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봉건제도와 이슬람 문화/당의 멸망과 5대 10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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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멸망과 5대 10국 시대〔槪說〕[편집]

안사의 난(755-763)을 고비로 당의 국위는 급속도로 쇠퇴했으며, 지방의 절도사가 군정·민정·재정의 실권을 쥐고 독립국처럼 되어 버렸다. 그에 덧붙여 이민족의 침입, 환관 세력의 횡포가 현저해졌으며, 사회 불안과 재정의 궁핍으로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특히 875년에 일어난 황소(黃巢)의 난은 10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중국 전토를 유린했으므로 당은 거의 지배력을 잃어버렸고, 907년에는 본래 황소의 한 무장(武將)이었던 개봉의 절도사 주전충(朱全忠:後梁의 太祖)에게 멸망당했다. 그 결과 중국의 통일은 명실공히 깨어져 버리고 5대 10국의 군벌 쟁패 시대로 되었다.5대 10국 시대(907-960)의 근 54년간에는 정권의 교체와 난립이 아찔할 정도로 전개되었다. 화북에서는 주전충이 세운 후량을 비롯해서 후당·후진(後晉)·후한(後漢)·후주(後周)의 5왕조가 차례로 교체하여 5대라 불리고, 그 외의 지역에서는 오(吳)·초(楚)·남당(南唐) 등의 10여 제국이 분립 흥망하였으므로 5대 10국이라 불린다. 이들 5대 10국의 건설자는, 남당을 제외하고 모두 절도사 등의 무장이며, 그 중에는 후당·후진·후한과 같이 이민족 출신도 있었다. 그들은 많은 심복을 의아(義兒)로 맞아 아군(牙軍)이라 부르는 친위대를 조직하여 무력의 강화를 꾀하고 서로 침벌 항쟁을 되풀이했다. 그 때문에 사회 질서는 문란해지고 정치의 부패, 도의의 퇴폐가 현저했으며, 5왕조 11군주를 섬기고 항상 재상의 자리를 유지했던 풍도(馮道)와 같은 인물이 나오기도 했다. 그간 당대부터의 문벌 귀족은 몰락하고 그에 대신하여 절도사와 연결지어진 일반 호족이나 대상인 등의 신흥 토지 소유자가 대두되고 전호(田戶, 小作人)에 의한 장원제도가 점점 발달하였다.한편 권력의 지방분산화는 지방의 개발을 촉진했고 지방산업의 발달과 함께 상업 활동도 왕성해져서 도시의 근교나 지방에는 초시(草市)라 불리는 정기시장이 열리게 되었다. 문화면에서도 당(唐)대에 번영한 중앙 문화가 지방에 보급되었으며 지방 문화의 발생을 촉진시켰다. 특히 쓰촨의 전촉(前蜀)·후촉(後蜀)의 회화 및 인쇄술이나 금릉(金陵, 南京)에 도읍을 둔 남당의 회화·문학·음악 등에 현저한 발달이 보였으며 어느 것이나 다음 송대 문화가 융성할 기초가 되었다. 또 여자의 발을 작게 만드는 전족(纏足)의 풍습은 남당에서 발생했다는 설도 있다. 960년 5대의 최후인 후주의 무장 조광윤(趙匡胤, 宋太祖)이 송 왕조를 세우자 여러 나라는 차례로 병합되어 중국은 또다시 통일되었다. 당말의 5대 10국 시대는 일반적으로 '당·송의 변혁기'라고 불리며 중국 역사상 중요한 전환기이다.


