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유럽의 국제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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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국제전쟁〔槪說〕[편집]

18세기 유럽 외교정책의 기본은 여전히 제국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는 동시에 제국의 세력 범위가 재조직된 세기이기도 했다. 먼저 에스파냐의 계승전쟁을 경계로 하여 종래 유럽에서 최강의 국가로 보였던 프랑스가 쇠퇴기에 들어섰다는 것과 에스파냐가 옛날의 국위(國威)가 아니라는 것――여기에 대해 독일제국 내 하나의 영방(領邦)국가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이 에스파냐의 계승전쟁을 계기로 급속히 대두되었다는 것, 러시아의 세력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등이다. 따라서 세력의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전에 비해서 한결 곤란해졌다. 많은 동맹이 각 나라의 사정에 따라서 체결되기도 하고 해소되기도 하여 복잡한 관계를 나타냈다. 오랫동안 격렬하게 반목하고 있던 합스부르크가(家)의 오스트리아와 부르봉가의 프랑스가 동맹하는 등 외교혁명이라 불리는 사태도 생겼다.

전쟁은 대부분의 경우 두 나라간의 전쟁이 아니라 전(全) 유럽 여러 나라를 강제적으로 전란 속에 휘말리게 하는 성격으로 발생했다. 더욱이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점은 유럽 본국간의 전쟁은 동시에 식민지간의 전쟁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18세기의 전쟁이 왕가간의 전쟁이라는 성격을 차차 불식(拂拭), 각국의 중상(重商)주의적 식민정책의 충돌이 때때로 전쟁의 최대 원인의 하나가 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17세기 말 이래 해상의 패권을 장악하고 정력적으로 해외 진출을 기도해 온 영국은 항상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최대의 강국(强國)이 되었다. 미국 식민지가 독립하여 영국의 지배 아래서 이탈한다는 타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18세기 말에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유럽을 선도(先導)하는 입장을 구축하고 있었다.

에스파냐 계승전쟁[편집]

-繼承戰爭

루이 14세가 행한 최후의 침략전쟁.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2세에게 자식이 없자,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루이 14세, 독일 황제 레오폴트 1세, 바이에른 선제후(選帝侯)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서로 상속권을 주장하였다. 에스파냐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중 그 어느 나라와도 병합되는 것을 두려워한 영국과 네덜란드, 특히 영국왕 윌리엄 3세는 비밀리에 두 번이나(1698, 1700) 에스파냐령의 분할을 프랑스, 오스트리아와 획책(?策)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던 중 1700년에 카를로스 2세가 죽었다. 이에 루이 14세는 에스파냐의 궁정(宮廷)을 조종하여 손자인 앙주공(公)을 펠리페 5세로서 에스파냐 왕위에 앉히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에 대하여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가 동맹하였으며, 프랑스측에는 사보이공(公), 바이에른 선제후 등이 동맹하였다. 그리하여 1701년부터 이탈리아, 네덜란드, 독일의 각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이동안 영국군은 지브롤터를 점령하였다(1704). 전쟁중에도 화평교섭(和平交涉)은 수차례 있었지만, 결국은 1710년 영국에서 휘그 내각이 무너지고 1711년 독일 황제 요제프 1세가 죽자, 1712년부터는 위트레흐트 화평회의(和平會議)가 열려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이 전쟁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도 행해졌는데, 앤여왕 전쟁이라고 불리고 있다.

위트레흐트 조약[편집]

