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봉건제도와 이슬람 문화/9 ~ 10세기경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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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10세기경의 세계〔槪說〕[편집]

이 시대는 800년에 카를 대제(大帝)가 교황 레오 3세로부터 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戴冠)됨으로써 그 막이 열렸다. 이에 카를 대제는 교황에 의한 동로마 제국 황제의 간섭을 배제하고 로마 제국 이래의 대(大)통일 제국을 건설하였는데, 이것이 비잔틴 세계 및 이슬람 세계와 구별되는 이른바 중세 유럽 세계라는 정치·문화적 공동체였다. 그리고 대제는 민족 이동기의 쇠퇴했던 문화를 부흥시키고(카롤링거 르네상스), 게르만·로마·그리스도교 등의 여러 요소를 융합시켜 오늘날까지도 내려오는 서유럽 공통의 출발점을 이룩하였다.그러나 고대 이래로 교역 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어 온 지중해가 사라센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됨으로써 서유럽 세계에서는 교환경제 사회가 자연경제 사회로 후퇴하게 되었던 까닭에, 대제의 사후(死後)에는 왕국도 분열되어 동프랑크(독일)·서프랑크(프랑스)·이탈리아 등 3국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영국에서도 색슨계(系)의 통일 왕조가 성립됨으로써 이 시대는 유럽 여러 왕국의 형성기로서도 중대한 의의가 있다.이 무렵의 유럽에서는 점차 장원제(莊園制)가 보급됨과 아울러 지배자와의 사이에 주종(主從) 관계가 일반화하기 시작하여 봉건제(封建制)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장원의 지역적 집중이 이루어짐으로써 나중에 영주권이 강화되어 왕권과 대립하게 되었고, 따라서 지방분권화 경향을 나타냈다. 한편, 교회도 이른바 교회령(敎會領)을 가지게 되며, 이 무렵에는 그 권력이 세속의 영주와 다를 바 없게 됨으로써 여기서 중세의 소위 2원적 지배체제가 성립된 것이었다.그러나 이에 대하여 비잔틴 세계는 고전 그리스 문화를 보존, 발전시키며 아시아 여러 민족의 침입에 대하여 서유럽 세계를 지키는 방파제 구실을 해 주었고, 또 그들의 문화는 문화적 진공상태하에 놓여 있던 동구(東歐) 슬라브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8세기 중엽 안사(安史)의 난을 겪고 나서 당(唐)의 국운은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당의 경제적 기초였던 균전제(均田制)가 무너지고 현실적 토지 사유에 바탕을 둔 양세법(兩稅法)이 시행되자, 토지 집중화 현상을 빚어냄과 동시에 농민의 몰락이 가속화하였다. 또한 농촌 사회의 변동은 부병제(府兵制)를 동요시켜 모병제(募兵制)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는 절도사(節度使)가 용병(傭兵)을 사병화(私兵化)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를 계기로 절도사는 지방의 행정·군사·재정의 실권을 집중하여 사실상 지방정권화하였다. 더구나 양세법 시행 이후에도 당의 재정 곤란은 격심하여 여러 종류의 잡세가 부가되고, 아울러 상업 및 고리대본이 발전함에 따라 농민은 장원에 유입되거나 번진(蕃鎭)의 용병이 되는 일이 속출하였다.번진 세력의 대두와는 반대로 중앙 귀족이 조락하고, 정부 내 환관(宦官)의 전횡과 관료의 당쟁은 당의 붕괴를 재촉하였다. 지방에 할거(割據)한 신흥 지주 호족 세력은 농민과 유민을 흡수하여 빈번하게 반란을 일으켰다. 9세기 후기의 황소(黃巢)의 난은 전후 10여 년에 걸쳐 당의 보고(寶庫)인 강회지방(江淮地方)을 유린함으로써 당 멸망에 결정타를 가했다. 이와 같이 중국의 고대사회는 당의 중기부터 변화하기 시작하여 9

10세기를 경계로 몰락하였다.10세기 초 절도사 주전충(朱全忠)이 후량(後梁)을 건립한 이래 50여 년간, 화북에는 후당·후진·후한·후주가 계승하였으며, 지방에는 10여 국이 할거·대항하는 이른바 5대 10국(五代十國)의 분열 시기를 맞이하였다.10세기 후반에 이르자 후주(後周)의 절도사 조광윤(趙匡胤)이 송(宋)을 건립하고, 회유와 무력으로 5대의 군벌 정권을 흡수 혹은 평정함으로써 중국은 또다시 통일을 보게 되었다(979). 5대의 군주가 이상으로 삼는 것은 군주 전제권 확립이었다. 송은 태조·태종 2대에 걸쳐 문치주의(文治主義)를 표방하고 무인 세력을 억제하여 군주독재권을 확립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리를 뽑아 새로운 관리기구를 편성하는 한편, 절도사도 이 새로운 관료로 대체해 나갔다. 새로운 관료를 황제의 권위에 예속시킴과 동시에 지방의 아군(牙軍)을 금군(禁軍)으로 개편하여 황제의 지휘하에 둠으로써 집권적 관료 체제를 완성하였다. 절도사의 해체와 무인 세력의 몰락 이래 지방 호족은 관료로 진출하였고, 장원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세력층(形勢戶)으로 성장하였다.한편 9

10세기에 걸쳐 동아시아는 당의 대외 발전에 자극되어 주변 여러 민족의 각성이 일어나는 시기였다. 만주에서는 발해에 이어 거란이 부족국가로 성장하여 연운 16주(燕雲十六州)를 둘러싸고 송과 격심한 항쟁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서역에는 위구르와 티베트가 번갈아 흥기했고 윈난(雲南)에는 남조(南詔)가 일어나 당을 괴롭혔다. 일본은 율령제의 붕괴 이래 장원에 바탕을 둔 무사 계급의 대두가 현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