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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시아 민족의 중국 침입과 남북조 대립〔槪說〕[편집]

265년에 위(魏)로부터 선양을 받은 진(晋)의 무제(武帝)는 280년에 이르러 강남(江南)에서 할거하던 오를 병합하여 다시 중국 전토의 재통일을 성취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대한 문제는 조조시대 이후 계속되던 이민족의 내지잡거(內地雜居)가 두드러지게 심해진 사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민족을 중국 국경 밖으로 이주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심각하게 검토되기에 이르렀다.무제는 이와 같은 난국을 타파하는 길을 일족(一族)의 단결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조씨의 위 왕실이 일족을 정권에서 멀리한 탓에 일찍 멸망하게 되었다는 점을 감안한 무제는, 그 일족을 대규모로 각지에 보내 왕으로 봉하고 영토를 분배했다. 그리고 오를 평정한 이상 이제는 태평 성세가 왔다는 구실로 지방 장관 휘하에 있던 주둔군들을 해산시켜 버렸다. 그러나 무제의 의도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일족을 중용한 일이 오히려 화를 자초하게 되었던 것이다.이 일족들을 왕으로 삼아 각지에 봉건(封建)시켰지만, 그들은 서로 다퉈 8왕의 난을 일으켰고, 이에 편승하여 침입한 북방 민족(五胡) 때문에 30여 년 만에 멸망했다. 이 쟁난을 영가(永嘉)의 난(亂)이라 한다. 이때 진나라의 일족 사마예(司馬睿)는 건업(建業)에서 제위에 올라, 진은 이후 강남(江南)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이 이전을 서진(西晉), 이후를 동진(東晉)이라고 한다. 진나라의 남천(南遷)과 함께 화북(華北) 명족(名族)의 대부분은 백성을 이끌고 강남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이후 양쯔강 유역의 개발이 발달하여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화북에서는 침입해 온 북방 민족이 각각 나라를 세워 격심한 흥망을 반복했다. 그들의 나라를 총칭하여 5호16국(五胡十六國)이라고 한다. 그 후 5세기에 들어서자 동진은 송(宋)으로 바뀌었고, 한편 화북에서는 선비족(鮮卑族)의 북위(北魏:後魏라고도 한다)가 화북을 통일하였다. 이 이후는 남북이 거의 같이 통일정권을 존속시켰기 때문에 이 시기를 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남조에서는 한인 왕조의 송(宋, 420

478)·제(齊, 479

501)·양(梁, 502

557)·진(陳, 557

589)이 흥망하였고, 북조에선 이민족 왕조인 북위(北魏, 386

534), 그것이 갈라져서 동위(東魏, 534

550)와 서위(西魏, 535

557), 그리고 북제(北齊, 550

577) 북주(北周, 557

581)가 흥망했다. 이 동안 합계 52명의 황제가 폐립(廢立)되었는데 천명을 다한 것은 20명도 못 된다. 북주에서 나온 수(隋)나라가 589년에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기에 이르러 남북조는 종말을 고했다. 3국 시대부터 수나라의 통일에 이르는 약 370년간은 전화가 그칠 때가 없는 정치적으로는 착잡한 시대였다. 그러나 이 사이에 강남(江南)의 개발은 진보되어, 북조에 있어서는 균전제(均田制)·조용조제(祖庸調制) 등의 여러 제도가 정비되는 등, 다가올 수(隋)·당(唐) 제국의 번영을 약속했던 시대로서 중국사상 중요한 시대이다. 또한 후한(後漢)의 멸망 후부터 수나라 통일까지의 사이를 총칭하여 위진(魏晋) 남북조 시대라고 하며, 문화사에서는 3국 이래 강남의 건업(建業)에 도읍한 6대 왕조인 오(吳)·동진(東晋)·송(宋)·제(齊)·양(梁)·진(陳)을 따서 육조 시대라고 부른다.

