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근세 유럽과 아시아/중국과 일본의 변천/명의 성립과 중국 사회의 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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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성립과 중국 사회의 변동〔槪說〕[편집]

약 1세기에 걸친 이민족(異民族) 왕조. 원(元)의 지배하에서 정치 사회적으로 가혹한 민족 차별을 받아 왔던 한(漢)민족은 14세기 중엽, 원 왕조의 내부 분열에 의한 지배력의 약화에 편승하여 민족적 반항을 개시했다. 그 반항의 중심이 된 것은 홍건군(紅巾軍)이라 자처하는 백련교도(白蓮敎徒)였는데, 이 홍건군에 참가한 빈농 출신의 주원장(朱元璋)이 마침내 두각을 나타내어 양쯔강 하류 지역의 경제력을 수중에 넣고 군웅(群雄)을 굴복시켜 명나라를 건국하고 제위(帝位)에 올라(洪武帝), 원을 북방으로 쫓아 중국을 통일했다. 그는 수도를 남경(南京)으로 정하고 정치 기구의 개혁과 농촌 대책을 강력히 추진하여 황제 독재제(獨裁制)를 주축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를 확립했다.

홍무제가 내정에 중점을 둔 데 반해서 적손(嫡孫)인 건문제(建文帝)를 물리치고 즉위한 영락제(永樂帝)는 수도를 북경(北京)으로 옮기고 또한 몽골 원정을 반복하고 남해 원정을 하는 등 대외 적극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그 후의 황제에는 범용(凡庸)한 자와 연소자가 많아서 관료의 당쟁(黨爭)이나 환관(宦官)의 전횡이 격심해졌다. 15세기에는 북방에서 서(西)몽골의 오이라트가 침입하여 명 왕조에 타격을 가하고 안으로는 농민폭동(鄧茂七의 亂)이 일어나서 사회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다. 16세기가 되자 소위 북로(北虜), 남왜(南倭)의 침공이 심해져서 명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기초가 흔들렸다. 이 때 장거정(張居正)이 나와 정치 개혁을 실시하여 재정을 바로잡았으나 그의 사후 다시 정치는 흔들려서 동림(東林)과 비동림의 당쟁이 격화되고 환관이 세력을 제멋대로 휘둘렀다. 정국 불안과 만주족(滿洲族)의 압박 속에서 명은 멸망에의 길을 달린 것이다.

한편 명대에는 사회적·경제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명나라초는 자급자족의 현물경제가 중심이었으나 영락제가 북경에 천도(遷都)한 데 기인한 경제적 중심(강남 지방)과 정치적 중심의 분리는 상인의 활동을 환기시켜서 차차 화폐(銀)의 유통을 활발하게 했다. 이리하여 명나라 중엽이 되자 농민 사이에 면화와 뽕나무를 중심으로 하여 상품 작물의 재배가 보급되어 양쯔강 하류 삼각주(三角洲) 지대에는 양잠업이나 면직물업·견직물업 등의 수공업이 발달했다. 이 밖에 푸젠(福建)의 쪽(藍) 재배나 제당(製糖)·제지(製紙)업, 징더진(景德鎭)의 도자기업, 광둥(廣東)의 제철(製鐵)업 등 각종 수공업이 발달하였고, 명조말에는 감자·옥수수·낙화생·담배 등의 재배도 시작되었다. 상품 생산이 왕성해지자 대(大)상인의 전국적 거래도 활발해져서 시장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농민은 더욱 화폐경제에 휘말려 농민의 가내 부업으로서의 수공업은 상인의 지배를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농촌 수공업의 전개는 그 때까지 고립 분산된 농촌 사회에 갇혀 있던 다수 하층 농민을 직접 간접으로 국내 시장에 결부시켜 자기들의 사회적 입장에 대한 자각을 눈뜨게 했다. 여기에서 새로운 농민운동이나 직공(職工)운동이 전개되었다.

백련교[편집]

白蓮敎

중국에서 미륵불 강생(降生)을 중심으로 한 불교적 민간신앙. 이와 같은 신앙은 당(唐) 이전에도 나타났지만, 남송(南宋)에 이르러 백련종(白蓮宗)이 일어나 그 말류(末流)는 주술적(呪術的) 경향이 현저해지자, 송(宋)말, 원(元)대에 걸쳐 자주 관헌의 탄압을 받았다. 미륵불신앙(彌勒佛信仰)은 당시 생활난에 허덕이던 민중에게 쉽게 수용되었고, 종교적 비밀결사까지 형성하여 관헌에 반항하였다.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반란은 원(元)·명(明) 말기에 빈번히 일어났으나 대규모적인 것은 청(淸)의 가경조대(嘉慶朝代)에 일어난 반란이다. 1796년 후베이성(湖北省) 서북부에 발생했던 이 반란은 갑자기 확대되어 후베이(湖北)·허난(河南)·산시(陜西)·쓰촨(四川)·간쑤(甘肅)의 각 성(省)에 파급, 전후 9년간 계속되었다. 이 반란에서는 전체적인 조직이나 통일된 슬로건 등은 없었고, 다만 게릴라전을 전개했을 뿐이었다. 청(淸)군은 부패하여 쓸모가 거의 없었음에 반하여, 지방 지주층이 조직했던 의용군인 향용(鄕勇)은 반란진압에 공이 컸다. 이와 같은 사태는 청(淸)의 쇠퇴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홍건의 난[편집]

紅巾-亂 원(元) 말기 이민족 왕조인 원의 중국 지배를 타도하고, 한(漢)민족 왕조인 명(明)나라 성립의 계기를 마련한 종교적 농민 반란. 백련(白蓮)·미륵(彌勒) 교도로 형성되었고, 홍건(紅巾)으로 머리를 싸서 동지의 표지(標識)로 삼았으므로 홍건적(賊)이라고도 한다.

