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대 유럽과 아시아/남북전쟁과 제국주의의 발전/청조의 개혁과 중국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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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의 개혁과 중국 분할〔槪說〕[편집]

태평천국의 대(大)농민전쟁을 진압한 후, 청조의 지배계급 내부에는 서유럽 무기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서유럽 근대 기술을 도입하려 하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일어났다. 양무운동은 군수 공업에서 방적·조선 등 민수산업(民需産業)까지 미쳤다. 이 사이에 개항(開港)의 자극으로 생사(生絲)·차(茶)의 수출이 늘어나고 민족자본가도 출현한다. 그러나 양무파 정권은 식산흥업정책(殖産興業政策)을 소홀히 했을 뿐 아니라 이금세(厘金稅:국내상품 유통과세)의 창설과 민간인의 기계사용, 양무파 기업과 경합하는 기업에 대한 제한 등으로 민족 산업의 발달이 위축, 왜곡되었다. 불평등 조약 아래 값싼 외국 상품은 도도히 중국에 유입되어 왔다(면사 수입량은 1870년부터 1892년까지 20배로 팽창). 1894

1895년의 청일전쟁은 양무운동의 ‘성과’가 어떤 것이었던가를 드러냈다. 중국은 열강이 자본을 투하하는 장소로서 제국주의적 세계분할의 대상이 되고 공장 경영·철도 부설·광산 채굴·차관 공여 등 권익이 제국주의 국가에게로 돌아갔다. 열강은 다시 조차지(租借地) 획득, 세력 범위의 획정 등 영토적 야심을 강화, 중국은 분할 위기에 직면했다. 1898년 지배계급 내의 자각 분자는 부르주아적 개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戊戌 변법). 민중의 반제(反帝) 투쟁은 1899

1900년에 의화단(義和團)에 결집되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절정을 보였으나 ‘아시아의 헌병’이 된 일본 등 8개국의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민중들은 과감한 항쟁으로 분할은 피할 수 있었으나 반식민지화(半植民地化)는 결정적인 것이었다.

양무운동[편집]

洋務運動

19세기 중기 이후 청조에 의한 일정한 ‘근대화’ 운동. 아편전쟁·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서구의 무기 우수성을 인식한 한인(漢人) 대관료(大官僚):(曾國藩·李鴻章 등)에 의해 착수되어, 1860년대부터 각지에 관영 군수 공업·외국어 학교 등이 건설되고 후에는 탄광·조선·방적·직포(織布) 등의 분야에서도 근대적 공장이 설치되었다. 서구의 근대 기술 도입으로 동요한 청조(淸朝)의 지배 체제 유지를 목표로 했던 것으로서 정치 체제의 근본적인 변혁은 하지 않았으며, 중국의 반식민지화는 더욱더 진행되어 갔다. 연호를 따서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고 한다.

청일전쟁[편집]

淸日戰爭

조선 시장의 지배를 둘러싼 청나라와 일본 간의 전쟁(1894

95). 일본의 승리로 끝나서 일본의 조선 지배 및 중국의 반식민지화가 확고하게 되고, 극동에 있어서의 열강의 제국주의적 세계 분할의 기초가 되었다.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킨 일본은 이후 경제적·정치적 진출을 강화해 갔다. 그러나 1884년 친일적인 독립당(開化黨)의 개혁이 실패(甲申政變)하고부터 일본 세력은 후퇴, 양무파 정권하의 청조 세력 증대가 현저하게 되어, 1886년 83대 17이었던 청일 양국의 무역 비중은, 1892년에는 55대 45로 접근하고 있었다. 청조는 동학혁명의 진압을 위해 조선의 요청을 받아 출병했는데 벌써부터 조선의 지배를 기도하고 있던 일본은 톈진 조약을 구실로 일방적인 출병을 하여 철군(撤軍)과 내정개혁(內政改革)을 둘러싸고 청과 충돌하여 7월 하순에 청군을 공격, 8월 1일 전쟁을 시작했다. 일본은 양무파(洋務派)가 자랑하는 육·해군을 평양과 황해에서 격파하고 전쟁은 8개월로 종료,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이 맺어졌다.