 국명


건국자


수도


흥망연대








오월

전촉

후촉

남한

남당

형남

북한


양행밀

마  은

왕심지

전  류

왕  건

맹지상

유  은

이  변

고계홍

 숭


양주

담주

복주

항주

성도

성도

광주

금능

강능

진양


902~937

907~951

909~945

907~978

907~925

934~965

917~971

937~975

924~963

951~979

감로의 변[편집]

甘露-變

당나라 문종 때인 835년에 일어난 변란이다. 환관(宦官)의 발호(跋扈)가 심해져 관료파 재상 이훈(李訓)이 절도사(節度使) 정주(鄭注)와 더불어 환관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궁원에 감로가 내렸다고 한 다음 환관들이 감로를 보러 간 틈을 타 주살하려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도리어 환관의 군사들에게 주살되었다. 이후 환관들의 횡포가 더욱 빈번하여 당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황소의 난[편집]

黃巢-亂 당말 황소에 의하여 지도된 농민반란(875

884). 당 왕조 멸망의 직접 원인이 되었다. 이 난의 지도자였던 왕선지(王仙芝)와 황소는 모두 소금 암상인이었다. 이들은 소금 밀매에 의하여 부를 축적하고 다수의 무뢰한을 양성하여 도당을 만들었다. 조정에서는 환관이 권력을 장악하고 지방에는 군벌이 발호하던 9세기 후반, 전국에서 농민의 도망이 잇달아 발생하고 각지에서 농민과 군대의 반란이 쉴새없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서도 875년에 산둥(山東)에서 일어난 황소(黃巢)의 난(亂)은 곧 전국적으로 퍼져 당의 지배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875년 왕선지(王仙芝)가 하북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황소는 이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왕선지의 사후 그 잔당까지 모아 유민이나 빈궁 농민을 흡수하면서 쓰촨을 제외한 중국 전토를 전전했다. 880년 수도 장안에 들어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국호를 대제(大齊)라 칭했다. 그 후 이극용(李克用) 등의 당군에게 반격을 받고 장안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도망했는데 884년 산둥의 태산(泰山)에서 사망했다. 그가 죽음으로 인해 전후 10년에 걸친 대란(大亂)이 끝났지만, 이 난을 계기로 당 왕조는 완전히 지배력을 잃고 약 10년 후에 멸망했다.907년에 황소의 부하였던 주전충(朱全忠)이 당을 멸망시키고 후량(後梁)을 세움으로써 이에 5대(代) 10국(國)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당이 종언과 함께 남북조 이래의 귀족사회도 또한 완전히 붕괴되었다. 3백년 가까이나 동아시아 역사세계에 군림했던 당조의 쇠퇴와 멸망은 이웃 여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주전충[편집]

朱全忠 (852

912, 재위 907

912)

5대 최초의 왕조 후량(後梁)의 초대 황제·태조. 처음에는 황소의 난에 황소를 따랐지만 후에 황소를 배반하고 다수의 부하를 데리고 당 왕조에 귀순하여 그 공으로 변 절도사가 되고 계속해서 양왕(梁王)으로 책봉되었다. 903년 소종(昭宗)의 의뢰를 받고 장안에 들어가 횡포를 극한 환관을 대학살, 다음해 황제를 받들고 뤄양에 천도했으나 소종도 살해하였으며, 또다시 907년에는 당 왕조 최후의 황제 애제(哀帝)를 폐위하여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양(梁, 後梁)이라 칭하고 개봉을 도읍으로 했다. 그러나 각 지방에는 그에게 승복하지 않는 군벌이 할거하고 있었으며, 특히 산시의 이극용(李克用)과 그의 아들 이존욱(李存勖)은 주전충과 최후까지 다투었다. 912년 양자인 주우문(朱友文)을 후계자로 하려다가 친아들 주우규(朱友珪)에게 살해되었다.

대운하와 도시의 번영[편집]

