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인류 문화의 시작/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파르티아 왕국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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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왕국의 발전〔槪說〕[편집]

유목민(遊牧民)이었던 파르티아인은 세력이 늘어나 이란,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는데, 훗날 예술, 종교 등의 면에서 이란적인 특색이 짙어졌다. 이와 같은 혼합적 성격이 파르티아 문화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또한 파르티아 시대는 훗날의 사산조 시대에 이란 문화가 개화(開花)하기까지의 서아시아에서의 과도적(過渡的)인 한 시기로 볼 수 있다.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 왕국 세력의 후퇴와 함께, 동방 변경에서는 먼저 박트리아의 디오도토스가 분리하였고, 이어 기원전 247년 이란계 유목민 출신의 아르사케스가 독립하여 파르티아 지방을 지배했다. 이것이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왕국(전 247

후 226)의 출발이다. 그는 얼마 후에 전사하고, 아우인 티리다테스가 뒤를 이어 서방에 영토를 확장하여 도읍을 헤가톰필로스에 두었다. 그 후 미트리다테스 1세(재위 전 171

전 138?) 시대에 파르티아의 대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는 동으로는 박트리아 왕국, 서로는 셀레우코스 왕조를 쳐서 헤라트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하고, 티그리스강 동쪽 연안에 파르티아 후기의 수도 크테시폰을 건설했다. 기원전 2세기 후반, 동방에서는 박트리아 왕국이 멸망하여 대월지(大月氏)로 바뀌었고, 서방에서는 로마의 진출이 현저해졌다. 파르티아에서는 미트리다테스 2세(재위 전 123

전 87?)가 즉위하여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에까지 세력을 뻗쳐서 전성시대를 이어갔다. 그가 죽은 후 국내에 분쟁이 빈발하게 되고, 또한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둘러싼 로마와의 대립으로 고투를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53년의 카를라에 전쟁에서는 크라수스를 전사하게 하였으며 기원전 36년에는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대패(大敗)시켰다. 로마의 제정(帝政)을 시작한 아우구스투스는 화평을 희망하여 이후 약 1세기 동안은 파르티아와 로마의 관계가 비교적 평온했다.

아르사케스 왕조[편집]

-王朝 Arsaces

이란계(系) 기마유목민(騎馬遊牧民)이었던 파르티아인의 기원에 관해서는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본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카스피 해의 동쪽 스텝 지대에 사는 유목민으로 다헤족의 한 지족(支族)을 이루는 파르니(또는 아파르니)족이었다. 그들은 호라산, 즉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파르타바, 혹은 그리스인이 파르티아이아라고 불렀던 지역으로 침입하여 이 곳을 거점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그 원주민과 함께 파르티아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1세는 동방의 군사 식민지를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동이란의 유목민은 활동을 방해받고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 반경에 이르자,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력이 가장 약한 박트리아나 파르티아에서는 각각 사트라프(總督)였던 디오도투스, 안드라고라스가 배반하여 떠나갔다. 이러한 시기를 틈타 기원전 238년경에는 아파르니 족의 족장(族長) 아르사케스 1세가 파르티아에서 안드라고라스를 무너뜨렸다.아르사케스 1세의 뒤를 이은 사람을 공식적으로는 아르사케스라고 일컬으며, 아르사케스 왕조의 기년(紀年)에 의하면 그 기원(紀元)을 기원전 247년에 둘 수가 있다. 파르티아인은 원래 문화수준이 낮은 유목민으로, 미트리다테스 1세의 시대까지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 황제의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아케메네스 왕조나 셀레우코스 왕조가 지배했던 넓은 영역을 지배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파르티아는 그때까지의 지배자가 남겼던 제도에 의존해야만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조 시대에 이미 독립적인 경향을 지녔던 메디아, 엘리마이스, 페르시스 그리고 카라케네 등의 왕후(王侯)는 그대로 신종자(臣從者)로서 인정했다. 그 밖은 거의가 파르티아의 지배구조(支配構造)에서 기초가 되는 총독령(總督領)으로 삼아 황제의 일족이나 신하로 하여금 지배케 했다. 이 시대의 총독령은 초기 셀레우코스 왕조 시대에 비하면 소규모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더구나 총독의 직책은 세습(世襲)되었기 때문에 소황후(小王侯)와 구별하기가 어려워졌다.이와 같은 파르티아 제국의 중앙집권력(中央集權力)의 나약함은, 자주 일어났던 왕위 계승 다툼에 의하여 조장되었다. 이를테면 미트라다테스 2세 뒤에 아르사케스 왕조의 직계(直系)가 끊겼을 때 귀족들은 회의를 열어 후계자를 지명했다. 아케메네스 왕조 이후로 이란에는 7대 귀족이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으며, 그러한 귀족들이 파르티아 제국의 정치를 좌우하는 수도 많았다.파르티아 시대의 전형적인 도시는 원형(圓形)인데, 하트라 유적에는 중앙에서 사방으로 큰 길을 내어 사방에 성문을 설치한 그 형식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하트라의 태양신전에는 이완 형식의 건물이 있는데, 이 이완 형식은 서아시아에 보급되고 사산 왕조에도 계승되었다. 또한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대리석이나 석회암으로 만든 왕후상의 환조·부조 등이 있다.

