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십자군 원정과 투르크족의 발흥/아프리카 여러 왕국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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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여러 왕국의 성립〔槪說〕[편집]

아프리카의 역사는 이집트에서 그 발단(發端)을 볼 수 있는데, 기원전 3000년경 나일 강 유역에 통일국가가 출현한 이래 기원전 16∼14세기의 아마르나 시대의 번영을 지나 기원전 6세기의 페르시아 침입에 이르기까지 30개의 왕조가 교체되었다.기원전 4세기에 알렉산드리아 시(市)의 건설이 있었고 프롤레마이오스 왕조 지배 때는 헬레니즘 문화가 번영하였다. 한편 북서부에도 페니키아의 식민지 카르타고가 융성하였으나 로마에 의해 멸망당하고 기원전 31년에는 이집트도 로마에 굴복하여 이후 아프리카의 북부는 로마화되고 크리스트교가 들어오게 되었다. 중세에는 게르만의 일파인 반달족(族)이 이베리아 반도로부터 도래(渡來)하여 왕국을 세우고, 5∼6세기에 걸쳐 존속되었다. 7세기에는 아라비아인(人)의 침입이 있었고, 11세기에는 아프리카의 이슬람화(化)가 최고조에 달했다.10세기에는 동서 칼리프로부터 자립한 파티마 왕조(王朝)가 출현하여 그 왕성(王城)으로 건설된 카이로는 그 후 아프리카에 있어서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파티마 왕조는 카이로를 중심으로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하여 시칠리아섬을 정복, 북아프리카 무역을 독점하였다. 이집트 서쪽의 북아프리카에서 살던 베르베르인은 7세기 이후 아랍인에게 정복되면서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그후 아랍인으로부터 독립하여 무라비트 왕조와 무와히드 왕조를 세우고 북아프리카에서 이베리아 반도까지 지배하였다. 이슬람교도가 된 베르베르인은 수단에도 침입하여, 그 지역 흑인들에게 포교를 하였다. 그래서 이슬람교도에 의한 흑인왕국이 수단 지방에 잇달아 건설되었다.사하라 사막 이남의 서아프리카에는 4세기경에 가나 왕국이 세워졌다. 가나 왕국은 11세기경에 이슬람화되었는데, 얼마 후 베르베르인이 세운 무라비트 왕조의 침입을 받아 쇠퇴하였다. 13세기에는 말리왕국이 일어나 이슬람 국가로 발전하였는데, 이 왕국의 수도인 통북투는 상업·문화의 중심도시가 되어 크게 번성하였다. 15세기에는 송하이 왕국이 새로 일어났다. 송하이 왕국 수도 통북투에는 대학이 설립되었는데, 이것은 흑인이 아프리카에 세운 최초의 대학이다. 그 후 16세기 말에 이 왕국은 모로코에 정복되었다. 이들 흑인 왕국은 매우 전투적이어서 정복활동을 통해 이슬람의 가르침을 전파하였다. 그들은 정복한 지역에 의료를 베풀고, 읽고 쓰기를 가르치면서 이슬람의 가르침을 확산시켰다.해안지대에는 7세기경부터 이슬람 상인에 의해 이슬람교와 그 문화가 전해졌다. 아랍인이 각국과 상아·금 등을 교역함으로써 도시 국가가 번성하였는데, 그 영향을 받아 원주민 반투족 가운데에는 이슬람화된 이른바 스와힐리 상인이 출현하였다. 내륙지방에도 짐바브웨의 신전 유적을 비롯하여 거대한 석조 건물들이 남아 있어서 지난날의 번영을 말해 준다.