-條約 Treaty of Utrecht

에스파냐의 계승전쟁은 1713

1715년에 열국 사이에 체결된 위트레흐트(Utrecht) 조약에 의해서 종결되었다. 펠리페 5세는 프랑스와 합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에스파냐의 왕위를 승인받았다. 주요내용은, (1) 열국은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합동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펠리페 5세를 승인한다. (2) 영국은 에스파냐로부터 지브롤터와 미노르카 섬을, 프랑스로부터는 허드슨 만(灣) 지방, 뉴펀들랜드, 아케디아를 얻는다. (3) 네덜란드는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의 몇 개 시(市)를 획득한다. (4) 프로이센의 왕호를 인정한다. (5) 사보이는 시칠리아를 얻는다. 이 조약에 의해서 오스트리아는 에스파냐의 옛 땅 나폴리 공국(公國)·밀라노 공국·토스카나의 일부·사르데냐를 획득했다. 그러나 에스파냐는 이에 불만을 품고서, 1717년 이래 몇 번이나 옛 영토의 수복을 목적으로 이탈리아 반도에 침략을 감행하여 그때마다 이탈리아에 전화(戰禍)를 입혔다. 이 위트레흐트 조약은 18세기의 국제관계를 규정한 것으로서 중요한 조약이다.

오스트리아 계승전쟁[편집]

-繼承戰爭

1740년 오스트리아(Austria)의 황제 카를 6세가 사망하고 황녀(皇女) 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했다. 그런데 바바리아 선제후·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 왕·에스파냐 왕 등이 각각 계승권을 주장하고, 프랑스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즉위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러한 나라들은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분할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도 이 기회에 오스트리아에 침입하여 산업이 발전하고 있었던 슐레지엔 땅을 점령하였다. 영국은 에스파냐와 교전상태에 있어 네덜란드가 프랑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오스트리아를 지지하였고, 폴란드도 중립을 바라면서도 오스트리아를 지지했다. 사르데냐는 에스파냐의 원조를 받아 북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 영토를 요구했다. 프로이센을 적대시하고 있던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에 호의를 보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에서도 개전하여 아메리카에서는 영국이, 인도에서는 프랑스가 각각 우세했다.

아헨 화약[편집]

-和約 Treaty of Aachen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은 1748년의 아헨(Aachen) 화약에 의해서 종결되었다. 주내용은 (1) 오스트리아는 파르마, 피아첸차를 에스파냐에게 양도할 것 (2)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를 확인함 (3) 제국(諸國)은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을 확인할 것 (4) 사르데냐는 롬바르디아의 일부를 영유함 등이다. 이 결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권이 승인되었으나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가 인정되어 7년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에서 점령한 지역을 각각 반환했다.

7년전쟁[편집]

七年戰爭

프로이센의 영유가 확정된 슐레지엔은 직물공업과 광산업의 중심지였다. 이 땅을 탈환한다는 것은 오스트리아의 발전을 위해서 극히 중요한 일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절대주의 확립에 노력하였고, 러시아, 작센과 손을 잡았으며, 다시 숙적 프랑스와도 동맹을 맺었다. 이것은 영국이 강국이 된 프로이센으로부터 하노버령(領)을 지키기 위해서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현실적인 외교 정책을 진행시켜 영국과 반목하고 있던 프랑스와 손을 잡고 반(反)프로이센 대동맹 형성을 진행시켰다. 프리드리히 2세가 1756년 선제공격(先制攻擊)을 실시하여 7년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로이센은 영국으로부터 군자금을 원조받으면서 전유럽을 상대로 싸웠으나 1760년 수도 베를린이 함락되어 일시 심한 곤경에 빠졌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황제가 바뀌어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프로이센을 지지하였으며, 또한 식민지 전쟁에 세력을 집중하고 있던 영국이 아메리카와 인도 양쪽에서 프랑스를 격파했기 때문에 형세는 역전되었다.

파리 화약[편집]

-和約 Treaty of Paris

1763년 후베르투스부르크 화의(和議)에서 7년전쟁은 종결되고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가 재확인되었다.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 요제프 2세를 독일 황제로 선거할 것이 약속되었다. 한편 영국은 같은 해, 파리(Paris) 화약에 의해 프랑스로부터는 캐나다 및 미시시피 이동(以東) 아프리카의 세네갈 땅을, 에스파냐로부터는 플로리다를 할양 받았으며, 폰디셰리 샨데르나고르는 프랑스에 반환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와 같은 전쟁을 통해서 영국은 해외 진출의 확고한 발판을 구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