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십자군 원정과 투르크족의 발흥/로마 교회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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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교회의 발전〔槪說〕[편집]

이슬람 세계의 확대나 노르만인의 진출 등에 의하여 유럽 제국의 정치적·종교적 혼미가 얼마 동안 계속된 후 이미 발전해 오고 있던 수도원의 혁신적 힘이 10세기경부터 점차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그 중에도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운동은 로마 교회 내에 신풍을 불러 일으켰으며, 세속 군주와의 서임권(敍任權) 투쟁에 있어서도 교황이 우위에 서고, 얼마 되지 않아서 셀주크 투르크에 대한 십자군 파견의 원동력이 되었다. 11세기 중엽에 그리스 교회와 결정적인 분리를 고한 이래, 13세기의 인노센트 3세(인노켄티우스 3세)가 존왕에 대한 승리를 얻기까지 로마 교황권은 세속 군주를 압도하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최성기에 있었다고 하겠다.

수도원[편집]

修道院 Monastery

가톨릭 교회에 있어서 순결·청빈·복종의 세 계율(戒律)을 지키며 수도 생활을 하는 장소. 여기서 수도사(修道士) 혹은 수녀는 수도회라는 단체 속에서 공동 생활을 했다. 수도라고 하는 금욕적·은둔적 생활은 원래 동방 종교의 영향으로 동방 교회에서 시작되어 6세기에 성(聖) 베네딕투스가 로마의 남쪽에 카시노산 수도원을 창설한 이래 베네딕투스파(派)·도미니쿠스파·프란체스코파 등 여러 파가 활동했다. 수도원에서는 세 계율을 지킴은 물론, 자급 생활·사경(寫經:經文을 베끼는 일)·전도 등을 열심히 하고, 특히 기도 생활을 중히 여겼다. 수도원은 퇴폐화하고 있던 교계(敎界)에 혁신의 기풍을 불어넣어서 수많은 교회의 고전(古典) 유지에 공헌, 중세 유럽의 교육(특히 부속 학교에 있어서의)을 촉진한 점에서 존재 의의가 크다고 할 만하다.

프란체스코 교단[편집]

-敎團 Francesco

탁발(托鉢) 교단의 대표적 존재. 프란체스코가 1209년경 교황 인노센트 3세로부터 설립허가를 받고 창설하였다. 소형제단(小兄弟團)이라고도 한다. 여제자(女弟子)인 클라라가 세운 자매단(姉妹團)도 있었고, 세속적 생활을 영위하면서 그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제3단(第三團)도 일어났다. 이러한 교단의 설립과 그 발전이 프란체스코 자신의 의도였는지 아닌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교황의 희망하는 바였고 교회화(敎會化)였음은 분명하다. 13세기 후반의 연대기 작가로서 세속적 쾌락을 즐긴 살림베네는 세속화한 프란체스코파 수도사의 전형이다. 그러나 교단 내부에서는 당초의 이상을 지키려는 과격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다. 도미니쿠스파가 의지적·이지적(理智的)인 데 비하여 이 교단은 내면적이며 정서적이었다. 그러나 학문연구도 하고, 특히 자연과학자가 배출되었다는 것, 그리고 일반적으로 도미니쿠스 교단보다 진보적이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도미니쿠스 교단[편집]

-敎團 Dominicus

탁발 교단의 대표적 존재. 설교자 교단이라고도 한다. 도미니쿠스가 1216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 계율을 지키는 새교단 설립의 허가를 얻어 20년 탁발과 무일푼으로 지낼 것을 결의, 탁발 교단을 조직했다. 프란체스코 교단처럼 형제단(兄弟團) 외에 여자 신도가 들어가는 자매단(姉妹團), 또 세속생활을 하면서 탁발교단의 이상(理想)을 실현하려는 제3단도 구성하였다. 프란체스코 교단과는 서로 아는 바 없이 성립되었으면서도 그 조직과 발전과정은 거의 같다. 그러나 창립자의 성격상의 차이에서 다른 점도 있다. 도미니쿠스는 의지와 이지의 인물이며 그 의도하는 바는 남프랑스의 이단을 박멸하려는 전투적 정신에 충만한 것이어서 프란체스코의 풍요한 내면성·정서성(情緖性)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프란체스코 교단이 사랑의 행동으로써 진실한 크리스트교 정신을 전파한 데 대하여, 도미니쿠스 교단은 설교와 문화활동으로 교회세력을 폈다. 종교재판도 그러한 역할의 하나였다.