시모노세키 조약[편집]

下關條約청일전쟁의 강화조약이다(18 95. 4). 일본 전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청국의 전권 이홍장에 의하여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조인. 청국은 (1) 조선을 안전한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2) 일본에게 랴오둥 반도·타이완·펑후도를 할양, (3) 일본에 2억 냥(兩)의 배상금을 지불하며, (4) 창사(長沙) 등 네 항구를 개항, (5) 일본인에게 개항장에서의 기업을 인정했다. (2)는 3국 간섭으로 수정(랴오둥 반도를 반환)되었으나, (4) 특히 (5) 조항은 최혜국 조관(最惠國條款)으로 구미 열강에도 적용되어, 열강은 자본 수출지(輸出地)로서의 중국 내지에서의 공업권을 획득했으며, 이에 대하여 일본 자본주의의 시장이 되어 ‘잠자는 사자’ 중국은 열강에 의한 분할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동치제[편집]

同治帝 (1856∼1875, 재위 1861∼1875)

청(淸)의 제10대 황제. 시호는 의황제(毅皇帝), 이름은 재순(載淳), 묘호는 목종(穆宗)이다. 아버지는 함풍제, 어머니는 서태후(西太后)이다. 함풍제의 사후 서태후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어린 동치제를 옹립하였다. 재위기간 처음에는 서태후·동태후 두 여인이 실권을 장악하다 이후에 서태후에 의해 집정되었다. 1873년에 친정(親政)을 시작했으나, 실제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고 병사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태평천국의 난과 이슬람교도의 반란 등이 평정되고 서양의 과학문명을 수용 자강의 촉진을 도모하는 등의 내치·외교상의 안정이 회복되어 동치중흥(同治中興)이 이루어졌다.

광서제[편집]

光緖帝 (1871

1908, 재위 1875

1908)

청조 제11대 황제인 덕종(德宗). 휘(諱)는 재첨(載?), 광서는 연호(年號). 선종도광제(宣宗道光帝)의 손자이며, 순친왕(醇親王)의 아들이다. 1874년 4세에 즉위하여 백모(伯母)인 서태후(西太后)가 섭정하였다. 뒤에 친정을 하면서도 실권이 없었으며, 서태후와의 불화는 더욱 심해졌다. 그의 치세(治世)는 청대(淸代)의 가장 다난한 시기로, 1878년의 일리(伊犁) 사건, 1784∼1785의 청(淸)·프 전쟁, 1894∼1895년의 청·일 전쟁 등 대외적인 위기가 계속되었다. 청·일 전쟁 후 제국주의의 침략이 격화되자, 1898년 캉유웨이(康有爲) 등을 등용하여 변법운동(變法運動)에 의해 혁신정치(革新政治)를 단행하였으나,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의 반대로 무술정변(戊戌政變)이 일어나, 불과 100일 만에 실패하여 유폐되었다.

캉유웨이[편집]

康有爲 (1888

1927)

청말 개량파의 지도자. 광둥성 난하이현 명문 출신으로, 호는 남해(南海). 공양학(公羊學)의 대가. 그는 고문(古文)을 배척하고 금문(今文)을 존중하여 신학위경(新學僞經)·공자개제(孔子改制)를 주장하였다. 또 경서(經書)에 불전(佛典)·서학(西學)의 교양을 가미하여 대동설(大同設)을 주장하고, 인류평등의 대동사회가 도래(到來)할 것을 믿었다. 일찍부터 변법(變法)의 생각을 가지고 있어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에 강학회(强學會)를 조직하고, 베이징(北京)에 보국회(保國會)를 조직하였으나 금지되었다. 광서제(光緖帝)에게 인정받아 1898년 혁신정치를 단행하여, 무술변법(戊戌變法)이 일어났지만 변법이 실패하여 국외로 망명하였다. 그후 다시 보황회(保皇會)를 설립하여 광서제를 복위시키려 했고, 신해 혁명 이후에도 청조(淸朝) 회복운동과 존공운동(尊孔運動)을 일으켰다.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대동서(大同書)』 등의 저서가 있다.

량치차오[편집]

梁啓超 (1873

1929)

청 말기, 민국 초기의 계몽사상가·정치가. 호는 임공(任公), 음영실주인(飮泳室主人)이라 부른다. 광둥성 신후이현(廣東省新會縣) 출신으로 캉유웨이에 사사하고 변법운동(變法運動)에 종사, 무술정변 후에는 일본에 망명하였다. 『청의보(淸議報)』 『신민총보(新民叢報)』 등으로 입헌 개혁을 주장, 보황회(保皇會)의 중심 인물이 된다. 청조 타도를 노리는 혁명파와 대립했으나 시류(時流)를 내다보는 데에 민감하고 타협적이기 때문에 민국이 성립된 후에도 정계·언론계에서 활약, 위안스카이(遠世凱)의 제정(帝政)에 반대하여 제3혁명을 일으켰다.