大運河-都市-繁榮

907년에 당대의 마지막 천자 애제(哀帝)로부터 선양(禪讓)된 형식으로 황제가 되어 후량(後粱)을 세운 주전충은 태조(太祖)라 불린다. 주전충이 이러한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은 지리(地利)를 얻은 변주(?州)의 절도사로서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 양제가 황하와 양쯔강을 세로로 관통하는 대운하를 건설하여 중국의 대부분을 연결할 수 있는 운하망(運河網)을 완성시킨 뒤부터 대운하 연변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크게 중요성을 갖게 되었으며, 그 부근에 신흥도시가 발달되어 번영을 누렸다. 그 가운데서도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것이 양쯔강과 대운하의 교차점에 있는 양조우(揚州)였고, 군사상의 요충지가 된 것이 황하와 대운하의 교차점에 있는 변주(?州:開封)였다.당대 후반기에 강남(江南)의 경제발전에 따라 강도(江都)라고도 불렸던 양조우는 북쪽으로 가는 강남 물자의 대집산지인데다 양쯔강 어귀와도 가까웠기 때문에 외국 무역항으로서 공전의 발전을 이룩했다. 아라비아 상인도 다수 왕래하여 쓰촨의 청두(成都)와 함께 양일익이(揚一益二)라 불리는 번화한 도시가 되었다.양조우에서 강남의 재화를 수도 장안으로 운반할 때는 반드시 배가 변주를 경유해야만 했을 뿐만 아니라, 대운하와 황하는 수위(水位)가 다르기 때문에 운하를 북상한 배는 변주에서 일단 화물을 내렸고, 그 화물은 다른 배에 실려 황하를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이와 같이 천하의 재물이 집산되는 변주의 절도사가 된 주전충은 재력과 무력을 아울러 지배하여 당을 멸망케 했다.

북의 5왕조와 남의 10국[편집]