클뤼니 개혁운동[편집]

-改革運動

10세기 초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클뤼니(Cluny) 수도원에서 일어난 교계(敎界) 개혁 운동. 10∼11세기에는 클뤼니뿐만 아니라 로트링겐, 바이에른 등의 각지에 독립된 수도원 개혁 운동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클뤼니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개혁운동은 프랑스 전토로 확대되고, 나가서는 에스파냐, 이탈리아, 독일에까지 파급되었다. 이 운동은 귀족의 원조를 받아 크리스트교화를 수행한 귀족운동으로 그 조직은 중앙 집권적이며 클뤼니 수도원장의 권력은 절대적이어서 여타의 교회는 모두 이에 종속되었다.교회의 세속화를 숙정(肅正)하고 성직의 매매 등 교회의 퇴폐 현상에 대한 혁신 운동의 선두에 선 클뤼니파는, 문화적인 공헌뿐 아니라 그레고리우스 7세나 우르바누스 2세 등의 강력한 교황을 옹립하여 십자군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그레고리 7세)[편집]

-世 Gregorius Ⅶ (1020?

1085, 재위 1073

1085)

로마 교황, 속명은 힐데브란트. 11세기 중엽까지 교황 밑에서 정치적 수완을 길러 교황 선거법의 개정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세속적 권력의 개입을 경계하고 교회는 세속 군주권으로부터 독립할 것을 주장했다. 교황이 되자 교계의 숙정을 강화하고 세속 군주권과 대립,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충돌했다. ‘카노사의 굴욕’ 사건에 있는 바와 같이 교황은 황제를 파문(破門)하여 사태가 악화되었다. 결과적으로는 하인리히 4세와의 대립 속에서 통분한 나머지 죽었지만 세속 군주에 과감히 대항하여 교황권을 신장했다.

제권과 교권의 대립[편집]

帝權-敎權-對立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황즉위와 함께 제국은 결정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등장은 교회개혁운동의 분기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의 완전한 자유를 요구하여 교황의 자유선거를 강조하였으며, 황제를 포함한 속인(俗人)에 의한 성직자 서임을 탄핵하고 이것을 성직 매매로 단정했다. 그리고 국왕의 원리를 바탕으로 성립되어 있는 제국조직을 제사(祭司)의 것과 국왕의 것으로 분리하여 성계(聖界)의 지도 감독권을 교황의 손에 되돌릴 것을 밝혔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위(優位), 제권(帝權)에 대한 교권의 우위라는 전제를 내세웠다.단기간의 대화가 있은 뒤에 그레고리우스 7세와 하인리히 4세는 인연을 끊었다. 그것은 그레고리우스 7세가 작센 봉기(蜂起)에 참여했기 때문에 해임된 작센의 여러 사교의 복위(復位)를 요구하고, 새로운 사교의 서임 정지를 요구한 일, 그리고 다시 교회법 위반, 성직 매매, 특히 반(反)개혁파 사교의 밀라노 사교좌 착임(着任)에 관하여 교황청에 출두해서 해명하라고 하인리히 4세에게 명령한 일로 발단하고 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분연히 이를 거절하여, 1076년 1월에 그의 뜻을 받든 독일인 고위 성직자에 의한 보름스 종교회의에서 교황직 부적격자, 불법교황으로서 그레고리우스 7세를 논단(論斷)하고 그 해임을 요구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보고 교황은 태도를 경화시켜 1076년 봄에 하인리히 4세를 파문(破門)하고 폐위시켰으며 그의 모든 봉신(封臣)을 국왕에 대한 성실서약(誠實誓約)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제권과 교권의 이와 같은 정면 충돌은 제국을 2분하였으며, 성직자, 귀족, 지식인은 하인리히 4세의 전통이든가, 아니면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의 어느 한 편의 선택을 강요당했다.

