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중세 유럽의 성립/동로마 제국과 비잔틴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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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과 비잔틴 문화〔槪說〕[편집]

비잔틴 역사만큼 모멸과 무시를 받았던 역사 부분은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근대 유럽 사학계에 있어서의 관심이 고대 세계와 서구 중세에 있었기 때문인데, 세계사적 시야에서 그 불균형을 시정하는 데 있어서 이 분야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비잔티움을 제2의 로마, 콘스탄티노플로서 건설한 이래(330), 여러 가지 소장(消長)을 거쳐서 1453년 터키군에게 점령되기까지 유럽 문화의 보루로서 유럽 자체의 중세(中世) 형성을 달성시켰으며, 또한 독자적·역사적 사명을 담당했던 것이다.이 제국의 발단에는 여러 학설이 있으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수도 건설이 그 발단이라 하여,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 근저에는 로마의 정치 이념과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도교 신앙이 있다(오스트로고르스키).이 시대의 대표적인 황제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인데, 비잔틴 황제의 특색인 황제교황주의(Casaropapismus)에 서서, 정치와 종교에 군림한 국가 이념은, 신의 섭리에 따른 지상 유일의 지배자로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신에 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했다.국가의 성격은 동양적이며, 그 문화적 형성은 그리스적 성격을 짙게 했고, 건축이나 예술에서는 비잔틴 양식을 확립하였으며, 교회 음악도 독자적인 것이 되었다. 종교에서는 그리스 정교회가 서방 가톨릭 교회와 공동으로 이단에 대한 해결에 노력했으나, 중요한 종교회의나 신학 논쟁이 있었다. 법제사상 유명한 『로마법 대전(大全)』도 이 시대에 완성했다.

비잔틴 제국[편집]

-帝國

비잔틴(Byzantine) 제국은 동로마 제국이라고도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

305) 이래 동서로 분할 통치, 아르카디우스 황제(재위 395

408) 때에 경계가 확정되었다. 로마가 외적을 방비하기에는 멀기 때문에 유럽과 아시아의 접점(接點) 지역으로 수도를 옮겼다. 4

6세기에는 두 번의 위기가 있었다. 하나는 고트족이나 훈족의 침입이며, 또 하나는 종교상 이단과의 싸움이다. 전자는 게르만의 대이동이며, 후자에서는 니케아(325), 칼케돈(451) 공회의에서 그리스도교의 기본적 교리를 확립시켰다.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 이후에 유일한 로마 제국이 되는데, 그 문화는 동방적 경향을 가졌고, 6세기에 이르러 그리스도교 예술은 하나의 황금기를 맞는다. 502년 이래 페르시아인과의 전쟁으로 혼란에 빠지는데, 이것을 구한 것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이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편집]

-公議會

[제1회(381)] 아리우스파 및 거기에서 파생한 파를 이단(異端)으로 판정하고, 성령(聖靈)인 부(父)·자(子)는 동격임을 확인하였다. [제2회(553)] 유스티니아누스 제(帝)에 의하여 소집되었다. 단성설(單性說)과 정통파 신앙과의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교황과의 분열을 초래하여 교회분열(시스마)이 일어났다. [제3회(680)] 콘스탄티누스 4세는 제국(帝國)의 정치상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단의설(單意說)을 부정하고, 교황청과 완전한 화해에 도달하였다.

로마 제국의 중흥[편집]

-帝國-中興

게르만의 대이동은 6세기 말, 동로마 제국과의 세력 분포도가 안정되면서 끝났다. 그 동안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을 옛날의 모습으로 재건하려고 하여, 대외정책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아프리카의 반달 왕국(534)과 이탈리아의 동고트족(554)을 멸망시키고, 에스파냐를 다시 정복한 결과로 제국의 면적은 배가했으며, 보편적 로마의 질서를 부흥시켰다. 또한 국경도 정비했다. 그 수도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이 되고, 문화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것이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편집]

-皇帝 Justinianus (483-565, 재위 527

565)

6세기의 동로마 제국은, 이 황제로 황금기를 맞았다. 황비인 테오도라와 명장(名將) 벨리사리우스 등의 보좌로 구 로마령을 회복하고 외정(外政)에 성공하여 중흥(中興)의 영주가 되었다. 트리보니아누스 등의 협력으로 로마법의 집대성을 완성하여 교회에 대한 황제의 권위를 확립하고, 행정을 개혁하고, 양잠업을 도입하여 상공업을 진흥시켜 동로마 제국의 전성기를 이루었다.건축으로는 비잔틴 예술의 대표작인 성 소피아 사원, 라벤나의 성 아폴리나레 교회, 성 비탈레 교회 등을 건설하여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시기·허영·박지약행(薄志弱行) 등의 비판도 있으나, 그가 품고 있던 이상은 컸으며, 특히 그리스도교적 황제관(皇帝觀), 즉 지상에 있어서의 신의 대표자로 행동했다. 그러나 그의 전제정치는 많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과도한 중세(重稅)가 되어 억압정치를 면치 못해 국력을 쇠약하게 만든 원인을 이루었다. 황제가 죽은 후에는, 이러한 서방(西方) 정책 편중 때문에 페르시아의 위협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르만 국가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편집]

