다. 우리들은 다만 이것저것 알 수 있는 데 불과하다. 어떠한 주장도 동일한 강도로 반대설이 대치(對置)될 수 있음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모든 의견·결정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판단중지의 입장이다. 여기로부터 행복에 이르는 새로운 생활 이상은 그리스 회의론의 근본 사상을 이루는 것이다.

절충파[편집]

折衷派 절충파란 특정한 무리의 사람들 또는 틀이 잡힌 사상 체계를 표시하는 것은 아니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기원후 3세기에 걸쳐, 철학상의 여러 학파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경향을 말하며, 오히려 '절충주의'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처세상의 지침을 부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일종의 핸드북과 같은 것이 유행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각 학파의 관심이 점차로 독자적 사상을 전개하는 것보다 오히려 일반 사람들의 교화에 힘쓰게 되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더욱이 이 배후에는 당시 각 학파에게 이미 독창성을 표방할 수 없게끔 된 사정이 있었다. 그 때문에 각 학파는 학조(學租)라고도 할 인물로 환귀하여 재해석(再解釋)으로 시종하든가 또는 통속철학(通俗哲學)에 철저하든가 두 가지 길 이외에는 학파의 존재 의의(意義)를 발견하고 존속을 꾀할 수가 없게 되었다. 통속철학으로의 길을 더듬게 된 데에는 문화의 중심무대가 로마로 옮겨감에 따라 현실적인 국민성으로 해서 각 학파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엄밀·추상적인 이론을 전개하는 것보다 오히려 현실에 대한 각각의 신봉하는 사상적 유효성·적절성을 역설할 필요가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이상 두 가지 길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각 학파간에 정도의 차이가 엿보이며 또 하나의 학파 내에서도 그것을 둘러싸고 분열이 생기는 경우가 있었다. 가령 '아카데미아'의 경우 플라톤으로 돌아가 그것에 충실하려고 하는 그룹(플라토니코이=플라톤 일문)과의 대립이 일어났다. 하여간 이러한 풍조와 더불어 각 학파는 점차 변질하여 종래의 학파간의 한계가 해체되게 되었다. 그리고 각 학파는 각자의 교설(敎說)의 기원을 되도록 옛날로 소급하여 거기서 권위를 구하려 하였다. 철학자는 어떠한 의견을 펼 때에는 언제나 고전(古典)을 참조하여 전거(典據)로 삼으려 하였다. 그 결과 기원전 2세기경부터 과거 철학자의 교설을 집성(集成)한 '학설지(學說誌)'나 플라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해·전집의 편집과 같은 활동이 성행하였다. 철학 분야 이외에도 바르로(전 116-전 27)와 같이 로마의 종교·사회제도·언어·관습과 같은 모든 분야에 관한 고사내력(古事來歷)을 집성·고증한 백과전서적 저술가가 출현하고 있다. 절충주의는 이와 같은 소위 상고주의(尙古主義)라고도 할 풍조와 표리 관계에 있다. 절충주의의 구체적 내용은 각 학파에 따라 다른데, 여하튼 자기 학파의 사상을 중심으로 다른 학파의 사상을 흡수·절충하려 하고 있다. 그 근저에는 학파간의 차이는 명목적인 것에 지나지 않고 결국은 하나의 근원으로 환원되어 근본이 일치한다는 상고주의적 발상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이용하여 플라톤의 2원론적 세계관 중에 스토아의 윤리학을 엮어 넣으려고 한 후기 아카데미아, 특히 아스칼론의 안티오코스(전 130/120?-전 68?)는 당시 절충주의의 전형을 나타낸다. 그의 제자 키케로는 <아카데미카> <최고의 선과 악에 관하여> 등의 저작 가운데서 스승의 설을 소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은 극단적인 경우 단지 당시 제 학파간의 학설상 차이를 절충·해소해 버릴 뿐만 아니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의 근본적 대립마저도 소멸시켜 후자를 전자 속에 전적으로 환원시키는 시도조차 행해지고 있다. 하여간 플라톤의 사상을 중심으로 다른 여러가지 사상을 절충화하려는 경향은 아카데미아뿐만 아니라 중기 이후의 스토아에도 엿보이고, 후일 기원 1세기 후반경에 플루타르코스 등에서 볼 수 있는 플라톤 주의의 부흥이라고도 할 현상으로 계승되어, 3-4세기의 '신플라톤 주의파'에서 체계화되고 결실을 보았다. 다른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사상을 절충화하려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레노스(129년?-199)는 그 일례이다. 그는 본시 담즙(膽汁)·점액(粘液)과 온(溫)·냉(冷)·한(寒)·난(暖)의 짝지음에 의해 독특한 병인론(病因論)을 전개한 의학자였다. 그리고 의학론의 입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에 대한 공감(共感)과 스토아에 대한 반감을 품고, <히포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학설에 관하여><유리아노스 반론(反論)> 등의 저작 속에 여러 사람의 학설을 인용하면서 독자적 절충주의를 전개하고 있다.