허베이성(河北省)에 본거지를 둔 백련교 회수(會首) 한산동(韓山童)은 일찍부터 미륵불하생(彌勒佛下生)설로 포교하여 허베이·허난·안후이(安徽)의 각지에서 널리 신자를 얻고 있었는데, 1351년 황하(黃河) 수리를 위한 역부(役夫) 징발이 야기시킨 민심의 동요에 편승, 송(宋)나라 휘종(徽宗)의 8대손이라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홍건군은 최초의 탄압에서 교수(敎首) 한산동을 잃었으나 교도 유복통(劉福通) 등은 그의 아들 한림아(韓林兒)를 받들고 안후이성으로 피신, 송나라를 세우고 사방에 격문을 보냈다. 이를 계기로 후베이(湖北)의 서수휘(徐壽輝), 안후이의 곽자흥(郭子興)·주원장이나 허난의 농민들이 차례로 반란을 일으켰다. 홍건군의 세력은 일시 화북·화중 일대에 미쳤는데, 내부 분열에 의해서 원군(元軍)에게 격파되어 본거지도 궤멸당했다. 그러한 가운데 주원장(朱元璋)만은 착실하게 세력을 뻗쳐서 천하를 평정했다.

홍무제[편집]

洪武帝 (1328

1398, 재위 1368

1398)

명의 초대 황제. 성은 주(朱)씨, 이름은 원장(元璋). 태조(太祖)라고도 한다. 호저우(豪州:安徽省鳳陽縣)의 빈농 출신으로 일찍 고아가 되어 탁발승(托鉢僧)으로 생활했다. 25세 때 홍건군의 부장 곽자흥의 부하가 되었고, 인정을 받아 일군(一軍)의 장이 되어 원의 강남 거점 남경(南京)을 점령, 오왕(吳王)이라 자칭하고 다시 각지의 군웅을 굴복시켜 1368년 명을 건립, 홍무(洪武)라 건원(建元)했다. 동시에 북벌군(北伐軍)을 일으켜 중국 통일을 완성했다. 그는 한민족 왕조를 회복하여 한(漢)·당(唐)의 치세로 돌아갈 것을 목표로 내걸었는데 단순한 복고(復古)가 아니라 황제 독재 체제의 확립을 목표로 했다.

그는 국내의 모든 면에서 몽골색(蒙古色)을 일소하기 위해 지난 1백여년 동안 중국인 사이에 침투한 몽골식 변발(?髮), 바지, 통소매 같은 의복, 그리고 몽골어(蒙古語)나 몽골식 성씨(姓氏) 등 원조(元朝) 이래로 파급된 몽골의 풍속·습관·언어 등 모든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몽골색의 일소를 공식적으로 실행하지는 않고, 원조의 지배 체제 중에서도 필요한 것은 계승했다.

이 점은 명왕조(明王朝)가 제도와 문물을 한·당의 전성기의 것으로 되돌리고, 또한 한·당에 필적하는 강대한 제국을 만들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태도와 결부되어 있었다. 중앙에서는 1380년 중서성(中書省)을 폐지하여 6부(六部:행정)를 두고, 도찰원(都察院:검찰), 5군도독부(五軍都督部:군사)를 설치하여 각각 황제에 직속시켰다. 지방에서도 포정사사(布政使司:행정)·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검찰)의 3권을 분립시켜 각각 중앙에 집결시켰고, 황제는 이 통치기구 위에 서서 절대 권력을 쥐었다. 그리고 관료의 감찰기관(監察機關)인 어사대(御史臺)도 폐지되고, 대신 도찰원(都察院)이 설치되어 관료에 대한 감독이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그 황자(皇子) 24명을 전국 요지에 영주로 봉하여 제실(帝室)의 안녕을 도모했다.

원말(元末) 이래로 다년간의 전란으로 인해 농촌의 피폐는 극한에 달하고 있었다. 농민의 고난이 어떤 정도인지는 태조 자신이 뼈저리게 체험한 바 있어, 그는 농촌의 부흥과 농민생활의 안정을 가장 긴급한 과제로 삼았다. 우선 각지에서 수리관개(水利灌漑) 공사를 시작하는 동시에 강남지방을 비롯하여 기타 지방의 땅 없는 농민을 전란으로 황폐된 화북(華北), 강북(江北) 각지로 집단 이주시키고, 경우(耕牛)와 종자(種子)를 주면서 거친 땅을 개간하게 했다. 또 변경지대의 둔전(屯田)도 강력하게 실시하여, 약 20년 동안에 국초(國初)의 5배에 가까운 농지(農地)를 회복, 개간시켰다.

한편, 조세(租稅)의 감면령(減免令)을 때때로 발포하고, 경지(耕地)의 일부에 뽕, 마(麻), 목화, 대추, 감, 밤 같은 각종 구황식물(救荒植物)의 재배를 지시하여, 농민생활의 안정에 배려를 베풀었다. 이러한 농업생산의 회복책(回復策)을 전제로 하여 전지(田地)의 측량과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어린도책(魚鱗圖冊)이라는 토지대장과 부역황책(賦役黃冊)이라는 호적자산대장(戶籍資産臺帳)이다. 특히 부역황책은 각 호구(戶口)의 토지 소유량, 가족 인수(人數), 부담 세액 등을 기록한 것으로 1381년에 전국적으로 일제히 작성되었다. 그로부터 10년마다 개편하여, 명 일대(明一代)를 통해서 조세(租稅), 역역(力役)을 부과하기 위한 기초자료로 쓰였다. 이 기초작업에 입각해서 농민을 다스리는 말단 기구로 농촌에 편성된 것이 이갑제도(里甲制度)이다.

그러나 황제 독재권의 강화를 목표로 한 그의 제도 개혁은 호유용(胡惟庸)·남옥(藍玉)의 옥사(獄事) 등과 같은 공신의 숙청과 첩자(諜者)를 사용하는 공포정치에 의해 실현된 것으로서, 당대에 10만 명의 사람을 죽였다. 그 결과 황제권은 절대적이었으나 만년에는 고독하게 살다가 병사했다.

