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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족의 세력 회복과 러시아의 진출〔槪說〕[편집]

15,16세기의 북아시아에서는 명나라 초기의 원정에 의해서 괴멸되었던 몽골족이 세력을 회복했다.

먼저 서북 몽골을 본거로 하는 오이라트부(部)의 에센이 몽골 고원을 통일하고 중국에도 침입하여 명의 황제 영종(英宗)를 사로잡는 대승을 거두었다(土木의 變). 그 후 오이라트가 내분에 의해서 쇠퇴하자 이를 대신해서 동부 몽골을 근거로 하였던 타타르부가 세력을 증가시키고, 16세기 후반에는 알탄칸(汗)이 정패(征覇)하여 중국에도 침입을 반복했다. 한편 이 무렵부터 러시아인이 동방에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여 오브강(江) 유역에 있던 몽골계의 시비르 한국을 멸망시키고 이후 태평양 연안을 향해서 급속히 동진(東進)을 계속했다.

북원[편집]

北元

명나라 태조(太祖)에 의해서 중국으로부터 구축(驅逐)되어 몽골 고원에 여명을 유지했던 시기의 원조(元朝)를 말한다. 1368년 명군의 공격을 받은 원의 순제(順帝)는 대도(大都)를 버리고 상도(上都)로 피하였으며, 1370년 응창(應昌)에서 죽었다. 그 아들 소종(昭宗)은 외몽골로 들어갔고 1372년에 명의 원정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쿠쿠 티무르가 죽고 나하추가 명에 항복하자 북원의 세력은 더욱 쇠퇴하고, 1388년 브이르 노르의 동북에서 명군에게 대패하였으며, 소종의 뒤를 이은 동생 토쿠스 티무르도 도우라강 기슭에서 살해되었다. 이렇게 북원은 멸망했다.

오이라트부(와자부)[편집]

-部(瓦刺部)

몽골의 부족명. 북원이 쇠퇴한 다음, 세력을 확대하고 북원계의 타타르부와 몽골의 패권을 다투었다. 명의 영락제(永樂帝)는 타타르의 세력을 누르기 위하여 오이라트(Oirat)의 부장 마흐무드를 순녕왕(順寧王)에 봉하고 원조를 하였는데 후에 세력이 강대해지자 원정하여 이를 격파했다. 그 후 마흐무드의 손자 에센은 동서 몽골을 통일하여 오이라트의 전성기를 맞았으나 1454년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오이라트는 세력이 부진하여 16세기 후반에는 타타르의 알탄에 복속(服屬)되었다. 17세기에 활동한 준가르는 오이라트의 후계자이다.

에센칸[편집]

-汗 (?

1454)

15세기의 오이라트부 부장. 부친 토곤의 뜻을 이어 서북 몽골에 근거하여 세력 확대를 꾀했다. 몽골 내부에 대해서는 동남에 근거하고 있던 타타르부의 토크타 부하를 가한(可汗)에 추대하고, 스스로는 태사(太師)가 되어 실권을 장악하였다. 또 주변의 각부에 대해서는 1443년의 하미(Hami) 정벌을 비롯하여 사주(沙州)·적근(赤斤)의 부를 항복시키고, 1446∼1447년에는 싱안링(興安嶺) 동쪽의 우량하(兀良哈)를 유린한 후 만주의 여진을 복속시켰으며, 또한 헤이룽강(黑龍) 하류의 길야크족을 정벌하고 조선에까지 침입하였다. 그동안 명(明)에 대해서는 조공무역(朝貢貿易), 아라비아 상인과는 대상무역(隊商貿易)을 하였고, 또한 무기와 식량 보급을 위한 밀무역(密貿易)도 권장하였으나, 명(明)조가 이를 거절하자 1449년 대거 침입하여 토목보(土木堡)에서 대승하고 영종(英宗)을 포로로 하였다.

그 결과 경제적·정치적으로 우위를 차지하여 1451년에는 가한(可汗)인 토크타 부하를 공멸(攻滅)한 후, 대원가한(大元可汗)을 자칭하고 오이라트부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1454년 부하인 아라지원(阿刺知院)에게 살해되어 그 지배는 단기간으로 끝났다.

타타르부(달탄부)[편집]

-部

타타르(Tatar)부는 몽골의 한 부족명으로 북원(北元) 계통에 속한다. 오이라트부가 발흥(勃興)하자 서로 항쟁하였고, 에센의 공격을 받아 일시 멸망 직전에 놓였으나 에센 사후 차차 세력을 회복했다.

16세기 초에는 다얀칸(汗)이 나타나서 몽골을 통일했다. 내몽골에서는 이때 정해진 여러 부족의 배치가 거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16세기 중엽에는 알탄칸이 위세를 떨쳐 거의 매년 중국에 침입한 외에 칭하이(靑海)와 티베트에도 원정하여 몽골인 라마교화의 실마리를 텄다.

알탄칸[편집]

-汗 (1507

1581)

타타르부의 부장 다얀칸의 손자. 투메트에 분봉(分封)되어 세력이 강했다. 1530년대부터 거의 매년 중국에 침입하였고, 1550년에는 일시 북경을 포위했었다.

또한 이 무렵부터 차차 정착 생활의 경향을 짙게 했다고 한다. 1570년 손자인 바간나기가 명(明)에 투항한 것을 계기로 명과 화해하여 순의왕(順義王)에 봉해져서 거성(居城)을 귀화성(歸化城)이라 부르고 마시장(馬市場)에 의해 명과 교역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편집]

-征服

러시아인에게는 13, 14세기부터 모피(毛皮)를 찾아 우랄을 넘는 자들이 있었으나 본격적인 시베리아(Siberia) 진출은 16세기 후반에 시작된다. 스트로가노프가(家)가 가마강 유역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고용한 카자흐의 대장 예르마크는 1581년 우랄을 넘어 동정(東征)하여 이루티시강 중류에 있던 몽골계의 시비르 한국(汗國)과 싸워 이듬해 수도 시비르를 점령했다.

1584년 예르마크가 죽은 다음, 시비르 한의 쿠춤은 수도를 탈환했으나 러시아인은 토블스크 등에 군사 식민지를 구축하였고, 드디어 1598년 오브강의 싸움에서 쿠춤을 격파하여 시비르 한국을 멸망시켰다. 이 시비르라는 이름이 시베리아라는 지명의 기원(起原)이다(→시베리아 동진).

예르마크[편집]

Timofeevich Yermak (?

1584)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의 기초를 닦은 탐험가. 처음 돈 카자흐의 대장으로서 볼가강 유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정부군에 쫓겨 가마강 유역으로 도망쳤다.

이 곳의 영주 스트로가노프가 1581년에 동방 원정대를 조직하자 그는 대장으로 기용되어 우랄을 넘어 시비르 한국을 치고 수도를 점령했다. 이 공으로 이전의 죄를 용서받고, 이반 뇌제(雷帝)에 의하여 시비르공(公)에 봉해졌다. 후에 시비르 한 쿠춤의 습격을 받아 이루티시강에서 익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