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문명의 형성/중국 문명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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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명의 기원〔槪說〕[편집]

중국 민족의 문화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하지 않은 점이 많다. 현재 어느 정도 확실한 것은 기원전 3000년에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화북지대(華北地帶)에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중국 원주민은 황하나 그 지류에 연한 단구(段丘) 위를 주거로 삼고, 농촌 취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농경·목축을 하며 수혈주거(竪穴住居)에 살고, 토기·직물·마제석기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1921년, 스웨덴의 고고학자 앤더슨은 허난성(河南省)의 양사오촌(仰韶村)을 발굴하고 채도(彩陶)를 요소로 하는 각지의 같은 계통의 문화를 양사오 문화라고 이름붙였다.1929년 역사 언어 연구소는 산둥성의 룽산진(龍山鎭) 청쯔야(城子崖)를 발굴했다. 흑도를 요소로 하는 같은 계통의 문화를 룽산(龍山) 문화라고 한다.양사오 문화와 룽산 문화와의 관계는 양사오 문화는 서방에, 룽산 문화는 동방에 각각 지역적으로 대립하여 발달했다고 하는 설과, 양사오 문화가 발달하여 룽산 문화가 성립했다고 보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후자가 유력하다. 또한 전후(戰後), 양쯔강 하류역의 장쑤·안후이·저장 지방에 두 문화보다 뒤진 선사 문화가 발견되어 주목받고 있다.

원중국인[편집]

原中國人 Proto Chinese

중국인의 직계인 선조로 신석기시대인(人). 허난성의 양사오 유적의 묘지나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동남쪽의 반파(半坡) 유적에서 발굴된 인골을 측정한 결과, 현대 몽골인의 특징이 보임으로써 몽골 인종에 속하는 원중국인이라 이름붙였다. 그러나, 몽골인은 일반적으로 키가 작으며, 반파인(半坡人)은 평균 신장 169.45㎝로 커서, 이 점은 아직 문제로 남아 있다. 이 사회는 모계제(母系制) 사회임과 동시에 남자 노인이 권위를 갖는 연령적 위계제(位階制)가 발달해 있었다.

황허문명[편집]

黃河文明

중국의 황허 유역에 성립한 옛문명의 총칭. 문명의 성립이란 일반적으로 국가·청동기·문자의 성립 등이 요소가 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황허 문명의 성립기(成立期)는, 오리엔트나 인도보다 늦은 기원전 2000년경이라 말하고 있다. 선사시대의 중국인의 생활구역은, 황허 유역 지대의 산기슭에 있는 물이 솟아나는 지대에 많으며, 수해를 피하기 위하여 단구(段丘) 위에 거주했다.나일강이나 인더스강 유역에서는, 하천의 정기적인 범람으로 인한 비옥한 흙의 퇴적을 이용한 관개 농업이 성립했으나, 이 점은 중국 농업의 성립 조건과는 다르다. 황토는 잿빛이 나는 황색의 석영(石英)이나 장석(長石) 등의 미립(微粒)의 퇴적으로서, 빗물 속의 석회질을 모아 땅이 비옥하고 부드러워서 농경 생활을 하기에는 아주 적합했다. 이 황토 지대에서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기초로 문명은 성립된 것이다. 양쯔강 유역에 고문명이 성립하지 않은 이유는, 고온다습(高溫多濕)하기 때문에 초목이 무성하여, 철기시대 이전에는 개간이 곤란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최근 양쯔강 중·하 유역의 문화 유적의 발굴 조사가 진척중이어서 그 결과가 주목된다.

채도[편집]

彩陶

선사시대의 토기로 채색토기·채문토기라고도 한다. 질이 좋고 얇으며, 검은색이나 적색으로 채색된 기하학 무늬, 상징 무늬(象徵紋), 소용돌이 모양의 무늬, 동물 무늬 선 등이 나타나, 바탕색은 산화염(酸化炎)으로 구웠기 때문에 홍색이다. 일반적으로 질좋은 점토를 사용하여 만들고, 녹로는 쓰지 않았으며 표면을 매끄럽게 갈았다. 채색된 그림은 당시 사람들의 심상(心象)을 반영하는 정신적 소산으로, 양사오 문화 초기의 반포(半坡) 유적은 특정한 동물무늬와 삼각형 무늬·그물 무늬 따위의 기하학 무늬가 특징이다.이후 먀오디거우(廟底溝) 유적은 동물 무늬에 새와 개구리가 있고, 기하학 무늬에 곡선의 느낌을 나타내는 선 등이 나타나 지역에 따라 약간의 그림의 변화를 보여준다. 중국의 채도는 간쑤(甘肅)·칭하이(靑海)·산시(山西)·허난(河南) 등지에서 출토되어 양사오 문화의 한 요소가 되었다. 채도는 서방 문화의 영향에 의해서 제작되었다고 하는 설이 일반적인데 독자적으로 중국에서 발생했다는 설도 있다.