키케로[편집]

Cicero (전 106-전 43) 로마의 철학자·정치가. 아르피눔이라는 시골 소읍의 신흥계급인 기사 가문 출신이다. 후일 로마로 나가 변설(辯舌)과 문재(文才)에 의해 집정관이라는고위직에 올라, 공화정시대(共和政時代)에 정치가로서 활약하였다. <베르레스를 고발한다> <바니리우스법 변호(辯護)> <카틸리나를 고발한다> <필리피카> <공화정에 관하여> 등의 저작은 그의 이 방면에서의 활약을 나타낸다. 동시에 그는 아카데미아파 아스칼론의 안티오코스, 스토아 학파 파나이티오스의 강의를 들었고, 다수의 철학적인 저작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사상가로서의 독창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의 공적은 그리스어의 철학 용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데에 있다. 오늘날 영·독·불의 철학 용어 중 대부분은 그의 라틴어에 의거하고 있다. <제신(諸神)의 본질에 관하여> <투스쿨룸 담의(談義)> 등의 철학 저작은 당시 철학 제파(諸派)의 사상을 아는 데 있어서 불가결의 자료이다. 그는 대개의 경우 자기 자신을 비판자의 위치에 놓고 당시의 3학파 인물을 등장시켜 논쟁케 하는 형식으로 철학의 저작을 전개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사상은 전체적으로 절충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정치가·공인(公人)으로서의 입장에서 사회로부터 분리된 곳에서 개인적 행복을 추구하려 하고 있다. 에피쿠로스 학파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나머지 2학파에 대해 공감을 나타내고 있다.

플루타르코스[편집]

Ploutarchos (46?-120 이후) 그리스의 말기의 역사가. 중부 그리스의 카이로네이아 출신. 아테네, 로마 등 각지로 유학했고 카이로네이아의 시정에 관여하기도 하였으나, 만년에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의 최고 신관이 되었다. 그의 저작은 전기(傳記)와 수상(隨想) (<모라리아>-倫理論-라 불린다)으로 대별되어 보다 방대한 양의 논고(論稿)로 이루어져 있다. 사상적으로는 플라톤을 신봉하며 특히 만년의 우주 생성을 주제로 하는 <티마이오스>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우주가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생성된 것이라는 데 대해 독창적인 해석을 표시하였다. 그는 궁극적으로는 플라톤의 사상을 축으로 하여 그리스의 종교적 전통과 이집트로 대표되는 동방 종교와의 종합을 꾀한 것 같다.

영웅전[편집]

英雄傳 <대비열전(對比列傳)>이라고도 한다. 테세우스와 로물루스, 데모스테네스와 키케로처럼 그리스·로마의 유사한 인물끼리 짝지어져 구성되어 있다. 후일에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에도 영향을 주는 등 현대에 이르도록 애독되고 있다.

신아카데미아[편집]

新Academia 중기 아카데미아의 카르네아데스 이후 플라톤 학파는 신아카데미아로 재차 독단적 방향을 걷는다. 스토아 철학으로 기울어져 절충주의로의 길을 한층 추구하게 되었다. 대표자는 라리사의 필론과 아스칼론의 안티오코스이다. 라리사의 필론(전 160-전 80)은 로마에서 강의를 하였다. 키케로는 그것을 들었다고 한다. 필론은 카르네아데스와 스토아파를 조정하여 안전의 명백한 지식을 주장하였다. 아스칼론의 안티오코스(전 68 사망)는 회의사상은 자기모순이라 하여 방기(放棄)하였다. 그리고 진리는 모든 진정한 철학자가 일치하는 곳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가장 행복한 생활을 위해서는 덕(德)만으로는 불충분하나, 어떤 종류의 행복한 생활을 위해서는 충분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필론은 제4차 아카데미아를 수립하여, 그 이후를 신아카데미아라고 하였다. 제5차 아카데미아의 학두는 안티오코스이다.