-國家-皇帝롬바르드족은 민족 대이동의 최후(最後)의 침입자이다. 568년에 이탈리아에 들어와서 게르만적인 부족국가를 건설했다. 프랑크족은 클로비스(클로드비히)왕에 의해 갈리아를 통치하고, 16세기 초에 당당한 통일국가가 된다. 이미 4, 5세기에 게르만 민족은 서방 영토에 침입해 오는데, 5세기에 서고트, 반달, 동고트가 각각 정착한다. 즉 6세기 전반의 유럽은 민족이동이 일단락되고 구서로마 제국의 거의 전부가 게르만 민족의 지배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동로마는 민족이동의 영향을 비교적 받지 않고 끝났기 때문에 서방에는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이 서방 영토의 재정복을 이룩한 것이다.

로마법대전[편집]

-法大全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칙명으로 편찬된 로마법의 집대성(集大成). 로마법의 편찬사업은 일찍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하여 기도되었던 것으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트리보니아누스 등 10명의 학자에 위촉하여 이 대사업을 완성하였다. 그들은 우선 역대 황제의 칙령집을 편찬하고, 여러 학자의 학설을 수집한 학설휘집(學說彙集)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법학도를 위한 교과서로서 법학제요(法學提要)를 편찬시켜 533년에 완성하였다. 이들 3부작(三部作)으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편찬사업은 끝났으나, 그 후 황제는 계속하여 중요한 칙명을 많이 냈으므로, 후세에 535∼564년간의 칙법 165를 편찬하였다. 이것을 추가법(追加法) 또는 신칙법휘집(新勅法彙集)이라고 한다. 이상 4부작(四部作)을 로마법 대전이라 한다. 로마법 대전이라는 명칭은 16세기부터 시작되었으나, 이것은 본래 로마 종교법 대전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은 현행법(現行法)의 집대성을 주목적(主目的)으로 하였으므로, 고법(古法)의 보존에는 좀 유감스러운 점도 있다. 법역(法域)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전영토였으므로 서로마의 일부에도 시행되었으나, 그 후 영토가 축소되어 동로마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및 베리투스의 법률 학교에서 교과서로서 오랫동안 사용되었으며, 11세기 이후 이탈리아에서 주석학파(註釋學派)에 의하여 설명적 주석을 달게 되었으며 고전부활(古典復活)의 선구가 되었다.

성 소피아 성당[편집]

聖-寺院

성 소피아(Hagia Sophia) 성당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트라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미레스의 이시드로스에게 명해서 건설한 건축사상 드물게 보는 걸작이다. 532년부터 537년까지의 불과 5년간에 세우고 황제는 “솔로몬이여 그대에게 이겼노라”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대(大) 돔(직경 31m)은 높이 약 50m로서, 더욱이 내부는 바실리카 형식이다. 경쾌한 구조, 아름다운 조화 등은 비잔틴 교회 건축의 방향을 결정지었다. 1543년부터 이슬람의 회당(會堂)이 되어 첨탑(尖塔)이 첨가되었다. 모자이크는 복원되어 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편집]

-凱旋門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24

337)의 즉위 10년을 기념하여 원로인이 세운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312년 로마에 진군할 때, 대낮에 십자가와 “이것으로 이겨라”라는 환상을 전군(全軍)과 함께 보고 막센티우스군(軍)을 티베르강 근처에서 격파했는데, 황제의 그 때 싸움 장면이 이 문의 부조(浮彫)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교와 제국의 통일에 획기적인 것이었다. 문은 흰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세 개의 통로가 있으며, 일부는 다른 건축에서 옮긴 것이다. 로마에 있다. 콘스탄티노플에는 대신에 ‘선량한 양치기의 상(像)’이 놓여 있다.

비잔틴 건축[편집]

-建築

6세기의 비잔틴(Byzantine)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한 건축의 황금기를 맞는다. 특색은 동양적 돔에 있고, 이것과 헬레니즘적 바실리카가 결합한다. 구조는 8각당식이거나 돔 집중식이다. 그 기조(基調)는 초절적(超絶的)인 신관(神觀)과 절대적 황제관에 있다. 성 소피아 사원이나 콘스탄티노플의 궁전, 수많은 원주로 받쳐진 지하 저수지군(群), 성벽 등이 유명하다. 기원(起源)으로는 로마설과 이란설이 있는데,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잡하다.

양잠[편집]

養蠶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인 552년에 네스토리우스파 수도사(修道士) 두 사람이 누에의 고치를 황제에게 헌상(獻上)한 것이 비잔틴에서의 양잠의 시초이다. 견직물은 중국에서 전해졌으며 5세기경 콘스탄티노플에는 상당한 양이 집합돼 있었다. 이 황제의 시대에 궁정 전용의 직물 공방(工房)이 생겼다. 그러나 개인의 공방은 허가되지 않았다. 궁정의 귀족이나 고관에게는 신분에 맞는 의장의 착용이 허가되었으며, 이 밖에 교회의 의식 등에 사용되었고, 후에 견직물은 서유럽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