호유용·남옥의 옥사[편집]

胡惟庸·藍玉-獄事

호유용은 태조와 동향(同鄕)으로 명조 개국공신의 한 사람이었다. 중서성 승상(丞相)으로 큰 권력을 휘두르게 되자, 초창기의 황제권력에 대해서 위험한 대항세력으로 간주되었다. 1380년 태조는 그가 일본(日本)이나 북원(北元)과 통하여 모반(謀反)을 꾸몄다는 죄로 주살(誅殺)했다. 이 때 일당(一黨)이라 해서 연좌(連坐) 처형된 수가 2만이라고도 하고 3만이라고도 한다. 중서성은 그 사건이 있은 직후에 폐지되었고, 승상의 직위도 없앴다.

이 사건은 10년이 지난 뒤에 다시 문제가 되어 원훈(元勳)인 이선장(李善長)이 추궁을 받게 되었다. 그는 그의 아우가 지난번 호당(胡黨)의 음모에 가담한 사실을 알면서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살(自殺)을 명령받았으며, 그의 일족 70여 명은 모조리 주살되었다. 이 때도 연루자(連累者)가 1만 수천 명에 이르고, 전후해서 많은 공신이 살해되었다.

그리고 1393년에는 북원토벌(北元討伐)에 공이 큰 장군 남옥(藍玉)이 역시 모반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남당(藍黨)으로 몰려 주살된 수가 2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개국공신 거의 모두가 주살을 당했는데, 사건에 관한 확실한 증거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어린도책[편집]

魚鱗圖冊

송대(宋代) 이후, 특히 명대(明代)부터 조세(租稅) 징수의 기초로서 만들어진 토지대장(土地臺帳). 책(冊) 머리에 총도(總圖)를 그렸는데, 토지를 세분한 모양이 꼭 어린(魚鱗:물고기 비늘)과 같다고 해서 이 이름이 나왔다. 한 필(筆)마다 구획을 표시한 지도를 만들어 각 토지의 지번·소재지·지목·면적·형상·조세 부담액·토지 소유자와 경작자의 성명 등을 기재했다. 어린도란 명칭은 이 그림이 물고기의 비늘이 나란히 있는 모양을 닮은 데서 생겼다고 한다. 송(宋)대부터 일부 지방에서 실시되었는데 명대에는 강남 지방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시행되었고, 청(淸)대에는 그 시행 범위가 더욱 넓어졌다.

부역황책[편집]

賦役黃冊

명대(明代)에 시행된 일종의 호적. 1381년 처음으로 작성되어 종전의 호첩(戶帖)과 바뀌었다. 당시 110호를 단위로 하여 이(里)라는 관제(官製)의 인보조직(隣保組織)이 만들어졌는데, 이 이(里)를 단위로 각호의 가족의 성명·연령·재산 등을 기입한 장부 4부를 작성하여, 주현(州縣)마다 한데 모아 1부는 부(府)에, 1부는 포정사(布政司)에 보관하고, 1부는 중앙의 호부(戶部)에 보냈다. 호부에서는 이를 난징(南京)의 후호(後湖) 중의 창고에 수납 보관했는데, 그 표지를 황색종이로 했기 때문에 황책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또 호적인 동시에 전부(田賦)·요역(?役)을 할당하는 원부가 되므로 부역(賦役) 황책이라고 한다. 그 작성은 이갑(里甲)의 재편성과 대응하여 10년마다 행해졌는데, 이를 기초로 하는 인구 통계가 명(明) 1대에 걸쳐 거의 변동이 없는 점으로 보아, 명의 후대의 기재는 그 신빙성이 희박하다. 명(明) 1대 사이에 27회 작성되었고, 청(淸)도 이를 이어받았다.

이갑제[편집]

里甲制

명나라 및 청나라초의 향촌(鄕村) 통치조직으로서 1381년 부역황책의 작성과 동시에 설정되었다. 토지 소유자 110호를 가지고 1리를 편성하고 그 중 인정(人丁)이나 세 부담액이 많은 부유한 호 10호를 이장(里長)으로 하고, 남은 100호를 갑수(甲首)로 하여 10호씩 10갑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매년 이장 1명, 갑수 10명이 윤번으로 이갑정역(里甲正役)이라는 임무를 맡았고 10년에 1순(巡)하였다. 이갑정역의 내용은 부역황책의 작성, 조세·역역의 할당과 징수, 이(里) 내부의 치안 유지 등의 중요한 것으로서, 만약 이(里) 내에 조세의 체납이나 도망호가 생기면 이장은 책임을 지고 그 부족분의 조세까지 부담했다. 또한 마을의 권농(勸農), 농민의 교화(敎化), 가벼운 사건의 재판 등을 담당하는 이노인(里老人)이 있어 농민생활의 지도를 맡았다. 명왕조(明王朝)는 이 제도에 의해서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전국의 농촌까지 지배력을 고루 뻗치는 데 성공했다. 이 밖에 궁정(宮廷)이나 중앙·지방의 관청에서 사용하는 물품이나 잡비의 부담이 있고, 시대가 지남에 따라 이러한 부담은 무거워졌다. 이갑제는 일조편법(一條鞭法)의 실시에 의해서 조세 할당의 단위가 이(里)에서 현(縣)으로 이관되고서부터 그 중요성이 감소되었으나 명조말까지 존재했고 청대에도 채용되었다. 그러나 지정은제(地丁銀制)의 출현과 함께 기능을 상실하여 실시되지 않게 되었다.