양사오 문화[편집]

仰韶文化

황허강(黃河) 중류의 채도를 동반한 신석기의 농경문화. 채도가 특색으로 채도문화(彩陶文化)라고도 한다. 유적의 대부분은 강기슭의 대지(臺地)에 있고, 거주지와 공동묘지가 있다. 정주생활을 했고 조·수수 등을 재배하고 가축 사육과 사냥, 고기잡이도 병행했다. 간석기·뗀석기·돌식칼 등으로 수확하고, 흙을 구워서 만들거나 돌을 갈아 만든 팔찌도 애용했다. 토기로는 붉은간토기와 바탕흙에 모래알이 함유된 회도(灰陶)가 있었는데, 특히 일부 붉은간토기에 기하학무늬와 사람 얼굴 등을 그린 채도는 제사라든지 묘장공헌(墓葬供獻)에 쓰였다. 성인(成人)은 공공묘지 안의 구덩이에 매장되었으며, 어린 아이는 옹관장(甕棺葬)으로 집 근처나 마루 밑에 묻혔다. 유적은 허난성(河南省) 서부, 산시성(山西省) 남부, 산시성(陝西省) 중부 등지에 분포되어 있으며, 대표적 유적으로는 산시성 시안시(西安市) 반포(半坡) 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반포 유적과 허난성 산현(陝縣)의 먀오디거우(廟底溝) 유적을 표준으로 하는 먀오디거우 유적이 있다. 시간적으로는 반포 유적쪽이 더 오래되었다. 양사오 문화는 황허강 상류에 전파되어 간쑤양사오(甘肅仰韶)문화의 탄생과 산둥(山東)의 농경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중원에서는 이 문화에 뒤이어 룽산문화(龍山文化)가 성립했다. 최근의 새로운 조사를 통해 허난성 신정현(新鄭縣)의 배리강(裵李崗)과 헤베이성 무안현(武安縣)의 자상(磁上) 등에서 양사오 문화보다 앞서 있었던 초기 농경문화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양사오 유적[편집]

仰韶遺跡

허난성(河南省) 몐츠현에 있는 신석기시대 농경 취락의 유적. 1921년 스웨덴의 고고학자 앤더슨에 의하여 발굴 조사되었다. 수혈주거(竪穴住居)·우물·묘지나 돌도끼·돌로 만든 식칼·돌살촉 등의 마제(磨製)석기, 회도(灰陶)·흑도(黑陶)·채도(彩陶) 등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양사오에서 출토된 채도를 요소로 하여, 신석기시대 속에 양사오 문화기를 설정했다. 그러나 양사오 유적 그것은 단일한 문화기의 유적만은 아니고, 여러 시대가 뒤섞인 유적이다.전형적 유적은 산시성 시안 부근의 반포(半坡) 유적이 있고, 양사오 문화에의 과도기 유적으로 허난성 먀오디거우(廟底溝) 제2기의 문화 유적이 있다.

룽산문화[편집]

龍山文化

산둥성(山東省) 리청현(歷城縣) 룽산전(龍山鎭) 청쯔야(城子崖)를 대표 유적으로 하는 신석기문화 중 하나. 양사오(仰韶)문화를 이었으며, 은(殷)·주(周)의 문화보다 앞선 문화이다. 이 문화는 검은 간토기로 대표되기 때문에 흑도문화라고도 한다. 흑도는 채도와 더불어 황허강 유역의 중요한 선사토기로 중요시되고 있다. 룽산문화는 보리·조를 주로 하는 농경문화로, 돼지·개·염소·소를 사육하고, 수렵과 어로 생활도 하였다.

흑도[편집]

黑陶

중국 선사시대의 흑색 토기로 검은간토기라고도 한다. 질이 좋고 얇으며 녹로를 사용한 것으로, 표면은 연마돼 있다. 흑색이 되는 이유는, 흑연으로 닦고, 식물성 기름을 칠하여 굽고, 구울 때에는 기름으로 태워, 그을리게 했다는 등의 설이 있다. 흑도의 분포는 산둥·허난을 중심으로 산시·저장·남만주·랴오둥 반도에 미치는데, 청쯔야 유적의 흑도가 가장 성하던 때의 것이다. 형태는 접시·사발·항아리 외에 중국 고유의 삼족토기(三足土器)의 형태인 정(鼎)·헌·규 등이 있다. 은(殷)·주(周)의 청동기(靑銅器)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나 아직 확실하지 않다.

청쯔야 유적[편집]

城子崖遺跡

산둥성 리청현(歷城縣) 룽산전(龍山鎭) 청쯔야(城子崖)에 있는 흑도 문화 유적. 1930년과 다음해의 두 번에 걸쳐, 중앙연구원 역사언어 연구소에 의하여 발굴되었다. 상층은 주나라 시대의 것이고, 하층은 석기 시대의 유적이다. 주위는 흙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주거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층에서 검은간토기와 다수의 석기·골각기·패기 등이 출토되었고, 마제인 구멍 뚫은 돌도끼·돌칼·돌낫·돌살촉·물레가락·조개껍질로 만든 조개칼·골제(骨製)의 대패 등도 발견되어 농경 문화의 발달 흔적이 인정되었다. 출토된 흑도를 요소로 한 룽산 문화기가 설정되었다.

회도(삼족토기)[편집]

灰陶(三足土器)

푸른빛과 회색을 띤 거칠게 만든 도질토기(陶質土器)를 회도라고 한다. 회도는 룽산문화기부터 나타나는데, 은·주 시대가 가장 성했으며 한(漢) 시대 이후에도 있었다. 형태는 중국 고유의 세발을 가졌는데, 역(?) 외에 삼족정(三足鼎)과 술단지(獻)가 있다. 역 토기는 찌는 그릇으로 쓰였다.표면에는 밧줄무늬를 놓았는데, 거칠고 두툼하며 실용적이다. 회도는 중국 고유의 토기로서, 독자적인 발전을 해온 것은 확실한데, 흑도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회도에서 흑도로 발전했다는 학설이 있으나 아직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