반달 왕국[편집]

-王國 Vandal (429∼534)

반달족이 북아프리카에 건설한 게르만의 부족왕국(部族王國). 가이세리크 및 그의 아들 훈네리크의 시대에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지중해의 패자가 되었다. 로마 속주민(屬州民)에 대해서는 정복자로서 군림하였으며, 다른 게르만 국가와는 달리 수도 주변에서는 토지를 전면적으로 몰수하였으나, 전 인구의 1.3%에 불과한 반달족의 로마화는 현저하였고, 왕위의 계승을 연장자의 단독 상속에 국한하여 게르만적인 균분상속(均分相續)으로 인한 왕국의 분열을 피하고, 훈네리크의 비(妃)로서 서로마 황제의 유녀(遺女)를 맞이하여 막대한 재보(財寶)를 배경으로 하는 로마풍(風)의 전제국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그 아들 힐데리크가 가톨릭으로 개종함에 있어, 민족주의파(派)의 불만이 폭발하여, 왕위를 그의 사촌 겔리메르에게 빼앗겼고, 이를 구실로 삼은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정복을 초래하여, 왕국 자체가 멸망하였다.

무라비트 왕조[편집]

-王朝 al-Murbit

알모라비트 왕조라고도 한다. 베르베르인에 의해 11세기 중엽 북아프리카에서 세네갈·모로코·알제리를 포함하는 무라비트 왕조가 세워졌다. 이는 같은 시대 유럽에서의 교회개혁운동과 비슷하여, 교양과 신앙의 순화를 요구하는 이슬람의 개혁운동에서 발단하고 있었다.사하라 사막에서 유목생활을 한 베르베르인의 한 갈래인 람투나족(族)을 중심으로 한 종교전사집단(宗敎戰士集團)이 세운 나라로 처음에는 세네갈 하구의 작은 교단국가(敎團國家)로 출발하여 차츰 세력을 넓혀, 1062년 마라케시를 수도로 삼고 지중해 연안까지 세력을 뻗쳤다. 1085년에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 이듬해 레온왕국의 알폰소 6세의 군대를 쳐서 이베리아 남부를 지배하였다. 12세기에 같은 베르베르인의 종교운동에서 비롯된 무와히드 왕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면서 멸망되었다.

무와히드 왕조[편집]

-王朝 al-Muwahhid

알모하드 왕조라고˙˙도 한다.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베르베르족(族)의 왕조로 이븐 투마르트가 일으킨 종교운동이 이 왕조의 시초이다. 이븐 투마르트는 바그다드와 카이로 등의 동방여행에서 돌아와 종교와 도덕의 개혁과 함께 무라비트 왕조 타도를 주장하는 무와히드 운동을 시작하여 국가적 조직을 결성하였다. 그의 사후 그의 대행자로 제자인 압둘 무민의 지도 아래 교단(敎團)세력이 강화되어 무라비트 왕조를 타도하고 북아프리카 일대를 지배했다. 수도를 마라케시로 옮겼다. 마라케시는 대상(隊商)무역과 수공업으로 발전했고 학문과 문화도 번창했다.13세기에는 북으로부터 그리스도교 세력의 압박, 지배층 내부의 대립과 항쟁, 여러 부족의 반란과 유목 베르베르인의 침입으로 쇠퇴하다가 1269년 마린 왕조에게 멸망당했다.

가나 왕국[편집]

-王國 Ghana

4세기경에 탄생. 가나는 그 위치를 이용하여 북아프리카와 나이지리아 지대와의 교역을 중개하는 일로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그들은 금(金), 노예, 곡물 등을 북쪽으로 보내고, 사하라에서는 소금을 수입했다.금광(金鑛)이 있다는 것도 가나 왕국 번영의 힘이 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될 때까지는 가나가 지중해의 여러 나라들에게 금을 공급하는 제일 주요한 나라였다. 어떤 아라비아인의 연대기(年代記) 작가는 ‘가나란 나라에서는 황금이 모래땅 위에 마치 홍당무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기록했다. 수도의 건조물은 석조가 많아 그 자취가 지금도 남아 있다. 왕은 그림과 조각으로 장식된 왕궁에 거주하며, 엄격한 과세제도를 정하고 특별한 행정직을 시켜서 관리하고 있었다.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왕의 적자(嫡子)가 아니고 왕의 자매(姉妹)의 적자였다. 가나 왕국은 11세기 중엽부터 후퇴하여 13세기 초에 몰락했다.

