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무굴 제국의 해체와 인도의 식민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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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의 해체와 인도의 식민지화〔槪說〕[편집]

무굴 제국의 통일이 무너지고 있을 무렵 프랑스, 영국의 동인도회사 세력다툼이 전개되고 있었다. 프랑스는 당초 뒤플렉스 지도하에 우세하였는데, 클라이브의 활약으로 영국 세력이 회복되고 1757년의 플라시 전투 이후에는 영국의 주도권이 확립되었다. 동인도회사는 마드라스, 벵골 등에서 인도인 토후(土侯)로부터 지세 징수권을 획득하여 토후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 강화시켜 나갔다.

여기에 대해서 인도인은 마이소르 전쟁·마라타 전쟁·시크 전쟁 등의 반영(反英) 투쟁에 봉기했다. 그러나 하이데라바드나 마라타가 마이소르의 저항(抵抗) 진압에 협력하고, 마라타 제후(諸侯)의 세력싸움에 영국 세력을 이용하여 영국 세력의 신장(伸長)을 초래했다는 사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일관된 지도와 통일적 조직이 결여된 반영(反英) 투쟁은 봉건세력의 동요와 내분으로 각기 격파되어, 19세기 중반의 시크 교국(敎國)의 반항을 최후로 영국 세력이 인도 전국을 휩쓴다.

동인도회사는 무굴 황제와 제후로부터 징세권(徵稅權)을 획득하고 황제에게는 연금을 지급한다는 형식으로 지배지역을 확대해 나갔는데, 1774년 레귤레이팅법(法)에 의해서 본국의 회사 감독권이 강화되었고, 벵골의 지사(知事, Governor)는 총독(總督, Governor-General)이 되었다(초대는 헤이스팅스). 1793년의 영구지조(永久地租) 설정(→자민다르)은 1813년 동인도회사의 인도 무역 독점권의 폐지와 함께 농촌의 파괴, 영국 상품의 유입에 박차를 가했다.

뒤플렉스[편집]

Joseph Dupleix (1697

1763)

프랑스의 인도 지배의 공로자. 동인도회사 사원 집안에 태어나 1742년 프랑스령 인도의 지사가 되었다. 이 사이에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일어나서, 영국 동인도회사와 항전(抗戰), 마드라스를 점령하는 등 프랑스 세력의 전성기를 맞았다. 인도인 토후로부터 행정권을 매수하여 영토를 확대시켰으나, 이것이 회사의 기업성(企業性)과 충돌하여, 드디어 1754년 본국에 소환되어 실의와 빈곤 속에서 죽었다.

클라이브[편집]

Robert Clive (1725

1774)

영국의 인도 지배의 기초를 구축한 정치가. 19세에 동인도회사 서기에 부임하여 뒤플렉스에 대항하여 카내틱을 확보, 후에 찬데르나고르를 점령, 캘커타를 탈환, 플라시에서 프랑스 원조를 받은 벵골 토후를 격파하고 영국의 주도권을 확립했다.

남작(男爵)을 수여받고 초대 벵골 지사가 되어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은퇴 후에는 시정(施政)과 사리 추구를 비난받고, 실의 속에서 자살했다.

플라시의 싸움[편집]

1757년 캘커타 북방의 플라시(Plassey)에서 있었던 영국 동인도회사와 프랑스의 원조를 받은 벵골 토후(土侯)와의 결전. 토후에 점령된 캘커타를 탈환한 클라이브가 이끄는 동인도회사 군대 3천 명은 7만의 벵골군에 대항했는데, 대군을 거느리고 형세를 관망하던 토후의 장군 밀 쟈파르의 내통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전후 클라이브는 쟈파르를 토후로 삼고 거액의 배상금·사례금 이외에 캘커타 주변 지역의 지조(地租) 징수권을 획득했다. 이후 프랑스 세력은 후퇴하고, 영국 동인도회사는 토후의 세력싸움에 편승하여 토후 폐립(廢立)의 실권을 쥐고, 지조 징집권(徵集權) 획득 등에 의해 인도 영토를 잠식해 들어간다.

