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남북전쟁과 제국주의의 발전/비스마르크 체제와 독일의 세계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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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 체제와 독일의 세계정책〔槪說〕[편집]

통일 후의 독일은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국제정치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다했다. 1880년대까지는 재상 비스마르크의 영향력이 강하여 경제상의 여러 개혁을 시행하였고, 보호무역 정책을 취해 자본주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또한 국가의 통일을 강화하기 위해, 가톨릭 교회의 세력에 대항하여 문화투쟁을 전개하고, 사회주의 진압법을 제정하여 사회주의 세력에 제재를 가하는 한편, 양로(養老)·상병보험(傷病保險) 등 일련의 사회정책도 아울러 실시하였다. 대외면에서는 신흥 독일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당면한 전쟁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는 것이 필요하였으므로 독일에 대해 복수열이 강한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열강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데에 힘썼다. 러·투 전쟁 후 베를린 회의를 소집하여 열강의 이해 대립을 조정한 것은 이와 같은 정책의 구체화였다. 이렇게 하여 독일의 자본주의는 눈부신 발전을 보여, 그 생산력은 마침내 영국을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880년대에는 비스마르크의 정책에도 모순이 드러나고, 특히 빌헬름 2세가 즉위하자 대외정책·사회주의 대책 문제 등에 의견 대립을 보여서 비스마르크는 하야(下野)하였다. 이즈음 강력해진 기업가는 적극적인 해외진출을 요청하게 되어, 세계정책의 전환은 불가피해졌다. 이리하여 1890년대에는 군비확장과 중근동(中近東)에의 진출이 강력히 추진되어 점차로 영국과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갔다.

비스마르크[편집]

Otto Ed uard Leopold Frst von Bismarck (1815

1898)

프로이센 융커 출신의 정치가로 19세기 후반의 독일 발전 및 국제정치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1862년 프로이센의 수상이 되어 철혈정책(鐵血政策)에 의해 독일 통일을 추진하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승리하여 통일을 실현하였다. 통일을 성취한 연후에, 독일제국 재상으로서 보호관세 정책·문화투쟁·사회주의 제재(制裁)·사회정책 등을 시행하고, 외교면에서는 프랑스를 고립시킴으로써 3제동맹·3국동맹 등에 의하여 평화를 유지하면서 국력의 충실에 진력하였다. 새로 즉위한 빌헬름 2세와 대립, 1890년에 물러났다.

라살[편집]

Ferdinand Lassalle (1825∼1864)

독일의 노동운동 지도자, 사회사상가. 견직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에서 헤겔 철학을 공부했으며, 헤겔 철학에 심취하여 재학중 이미 헤겔좌파가 되었다. 1848년 3월혁명을 계기로 두 번이나 투옥되었으며, 프랑스의 사회주의자와 K.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아 1845년 무렵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독일 노동운동을 지도하여 1863년 독일사회민주당의 전신인 전독일노동자동맹을 조직하였으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발전을 이루지 못했고 마르크스파와의 내부갈등과 재상 비스마르크의 사회입법과의 타협도 성과를 이루지 못한 채 1864년 여성문제로 결투중 부상을 입고 죽었다.

주요저서로는 『노동자 강령(1862)』 『공개답장(1863)』 『간접세와 노동자계급(1863)』 등이 있으며, 그의 사상은 독일사회민주당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문화투쟁[편집]

文化鬪爭 Kulturkampf

독일에서 비스마르크가 행한 가톨릭 억압정책. 가톨릭은 일상 생활·교육 등을 통하여 시민에게 영향력을 가져 흑색(黑色) 인터내셔널로서 국제적으로도 연계(連繫)되었다. 이것을 이용하여 서남 독일은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적 중앙집권에 반대하고 지방분권주의를 취해, 중앙당을 조직하였다. 이에 비스마르크는 1871년 교단조항(敎壇條項), 1872년 학교관리법, 1873, 1874, 1875년의 5월법, 1872년의 예수회 금지 등의 조치에 의해 대탄압을 꾀했다.

그러나 가톨릭의 맹렬한 반대와 사회주의 세력화에 직면하여 타협이 불가피해지자, 1878년 피우스 9세의 죽음을 전기(轉期)로 하여 점차 각종 금지법(禁止法)은 해제되고, 비스마르크의 패배로 끝났다.

비스마르크의 산업육성[편집]

-産業育成

독일의 통일은 국내 시장의 통일을 완성하였고, 전쟁에 의해 프랑스로부터 획득한 영토와 배상금은 급속한 경제발전의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통일 후에도 화폐제도·도량형제도·우편제도·은행제도 등의 통일·정비를 하였고, 보호관세 정책을 취하여 산업 육성에 힘썼다. 그 결과 독일의 공업이 19세기 말에는 영국을 능가할 정도가 되고 기업의 집중도 진척되었다.