파르티아인의 종교[편집]

-人-宗敎

파르티아인의 종교에 관해서는 아직도 충분히 해명되지 않고 있다. 처음에 그들은 유목민으로서 자연 숭배의 특징을 지녔다. 또한 구(舊) 니사의 발굴(發掘)로 보아, 그들이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그리스와 서(西) 아시아의 습합신(習合神)을 숭배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이란 종교의 특징이 조금씩 파르티아인을 사로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셀레우코스 왕조 시대에 페르시스에서는 조로아스터교를 받들고, 그 주신(主神)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하는 왕후(王侯)가 있었다.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대표적인 3신(三神)으로는 아후라 마즈다, 미트라, 아나히타가 있다. 이들은 파르티아 시대에도 이란의 사제계급(司祭階級)인 마기 승(僧)에 의해 제사되었다.미트라 신앙의 기원에 관해서는 충분히 밝혀지지 못하고 있으나, 미트라란 태양신, 진실, 죽음으로부터의 구제(救濟) 등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로마 제국에서는 황소를 죽이는 부조(浮彫)로 유명한 밀의종교(密儀宗敎)가 되었으며, 그리스도교와 함께 제국 안의 곳곳으로 번졌다. 아나히타 여신의 신앙도 이란에 뿌리를 깊이 내려, 그리스 이름으로 아르테미스 혹은 셈 이름으로 아나이아라고도 불려 이 역시 로마 제국에 번졌다.

파르티아의 중개무역[편집]

-仲介貿易

파르티아는 셀레우코스 왕조 시대보다도 더욱더 국제성을 띠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漢)의 서진(西進), 로마의 동진(東進)으로 세계적인 경제의 교류권(交流圈)이 나타났기 때문이며, 그 주요 육로(陸路)는 실크로드(비단길)라고 불렸다. 기록에 의하면 파르티아는 로마보다 먼저 한(漢)과 교섭을 가졌고, 안식(安息)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의 무제(武帝)가 서역(西域)에 장건(張騫)을 파견했던 일은 유명하거니와, 장건의 안식에 대한 보고는 『사기(史記)』의 「대원전(大宛傳)」에서 볼 수 있다.즉, ‘안식은 대월지(大月氏)의 서쪽에 위치하며, 크고 작은 많은 성이 있는 대국(大國)이다. 그리고 왕의 초상을 새긴 은화(銀貨)가 사용되며, 왕이 바뀌면 다시 고쳐 주조한다.그리고 문자는 가죽, 즉 양피지(羊皮紙)에 가로로 쓰고 있다’라고 전하고 있다.또한 『한서(漢書)』의 「서역전(西域傳)」에 의하면, 무제(武帝)는 안식으로 사절을 보내고, 그 사절이 귀국할 때 함께 따라와서 한을 방문한 안식의 사절은 무제에게 큰 새(타조)의 알과 이간(犁?)의 현인(賢人:魔術師)을 선사했다고 전해진다. 이 이간이라는 지명은 분명치 않으나, 아마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인 듯싶다. 또한 이 무렵에 서역(西域)에서는 갖가지 곡예(曲藝)가 유행하고 있었다.1세기에 이르자 제정(帝政) 로마의 번영은 제국(帝國) 주변의 경제 활동을 더욱 자극하여 동서간의 교섭도 활발해졌다. 기원후 97년 화제(和帝) 때에 서역도호(西域都護)였던 반초(班超)는 부하인 감영(甘英)을 대진(大秦)으로 파견하려 했으나, 감영은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했다. 이때의 대진이 로마였는지 아니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였는지 혹은 그 밖의 다른 곳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한편, 대진에서도 언제나 한(漢)으로 사절을 보내려 했으나, 안식은 한의 증채(繒綵:견직물)를 대진으로 보내는 중개무역을 유지하기 위해서 항상 그것을 방해했다. 166년 환제(桓帝) 때에 이르자 대진왕(大秦王) 안돈(安敦)이 해로(海路)로 일남(日南)에서 사절을 보내어 상아(象牙), 서각(犀角), 대모(玳瑁)를 선사하였음이 『후한서(後漢書)』의 「서역전(西域傳)」에 기록되어 있다. 이 대진왕 안돈은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파르티아는 중개무역으로 이익을 얻고 있었고 왕들은 도로와 수송 수단의 개선과 거래 정상화에 노력하였다.무역 상품에 대한 과세는 국가 수입의 극히 중요한 원천이었다. 로마에 운반된 상품으로서는 중국의 비단 외에 후추·향료·상아·보석 등의 값비싼 사치품이 있었고, 로마로부터는 청동기유리제품·포도주·기름·금 등을 가지고 왔다.

