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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교회와 로마 제국〔槪說〕[편집]

4세기 초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로부터 10년이 지나,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었다. 다시 80년 후에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교회 밖의 사교(司敎)로서 포교를 사명으로 느꼈고, 테오도시우스는 제국의 이익보다도 신에 봉사하는 것을 중하게 여겼다.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을 정복한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오지 않았다. 승리는 정통파 교회(가톨릭)의 것이었고, 이단(異端:아리우스파, 도나투스파 등)이나, 이교(異敎:마니교·태양신 숭배 등)를 정치권력에 의탁하여 압박했다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물론 그리스도교 자체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성직자나 교회의 조직화도 한마디로 형식주의적 권위 형성이라고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회가 지배체제에 밀착되어 가공할 퇴폐를 낳은 것도 사실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공인[편집]

-敎-公認

297년의 마니교 금지에 이어, 30gv3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리스도교의 박해를 명령했다. 그것은 전통적 다신교에 의해 제국 국민의 정신적 결속을 시도한 것인데, 이미 제국에 뿌리박은 그리스도교에의 결정적 타격은 되지 못하여, 박해정책의 추진자인 갈레리우스 자신이 조건부 관용령(311)을 내리고 다시 콘스탄티누스, 리키니우스 연명(連名)의 전면적 관용령(밀라노 칙령, 313)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밀라노 칙령[편집]

-勅令 Edict of Milan

313년 2월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에서 공포한 칙령. 크리스트교 박해를 폐지시키고 교회 발전의 길을 터놓은 획기적인 문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통일 완성 전에 서방(西方)의 정제(正帝)로서 동방(東方)의 정제 리키니우스와 연명(連名)으로 밀라노에서 발표한 칙령이다. 이로써 신앙과 교단(敎團) 결성의 자유를 인정하고, 교도의 복권(復權), 몰수(沒收) 재산의 반환을 규정하는 등 다른 종교와 평등한 대우를 보장하였다. 이로써 네로 황제 이래 약 250년 동안 박해를 받아오던 크리스트교가 공인되어, 그 세력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속권과 교회[편집]

俗權-敎會

그리스도교 공인을 계기로 래크탄티우스, 에우세비우스 등 교회인은 콘스탄티누스를 설득하여 그를 개종(改宗)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교 전주(專主)로서 교리 논쟁을 조정한 탓으로 오히려 혼란이 생겼다. 325년 그가 개최하게 한 니케아 종교회의는 아버지인 신(神)과 아들인 신을 동질(同質)로 하는 니케아 신조(信條)를 채택하고, 이질(異質)을 주장하는 아리우스(Arius, 250?

336,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의 설을 이단(異端)이라고 했었는데, 불과 2년 후 제2회 니케아 회의는 아리우스파를 승인했다. 그 후 알렉산드리아 사교(司敎)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

373)의 맹렬한 활동으로 또다시 아리우스파가 금지되었으나, 335년의 티로스 회의는 아타나시우스를 파문(破門)하고 아리우스를 불러들였다. 빈번한 분규가 생긴 것은 본래 교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에 세속(世俗)의 정치 권력(俗權)이 개입하였고, 더욱이 교회측이 여기에 연합했기 때문이다. 다음의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이르러서는 무역으로 교리의 통일을 꾀하고, 교회측에서는 분열된 종교회의가 서로 반대파를 파문했다.

니케아 종교회의[편집]

-宗敎會議 Council of Nicaea

삼위일체에 관한 교회 내부의 논쟁을 해결하고 교회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왕이 개최한 크리스트 교회 최초의 종교회의(宗敎會議:325). 참가자는 300명으로 그 모두가 심한 박해의 체험자였으며, 대부분은 동방 교회의 주교(主敎)였다. 에우세비우스가 아리우스파를 대표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가 이끄는 정통파와 대결, 에우세비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중도파가 타협에 노력하여 중도파가 기초한 의정서 문안에 정통파가 주장하는 ‘부(父:天父)와 자(子:크리스트)는 동질이다’라는 한 구절을 추가하여 이질(異質)을 주창하는 아리우스파의 추방을 결정하였다. 이 밖에 교회 운영상의 규정 등 12조를 채택하고, 약 2개월만에 폐회하였다. 이 회의에서 채택된 신앙조문(信仰條文)은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제2회)에서 약간 수정되어, 일반적으로 니케아 신조(信條)라 불리게 되었다.

아리우스[편집]

Arius (250?∼336)

크리스트교 이단(異端)의 시조. 리비아 출신. 처음에 수도사였다가 뒤에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사제(司祭)가 되었다. 단순한 유일신론의 입장에서 아버지인 하나님과 아들인 크리스트의 완전한 동질성(同質性)을 부정하고, 오히려 아버지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로서의 크리스트의 인간성을 강조하며,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론에 반대했다. 318년 주교 알렉산드로스가 소집한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이단으로 인정되었으나, 동문의 에우세비우스의 지원을 얻어 항소를 제기, 전교회의 논쟁을 야기한 결과,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서의 파문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그 세력은 끈질기게 남았으며, 특히 게르만 부족들에 대한 전도(傳道)는 사적(史的)으로 중요하다.