유대·알렉산드리아의 철학[편집]

Judea·Alexandria-哲學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정 이후 동·서양세계의 융합에 있어서 사상면에서 주도적 역할을 다한 것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기원전 2세기경, 히브리어로 쓰인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였다. 이는 통상 <70인역성서(七十人譯聖書)>(세프사긴타)라고 불리는데, 그 성립의 사정은 역시 알렉산드리아 유대인의 저작이라고 추정되는 <아리스테아스의 편지>에 서술되어 있다. 이와 같은 번역과 동시에 구약성서를 그리스 철학의 관점에서 해석·주해하려고 하는 시도도 있었다. 기원전 2세기 중엽경의 아리스토브로스, 기원후 1세기경의 필론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전자의 저작은 단편적으로밖에 전존(傳存)되어 있지 못하나, 후자의 것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이러한 작업을 행하는 전제로서 그들은 그리스의 철학 사상과 모세 율법과의 동질성 및 전자의 역사적 기원을 후자에서 구하는 '그리스 철학의 유대 기원설'이라고도 할 특이한 주장을 한다.

필론[편집]

Phil n (알렉산드리아의) (전 25?-후 50?) 유대인 철학자.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이며, <구약성서>를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의 사상을 원용하여 비유적 해석을 행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즉 그의 <창세기> 해석을 예로 들면,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전개되어 있는 데미우르고스(造物神)와 이데아의 관계를 교묘히 엮어 넣으면서 전체가 신에 의해 창조된 혼의 타죄(墮罪)-정화(淨化)의 과정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 그에 의해 <구약성서>의 신의 초월성은 주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의해서 비로소 이론적으로 뒷받침되어 체계화되었다. 또한 그는 저서 중에 유대인의 종교상 절대적 정당성을 그리스 철학자의 주장을 많이 인용하면서 증명하려 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당시의 사상을 알기 위해 그의 저서는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그의 사상은 신플라톤 주의나 그리스도교 교부(敎父) 및 근세의 스피노자 철학 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천지 창조에 관하여> <비유적(比喩的) 해석> <특수율법에 관하여> 등 주로 <구약성서>의 모세 5경(五經)이라고 하는 부분을 대상으로 하는 방대한 저작이다.

신피타고라스 주의[편집]

新Pythagoras主義 1세기경부터 피타고라스의 이름을 빌린 갖가지 문서가 유포되었다. 내용으로 보면 사후 영혼의 운명을 신비적으로 묘사하면서 금욕주의를 설파한 것이 대부분이다. 또 '수(數)'를 감각에 의해 파악할 수 없는 세계를 상징하고, 그와 같은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하는 전제 아래에서 플라톤·스토아의 양 사상을 절충한 것과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출현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제정기(帝政期) 로마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유행되고 후일의 신플라톤 주의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다. 인물로서는 니기디우스·피굴루스(전 1세기 후반)·티아나의 아폴로니오스, 가데스의 모데라투스(모두 후 1세기 후반), 아파메아의 누메니오스, 게라사의 니코마코스(후 2세기 중엽) 등이 있다.