팔왕의 난[편집]

八王-亂 290년에 무제가 죽고 그의 아들 혜제(惠帝:재위 290∼306)가 32세로 즉위했으나 그는 너무도 우매한 천자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 정치의 실권은 황후인 가씨(賈氏)가 장악하게 되었다. 가황후는 시중의 미소년들을 데려다가 이들과 정을 통하고는,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 그들을 죽여 없앴다. 아마도 후계자를 낳을 생각에서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얼마 후 황태자를 폐하고 가씨의 핏줄이 닿은 사람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이에 진의 제왕(諸王) 8인이 서로 일어나 정권을 쥐고자 싸움을 벌였다. 이것이 이른바 8왕의 난으로서, 그 결과 사회는 문자 그대로 황폐하게 되었고 가황후도 폐위당했다.제왕들은 후환을 염려하지 않고, 화북(華北) 지방에 들어온 흉노(匈奴), 저(?), 선비(鮮卑) 등의 이민족과 손을 잡았으므로 혼란을 거듭하게 되었다. 306년 혜제의 죽음으로 16년간에 걸친 8왕의 난은 종말을 고하고, 그 동생이 제위에 올라 회제(懷帝:재위 306∼313)라고 불렸다. 이 난이 거듭되는 동안 8왕은 군사력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각기 흉노·선비족 등을 끌어들임으로써 그들이 중국을 침략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으며, 마침내 5호 16국이 일어나는 결과가 생겨났다.

영가의 난[편집]

永嘉-亂 311년(永嘉 5), 5호의 하나인 흉노(匈奴)의 군대가 서진의 수도 뤄양을 함락시켰던 난을 가리킨다. 이 난으로 서진은 멸망하고, 진황실 및 중국 지식인의 대부분은 남으로 건너가서, 화북은 5호 16국 시대를 맞았다.당시 중국 내지에 이주해 온 이민족은 몽골 계통의 흉노, 갈(?), 선비와 티벳 계통의 저, 강(羌)으로서, 이들을 5호(五胡)라고 불렀다. 그 가운데서 산시(山西)에 있던 흉노족의 유연(劉淵)이 자립하여 국호를 한(漢)이라 하고, 그 아들 유총(劉聰)은 311년에 일족인 유요(劉曜)와 부하 석륵(石勒)을 보내 진(晋)의 수도 뤄양(洛陽)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회제를 사로잡아 한의 수도 평양(平陽)에 압송하여 사형시켰다.가 황후의 뒤를 이은 혜제의 황후 양씨(羊氏)는 폐위와 복위를 여러 번 되풀이당한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였는데, 이번에는 유요에게 잡혀서 그의 처가 되었고, 수도 뤄양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이 사건을 영가(永嘉)의 난(亂)이라 부른다. 뤄양 함락의 소식을 들은 회제의 조카가 장안(長安)에서 천자의 자리에 올라

민제(愍帝:재위 313∼316)라 했으나, 316년에 유요의 공략을 받고 평양에 잡혀가 살해되었다.화북에서 혼란이 계속되고 있을 때, 진 왕실의 일족인 사마예(司馬叡)가 오의 옛 수도 건업(建業)에서 자립을 꾀했다. 이에 그는 귀족의 일단과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본고장 토호(土豪)와도 손을 잡았다. 뤄양에 이어 장안이 함락되자 그는 자립하여

진왕(晋王)이라 칭하고 이어 군신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이것이 원제(元帝:재위 317∼322)인데, 그 판도는 동남지역을 영유한 데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역사에서는 이후를 동진(東晋), 그 이전을 서진(西晋)이라 구별하고 있다. 수도인 건업은 민제의 이름인 업(業)이란 글자를 피하기 위해 건강(建康)이라 바꾸었다.