마이소르 전쟁[편집]

-戰爭

18세기 후반에 영국과 마이소르(Mysore) 왕국과의 사이에 4회에 걸쳐서 일어난 전쟁. 영국의 남인도 장악의 결정적 단계가 된 전쟁이다. 1761년 남인도의 마이소르 왕국에서는 이슬람교도의 무장 하이다르 알리가 자립하여 왕위에 올랐다. 하이다르 알리는 정치가로서나 군인으로서 탁월한 수완을 지닌 사람으로서 삽시간에 남인도의 서해안에 강대한 세력을 구축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에 남인도 지방에 세력을 부식하고 있던 영국을 자극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1차(1767∼1769), 제2차(1780∼1784) 전쟁에서는 영국측이 불리하게 끝났는데, 제2차 때에는 프랑스가 마이소르측에 가담함으로써, 유럽에 있어서의 영국과 프랑스의 확집(確執)이 인도에 파급했다. 영국은 인도에 있어서의 각 번왕국(藩王國) 사이의 세력 다툼을 교묘히 이용하여 하이다르 알리의 아들 티푸 술탄(Tipu Sultn)에게 제3차(1790∼1792), 제4차(1799)의 전쟁을 도발, 마침내 티푸를 죽이고 남인도에 세력을 확립하였다.

마라타 전쟁[편집]

-戰爭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쳤던 마라타(Martha) 동맹의 반영(反英) 전쟁. 페시와가(宰相家)의 내분으로 마라타 제후(諸侯)는 영국,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세력을 다투었다(제1차, 1775

1782). 이로 말미암아 진출한 영국 세력에 대한 저항도 패배(1803

1805)하고, 1817

1819)년 제3차 저항이 시도되었으나 제후간의 불통일 때문에 각기 격파당했다. 마라타의 굴복에 따라 조직적인 반영 세력으로는 시크 교단(敎團)만이 남았다.

란지트 싱[편집]

Ranjit Singh (1780∼1839)

인도 시크교도 왕국의 창시자. 펀자브에서 출생. 펀자브지방에 할거하던 시크교도의 세력을 규합하여 19세기 초에 시크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펀자브 정복은 영국의 요구와 충돌하였으나, 세 차례의 마라타 전쟁에도 영국에게 굴복하지 않은 유일한 왕국으로서 독립을 지켰다. 1839년 그가 죽은 후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기 시작하여 1840년대에 시크전쟁에서 두 차례에 걸쳐 패배함으로써 멸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인도는 독립된 정치권력이 완전히 사라졌다.

시크 전쟁[편집]

-戰爭

19세기 중엽, 인도 서북부를 지배하고 있던 시크교도와 영국군 간에 일어났던 전쟁. 2회에 걸친 이 전쟁의 결과, 영국은 서북 인도의 요지 펀자브 지방을 병합하는 데 성공하였다. 제1회의 전쟁은 1845∼1846년에 있었고, 발단은 시크군이 영국군 점령지구에 공격해옴으로써 시작되었다. 항상 펀자브 지방의 병합을 노리던 동인도 회사는 즉시 선전을 포고하여 응전하였다. 서전(緖戰)은 시크군의 선전(善戰)으로 3회나 승리를 거두었으나, 몇몇 시크 영주(領主)들의 배반으로 1846년 전투에서 패배하여 라호르조약이 체결되고 영국은 동부 펀자브 지방을 병합하는 한편 서부 펀자브 지방에는 군대 주둔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제2회의 전투는 1848∼1849년에 일어났고, 영국의 식민지화 정책이 노골화되자,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반영(反英) 무장 봉기로 폭발하게 되어, 진압에 나선 영국군의 고전(苦戰)은 제1회와 별 차이 없었으나, 또다시 유력한 시크 영주의 배반으로 진압되었다. 이 결과 영국은 1849년 3월에 전(全)펀자브 지방의 병합을 선언하고, 숙원의 인도 정복을 완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출하는 서북 국경지역까지도 장악했고, 인도 최대의 곡창·면작지대(綿作地帶)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자민다르[편집]

Zamindr

인도에서 공식적으로는 토지소유자 일반, 보통으로는 대지주를 가리킨다. 무굴 왕조 초기에는 지조(地租) 징집 청부인(請負人)으로서, 징집액의 10분의 1을 자기 것으로 했다. 영국의 지배하에서 근대법적(近代法的)인 지주로 오인되어, 1793년 콘워리스 총독의 ‘영구지조 설정(永久地租設定)’에 의해서 영구 고정지조(固定地租)를 동인도회사에 납부할 의무를 진 토지소유자로서 인정되었다. 자민다르의 징세 대상에 대한 지주화는 무굴 시대부터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것으로 명실상부한 대지주로서 재지(在地) 권력을 장악하여, 영국 지배의 지주(支柱)가 되었다. 평등한 공동체 성원(成員)이었던 자작농민은 이 새 지주의 소작인으로 영락되어 빈궁화되었다. 현재도 토지개혁의 중요한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그 후 타르크타르 등 중간 지주층이 파생되어 착종(錯綜)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남부 인도에서는 경작자를 납세자이자 소유자로서 인정하는 라이야트와리제(制)가 실시되었으나 지주도 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