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중세도시의 발달/일본의 무가 정권 성립과 가마쿠라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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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무가 정권 성립과 가마쿠라 시대〔槪說〕[편집]

13세기 후반의 호겐(保元)의 난(亂)으로부터 지쇼(治承)·주에이(壽永)의 내란에 이르기까지의 30년간은 고대 사회에서 봉건(封建) 사회로의 전환의 격동 시대였다. 귀족 계급의 ‘사무라이(侍)’ 신분으로서 왕조 국가의 지배하에 있었던 무사 계급(재지 영주층, 在地領主層)은 지방 농촌의 봉건적 진화의 주역(主役)이 되어 봉건 영주로서의 발전 과정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고대 사회가 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데 비하여, 봉건 사회는 농촌에서 봉건적 생산 관계를 기축(基軸)으로 하여 구성되었다.무사 계급의 경쟁에서 승리한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조정(朝廷)으로부터 우근위대장(右近衛大將)에 임명되어 실질적 권력으로서 무사(武士) 정권이 성립되었다(1190). 이것이 곧 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의 성립이다. 즉 가마쿠라 바쿠후의 성립으로 일본에 있어서의 봉건 사회가 성립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죽은(1199) 후의 약 60년간은 가마쿠라 바쿠후 내부의 분쟁을 교묘하게 처리한 요리토모의 처가(妻家)인 호조씨(北條氏)가 대두하여 실권을 잡고, 구케(公家) 정권과의 격돌에서 무력적(武力的) 승리를 거둠으로써 무가 정치가 집권 정치로서 확립된 시대였었다.가마쿠라 시대 사회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 것은 바쿠후(幕府)에 결집하여 지두직(地頭職)에 임명된 무사(在地領主)였다. 그들은 농촌에 크고 넓은 성(城)을 마련하고, 하인·종자 등을 예속시켜서 직영지를 경작시켰다. 또한 일족을 중심으로 결합하여 총령제적(總領制的) 무사단(武士團) 또는 당(黨)을 만들고 일족을 요소에 배치하여 영토의 확장을 꾀했다. 이리하여 지두영주제(地頭領主制)가 진전되었다.농업에 있어서는 서(西)일본에서 2모작(二毛作)과 우마(牛馬)를 이용한 경작도 보급되었다. 또한 견(絹)·면(綿)·유(油) 등의 수공업 생산이 농업의 부업으로 영위되었다.또한 단야(鍛冶)·건축·제도(製陶) 등의 종사자는 전문기술자로 성장했다. 농업·수공업의 진보에 따라서, 재지 영주나 몬슈(名主) 층이 공납물(貢納物)이나 잉여 생산물을 팔게 되어, 교통의 요지나 사사(社寺)의 문전에 월 세 번의 정기 시장이 서게 되었고, 거래에는 송전(宋錢)이 사용되고 어음의 이용도 시작되었다.

가마쿠라 바쿠후의 성립[편집]

鎌倉幕府-成立

가마쿠라는 1180년대부터 1333년에 이르는 동안, 가마쿠라를 근거지로 한 일본 최초의 무인(武人) 정권으로 1183년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가 도고쿠 행정권(東國行政權)을 공인받게 된 때를 바쿠후 설립시기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1185년의 슈고(守護:치안관) ·지토(地頭:토지의 관리인)의 설치를 그 시초로 보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가마쿠라 바쿠후의 지배체제는 쇼군(將軍:바쿠후의 최고 장관)과 사무라이(武士)와의 주종제(主從制)와 전국적으로 배치된 일반 경비관(警備官)인 슈고·지토제를 2대 지주(支柱)로 하였다. 그러나 가마쿠라 바쿠후의 창립이 곧 봉건제도의 성립이라는 설(設)을 의문시(疑問視)하는 견해도 있다. 정치기관으로서는 중앙에 사무라이도코로(侍所:인사·군사 문제 취급)·만도코로(政所:토지관리)·몬추조(問注所:소송담당)의 3기관이 있으며, 지방에 슈고·지토가 배치되었다.요리토모가 죽은 뒤는 호조(北條)씨가 바쿠후 정치를 주재하여 바쿠후의 지배권을 강화함으로써 싯켄(執權:쇼군을 보좌한 정부의 최고직) 정치의 최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점차 싯켄 정치의 전제화를 가져와, 결국 인심의 이반을 틈탄 교토(京都) 조정의 바쿠후 타도 운동이 성공하여, 가마쿠라 바쿠후는 150년의 역사로 막을 내렸다.

가마쿠라 시대의 신불교[편집]

鎌倉時代-新佛敎

헤이안(平安) 시대의 불교계를 지배했던 천대(天臺)·진언(眞言)을 비롯한 교단(敎團)은 한편으로는 천황이나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장원령(莊園領)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승려들은 학파(學派) 차이는 있었으나 국가나 귀족을 정신적으로 수호하기 위해서 학덕(學德) 수련의 장소가 주어져 있었다.

가마쿠라 문화의 새 경향[편집]

鎌倉文化-傾向

헤이안 말기의 내란을 겪자 귀족 사회만을 세계로 하는 정신 생활은 무너졌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말법(末法)의 세상이 눈앞에 출현했다고 당황하였으나, 그때까지의 역사를 총괄하여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지엔(玆圓)은 『구간쇼(愚管抄)』를 통하여 무사 정권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귀족이 이와 공동으로 정치를 하는 것이 도리라고 했다. 헤이안(平安) 귀족 문화의 상징인 와카(和歌) 세계에서도 후지와라 준세이(藤原俊成)는 시대 구분을 실시하여 『신코킨(新古今)』에 이르는 새로운 방향을 확정했다. 궁정(宮廷)의 유흥이었던 렌가(連歌)는 지게(地下) 렌가로서 무사 이하 몬슈(名主)에 이르기까지의 예술로서 독립했다. 군키모노(軍記物)는 전국적으로 환영받고, 테마에 주관을 두고 내용만을 간결하게 전하는 가나호고(假名法語) 문체가 성립되었다.

아즈마카가미[편집]

吳妻鏡

일본 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의 사적(事蹟)을 기록한 일기형식의 역사책으로 동감(東鑑)이라고도 쓴다. 1180∼1266년, 즉 바쿠후가 시작된 후부터 그 중기에 이르는 동안의 것으로 13세기 중엽이후 14세기 초엽 이전에 바쿠후 관리가 편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대체로 정확하며, 가마쿠라 바쿠후의 정치와 물심양면에 걸친 무사(武士)의 생활을 이해하는 데 좋은 사료(史料)가 된다. 51권이 현존한다.

겐무중흥[편집]

建武中興

일본의 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가 망한 1333년 6월부터 1335년 11월까지의 2년 반 동안, 고다이고 천황(後醍?天皇)에 의해서 주재(主宰)된 복고정치. 천황은 교토(京都)로 귀환하자 즉시, 율령(律令) 정치의 재흥(再興)을 내세우고 신정(新政)에 착수, 1334년 1월 겐무(建武)라 개원(改元)하였다. 신정부는 인세이(院政)·셋쇼(攝政)·간파쿠(關白)를 폐지, 바쿠후의 재설치를 불용하고 천황 친정체제를 부활하였다. 그러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의 모반으로 다시 바쿠후(幕府) 정치가 부활되었으며,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吉野)로 파천(播遷)하고, 다카우지가 세운 고묘(光明) 천황이 교토에서 즉위하여, 이후 약 60년 동안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