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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동유럽 후퇴 개시〔槪說〕[편집]

술레이만 1세가 죽은 후 오스만 제국은 범용(凡庸)한 군주들이 잇고, 1571년에는 레판토 해전에서 에스파냐·교황·베네치아의 연합 함대에 대패했으나 유능한 재상이 술탄을 도와서 제국의 위세(威勢)는 그 뒤 얼마 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국 쇠퇴의 징조는 이미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궁정에 있어서 하렘의 권력이 증대하여 정치를 문란케 했으며, 과중한 세금은 사람들을 괴롭혔고, 제국 각지에는 반란이 빈발했다. 또한 유럽 여러 나라의 압력은 강해지고 배후에서 이란의 사파비 왕조가 오스만 제국을 위협했다.

16세기 후반에는 또다시 강력한 재상이 잇따라 나와서 국정의 개혁을 단행하고, 동유럽에 대하여 공세로 전환했으나 이러한 대외 적극책은 성공을 하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메메트(마호메트) 4세(재위 1648

1687) 때의 재상 카라 므스타파의 무모한 대외 원정은 오히려 동유럽에서의 투르크 세력 후퇴의 원인이 되었다. 그는 1677년 대군(大軍)을 이끌고 우크라이나에 침입했으나 러시아군과 싸워 패하고 1681년에 화해했다.

이어 헝가리에서 일어난 오스트리아에 대한 반란을 이용하여 1683년 제2차 빈을 포위했다. 그러나 이것도 폴란드 왕과 독일 제후의 원군(援軍)에게 패하고 그는 책임을 추궁받아 베오그라드에서 처형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측의 반격이 강해지고 1686년에는 부다페스트가 적의 수중에 넘어가자 헝가리는 마침내 투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697년 젠타의 패전 후, 1699년 투르크는 카를로비츠에서 조약을 맺어 유럽 여러 나라에 대하여 오로지 수세(守勢)에 서게 되었다.

카를로비츠 조약[편집]

-條約 Treaty of Karlowitz

베오그라드 북서의 카를로비츠(Karlowitz)에서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폴란드·러시아·베네치아 사이에 맺어진 조약(1699). 젠타의 패전 후 투르크는 영국·네덜란드에 조정(調停)을 의뢰하여 강화(講和)를 교섭했다.

1683년 투르크는 프랑스와 결탁하고 제2회 빈 포위를 하였으나, 오스트리아는 투르크를 격퇴하고 다시 진격하여 헝가리의 지배권을 빼앗아, 농업 식민을 통하여 독일화를 진척시키고, 이어 1691년과 1692년 두 차례에 걸쳐 투르크군을 격퇴하였다. 투르크는 영국, 네덜란드의 조정으로 화약을 맺고, 오스트리아에게 헝가리와 트랜실베니아를, 러시아에게 아조프 지방을, 베네치아에게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달마티아 지방의 일부를 각각 할양하고, 폴란드에 대해서는 1678년에 탈취한 포돌리아 지방을 반환하였다.

이 조약으로 오스트리아의 헝가리 지배가 확립됨과 동시에 투르크는 이 조약 이후 종래의 유럽제국에 대한 공격적 입장에서 수세적 지위로 전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