5호 16국[편집]

五胡十六國 5호는 4세기 초에 화북에 침입하여, 5세기 중엽까지 이 지역 각지에 연이어 독립국을 세운 북방·서방의 이민족인 흉노·갈·비·저(?)·강(羌)의 5족이다. 그러한 5호가 세운 나라가 16(셈하는 법에 따라서는 더욱 많다)이었기 때문에, 이 시대를 5호 16국 시대라고 부른다.흉노는 일찍부터 중국 북변에서 유목생활을 해 오고 있었는데 그 일부가 화북에 들어왔다.316년 진나라의 세력을 화북에서 일소한 유씨(劉氏)의 조(趙), 저거씨(沮渠氏)의 북량(北凉), 혁련씨(赫連氏)의 하(夏) 등이 흉노가 세운 나라이다. 갈(?)은 흉노와는 다른 종족으로 산서 방면에 근거해 있다가 석씨(石氏)가 후조(後趙)를 세웠다. 선비는 흉노와 같은 북방계 유목민족이며, 모용씨가 같은 선비 우문씨(宇文氏)·단씨(段氏)와 함께 전연(前燕)·후연·서연·남연을 세웠고, 이어서 탁발씨(拓跋氏)는 대(代)를 세웠다. 대는 북위(北魏)의 전신이다. 이 밖에 걸복씨(乞伏氏)의 서진(西秦), 독발씨(禿髮氏)의 남량(南凉)도 있다. 저·강은 티베트의 민족으로 생각되며, 저가 세운 나라로는 이씨(李氏)의 성(成), 부씨(?氏)의 전진(前秦), 여씨(呂氏)의 후량(後凉)이 있고, 강이 세운 나라로는 요씨(姚氏)의 후진(後秦)이 있다. 또한 16국 가운데는 한(漢)민족이 세운 나라, 즉 장씨(張氏)의 전량(前凉), 이씨의 서량(西凉), 풍씨(馮氏)의 북연(北燕)도 있다.


5호 16국

민 족

국 가

건국자

흉노족(匈奴族)

선비족(鮮卑族)

한족(漢族)

저족(灓族)

강족(羌族)

갈족(厘族)

전조(前趙:漢)

북량(北凉)

하(夏)

전연(前燕)

후연(後燕)

서진(西秦)

남량(南凉)

남연(南燕)

전량(前凉)

서량(西凉)

북연(北燕)

성(成:漢)

전진(前秦)

후량(後凉)

후진(後秦)

후조(後趙)

유연

저거 몽손

혁련 발발

모용 황

모용 수

걸복 건귀

독발 오고

모용 덕

장준

이숭

풍발

이웅

부건

여광

요장

석륵

진의 남천[편집]

晋-南遷

흉노의 유씨(劉氏)에 의하여 진(晉) 황실이 멸망했을(316) 때, 이보다 앞서 안동(安東) 장군으로서 건업(建業:南京)에 진치고 있던 사마씨(司馬氏)의 일족 낭사왕(琅邪王) 예(睿)는 317년 이 땅에서 진(晉)의 왕위에 오르고 다음해 원제(元帝)라고 자칭, 진왕조를 재흥시켰다. 이 이후의 진을 동진이라고 한다. 드디어 진황실의 일족을 비롯하여 명족(名族)이 남으로 이동, 소위 남조의 귀족층을 형성함과 동시에 강남의 개발이 진전되었다.

동진[편집]

東晋

화북에서는 진천왕 부견이 370년에 모용씨의 전연국을 병합함으로써 화북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강남에 근거한 동진에서는 실력자인 환온(桓溫)의 움직임이 정국을 좌우하고 있었다.동진의 원제가 진의 재건에 성공한 것은 화북의 명문귀족 출신인 왕도(王導)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뤄양, 장안이 잇따라 흉노에게 함락당하고 화북이 소요지역으로 변하자, 왕도와 같은 북방의 명문 귀족들이 속속 동진 치하의 강남으로 이주해 왔다. 가족을 데리고 강남의 별천지에 이주해 온 사람들은 백적(白籍)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호적에 등록되었다. 그들은 국가의 세역(稅役)을 모두 면제받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반면에 일반인들은 황적(黃籍)이란 보통 호적에 등록되어 세역을 부담했기 때문에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불만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얼마 후에는 제도를 고쳐, 이주자의 백적을 폐지하고 토착민과 같은 황적에 등록케 함으로써 불평등을 없애게 되었다. 이 토단법(土斷法)을 실시한 사람이 처음에는 실력자인 환온(桓溫)이고, 그 후 군인출신인 유유(劉裕)였다.345년에 서부 군단을 통솔하게 된 환온은 유능한 무장인 동시에 청담(淸談)의 재능도 있는 교양인이었다. 그는 서부군단을 이끌고 북벌을 행하여, 비록 전진의 군대가 지키는 장안은 점거하지 못했으나, 356년에는 일시적으로 뤄양을 탈환하기까지 했다. 이와 같은 군사적인 대성공을 배경으로 그는 동진의 실권을 장악했다.이와 같이 서부가 북부를 제압한 시기가 10년 가량 계속되어 환온에 의한 선양준비운동이 표면화되었으나 귀족가문의 사안(謝安)이 중망(衆望)을 받으며 정계에 등장하자 환온의 야망은 좌절되었다. 환온은 373년에 죽었다.