말리 왕국[편집]

-王國 Maili

말리는 흑인 왕국으로, 11세기 초 케이타라는 왕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메카에 순례한 뒤에 술탄 칭호를 얻어, 그 후로 이슬람교국(敎國)이 되었다.말리 왕국을 서수단의 패자가 되게 한 것은 말리의 라이온으로 알려진 순디아타왕이다. 왕은 1240년에 가나를 멸망시키고 사방으로 세력을 뻗쳐 광대한 제국(帝國)을 건설했다. 농업의 발전에도 노력하여 그에 의해서 목화의 지배가 도입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1310년부터 1312년에 말리의 아부 바크르 2세라는 왕이 대서양 연안에서 해양 원정대를 조직하여, 바다 건너 저쪽을 탐색하려 했다고 한다.아부 바크르 2세의 적자이며 후계자였던 만사 무사(재위 1312∼1337)는 뛰어난 통치능력과 화려한 궁정생활로 흑인 왕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말리 제국이 최대의 판도를 자랑한 것도 그의 재위중이었다. 넓은 영토에서는 매년 1만 2천 마리의 낙타가 왕래하여, 사하라 무역은 모로코에서 더 동쪽으로 확대되고, 이집트와도 대규모의 교역을 하게 되어 있었다. 1324년, 만사 무사의 메카 순례는 흑인 제국의 번영을 자랑하는 대 퍼레이드가 되었다. 그가 카이로에 체재하고 있을 때 이 왕의 모습을 본 베네치아(베니스)의 상인들은 그의 부(富)에 놀랬으며, 말리라는 흑인제국의 이름이 14세기 유럽인의 지도에 기입되었다. 만사 무사가 아낌없이 뿌린 방대한 양의 황금은 카이로의 금 시세를 혼란에 빠뜨려, 그 후 몇해 동안 인플레를 일으킬 정도였다. 만사 무사 치하의 말리는 상인뿐 아니라 문인, 학자, 종교가 등 지식인도 활발히 활동했다. 그 중에서도 고명(高名)한 시인이고 건축가였던 에스 아헤리는 수단의 대상업 도시로 발전한 통북투의 건조물에 독창적인 솜씨를 남기고 있다.말리는 사하라를 왕래하는 모든 상업활동에 지배력을 갖고 있었다. 이는 가오에서 발견된 묘석으로도 명백하다. 이 묘석은 에스파냐에서 다듬어진 뒤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隊商)에 의해 운반되어 온 것이었다. 아라비아의 대탐험가 이븐 바투타는 1352년 말리를 방문하고, 왕위에 있었던 만사 무사의 아우인 슐레이만의 궁정에 영접을 받았다. 그의 여행기에는 말리의 번영과 여러 가지 제도, 주민의 기질에 대해서 매우 호의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말리 제국은 15세기에 포르투갈인의 침입이 시작되자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그후 송하이 왕국이 말리 왕국의 영토를 거의 다 장악했다.

송하이 왕국[편집]