정난의 변[편집]

靖難-變

영락제(永樂帝)가 제위를 건문제(建文帝, 惠帝)로부터 탈취한 사건. 홍무제는 천하통일 후 제실의 안태(安泰)를 기도하여 창업 공신을 배제함과 동시에 황자를 전국 요소에 영주로 봉했다. 그것도 세록(歲祿)을 급여할 뿐, 지방 인민의 지배권은 주지 않았다. 그러나 대(對) 몽골 관계로 인해서 제왕(諸王)에 일부 병권을 위임했기 때문에 세력이 강한 자가 나타났고, 그 중에서 북경(北京)에 분봉된 연왕(燕王)의 세력은 강대해졌다. 홍무제 사후 손자인 건문제가 16세로 즉위하자 근신(近臣)의 말에 따라 집권 정책을 계승하여 제왕에 대해서는 억압책을 취했다. 연왕은 이 기도를 알자 “임금 옆의 간신을 제거하여 제실의 위난을 평정한다”고 하면서 북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4년간의 내전 끝에 남경을 함락시키고 제위에 올랐다. 이가 곧 성조(成祖)이며 처음에 연왕은 군측(君側)의 간신을 몰아내고 제실(帝室)의 난(難)을 다스린다는 명목을 들어 스스로 이 사건을 ‘정난(靖難)’이라 일컫고, 그 군사를 정난사(靖難師)라 불렀다.

영락제[편집]

永樂帝 (1360

1424, 재위 1402

1424)

명나라의 제3대 황제. 성명은 주태, 홍무제의 제4자, 성조(成祖)라고도 한다. 처음 연왕에 봉해져서 북경에 있었는데, 건문제의 제왕(諸王) 억압책에 반항하여 정난의 변을 일으켜서 건문제를 패배시키고 1402년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영락제는 반대파를 일소하고 제왕을 눌러 군주권을 강화시킴과 동시에 측근의 환관(宦官)을 중용하고 동창(東廠)이라는 특무기관(特務機關)을 설치하여 그 운영을 그들에게 맡겼다. 군주권을 배경으로 하는 환관의 전횡은 이 때에 시작된다. 또한 황제는 1421년 북경에 천도하고 수도와 북변의 방위를 일체화시켰는데 이에 수반하여 대운하를 수축(修築)하여 강남의 경제력과 수도를 연결시켰다. 영락제는 또한 대외적으로 적극책을 취했다.

몽골에 대해서 5회의 대원정을 한 것 외에 귀주(貴州)의 내지화(內地化), 안남(安南)의 병합, 만주 경영 등 그의 일대는 외정(外征)으로 지새웠고, 마침내 정벌 도중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정화(鄭和)의 남해 원정도 모두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 실시된 것이다.

베이징 천도[편집]

北京遷都

건문제(建文帝)를 쓰러뜨리고 제위에 오른 영락제에 대하여 강남(江南)의 세론(世論)은 대단히 비판적이어서 신제(新帝)로서는 난징(南京)이 마음 편한 곳이 아니었다. 또한 정난(靖難)의 변(變) 동안 북변(北邊)이 거의 무방비상태로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단 몽골고원으로 달아난 원(元)의 잔존세력이 틈을 타서 침해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영락제는 연왕(燕王)시대부터 자기의 거성(居城)이던 베이핑(北平)에 머무르는 일이 많았으며, 5회에 걸친 몽골 토벌작전도 베이핑을 거점으로 수행되었다. 그러다가 1421년(永樂 19년) 새 궁전이 완성되자 베이핑을 베이징(北京)이라 고쳐 정식 국도(國都)로 정하고, 그 때까지의 국도였던 난징에는 형식적인 정부를 남겨 두어 별도(別都)로 삼았다. 명왕조(明王朝)는 난징을 도읍으로 해서 성립된 국가인데, 그것은 강남에서 일어나 천하(天下)를 통일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조였음을 의미했다. 양쯔강(揚子江) 하류지역의 개발이 진척된 것은 당대(唐代) 중간부터이며 그후 경제적인 면에서 이 지역은 종전의 선진지역(先進地域)인 황하유역을 압도하게 되었다. 송대(宋代)에 와서는 이 경향이 더욱 뚜렷해졌으며, 문화면에서도 강남 지식인의 진출이 눈부신 바 있었다.

명 왕조는 이러한 경제적 최선진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그 통일제국(統一帝國)을 형성했다. 그런데 30년 남짓한 짧은 기간을 거친 뒤에 국도가 베이징으로 옮겨져 정치와 경제의 중심이 다시 분리되었다. 그러나 강남(江南)의 경제적 중요성은 결정적이었으므로 결과적으로 강남의 물자, 특히 조세(租稅)로 거두어들인 양곡을 베이징으로 수송하기 위해 대운하(大運河)를 개수(改修)하기로 되었다. 원대(元代)에 개착(開鑿)하였으나 수심(水深)을 유지하지 못한 채 방치된 회통하(會通河)를 중심으로 베이징과 강남을 잇는 대운하의 완성을 본 것은 1411년이었다. 여기에서 화북(華北)과 강남이 경제적으로 강하게 연결된 것이다. 이후 이 대운하는 명(明)·청(淸) 시대를 통하여 경제면이나 교통·운수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환관의 정치활동[편집]

宦官-政治活動

명대(明代)는 중국사를 통하여 후한(後漢) 및 당(唐)과 함께 환관(宦官)이 권력을 마구 휘두른 시대로 그 발단은 영락제 때부터였다. 태조(太祖)가 환관을 황제의 눈과 귀로 여겨 다방면에 이용했으며 그 반면에 그들에 대한 통제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궁문(宮門)에다 ‘내신(內臣:宦官)은 정사(政事)에 관여하지 못한다. 관여하는 자는 참(斬)한다’라는 글자를 각주(刻鑄)한 철패(鐵牌)를 세워 외관(外官)과의 교제를 금했다.

건문제(建文帝)는 그 뒤를 이어 환관에 대한 통제를 더 엄하게 했는데, 환관들이 그것을 원망하여 정난(靖難)의 변(變)에 즈음해서 연왕(燕王) 측에 내통하여 건문제 측의 내부사정을 알려 주었기 때문에 연왕은 난징공략을 결심했다고 한다. 영락제는 그러한 사정으로 황제의 독재(獨裁)를 철저히 하기 위해서 환관의 힘을 이용하려고 했다. 신도(新都) 베이징에서는 수천 명의 환관이 채용되어 12감(監), 4사(司), 8국(局)의 조직이 만들어졌다.