카노사의 굴욕[편집]

-屈辱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파문되어 굴복한 사건. 황제 반대파의 제후와 교황이 결합하여 교황이 세속인에 의한 성직자 임명을 부인한 일에 대하여 하인리히 4세가 따르지 않으므로 파문했다(1076). 이에 대하여 황제도 교황의 폐위(廢位)를 결정했다. 그 후 1077년에 황제도 카노사(Canossa) 성에 체재중인 교황을 찾아 찬 바람 눈보라 속에서 용서를 빌었는데, 3일간의 노력 끝에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교묘하게 계산된 이 행위에 의해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허락을 얻고, 동시에 반황제파 제후의 교황에 대한 신뢰를 흔들어 놓는 데 성공했다.각 제후 저마다의 입장에 따라서 지나친 관대함으로 또는 지나친 엄격함으로도 받아들여진 이 조처는 결과적으로 하인리히 4세에게 크나큰 이익을 가져다 주게 되어 이 사건 후에 황제는 그레고리우스 7세를 폐위하고 클레멘스 3세를 대립교황(對立敎皇)으로 추천하여 우위를 지키기에 이르렀다. 이는 성직 서임권 투쟁의 정점을 이루는 사건으로 교황과 황제의 항쟁사상 그 의의가 크다.

우르바누스 2세 (우르반 2세)[편집]

-世 Urbanus Ⅱ (1042?

?, 재위 1088

1099)

로마 교황. 클뤼니 수도원의 부원장으로서 그레고리우스 7세를 도와 개혁 운동을 추진했다. 성직 서임권 문제, 성직 매매 문제, 성직자의 혼인 문제에 관해서 엄격한 태도를 취하고, 교계의 숙정과 정화, 교황권의 신장에 힘썼다. 그는 하인리히 4세를 눌러 프랑스의 필리프 1세를 파문(1093), 교황의 우위를 확립했다. 당시 이슬람 교도(셀주크 투르크)의 예루살렘 침입에 대하여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원조를 요청해 왔으므로 그는 클레르몽에서 종교회의를 개최하여(1095) 십자군 파견을 역설, 결국 파견이 결정됐다. 우르바누스 2세 시대는 진정한 의미로 교황권의 절정기였다고 할 만하다.

보름스 협약[편집]

-協約 Concordat of Worms

신성 로마 황제인 하인리히 5세와 교황 칼릭스투스 2세 간에 맺어진 협정. 이로써 1076년 이래의 성직서임권투쟁(聖職敍任權鬪爭)은 일단 타결되었다. 그 내용은 성직자(聖職者)는 교회법의 규정에 따라서 선거되며, 황제는 지환(指環)과 장(杖:영적 권력의 상징)에 의한 서임권(敍任權)을 포기하고 홀(笏:세속적 권력의 상징)에 의한 교회령 및 이에 부수되는 정치적 권리의 수여만을 행사한다. 단 선거에는 황제 내지는 그 대리인이 입회한다. 독일 국내에서는 황제의 홀(笏)에 의한 수봉(授封)은 성직자서임(聖職者敍任) 때 행해지는 성별(聖別)의 의식(儀式)에 선행(先行)되며, 부르군트와 이탈리아에서는 성별(聖別)이 선행(先行)되어야 할 것. 교회국가(敎會國家)에서는 이러한 협정(協定)은 적용되지 않음 따위 등이다. 이 내용은 교황과 황제가 다같이 만족을 느낄 수 없는 타협으로 서임권 투쟁은 내내 계속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123년에 열린 제1회 라테란 종교회의는 보름스 협약과 교회개혁의 기본노선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에 이 협약의 양당사자는 연이어 사망하게 된다.