비수의 싸움[편집]

?水-

동진 정부의 정치·군사의 최고 책임자가 된 사안은 전형적인 문인귀족이었다. 그는 왕도(王導)의 정치이념을 계승하여 북부와 서부의 군사력 균형을 유지하면서 문인귀족의 지배를 정착시키려 했다. 환온이 죽은 뒤에도 환씨(桓氏) 일족에게 서부 군단을 통솔케 하고, 북부의 통솔은 조카인 사현(謝玄:343∼388)을 비롯한 사씨(謝氏) 일족에게 맡겼다.383년에 이르러 전진의 부견이 보병 60여 만, 기병 27만이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해 왔다. 이를 맞은 북부의 군단장 사현은 북부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회수(淮水)의 지류 비수(?水) 강변에서 전진군에게 선제 공격을 가했다. 오합지졸이었던 전진군(前秦軍)은 크게 패하고 퇴각했다. 북부군에서는 유뇌지(劉牢之) 등의 활약이 컸다. 진군에게 쫓긴 전진군은 퇴각 도중 크게 혼란을 빚었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비수의 싸움이다. 이 싸움으로 남북의 경계는 대략 회수를 사이에 두고 정해지게 되었다.비수의 싸움은 화북을 다시 분열상태로 빠뜨리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승국인 동진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북위의 화북 통일[편집]

北魏-華北統一

5호 16국 시대에 소위 중국 북반부의 이민족 국가의 난립을 통일한 것은 북위(北魏)였다. 5호의 하나인 선비족의 탁발부(拓跋部)는 2세기경 중국 북동부에서 차츰 남하해 왔다. 서진(西晉)은 315년 이들에게 산시(山西) 북부의 땅을 주고, 그 군장(君長) 탁발의노(拓跋倚盧)를 대왕(代王)으로 봉했다. 이윽고 서진이 망하자, 대왕 탁발규(拓跋珪, 道武帝)는 자립하여 386년에 국호를 위라고 했다. 도무제는 중국 진출을 개시해 국도평성(平城, 현재의 大同) 부근에 백성을 강제 이주시켜서 국력의 충실에 노력했다. 이것은 후의 황제들에게 계승되었고, 태무제(太武帝) 때에 남아 있던 하(夏)·북연(北燕)·북량(北凉)을 멸망시키고 439년 드디어 화북 통일을 완성했다. 여기서 남북조 시대가 시작된다.

북조[편집]

北朝

북위의 화북 통일과 전후해서 강남(江南)에 있어서는 동진에 대신해서 송(宋)이 성립되었다. 이후 수(隋)가 남북을 통일하여 전(全)중국을 지배하기까지의 사이를 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북위(北魏:386

534)는 선비족(鮮卑族)의 탁발씨(拓跋氏)가 세운 나라로서 위라는 국호는 태조 도무제(道武帝) 때에 정해졌다. 그 손자 태무제(太武帝)에 의해서 439년 화북의 통일이 완성되고, 5세기 말 효문제(孝文帝) 때는 여러 제도가 정비되어 최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안 가서 권신인 고환(高歡)과 우문태(宇文泰) 두 사람이 국권을 둘러싸고 항쟁, 각자의 황제를 옹립하여, 효정제(孝靜帝)의 동위(534

550)와 효무제(孝武帝)의 서위(534

557)로 갈라졌고, 고환의 아들 고양(高洋)은 동위를 빼앗아 북제(北齊, 550∼577)를 세웠으며,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宇文覺)은 서위를 빼앗아서 북주(北周 557

581)를 세웠다. 북제는 북주에게 멸망되었으나, 북주도 외척(外戚) 수공양견(隨公楊堅)에 의하여 나라를 빼앗겼다. 양견은 수나라 문제(文帝)이다.