네스토리우스파[편집]

-派 Nestorianism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總主敎) 네스토리우스(?∼451?)를 시조(始祖)로 하는 크리스트교의 일파. 크리스트의 신격(神格)과 인격(人格)을 구별하는 크리스트 이성설(二性說), 마리아의 비성모설(非聖母說)을 주장하여, 431년 에페소스의 공의회에서 이단(異端)으로 몰려 네스토리우스는 면직(免職)되어 리비아로 추방당했다. 이 파는 424년경부터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티나 지방 및 인도에까지도 전도되었다. 또 7세기에는 중국(당 태종 때)에서 경교(景敎)라 불리었고, 그 교회를 파사사(波斯寺)라 불렀다. 당 현종(玄宗) 때에는 대진사(大秦寺)라 개칭하고, 각지에 이를 건립하여 교세(敎勢)를 제법 떨쳤다. 그 후 200년간 명맥(命脈)을 유지하였으나, 무종(武宗) 때 박해를 받아 쇠퇴하였다. 그러나 원조(元朝)의 치하(治下)에서는 그 신앙이 다시 허락되어 신자와 교회가 증가하였다.

에페소스 공의회[편집]

-公議會 Council of Ephesos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總主敎) 네스토리우스를 이단(異端)으로 결정한 회의. 교황 및 여러 주교(主敎)들의 요청으로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가 소집하였다.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로 부를 것을 부정하고, 또 크리스트의 신성(神聖)을 부정한 네스토리우스를 파문(破門)·추방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449년에는 에페소스의 강도회의(强盜會議)라 불리는 종교회의가 열리어 크리스트의 단성설(單性說)이 공인되었기 때문에 비잔틴 황제 및 로마 교황의 반격을 불러일으켰다.

칼레돈 공의회[편집]

-公議會 Council of Chalcedon

동로마 황제가 로마 교황 레오 1세의 요청으로 소아시아의 칼케돈에 소집한 제4차 크리스트교 전체 회의. 주교(主敎) 600명이 출석하여 사상 희유의 성황을 이루었으나, 니케아 회의 이래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기타 여러 학파와의 항쟁(抗爭), 특히 2년 전의 에페소스의 강도회의(强盜會議)에서 조정된 험악한 분위기가 그대로 감돌아 시종 분쟁이 계속되었다.그러나 이 회의의 결과 크리스트의 단성론(單性論)이 부정되고, 크리스트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완전 결합을 주장하는 정통파(正統派)가 승리하였다.

반동과 관용[편집]

反動-寬容

혼란과 퇴폐를 배경으로 율리아누스(재위 361

363)가 반동을 일으켰다. 그리스의 고전 문화를 동경하던 그는 그리스도교에서 정통적 다신교로 개종하여 일종의 문예부흥을 꾀했다. 그의 시도는 3년간이라는 짧은 치세로 말미암아 효과는 없었으나, 이교(異敎) 문화를 존중하는 풍조가 여전히 뿌리깊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아래서는 마니교 이외의 종교를 인정하는 관용책이 취해지고, 특히 제국 서반(西半)을 분할·통치하는 발렌티니아누스는 교리 논쟁에 개입하지 않고, 성직자를 사교(司敎) 법정에서 재판하는 특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동로마를 분할 통치한 발렌스는 초기의 관용정책을 버리고, 아리우스파에 반대하는 파를 추방하고 이교를 금하는 한편 고전서(古典書)를 불태웠다.

테오도시우스의 신봉[편집]

-信奉

비관용정책을 이은 것이 테오도시우스이다. 그는 380년, 삼위일체설을 정통 신앙으로 하는 데살로니케 칙령을 발표하고, 다음해에 이단자의 추방과, 이단교회의 몰수를 명령하였다. 391년에는 이교 신전 참례, 우상예배가 금지되어, 이교활동은 정지당했다. 처음에 테오도시우스와 함께 제국(서로마)을 분할 통치한 그라티아누스도 관용정책을 버리고, 이단의 집회를 금하고(379) 로마의 베스타 무당이나 이교 사제(司祭)의 면세 특권을 폐지했다. 이 정책 전환에 커다란 역할을 한 사람이 교회정치가 암브로시우스이다. 밀라노 사교인 그는 그라티아누스에게 국가에 대한 봉사보다 정통파 교회(가톨릭)에 충실하도록 권하고, 제국의 단독 지배자가 된 테오도시우스에 대해서 강경한 태도로 교회에의 존경을 강요했다. 전쟁을 악(惡)으로 생각하여, 고트인이나 찬탈자(纂奪者) 막시미우스와 쉽사리 싸우지 않았을 만큼 경건한 테오도시우스는 제국의 위기를 돌보지 않고 이교금지에 열중하여, 암브로시우스에 무릎을 꿇었다.

청신의 이단[편집]

淸新-異端

이미 콘스탄티누스 이래 교회 재산으로 빈자를 구제하도록 명령하여 부유한 사교에게 공과(公課)가 과해진 바와 같이, 교회의 재산은 커졌고 속세 사람과 마찬가지로 재산을 땅에 저축하는 성직자까지 나타났다. 이집트의 안토니우스가 창설했다고 하는 수도원에서도, 콜로누스나 도망노예를 받아들여서 대영토를 경영하는 예가 있었다. 하느님 앞에서의 인간의 평등, 철저한 인간애라는 그리스도교 본래의 정신은 오히려 이단 사이에서 부활하는 경향을 보였다. 4세기 전반 사회 운동과 결부되어 아프리카에 퍼졌던 도나투스파·아고니스트파에는 초기 그리스도교 집단의 규율과 상호부조가 살아 있었다. 4세기 후반, 마니교도로서 처형된 풀리스킬리아누스를 중심으로 하는 금욕파(禁慾派)의, 원시교회로 돌아가라는 부르짖음은, 교회문화인에게 강한 감명을 주었다.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히에로니무스·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나 에우세비우스의 저작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루피누스, 『고백록』, 『하느님의 나라』의 저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

430)가 그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