北-五王朝-南-十國

당의 멸망은 중국 내외에 연쇄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국내 각지의 군벌과 국외의 이민족 등, 지금까지 기회를 엿보고 있던 내외의 할거(割據)세력이 앞을 다투어 자주 독립을 부르짖게 되었다. 북방에서는 몽골계통의 거란(契丹) 민족이 추장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를 중심으로 민족적 통일을 완수하고 요(遼)를 세워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강국이 되었다. 중국 내부도 남북으로 크게 분열되었다. 이때 남북의 경계선이 된 것은 역시 화이수이(淮水)였다.화이수이 이남에서는 먼저 오늘날의 장쑤(江蘇), 안후이(安徽), 장시(江西) 등 3성(省)을 중심으로 양행밀(楊行密)의 오국(吳國)이 최대의 세력을 떨쳤고 또 저장성(浙江省) 일대에서 전류(錢?)의 오월국(吳越國), 후난성(湖南省)에서 마은(馬殷)의 초국(楚國), 푸젠성(福建省)에서 왕심지(王審知)의 민국(?國), 광둥성(廣東省)에서 유엄(劉嚴)의 남한국(南漢國), 그리고 쓰촨성(四川省)에서 왕건(王建)의 전촉국(前蜀國)과 뒤이어 후촉국(後蜀國)이 각각 독립하고 양쯔강 중류 후베이성(湖北省)의 형주(荊州) 부근에서는 고계흥(高季興)이 형남국(荊南國)이란 반독립 정권을 수립했다. 이와 같이 화남(華南)에서는 독립·반독립의 정권이 10국을 헤아리게 되고, 한편 화북(華北)에서는 후량을 비롯하여 단명한 다섯 왕조가 흥망을 되풀이했기 때문에 이 시기를 5대 10국 시대(五代十國時代:907∼960)라 했다.화북의 카이펑(開封:?州)에 수도를 둔 주전충의 후량 왕조에 있어서 가장 큰 위협이 된 것은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을 근거로 한 투르크계 사타(沙陀) 부족의 이극용(李克用) 정권, 즉 진(晋)이었다. 원래 이극용은 황소의 난 평정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이었다. 이극용이 죽자 그 아들 이존욱(李存?)이 진왕을 계승하여 황하를 사이에 두고 후량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마침내 승리를 거두고 카이펑에 들어가 후량을 멸망시켰다. 그가 후당(後唐:923∼936)의 장종(莊宗)인데, 그는 당의 부흥을 이상으로 하여 도읍을 서쪽 뤄양으로 옮겼다. 얼마후 이극용의 양자 이사원(李嗣源)이 군대의 옹립을 받고 제위에 올라 명종(明宗:재위 926∼933)이라 불렸다. 그가 죽은 뒤 제위를 둘러싼 내분이 일어났는데, 이를 틈타 명종의 사위 석경당(石敬?)이 거란의 원조를 받아 타이위안에서 군사를 일으켜 뤄양에 들어가 후당을 멸망시켰다. 그가 후진(後晋)의 고조(高祖:재위 936∼942)로서 그는 도읍을 다시 카이펑으로 옮겼다.고조는 우선 거란에 대해 신(臣)이라 칭하고 원군의 보답으로 오늘날의 베이징(北京), 다퉁(大同)을 포함하는 소위 연운(燕雲) 16주의 땅을 할양하는 외에 세폐(歲幣)로서 해마다 30만 필의 비단을 바치기로 했다.연운 16주를 얻고 국호를 요(遼)라 한 거란의 태종(太宗)은 946년에 이르러 대거 남침을 개시하여 카이펑을 함락하고 후진을 멸망시키고 말았다. 이때 요 태종은 그대로 카이펑에 머물며 중국을 지배하려 했으나 한민족(漢民族)의 저항을 받아 그대로 돌아갔다. 그후 사타 부족 출신인 타이위안의 군벌 유지원(劉知遠)이 후한(後漢:947∼950)을 세웠으나 불과 4년 만에 망하고, 장군 곽위(郭威)가 군대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 이것이 5대의 마지막 왕조 후주(後周)의 태조(太祖)였다. 이때 후한의 일족인 유숭(劉崇)은 타이위안에서 따로 북한국(北漢國)을 세웠다.혼란·분열·할거를 거듭하던 중국사회는 후주(後周)에 이르러 겨우 통일의 기운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자의 근위병인 금군(禁軍)의 발달이 중국을 재통일로 이끈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후주에서는 태조가 죽은 뒤 양자 시영(柴榮)이 즉위했는데, 이가 세종(世宗:재위 954∼959)으로서 5대의 유일한 명군(名君)이었다. 그는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남당(南唐)을 공격하여 양쯔강 이북 지역을 점령하고 남당을 보호국으로 삼았다. 이로써 50년 동안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천하의 형세가 무너져 급전 직하, 통일로 향하게 되었다. 얼마후 후주로부터 중국 역사상 마지막 선양을 받은 근위군(近衛軍) 대장 조광윤(趙匡胤)이 등장하는데, 그가 세운 송왕조(宋王朝)에 의해 천하통일이 성취된다.화북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진 다섯 왕조는 불과 54년 동안에 13인이나 되는 황제를 배출시켰다. 5대는 문자 그대로 무인(武人) 전성의 시대로서 지방관도 거의 무인이 차지했고, 문관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그만큼 쇠약해졌다. 따라서 문관의 책임도 가벼워 풍도(馮道) 같은 인물은 후당, 후진, 후한, 후주 등 4왕조에서 10인의 황제를 섬기며 30년이나 고관을 지냈는데 재상을 역임한 것만도 20년간이나 되었다.5대 10국의 분열시대에는 지방에서 새로운 문화가 발생하여 송(宋) 이후의 문화적 기초가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쓰촨의 청두(成都)를 도읍으로 삼았던 촉(蜀)과 난징(南京)에 도읍했던 남당(南唐)의 문화가 특히 발달했다. 촉에서는 문화보급의 기초가 된 목판 인쇄술과 제지술이 발달했으며, 남당에서는 당시(唐詩)를 대신하여 사(詞)라 불리는 문학이 성행했고, 또 동원(董源), 거연(巨然) 같은 화가가 나와 강남의 자연을 묘사한 산수화(山水畵)를 그려 훗날의 남종화(南宗畵) 양식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

후량[편집]

後梁

5대 최초의 왕조(907

923). 907년 본래 황소의 부하였던 주전충이 당을 멸망시키고 카이펑(開封)에 건국. 당의 귀족정치에 대신하여 최초로 무인이 지배하는 왕조를 세웠는데 2대 17년으로 후당의 이존욱에게 멸망당했다.