인노센트 3세 (인노켄티우스 3세)[편집]

-世 Innocentius Ⅲ (1161

1216, 재위 1196

1216)

로마 교황.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 사망 후 황제령(皇帝領)의 일부를 교황령(敎皇領)에 합병시킨 외에 독일 왕 오토를 파문하고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사사로운 일에도 간섭했다. 또 1206년에 캔터베리 대사교(大司敎) 임명에 관해서 영국의 존왕과 다투어 그를 파문했다. 그 때문에 존왕은 교황에 굴복하고 자기의 국토를 일시 교황에게 헌상했다가 다시 교황으로부터 왕으로 봉해지는 형식으로 지위와 국토를 다시 받아들이는 추태를 연출했다. 인노센트 3세 시대에 제4회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는데, 처음 교황은 그 공격이 십자군 본래의 목적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비난했다. 그러나 이 원정은 많은 재보(財寶)를 가져오고 동방교회가 로마 교회에 종속되는 성과를 낳자 교황의 권위는 크게 높아졌다. 그 밖에 성(聖)프란체스코, 성 도미니쿠스의 수도원 운동을 공인(1210∼1215), 육성하였으며, 1215년 라테란 종교회의를 열어 교의상·교회 규율상의 여러 결정을 짓기도 했다. 그가 교황권의 제권(帝權)에 대한 우월성을 태양과 달과의 비유로 주장한 것은 유명하다.

라테란 종교회의[편집]

-宗敎會議 Lateran Councils

로마 라테란 대성당에서 5회에 걸쳐 열린 가톨릭 교회의 종교회의로 공의회라고도 한다. 중세 후반의 교황권 융성기에 4회, 르네상스기에 1회에 열린 회의로 회의명칭 외의 공통점은 없다.(1) 1123년은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 문제를 논의하고, 보름스 협약(協約)을 확인, (2) 1139년, (3) 1179년은 교황선거법(敎皇選擧法)을 확정, (4) 1215년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교황 인노센트 3세의 소집하에, 천 수백 명이 참집, 신교(新敎)의 조직은 교황의 재가를 얻어야 한다고 정하고, 이단재판(異端裁判)의 새로운 규정을 설정하였으며, 또 7세 이상인 자는 1년에 한 번은 성찬식(聖餐式)에 참가하여야 하고, 그 앞에 비밀고백을 할 것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화체설(化體說)을 공인교의(公認敎義)로 정하고, 빵과 포도주는 실제로 크리스트의 살과 피로 변화한다고 하여, 이를 받음이 구제의 필수조건이라고 하였다. 그 회의의 성대함과 결의사항은 교황권(敎皇權)의 절정을 상징하는 것이다. (5) 1512∼1517년은 교회개혁의 마지막 시도로 소집되었으나, 참가자가 적었고 효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가톨릭교회[편집]

-敎會 Catholic Church

정통교의(正統敎義)를 신봉하는 크리스트 교회. 가톨릭이란 말은 그리스어의 가톨릭코스(보편적, 세계적)에서 나온 말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그의 사후 사도(使徒)에 의해 각지에 전도되어, 네로 이하의 로마 황제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도수를 증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공인되어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국교로 정해졌는데, 그동안 사도의 우두머리인 베드로의 순교지인 로마의 주교(主敎)가 사도권(使徒權)을 계승하여 그 권위를 높였으며, 로마 제국의 동서분열 이후는, 총대주교좌(總大主敎座)의 지위를 주장하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와 대립, 프랑크 국왕과 제휴하면서 교황으로서 서유럽에 지도권을 확립하였다. 동서 양교회의 대립은 우상숭배론 등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론 등에 의해 가일층 심화되다가, 1054년 최종적으로 분리하였다. 중세 가톨릭 교회의 조직은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교계(敎階)제도를 이루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성직서임권 투쟁을 거쳐, 인노센트 3세로부터 보니파키우스 8세에 이르는 동안, 교황은 태양이며 황제는 달이라고 비유될 만큼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그 세속화와 타락은 각 지방에 이단(異端)운동을 일으키게 하여 종교개혁운동에 의해 대타격을 입었다. 그 후 내부의 쇄신과 반동종교개혁(反動宗敎改革)에 의하여 다시 재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