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사/중세 유럽과 아시아/프랑크 왕국과 사라센 제국/로마 교회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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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교회의 발전〔槪說〕[편집]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 내에서 공인된 다음, 같은 4세기 말에 제국은 동서로 분열되었고, 우상 숭배 문제 등으로 동서 양 교회는 분리하는 방향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 후 서로마 제국의 쇠퇴에 따라서 일시 서방 가톨릭 교회도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8세기에 들어와 프랑크 국왕 클로비스의 개종(改宗), 피핀의 교황령의 기부, 카를 대제(찰스 대제)의 대관(載冠) 등, 일련의 군주권과의 유대가 강화되어, 로마 교황은 서유럽의 정신적인 지도자로서 다시 지난날의 로마제국 시대의 지위와 권위를 부활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교황권은 강화되었으나, 카를 대제 시대 이후 독일, 프랑스 또는 기타 여러 나라에서 교회는 국민적·지방적으로 조직되어 교황 지상권(至上權)에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즈음부터 동시에 노르만인의 침입도, 이슬람교도의 세력 신장도 있어서 11세기경까지 정계(政界)나 교회도 동요와 퇴폐의 시대를 보냈다.여기서 드디어 클뤼니 수도원을 비롯한 수도원의 개혁 운동이 한편에서 전개되기 시작했고, 또 한편에서는 교황과 군주 사이의 성직 서임권(敍任權)을 둘러싼 투쟁이 전개되기에 이른 것이다.

피핀의 기부[편집]

-寄附 Donation of Penin

프랑크 왕 피핀은 자기의 왕위를 교황 자카리아스에게서 승인을 받고, 그 대상으로서 다음대의 교황 스테판 2세가 롬바르드 국왕의 압박을 받아 구원을 요청해 온 데 대해서 754년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라벤나 지방을 평정하고 그 땅을 교황에게 헌상했다. 이것이 피핀의 기부이며, 이후 종래의 베드로 세습령(世襲領)에 부가해서 교황령이 국제적으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수년 후 가짜 이시도루스 문서라고 불리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부장’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로마 교황령[편집]

-敎皇領 Papal State

로마 교황이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세속적인 지배를 실시해 온 독립국가. 7세기경까지 ‘성 베드로의 유산’이라고 칭하는 광대한 지역을 교황이 영유(領有)하고 있었는데, 롬바르디아족의 침입을 막은 피핀의 기부에 의해서 교황령은 더 인정하게 되었다. 11세기에는 다시발전하여 베네벤토, 토스카나, 로마니아 각지에 세력을 뻗쳤다. 르네상스 시대는 영역 안 도시들의 독립적 경향이 강했고, 다시 보로니아, 라벤나를 합쳤다. 그러나 18세기 이후는 차차 영토가 축소되어, 19세기에 들어와서는 나폴레옹 1세에게 병탐되었다. 빈 회의 후 일시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했으나, 1860년 ‘성 베드로의 유산’ 이외의 모든 땅은 사르디니아에 합병당하고, 1870년에는 바티칸을 제외한 모두를 잃었다. 현재에는 바티칸시로서 독립되어 있다.

그레고리우스 2세 (그레고리 2세)[편집]

-世 Gregorius Ⅱ (669

731, 재위 715

731)

로마 교황.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초빙으로 콘스탄티노플에 부임, 교회 회의를 위해 노력하였고, 715년 교황이 된 후는 로마의 우위를 주장했다. 726년 동로마 황제 레오 3세의 칙령(726)에 의해 생겨난 우상숭배 금지 칙령(勅令) 발표에 의한 논쟁에 참가하고, 황제가 위협적으로 성화상 파괴의 실시를 강요하자, 로마교회 회의를 개최하여 그 요구를 거절하고, 또 그 무력적 압박에 항거했다. 한편 롬바르드족의 로마 육박을 막은 후, 이와 친선관계를 유지하는 데 노력하고, 722년 보니파티우스를 사교에 임명, 독일에 파견하여 포교케 했고, 수도사의 활동에도 원조를 했다.

그레고리우스 3세(그레고리 3세)[편집]

-世 Gregorius Ⅲ (?∼741, 재위 731 ∼741)

로마 교황. 시리아(Syria)에서 출생. 그레고리우스 2세의 정신을 계승(繼承)했다. 로마의 내외 정책에 있어서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고, 동로마 황제 레오 3세의 성화상 파괴의 칙령(726)에 의해 생겨진 논쟁에 있어서는 황제와 화해하려 했으나 실패, 동로마 제국의 압박을 받았다. 739년 롬바르드족 왕의 고압정책 때문에, 프랑크족과 제휴(提携)하려 하고, 그 궁제(宮帝) 카를 마르텔에게 수차 원조를 구했으나, 군사적 간섭을 거절당했다. 한편 보니파티우스를 대사교에 임명하고, 그에게 바이에른, 튀링겐 및 헤센의 교회조직을 위임했다.