후당[편집]

後唐

5대 두번째의 왕조(923

936). 투르크계 사타족(沙陀族) 출신의 이존욱이 건국, 뤄양을 도읍으로 했다. 이존욱은 당말 황소의 난 평정에 공이 있었던 하동 절도사 이극용의 아들. 923년 위주(魏州:河北省大名縣)에서 즉위하여 후당의 장종이 되고 동년 아버지 때부터의 숙적 후량을 멸망시키고 도읍을 뤄양으로 정했다. 다음해 명종 치세 8년간은 비교적 평화가 계속되었지만 명종이 죽은 후 계사(繼嗣) 다툼이 일어나 936년 거란(契丹)과 연합한 부하 무장 석경당(石敬?)에 피살되어 4대 13년으로 멸망했다.

장종[편집]

莊宗 (885∼926)

중국 5대의 후당(後唐)의 시조. 이름은 이존욱(李存?). 진왕(晋王) 이극용(李克用)의 큰 아들. 908년에 부왕의 사망 후 진왕에 즉위, 923년에 위주(魏州:河北)에서 재위에 올라 진을 당(唐)이라 하고, 후량(後梁)을 멸망시켜 낙양(洛陽)에 도읍하였다. 그는 무용(武勇)이 우수하여 어려서부터 가무음곡(歌舞音曲)을 즐겼으나, 후량을 멸망시킨 후부터 사치에 빠져 민심을 잃게 되어 926년에 친군(親軍)의 장(將) 곽종군(郭從謹)에게 살해당하였다.

후진[편집]

後晉

5대 세번째의 왕조(936

947). 후당의 무장으로서 투르크계 사타(沙陀)족 출신 석경당이 카이펑에 건국했다. 석진(石晉)이라고도 한다. 석경당은 후당을 섬겨 하동 절도사가 되었는데 936년 북쪽 거란과 연합하여 후당을 멸망시키고, 그 대신 후진을 세웠다. 거란에는 신하로서의 예를 취하고 연운(燕雲) 16주(現在의 北京·大同을 중심으로 하는 河北·山西의 북부를 포함하는 지역)를 할양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매년 비단 30만 필을 보냈으나 다음 출제(出帝)는 거란에 반항했다가 반대로 정벌 당해 후진은 2대 11년으로 멸망했다.

후한[편집]

後漢

5대 네번째의 왕조(947

951). 후진의 무장이며 투르크계 사타족 출신인 유지원(劉知遠)이 건국, 카이펑을 도읍으로 했다. 유지원은 하동 절도사로서 진양(晉陽:山西省太原縣)의 수비를 맡고 있었는데 947년 거란이 수도 카이펑으로 침입하여 후진을 멸망시키고 북으로 돌아간 후 카이펑에 쳐들어가서 대신 후한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그는 재위 1년으로 죽고 다음 은제(隱帝)도 즉위한 이듬해 살해됨으로써 후한은 2대 4년으로 멸망했다. 5대 중에서 가장 단명한 왕조이기도 하다.

후주[편집]

後周

5대 최후의 왕조(951

960). 후한의 무장 곽위(郭威)가 카이펑에 건국. 곽위는 거란을 방어하기 위해 천웅군(天雄軍) 절도사로 업도(?都:河北省大名縣)를 수비하고 있었는데 950년 수도 카이펑에서 은제(隱帝:後漢 제2대 황제) 측근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자 남하하여 이를 진압, 다음해 여러 장수들에게 추대되어 후주의 태조가 되었다. 다음대 세종은 5대 중 유일한 명군이라 전해지며, 내정을 정돈하고 후촉(後蜀)·남당·거란을 공격하여 중국 통일의 대업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공제(恭帝)가 어렸기 때문에, 대신 장군 조광윤(趙匡胤, 宋太祖)이 천자로 옹립되어 후주는 3대 10년으로 멸망했다.

