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로마 공화정에서 원수정으로
로마 공화정에서 원수정으로〔槪說〕
[편집]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후에, 불안과 동요의 세기가 왔다. 그 발단은 속주에서의 반란, 이탈리아의 노예 반란, 동맹시 전쟁(전 91
전 88) 등 로마의 지배를 흔들리게 하는 일련의 무력 행사였다. 계속되는 위기는, 자비로 군대를 편성한 유력자들이 극복했다. 그러나 그들의 군사력은 외적(外敵)뿐만 아니라 국내로까지 향하였다. 정계의 대립이 무력으로 해결하게 되어 내란의 위험은 오히려 강해졌다.한편 지금까지 국정을 담당했던 특권적 지배층은 국가의 이익보다도 그 특권을 중시하는 보수세력(원로원파)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력은 여전히 뿌리깊었다. 실력자들도 이와 정면으로 대결하기를 피하고, 국제상(國制上) 최고의 권위를 가진 민회 결의(국민의 총의)를 무기로 대항했다. 그라쿠스의 개혁 이래, 전통을 중시하는 원로파와 민회를 조종하는 민중파의 책략이 정치사를 장식한다.반란과 정쟁(政爭)을 배경으로 마리우스(Marius), 술라(Sulla), 폼페이우스(Pompeius), 카이사르(Caesar, 시저)의 항쟁이 전개된다. 그 무대는 이제 한 도시국가 로마가 아니라, 지중해를 지배하는 세계 제국인 로마였다. 제국 정책을 수립한 카이사르는 암살자의 칼에 넘어졌으나, 그 정책은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마리우스
[편집]Marius, Gaius (전 157
전 86)
로마의 장군, 정치가. 중부 이탈리아의 아르피눔(Arpinum)에서 출생. 초기의 경력에 대하여는 분명치 않은 점이 많다. 기원전 119년 호민관(護民官)·기원전 115년 법무관·기원전 114년 스페인 총독을 역임, 기원전 111년 아프리카에 유구르타 전(戰)이 일어난 후, 많은 귀족 출신의 장군이 이를 평정치 못한 때, 기원전 107년 통령(統領)에 피선, 기원전 105년 출진(出陣)하여, 진압에 성공했다. 이때 종래의 시민병제도(市民兵制度)를 버리고, 빈민을 모아 군대를 조직했는데, 이후에 큰 영향을 주었다.기원전 104년∼기원전 101년 통령으로서 빈민파를 대표하고, 특히 기원전 102년 게르만인의 테우토네스족을 아쿠아에 섹스티아에에서, 기원전 101년 킴브리족을 베르켈라에에서 격파, 명망(名望)을 높였다. 기원전 88년∼기원전 87년 벌족파(閥族派)의 대표인 술라와 투쟁, 한때 술라에게 패하여, 로마를 떠났다. 기원전 87년 로마에 귀환한 후, 로마시에서 술라파의 대학살(大虐殺)을 하고, 기원전 86년 7차 집정관직(執政官職)에 복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고 병사했다. 그는 중앙 정계에 있어서는 전진(戰陣)에 있을 때처럼 생기를 보이지 못했으나, 민중파 정치가 중 대인물로서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술라의 반동정치
[편집]-反動政治
독재관(獨裁官)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전 138
전 78)는 호민관과 민회의 역할을 대폭 제한하고, 원로원의 권위를 현저하게 높여 반동적 체제를 수립했다. 술라의 정적 추방과 재산 몰수는 철저하여 훗날까지 공포와 반감을 부식시켰는데 몰수한 토지를 많은 퇴역 군인에게 분배한 것은 대토지 소유의 진행을 완화시키는 데 효과가 있었다.
폼페이우스
[편집]Gnaeus Pompeius (전 106
전 48)
로마의 정치가, 장군, 술라를 지지하여 정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술라가 죽은 후 두 사람의 부장(部將)이 대두했다. 그 중 한 사람인 폼페이우스는 에스파냐에서 민중파의 세트로리우스가 일으킨 반체제(反體制)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또 한사람인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전 114
전 53)는 검투노예(劍鬪奴隸) 스파르타쿠스가 지도하는 노예의 대반란(이탈리아)을 진압했다. 두 사람은 기원전 70년 집정관에 취임하여 술라의 반동체제를 무너뜨려 갔다. 그 후 폼페이우스는 동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여 로마의 곡물 공급을 확보하고, 이어서 폰토스왕 미트리다테스를 공략했으며, 동방의 여러 문제를 모두 해결하고 귀국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그의 세력 증대를 경계하여 그의 동방 정책, 퇴역 군인에의 토지 분배안을 쉽게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병사들과 동방 여러 나라의 불신을 사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제1회 삼두정치
[편집]第一回三頭政治
폼페이우스가 곤경에 빠져 있을 무렵 크라수스도 원로원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의 부하이며 민중파의 야심적 정치가인 카이사르가 두 사람을 설득하여 세 사람의 이익을 도모하는 비밀 협정을 성립시켰다(전 60). 소위 3인 동맹이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59년의 집정관으로서, 폼페이우스를 위하여 토지법(퇴역 군인에의 토지 분배)을, 크라수스를 위하여 속주 아시아의 징세액 감축법을 민회에 제출했다. 그는 자기의 지지자인 폼페이우스의 퇴역 군인을 동원하여 민회에 압력을 가하여 방해하는 원로원파의 도당과 난투까지 벌여서 법안을 성립시켰다. 카이사르 자신은 갈리아의 지사가 되었다.