또, 이와 별도로 동창(東廠)이라는 비밀경찰을 설치하고, 황제 직속의 첩보기관, 검찰기관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장관(長官) 이하의 밀정(密偵)으로 환관을 임용하여, 문무관료(文武官僚)는 물론이고 일반 백성의 일상 생활까지 감시를 시켰다. 그리하여 천하의 모든 정치정보가 수집되었을 뿐만 아니라, 양곡 등 중요한 물자의 가격까지 조사시켰다고 한다.

이 동창은 또 하나의 비밀경찰인 금의위(錦衣衛)와 협력관계에 있었으며, 그 탄압은 몹시 가열(苛烈)하여 명일대(明一代)를 통하여 이 기관의 희생이 된 학자, 지식인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뿐 아니라, 영락제는 더욱 다방면으로 환관을 이용했다. 군대가 지방에 출동할 때에는 반드시 감시역(監視役)으로 환관을 딸려 보냈는데, 그들은 감군(監軍)이라 불렸다. 외국에 보내는 사절(使節)에도 환관을 임명하고, 외국무역을 담당하는 사무소인 시박사(市舶司)에도 환관을 두었다. 이와 같이 환관의 정치활동은 영락제 때에 시작되고, 명 일대의 밀정정치(密偵政治)의 기초가 영락제에 의해 구축되었다.

몽골친정[편집]

蒙古親征

영락제(永樂帝) 시대의 대규모의 대외사업(對外事業)으로 가장 큰 것은 몽골족 토벌전쟁이다.

당시 중국에서 쫓겨난 몽골족인 북원(北元)은 원조(元朝)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의 뒤를 그 아들 소종(昭宗)이, 그후 그 아우 토쿠스 티무르가 계승했는데, 그 세력은 더욱 쇠퇴하였다. 이 동(東)몽골부족을 명나라에서는 ‘타타르’라고 불렀다.

1410년(永樂 8년) 영락제는 50만 대군을 거느리고 타타르를 친정(親征)하여 격파했다. 그런데 타타르부(部)의 세력이 쇠하자, 대신해서 서(西)몽골의 오이라트부(部)의 세력이 고개를 들었다. 영락제는 1414년(永樂 12년) 다시 대군을 거느리고 친정하여 툴라 강변에서 부장(部長) 마함을 격파했다. 그러나 이런 대원정(大遠征)은 국가적 부담의 증대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재정(財政)이 고갈하게 되고, 백성들 사이에 염전(厭戰) 기분이 만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강행되었다.

오이라트가 패하자 타타르가 다시 세력을 만회했다. 영락제는 다시 토벌군을 거느리고 출정했지만 전과(戰果)를 거두지 못했으며, 1424년 마지막 원정에서 돌아오던 도중 유목천(楡木川)에서 병사(病死)했다. 영락제의 대원정 사업은 결국 그 내용에 있어서는 반드시 광휘찬란하지는 않았지만, 10세기 이래로 한민족(漢民族)이 북방민족으로부터 굴욕적인 화평(和平)을 강요당하고 늘 압도하는 상태에 있다가 오랜만에 반격을 가하여 그들을 조공무역(朝貢貿易)의 체제에 편입시키는 계기를 만든 것은 큰 공적이었다.

정화의 남해 원정[편집]

鄭和-南海遠征

정화는 명대 초기의 무장으로서 대항해가(大航海家)이다. 윈난성 쿤밍(雲南省昆明)의 회교도로 본성은 마(馬). 환관으로서 영락제를 섬기고 정난의 변에서 공을 세워 정(鄭)이라는 성(姓)을 받았다.

1405년부터 1433년 사이에 7회의 대원정 항해를 실시하여 불후(不朽)의 이름을 남겼다. 그 제1

3 항해(1405

1407, 1407

1409, 1409

1411)에서는 자바, 수마트라, 실론에서 캘리컷에 달했고, 제4

7항해(1412

1415, 1416

1419, 1421

1422, 1430

1433)에서는 본대는 페르시아만의 호르므즈까지 원정하였으며, 별대(別隊)는 아프리카 동쪽 해안 아라비아 방면까지 진출했다. 그 선단은 보물선·서양대보선(西洋大寶船) 등으로 불렸고, 때로는 동남아시아 제국에 중국 황제의 위세를 보이고 조공(朝貢)을 촉구했다. 이 원정에 사용한 배는 길이 1백 37미터, 폭 56미터의 거선(巨船)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가 1497년 희망봉을 발견했을 때 인솔한 선단(船團)이 3척에 60명의 선원(船員)을 분승시킨 정도로, 정화의 함대는 그 선박의 수에 있어서도 세계 최대의 함대이며, 원조 이래로 진보된 이슬람 항해술을 응용한 대원정이었다.

또한 이때에 정화를 수행한 사람들에 의해서 남(南)아시아, 서(西)아시아 여러 나라 사정을 소개하는 저작(著作)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환(馬歡)의 『영애승람(瀛涯勝覽)』, 비신(費信)의 『성사승람(星?勝覽)』, 공진(鞏珍)의 『서양번국지(西洋番國志)』 등으로,

이에 의해서 중국인의 지리(地理)에 관한 지식이 인도에서 아프리카 방면까지 확대되고, 중국인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는 단서가 되었다.

등무칠의 난[편집]

鄧茂七-亂 명(明) 때 1448년부터 약 1년간 강남의 푸젠성(福建省)에서 일어난 농민반란. 반란명칭은 주도자 등무칠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푸젠성 지방은 평야는 협소하지만 산지가 많아 농업에 알맞은 기후로 일찍이 농업이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하였다. 당시 화폐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하여 조세(租稅)는 은납제(銀納制)가 실시되었고, 농민들의 상업작물(商業作物)의 생산이 증가하였다.