양행밀[편집]

楊行密 (852∼905)

5대 10국의 하나인 오국(吳國)의 태조. 여주합비(廬州合肥) 사람. 자(字)는 화원(化源). 처음에 군도(群盜)에 끼어들었다가 군대에 응모하여 서북의 수비를 맡아 대장이 되었다. 그 후 병란(兵亂)을 일으켜 여주(廬州)를 점거하고 883년 여주 자사(刺史)가 되었다.각지에 전전(轉戰)하여 양저우(揚州)로 들어가 회남(淮南) 절도사로 임명되고 902년 오왕(吳王)이 되어 저장(浙江)에 독립하였다. 사후 장자인 악(渥)이 계승하였는데 나라는 4대 36년, 937년에 멸망하였다.

전류[편집]

錢? (852∼932)

5대 10국의 오월(吳越)의 건국자. 자(字)는 구미(具美), 항저우(杭州) 임안(臨安) 사람. 시중의 무뢰한으로 소금장사를 하였으나 희종(僖宗) 때 내란진압에 공을 세웠으며, 황소(黃巢)의 난 토벌에도 참가하여 수훈을 세워 항주자사(杭州刺史)가 되었다. 그 후 진해절도사(鎭海節度使)·진동절도사(鎭東節度使)를 겸하고, 양절(兩浙) 지방을 영유하고 항저우에 치소(治所)를 두었다. 907년 오월왕(吳越王)이 되고, 후당(後唐) 장종(莊宗) 즉위 때, 제왕(帝王)에 준하는 예우를 받았다.

왕건[편집]

王建 (847∼918)

5대 10국의 하나인 전촉(前蜀)의 건국자. 고조(高祖)라고 칭한다. 허주무양(許州舞陽) 출신. 자(字)는 광도(光圖). 염적(鹽賊)에서 병졸(兵卒)이 되었다가 황소(黃巢)의 난 토벌에 공을 세워 장수가 되었고, 환관(宦官) 전영자(田令孜)의 양자가 되었다. 당시 동피서도(東避西逃)하고 있던 당(唐)의 희종(僖宗)을 보호한 공으로 쓰촨(西川)의 한 자사(刺史)로 영전, 쓰촨 각지를 공략하고 891년 청두(成都)에 있던 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 진경선(陳敬瑄)도 항복시켜 드디어 당(唐)으로부터 검남서천(劍南西川) 절도사에 임명되었고, 이후 쓰촨의 경략에 힘썼다. 901년까지에 동천(東川)·산남(山南)의 땅을 합쳐 거의 쓰촨 전토를 통일하였다.

903년 촉왕(蜀王)으로 봉함을 받았으나 양(梁)의 건국과 함께 대촉(大蜀)이라 잠칭하고 청두(成都)에 도읍하였다(907).당말(唐末)부터 중원(中原)의 귀권세족(貴權世族)이 쓰촨으로 도피하는 자가 많았는데, 왕건은 그들을 우우(優遇)하였으므로 국토의 풍요와 더불어 촉의 문화는 고도로 발달하였다.

맹지상[편집]

孟知祥 (874∼934)

5대 10국의 하나인 후촉(後蜀)의 고조(高祖). 형주용강(刑州龍岡) 사람. 자(字)는 보윤(保胤). 후당(後唐)의 장종(莊宗)이 전촉(前蜀)을 멸하였을 때 성도윤(成都尹)으로 뽑히었다. 그 후 병력을 기르고 몰래 독립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조정에서도 경계하여 여러 가지 모략을 행하였으므로 도리어 경화(硬化)하여 930년 드디어 반기를 들었다. 932년 촉(蜀)의 전토를 영유하고 이듬해 촉왕으로 봉해졌으며, 934년 즉위하였다. 3남 창(昶)이 뒤를 이었다.