사회민주당[편집]

社會民主黨

자본주의의 발달에 수반하여 1860년대부터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해졌고, 1875년에 여러 파가 합동하여 사회주의 노동당이 결성되었다. 이것은 사회주의 진압법에 의해서 일시 세력이 쇠퇴되었으나 점차 당세(黨勢)가 늘어 제국의회(帝國議會)에 많은 의석(議席)을 차지하여 비스마르크의 야당(野黨)이 되었다. 히틀러에 의해 탄압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부활하였으며, 서독(西獨)의 사회민주당은 자유당과 연합여당이 되었다. 1972년 11월의 총선거에서는 제1당으로 진출, 집권당으로서 동서독 문제의 타결에 주력하였으며, 동독(東獨)에서는 공산당과 합동하여 사회통일당(社會統一黨)이 되었다.

사회주의자 진압법[편집]

社會主義者鎭壓法

비스마르크에 의해 제정된 사회주의 세력의 제재를 위한 법률. 1878년에 제정되었는데 사회주의자의 집회·결사·출판의 자유에 제한을 가하며 운동자의 추방과 사회노동당의 불법화를 단행하였다. 1890년 비스마르크의 실각(失脚) 후 폐지되었다.

보호관세법[편집]

保護關稅法

비스마르크는 처음 자유무역주의를 취하였으나 1873년 공황(恐慌) 이후의 경기후퇴(景氣後退)로 정책 전환을 강요받아 1879년 동법을 제정하였다. 이것은 공업원료 이외의 수입품에 5

10%의 관세를 부과하는 것을 규정한 법이다. 그 결과 공업제품의 수입이 억제되어 산업자본가가 이익을 보았고, 농산물에 관세를 매기는 것으로써 융커도 혜택을 받을 수가 있었다.

비스마르크 체제[편집]

-體制 Bismarckian System

1870

1880년대, 독일제국의 발전에 필요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비스마르크가 만들어낸 국제질서이다. 프랑스의 보복을 두려워한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으며, 러시아와 제휴하고 영국과의 우호에 힘써, 프랑스의 완전 고립화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그 체제도 내부에 여러 가지 모순을 포함하여 비스마르크 퇴진 후, 1890년의 독·러 재보장조약(獨露再保障條約)의 파기, 1891년의 프·러동맹 성립에 의해 붕괴되었다.

3제동맹[편집]

三帝同盟 Three Emperor’s League

1873년에 체결된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3국 황제간의 비밀협약. 비스마르크의 프랑스 고립화 정책의 하나로 국경선의 현상 유지, 국내 혁명운동의 제재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동맹은 발칸 방면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대립이 격화됨에 따라 점차로 약화되어, 1878년의 베를린 회의로 사실상 소멸되었다. 1881년에 3제협상으로 부활되었으나 이것도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베를린 회의[편집]

-會議 Berlin Congress

비스마르크의 초청(招請)으로 베를린에서 개최된 국제회의(國際會議). 그 목적은 1878년 3월 러·투 전쟁을 종결시킨 산스테파노 조약을 파기시키는 데 있었다. 산스테파노 조약에서는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3국의 독립과 대(大)불가리아 자치공국(自治公國)의 건설을 약정하였는데 발칸반도에 슬라브계 여러 민족의 독립국가(獨立國家)를 건설한다는 것은 발칸에 대한 러시아 세력의 침투를 뜻하는 것이므로, 발칸에 사활적(死活的)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오스트리아와 영국은 다같이 산스테파노 조약의 파기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이 국제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공정한 중재인(仲裁人)의 역할을 자청하여 이 문제에 관계된 여러 나라를 베를린에 초청하여 국제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3국 독립은 인정되었으나, 그 영토는 변경되었고, 불가리아 공국의 영토는 발칸산맥의 북쪽으로 제한 축소되었으며, 남쪽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주권(主權)하에 새로이 동(東)루마니아 자치주(自治州)가 설립되었다.

또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두 지방의 행정권은 오스트리아에 주어진 반면, 러시아가 기도했던 소아시아 방면의 영토획득은 제한되었다. 한편 영국은 이 회의 도중 투르크와 방위조약을 맺고, 그 대상으로 키프로스 섬의 행정권을 받았다. 이 회의는 1814∼1815년의 빈 회의 및 1856년 파리 회의와 함께 19세기의 3대 국제회의로 회의 중 비스마르크의 태도 때문에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독·오 동맹[편집]

獨墺同盟 Austro·German Alliance

1879년 독일·오스트리아 사이에 체결된 군사동맹. 베를린 회의 후 러시아에서 반독(反獨) 감정이 높아졌으므로 비스마르크는 러시아를 대비하고 한편으로 오스트리아가 러시아나 프랑스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체결된 것이다. 양국(兩國) 중 한쪽이 러시아로부터 공격받을 때 다른 한쪽은 전력을 다해 원조하고, 러시아 이외의 제3국으로부터의 공격이 있을 경우에는 호의적 중립을 지킬 것을 약정한 것이다. 3국동맹과 마찬가지로 제1차 세계대전까지 존속되었다.

