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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기의 로마 문화〔槪說〕[편집]

‘그리스의 학예, 로마의 지배’라는 말과 같이, 로마인은 문화의 창조보다도 선진 문화의 수용(受容)과 보급에 공헌했다.일찍이 왕정기(王政期)에는 에트루리아 문화의 영향이 압도적이어서 후에 로마인의 특기가 되는 아치 구축, 복점(卜占), 검투노예의 칼싸움 등은 모두 에트루리아가 기원(起源)이다. 그와 함께 중요한 것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이며, 에트루리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문자와 미술이, 또한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 식민시로부터 직접적으로 종교와 법률이 전해진 것 같다.공화정기(특히 기원전 4세기)에 로마는 문화적 쇄국상태에 들어간다. 북방의 켈트 문화의 영향은 있었으나, 그리스의 선진 문화로부터 떨어져 나간 시기에 로마의 로마다운 맛이 길러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신의·권위·전통을 존중하는 정신적 태도는 기원전 3세기 이후 헬레니즘 문화의 물결이 밀어닥친 뒤에도 오랫동안 로마인이 고유의 ‘미덕’으로 자랑하는 것이었다.종교宗敎

로마인의 신앙에서 두드러진 것은 평화·신 등의 추상 개념에 신령(神靈)을 인정하여 신으로서 존숭(尊崇)한 것이다. 로마의 신이 그리스의 신과 동일시된 다음에도 신들의 계보나 행동(투쟁·연애 등)의 이야기가 발달하지 않은 것은 로마 신의 추상적 성격 때문이다. 신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주피터(Jupiter) 대신(大神)과 ‘아궁이의 신’ 베스타(Vesta)였다. 베스타 신전의 성화는 국가 존속의 상징으로서 처녀 제관들이 수호했다.문학文學

가계(家系)와 선조의 공적을 자랑하는 로마인에게는 자기 나라의 역사를 자랑하는 기풍도 강했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인 안드로니쿠스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번역한 후에 비로소 라틴어의 본격적 서사시가 탄생했는데, 그것은 엔니우스의 『연대기』였다. 또한 한니발 전쟁 때쯤, 파비우스와 픽톨은 로마의 입장을 선전하기 위하여 그리스어로 최초의 『역사』를 썼다. 이 파비우스를 포함해서 정치가가 문화인으로서 활약하는 예가 드물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제3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자 스키피오로서, 철학자 파나에티오스, 역사가 폴리비오스 등의 그리스인과 친교를 맺어 로마 일류의 지식인 살롱을 형성하고 있었다.헬레니즘의 유입에 대해서 그 개인주의가 로마의 전통적 미덕을 파괴한다는 비판의 소리도 뿌리깊었다. 검찰관 카토가 그리스의 철학자 카르네아데스에게 로마 퇴거를 명령하고, 원로원이 민중의 박쿠스 축제를 금한 것은 헬레니즘화의 풍조에 대한 반발이다.실용성을 존중하는 로마인은 변론을 중시하였고, 나아가서 변론을 통하여 철학을 깊이 이해했다. 또한 마치 명연설을 듣는 것과 같은 문장을 최상의 명문으로 생각하게 되어, 간결하고 알기 쉬운 라틴 산문이 탄생했다. 대표적 웅변가 키케로는 변론에 손질을 가하여 널리 ‘읽히기’ 위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변론에 대한 강한 관심도 작용하여 로마인은 연극을 좋아했다. 이미 기원전 2세기에 플라우투스, 카에킬리우스, 테렌티우스가 아티카 희극을 본떠서 로마 희극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