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진의 쇠퇴와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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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쇠퇴와 몰락〔槪說〕[편집]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로 중국의 중앙집권적 전제 지배의 기초확립과 함께 여러 제도의 통일과 통제로 역사상 길이 남을 만한 업적을 쌓아 번영했던 진나라도 시황제의 죽음으로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시황제 죽음으로 인한 후계자 계승문제와 빈번한 원정과 장성(長城) 축조, 토목사업 등은 백성의 불만을 야기시키고 황제의 순행(巡幸) 도중 급사로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나 통일후 15년만에 멸망하고 만다.

시황제의 죽음과 후계자 다툼[편집]

始皇帝-後繼者-

전제군주에게 있어 후계자의 선정과 그 선정의 시기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그것이 빠르면 대립하는 권력자의 출현에 의해 전제군주의 권위가 상실되고, 지나치게 그 시기가 늦어지면 태자책립(太子冊立)을 둘러싼 다툼으로 인하여 끝내는 국가의 붕괴를 초래하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시황제의 경우에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망상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의 죽음과 이에 따른 다음 황제의 선정 등의 화제는 가장 꺼려해야 할 일로 여겨 멀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한 채로 기원전 210년 동방순행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병에 걸려, 그 해 7월에 사구(沙丘)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때 임종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막내아들인 호해(胡亥)와 승상인 이사(李斯), 그리고 중차부령(中車府令)이며 환관인 조고(趙高) 등 3인이었다. 이전부터 큰 야심을 품고 있던 조고는 이 호기(好機)를 놓칠세라 호해, 이사를 선동하여 음모를 꾸몄다. 시황제의 유조(遺詔)를 개찬(改竄)하여 영명한 맏아들 부소(扶蘇)와 명장 몽념(蒙恬)에게 사형을 선고함과 동시에, 그들은 시황제의 죽음을 감쪽같이 숨긴 채 수도로 돌아가 9월에 이르러 호해를 2세 황제로 옹립했다.그러나 범용(凡庸)한 2세 황제 호해는 완전히 조고의 괴뢰에 지나지 않았고, 정치의 실권은 조고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조고는 반대파의 왕족, 고관을 차례차례로 살해하여 조정 안은 공포정치를 방불케 했다. 이와 같은 중앙에서의 정치의 혼란은 지방에까지 영향을 미치어, 이윽고 진의 압정에 대한 민중의 분만(憤?)이 폭발하게 된다.

희생당한 농민들[편집]

犧牲-農民-

진(秦)의 시황제는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정치가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시황제의 이름을 드높이게 한 흉노정벌이나 만리장성의 건설 등 눈부신 여러 가지의 사업은 한결같이 인민, 즉 농민 대중의 커다란 희생에 의해서 완수된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 막대한 비용은 그들의 중세(重稅)로 마련되고, 방대한 숫자에 달하는 병력이나 노동력도 또한 그들의 의무에 의해 행해졌다. 문자 그대로 농민의 피와 땀의 결정이었다. 그 결과, 농촌에서는 일꾼을 빼앗기어 생산력은 위축되고, 그 뿐만 아니라 무거운 세금의 부담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시황제는 이와 같은 현실에 처한 농민의 곤궁이나 심정, 또는 거기에서 불러 일으켜질 위기라는 것을 직관하는 능력이 모자랐다. 그는 여전히 철저한 획일주의와 매우 혹독한 법률에 의해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고, 농민을 병역, 노역(勞役)에 징발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 방침은 2세 황제 시대가 되자 더욱더 가혹할 정도로 심하게 계승되었다. 그로 인하여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농민은 마침내 진조타도(秦朝打倒)를 부르짖고 일어나게 된다.

진승과 오광의 난[편집]

陳勝-吳廣-亂

진에 대한 반항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 것은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라는 두 농민이었다. 그들은 두 사람 다 허난성(河南省) 출신인데, 특히 진승은 집안이 가난하여 고용살이를 하며 남의 땅을 경작하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이미 농민 사이에 토지를 잃은 사람과 대토지 소유자와의 계층분화(階層分化)가 진행되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진승 등이 봉기한 것은 병사로서 징발되어 북변(北邊)을 수비하러 가는 도중의 일이었다. 2세 황제의 원년(元年) 7월, 진승은 오광 등 9백 명의 농민과 함께 북변의 어양(漁陽)을 향하고 있었다. 대택향(大澤鄕)까지 가자, 우연히 큰비가 내려 도로가 불통이 되고 기일까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게 되었다. 진나라의 법률에서는 기일까지 가지 못했을 경우에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참죄(斬罪)를 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때 진승과 오광은 모의(謀議)를 하여, 어차피 죽임을 당할 바에는 나라를 세우고 죽자고 봉기할 것을 결의했다. 두 사람은 공모하여 인솔자인 진나라 대장(隊長)을 죽이고 겁을 먹은 농민들에 대해서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씨가 있을 것이냐고 말하여 고무했다. 진승이 장군, 오광이 부장(副將)이 되어, 진말(秦末) 최초의 혁명집단이 탄생했다.그들은 대택향(大澤鄕) 주변의 여러 현(縣)을 공략하고, 불평하는 농민을 규합하면서 진격했으며, 진(陳)을 공격할 무렵에는 전차 7백 량(輛), 기병 1천 명, 보병 수백만 명의 대군(大軍)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하여 진(陳)을 점령하자,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진승은 민중에게 추대되어 왕위에 올라 진왕(陳王)이라 칭하고, 국호를 장초(張楚)라고 불렀다. 대택향에서 봉기한 지 불과 1개월도 안 되어서의 일이다. 그러나 진승 등은 봉기한 지 약 반년 만에 살해당하고 장초의 농민정권은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그들이 행한 혁명의 불길은 전국에 널리 퍼져나가 각지에서의 봉기를 촉진시켜, 얼마 안 가서 진제국을 타도하기에 이른다. 진승과 오광은 그 선구적 역할을 충분히 해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한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 봉기의 지도자로서 후세에 높이 평가되어 왔다.