한편, 상인 자본가들이 토지투자로 대농장을 소유하고 부재지주(不在地主)로 군림, 농민지배를 강화하여 전호제(佃戶制)를 확대하였다. 이에 전호(佃戶:소작인)들은 고액의 지대 외에 동생(冬牲)이라는 부조(副租)를 바쳐야 했고, 지주가 담당해야 할 조세·요역의 일부까지 대신해야만 했다. 이러한 봉건적 압박에 유민(流民)이 늘어났다.

또한 전호들은 지역의 자체경비조직체인 총갑제(總甲制)에도 편성되어 있었는데, 이 총갑제의 총갑인 등무칠이 전호들의 주장을 대변하여 동생폐지에 성공하여, 이후 광산 노동자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전개했다. 그러나, 정부군의 우수한 병력과 반란민의 내부분열로 실패하였다. 이 반란은 중국 역사상 화폐경제가 확대되는 상황 아래 자립적인 농업경영을 확보하기 위한 항조(抗租)운동의 시초라는 데에 의의가 있다.

토목의 변[편집]

土木-變

토목보(土木堡:河南省懷來縣 부근)를 중심으로 해서 싸운 명군(明軍)과 오이라트군과의 전쟁(1449). 오이라트의 에센은 북방지대에 있어서의 세력확대에 성공하자, 그들의 조공무역(朝貢貿易)과 그들의 지배하에 있는 아라비아인들에 의한 대상무역(隊商貿易)의 횟수(回數)를 증가해 줄 것을 명조에 요구했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반대했다. 1449년 7월 명조는 환관(宦官) 왕진(王振)의 무모한 강경책에 이끌려 영종(英宗)이 친정군(親征軍)을 이끌고 나섰지만 토목보에서 오이라트군에게 거의 전멸당하고, 영종은 포로가 되어 북방으로 납치되었다. 명은 영종의 아우 대종(代宗)을 왕위에 올리고, 우겸(于謙) 등이 북방의 방위 태세를 강화시켜 오이라트의 침입에 대비하였지만, 1450년 영종이 송환되고 화의가 성립되었다.

북로[편집]

北虜

명의 북변을 침략한 몽골족을 가리킨다. 1449년 명이 토목의 변에서 대패한 이래 몽골족의 북변 침입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명에서는 장성(長城)을 수축하는 등 이에 대비하였다. 한편 몽골에서는 타타르부에 다얀칸(汗)이 나타나서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였고, 손자인 알탄은 1542년 대거 명에 침입하여 살륙·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해마다 침입하였고 북경성을 포위한 일까지 있었다. 명에서는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여 방비에 노력했으나 이 때문에 국력은 많은 타격을 받았다.

남왜[편집]

南倭

명의 동남 해안지방을 약탈한 해적, 왜구(倭寇)를 말한다. 왜구란 명칭은 한국·중국의 연해 지방에 대한 일본인의 침략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활동 시기는 원대 말에서 명대 초에 걸친 전기와 가정년간(嘉靖年間, 1522

1566)의 후기로 나뉘며, 활동 지역은 전기에는 한반도에서 화북(華北) 연안 지방 위주였고, 후기는 화중·화남의 연안이 중심이었다. 활동의 양상은 후기가 심했고, 북로와 함께 명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

장거정의 토지장량[편집]

張居正-土地丈量

장거정(1525

1582)은 명조의 정치가이다. 후베이 장림(湖北省江陵) 사람. 자는 숙대(叔大). 23세에 진사에 합격,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1572년 만력제가 10세로 즉위하자 선제(先帝)의 유조(遺詔)에 따라 그 보좌가 되어 국사를 독재했다. 밖으로는 몽골의 알탄과 화해하여 북변의 평화를 유지하고 내정에서도 행정 정리, 관기 숙정, 용비(冗費) 절감 등의 개혁을 단행했는데, 특히 중요한 것은 1580년부터 착수한 전국적인 호구 조사와 토지 측량(장량)이다. 이 사업의 완성은 그의 사후까지 걸렸으나 그 결과 많은 은전(隱田)이 적발되어 농민의 세 부담의 공평화와 아울러 국가 재정의 적자도 일거에 해소되었다. 그의 사후 정치는 삽시간에 이완(弛緩)되는데 명이 그로부터도 수십 년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업에 힘입은 바 크다.

동림당[편집]

東林黨

명(明)말의 정치상의 당파. 만력(萬曆) 초년 장거정(張居正)에 반항한 정의파 관료인 고헌성(顧憲成)·추원표(鄒元標)·조남성(趙南星) 등은 장거정의 사후에도 내각(內閣) 및 내감(內監) 일파의 정책과 대립항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592년 이후 반(反)내각파는 황태자 책립문제·인사문제 등으로 정계로부터 추방되고, 내감(內監)의 각지 파견에 의한 정치적 수탈의 강화 등 부패한 정책이 강행되었다. 이 때문에 고헌성·고윤성(顧允成)·고반룡(高攀龍) 등은 향리(鄕里) 무석(無錫)에 동림서원(東林書院)을 건설하고 강학(講學)활동을 행하였다. 이후 그들은 강학에 있어서 정치적 논의를 심화하여 재야적인 정치활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중앙 및 지방의 동림파 관료와 협력하여 개광(開鑛)·상역(商役)·증세(增稅)문제 등 내감일파의 정책에 대하여 강력한 반대운동을 폈다. 만력말에서 천계(天啓)에 걸쳐 정격(挺擊)·홍환(紅丸)·이궁(移宮)의 삼안(三案)이 발생하여 동림파는 내감 일파의 정치적 음모와 논란하여 대논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1625, 1626년의 위충현(魏忠賢) 일파의 탄압에 의하여 동림당은 일단 패배하였으나, 그 운동은 복사(復社)라는 정치결사에 이어졌는데 이를 소동림(小東林)이라고도 한다.

