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청 및 러시아의 북아시아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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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및 러시아의 북아시아 진출〔槪說〕[편집]

청은 네르친스크 조약 이래 헤이룽강(黑龍江) 유역 이남을 확보해 왔는데 다시 외몽골 방면에서도 이때까지 때때로 침입하여 청의 지배를 방해하고 있던 일리(Ili) 지방 준가르부(部)의 세력을 일소하고, 외몽골은 물론 일리 지방에서 신장(新疆)·티베트·칭하이(靑海) 방면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부를 지배하게 됐다. 통치에 있어서는 회유책(懷柔策)을 취하여 그들의 자치에 위임함과 동시에 중앙의 이번원(理藩院)이 통괄하였다.

러시아는 청(靑)에게 헤이룽강 방면으로부터 쫓겨간 후 외몽골 방면으로 향했고, 새로이 캬흐타 조약을 맺어 이 방면에서도 양국 관계가 조정되었다. 또한 캄차카 방면에는 이미 17세기 말에 거기에 가 있었으나 수차례 탐험 조사에 의하여 이곳을 영유하고 베링 해협으로부터 알래스카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와 같이 청은 국경을 확보하고 북아시아 진출을 과시하였으며, 러시아 또한 시베리아를 확보하고 동북에의 진출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준가르부[편집]

-部

17세기 초부터 18세기 중엽에 걸쳐 일리 지방을 근거로 하여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발전한 몽골족의 부 명칭이다. 17세기 후반에 외몽골에 침입했다가 청에 패배당한 적도 있으나 그 후에도 가끔 외몽골이나 티베트에 침입했기 때문에 청은 1755년 그 근거지를 공격, 완전히 격멸하여 일리 지방을 준부(準部)로 하고 더 나아가서 준가르(Dzungar)부 지배하에 있었던 동투르키스탄의 투르크인까지도 정복하여 회부(回部)로 하고, 양부를 합쳐 신장(新疆)이라 명명(命名)하고 후에 성(省)을 두었다.

캬흐타 조약[편집]

-條約 Treaty of Kyakhta

러시아와 청(淸) 사이에 맺은 조약. 캬흐타는 조약 체결 후에 생긴 러시아측의 마을인데, 러시아와 외몽골의 국경상에 있으며, 청국측의 마이마이청(賣買城)과 대치하고 있다. 1689년 러·청간에는 네르친스크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그 후에 다시 통상관계를 조정하고, 러시아와 외몽골과의 국경을 확정할 필요가 생겨 1727년 11조로 된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요점은, 네르친스크 조약에서 정한 아르군강 국경으로부터 서쪽에 이르는 국경을 오늘날의 러시아·몽골 국경선으로 정하고, 러시아 대상(隊商)은 그 인원을 200명으로 하여 3년에 한번씩 베이징(北京)에 올 수 있게 할 것, 캬흐타와 아르군 강변에 교역장(交易場)을 설치할 것, 러시아는 베이징에 교회를 설립하고 선교사와 어학(語學) 연구생(5명)을 둘 것 등이었다. 이 조약의 결과 청국은 몽골에 대한 주권을 확립하였으며, 금세기(今世紀)에 이르기까지의 러시아와 청국 간의 관계를 규정한 점에서 중요하다.

캄차카 영유[편집]

-領有

캄차카(Kamchatka)는 18세기 사이에 러시아의 영유로 돌아갔다. 러시아는 카자흐의 대장 아틀라소프의 원정으로 1697년 일찍이 캄차카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그 후 1720

1721년의 측지대(測地隊)나, 1925

1930년과 1933

1943년의 베링을 대장으로 한 제1차 및 제2차 탐험대의 활동에 의하여 반도(半島)의 실정이 판명되어 점차 러시아 영유로 귀속되었다.

베링 해협 탐험[편집]

-海峽探險

러시아의 항해가 베링(Be­ring)이 행하였다. 그는 표트르 1세로부터 명령을 받고 캄차카 탐험대를 조직하여 제1차 탐험(1725

1730)으로 캄차카 동해안에서 북상(北上)하여 베링 해협(그의 이름으로 命名)을 통과하였고, 제2차 탐험(1733

1743)으로 북아메리카 연안에 도달하였다. 아시아와 아메리카가 육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판명되어 알래스카 개척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