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십자군 원정과 투르크족의 발흥/십자군의 침입과 이슬람교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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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의 침입과 이슬람교 제국〔槪說〕[편집]

1099년 7월 예루살렘을 점령한 제1회 십자군 병사들은 하느님에게 감사의 기도를 한 후 주민 대량 학살을 과감히 자행했다. 그들은 성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왕국(1099

1187)을 세우고 또한 시리아 지방에 세 개의 후국(侯國)을 두고 유럽의 봉건제도를 도입하였다. 당시 이슬람 세계는 셀주크 왕조의 대통일(大統一)은 붕괴되고 분열이 시작되던 시기에 해당되며, 이 사실이 십자군의 성지 탈취를 용이하게 한 것이다.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슬람 교도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셀주크 왕조의 부장(部將)으로서 나중에 독립한 이라크 태수(太守) 장기(재위 1127

1146)와 아들 누르 우딘(재위 1146

1173)은 이슬람 세력을 결집(結集)하여 십자군에 대한 성전(聖戰)을 지도하고, 그 뒤를 이은 이집트의 지배자 살라딘은 1187년 7월, 마침내 예루살렘 회복에 성공했다. 이후 십자군에 대항하는 이슬람 세력의 중심은 이집트로 옮겨졌다.이집트는 10세기 후반 파티마 왕조가 이 땅을 정복한 이후부터 동서 칼리프국과 견주는 제3의 칼리프국으로서 번영하고 있었으나 11세기에 들어서자 점차 쇠퇴하여 십자군 시대에는 살라딘을 시조로 하는 아유브 왕조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파티마 왕조[편집]

-王朝 Fatimid

이집트의 시아파(派) 이슬람 왕조(909

1171). 마호메트의 딸 파티마(Ftima)의 자손이라 칭하는 우바이다츨라 알 마흐디가 튀니스에 건국했다. 알제리, 모로코,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969년에는 이집트의 이프시드 왕조를 멸하여 시리아, 히쟈즈에까지 세력을 넓혔다. 972년 카이로에 수도를 옮기고 지중해 무역을 독점, 11세기 초까지 전성(全盛)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 후 시칠리아를 노르만인에게 빼앗겨 국내에서는 투르크인이나 베르베르인 용병대(傭兵隊)의 전횡(專橫)이 심해서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파티마 왕조는 셀주크 투르크의 침략을 받아 쇠퇴하였으며, 또 십자군과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계속되는 틈에 이란계(系) 투르드인(人) 출신이며 뒤에 아유브 왕조의 창시자가 된 살라딘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살라딘[편집]

Saladin (1138

1193, 재위 1169

1193)

아유브 왕조의 시조. 살라 우딘에서 생긴 이름. 이란의 쿠르드족(族) 출신으로 누르 우딘의 부장(部將)이 되었다가 이집트에서 독립, 신왕국을 세웠다. 이라크, 시리아, 예멘,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계를 통일하고 십자군과 싸워 1187년 예루살렘 왕국을 멸했다. 그 후에도 제3회 십자군의 침입을 격퇴하여 예루살렘을 확보했다. 그는 이슬람 교도에게 영웅으로 간주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고결한 인격은 유럽의 전사(戰士)들로부터 상찬(賞讚)을 받았다.

아유브 왕조[편집]

-王朝 Ayyubid

파티마 왕조에 이어 이집트를 지배한 왕조(1169

1252). 왕조의 이름은 건국한 사람 살라딘의 부친 아유브에서 유래한다. 파티마 왕조가 시아파(派)였음에 반하여 정통파 신앙을 확립했다. 파티마 왕조에서 독립한 후에 시리아를 정복하여 유프라테스 강에서 나일 강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고 십자군의 침입에 대한 방위 제1선의 구실을 하였다. 이집트의 반(反)십자군 요새화는 홍해(紅海)경유의 지중해 교통을 두절시키고, 흑해 북안을 돌아가는 교통로를 발달시켜 몽골 서정(西征)의 원인(遠因)도 되었다. 또 살라딘이 채용한 외국인 노예병제도는 오스만투르크 예니체리 군단의 선구(先驅)로 보여지고 있다. 이 왕조는 십자군을 격퇴하여 위세를 높였으나 바로 분권적(分權的) 경향이 짙어진데다 터키인 노예(마물루크) 출신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