신플라톤 학파[편집]

新Platon學派 3세기 이후,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를 기초로 전개해 오는 사상 체계로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스토아 학파 등 고대 여러 학파의 사상 종합화 위에 성립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기본적으로는 이데아계-현상계(現象界)라고 하는 플라톤적 2원론을 계승하고 있으며, 특히 전자를 세분화하여 전 존재를 계층적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데 특색이 있다. 신플라톤 주의는 그 학파로서의 존재는 529년 유스티니아누스제(帝)에 의한 이교도(異敎徒)의 학원폐쇄령과 더불어 종지부를 찍게 되는데, 사상 자체는 중세·근세를 통해 커다란 영향력을 가졌었다. 르네상스에 있어서의 플라톤 주의 부흥이라 일컬어지는 것도 실제 내용은 신플라톤 주의의 색채를 농후하게 갖는 것이었다. 학파의 발전을 역사적으로 보면, 학조(學祖) 플로티노스에서 제2대 학두 포르피리오스(232/233-305? )를 거쳐 얌블리코스(4세기 중엽)까지는 로마에 그 중심이 있었다. 그 후에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 등지의 동방세계로 중심이 옮겨졌다. 특히 전자의 경우, 그 곳에 존속하던 플라톤을 계승하는 아카데미아가 그대로 신플라톤 학파의 학원(學園)화가 되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의 학풍은 프로클로스(410-485, <신학원리>나 플라톤의 주해서를 다수 저술했다), 시리아누스, 다마스키오스(470년- ?), 신프리키오스로 계승되어 갔다.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그룹은 여류 철학자들이었으며 그리스도 교도에 의해 학살된 휴파티아, 시네시오스(370경-413) 히에로쿨레스 등에 의해 4-5세기에 걸쳐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다른 한편, 서방세계에 있어서도 신플라톤 주의는 전적으로 소멸되어 버린 것은 아니고 마크로비우스(400년경의 사람. 신플라톤 주의의 관점에서 키케로의 <공화정에 관하여>에 수록되어 있는 <스키피오의 꿈>을 해석하였다), 마르티아누스 카페르라, 칼키디우스(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라틴어로 번역, 주해를 거쳐 등장하였다) 등의 인물이 4-5세기에 걸쳐 등장하였다. 다만 그들은 동방의 경우와 달리 반드시 틀이 잡힌 그룹을 형성하였던 것은 아니다. 또 서방세계에서 신플라톤 주의는 그리스도교와 점차 결합되어 갔다. 이에 대해 동방의 경우 쇠퇴 일로에 있던 이교(異敎)에 대해 이론적 지주를 주려는 경향이 엿보인다. 즉 이교의 제신(諸神)이나 신화를 플로티노스의 사상 체계 속에 엮어 넣어 재해석하려는 의도가 보여 신비주의적 경향을 심화해 갔다. 신플라톤 주의는 플로티노스의 경우를 예로 들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즉 이데아계와 현상계로 2분(二分)하고, 전자 중에 '1자(一者)', (토·헨), '누스'(지성 내지 정신), '프시케'(영혼)의 3원리(三原理)를 설정한다. 이 '1자'에 관해서는 '선(善)한 것' '단순한 것' '자족적(自足的)인 것' 등 갖가지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명확한 규정이 불가능한, 오히려 "그 무엇이 아닌가"라고 하는 부정적인 형태로밖에 말할 수가 없는 온갖 존재의 구극적(究極的) 원리라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1자'의 발상은 여러가지로 다양하게 나타나 있는 현실(現實界)의 배후에는 무엇인가 그것을 통일하는 구극적인 '1'('多'에 대한 '1')이라는 것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논리적 전제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더욱이 이러한 3원리는 각각 독립된 실체는 아니고 '1자'로부터 유출(流出)되어(에마나티오) 생겨난 것이라고 되어 있어 동적(動的)인 관계에 있어서 통일적으로 포착되고 있다('一者'→'누스'→'프시케'). 즉, 불(火)이 열(熱)을, 얼음(氷)이 냉(冷)을 발산하고, 인간이 아이를 낳는 것과 같이 물건(物)은 자신이 성숙·충실해지면 자기와 동형(同形)의 물건을 산출하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충실해진 '일자(一者)'로부터 '누스', 다시 '누스'에서 '프시케'가 산출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프시케'에는 '이데아계'(英智界)와 그 그림자인 '현상계'를 연결하고 양자를 매개하는 기능이 주어지고 있다. 또 이와 같은 '일자'로부터의 것의 산출·유출의 길과 동시에 일체의 것의 일자에의 환귀(還歸) 과정이 고려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체계는 플라톤적인 '이데아계(英智界)'에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운동·생성(生成)의 견해와 스토아적인 통일된 하나의 생명체·유기체(有機體)로서의 우주를 보려고 하는 관점 등을 도입하여, 그렇게 함으로써 플라톤적 2원론(二元論)이 갖는 모순(상호간에 따로 존재하는 '이데아계'와 '현상계'를 어떻게 결합하여 관련을 맺게 할 것인가)의 한 가지 해결책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또 '1자' '누스' '프시케'의 3원리는 인간의 의식 내 사고(思考)의 반영(反映) 내지 산물로 생각되고 있다. 즉 현상계의 다양성이 의식 내에 있어서 논리적으로 정리되어 가는 단계를 3원리는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3원리는 초월적(超越的)인 동시에 내재적(內在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결국 이와 같은 체계를 구상함으로써 초월적 절대자와 유한존재(有限存在) 인간의 신비적 합일을 의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3원리는 초월적인 실체로서 생각하게 되어 절대자('토·헨', 그 밖에 갖가지 명칭으로 불린다)를 정점으로 하는 존재의 계층단계를 표시하는 것으로 되었다.