형남[편집]

荊南

5대 10국의 하나. 남평(南平) 또는 북초(北楚)라고도 한다. 후베이(湖北) 3주(州)를 영유하며, 수도를 강릉(江陵)에 두었다. 건국주(建國主)인 고계흥(高季興)은 당말(唐末) 후량(後粱:5대)의 태조인 주전충(朱全忠)을 섬기어 907년 형남절도사가 되었고, 말제(末帝) 때에 발해왕(渤海王)에 봉해졌다. 예의(銳意) 내치에 힘써 병사를 길렀으며, 후당(後唐:5대)의 장종(莊宗)에 입조(入朝)하여서는 924년 남평왕으로 봉함을 받았다. 명종(明宗) 때 후당을 배반하고 오(吳:10국)에 복속하였다. 형남은 5대 여러 나라 중 국토가 가장 작았기 때문에 2세(世) 종회(從誨)는 중원(中原)의 후당(後唐)·후진(後晉)·후한(後漢) 및 주위에 있는 오(吳)·남한(南漢)·민(민)·후촉(後蜀)에까지도 신하(臣下)의 예의를 취하여 무역의 이(利)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963년 호남을 토벌하려는 송(宋)의 태조(太祖)에게 가도멸괵(假道滅괵)될 때까지 독립적인 지위를 보존하였다.



국명



건국자



수도



흥망연대









오  월

전  촉

후  촉

남  한

남  당

형  남

북  한



양행밀

마  은

왕심지

전  류

왕  건

맹지상

유  은

이  변

고계흥

유  숭



양주

담주

복주

항주

성도

성도

광주

금릉

강릉

진양



902-937

907-951

909-945

907-978

907-925

934-965

917-971

937-975

924-963

951-979



10국

군벌[편집]

軍閥

사병집단(私兵集團)의 힘에 의해 특정 지역을 지배하는 지방 군사 세력을 말한다. 5대는 통일 정권이 없는 군벌 할거 시대였다. 당의 안사의 난(755

763) 이후 변경이나 지방에 설치된 절도사는 관내의 군(軍)·민(民)·재(財)의 3권을 장악하고 막대한 사병을 양성하여 강대한 지방 군벌로 화했다. 907년 당 왕조의 멸망을 계기로 절도사가 각지에서 계속 독립하여 이후 송나라 건국(960)까지의 54년간 군벌 정권의 심한 대립 항쟁이 행해졌다.

의아[편집]

義兒

양자의 의미로 따로 의자(義子) 또는 가자(假子)라고도 불리며, 5대의 여러 군벌간에 유행했다. 5대의 각국 군주는 실자(實子)가 있으면서도 많은 비(非)혈연자를 의아로 맞아 의제(擬制)의 친자식 관계를 맺고 자기 지배권의 유지, 강화를 도모했다. 후당의 건국자 이존욱의 아버지 이극용은 100여 명의 의아를 양육하고 있었다고 하며, 또 후당의 명종이나 후주의 세종과 같이 의아로서 황제가 된 자들도 있었다.

아군[편집]

牙軍 당말 5대의 절도사 휘하의 친위대로서 군대의 중핵을 이룬다. 절도사의 거성(居城)인 아성을 수비하는 군대라는 의미에서 아군(牙軍)이라 이름지어진 것이다. 실업자인 하급관리·몰락 농민·도둑·죄인·무뢰배 등을 모아 조직된 것이지만 절도사와는 굳은 주종관계를 맺어 아장(牙將)·아리(牙吏)·아졸(牙卒) 등의 계급이 있었으며 큰 세력을 갖고 있었다. 5대의 여러 정권은 아군의 동향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아서 절도사는 누구나 아군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풍도[편집]

馮道 (882

954)

5대의 정치가. 군벌 정권의 혼란 시대에 후당·후진·요(遼:契丹)·후한·후주의 5왕조 11군주를 차례로 섬겨서 항상 재상의 지위를 유지했으므로 후세 사람들에게 무절조·파렴치한의 대표적인 인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난세에 처하여 민중 생활의 안정을 잘 보살폈으므로 사람들로부터 관후한 어른이라고 칭찬을 받기도 했다. 또 경서(經書) 인쇄로는 최초로 『구경(九經)』의 간행 사업을 벌였는데, 이것은 문화사상의 공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전족[편집]