갈리아 전쟁과 내란
[편집]-戰爭-內亂
로마에는 갈리아인에 대한 뿌리깊은 공포가 있었다. 토지를 찾는 그들의 이동이 로마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카이사르는 강력하게 갈리아인의 정복을 추진하여 한편으로는 장군의 명성과 병사의 지지를 확보하고 또 한편으로는 전리품과 착취로 많은 이득을 손에 넣었다. 기원전 58년부터 10년간의 전쟁에서 갈리아는 인구 3분의 1을 잃었다고 한다. 카이사르의 원정은 로마인의 눈에는 대성공으로 폼페이우스를 경계시켰다. 특히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전선에서 죽은 다음부터 양자간의 대립은 결정적이 되었다. 로마에서는 원로원파와 카이사르파의 폭력 사건이 속출하는 가운데,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의 제휴가 성립되었다. 양자는 카이사르의 병력을 두려워하여 군대를 해산시키고 귀국하도록 명령했다. 카이사르는 위법 행위의 고발이 두려워 귀국을 연장시켰다. 교섭과 책략의 2년간이 지난, 기원전 49년 1월 원로원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사태 수습의 전권을 폼페이우스에게 일임했다. 카이사르는 귀국 명령에 선수를 쳐 로마에 진군하였다. 예상 외의 급진격에 폼페이우스는 동쪽으로 퇴각, 테살리아의 파르살로스에서 카이사르와 대전하다 대패를 당했다. 패주하는 그를 쫓아 카이사르가 이집트에 도착했을 때 폼페이우스는 이미 암살된 뒤였다. 이집트에서 카이사르는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에 마음이 끌려 왕가의 내분에 개입하여 현지인의 심한 반격을 받았다(전 48). 이후 소아시아에서 폰토스왕(전 47), 아프리카에서 원로원파인 카토와 스키피오(전 46), 에스파냐에서 폼페이우스의 아들(전 45)을 상대로 싸움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싸움의 틈(통산 1년 남짓)을 타서 카이사르는 대규모의 제국(帝國)정책에 착수했다.
카이사르
[편집]Caesar(전 100
전 44)
로마의 장군, 정치가. 명문 출신으로 마리우스의 평민당에 접근(전 84)하다가 귀족당(貴族黨) 술라의 박해로 해외를 전전했다. 술라의 사후 로마에 왔다가 로토스 섬(島)의 수사가(修辭家)에게 웅변술을 배우고 다시 로마로 돌아와(전 70) 폼페이우스를 도와 마리우스의 상(像)을 재건하여 국민들의 호감을 얻었다. 그 뒤 재정관·안찰관·대신관·법무관·스페인 지사 등을 역임했다. 귀국하여 원로원과 대립(전 62). 기원전 60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공모, 제1차 삼두 정치를 성취시키고 집정관 만기 후 갈리아에 부임, 일대를 진압하고 브리타니아에 원정했다. 그후 폼페이우스와 결탁한 원로원이 군사령권의 포기, 군대의 해산을 명하자,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에 진격, 팔사르스에서 반대파를 분쇄하고 이탈리아를 지배하자 원로원은 그를 독재관에 임명했다(전 49). 이듬해 이집트로 원정, 클레오파트라를 원조하고 귀국하여 소아시아, 스페인, 아프리카에 전전(轉戰), 종신 집정관의 칭호를 얻어 독재적 권한을 발휘하여 율리우스력(曆)을 채용하고 빈민 구제, 식민지 건설 등 내치와 외교에 눈부신 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가 황제가 되려는 야욕을 보이자 반감을 얻게 된데다 더욱이 기원전 44년에 호민관을 모독함에 이르러 타도의 음모가 시작되고, 기원전 44년 드디어 원로원에서 습격을 받아 몸에 23곳에 상처를 입고 쓰러져 일생을 마쳤다. 그는 군인과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로마 제일의 웅변가로 그에 필적할 인물은 키케로뿐이었다.