담사동[편집]

譚嗣同 (1865∼1898)

청나라 말기의 변법사상가. 자는 부생(復生), 호는 장비(壯飛)이다. 후난성(湖南省)에서 출생하였고, 부친은 진보적 사상을 가진 관리였다. 어릴적부터 호방하고 무술을 좋아했으며, 사문에 뛰어났다. 1884년 이래로 과거에 응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의 패배에 분개하였고, 변법을 행하는 것 외에 중국이 회생할 길은 없다고 여겨 다음 해 캉유웨이(康有爲) 등과 함께 베이징(北京)에서 변법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량치차오(梁啓超) 등과 난징(南京)에 재직하며 양문회(楊文會)에 나가 불교를 공부하였는데, 이 때 그의 명저 『인학(仁學)』이 완성되었다.

청일전쟁 후에는 신학에 공명하여 당재상(唐才常) 등과 남학사(南學社)를 열고 『상보(湘報)』를 발행하는 등 변법유신(變法維新)을 위해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캉유웨이 등과 함께 신정(新政)을 추진시켰으나 변법의 실패로 무술정변 때 처형당하였다.

서태후[편집]

西太后 (1835

1908)

청말 궁정의 최고 실력자. 만주 치인(旗人) 출신으로서 청조 제9대 문종(文宗) 함풍제(咸豊帝)의 측실(側室), 동치제(同治帝)의 생모로 자희태후(玆禧太后)라고 칭함. 동치제가 6세 때 즉위하자 황태후(皇太后)와 함께 섭정하였고, 동치제가 죽은 후 여동생의 셋째 아들을 세워 광서제(光緖帝)라 하고 1887년까지 섭정으로서 권력을 떨쳐 청조 보수 완고파의 중심이 된다. 광서제 친정 후는 제당(帝黨)과 대립했으나 1898년 무술변법을 탄압, 광서제를 유폐(幽閉)하고 재차 최고 권력을 장악, 의화단의 반제(反帝) 투쟁도 자기 보존에 이용했다. 이후는 외국에 아첨하는 매판성(買辦性)을 노골화하여 중국의 반(半)식민지화를 촉진했다.

무술변법[편집]

戊戌變法

1898년(光緖 24년 戊戌)에 시도되어 실패한 청조의 입헌군주제 개혁이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양무파(洋務派)의 본질이 노출되고 열강의 중국 분할 위기가 진행되자,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담사동(譚嗣同) 등 하급 관료 지식인은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변법운동을 일으켰다.

캉유웨이(康有爲)가 이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는데 때마침 청 조정에서는 서태후(西太后)와 광서제(光緖帝) 사이에 대립상태가 야기되었고, 조정의 신하들도 양파로 분열되어 상쟁하다가 마침내 보수(保守)·혁신(革新)의 싸움으로 번져나갔다. 연소기예(年少氣銳)한 광서제(光緖帝)는 1898년 6월, 혁신파의 영수 캉유웨이와 량치차오 등을 등용하여 일거에 혁신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관청의 정리(整理), 과거(科擧)제도와 학교제도의 개혁, 실업의 진흥, 신문 관보(官報)의 발행, 번역기관의 설치 등 입헌정치의 시행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는 이와 같은 혁신 정치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그 해 9월 쿠데타를 일으켜 신정부는 불과 100일만에 붕괴되고 말았다. 이 사태가 무술년(戊戌年)에 일어났으므로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 일컫는다. 이 결과 광서제는 유폐되고 주동인물이던 캉유웨이, 량치차오는 해외로 망명하였다. 보수파 세력이 다시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모든 신정책은 빠짐없이 보수정치시대로 되돌아가 중국의 근대화는 한층 더디게 되었다.

존 헤이의 문호개방 선언[편집]

-門戶開放宣言

1899년 미국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가 제창한 외교 정책으로서 미국의 중국 분할 참가를 꾀한 것. 극동 진출에 뒤늦은 미국은 1899년 필리핀을 획득하자 유럽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의 진행을 저지하고, 자국의 중국 시장 진출을 기도했다. 같은 해, 헤이는 청국의 영토복원, 문호개방, 기회균등을 원칙으로 하는 통첩을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에 보냈다.