3국동맹[편집]

三國同盟 Triple Alliance

1882년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3국 사이에 성립된 군사동맹. 1881년 프랑스의 튀니지 점령에 충격을 받은 이탈리아가 독일·오스트리아에 동맹을 제의한 것을 직접적인 동기로 하여 성립되었으며, 전쟁 발발시 상호 군사원조를 하는 것 등이 규정되었다. 후일 3국협상에 대항하는 국제진영의 중심이 되었으나, 이탈리아의 이해는 다른 2국, 즉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는 반드시 일치되지 않아 제1차 세계대전중인 1915년 이탈리아가 협상국측에 참가하였기 때문에 동맹은 와해되고 말았다.

독·러 재보장조약[편집]

獨露再保障條約 Reinsurance Treaty독일과 러시아간에 체결된 비밀 조약. 1885년에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관계가 긴박해지자, 양국은 3제협상(三帝協商)의 갱신을 거절했다. 독일은 프랑스의 보복에 대비하기 위해 러시아의 중립을 필요로 했고 러시아도 아시아에서 영국과의 각축을 계속했으므로 독일의 지지를 필요로 하여 이 조약을 체결했다. 독일이 프랑스를, 또는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3국과의 전쟁에 있어서는 상호중립을 지킬 것과 발칸의 현상유지가 약정되었다. 그 기한은 3년이었으나 1890년 독일이 갱신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소멸되었다.

러시아·프랑스 동맹[편집]

露佛同盟 Russo·French Alliance1891년에서 1894년에 걸쳐 성립된 러시아·프랑스 사이의 군사동맹. 19세기 후반 러시아와 프랑스는 비스마르크의 3제동맹(三帝同盟)과 독일·러시아 재보장 조약 등의 프랑스 고립화정책으로 친선관계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1890년 러시아와 독일의 재보장조약의 만기와 비스마르크의 퇴진으로 러시아와 프랑스의 관계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비스마르크 퇴각후 새로운 재상 카프리비는 재보장조약에 대한 러시아의 요구를 거절하여 국제적으로 프랑스와 러시아 두 나라는 고립상태가 되었다. 특히 러시아는 프랑스로부터의 재정적 원조가 절실했다. 1891년 프랑스가 러시아 공채(公債)를 인수함으로써, 두 나라의 관계는 밀접해져 같은 해 정치협정을 체결한 뒤 이듬해인 1892년에 군사협정을 체결했다. 이로써 러시아·프랑스 동맹은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3국동맹에 대항하여 유럽의 2대 진영으로 새로운 세력관계를 형성하다가 영국의 가담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요인이 되었다.

빌헬름 2세(윌리엄 2세)[편집]

-世 Friedrich Wilhelm(1859

1941, 재위 1888 1918) 즉위 후 얼마 안 되어,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정책과 대외정책에 관한 의견 충돌로 재상 비스마르크를 파면시키고(1890) 독재적 경향을 강화하여 ‘신항로(新航路)’라고 불리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군비, 특히 해군 확장에 힘쓰며, 강력한 세계정책을 전개하여 발칸·중근동(中近東)으로의 진출을 기도한 것이 영국과의 대립을 격화시켜,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었다. 1918년 패전과 혁명으로 인해 퇴위하였다.

3B 정책[편집]

-政策 3B Policy

1890년대부터 적극화된 독일의 제국주의적 근동정책(近東政策)을 상징하는 말이다. 3B란 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의 머리글자를 지칭하며, 독일에서 발칸, 소(小)아시아를 지나 페르시아만(灣)에 이르는 지역에 정치적·경제적 세력을 확립하려는 정책이다. 바그다드 철도의 건설은 이 정책의 근간을 이루었다. 영국의 3C정책, 러시아의 남진정책과 대립하여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

바그다드 철도[편집]

-鐵道

독일 자본을 핵심으로 바그다드 철도 회사에 1899년 오스만제국 정부가 부설특허권(敷設特許權)을 부여하여(정식으로는 1903년) 건설된 아시아·투르크의 철도. 소위 3B정책의 기축(基軸)을 이루며, 독일 제국주의 정책의 중요한 일환(一環)을 이룬다. 엄밀히는 코니아부터 바그다드를 지나 페르시아만(灣)에 이르는 노선을 가리키나, 보통은 1888년 이후 건설된 아나톨리아 철도도 포함해서 부른다. 철도 부설에 있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열강(列强)의 근동정책(近東政策)과 대립하여, 1914년 영국과 타협함으로써 페르시아만에의 부설권을 포기하였지만, 제1차 세계대전 때문에 완성하지 못했다. 전쟁 후에 투르크 영내(領內)의 노선은 터키공화국 소유가 되고, 시리아 영내(領內)의 부분은 프랑스가 관리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