강남에서의 상품 생산의 발전[편집]

江南-商品生産-發展강남 양쯔강(揚子江) 하류의 삼각주 지대 개발은 남송(南宋) 이래 비약적으로 진전되었는데 자연적 호조건의 혜택도 있어 명대에는 농업 생산이 한층 증대했다. 특히 중엽부터는 그 때까지의 주곡(主穀)을 중심으로 하던 자급(自給) 생산이 깨어지고 각지에서 상품 작물의 재배가 성행되었다.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에 걸쳐 중국에서는 각종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의 하나로 견직물업이 있다. 중국 고래(古來)의 산업인 견직물업은 송(宋)·원(元) 이래의 전통을 계승하여 명나라 때에도 쑤저우(蘇州)·항저우(抗州), 난징(南京)을 중심지로 하여 단자(緞子), 능(綾), 사(紗) 같은 고급품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쑤저우는 타이후(太湖) 기슭에 있어 대운하(大運河)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에 위치하여, 견직물의 일대 중심도시로 번영했다.

쑤저우는 신흥(新興) 직물업의 중심지로서, 마무리 공정이나 고급품의 생산을 맡아 더욱 발전했다. 또한 직물업의 발전에 따라 각 지역 상호간의 분업화도 촉진되어, 후저우(湖州)의 생사(生?) 산업이나 우후(蕪湖)의 염색업(染色業) 등도 발달했다.

견직물업과 함께 당시의 중국산업의 또하나의 중심이 된 것은 면직물업이었다. 국초에 태조(太祖)가 전국 농민에게 면화(綿花)의 재배를 강제적으로 권장하여 명나라 시대를 통하여 거의 전국에 그 재배가 보급되었다. 그와 동시에 농촌에서는 부드럽고 질긴 일상의료(日常衣料)로서 자가소비를 위한 면포(綿布) 생산이 확대되었다. 그런데 15∼16세기에 이르러 면포생산이 재편성되어, 강남 삼각주 지대의 쑤저우에 인접한 쑹장(松江)을 중심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보았다. 이 지방은 면직기술이 쑤저우의 전통적인 견직기술을 응용함으로써 다른 지방에 비해 기술면에서 탁월하였고, 또 교통이 매우 편리한 위치에 있어 대운하(大運河)를 통해 원료(原料)인 면화를 구하기가 용이하여 전국 제일의 면포 생산지로 발전하였다. 이에 따라 북방의 여러 성(省)은 면화재배를 많이 하여 쑹장면업의 원료 공급지가 되었다.

한편 상품 작물의 재배 등에 의해서 화폐경제가 농촌에 침투했는데, 일조편법의 실시는 농촌을 한층 화폐경제에 휘말리게 했다. 농민은 소작료나 조세를 납부하고 나면 가계를 보충하기 위해서는 고리대금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것을 반제하기 위해서는 화폐(銀)를 손에 넣어야 했다. 이 가계 보충 수단으로서 그들은 가족이 총동원해서 가내공업에 힘썼다. 이 시대의 농촌 수공업은 이와 같은 환경 아래서 발달한 것이다. 따라서 가내공업을 영위하는 농민에 대한 고리대금업자나 상인의 지배력은 대단히 강했는데 그 중에는 도매업계 청부제선대 생산(都賣業制請負制先貸生産)을 하는 상인도 나타났고, 나아가서 매뉴팩처적 경영을 보이는 것도 출현했다. 그러나 수공업 생산자 자신이 시장을 파악하고 생산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극히 곤란했다.

일조편법[편집]

一條鞭法

명대(明代)의 후기에 제정한 세제(稅制). 당(唐)의 양세법(兩稅法) 이래로 중국의 세제는 양세(兩稅:夏稅·秋稅)와 각종의 요역(?役)이 있었는데, 양자(兩者)를 아울러 일조(一條)로 하여 납세자의 토지소유면적과 정구수(丁口數)에 따라 세액을 결정하고, 은(銀)으로 납부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복잡한 세제를 간소화하여 당시의 사회 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대응하고, 국가의 조세(租稅)수입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1560∼1570년경 먼저 강남(江南)을 중심으로 시행하고, 점차 화북지방에 보급시켜 갔다.

역역도 명대초에는 이갑정역(里甲正役)과 그 밖의 잡역으로 간단한 것이었는데 중기부터 그러한 항목이 늘어나서 부담도 무거워졌다. 그와 함께 징세사무도 번잡해지고 거기에다 관리의 부정행위나 농민 부담의 불공평이 현저해졌다. 그래서 징세 사무를 간편화하고 조세 수입을 확보하기 위해 전부에 이어 역역의 은납화(銀納化)도 촉진하고, 조세의 잡다한 항목을 합병하여 은으로 일괄 납입시키도록 한 것이 일조편법으로서, ‘一條編法’이라는 표기가 옳다고 한다. 이 법은 16세기 중엽부터 지방으로 실시되어 말기경 전국으로 확대되었는데, 실시 시기나 지방에 따라서 내용에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의 차이는 (1) 각항 역역의 합병, (2) 각항 전부(田賦)의 합병, (3) 전부·역역의 합병의 세 가지로 대별할 수가 있는데 또한 그 하나하나의 합병 정도에도 차가 있었다. 이와 같이 처음은 여러 가지 내용을 가졌던 일조편법도 차차 부(賦)·역(役)의 합병화가 일반적으로 되어 (3)이 전형(典型)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 법은 부·역을 단일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종래 개별적으로 할당하여 징수되고 있던 부·역을 일괄하여 합병징수함으로써 그 사이에 작용되는 부정을 배제하려 한 것으로서 말하자면 징세 기술면에서의 개혁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만력제[편집]

萬曆帝 (1563

1620, 재위 1572

1620)