박트리아[편집]

Bactria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소련의 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 등으로 이루어진 고대 그리스인이 세운 나라. 아무다리아강 중류지역의 비옥한 지역을 포함하여 중국·인도·서방을 잇는 내륙 교역로로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 시대에는 박트리아주(州)로 속령(屬領)이 되어 그곳을 통해 시베리아의 금이 유입되기도 했다. 알렉산더 제국이 붕괴한 뒤, 셀레우코스 1세가 세운 시리아 왕국이 쇠퇴한 틈을 타서 디오도토스라는 유력자가 중앙으로부터 독립하여 그리스·인도·이란인들로 구성된 독립왕국 박트리아를 세웠다. 이 박트리아는 비옥한 오아시스로서 일찍부터 집락(集落)이 발달하고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하에서는 확실히 변경이었으나, 그리스인은 ‘이란의 보석’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리스나 로마의 작가가 ‘1천의 도시인 박트리아’라고 말했던 것은 오아시스 지역에서 성벽을 둘러싼 도시적 집락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도시는 농업이나 통상(通商)으로 경제력을 갖추고 그리스 문화와 어울렸기 때문에 박트리아 문화를 낳았다. 지금의 발흐에 해당하는 박트라를 수도로 정한 후 농업과 인도 교역으로 부를 쌓아 약 40명의 왕을 배출하였는데, 특히 데메트리오스 1세 때에는 대제국으로서의 세력을 떨쳐 한때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까지 세력이 미쳤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의 동정(東征)을 틈타 유크라티데스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된 후 끊임없는 왕위 찬탈전으로 점점 쇠퇴하였다. 서쪽에서의 파르티아의 침입과 북쪽에서의 대월지(大月氏)의 침입으로 왕국은 결국 멸망하였다. 이 지역의 일부를 근거로 나라를 세운 쿠샨족은 카니슈카왕 때 가장 번영하였고, 카니슈카시대에 간다라식 불교미술이 성립되어 불전(佛典)의 결집이 행해졌다. 박트리아에서는 그리스·이란·인도의 여러 문화가 융합되었다.

실크로드의 대상도시[편집]

-隊商都市

건조지대에 점재하는 오아시스 도시 가운데, 특히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대상교역(隊商交易)으로 말미암아 번영한 고장을 대상도시라고 부른다. 즉 사막의 항구도시를 말한다. 여기에는 신전(神殿)·왕궁(王宮)을 중심으로 상품 거래소, 대상 숙사가 들어서고 극장 등의 오락 시설도 갖추어졌으며, 대상을 유목민(遊牧民)들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경비대가 편성되었다. 도시 재원(財源)의 대부분은 대상들의 수송 물자에 부과되는 관세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대상교역업자가 경제상의 실력자가 되고, 나아가서는 정치상의 권력자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종교상의 권위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1세기부터 3세기에 결쳐 동(東) 아시아에 한제국(漢帝國), 인도 북부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쳐서 쿠샨 제국, 서(西) 아시아에 파르티아 제국, 유럽에 로마 제국이 군림하고, 동 투르키스탄,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등에 수많은 오아시스 도시가 성립되었다. 이들을 잇는 교통로가 이른바 실크로드로서, 중국제 견직물을 비롯하여 각종의 다양한 문물이 오가고, 오아시스 도시에는 대상도시라고 불리는 것이 잇달아 출현하였다.이를테면, 아카바 만(灣) 어귀 북방에는 아라비아 계(系)의 나바타이인(人)이 세운 페트라가 동방(東方)의 사막 횡단로와 홍해(紅海)·지중해(地中海)를 연결하는 교역에 의하여 번영을 누렸다. 또한 파르티아가 군사·교역의 요지에 세운 하트라는 1세기에 메소포타미아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고 일컬어진다. 그리고 106년, 페트라가 로마 군(軍)에게 점령된 뒤에는, 시리아 사막의 한복판에 있는 팔미라가 서 아시아의 일대 교역 중심지가 되고, 3세기 후반에 팔미라 여왕 제노비아는 유프라테스 강으로부터 나일강에 걸친 왕국을 수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