纏足

중국 여성의 기형적인 작은 발을 일컬음. 여자 4, 5세가 되면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네 발가락을 안쪽으로 굽혀 천으로 긴박(緊縛)하여 발육을 막고 작은 신을 억지로 신겨서 만든다. 이 풍습은 당말(唐末)에서 5대(900년 전후)에 일어난 듯하나, 송말(宋末)의 장방기(張邦基)의 「묵장만록(墨莊漫錄)」에는 단지 근세(近世)에 일어났다고 하였으며, 원말(元末)의 도종의(陶宗儀)의 「철경록(輟耕錄)」에는 5대 남당(南唐)의 후주(後主)가 애비(愛妃)의 발을 동여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어, 금련(金蓮)의 대(臺) 위에서 춤추게 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 풍습은 송(宋) 이후에 퍼졌는데, 그것은 여자의 행동의 자유를 빼앗고 또 그 가련한 모습이 남성의 흥미를 끌었기 때문이며, 원대(元代)에 유행한 것은 선교사 오도리크의 기행(紀行)에 보인다. 명(明)을 거쳐 청초(淸初)에 금한 일도 있었으나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화북(華北)에 전족자가 많으며 화남(華南) 및 빈자(貧者)에게 적고, 청말에는 천족회(天足會) 등이 생겨 폐지운동이 격심하게 일어나 끝내 청조 멸망 후에 완전히 쇠하여졌다.

비전[편집]

飛錢

당·송 시대에 행해진 송금어음 제도이다. 송대에는 편전(便錢)·편환(便換)이라고도 불리었다. 당나라 중기 이후 상품화폐 경제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원격지(遠隔地)와의 대규모 거래가 성해졌으나 동전은 중량이 있어 휴대하기가 불편했던 것과 도둑들에게 습격받을 위험이 있었으므로 그 불편과 불안을 없애기 위한 지불 방법으로서 비전 제도가 생긴 것이다.비전의 경영은 당대(唐代)에서는, 번진(藩鎭)이 경사(京師)에 둔 진주원(進奏院), 정부의 재정기관(三司), 금군(禁軍)을 장악하는 환관(宦官)·부상(富商)이 하였다. 현금을 비전으로 바꾸려면 각전(刻錢)이라고 불리는 수수료를 납입하고, 첩(帖)·거(據) 등의 어음을 교부받았다. 지불인은 수취인이 지참하는 첩과 어음 발행인이 송부한 첩을 대조한 후 현금을 지불하였다. 송대(宋代)에서는 편전무(便錢務)라고 불리는 관사(官司)가 발행 사무를 취급하고, 지방관사는 상인이 환어음을 제시하고 지불을 요구할 때는 당일 지불하였고 민간인이 취급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비전의 발달은 장차 지폐(紙幣)의 발생과 발달을 가져오게 하였다.

남당문화[편집]

南唐文化

중국 5대 10국의 남당국(南唐國)에 발달한 문화. 939년부터 36, 37년 간 금릉(金陵)에 도읍하여 좋은 환경과 군주의 기호(嗜好)로 수(隋)·당(唐) 문화를 이어받아 5대 10국 중 일류의 문화국이 되었다. 중당(中唐)부터 일어난 사(詞)가 유행하여 장필(張泌)·풍연기(馮延己)·성유뮨(成幼文)·경옥진(耿玉眞) 등이 나온 외에 중주(中主) 이경(李璟)·후주(後主) 이욱(李煜)도 명인으로서 「남당이주사집(南唐二主詞集)」이 있다. 회화에서도 서희(徐熙)·한희재(韓熙載)·고굉중(顧?中)·주문구(周文矩)·동원(董源) 등이 나와서 귀신도석화(鬼神道釋畵)도 행하여졌고, 근세적인 화훼산수화(花卉山水畵)도 성하여져 서숭사(徐崇嗣)의 몰골법(沒骨法)은 공전(空前)의 화법이다. 중주(中主)는 화원(畵院)을 설치하여 북송(北宋)의 선화화원(宣和畵院)의 선구를 이루었다. 공예(工藝)에서는 징심당지(澄心堂紙)의 제조나 훌륭한 묵(墨)도 만들어져, 수·당 문화에서 송(宋)·원(元) 문화로 옮기는 과도기 문화로서 중요한 문화 시대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