플로티노스[편집]

Pl tinos (205-269/270) 그리스 말기의 철학자. 그 자신은 자기의 생애에 관하여 쓴 것을 한 마디도 남기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가 현세에 있어서의 생활을 그림자 생활이라 생각하여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 사는 것을 오히려 수치로 여겼던 데에 기인한다. 다만 그의 제자 포르피리오스가 그로부터 간간이 얻은 전문(傳聞)을 바탕으로 <플로티노스전(傳)>을 써서 <엔네아데스>의 서문(序文)으로 삼은 것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것에 의하면, 그는 이집트의 리코폴리스에서 태어나 28세 때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양자(兩者)를 절충한 것과 같은 철학을 가르치던 암모니오스의 제자가 되어 거기서 11년간 연찬을 쌓았다. 그 후 로마로 나가 철학을 강설하였다고 한다. 만년은 유행병에 걸렸기 때문에 제자들도 두려워서 접근하지 못하고 고독한 가운데 생애를 마쳤다고 전해진다. 그가 최후로 남긴 말은 "우리들 가운데 있는 신(神)의 것을 만유(萬有) 속에 있는 신의 것으로 끌어올리려고 하는데"라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엔네아데스[편집]

플로티노스가 남긴 54개의 논문을 제자 포르피리오스가 정리한 것이다. 포르피리오스는 이들 논문을 내용상 9개씩으로 정리하고 전체를 6권이 되게 편집하였다. '엔네아데스'란 본시 '9'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엔네아스'의 복수(複數)이다. 따라서 각 권(卷)은 '엔네아스'라고 불리며 '엔네아데스'는 전체를 지칭한다. 다시 '6'이 '1'·'2'·'3'의 합이므로 전체가 제1-3권까지의 3권으로 되는 제1부와 제4-5의 2권으로 되는 제2부 및 제6권을 제3부로 하는 총3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3부는 각각 플로티노스의 3원리(三原理)가 반영되도록 잘 편집되어 있다. 즉 제3부에 해당하는 제6권에는 <선한 것, 1인 것에 관하여> 등 '1자(一者)'에 관한 논문이 집록되어 있다.

포르피리오스[편집]

Porphyrios (232/233-305?) 플로티노스의 후계자. 페니키아의 무역도시 틸로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우선 당시의 풍습대로 아테네에 유학하여 롱기노스에게 배웠다. 그 후 로마로 나가, 플로티노스와의 해후(解逅)로 그에게 쏠려 문하에 들어갔다. 스승의 논문을 정리하여 <엔네아데스>를 편집하고 스승의 학설 보급에 진력하였다. 그는 다방면에 걸쳐서 저작을 했다고 전하는데, 그 태반은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데 불과하다. 그는 채식주의자였다고 전하며, 그 관점에서 <동물적 식물의 기피(忌避)에 관하여>를 내놓았다. 또 그리스도교를 적대시하여 <그리스도교 반론(反論)>을 저술하였다. 그는 만년에 여섯 아이를 가진 미망인 마르셀라와 결혼하였으나 그녀에게 보낸 서간에는 그의 이교(異敎)의 제신(諸神)에 대한 경건한 심정이 나타나 있다. 그 밖에 호메로스의 시 해석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관계 저서의 주해와 입문서 등이 있다.