남조[편집]

南朝

동진(東晋) 멸망 후, 수나라에 의해서 중국 전토가 통일되기까지 강남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 흥망했던 여러 왕조를 남조라고 한다. 동진(317

419)은 강남을 가우(假寓)의 땅으로 삼고 중원(中原)에 복귀할 것을 바랐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동진의 실권을 장악한 유유는 혼란에 빠져 있던 화북에 대해 북벌을 감행하여 우선 남연(南燕)을 무찔렀다. 또 손은의 잔당을 이끈 노순(盧循)이 수도 건강에 육박하자 그는 북벌을 중단하고 돌아와 이를 토벌했다. 그리고 413년에는 환온의 선례에 따라 호적(戶籍)의 실태조사를 행했는데, 이는 북벌을 위해 정부의 수입을 증대시키는 동시에 호족(豪族)세력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였다.동진의 정권이 성립된 지 꼭 1백 년이 되는 417년, 유유는 두 번째 북벌에 의해 비록 일시적인 것이기는 하나 뤄양과 장안을 탈환하는 공로를 세웠다. 마침내 420년에 그는 동진의 마지막 천자 공제(恭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국호를 송(宋:420∼479)이라 하고 무제(武帝:재위 420∼422)로 불렸다.이렇게 하여 남조(南朝)가 시작되었는데,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여 북조(北朝) 최초의 왕조가 됨으로써 중국은 한족의 남조와 이민족의 북조가 대립하는 남북조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유유의 아들 문제(文帝:재위 424∼453) 때인 원가(元嘉) 시대는 귀족문화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남송은 북위의 침입으로 쇠퇴하다가 약 60년 만에 소도성(蕭道成)의 제(帝:479∼502)와 교체하게 되었고, 제는 20년이 지나 소연(蕭衍)의 양(梁:502∼557)과 교체되었다.48년 동안 재위한 양의 무제(武帝) 소연(재위 502∼549)은 학술을 장려했으며, 열렬한 불교신자이기도 했다. 수도인 건강은 불교를 중심으로 크게 번영했다. 그러나 무제는 만년에 북조의 동위(東魏)에서 도망해 온 무장 후경(侯景)을 받아들인 것(549)이 화근이 되어, 그의 배반으로 인해 불행한 최후를 마쳤다. 이 후경(後景)의 난(亂)으로 많은 명문귀족이 멸족되고 수도는 황야로 변했으며 남조의 귀족문화는 큰 타격을 받았다. 얼마 후 양이 망하고 진패선(陳覇先)의 진(陳:557∼589)이 이를 대신했으나 진은 겨우 건강 주변을 지배하는 데 그쳤다.진이 수의 문제(文帝)에게 타도되어 멸망했을 때 남북조 시대는 끝났다. 남조에서는 귀족의 세력이 강하여 그들의 정권 항쟁을 둘러싸고 천자(天子)의 폐립, 왕조의 교체는 빈번히 있었으나 전토에 걸쳐서 전란의 소용돌이가 되는 일은 적었고, 따라서 강남의 개발은 진전되고, 풍부한 문화를 탄생시켰다.