명의 제14대 황제. 성명은 주익균(朱翊鈞), 신종(神宗)이라고도 한다. 10세에 즉위했기 때문에 재상인 장거정(張居正)이 위임을 받아 정무를 전담했다. 그는 관직의 정리, 숙정(肅正) 전토의 측량, 재정의 개혁 등을 단행하여 치적을 올렸는데 그가 죽자 만력제의 방종한 정치가 시작되었다. 안으로는 태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관료간에 동림당(東林黨)과 비동림당의 당쟁이 전개되고, 밖으로는 만력의 3대정(大征)이라 하는 병란이 일어났다. 이것이 왕조의 재정을 압박했기 때문에 황제는 환관에 명하여 각지에 광산을 개발하고 상세(商稅)를 늘려서 징수했으나 환관의 주구(誅求)가 심하여 각지에 반(反)환관 폭동이 일어났다. 이때 만주에서 일어난 여진족(女眞族)의 누르하치가 중국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명은 내우외환(內憂外患) 속에서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만력의 3대정[편집]

萬曆-三大征

명의 만력시대 중엽 연이어 일어난 3차의 난. 장거정이 사망하자 명왕조(明王朝)의 정치는 즉시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신종(神宗)은 후궁(後宮)에 틀어박혀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었고 장거정이 남긴 정치의 응어리 때문에 관료와 환관(宦官)들 사이에 다시 파벌이 생겼다. 황제의 궁정생활이 너무 호화로워 장거정이 애써 비축한 재원(財源)은 궁전의 건축이나 장려한 정릉(定陵)의 건설 등으로 삽시간에 소비되고 말았다. 이 때 ‘만력의 3대정’이라는 전란이 일어났다.

첫번째는 1592년(萬曆 20년) 닝샤(寧夏)에서 몽골인 장군 보바이가 일으킨 반란으로 이 반란은 랴오둥(遼東)의 최강부대를 원군(援軍)으로 보내어 간신히 진압되었다. 그런데 이 난리가 벌어지고 있던 동년(同年) 4월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반도에 대한 침략(壬辰倭亂)을 시작했다. 명나라는 조선왕조로부터 구원의 요청을 받고 대군(大軍)을 출동시켰는데, 히데요시의 정명(征明)이라는 공명심 때문에 일어난 이 전쟁은 7년이나 계속되어 조선 전토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으로 끝났다. 명나라 측에서는 이 전쟁에서 많은 인명을 잃었고, 재정 부담도 컸다. 그리고 이 전쟁에 의하여 랴오둥 방면의 방위체계가 약화되어 여진족(女眞族)의 대두를 허용하게 되었다. 명 왕조는 수십 년 후 이 여진족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된다.

마지막으로 일어난 반란은 조선반도에서의 전란이 아직 끝나지 않은 1597년(萬曆 25년)에 파저우(播州)에서 일어난 소수민족의 추장(酋長) 양응룡(楊應龍)의 반란이다. 그는 묘족(苗族)출신의 지방관(地方官)이었는데, 명나라 관헌의 극단적인 차별대우에 분격해서 반기를 들어 명이 조선에 출병한 허점을 노려 난을 일으켰는데 1600년에 평정되었다. 이 난을 진압하는 데에도 2년이라는 세월이 걸리고 대군을 동원해야 했다. 이러한 전란의 계속으로 인하여 군사비가 급증하고 국가재정은 더욱 궁핍하게 되었다.

민변[편집]

民變

명 말기에 도시민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중운동. 만력 3대정 등으로 국고가 탕진되자 황제는 각지에 환관을 파견하여 새로운 광산을 개발하고, 상세(商稅)를 더 많이 징수하려 했다. 그래서 유명한 '광(礦)·세(稅)의 해(害)'가 야기되었다. 지방에 파견된 환관은 광사(礦使)나 세사(稅使)로 불렸는데, 이들은 육로(陸路)나 수로(水路)의 요충에 관소(關所)를 설치하고 황제의 위광(威光)을 내세워 제멋대로 상세를 징수했으며, 땅속에 은광(銀鑛)이 있다고 해서 주민들의 가옥을 파괴했다. 그런데 이러한 환관의 무법(無法)을 고발하거나 비판한 관료는 오히려 황제에 의하여 처벌을 받았으며, 심한 경우에는 처형을 당하였다.

이에 민중은 환관에게 저항하여 반세(反稅) 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도시의 민중폭동, 이른바 민변(民變)이다. 그중에서도 쑤저우(蘇州)의 견직물 직공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세(反稅)·반환관(反宦官) 폭동인 ‘직용(織傭)의 변(變)’은 유명하다. 당시에 중국 최대의 견직물업 도시였던 쑤저우에 세사(稅使)로 파견된 것은 환관 손륭(孫隆)이었다. 그는 무뢰한들을 부하로 써서 지나가는 상인에게서까지 상세(商稅)를 징수하고, 나아가서는 직물업자의 직기(織機)나 직물에도 과세했다. 그 때문에 직조공장이나 직물 도매상들이 잇달아 문을 닫고, 거기서 일하던 수천 명의 직공이 실직했다.

이런 상황에서 2천여 명의 직공이 폭동을 일으켜 세사의 부하들의 집에 불을 지르거나 살해했으며, 장본인인 손륭을 쑤저우에서 추방했다.

이러한 민변(民變)은 악랄한 징세사(徵稅使)의 수탈에 반대해서 발생한 왕조 말기에 흔히 있는 폭동이지만, 그와 동시에 새로 발전하고 있는 수공업의 담당자로서 자기네의 힘을 자각하기 시작한 직공들에 의한 폭동, 다시 말하면 선구적인 노동자에 의한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같은 반환관(反宦官)·반세(反稅)의 폭동이 베이징(北京)을 비롯한 린칭(臨淸), 우창(武昌), 경덕진(景德鎭) 등 각지의 도시에서도 발생했으며, 또한 이와 함께 농촌에서는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소작투쟁(小作鬪爭)이나 노예(奴隸)의 신분해방운동―노변(奴變)―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봉건적 체제에 반대하는 이러한 움직임은 명말(明末)에 이르러 더욱 고조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