-王國 Songhay

나이저 강 유역에 정착해 있던 목축민 송하이족(族)은 7세기부터 12세기까지 자 왕조 밑에서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왕조는 11세기에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수도를 가오에 두었다. 이곳은 카이로에서 오는 대상(隊商)의 종점이 되는 곳이었다.말리 제국의 쇠퇴에 따라, 서수단에서 송하이 왕국의 세력이 15세기 중엽에 왕위에 오른 수니 알리의 무력 침략에 의해 강대해졌다. 아라비아의 작가들은 그를 이교도이고 이슬람교에 대한 박해자라고 말하고 있다. 1492년, 대왕이 죽은 뒤에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은 아버지를 본받아 이슬람교도를 탄압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왕조를 위기에 직면시켜, 몇 달 후에는 이슬람교도의 장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이 신왕(新王)이 아스키아 무하마드이다.아스키아 무하마드는 제1급의 통치자였다. 왕국은 총독을 우두머리로 하는 행정부의 창설, 세제(稅制)의 정비, 도량형의 통일, 계급질서의 확립 등 여러 가지 정책에 의해 정연하게 조직되었다. 영토도 더 확대되어 수단 역사상 최대의 제국이 구축되었다. 문화정책에도 주력하여 학자와 문인을 보호, 원조했으므로, 통북투는 문화의 큰 중심지가 되었다. 대학(大學)에는 ‘지식과 덕을 열심히 탐구하는 젊은이들’이 서아프리카 각지에서 모여들어 신학, 법학, 수사학, 문법, 문학을 배웠다.16세기말, 송하이는 금광(金鑛)의 탈취를 노리는 모로코의 치열한 공격의 대상이 되어 화승총(火繩銃)과 대포로 무장한 모로코군(軍)이 사하라 사막을 건너서 침입하여, 창과 칼과 방패밖에 갖지 않은 송하이군을 격파할 때 통북투는 폐허로 변했다.

카넴·보르누 왕국[편집]

-王國 Kanem·Bornu

아프리카의 차드호(湖) 주변은 트리폴리, 이집트, 나일 상류, 또는 수단의 여러 나라로 향하는 대상로(隊商路)의 접점이며, 통상의 이익에 의해 문명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차드호 주변은 지리적으로는 두 지방을 포함하고 있어, 호수 동쪽의 카넴과 서쪽 보르누로 나누어진다. 이 왕국은 처음에는 카넴 왕국이라 불렸으며, 9세기 초에 발생했다. 왕조는 11세기 말에 가서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13세기 전반에는 번영의 정점에 다다랐다. 카넴 왕국은 카이로에 특별구(特別區)를 설치했고, 같은 무렵 튀니스에 파견된 사절은 ‘카넴의 왕, 보르누의 주(主)’라는 이름으로 기린을 선사한 일도 있었다. 이 왕조는 14세기 말에는 수도를 차드호 서쪽으로 옮겨 그 후로는 보르누 왕국이라 불리게 된다. 천도의 이유는 동쪽에 일어난 세력의 압박에 저항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보르누 왕국이 융성을 회복하여, 카넴을 다시 지배하에 두게 된 것은 16세기의 일이다. 그 후에도 번영과 쇠퇴를 되풀이하다가 1846년에 유럽의 간섭을 받아 쟁란(諍亂) 속에 멸망했다.

베닌 왕국[편집]

-王國 Benin

송하이와 보르누 사이에서 장기간 활약한 하우사족(族)의 여러 나라의 정치·경제 제도는 수단지방의 다른 민족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그중 대표적인 부족으로 에도족이 있었는데, 이들은 나이저강의 삼각주에서 서쪽에 위치한 베닌에까지 이르는 영토를 영유하여 중요한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했다. 15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중엽까지 번영한 이 왕국은 15세기경부터 포르투갈인이 들어온 후 노예·상아 등을 수출하고 총포를 수입하는 등 삼림지대가 북부평야지대 사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여 무역로로 번성하였다. 또한 예술성이 높아 점토의 거푸집과 밀랍을 사용하여 밀랍이 녹아 없어지게 하는 주조법으로 만든 청동조각(靑銅彫刻)을 대표로 하는 예술적 전통과 재능이 베닌 왕국에 남김없이 계승되었다. 금공(金工) 외에도 상아 조각, 목조(木彫) 등 아프리카 흑인 예술의 정화(精華)는 19세기말 왕국을 멸망시킨 영국인이 약탈한 기념으로 대영박물관(大英博物館)의 한 구석을 장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