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십자군 원정과 투르크족의 발흥/일본의 무사 성장과 헤이안 말기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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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무사 성장과 헤이안 말기의 문화〔槪說〕[편집]

율령 정부의 지배력이 약화되어 지방 정치의 질서·치안이 문란해지고, 다토층(田堵層) 등 새로운 농민층이 성장하자, 지방의 군사(郡司)·향사(鄕司)·장관(莊官) 등 호족·토호들은 자기의 지배와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무장을 하게 되어 각지에서 무사가 탄생되었다. 그들은 자기 일족을 중심으로 주변의 소토호(小土豪)·농민을 종자(從者)로서 조직화하여 무사단(武士團)을 형성했다. 그리고 그들은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와서 토착한 구(舊) 국사(國司)나 그 자손을 동량(棟梁)으로 추대하여, 공령(公領)·장원(莊園)의 테두리를 넘는 대무사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동량이 된 무가(武家) 가운데는 간무헤이시(桓武平氏)와 세이와겐지(淸和源氏)가 유력했다.정부는 이러한 무사로 궁중을 경비케 한다든지, 압령사(押領使)나 추포사(追捕使)로 임명하여 지방의 치안 유지에 이용했다. 또한 귀족이나 사사(寺社)도 각자의 장원 내에서 ‘병사역’으로서 무사를 징발하여 경비·숙직에 충당했다. 이와 같은 무사는 ‘사무라이(侍)’라고 불리었고, 귀족층으로부터는 신분적으로 비하(卑下)당하는 존재였다.그러나 지방에서 착착 실력을 양성하고 있던 그들은 정부·국아(國衙)의 지배에 반항하여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쇠퇴해 가는 귀족과 대두하는 무사가 혼합된 이 동란기(動亂期)는 종래 귀족 본위의 불교나 그 밖의 문화에 서민화와 지방화를 촉진시켰다. 헤이안 말기의 문화는 이리하여 정토(淨土) 예술과 문학을 탄생시켰고, 더욱이 그 중심을 이루는 사람 가운데 무사나 서민이 포함됨으로써 중앙에 뒤지지 않은 훌륭한 지방 예술이 형성되었다는 점에 특색이 있다.

무사의 발생[편집]

武士-發生

9,10세기 이후 지방 농촌에서는 군사나 향사들이 각기 군·향에 대해서 사적(私的) 지배를 강화시키고 있었다. 또한 그들을 비롯한 호족이나 부유한 농민들은 적극적으로 미간지(未墾地)나 황폐지의 개발을 추진하여, 그들 가운데는 상당한 개발지(私領)를 소유함으로써 ‘근본 영주(根本領主)’ 또는 ‘개발 영주’ 등으로 호칭되는 자도 나타났다. 한편 이 시기에 율령 정부의 지방 지배력은 점차 쇠퇴하고, 국사(國司)의 징세리화(徵稅吏化) 진행도 있어서, 지방 정치가 황폐하여 국내의 질서·치안은 혼란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군·향사 등은 자기 지배지나 재산 등을 국사·인근 호족 또는 도적 등의 외부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고, 나아가서 반대로 세력 확대를 목적으로 일족 자제(子弟)를 중심으로 무장화하여 무력을 축적해 나갔다.

헤이시 정권과 겐페이의 쟁란[편집]

平氏政權-源平-爭亂호겐(保元)·헤이지(平治)의 난에서 시작되어 지쇼(治承)·주에이(壽永)의 난으로 끝나는 12세기 후반의 30년간은, 고대 사회에서 봉건 사회로 역사의 흐름이 급전환을 하는 일대 변혁기였다. 이때부터 장기간에 걸쳐서 역사의 주역을 담당해 왔던 귀족 계급에 대해, 과거 그들의 종자였던 지방 무사 계급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호겐·헤이지의 두 난을 교묘한 정치적 감각으로 극복한 이세헤이시(伊勢平氏) 일문(一門)의 동량인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에 의해서 섭관정치(攝關政治)의 재판이라 할 수 있는 일문의 독재적 정권 장악이 성공했다. 일반적으로 로쿠하타(六波羅) 정권 또는 헤이시(平氏) 정권이라고 하는 권력이 탄생했다.1180년, 반(反) 헤이시의 봉화(烽火)가 일어나서 다시 전국 쟁란에 돌입했는데, 지난날의 헤이지 난 때의 패자 미나모토 요시토모(源義朝)의 장남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 1147

1199)를 중심으로 한 반 헤이시 세력은, 무사 계급의 정권 창립을 목표로 하여 다이라노 기요모리 일족과 대립했다. 이리하여 고대 말기의 정치사(政治史)는 겐페이의 쟁란이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전체적으로는 귀족 정권의 몰락과 무사 정권의 탄생을 초래하는 변혁으로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세기게 되었다.

헤이안 말기의 문화[편집]

平安末期-文化

무사의 대두와 반란, 사원(寺院)의 귀족화와 승병(僧兵)의 난폭 등 불교계의 타락, 연이은 천재지변 등은 불교 교설(敎說)상의 말법 사상(末法思想)과 조응(照應)하여 귀족들을 위협했다. 귀족들은 이 정토신앙(淨土信仰)을 위해서 재산을 투입하여 조사 조불(造射造佛)을 했는데, 오슈 후지와라시(奧州藤原氏)에 의한 히라이즈미(平泉), 츄손지(中尊寺)의 아미다도(阿彌陀堂, 金色堂), 붕고후츠키지(豊後富貴寺)의 아미다도 등이 그 예이다. 또한 정토교는 이미 10세기에 민간에게 전파되어 헤이안 말기에는 법화경(法華經)의 지경자(持經者) 등이 증가하여 지방 서민간에 퍼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