열강의 이권과 중국 분할[편집]

列强-利權-中國分割

‘잠자는 사자’ 청조가 신흥의 한 작은 나라 일본에 패하여 그 실태가 폭로되자 제국주의 단계에 돌입하고 있던 구미 열강은 다투어 중국 분할에 광분하게 되어, 제품 시장으로서뿐만 아니라 자본을 투하하는 곳으로서의 식민지 획득 경쟁을 격화시켰다. 구미 제국(歐美諸國)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이 내지에 기업권을 획득하자, 최혜국조관에 의하여 이를 향수(享受)하고, 각 개항장에서 공장을 경영하는 외에, 더욱이 철도 부설권·광산 채굴권·조차지를 획득하고 차관을 공여함으로써 청조의 생사 운명을 좌우하게 되었는데, 다시 그 세력 범위를 설정하여 경제 진출을 강화하였다. 3국 간섭의 선두에 선 러시아는 그 보수로서 동청 철도부설권(東淸鐵道敷設權)을 획득, 독일의 자오저우만(州灣) 조차에 편승하여 랴오둥 반도 남부를 조차하고, 프랑스는 광저우만(廣州灣), 영국은 웨이하이웨이(威海衛)·주룽반도(九龍半島)를 조차했다(1898). 이어 러시아가 만몽(滿蒙), 독일이 산둥(山東), 영국이 양쯔강 유역, 프랑스가 광둥-윈난 지구를 세력 범위로 했으나 뒤늦게 진출한 미국은 문호 개방 정책으로 중국 분할에 가담하는 정책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구교사건[편집]

仇敎事件

청말의 그리스도교 배격운동이다. 망하조약(望廈條約)·베이징 조약(北京條約)으로 그리스도교의 포교 자유(布敎自由)가 인정되었다. 이후 구미 제국에서 수많은 선교사가 들어와서 전도했으나 ‘신부(神父)는 선두에 서고, 포함(砲艦)은 그 뒤를 따른다’라고 할 만큼 객관적으로는 침략의 첨병 역할을 수행했다. 중국 민중은 이에 저항하고 교회 등을 파괴했는데, 1868년의 톈진(天津), 1895년의 창장(長江) 유역 사건이 대규모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화단 운동은 최대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의화단사건[편집]

義和團事件

1900년 화베이에서 일어난 반(反)제국주의의 대투쟁과, 열강에 의한 진압 전쟁. 의화단이란 의화권법(義和拳法)을 신봉하였던 백련교(白蓮敎)계의 일종의 종교결사(宗敎結社). 19세기 말에 접어들어 열강의 제국주의적 진출이 격화됨에 따라 각지에서는 구교(仇敎) 폭동이 빈발했는데, 1899년 산둥성에서 일자리를 잃은 운하 노동자·몰락 수공업자·농민 등이 의화단에 결집, 그리스도교 박멸을 슬로건으로 봉기했다. 화베이 일대에 파급. 모든 서양적인 것을 파괴, 베이징에서는 독일 공사를 살해했다. ‘청조(淸朝)를 돕고 외인(外人)을 멸한다’를 슬로건으로 하였으나, 서태후는 이를 이용하여 1899년 6월 열강에 선전포고, 일본·영국·미국·독일·프랑스·러시아·오스트리아·이탈리아 8개국은 공동 출병하여 의화단을 진압, 1901년 의화단 의정서가 조인되었다. 미신의 요소가 강하고 청조에 이용되는 등의 약점을 가지면서도 적수공권(赤手空拳)의 민중이 공전의 규모로 봉기하여 저항함으로써 열강의 중국분할을 저지한 반제투쟁(反帝鬪爭)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베이징 의정서[편집]

北京議定書

1901년 청조와 열강 사이에 조인된 의화단 사건의 해결책(의화단 의정서). 청조는 주모자 처형, 배상금 4

5억 냥(兩)을 지불하고(關稅·鹽稅를 담보), 공사관 구역 및 베이징-산둥관(山東關)의 요지에 외국 군대의 주둔, 민중의 배외단체(排外團體) 가입 엄금 등을 인정했다. 청조는 군사·재정의 중추가 열강에 지배되어 대외 종속성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