유방과 항우의 대두[편집]

劉邦-項羽-擡頭

진승, 오광 등이 패배한 뒤에 봉기군(蜂起軍) 속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였다. 유방은 초(楚)나라 농민으로서 자(字)는 계(季)이며 패(沛)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이름도 모르고, 또한 출생연도도 분명하지 않은, 이른바 그 당시의 전형적인 농민계층의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의 유방은 성격이 활달하고 모든 일에 구애를 받지 않는, 시원스런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농사일을 싫어하여 제멋대로 방탕생활을 하면서 유협(遊俠)한 기질을 부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후 장년이 되어 패(沛) 근처의 사수(泗水)의 정장(亭長)으로 발탁되었다. 2세 황제 초에 그는 정장이라는 직분으로 죄수들을 이끌고 여산릉(驪山陵)의 조영현장(造營現場)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죄수들이 연달아 탈주하여 호송자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유방은 죄수들을 전원 석방해 주고, 자신은 고향의 산중에 들어가 도적의 두목이 되었다. 진승 등이 봉기를 일으켰다는 소문이 전해진 것은 마침 이때였다. 유방은 패의 민중과 협력하여 현령(縣令)을 죽이고 추대를 받아 패공(沛公)이 되어, 이에 군사를 일으키게 되었다. 때는 기원전 209년 9월의 일이다. 이때 항량은 사람을 죽이고 원수에게 항상 노림을 당하는 몸이 되어, 항우를 데리고 오(吳)에 망명하게 되었다. 이 망명지에서 특히 항량은 그 고장의 유지가 되어 힘을 기르고 있었다. 진승 등의 봉기에 관한 소식이 전해지자, 이전부터 초나라의 재흥을 원하며 그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항량은 항우와 함께 회계태수(會稽太守)를 죽이고 군사를 일으켰다. 때는 유방과 같은 9월의 일이다. 그리하여 양쯔강(揚子江) 하류지역을 평정하고, 진승 등의 군사와 합류하려고 강동(江東)의 자제 8천 명을 거느리고 양쯔강을 건너 북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홍문지회[편집]

鴻門之會

진승(陳勝)이 죽은 후 항량(項梁)은 초(楚)의 회왕(懷王)의 손자로서 심(心)이라는 사람을 내세워 똑같은 회왕이라고 일컫고 반진(反秦) 세력을 집결시켰다. 기원전 208년 8월 항량이 전사하자, 초나라 군사의 중심이 된 사람은 항우와 유방이었다. 9월이 되어 항우는 북로(北路)에서, 유방은 남로(南路)에서 함양으로 진격하게 되었는데, 이때 회왕은 맨 먼저 관중(關中)에 들어간 사람을 관중왕(關中王)으로 삼을 것을 약속했다. 항우가 거록(鉅鹿)에서 진군(秦軍)을 쳐부수고, 또한 진 나라 장수 장한(章邯)을 항복시키는 등 허난(河南) 지방의 곳곳에서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유방은 기원전 207년 10월에 한발 앞서서 우관(武關)을 돌파하여 함양을 점령하고 2세 황제 다음의 진왕(秦王) 자영(子?)을 항복시켜 관중을 지배했다.유방이 먼저 관중을 지배하자 격노한 항우는 총력을 기울여 단번에 한꾸관(函谷關)을 돌파하고, 12월에 홍문(鴻門)에 진을 쳤다. 이 험악한 양자의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유방이 사과하는 형식으로 열린 회견(會見)이 역사상 유명한 홍문지회(鴻門之會)이다. 항우 쪽에서는 이 기회에 유방을 죽일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항우의 우유부단한 태도로 말미암아 그 기회를 잃었으며, 유방은 부하의 필사적인 활약으로 손쉽게 호랑이 굴을 벗`어나 그후의 운명을 크게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그후 항우는 군사를 함양으로 진군시켜 진왕 자영(子?)을 죽이고 시황제의 여산릉(驪山陵)을 파헤쳐 진보재화(珍寶財貨)를 약탈하고, 아방궁(阿房宮)에 불을 질렀다. 그 불은 3개월에 걸쳐 계속 타올랐다고 하며, 진도(秦都) 함양은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이에 이르러 진(秦)은 시황제의 통일로부터 헤아려 3대(代),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