시루라에[편집]

Saturae 이것은 로마제국 초기의 작가 페트로니우스(Gaius Petronius, 別名 Petronius Arbiter)가 쓴 풍자소설의 제목이다. 페트로니우스는 네로 황제(Claudius Caesar Augu­strus Germanicus Nero, 37-68)에게 프로터콜(protocole)을 가르치던 Titus Petronius와 동일인물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폴란드의 소설가 시엔키에비츠(Henryk Sienkiewicz, 1846-1916, 1905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유명한 소설 <쿼바디스>(Ouo vadis, 1895)에도 등장한다. 이 소설에서 그는 "낮에는 잠자고, 밤에는 공무(公務)와 생활을 위한 환락으로 보낸 사람. 다른 사람들은 공무에 정진하여 명성을 얻었지만, 그는 놀고 태만하면서도 명성을 얻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한때 속국의 총독까지 지냈으나, 중상모략 당하여 자살을 명령받고 자결하였다. 그러나 <쿼바디스>에서는 그의 자결장면을 아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사투라에>의 줄거리는 엔콜피우스(Encolpius, 이야기하는 사람)가 아스킬투스(Ascyltus)라는 하층계급출신 불량소년과, 노예인 기톤(Giton)이라는 두 소년을 데리고, 주로 남부 이탈리아 지방의 그리스인 도시들을 방랑하는 과정에, 여러 가지 사건에 부딪치면서 놀아나는 음란하고도 추잡한 짓을 하는 국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것은 네로 황제시대, 로마의 타락한 사회풍조를 폭로·풍자한 것으로서 당시의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라고 한다.

네로[편집]

현대 공산폭군의 대표자는 소련의 스탈린(Iosif V. Stalin, 1879~1953), 북한공산집단의 김일성(1912~1994), 알바니아의 독재자 엔베르 호자(Enver Hoxha, 1908~1985) 등으로 꼽지만, 동서간 고대폭군의 챔피언은 중국 은(殷)의 주왕(紂王)과 하(夏)의 걸왕(桀王), 그리고 로마의 네로(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Nero, 전명 Lucius Domitius Nero, 37~68, 재위 54~68)황제를 꼽는다. 로마제정시대 초기에는, 현명한 황제가 많아서 로마의 국위도 크게 떨치었다. 그러나 네로만은 이 무렵에 집권한 예외적인 암매한 군주였다. 네로는 아그립피나와 선부(先夫)사이에 태어났고, 등극 직후는 근위대장 부르루스(Sextus Afranius Burrus, ?-62), 사부(師父)인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BC 54-AD 65)의 후견하에 선정을 베풀었지만, 성장함에 따라 우리나라 조선조의 연산군(燕山君)마냥 방종하게 되어, 어머니(아그립피나)와의 권력투쟁 끝에 그녀를 살해했다. 부르루스의 사망과 세네카의 은퇴(66년, (피소의 반역행위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자결명령을 받고 자살)로, 간신배 티겔리누스(Gaius Ofonius Tigellinus)를 신임하게 되자 이미 그의 방종을 제지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 특히 여자관계가 지저분한 바 모자간통죄를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황후 옥타비아(Octavia, 40c-59, Claudius 황제의 딸)를 살해하고, 오토(Marcus Salvius Otho, 32-69, 68년에 황제로 추대됐으나 3개월간 집권후 자살)의 처 폽파에아사비나(Poppaea Sabina, ?-65, 62년 네로황제와 재혼했으나 네로의 발길에 채여 죽었다)와 재혼하였다. 그의 포학성은 기독교가 널리 신앙됨에 따라 더욱 증대되었다. 64년에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했는데, 이것은 네로가 당시 불법화됐던 기독교인을 대량학살하기 위한 방화였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네로는 이런 여부를 부정하고, 그 죄를 기독교도들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 적반하장격으로 그 화재는 기독교도의 소행이라고 역선전하면서 그들을 대량 체포하여 박해를 가하였다. 68년에 갈리아지방에 반란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원로원과 근위병도 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로마를 탈출한 후 곧 자살로서 자기가 저질렀던 죄과를 치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