시저
[편집]→ 카이사르
키케로
[편집]Cicero (전 106∼전 43)
로마의 정치가, 철학자, 웅변가, 도덕 철학적 수필가. 어려서 일류 학자로부터 수사학(修辭學), 철학 등을 배우고, 변호사로 개업했다. 기원전 79년∼기원전 78년 사이에 다시 아테네, 소아시아에 유학하고 귀국, 감찰관(전 69)을 거쳐 통령에 오르고(전 63), 카테리나 음모를 사전에 발견하여 원로원으로부터 ‘조국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기원전 60년 제1회 삼두정치가 성립되자, 로마에서 추방되었고 공화주의자의 중진으로서 카이사르에 반대하고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다. 내란 뒤에는 문필에 종사하고, 혼란한 공화정 말기의 로마에 살면서 전통에 충실한 보수파의 대표자로 일관, 제2차 삼두정치에 참가를 거부, 정적인 안토니우스에게 피살되었다. 그는 그리스의 데모스테네스와 병칭되는 로마 제1의 웅변가로 연설집을 남겼는데, 그의 글은 당대 일류이며 문체는 라틴어의 모범으로서 근대 유럽 여러 언어의 형성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의 철학과 수사학의 저술은 독창성은 없으나 그리스 학술의 로마 수입 및 학술용어의 번역으로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쳐, 아리스토텔레스 다음가는 중세 철학의 교사로 불린다.
안토니우스
[편집]Antonius(전 82∼전 30)
로마 정치가, 장군. 카이사르의 부장(副將)으로 각국을 정복. 카이사르가 죽은 뒤에는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회 삼두 정치를 실현하였다. 후에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에 매혹되었다가, 옥타비아누스와 악티온 해전(海戰)에서 패배, 자살하였다.
제2회 삼두정치
[편집]第二回三頭政治
카시우스, 브루투스 등의 카이사르 암살자는 카이사르의 부장(部將)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전 82
전 30)에게 추방당했고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추방되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으로부터 집정관 취임을 거부당하자 태도를 바꾸어 안토니우스와 화해했다. 두 사람은 중재자인 레피두스(Marcus Aemilius Lepidus, ?
전13)를 포함해서 ‘국가 재건을 위한 3인 위원’이 되었다. 제1회 3인 동맹은 비밀 협정이었으나, 두번째는 장군 정치가의 공공연한 거래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특권적 상층부의 지배, 원로원의 권위를 능가하는 개인 지배의 전주곡이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서방 제패
[편집]-西方制覇
기원전 42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전 63
후 14, 재위 전 27
후 14)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피(Philippi)에서 카시우스, 브루투스를 격파했다. 공통의 적을 잃은 두 사람은 다시 대립했으나 기원전 40년 안토니우스의 아내 후루비아의 죽음을 계기로 옥타비아누스는 누이를 그에게 시집보내어 화해를 재현하였다. 기원전 37년, 3인 동맹은 5년간 연장되고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와 서방의 속주, 안토니우스는 동방의 속주,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세력 범위로 삼았다. 옥타비아누스는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를 쳐서 서지중해의 제해권을 쥐었고, 또한 레피두스를 정복하여 아프리카를 차지하고 안토니우스와의 대결을 준비했다.
악티온 해전
[편집]-海戰
기원전 31년 9월 2일에 그리스의 서북부 악티온 앞바다에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와의 전쟁.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시저)의 동방정책(특히 파르티아 공격)을 추진하기 위하여 이집트의 부(富)에 주목했다. 아내와 이혼하고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결혼, 로마 영토 키프로스섬과 크레타섬 등을 선물했다.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이익을 무시하고 동방적 군주지배를 꿈꾸는 것을 비난하고 자기는 공화정치를 지킨다고 선언했다. 기원전 31년 악티온 연안의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 함대는 패전하여 두 사람은 이집트로 피신하여 자살했다. 이로써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지배권을 차지하게 되었고, 뒤에 로마제국의 첫 황제로의 발판이 되었다.
원수정의 성립
[편집]元首政-成立
기원전 29년에 로마에 개선한 옥타비아누스는 그가 주장해 온 ‘공화정의 재건’에 착수했다. 그는 내란 평정을 위한 전권을 반납하고, 원로원에서 첫째 자리인 프린케프스(Princeps, 筆頭議員)의 지위와, 아우구스투스(Augustus, 尊嚴者)라고 하는 칭호를 받았을 뿐 표면상으로는 집정관에 연속 취임하는 것까지 사퇴했다. 그러나 그는 공직에 따르는 직권을 장악했다. 호민관에는 취임하지 않았으나, 호민관의 직권을 얻어서 민회(民會)에서의 입법을 지배했다. 마찬가지로 프로콘술(Proconsul, 代理執政官)의 직권에 의해서 많은 속주를 관리했다. 그 밖에 선전(宣戰), 강화, 공직 입후보자의 지명권을 가졌다. 이만한 권력 집중도 결국은 군사력과 경제력의 덕분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수도의 근위병 9천 명, 속주군 30수만 명을 움직였고, 또한 그가 관리하는 속주로부터의 수입을 국고(國庫)가 아닌 원수금고(元首金庫)에 넣었다. 이러한 지배체제(元首政)가 존속한 것은 종래의 특권을 인정하여 노빌레스(Nobiles, 上層部)를, 최대 규모의 식민으로 병사를, 실무에서의 수입으로 에퀴테스(Equites, 騎士)를, 그리고 평화로 모든 사람들을 이끌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