유유[편집]

劉裕 (356∼422)

남송(南宋)의 초대 황제. 시호는 무제(武帝). 팽성(彭城) 사람. 군공조(郡功曹) 유교(劉翹)의 아들이다. 자는 덕여(德輿). 서민 출신으로 자라나 군인으로 출발하여 유뇌지(劉牢之) 밑에서 손은(孫恩)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유뇌지가 환현(桓玄)에게 죽자 잠시 환현 밑에 복종했으나, 얼마 후 제장(諸將)과 모의하여 환현을 습격, 이를 멸망시켰다.그리하여 환현에 의하여 폐위된 안제(安帝)를 옹립하고 반대당의 유의(劉毅)·사혼(謝混) 등을 토벌하여 군권(軍權)을 한손에 장악한 후, 안으로는 토단법(土斷法)을 행하여 정부의 재정적 기초를 공고히 하고, 밖으로는 누차 북벌을 행하여 남연(南燕)·후진(後秦)을 멸망시켰으며, 한때 장구(長驅)하여 장안(長安)을 수중에 넣기도 하였다. 안제가 죽은 후, 420년 동진(東晋) 최후의 천자인 공제(恭帝)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아 송조를 성립시켰다.그 후 화북(華北)에서 통일한 북위(北魏)와 더불어 남북조 시대를 형성하였다. 재위 3년으로 사망하였다.

구품중정법[편집]

九品中正法

위진 남북조 시대(220

589)에 실시된 관리 임용제도. 우선 지방의 군(郡)마다 그 군 출신 관리들 가운데서 중정(中正)이란 관리를 선정하여 군내 관리에 대한 재능·덕행을 조사시켜 이를 1품에서 9품으로 나누고 이를 향품(鄕品)이라 했다. 한편 정부는 이 향품에 대응하기 위해 관료의 등급을 역시 1품에서 9품까지 구분하고 이를 관품(官品)이라 칭했다. 이것은 한(漢)나라 때의 향거이선(鄕擧里選)에 대치된 제도이며, 이 시대에도 다른 선정 방법과 병용되었는데, 수의 시대가 되어 과거가 실시되기까지 관리 임용법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3국 위(魏)의 진군(陳群)이 220년대에 제창, 입안하여 시작된 것이라고 전해진다.이런 구품중정법은 가문에 구애됨이 없이 개인의 재능과 덕망에 따라 조정 관리에 임명하자는 것이 원래의 취지였다. 그러나 중정직에 임명되는 사람은 거의 모두가 지방의 유력자들로서, 향품을 정할 때 동료나 중앙의 대관(大官)으로부터 청탁을 받고 유력자의 자제는 후하게, 무력자의 자제는 박하게 매기는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제도는 당시 상류사회의 귀족화라는 조류에 밀려 오히려 귀족계급에게 유리하게끔 운영됨으로써 귀족제도의 견고한 하나의 지주(支柱)가 되기에 이르렀다.이 구품 중정법에 있어서 관품이 향품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은 귀족의 신분이나 지위가 비록 왕조 권력에 의해 부여되는 것 같다 하더라도 근원적으로는 그 향당사회(鄕黨社會)의 지위나 권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문벌에 관계없이 인재를 널리 등용한다는 본래 취지와는 달리, 호족 세력이 관직을 독점하게 하는 길을 터주게 되어 결국 이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여 귀족계급을 형성하였다.

효문제[편집]

孝文帝 (467

499, 재위 471

499)

북위(北魏)는 국초(國初) 이래 일관하여 한화(漢化) 정책을 취해 왔는데 제6대의 고조(高祖) 효문제는 그것을 더욱 추진했다. 불과 5세에 즉위했기 때문에 처음 20년간은 조모인 풍태후(馮太后)가 정치를 맡았었는데, 그 동안에는 그 때까지 무급이었던 관리의 봉록제를 정하고, 토지제도로서의 균전제, 행정 조직으로서의 3장제를 시행하였으며, 세제·호적의 법을 개정하였다. 409년 풍태후가 죽자 친정(親政)하여 한인 관료의 말에 따라 법령의 정비에 노력했다. 494년에는 보수파가 많은 평성(平城, 大同)에서 뤄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기고 다수의 북방민족을 이주시켰다. 언어·복장에 이르기까지 중국화를 추진시키고, 제실(帝室)의 성씨인 탁발씨도 중국식의 원씨(元氏)로 고쳤고, 종실과 중국 명족(名族)과의 혼인을 권장했다. 이리하여 북위는 최성기를 맞았고 문화는 번영하였으나, 한편 유목민족으로서의 선비(鮮卑) 고유의 기풍이 상실되어 문약(文弱)에 흐르고, 북변에 남은 북방민족과 제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등, 북위 멸망의 원인(遠因)도 가져오게 되었다.

균전제[편집]

均田制 북위의 효문제(孝文帝)의 태화(太和) 9년(485)부터 당(唐)나라 중엽까지 실시되었던 토지제도이다. 토지·겸병(兼倂)을 억제하여 농민을 토지에 고착시켜 국가의 조세 수입을 확보하려고 한 것이다. 시대의 추이와 함께 규과가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곡물을 재배하는 토지를 자손에게 상속하는 것을 불허하는 노전(露田, 당에서 구분전) 80묘(畝)와, 뽕나무·대추·느릅나무를 심는 토지로 자손에게 상속되는 상전(당에서는 영업전) 20묘 등 계 100묘, 다시 약간의 거주 원택지를 농민에게 주는 것이다. 균전제하의 토지에는 관리에게 주는 직분전·관인영업전(官人永業田), 관청의 경비에 충당하기 위한 공해전(公?因), 당나라 때에는 사전(寺田)·관전(觀田, 관은 도교의 절) 등도 있었다. 노전을 받는 연령에도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20세 전후에서부터 60세 전후까지 사이이다. 북위에서는 여자·노비·소 등도 급전(給田)의 대상이 되었는데 당대에 이르면서 모두

폐지되었다. 이 제도는 이념으로서는 춘추시대에 실시되었다고 되어 있는 정전제(井田制)를 이어받고 있으며, 실질적으로는 북위가 화북통일 이전에 실시하고 있던 도민(徒民:일정 구역에 강제적으로 옮겨진 백성)에 대한 계구수전(計口受田:인구를 계산하여 땅을 준다)책을 계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토지의 환수(回收와 班給)가 어느 정도 실행되었는지, 대토지 소유와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등 실시면에서는 명확하지 않은 점이 많고, 아직까지 정설(定說)을 얻지 못하고 있다.(唐의 均田制 참조)

토단법[편집]

土斷法

동진(東晋) 말기부터 시도되어 송(宋)의 무제(武帝)에 이르러 이루어진 호적 정리이다. 이는 교우자(僑寓者)를 그 현주지의 호적에 편입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으로 인해 교우자는 명실 공히 토착자(土着者)가 되었고, 국가에 의한 인구 파악이 확실해졌다. 진대(晋代) 영가(永嘉)의 난 전부터 남북조에 걸쳐 고향을 떠나 유우(流寓)하는 자가 많이 생겼는데, 교우자는 현주지에서 생계를 유지하여도 앞으로 본적지로 돌아가야 할 자이기 때문에 현주지 군현(郡縣)의 관할에는 속하지 않으며 일반 백성의 호적인 황적(黃籍)과는 달라 백적(白籍)에 기록되어, 역역(力役)도 면제받는 등 그 대우에 차별이 있었다. 이러한 조처는 일시적으로 남천(南遷)한 동진(東晋) 정부로서는 부득이한 조처였으나, 이에 정리해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것을 정리한 것이 토단이며, 그 때에 교군현(僑郡縣)의 병합·폐지도 같이 실시되었다. 유명한 토단법 중에는 동진의 군벌 환온(桓溫)이 시행한 경술(庚戌) 토단법(364)이 있는데, ‘재산이 많아지고 나라가 풍요를 이루게 된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밖에 유유(劉裕:송의 武帝)가 동진 말에 행한 의희(義熙) 토단법(413)이 있다. 백성의 유동은 이후에도 있었기 때문에 남조(南朝)에 와서도 때때로 이 법을 시행하였다.남조에서는 재래의 남인(南人)과 남도(南渡)한 북인이 각각 다른 호적에 편입되어 있었는데, 이 틈바구니를 빠져서 귀족·호족이 탈세를 하고 있어 호구를 조사하여 이것을 일원화한 것인데, 조정(朝廷)이 이것으로 인해서 피해를 입는 귀족이나 호족으로서 성립되어 있었다는 점이 특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